재치는 생각·상상으로 하며 책략은 행동으로 하는 요술 올바르고 정확한 통찰력 필요
강렬한 태양 아래 장맛비에 젖은 진흙탕에서, 럭비공 하나를 두고 몸을 던지고 굴리면 눈동자만 반짝거린다. 강력한 스크럼을 통해 공을 잡고 득점을 위해서는 수시로 공격 방향을 기만하는 책략이 필요하다.
● 책략과 기만
제3편 10장은 책략(策略, Cunning) 즉 기만(欺瞞)을 말하고 있다. 첫머리에 ‘책략을 쓰려면 의도를 숨겨야 한다’라고 돼있다. 이것은 손자병법의 ‘범전자(凡戰者)는 이정합(以正合), 이기승(以奇勝): 무릇 전쟁이란 정공법으로 맞서고 기만으로 승리한다’와 일맥상통한다.
클라우제비츠가 말한 책략가는 ‘자기가 속이려는 사람이 스스로 이성의 잘못을 저지르도록 만들며, 상대방의 눈앞에서 문제의 본질을 갑자기 변화시킨다. 그래서 재치가 생각과 상상으로 하는 요술인 것처럼 책략은 행동으로 하는 요술이다.
그리고 말로 하는 행동은 많은 노력이 들지 않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주로 적을 속이는 데 쓴다’라고 했다. 이것은 다양한 방법으로 상대방의 주의력을 분산시켜 건전한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는 기만의 다른 형태로 계획이나 명령을 거짓으로 전하거나 적에게 일부러 잘못된 정보를 흘리는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최고지휘관은 책략보다 올바르고 정확한 통찰력이 더 필요하며 유용한 특성’임을 강조한 것은 기만에 속지 않도록 유념하라는 뜻이다. 또한 대담성과 책략은 서로를 강화시켜 하나의 불빛으로 만든다고 피력했다. 전쟁에서 기만을 통해 승리를 쟁취하듯이 럭비에서도 강력한 스크럼을 통해 공이 빠져 나오면 8번 선수가 한 번의 페인팅을 통해 상대편의 주의를 분산시킨다. 그리고 윙이나 센터의 빠른 발을 이용해 트라이에 성공하는 것과 같다.
● 럭비와 럭비공
럭비가 영국에서 번창한 시기는 1066년 노르만의 영국 정복 이후부터다. 당시는 게임 규칙이 없어 거의 목숨을 건 투쟁에 가까운 경기였다. 근대 럭비는 각 팀 15∼30명의 경기자가 상대편 골대에 먼저 골을 가져가기 위해 싸우는 ‘헐링 앳 골(Hurling at Goal)’을 계승한 럭비 풋볼이다. 오늘날 럭비풋볼의 규칙은 1823년 만들어졌다. 영국의 한 럭비 구장에서 경기가 득점 없이 끝날 무렵, 월리엄이란 소년이 상대가 킥한 볼을 잡고 골라인으로 달려들었다. 당시는 드리블 이외는 허용되지 않았다.
일제시대 때 소개됐던 럭비는 6·25전쟁 후 군 전력 증강책의 일환으로 각군 사관학교와 육군에 보급돼 뿌리를 내리는 계기가 됐다. 지금은 디자인플라자가 들어선 옛 동대문운동장에서 각군 사관생도 럭비 대표팀 경기가 열리는 날에는 함성으로 운동장이 가득 찼다.
한편 오늘날 쓰는 타원형 럭비공은 돼지 오줌보에서 유래됐다. 럭비가 처음 시작된 곳은 영국 워빅스의 럭비스쿨이었다. 1845년 럭비의 아버지 토머스 아널드가 통일된 규정을 만들었고, 1862년 돼지 오줌보 주위에 가죽 네 조각을 손으로 꿰맨 것이 첫 럭비공이었다. 처음에는 둥근 모양이었으나 경기를 할수록 찌그러지고 타원형으로 변해갔다. 공을 발로 차는 축구 등에 비해 럭비는 차는 시간보다 공을 손으로 잡고 던지는 시간이 많아 원형보다 타원형이 유리했다. 기술이 발달하면서 1941년 이후부터 천연가죽 안에 바람을 넣었으나 물에 약한 것이 단점이었다. 젖은 공은 선수들을 더욱 지치게 했다. 이에 1980년대부터 방수 기능을 갖췄으며, 손에 밀착되고 던지기 편하도록 공 표면에 오톨도톨한 돌기가 있는 최대 460g의 공이 제작됐다. 럭비는 단순한 스포츠를 넘어 인종 갈등을 해소하는 방편으로도 활용됐다.
● 스프링복스와 인빅터스
지난해 12월 타계한 넬슨 만델라는 흑백 인종갈등을 해소하고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해 럭비를 활용했다. 그는 인권과 자유와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다가 27년간 감옥에 갇혔으나 그 고난을 극복하고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으로 당선됐고, 노벨평화상을 수상하는 불굴의 인간정신을 보여줬다. 한 부족의 추장 아들로 극심한 인종차별이 횡행하는 나라에서 태어나 인권과 자유를 향한 머나먼 길을 걸었다.
넬슨 대통령은 거의 백인으로 이뤄진 자국 팀 스프링복스(springboks)와 영국 팀 간 경기에서 흑인들이 상대인 영국 팀을 응원하는 것을 목격했다. 백인의 전유물이던 럭비가 흑인의 마음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에 그는 인종과 국경을 초월한 고도의 책략(策略)을 모색했다. 흑인이 단 1명뿐이었던 스프링복스 멤버들이 TV에 출연해,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에 대한 저항의 노래 ‘응코시 시키렐레’를 불러 감동적인 모습을 연출했다. 결국 1995년 럭비결승전에서 기적의 우승을 만들어냈다.
이 사건은 ‘굴하지 않는다’란 뜻의 영화 ‘인빅터스(Invictus, 2010)’로 태어났다. 19세기 말 영국의 시인 헨리는 인생의 어려움을 굴하지 않는 용기(百折不屈)로 극복할 것을 노래했다. “나는 내 인생의 주인공, 나는 내 영혼의 선장이다.(I am the master of my fate, I am the captain of my soul.)” 럭비 선수뿐만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꼭 필요한 말이다.
<오홍국 군사편찬연구소 연구관·정치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