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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묵상글 ( 주님 수난 성 금요일. - 염치없는 오늘.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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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2012년 강론>
2012.04.06 09:09
“우리에게는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는 대사제가 아니라
모든 면에서 우리와 똑같이 유혹을 받으신,
그러나 죄는 짓지 않으신 대사제가 계십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이 세상에서 삶을 마치시는 오늘
도리어 저는 주님께서 이 세상에서 오신 뜻을 생각합니다.
왜냐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오실 때
이미 이 죽음은 예견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마치 고생이라는 것은 전혀 모르던 양반 집 규수가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시집온 것과 같습니다.
구정물에는 손도 담그지 않고 마님 소리만 들으려면 애초에
가난하고 별 볼 일 없는 집에 시집오지 말아야 하는데
찢어지게 가난한 집에 오직 사랑 하나 때문에 시집온 것과 같이
주님께서 이 세상에 인간이 되어 오심은 오직 사랑 때문이고
인간의 모든 가난과 고통과 죽음을 각오하고 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인간과 모든 면에서 같아지고자 하셨습니다.
이것이 사랑의 동화同化입니다.
당신의 모든 호사스러움은 버리고 인간의 구차함을 택하시고
천국의 모든 복락은 버리고
인간의 모든 고통과 질병과 죽음을 택하시는 겁니다.
저는 이번에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고통을 택하심을 묵상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의 모든 짐을 당신이 지시는 겁니다.
내가 지지 않은 나의 십자가도 주님께서 대신 지시고
내가 지지 않은 내 사랑하는 이의 십자가도 대신 지시는 겁니다.
어머니들은 걱정이 운명이십니다.
자식이 걱정하지 않는 거까지 어머니는 대신 걱정을 하십니다.
그리고 어머니들은 자식의 모든 불행을 당신의 것으로 삼으십니다.
자식이 그렇게 된 것 다 자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그렇게 낳았고 그렇게 키웠으니 모든 것이 당신 책임입니다.
우리의 주님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으로 인해 태어난 우리의 모든 것은 당신 책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해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은
우리에 대한 당신의 모든 책임을 지시는 겁니다.
저는 지금 주님께서 우리의 십자가를 대신 지심이
그러니까 당연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당신 책임으로 여기시고,
그래서 모든 고통과 죽음도 당신이 것으로 짊어지시는
그런 사랑을 하신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함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시는데,
그 사랑을 핑계 삼아 우리는
너무나도 뻔뻔하게 내 십자가를 주님께 맡깁니다.
키레네의 시몬이 주님의 십자가를 대신 졌다고 하는데
사실은 그게 아니고 주님께서 오히려 키레네의 십자가를 지신 거지요.
그러니 사실은 키레네의 시몬이
자기 십자가 대신 지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좀 거든 것입니다.
한 번은 제가 천안역에서 기차를 타러 가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너무 무거운 짐을 들고 계단을 오르셨습니다.
아마 시골 농사 진 거 자식에게 갖다 주시는 거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들어다드리겠다고 하니 너무 고마워하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들고 가는데 굳이 당신도 거들겠다고 하시는 겁니다.
괜찮다고 해도 너무 미안해서 그런다고 하셔서
별 도움은 안 되었어도 같이 드시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참으로 염치없는 오늘이지만,
뻔뻔스럽지 않기 위해서 오늘만이라도 제 대신 지시는 주님의 십자가를
제가 어떻게 거들어야 하는지 이 새벽 고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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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찬선 신부님 올해 오늘 강론글 : 아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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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호명환 가롤로 신부님.
CAC 매일묵상
"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
CAC(Center for Action and Contemplation)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호명환 번역)
“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라는 가사는 고통받는 이들과 함께 머무르라는 신앙적 기억을 일깨워 줍니다.
리처드 로어의 매일 묵상
예수님과 희생 염소 메커니즘의 종말
"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
2026년 4월 2일 목요일
성 목요일
욜란다 피어스 박사(Dr. Yolanda Pierce)는 영가 "Were You There?"(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 안에서 위로와 도전을 동시에 발견합니다. 이 노래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회상하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 앞에 어떻게 현존하고 있는지를 성찰하도록 초대합니다:
저는 어느 작은 침례교 교회에서 성지 주일 설교자로 초대받았을 때, 성가대가 "Were You There (When They Crucified My Lord)?"(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 를 불렀습니다. 많은 이로부터 사랑받는 이 영가는 저로 하여금 현존의 힘과 노래가 담고 있는 하느님의 급진적인 현존 체험에 대해 신학적으로 성찰하게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부터 이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지만, 이 영가는 오늘의 현실을 강하게 강조하며 이를 듣는 이들에게 과감히 묻습니다: "Were you there?"(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 여기서 "당신"이라는 호칭은 이 질문이 실제로 그 자리에 있을 수 없었던 우리 모두를 향한 질문임을 가리켜 줍니다. 그러나 이 물음은 또한 여전히 신자들에게 십자가 아래에 서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이라는 급진적인 행위에 자신을 일치시키라는 초대를 전하기도 합니다.
피어스는 우리가 현존해야 할 고통의 자리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며, 그곳에서 정의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있는 그 자리에 우리가 온전히 함께할 때, 충만한 생명이 드러납니다. Were You There?(당신은 거기에 있었나요?)는 신자들에게 인류 전체와 함께하는 현존이 성당 안으로 들어가거나 교회의 문턱을 넘는 것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음을 일깨워 줍니다. 십자가, 곧 골고타는 공적인 현장의 자리입니다. “Were you there?”라는 수사적 질문은 단순한 과거 회상이 아니라, 오늘날 상실과 상처 속에 살아가는 세대들 곁에 우리가 참으로 함께할 것인가를 묻는 긴박한 물음을 던집니다.
현존한다는 것은 곧 필요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함께하는 것입니다. 허리케인 카트리나로 인해 제방이 무너졌을 때, 혹은 아이티 지진으로 많은 사람이 죽고 큰 피해를 입었을 때 당신은 그 자리에 있었습니까? 앞으로 또 다른 자연 재해가 닥쳐 가장 취약한 이들이 피할 곳을 찾지 못할 때, 당신은 그곳에 함께할 것입니까?…
현존한다는 것은 곧 사람들이 고통받는 그 자리에 함께하는 것입니다. 굶주린 이들과 집 없는 이들, 영적·육적 양식을 찾는 이들 곁에 당신은 있었습니까? 아니면 길 건너편으로 지나가 버리겠습니까?
현존한다는 것은 정의를 위한 투쟁의 최전선에 서는 것입니다. 셀마와 버밍햄에서 군견들과 물대포의 위협을 무릅쓰며 함께 있었습니까? 앞으로 의료보험이 없는 이들을 위해 국회의사당 앞에 설 것입니까? 교육 예산 삭감에 항의하기 위해 상원의원 사무실에 나아갈 것입니까? 비록 또다시 수십억 달러가 부당한 전쟁을 위해 배정되는 현실 속에서도 말입니다.
Were You There?의 가사 중 "오, 때로는 나를 떨리게 하네! 떨리게! 떨리게!"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우리는 불의 앞에서 깊이 감동하며 떨 수 있는 능력을 잃어버린 것은 아닐까요? 거룩하신 하느님 앞에서 정의의 일을 요청받을 때, 그분의 현존 앞에서 더 이상 떨지 않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 공동체 이야기
저는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죽으셨다”는 이미지에 대해 오랫동안 어려움을 느껴왔지만, 동시에 십자가 사건이 제게 어떤 의미인지 표현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서툴게나마 제 의식은 예수님의 죽음을, 인류가 다시금 하느님의 ‘충만한 생명’에 대한 본래 의도에 열려 나아가도록 길을 열어 주신 사건으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신시아 부르조의 묵상(the meditation)에서 저는 제가 붙잡으려 했던 것을 설명해 주는 말씀을 읽었습니다: “핵심은 예수님의 삶을 성사로 읽는 데 있습니다. 곧, 예수님의 삶은 단순히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신자들에게 힘을 주는 거룩한 신비인 것입니다.”
—Shona H.
References
Yolanda Pierce, In My Grandmother’s House: Black Women, Faith, and the Stories We Inherit (Broadleaf Books, 2023), 83, 84–86.
Image credit and inspiration: Vaishak Pilai, untitled (detail), 2020, photo, India, Unsplash. Click here to enlarge image. 벽에 새겨진 저 거친 십자가는 우리가 희생 염소를 지목하려는 인간적 충동의 표지가 됩니다. 이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것을 얼마나 쉽게 다른 이에게 떠넘기는지를 드러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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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영성 묵상글
"당신은 당신의 어두운 내려오심 속에서, 오히려 가장 자비로우셨습니다."
언어는 현실의 작은 부분만을 담아낼 수 있습니다. 나머지, 훨씬 더 큰 부분은 침묵입니다. 죽음은 결국 모든 이에게 찾아오는 위대한 침묵입니다. 초기 교부 가운데 한 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그분의 침묵도 들어야 한다."라고요...
십자가 곁에 무릎 꿇어도 좋지만, 앉는 것이 더 낫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래 머물러야 하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평생 동안 말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고통과 슬픔과 함께 앉아, 그것을 "해결"하거나 피하려는 유혹을 거부해야 합니다. 우리 삶의 일부인 고통이나 슬픔은 오직 침묵 안에서만 그 의미가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많은 사람들이 세기를 거쳐 끔찍한 "골고타로 향하는 길(십자가의 길)"을 견뎌낼 수 있었던 것은, 침묵 안에서 내면으로 깊이 들어가는 묵상을 통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과 자신들의 그 길을 연결시킴으로써 거기에서 어떤 심오한 진리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프랑스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고 합니다. "금요일은 언제나 가장 좋은 날이거나 가장 나쁜 날이다." 그것이 어느 쪽이 될지는 아마도 주말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는지에 달려 있겠지요. 그러나 성 금요일이 "좋은 날", 혹은 "선한 날"(Good Friday)인 이유는 부활 주일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에 의미를 주는 것은 언제나 "결말"입니다. 십자가의 침묵은 부활의 빛 속에서 비로소 드러납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 목요일 만찬 미사 후부터 성 토요일까지 미사 성제를 거행하지 않고 침잠 안에서 어둠으로 들어가시어 인류의 가장 어두운 곳에 빛을 비추어 주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묵항하는 것입니다.
이렇듯이 그리스도께서 죽음을 이기시고 영원한 생명을 여셨기에 성 금요일은 참된 희망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 금요일은 그저 슬픈 날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가장 짙은 어둠인 죽음에 빛과 생명을 비추어 어둠과 죽음을 이기신 희망의 날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패배의 상징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가는 승리의 문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이날 성체를 축성하지 않고, 오직 십자가 경배와 말씀 전례, 그리고 이미 성 목요일에 축성된 성체를 나누는 것도 바로 이 신비를 드러내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 금요일은 하느님께서 우리 존재 가장 깊은 내면에 심어 주신 가능성이 움을 트기 시작하는 시간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을 뚫고 우리 내면 그 깊숙한 곳으로 들어오시어 그 가능성에 빛을 비추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성 금요일의 묵상 글로 예수회 사제이자 시인이었던 영국의 제라드 맨리 홉킨스(Gerard Manley Hopkins: 1884-1889)의 [The Wreck of the Deutschland(도이칠란트호의 침몰)]이라는 시 일부를 함께 나누겠습니다. 어쩌면 이 시가 성 금요일인 오늘 우리의 완고한 마음을 녹여 내리는 화두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사람들 가운데 흠숭 받으소서,
삼위의 모습으로 계신 하느님.
굴속에 고집스럽게 숨어 있는
사람의 악의를 폭풍으로 꺾으소서.
말로 다할 수 없는 달콤함, 혀로 다 전할 수 없는 사랑,
당신은 번개이시며 사랑이십니다. 나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겨울이면서 동시에 따뜻함이신 분.
마음을 어루만지시는 아버지, 당신은 나를 흔드셨습니다.
당신의 어두운 내려오심 속에서, 오히려 가장 자비로우셨습니다.
모루의 울림과
불길 속에서 당신의 뜻을 단련하시어,
혹은 오히려 봄처럼 은밀히 스며들어
그를 녹이시되 여전히 다스리소서.
바오로에게는 한순간의 번개처럼,
아우구스티노에게는 오래 이어진 달콤한 기술처럼,
우리 모두 안에서, 우리 모두를 통해
자비를 이루시고, 다스리시는 임금님, 흠숭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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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사형을 당한 사건 앞에 서 있습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인간들의 계획된 악이 저지른 사건입니다. 인간이 하느님을 죽인 사건입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에 대한 교종 프란치스코의 말씀을 되새겨봅니다.
“그분의 수난은 사고가 아닙니다.
그분의 죽음은, 그 죽음은 (성경에 이미)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악할 만한 신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있는 ‘신비’입니다. 곧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역사가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보이는 역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신비’입니다.
그것은 그 고통이 기쁨이요, 그 패배가 승리요, 그 배척이 사랑이라는 신비입니다. 그 어둠이 빛이요, 그 죽음이 생명이요 구원이라는 헤아릴 수 없이 깊은 ‘신비’입니다. 또한 그 무력함은 전능함 안에서, 그 비참함은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는 말로 형언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우리는 이 ‘신비’를 ‘그리스도의 부활’과 결합되지 않고서는 결코 알아들을 길이 없습니다.
오늘은 ‘주님 십자가의 신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참으로 인간의 이해로는 다 알 수 없는 ‘신비’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 ‘신비’가 바로 “우리를 위해서” 주어졌다는 사실입니다.
그러기에 예수님께서는 이 죽음의 길을 능동적으로 의연한 모습으로 결연하게 가십니다. 어둠 속을 걷되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패배 당하되 승리로 나아가며, 죽음의 길로 걷되 생명의 길로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으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을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길로 제시해주십니다. 비록 인간이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지만, 하느님께서는 인간을 본래의 당신의 사랑에로 되돌아오게 이끄십니다.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지고한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십자가의 길’은 사랑의 길이며, ‘사랑을 완성하는 길’이 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야말로 사랑의 완성이요, 동시에 완성된 사랑의 모습입니다.
그래서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말한다.
“십자가의 하느님의 침묵 속에 완성되어 있는 저 함성의 신비를 들으십시오.”
그러기에,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수난과 죽음’을 기념하면서, 결코 비통하지만은 않습니다. 오히려 십자가를 경배하며, 승리와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설혹 가슴 쓰린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네 가슴이 심하게 쓰리고 아려올 때, 바로 그 때가 오히려 우리 안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꽃 피우시고 계시는 그분을 보아야 할 때입니다. 바로 그 고통 안에서 예수님을 관상해야 할 때입니다.
부활은 죽음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죽음 안’에 옵니다. 곧 십자가의 고통이 끝난 후에 오는 어떤 것이 아니라, 바로 그 ‘십자가 안’에 이미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부활의 생명은 우리의 죽음 안에서 싹을 틔웁니다.
그러기에, 우리의 고통과 죽음은 그분의 현존을 드러내는 장소입니다. 그 속에서 당신의 참된 사랑을 주십니다. 우리는 죽음의 십자가 안에서, 사랑을 퍼주고 계시는 예수님을 봅니다. 이토록 십자가는 당신의 사랑입니다.
우리는 이 ‘십자가의 신비’, 곧 죽음을 통한 ‘사랑의 신비’를 살아갑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우리는 당신 사랑의 십자가를 입 맞추며 경배합니다.
오, 참으로 아름다운, 이토록 시린, 우리의 말문을 막는, 이 형언할 수조차 없이 강한,
사랑의 십자가를 경배합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
주님!
오늘도 고통과 죽음 앞에 서 있습니다.
나의 허약함과 죄 앞에 서 있습니다.
당신의 고통과 죽음 속에 감추어진 신비를 알게 하소서.
십자가에 걸려 있는 완성된 사랑의 향기를 맡게 하소서.
그 사랑을 알고, 그 신비를 살게 하소서.
고통에서 기쁨을, 패배에서 승리를,
어둠에서 빛을, 죽음에서 생명을 이끄소서.
어둠 속에서도 빛을 향하여 나아가며,
고통 속에서도 기쁨으로 걸어가고,
패배 당하여도 승리로 나아가게 하소서.
우리네 쓰린 가슴에서 사랑을 퍼 올리소서.
무력함이 전능함 안에서,
비참함이 거룩함 안에서 일치를 이루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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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난 2월 23일에 ‘엘파소’엘 다녀왔습니다. 3년 전에 서울대교구에서 사제를 파견했던 공동체입니다. 저는 두 번 엘파소엘 방문했었습니다. 본당 신부님은 제게 30일 피정 지도를 받았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환영차 방문했습니다. 2년 전에는 신부님이 초대해서 포트워스 신부님과 함께 방문했습니다. 신부님은 비자 문제가 있어서 작년 4월에 한국으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그 뒤로 엘파소 한인 공동체는 한국인 사제가 없이 미국 성당에서 신앙생활 했습니다. 교우들은 제게 ‘판공성사와 미사’를 부탁했습니다. 저는 기쁜 마음으로 도움을 주기 위해서 엘파소로 갔습니다. 16명의 교우는 모두 성사를 보았고, 감사의 미사를 봉헌했습니다. 그날 복음 말씀은 마태오 복음 25장 ‘최후의 심판’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착하고 성실하게 살았던 사람은 오른쪽으로, 악하고 게으르게 살았던 사람은 왼쪽으로 나누었습니다. 오른쪽에 있는 사람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내가 힘들었고, 배고팠고, 헐벗었고, 나그네 되었을 때 나를 따뜻하게 대해 주었다. 그러니 영원한 생명이 있는 천국으로 가라.’
그러자 오른쪽에 있던 사람이 말합니다. ‘우리가 언제 그렇게 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가장 배고팠고, 헐벗었고, 나그네 되었던 사람에게 해 준 것이 곧 나에게 해 준 것이다.’ 저는 1년 동안 한국어 미사를 하지 못했던 엘파소 공동체로 갔고, 미사와 판공성사를 해 주었으니, 오른편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엘파소 한인 공동체는 제게 보람 있는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한인 공동체는 제가 앞으로도 와 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두 달에 한 번은 가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다음 방문일정은 5월 26일로 정했습니다. 예전에 한비야 씨가 이런 이야기 했습니다. ‘일에는 4가지 종류가 있습니다. 보람 있고 즐거운 일, 보람 있지만 힘든 일, 보람 없지만 즐거운 일, 보람도 없고 힘든 일’ 이번 엘파소 방문은 보람 있었고, 즐거운 일이었습니다. 신앙인은 보람 있지만 힘든 일도 기쁜 마음으로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은 성금요일입니다. 오늘 빌라도가 예수님께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입니다. 진리가 여러분을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러 왔습니다. 이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해 주십시오. 아버지의 말씀이 진리입니다. 아버지 이 사람들이 진리를 위해서 몸 바치게 하십시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율법은 모세를 통하여 주어졌지만, 은총과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왔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돈이 진리인 사람은 돈 때문에 양심을 버리고, 돈 때문에 친구를 배반합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명예가 진리인 사람은 그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 자신은 물론 주변의 사람까지 위험하게 합니다. 명예는 지킬 힘이 있을 때 지켜지는 것입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자존심이 진리인 사람은 자존심 때문에 소중한 것을 버리기도 합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성공이 진리인 사람은 희생과 나눔을 어리석다고 생각합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이 있습니다. 권력이 진리인 사람은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 폭력을 정당화합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진리를 위해서 살아갑니다.
신앙인에게 진리는 무엇일까요?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입니다. 세상의 가치와 기준으로는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성공, 명예, 권력이라는 사다리를 타고는 도저히 올라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자비로운 마음을 지녀야 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누구나 들어갈 수 있지만 아무나 들어갈 수 없는 나라입니다. 마음이 가난한 이,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이, 자비를 베푸는 이, 평화를 위해서 일하는 이,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는 이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이 땅에서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은 나라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타 언덕을 올라 십자가에 매달리시어 숨을 거두신 ‘성금요일’ 예식을 할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들 생의 한가운데서 가장 부끄럽고, 가슴 아팠던 순간들을 생각해 보았으면 합니다. 어떤 분은 친구를 배반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부모님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해서 약한 이를 괴롭히고 짓밟은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다른 이에게 자신의 잘못을 전가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어떤 분은 아내 모르게 다른 여인에게 눈길을 주었던 일을 떠올릴지 모릅니다. 오늘 우리는 이렇게 고백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세상 구원이 여기에 달려 있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그리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 깊은 경배를 드립니다. 십자가 위에 계신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자 일어나 갑시다.’ 비록 그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이 외로움의 길이라고 해도, 그 길 때문에 모든 것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해도, 그 길이 죽음의 길이라고 해도 함께 하자고 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고난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사람들의 환호 속이 아니라, 침묵과 조롱 속에서 걸어가셨습니다.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돌길을 걸어 올라가셨습니다. 넘어지셔도 다시 일어나셨고, 쓰러지셔도 끝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 길은 패배의 길이 아니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억울함의 길이 아니라 용서의 길이었습니다. 저주의 길이 아니라 구원의 길이었습니다. 주님, 저희도 저마다의 고난의 길을 걷고 있습니다. 보람은 있지만 힘든 길,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 때로는 외롭고 눈물 나는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먼저 걸어가셨기에 그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희망의 길입니다. 십자가 끝에는 부활이 있음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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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 08:05. 추가.
거듭 치유되고 기적을 본다 해도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성목요일 저녁 예수님께서 행하신 세족례를 묵상하면서, 참된 신앙에 대해 묵상해봅니다.
신앙에도 거짓 신앙, 사이비 신앙이 있습니다.
무늬만 신앙인, 겉과 속이 다른 수박 신앙인도 있습니다.
그들은 신앙생활을 해나가면서도 달콤함과 신비스러움, 기적과 치유, 세상에서의 성공과 안녕만을 추구하지, 고통이나 십자가는 철저하게도 외면합니다.
나와 내 가족의 승승장구만을 기원하지, 공동선이나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웃과의 연대는 안중에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사이비요 수박 신앙인이 확실합니다.
수난이 시작되기 직전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께서는 갑자기 허리를 굽히시어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셨습니다.
그 작지만 강렬한 행위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참된 신앙은 희생과 봉사, 헌신과 겸손에 뿌리내려야 함을 강조하셨습니다.
요즘 한국 가톨릭교회의 이단이라고 할 수 있는 ‘마리아의 구원 방주’ 문제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들은 다가오는 서울 세계청년대회를 세력 확장의 좋은 기회로 여기고, SNS를 통한 적극적인 홍보에 목숨을 걸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들이 지난 수십 년간 펼쳐온 행태는 신천지나 통일교 등 사이비 집단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보잘 것 없으며 나약하기 그지없는 한 존재를 신격화시킵니다.
그리고 그 주변에는 생계가 달려있는 협력자들이 기생하고 있습니다.
치유니 기적이니 하며 모은 막대한 헌금은 대대적인 부동산 매입으로 이어집니다.
가톨릭교회 당국 그 누구로부터의 인준을 받지 않았음에도 수도자 복장을 한 사람들이 모여있고,
불행하게도 균형감각을 상실한 사제들이 미사를 봉헌하고 있으니, 참으로 불행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교님들이 지속적으로 당부해오신 것처럼 교도권에 순명하지 않는 단체인 나주에서 봉헌되는 모든 미사나 성사는 무효입니다.
그들이 사람들의 눈길을 끌기 위해 지속해온 각종 이벤트 행사들, 참으로 기괴하고 유치합니다.
모든 행사에 꼭 따라다니는 것이 있습니다.
불치병의 치유입니다.
그들이 충실하게 업데이트하는 영상물에는 추종자들이나 은혜받았다는 사람들의 간증으로 빼곡합니다.
사실 불치병이나 중병에 걸린 사람들, 말기 암 환자들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치유니, 기적이니 하며 미끼를 던지며 세를 불려가는 동시에 사업을 확장시키는 것입니다.
저는 기회 닿을 때마다 강조를 합니다.
너무 치유나 기적, 특별하고 기이한 현상에 연연하지 말라고. 우리 가톨릭 신앙은 균형과 상식을 기반으로 한 종교이기에 그렇습니다.
신앙은 이성과 함께 가야 합니다.
만일 누군가가 끝도 없이 치유되고 또 치유되어 200세가 되었다면, 그 사람이 행복할까요?
중병에 걸리면 제일 먼저 병원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첨단 의료 기술로 고통 중에 있는 환자들에게 희망과 새 삶을 건네고 있는 이 시대 또 다른 치유자 예수님이신 유능한 의사 선생님을 찾아가야 할 것입니다.
병고 속에서도 낙관적인 마음 잃지 않고, 부단히 하느님 자비와 은총을 청할 것입니다.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병과 맞서 싸우는 등 최선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이제 때가 왔나보다 생각하며, 평생 기다려왔던 주님을 만날 시간을 준비하셔야 할 것입니다.
아무리 치유되고 소생되며 기적을 본다해도 우리 모두 언젠가 죽을 것입니다.
루르드의 목격자 벨라뎃다 성녀도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철저한 순명과 기도와 겸손한 은수생활로 지금은 하늘의 빛나는 별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아직도 기적이니 신비니 치유니 하며 먼 곳까지 왕복하시느라 고생하시는 분들, 고백성사 통해 따뜻하고 자상하며 균형 잡히고 상식적인 아버지 집으로 돌아오시기 바랍니다.
우리 가톨릭교회는 값싼 신앙을 거부합니다. 아무리 훌륭하고 탁월한 신앙인이라 할지라도 신격화하지 않습니다.
신앙이라는 상표를 붙여 어색하고 조잡한 물건을 강매하지 않습니다.
고통과 십자가는 외면하고 부와 성공, 건강과 치유만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아버지 뜻에 순명하기 위해 철저한 침묵 가운데 무거운 십자가를 지고 골고타 언덕을 예수님을 삶과 죽음을 이정표로 삼습니다.
성모님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 한가운데 비범함을 사신 분입니다.
매일의 고통과 십자가를 기쁘게 수용하셨고, 단순하고 소박한 삶을 사셨습니다.
우리에게도 일상에 충실할 것과 매일의 시련을 잘 견디라고 권하십니다.
성모님께서는 결코 피눈물 흘리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나뒹구는 모습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어색하고 기상천외한 신앙 행태를 원치 않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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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오늘의 복음 말씀 묵상 ✝️
요한 18,1–19,42
오늘 우리는
복음 전체 가운데 가장 깊은 침묵의 길을 걷습니다.
체포, 재판, 조롱, 십자가, 죽음, 무덤.
이 모든 사건은
폭력이 어떻게 의롭다는 얼굴을 쓰고
사람을 죽이는지 보여 주지만,
동시에 사랑이 어떻게 끝까지 남아
세상을 살리는지도 보여 줍니다.
성 아우구스티노는
십자가를 단지 비극으로 보지 않습니다.
그에게 십자가는
하느님의 사랑이 인간의 죄를 정면으로 바라보면서도
그 죄보다 더 깊게 들어가
죄를 무너뜨리는 자리입니다.
인간은 예수님을 “제거”한다고 믿었지만,
하느님은 그 자리에서
구원을 “완성”하십니다.
요한복음의 수난기는 특히
예수님의 주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끌려가는 희생양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내어주시는 분입니다.
“내가 그다.”
이 선언은
폭력 앞에서 움츠러든 고백이 아니라
사랑으로 끝까지 서 계시는
하느님의 현존입니다.
아우구스티노는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패배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사랑으로 승리하셨다”는 방향으로 우리를 이끕니다.
승리는 상대를 무너뜨리는 힘이 아니라
증오를 끝내는 사랑입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느님이 인간에게 되갚는 심판이 아니라
하느님이 인간을 되찾는 자비입니다.
성금요일의 성찰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나는 어떤 순간에
약자를 희생시키며 ‘질서’를 지키려 했는가?
나는 어떤 순간에
침묵해야 할 곳에서 말로 상처 주었고,
말해야 할 곳에서 두려움으로 침묵했는가?
그리고 주님은
그 모든 자리에서
내게 무엇을 보여 주시는가?
예수님은 “다 이루어졌다” 하시고
숨을 거두십니다.
끝이 아니라
사랑이 끝까지 간 자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자리에서
말을 줄이고
침묵으로 머무르며
십자가가 우리를 바꾸도록 허락합니다.
주님,
십자가 앞에서
저의 변명과 정당화를 내려놓게 하소서.
당신의 사랑이
제 안의 폭력과 두려움을 녹이고,
자비와 평화로 다시 빚어 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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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08:00. 추가.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제자들과 함께 키드론 골짜기 건너편으로 가셨다.
거기에 정원이 하나 있었는데 제자들과 함께 그곳에 들어가셨다.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여러 번 거기에 모이셨기 때문에, 그분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곳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유다는 군대와 함께,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보낸 성전 경비병들을 데리고
그리로 갔다.
그들은 등불과 횃불과 무기를 들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닥쳐오는 모든 일을 아시고 앞으로 나서시며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셨다.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나다.” 하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을 팔아넘길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서 있었다.
예수님께서 “나다.” 하실 때, 그들은 뒷걸음치다가 땅에 넘어졌다.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누구를 찾느냐?” 하고 물으시니,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요.” 하고 대답하였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나다.’ 하지 않았느냐? 너희가 나를 찾는다면 이 사람들은 가게 내버려 두어라.”
이는 “아버지께서 저에게 주신 사람들 가운데 하나도 잃지 않았습니다.” 하고 당신께서 전에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게 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에 시몬 베드로가 가지고 있던 칼을 뽑아, 대사제의 종을 내리쳐 오른쪽 귀를 잘라 버렸다. 그 종의 이름은 말코스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이르셨다.
“그 칼을 칼집에 꽂아라.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신 이 잔을 내가 마셔야 하지 않겠느냐?”(요한 18,1-11)>
1) 우리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이미 알고 있고, 믿고 있습니다.
성금요일 전례는 ‘부활 신앙’을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시기 전에 겪으신 수난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전례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어떻게?’보다 ‘왜?’가 더 중요합니다.>
사실 ‘십자가 신앙’은 ‘부활 신앙’을 전제로 한 것이고, ‘부활 신앙’의 일부이기도 합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믿는 사람들에게만 의미 있는 상징이 되고, 표징이 됩니다.
<반대로, 부활을 안 믿는 사람들에게는, 십자가는 무의미한 물건이 될 뿐입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 그리고 더러워진 사람들에게 뿌리는 암송아지의 재가 그들을 거룩하게 하여 그 몸을 깨끗하게 한다면, 하물며 영원한 영을 통하여 흠 없는 당신 자신을 하느님께 바치신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을 죽음의 행실에서 얼마나 더 깨끗하게 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섬기게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는 새 계약의 중개자이십니다.
첫째 계약 아래에서 저지른 범죄로부터 사람들을 속량하시려고 그분께서 돌아가시어, 부르심을 받은 이들이 약속된 영원한 상속 재산을 받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히브 9,13-15).”
2) 복음서에 기록되어 있는 ‘예수님의 수난 이야기’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비교해 보면,
수난 이야기는 길고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는데, 부활 후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짧고 간단합니다.
부활이 그리스도교의 핵심 신앙이니까 수난 이야기보다 더 길고 더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왜 반대가 되었을까?
그것은 복음서를 기록한 시기의 상황과 관련된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복음서는 예수님 승천 후에, 세월이 꽤 많이 흐르고 나서 기록되었습니다.
그 당시 신자들은 ‘부활의 기쁨’을 누리면서 살고 있었고, 아마도 수난 때의 참혹했던 일은 잊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것은 보통 사람들의 인간적이고 자연스러운 심정입니다.>
그런데 십자가를 잊어버리면 부활의 기쁨이 희미해지고,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부활의 기쁨 자체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사도들과 복음서 저자들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잊지 말라고, 수난 때의 일을 길고 자세하게 기록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왜, 어떻게, 얼마나 십자가 수난의 고통을 겪으셨는지를 기억하고 있어야 ‘부활의 기쁨’을 제대로 누릴 수 있습니다.
그것도 ‘파스카의 신비’에 속한 일입니다.
어둠의 무서움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빛을 잘 간직하고, 병의 고통을 잘 기억하는 사람이 건강을 잘 지킵니다.
3) “우리에게 부활의 기쁨은 현재의 일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은 과거의 일이다.
십자가는 이미 끝난 일 아닌가?
그런데도 왜 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해야
한다고 계속 강조하는가?” 라고 물을 수 있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그것은 불로 단련을 받고도 결국 없어지고 마는 금보다 훨씬 값진 여러분의 믿음의 순수성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밝혀져, 여러분이 찬양과 영광과 영예를 얻게 하려는 것입니다(1베드 1,7).”
<사는 것이 너무 힘들어서 모든 것을 다 포기하고 싶은 심정에 사로잡히는 때가 있습니다.
그런 위기 상황에 있는 사람에게 가서 “주님께서 주신 십자가이니 달게 받아들여라.” 라고 말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상투적인 말’은 당사자를 더 힘들게 할 뿐입니다.
바로 그럴 때에 정말로 필요한 것은 ‘사랑’입니다.
‘말’로만 하는 사랑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함께 하는 사랑,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사랑이 필요합니다.
개인의 힘으로 안 되면 공동체가 나서야 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참여하는 일도, 각자 자신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지는 일도, 누구에게나 쉬운 일은 아니지만, 사랑으로 함께 하면 해낼 수 있습니다.
십자가는 부활을 향해 함께 나아가는 사랑을 상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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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함승수 세례자 요한 신부님 -------- 11:00. 추가.
요한 18,1-19,42 "거기에서 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오늘 성금요일 전례를 통해 우리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어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생각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매달려 계신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사제와 신자들은 이런 계응을 주고 받지요. “보라 십자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 “모두 와서 경배하세.”
십자가는 원래 죽음과 징벌의 상징입니다. 극악무도한 잘못을 저지른 죄인을 매달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세상 구원이 달렸다’고 하니 선뜻 그 의미를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이는 크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첫째는 ‘구원’ 그 자체이신 분, 우리를 구원하실 구세주께서 십자가에 못 박힌 채 매달리셨다는 ‘사실’의 확인입니다. 그런 슬픈 일이 생긴 것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은 우리의 고집 때문이고, 그분의 사랑을 믿지 않은 우리의 불신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우리를 구원으로 이끄실 수 없었기에, 당신께서 우리를 위한 ‘희생양’이자 ‘속죄양’이 되시어 십자가에 매달리는 길을 택하신 겁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장대에 높이 매달린 구리뱀을 바라보며 하느님의 자비와 사랑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받았듯이, 우리도 십자가에 매달리신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의 사랑과 자비에 대한 믿음을 통해 구원받도록 하시려는 것이지요.
둘째는 온 세상 사람들이 구원받을 수 있겠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십자가에 달렸다는 ‘의미’의 전달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한 지극한 사랑으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써, 즉 우리를 위해 기꺼이 희생하심으로써, 그분을 죽게 만든 ‘사형도구’였던 십자가에 새로운 의미가 덧입혀졌다는 뜻입니다. 이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며 더 이상 ‘죽음’을 떠올리지 않습니다. 우리 죄를 대신 속죄하시기 위해 죽음마저도 기꺼이 받아들이신 주님의 사랑과 희생을 생각하지요. 그리고 주님을 굳게 믿고, 우리를 위한 그 사랑과 희생을 헛되게 만들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이들이, 즉 주님께서 가르쳐주신 가르침과 계명을 충실히 따르는 이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에 힘입어 구원이라는 큰 은총을 누리게 되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구원이 십자가에, 보다 자세히는 주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음에 대한 믿음에 달렸다고 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의 뒤를 따라야 하는 우리의 소명을, 그래야만 주님의 뒤를 따라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우리의 신원을 생각하며, 주님께서 나에게 맡겨주신 십자가를 소중하게 끌어안고 기꺼이, 기쁘게 신앙의 길을 걸어야겠습니다. 성인들이 남긴 다음과 같은 조언들이 그 길을 걷는 우리의 앞을 밝혀줄 것입니다.
“오 하느님, 죽어서 당신의 아름다운 얼굴을 마주 대할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어떤 고통도 달게 받겠습니다. 죽음도 서러워하거나 두려워하지 않겠습니다.”(성 아우구스티노) “이제 나는 여러분을 위하여 고난을 겪으며 기뻐합니다. 그리스도의 환난에서 모자란 부분을 내가 이렇게 그분의 몸인 교회를 위하여 내 육신으로 채우고 있습니다”(사도 바오로 / 콜로1,24)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반드시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의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성녀 쥴리 빌리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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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0403. 주님 수난 성 금요일. 굿뉴스 게시판-우리 묵상 체험. Mark Choi 님 -------- 08:30. 추가.
https://bbs.catholic.or.kr/bbs/bbs_view.asp?num=1&id=2130946&menu=4770 2026. 07:22 ㅣNo.188863
■ Beyond the Easter Candy: A Call for Liturgical Renewal
부활절 기고 — 사탕 너머의 질문
Beyond the Easter Candy: A Call for Liturgical Renewal
어릴 적 부활절이면 어김없이 개신교 교회 마당으로 달려갔다. 목적은 하나, 사탕과 과자였다. 천주교회는 그런 것을 준다는 소문조차 없었고, 어린 마음에 "천주교는 못사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는 막연한 편견도 있었다. 그렇게 부활절은 내게 오래도록 "맛있는 것 주는 날"이었다.
세월이 흘러 한국은 눈부시게 풍요로워졌고, 이제 사탕 몇 알에 교회 문을 두드리는 아이는 없다. 그러나 부활절의 진정한 의미는 사탕 한 봉지보다 훨씬 깊은 곳에 있었다. 문제는 그 깊이를 우리가 얼마나 온전히 살아내고 있느냐이다.
As a child, Easter meant one thing above all else: racing to the nearest Protestant church for candy and snacks. The Catholic parish gave nothing of the sort, and in the innocent logic of youth, I had absorbed a vague prejudice — that the Catholic Church was a place for the poor. For years, Easter simply meant the day you got something sweet.
Korea has grown remarkably prosperous since then, and no child today comes to church for a handful of candy. Yet the true meaning of the Resurrection runs far deeper than any Easter basket. The real question is how faithfully we are living out that depth.
I. 비어가는 성당, 채워지지 않는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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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미국 천주교회의 현실은 심각하다. 주일 미사 자리는 텅텅 비고, 반주자를 사례비를 드려 모셔도 피아노 앞에 앉을 젊은이를 찾기 어렵다. 미국인 신부는 거의 사라져가고 있다. 이 공동화(空洞化)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라 신앙 생태계 자체의 균열을 뜻한다.
반면 한국 교회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활기를 유지하며 해외로 사제를 파견하기도 한다. 그러나 외형적 건강함이 곧 영적 충만함은 아니다. 수치 너머를 들여다볼 용기가 필요하다.
The state of the American Catholic Church is alarming. Sunday pews sit largely empty, young musicians will not come to play the piano even when offered payment, and American-born priests have nearly vanished. This hollowing out is not merely a numbers problem — it signals a fracture in the living ecology of faith itself.
The Korean Church, by contrast, retains relative vitality and even sends missionaries abroad. Yet outward health is not the same as spiritual fullness. It takes courage to look honestly beyond the statistics.
II. 첫 번째 제안: 신자들의 기도를 신자들에게 돌려주라
First Proposal: Return the Prayer of the Faithful to the Faithful
미사 중 "신자들의 기도"는 말 그대로 신자들이 드리는 기도여야 한다. 그러나 현실은 누군가 미리 작성해 둔 원고를 낭독하거나 오래된 양식을 그대로 답습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기도하는 이가 자신의 말로, 지금 이 순간 공동체의 아픔과 기쁨을 담아 자유롭게 바칠 수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기도가 아니라 낭독에 불과하다.
이번 부활절부터라도 신자들의 기도가 말 그대로 살아있는 기도가 되기를 청한다. 형식의 틀을 유지하되, 기도하는 이에게 자신의 언어로 드릴 자유를 허락하자. 그것이 부활의 생명이 전례 안으로 흘러드는 작은 문이 될 것이다.
The "Prayer of the Faithful" in the Mass is, by its very name, meant to be the prayer of the faithful. Yet in practice it is most often a prepared script, read aloud from a monthly guide or a fixed template. When those who pray cannot offer their own words — cannot bring the community's present joys and sorrows into the moment — what is spoken is recitation, not prayer.
Beginning this Easter, let the Prayer of the Faithful become genuinely alive. Keep the liturgical structure, but grant those who pray the freedom to speak from their own hearts. That small opening may become a doorway through which the resurrection life flows into our worship.
III. 두 번째 제안: 월간 해설집을 걷어내고 성경을 펴라
Second Proposal: Put Down the Monthly Guide, Pick Up the Scripture
미사 때마다 배포되는 월간 해설집은 편의를 위해 시작되었겠으나, 어느 순간 성경 자체를 밀어내고 있다. 신자들은 해설집에 눈을 고정한 채 성경을 펼치지 않는다. 하느님의 말씀을 직접 만나는 대신 누군가의 해석된 요약본을 읽는다.
성경은 요약이 아니라 만남이다. 월간 해설집을 내려놓고 성경을 손에 쥘 때, 우리는 비로소 살아있는 말씀 앞에 직접 서게 된다. 이 작은 변화가 미사를 단순한 의무 이행에서 진정한 말씀의 전례로 되살려줄 수 있다.
The monthly missal guides distributed at Mass were introduced for convenience, but somewhere along the way they have begun to displace Scripture itself. The faithful fix their eyes on the booklet and never open the Bible. Instead of encountering the Word of God directly, they read someone else's abridged interpretation of it.
Scripture is not a summary — it is an encounter. When we put down the monthly guide and hold the Bible itself, we stand directly before the living Word. This small change has the power to transform Mass from a ritual obligation into a true Liturgy of the Word, restored to its original vitality.
✝ 부활은 변화다 — Resurrection Is Change
부활절은 죽음이 끝이 아님을 선포하는 날이다. 그 선포는 전례 안에서도 살아 숨 쉬어야 한다. 사탕을 받으러 달려가던 어린 날의 기억은 이제 다른 질문으로 바뀌었다 — 우리는 부활의 생명을 전례 안에서 얼마나 생생하게 살아내고 있는가?
올 부활절, 두 가지만 바꿔보자. 신자들의 기도를 살아있는 기도로 되살리고, 성경을 직접 손에 들자. 작은 부활이 큰 부활의 시작이 된다.
알렐루야. 주님께서 부활하셨나이다.
Easter proclaims that death is not the final word. That proclamation must breathe within our liturgy as well. The childhood memory of running for Easter candy has given way to a deeper question: how vividly are we living the resurrection life within our worship?
This Easter, let us change just two things. Let us restore the Prayer of the Faithful as a living prayer, and let us hold the Scripture in our own hands. A small resurrection can be the beginning of a great one.
Alleluia. The Lord is risen indeed.
부활절 2026 · Easter 2026 · 마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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