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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정희를 위한 진혼곡(鎭魂曲)
세계적으로도 명성이 드높은 미국의 권위 있는 시사 주간지 <Time>은 98. 8. 16자 호에서 '20C 아시아 인물 20 걸'을 선정, 발표한 특집기사를 게재한 바 있다. 이 때, 그 명예로운 20 걸의 반열에 선정된 유일한 한국인이 있었다. 그는, 위선의 가면을 쓰고 온갖 교언과 사술로써 정권을 찬탈한 뒤 시종일관 방약무인으로 날뛰고 있는 이른 바 '민주화 운동권출신'이라 불리는 사이비 진보세력들에 의해 무참히 능멸당하고 있는 이 시대의 고독한 영혼, 바로 박정희 전 대통령이었다. Ⅰ. 序說- 진중권에게 주는 경고. 박정희... 이제껏 그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인식(認識)은 항상 양극단(兩極端)으로 치달아 왔다. 그것도 단순히 어떤 정점(定點)으로의 수렴(收斂)을 나타냄이 아니라 무한대(無限大)로의 발산(發散)의 양상을 나타내면서 말이다. 즉 그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를 내려 온 그룹을 플러스(plus), 부정적인 평가를 내려 온 그룹을 마이너스(minus)로 본다면, 그에 대한 양 집단의 평가는 호(好)와 불호(不好) 각각이 극과 극으로 치닫다가 그저 어떤 한계가 보이는 특정 점에 도달한 뒤 이내 정지해버리고 마는 (물론 수학적인 의미에서의 '수렴'은 결코 정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지만) 그런 유한성을 띤 개념이 아니라, 호(好)는 호(好)대로, 또 불호(不好)는 불호(不好)대로 각각 하나는 플러스 무한대로, 다른 하나는 마이너스 무한대로 발산하는 양상을 노정(露呈)시켜 왔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박정희라는 이 고독했던 외경(畏敬)의 인물에 대한 컬트(cult)적 숭배 현상의 강도는 날이 가면 갈수록 증폭, 고조되고 있으며, 이와 동시에 그 반대의 경우, 즉 그의 비판자들의 경우 역시 그에 비례하여 그에 대한 혐오감이 증오의 수준을 상회(上廻)하여 이제는 저주의 수준에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일반적인 박정희 비판자들에게, 그들이 박정희를 지지하는 진영을 논리적으로 무력화시키는 데 원용할 궤변적 논리를 개발해 내는 자들이 특히 명심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이미 고인이 돼 버린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이른 바 '박정희 신드롬'이라는 유행어까지 낳게 하며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과거에 대한 절절한 향수에 젖지 않을 수 없게 만들고 있는 이 독보적인 인물, 박정희에 대한 작금의 컬트적 숭배현상의 내부를 조명해 볼 때, 그를 흠모하고 있는 절대다수 국민들의 의식수준은, 진중권 등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인간 이하 종자들이 연신 지껄여 대고 있는 바처럼 그런 "발달 심리학적으로 아직 자의식(自意識)이 형성되지 못한 상태에 있는 자들" 내지는 "독자적으로는 무슨 일이든 추진을 하지 못하고, 오직 '지도자'를 만나야 비로소 존재를 실현할 수 있다는 생각이 의식의 바탕에 강하게 깔려 있는 자들"과는 전혀 거리가 먼, 매우 지적이고 사려 깊으며 또한 진중한 성격의 소유자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사회적으로 조직(組織)이라는 울타리 속에서 '리더(leader)'의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일수록 그를 이해하고 지지하는 경향이 높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조직의 수장(首長)으로서, 이따금 불현듯 엄습하곤 하는 고독이라는 정서의 무게와, 조직원들의 통솔에 있어 카리스마의 중요성을 그들은 충분히 경험을 통해 인지(認知)하고 있기에, 국가를 경영하는 영도자(領導者)로서의 박정희의 고뇌와 입장을 일반인들보다는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것은 당연지사(當然之事)라 하겠다. 따라서 이 논거 하나로 필자가 앞에 제시한, "자의식 운운..."하는 진중권의 헛소리는 그대로 '덮어 쓰기' 당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어떤 조직이든- 심지어 조직 폭력배들의 '조직'마저도- 일단 그 카테고리(category)의 리더(leader)라고 한다면, 그는 응당 여타의 구성원들에 비해 일반적으로 뛰어난 지적 성숙도(知的 成熟度)를 구비하고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네 무덤에 침을 뱉으마"라는 제목의, 속된 말로 매우 '싸가지' 없는 책을 써 갈겨, 故人을 난도질하려는 자들에게 가당치도 않은 논리를 제공해 온 진중권이라는 자는 남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선 스스로의 그 저열한 자의식의 굴레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더욱 열심히 노력하기 바란다. 물론 희망은 결코 보이지 않는다만 말이다. 또한 진중권, 자네가 박정희를 비난하는 책을 쓴 것까지는 좋다. 이해해 주겠다. 그러나 그 어떤 이유로라도 자네가, 박정희를 흠모하는 절대다수의 국민들까지 비하(卑下)할 권리는 없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아니 좋아하고는 전적으로 그 사람의 자유의지(自由意志)의 영역에 속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앞으로는 두 번 다시 그러한 시건방지기 짝이 없는 작태를 보이지 않기를 바란다. Ⅱ. 문제의 제기- 박정희 비판자들이 명심해야 할 점. 자, 이제 각설(却說)하고, 다시 박정희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박정희는 과연 그의 비판자(批判者)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개발이라는 미명하에 대한민국 국민의 인권을 유린하고 민주주의의 역사를 후퇴시킨 희대의 독재자에 불과했는가? 아니면 전후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진 참담했던 이 땅에 혜성처럼 나타나, 국가의 기틀을 확립하고 당시 상황으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조국 근대화의 위업(偉業)을 달성한 위대한 영웅이었는가? 이렇게 서로 극과 극으로 대립되는 이 두 개의 화두(話頭)는 마치 앞과 뒤를 구별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꼬이고 꼬여, 오직 한 사람의 주위를 에워싸며 끊임없는 이슈(issue)를 확대재생산(擴大再生産)하며 지금까지도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고 있다. 바로 이부터가 그의 거대한 역사적 궤적(軌跡)을 여실히 방증(傍證)하는 실질적인 근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비판자들이 분명히 알아둬야 할 점은 필자가 위에서 이미 강조한 점 이외에도 또 있다. 그것은 현재 박정희를 존경하거나, 존경까지는 못 되더라도 적어도 그에 대한 호감은 지니고 있는 많은 국민들 중에는, 과거 한 때는 그에 대한 맹렬한 비판의 칼날을 서슴없이 휘두르던 많은 지식인들이 대거 포함돼 있고, 또한 종전까지의 비판론자의 견지에서 입장을 선회한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다는 점이다. 즉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느끼고 있는 대다수 우리 국민들은 결코 그의 과오(過誤)를 모른다거나 또는 알면서도 무시하고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라는 말이다. '인혁당 사건' 이나 '실미도 사건' 등 박정희의 18년 철권통치 시대를 거치면서 일어난 많은 비극적 사건들은 엄연히 비난받아 마땅한 박정희의 과오라고 인식하고 있으며, 따라서 비판의 고삐를 결코 늦춰 줄 생각은 전혀 갖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한 지도자를 평가할 때, 아무리 그를 훌륭한 지도자로 인식하고 있다고 해도, 그 지도자의 과오부분에 대해서 만큼은 준열히 질타를 해줄 줄 알아야만 나중에 그 지위에 오를 미래의 지도자들에게도 하나의 경종의 울림을 줄 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박정희의 그 찬란한 업적의 이면에서 아직도 이 땅 어딘가에 어둡고 우울한 음영(陰影)을 드리우고 있는 그의 많은 과오들을 그렇게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흠모하는 국민들이 나날이 급증하고 있는 이 거역할 수 없는 하나의 거대한 움직임, 즉 저 가열 차게 타오르고 있는 '박정희 신드롬'의 불길이 잦아들지 않는 이유는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그러한 과오들을 일거에 상쇄시켜 버리고도 남는, 이 땅 위에 새겨진 그의 위대한 발자취에 있다고 나는 본다. 또한 거기에는 지도자를 평가함에 있어 평면적인 잣대를 적용하지 않고 입체적으로 조명하려는 성숙된 국민의식도 물론 크게 일조했으리라고 사료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이유는 지금껏 그를 따라잡을 만한 걸출한 인물이 나타나지 않았다는 데 있다. 아마도 그것이 가장 정확한 이유일 것이다. 박정희 비판자들은 아마도 이처럼 많은 과오에도 불구하고 박정희가 '존경하는 정치지도자'의 맨 앞줄에 위치하고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은 이유를 무척 궁금히 여겨 왔을 것이다. 박정희 비판자 그룹의 일원인 모 대학 교수 최상천은, 얼마 전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조·중·동으로 상징되는 수구집단의 지속적인 선동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 민중의 삶이 실질적으로 향상되는 실질적 민주화가, 정치적 민주화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 말을 다시 설명하자면 이렇다. 정치적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국민들은 자유롭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하고 또 비판할 수 있는 자유를 얻게 되었지만, 정통성을 갖춘 정권이 몇 차례나 출범했음에도 불구하고, IMF 외환위기와 신용카드 대란 등 일련의 절망적 국가경제상황에 직면하게 되면서 민중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궁핍해졌고, 따라서 그러한 일반 민중들은 자신들이 국가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배신감을 갖게 되면서 '차리리 그 때가 좋았다'는 향수를 갖게 된다는 설명인 것이다. Ⅲ. 문제의 제기- 박정희 비판자들의 의식구조와 내가 이 글을 쓰게 된 동기. 그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20세기 대한민국 현대사의 거인 중의 거인이었던 박정희의 공과(功過)에 대한 평가는 이미 다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대체적인 윤곽이 잡힌 것은 사실이다. 다시 말해 지금 그를 존경한다고 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의 과오는 의도적으로 잊어버리고 특별한 공적 만을 선별해 기억하고 있다거나, 사실과는 완전히 유리된 허설(虛說)이나, 그를 우상화시키기 위해 날조된 그 어떤 허무맹랑한 신화 따위를 근거로 하여 세뇌된 맹목적 광신도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땅의 소위 알량한 민주화 운동권출신 나부랭이들이 대거 포진해 있는 현 집권층은 아직까지도 이미 죽은 고인(故人)을 또다시 죽이지 못해 안달을 하며, 마치 그를 현재까지도 살아서 활약하고 있는 인물인 양 둔갑시켜 끝없이 새로운 소모적 이슈들을 확대재생산하며 나라를 혼란의 구렁텅이로 빠뜨리고 있으니 저런 자들을 과연 인간이라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이에 나는 그러한 저 자들의 실체는 과연 무엇이며, 또한 그렇게 저열하고 야비하기 이를 데 없는 가증스런 작태들을 창피한 줄도 모르고 저렇게 버젓이 자행하고 있을 수 있는 저 자들의 의식구조는 과연 어떠한 메커니즘(mechanism)으로 이루어져 있는가를 철저히 해부함과 동시에, 이에 대한 논리적이면서도 준열한 비판과, 가열찬 각성의 촉구를 통하여, 박정희의 시신을 무자비하게 난도질해 대는 데 이용해 온, 피비린내로 얼룩진 그 더럽고도 비열한 매도의 칼날을 스스로의 반성과 더불어 거두게 함과 동시에, '너희 선친의 일본군 중위 전력은 반민족적 매국행위'이고 '우리 선친의 일본군 헌병오장 전력 또는 만주국 경찰 전력은 불가피했던 한 시대의 비극'이라는 식의 가당 치도 않은 궤변에 기초한, 가증스런 이분법적 구획의 구실을 만들어, 이 나라를 또 다른 형태의 양극단으로 분열시키고, 그러한 끝없는 분열의 조장을 통하여 국민들의 결집을 사전에 차단시켜 버림으로써 자신은 무한대의 어부지리를 얻겠다는 심산으로 광분하고 있는 간계의 달인이자 모략과 음모의 화신인 노무현씨와 그 하수인들에게 일말의 경종이라도 울리고자 하는 뜻과 더불어, 현재 저 간악한 무리들이 이른 바 '친일을 포함한 포괄적 과거사 청산'이라는 거창한 슬로건을 내걸고 마치 자신들만이 정의의 사도인 양 행세하며, 차기대선에서도 이른 바 '재미'를 볼 요량으로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요하게 현혹하려고 안달이 나 있는 주 타깃, 곧 박정희라는 인물을 전혀 모르는 현재 십대 후반의 청소년들과 이십대의 젊은이들에게, 저 사특한 현정권에 결코 기만을 당해서는 아니 된다는 주의를 환기시키고자 하는 의도에서 이 글을 쓰게 되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따라서 나는 이 글에서의 논점을 '박정희 비판의 허와 실'이라는 바로 아래 글의 소제목(小題目)에서 암시하는 바와 마찬가지로 박정희를 비판하는 세력들과의 보다 합리적이고 유익한 논쟁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맹목적인 찬양이나 그들이 비판하고자 하는 고인의 과오에 대해 무조건적인 두둔은 결코 하지 않을 것임을 미리 밝혀 두며, 동시에 되도록이면 제 3자적인 견지에서, 상식과 도리에 입각한 객관적인 논리로써 의견을 개진해 나갈 것임을 아울러 강조해 두고자 한다. Ⅳ. 박정희 비판의 허와 실- 박정희와 김일성의 비교. 박정희... 누구든 20세기를 풍미한 남북의 대표적인 두 지도자를 꼽으라고 한다면, 으레 박정희와 김일성을 꼽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 역시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박정희와 김일성은 개인사적으로나 역사에 남긴 궤적 등 모든 차원에서 비교해 볼 때 극과 극의 상반된 삶을 살다 간 인물들임에 틀림없다. 즉 두 인물은 모두 독재의 형태로 표면화된 통치스타일을 국가운영에의 절대적 방법론으로 삼았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 사람(박정희)은 첨예한 미소 냉전의 대립구도와 그 궤를 같이 해 오던 초긴장의 남북 대치상황의 여파로 결국 북괴의 총탄에 자신의 학같은 아내를 희생시켜야 했고, 그 자신 역시 불과 만 62세의 나이에 심복의 총탄에 의해 비참한 최후를 맞이해야만 했었던 반면에, 나머지 한 사람(김일성)은 겨우 33세의 이른 나이에 정권을 잡아 무려 49년간이나 가히 신(神)의 수준이나 다름없는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제왕적 독재를 해 왔으면서도, 만 82세까지 장수를 누리며 기쁨조에, 온갖 호사(豪奢)는 다 찾아가며 즐기다가 별다른 고통없이 (이른 바 호상으로) 죽었을 뿐 아니라, 최첨단 과학문명과 고도로 발전된 민주정치 시스템이 구 공산권 국가들에도 만개하고 있던 20C 말엽에 감히 자신의 아들에게, 자신이 누려 온 제왕으로서의 권력을 물려주는, 구 봉건세습왕조에서나 볼 수 있었던 그야말로 혀를 내두르지 않을 수 없는 가공할 파렴치의 극한적 작태를 저질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에 대한 사후(死後)의 평가에 있어서 역시, 김일성(金日成)이란 인물은 가히 천복(天福)을 타고 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과도한 대접을 받고 있다. 그러나 박정희는 어떠한가. 그는 비록 나중에 가서 5.16을 일으킬 당시의 그 순수했던 초심(初心)이 변질되어 많은 비난을 받게 되었던 것이 사실이긴 하지만, 적어도 유신(維新)을 단행하기 이전까지는 최소한 민주주의라는 형식적 절차만큼은 존중해 나가려는 태도를 견지해 왔었다. 즉 그 내용이야 어떻든 간에 적어도 형식적으로는 국민 직접선거라는 적법한 절차와 방식을 통해 대통령으로서의 지위적 정통성을 얻으려고 노력했었다는 말이다. 또한 그는 70년대 초반까지도 북한에 뒤지고 있던 한국의 그 허약하기 짝이 없던 경제력을, 그 특유의 불굴의 투지와 명철한 판단력이 한 데 응축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해 그야말로 눈부신 비약적 성장의 상승기류를 타게 함으로써, 이른 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불리는, 세계적으로도 그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자랑스런 역사적 대위업을 달성하는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이 땅의 한 구석에서는 이미 사자(死者)가 된 그의 무덤에 여전히 더러운 가래침을 쉬지 않고 뱉어 댐과 동시에, 한술 더 떠 무덤 속에 있던 故人의 시신을 꺼내 도마 위에 올려 놓고, 저 천하의 악명 높은 새디스트, 알 자르카위를 무색케 할 정도의 잔혹 무도한 난도질에, 유골까지 해머(hammer)로 까 부수는 천인 공노할 만행을 자행하고 있으니 적어도 양식을 지닌 국민이라고 한다면, 이러한 극도로 더럽고 야비하기 짝이 없는 천하의 망발을 보고도 어찌 격분을 하지 않을 수가 있겠으며, "이 무슨 얄궂고도 한심한 운명의 장난인가?"라는 자조 섞인 한탄을 내뱉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그러나 아이러니컬하게도 지금껏 절대다수의 국민들의 마음 속에 신화처럼 남아, 사무치는 그리움의 정서를 유발하고 있는, 이미 전세계가 인정하는 조국근대화의 기수이자 민족중흥의 화신이었던 박정희를, 공적은 모조리 무시하고 한낱 악독한 독재자로서만 매도하려고 혈안이 돼 있는 저 자들은, 정작 가장 맹렬히 비난받아 마땅한 희대의 이기적인 독재자, 김일성과 그의 알량한 황태자 김정일에 대해서는 자못 관대한 태도를 취하는, 정녕 보는 이로 하여금 실소를 금할 수 없게 하는 극심한 이율배반적 모순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이다. 게다가 내가 특히 의문스럽게 생각하는 점은, 바로 이러한 박정희 매도세력, 즉 소위 민주화 운동권 출신을 자처하는 그룹들이 노무현의 집권으로 말미암아, 마치 물 만난 물고기들 마냥 제 세상을 만났다고 기세가 등등해지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한 술도 아니고 몇 십 술을 더 떠, 이미 고인이 된 지 25년이나 된 무덤 속의 박정희를, 하필이면 그것도 자신들의 무능과 무책임으로 인해 경제 사회 전반에 걸쳐 극심한 파탄이 일어나, 범국가적으로 과연 '제 2의 아르헨티나' 꼴이 되느냐, 마느냐 하는 이 절박한 위기상황에 저리들 요란법석을 떨면서, 씹어 대는 데만 광분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더욱이 김영삼 정부부터 계산한다면 이미 그 알량한 민주화 운동 세력이 집권을 하게 된지도 이미 12년이 다 돼 가는 이 시점에 말이다. Ⅴ. "왜 하필 지금인가?" 다시 말해서 필자가 의문을 갖고 있는 내용 중 가장 핵심이 되는 부분이 바로 이 점인 것이다. 여기에는 박정희 비판에 대한 당위성을 부르짖는 행위 자체에 대한 논란도 필요없고, 반대로 박정희에 대한 향수를 자극하는 움직임에 대한 일체의 비난도 개입될 여지가 없다. 지금 노무현 코드가 온갖 구차한 명분을 들먹여 가며 쟁점화시키고 있는 박정희 이슈의 실질적인 핵심이자 양식 있는 국민들의 뇌리 속에 강한 의혹으로 자리잡고 있는 문제의 포인트는 바로 "왜 하필 지금인가?" 에 있는 것이다. 역사적 인물을 존경하고 아니 하고 의 문제는 전적으로 개인의 자유의지에 달려 있다. 따라서 나는 박정희를 비난하는 자들의 그러한 정치적 성향 내지는 소신 자체 만큼은 전적으로 존중해 주고 싶다. 그러나 그럼에도 필자가 바쁜 시간을 쪼개어 이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저들의 '박정희 비난'에는 그러한 순수함이나 진정성은 완전히 결여돼 있고, 이를 어떻게 든 정략적인 쟁점으로 삼아 오로지 자신들의 '철밥통'만을 어떻게든 챙기는 데 이용해 보겠다고 하는, 지극히 가증스럽고도 교활한 저의가 여기저기 드러나고 있다는 데 대한 피가 다 역류할 듯한 격노, 즉 끓어오르는 비분강개(悲憤慷慨)의 발로에 있다 하겠다. 다시 말해 저들의 집요하고도 악랄한 박정희 매도의 저의는, 그것이 자신들의 지극히 정략적인 꼼수를 지지자들에게 알려 결속을 다지기 위한 차원에서 고의로 드러내는 '액션'에서 비롯된 것이든, 아니면 적어도 외견상으로는 마치 이 나라의 온전한 민주주의의 정착을 위해 내건 듯이 보이는 위선적 명분인 '과거사 청산'이라는 대의(大義)에 충실하기 위한 것으로 보이게 하려는 가증스런 간계에서 비롯된 것이든 관계없이 오로지 하나의 근거로 수렴한다. 그 수렴 값은 바로 '열우당 장기집권 음모'의 간특한 계략에 의거한 '박근혜 죽이기'인 것이다. 물론 이러한 기현상이 일어나게 된 데에는 위에서 적시한 바 있는 열우당과 노무현의 간특한 음모이외에도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유가 한 가지 더 있다. 그것은 바로 한반도 저 최남단 마라도에서부터 다시 불어 온 이른 바 '박정희 신드롬'의 돌풍이다. 그렇다면 '박정희 죽이기'와 마찬가지로 '박정희 신드롬은 왜 다시 불거졌는가'를 고찰해보지 않을 수가 없다. 만일 '박정희 신드롬'이 없었다고 한다면, 즉 박정희가 '별 볼일 없는'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애당초 '박정희 죽이기'의 음모도 태동하지 않았을 테니 말이다. Ⅵ. '박정희 신드롬'의 태동(胎動)에 대하여. 자, 그렇다면 타임머신을 타고 한 번 과거로 되돌아가 보자. 1979년 10월 26일, 자신과 평생을 함께 했던 고향후배이자 충실한 심복이었던 김재규의 총에 죽임을 당한 박정희는, 기실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은 국민들에게 부정적인 인물로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이는 박정희 사후 등장한, '하나회'를 주축으로 하는 신군부 세력의 리더였던 전두환이 12.12 쿠데타로 정권을 찬탈한 이후, 박정희의 후광(後光)을 입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통행금지 해제 등 일련의 규제완화 정책을 단행하여 독재정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름대로 박정희 정권과는 차별화된 정권이라는 점을 부각시키려 부단히 애를 썼다는 점도 물론 일부 이유로서 작용한 게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런 이유보다는, 상당수의 그러한 생각을 지니고 있던 국민들 스스로가, 과거의 암울했던 그의 시대를 두번 다시는 기억하고 싶어하지 않았다는 데 주된 이유가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본다. 다시 말해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했을 당시, 많은 국민들은 오열 속에 그를 보내긴 했지만, 기실 누구도 그의 시대로의 복귀를 원하지 않았던 건 결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적어도 그 당시 상황에서는 그랬었다. 따라서 진정한 민주주의라는 것은 단 한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우리 국민들은, 적어도 5.17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당연히 민주주의의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을 기대하고 있었고, 그를 흘러간 과거의 인물로서만 기억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좋든 싫든, 이 땅에서 일세를 풍미하며 조국 근대화의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혁명가로서 많은 국민들의 뇌리 속에 각인돼 있었던 독재자가 사라지자, 그가 정권을 잡았던 방법과 동일한 방법, 즉 군사쿠데타라는 수단을 동원해 '새로운 독재자'인 전두환이 등장하였다. Ⅶ. 역대 대통령의 통치 성적표- 전두환과 노태우 위에서도 이미 언급했듯이, 전두환이란 인물은 처음에 일견 박정희의 재판(再版)으로 인식되었던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박정희와는 카리스마적 통치술이라는 공통점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면에서 판이하게 다른, 사악하고 탐욕스런 독재자로서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했고, 한 때 박정희의 양자라고까지 불리며 주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으며 출세가도를 달려왔음에도 불구하고, 배은망덕하게도 집권하고 난 뒤부터는 그를 추앙한다거나 그의 업적을 부각시키려는 노력은커녕 되레 그를 은근히 폄하하거나 그와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데만 급급해 했다. 전두환 정권은 헌법에서 5·16 혁명 정신을 삭제하였고, 공화당 실세들을 권력형 비리 혐의로 숙청시키면서 박정희의 시기를 부정과 부패, 그리고 비리의 온상이었던 시기로 규정하는 반면, 자신들은 '정의사회 구현'을 추구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것은 전두환 자신이 자신의 집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련의 조치 중 하나였음은 불문가지다. 그러므로 5.17 을 기점으로 하여 1980년대는 바야흐로 새로운 암흑기가 도래하는 양상을 띠게 되었고, 국민일각에서는 박정희보다 더한 전두환의 독재를 못마땅히 여기면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이 일어났을 무렵에는 "그래도 전두환에 비하면 박정희는 신사였다"라는 말을 공공연히 내뱉는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당시의 우리 국민들의 의식 속에 벌써부터 '박정희의 향수'가 지금처럼 맹렬한 기세로 일어났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왜냐하면 최소한 그 때까지만 해도 순수한 민주주의의 정신에 입각하여 적법한 방식과 절차에 의해 탄생된, 소위 '문민정부'라고 하는 새로운 정치시스템의 참신성에 대한 선험적 기대감이 우리 국민들의 마음 속에 강하게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대적 조류 속에서 결과적으로 오늘날의 가열찬 '박정희 신드롬'을 야기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세력은 아이러니컬하게도 그를 그토록 악랄하게 매도하며 자신들의 도덕적 우위를 내세워 오던 이른 바 '반독재 민주화 운동 세력'이었다. 1980년대 초반부터 반(反)독재투쟁의 선두에 섰던 학생운동 및 재야 세력들은 강력한 투쟁으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했고, 결국엔 1987년 6월 항쟁을 통해 대통령 직선제를 쟁취해냈다. 그러면서 그 해 연말에 실시된 대선에서 노태우가 그 직선제라는 민주적 절차를 통해 정권을 잡게 된다. 그러나 이른 바 '물태우'라는 지극히 불명예스러운 별명에서도 우리가 짐작할 수 있듯이 노태우는 자신의 그 우유부단하고 소신없는, 지도자로서의 치명적인 성격적 결함을 끝내 극복하지 못하고 무수히 많은 실정을 노정시킴으로써 국민의 원성을 사는 그야말로 불명예스런 대통령으로 역사에 남게 된다. 그러던 와중에 1980년대 말 김종필 등 구시대의 인물들이 다시 정치권에 복귀하기 시작하는 것을 계기로 한 동안 잠시 잊혀져 있던 박정희는 점차 국민들의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나기 시작한다. 이는 당시의 여론 조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1989년 10월25일 10·26 10돌을 맞아 20세 이상의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결과에 따르면, 61%가 과오보다는 공적이 많았다고 응답한 반면, 과오가 더 많았다는 쪽은 13.7%에 불과했다. 그보다 한 달 앞선 한국갤럽조사연구소의 조사결과도 역시 "박정희의 18년 집권이 우리 역사에 미친 유익성은"이란 질문에 "아주 유익했다"는 응답자가 26.1%,"약간 유익했다"는 응답자가 40%로서 "유익했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전체의 과반수를 훨씬 상회하고도 남는 66.1%로 나타났다. 이는 박정희의 사망 직후와 달리 박정희가 긍정적으로 인식되고 있음을 보여 준다. 박정희는 사후 국민들로부터 잠시 잊혀져 있었지만, 박정희 정권보다 더한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적 통치와 부정·비리·부패를 바탕으로 부활하였다는 점을 시사해주는 좋은 자료라 할 만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적어도 노태우가 퇴임할 무렵까지만 해도, 박정희에 대한 향수가 지금처럼 거센 불길로 치솟아 오르지는 않았었다. 진정한 문민정부의 탄생은 아직까지 도래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믿는 국민적 정서가 여전히 팽배해 있었기 때문이다. 많은 박정희 비판론자들은 왜 박정희의 긍정적 측면만 기억을 하고, '레드 컴플렉스(Red Complex)'에 의해 움츠러든 국민들에게 박정희 정권이 조작해 낸 수많은 정치적 사건들, 특히 인권과 민주주의를 짓밟은 범죄적 행태 등이 노정시킨 부정적 측면은 망각하느냐고 항의하곤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경향을 더욱 가속화시킨 것은 역설적이게도 박정희의 말년에 그의 독재와 대결하여 '민주화의 기수'라는 상징성을 획득했던 김영삼과 김대중이었다. Ⅷ. 역대 대통령의 통치 성적표- 김영삼과 김대중 김영삼은 정권 획득을 위해 3당 합당을 감행하는 등 독재정권의 후예들과 손을 잡았지만, 초기 개혁정책으로 인해 90%를 상회하는 최고의 인기를 얻었었다. 그러나 수구세력들의 반격으로 인한 개혁의 실패, 정권의 도덕성에 상처를 주었던 김현철 게이트 등 일련의 사건들,'역사 바로 세우기'라는 역전극의 참담한 실패, 그리고 결정적으로 IMF관리체제로의 돌입이라는 경제위기의 야기로 인해 김영삼은 끝내 몰락하고야 만다. 이어서 '준비된 대통령'임을 자처하며 새로이 들어선 김대중 정부는 또한 어떠했는가? 외환위기가 발생하자 김대중 정부는 황급히 IMF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총체적 경제위기를 막기 위해 외환보유 부족에 대한 대책마련에 부심하게 된다. 다행히 환란은 가까스로 진화가 되었으나 국민 대다수가 당시에 체감했듯, 결과적으로 금리가 18% 대에서 최대 25% 대까지 폭등하게 되었고 게다가 설상가상으로 <조달금리상승 + 인플레이션>현상이 발생하게 됨으로써 금융권의 마비현상까지 초래하게 된다. 이에 따라 김대중 정부는 서둘러 화폐를 회수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인플레이션은 잠시 잠잠해지는 듯 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불경기가 이어지면서 경기침체의 골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그러던 와중에 김대중은 특단의 조치로써 경기부양을 유도하기 위해 카드사를 활용하게 되었다. 주지하다시피 본시 카드란 그 동안 일정소득이 보장되는 사람에게만 그 개별적인 신용도를 감안해 신중히 발급해 왔던 것인데, 궁지에 몰린 DJ 정부의 졸속정책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길거리에서까지 모집이 가능하도록 규제를 대폭 완화해 주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는 금융감독원 및 재경부 그리고 정부부처까지 깊이 관여했다. 그 결과 경기부양의 목적은 일단 달성하긴 했으나, 거기에는 거대한 후 폭풍이 기다리고 있었다. 사용한도를 지나치게 확대한 결과 '연체' 및 '신용불량'이라는 덤까지 국민이 몽땅 뒤집어 쓰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카드사들의 잘못도 한몫을 단단히 한 것은 사실이다. <카드 장당 수수료 + 성과급>이 몇 십만원씩 하다보니 카드 모집인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게 되었고 따라서 대상을 가리지 않고 마구잡이로 발급을 승인해 주는 한심하기 짝이 없는 작태들이 도처에서 연일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빈번히 일어나게 된 것이다. 이처럼 경제력이 없는 사람들의 연체가 빈발하게 되면서 카드사들은 당연히 채권회수를 하지 못하게 되었고, 바로 이것이 추후 '카드대란'이라는 엄청난 사회 경제적 파장을 몰고 온 결정적 원인이 된 것이며 이는 김대중의 최대의 실정 중 하나로 남는 대 사건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가계부채 500조원, 신용불량자 남발 400만. 김대중-진념의 신용카드 소비촉진책은 결국 신용불량자 남발로 끝났던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비밀리에 국민의 혈세 5억불을 불법으로 조달해 김정일의 입에 갖다 처넣은 천인 공노할 대북송금 사건을 야기한 장본인이 바로 김대중이 아닌가? 하지만 이 사건이 일어나게 된 배경과 주된 이유에 대한 설명은 필자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한 바 있고, 또한 지금은 주지의 사실이나 다름이 없으므로 여기선 생략한다. 김대중이 저지른 여러 과오들 중에 우리 국민들이 가장 분노하고 있으며 또한 절대로 영원히 용서할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꽃다운 우리 해군장병들의 목숨을 앗아간 서해교전에 대한 그의, 국가원수라는 막중한 당시의 지위를 고려할 때, 가히 직무유기에 해당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무책임, 무관심으로 일관해 왔던 그의 잔인함이다. 기실 1차 서해교전 때 북한은 한국군에게 망신을 당했고 북한과 김대중은 북한 해군의 열세를 처음 알게 되어 매우 당황했다고 한다. 이에 김정일은 보복을 해서 명예를 회복한다는 계획에 따라 2차 서해 교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데 이미 남침의 징후가 포착되었음에도 김대중 정권은 보고를 묵살하고 위기에 처한 우리 해군함정을 그대로 방치했으며, 해군의 월등한 전투 능력에도 불구하고 김대중과 좌익계 군부들은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음에도 반격을 못하게 했다. 당시 언론에서는 이 사건의 원인을 군부의 태만한 작전 때문이라 보도했으나 내부 사정은 결코 그게 아니었다. 결국 전몰 해군장병들은 결과적으로 김대중과 좌파 군부실세들이 북한에게 승리를 안겨주기 위해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는 국민적 의혹의 굴레에서 영원히 자유롭지 못한 신세가 돼 버린 것이다. 어디 그 뿐인가! 민주투사 만델라에 대한 치졸한 시기심의 발로였을 듯 싶은 DJ의 노벨상에 대한 노욕(老慾)은 결국 대북 불법송금비리를 야기했고, 그 비리의 주역인 DJ와 그 하수인들은 그 가공할 범죄의 책임을 면피하기 위한 손쉬운 바람막이 정도로 이용하려고 망집과 교만으로 똘똘 뭉친 한 용렬한 인간을 권좌에 앉혔으니, 그가 바로 노무현이다. Ⅸ. 역대 대통령의 통치 성적표- 노무현 솔직히 말해서 필자는 지금껏 김대중이라는 인물을 매우 혐오해 온 게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집권 당시 단 한 번이라도 그에 대한 비판의 글을 인터넷에 올린다거나, 그를 비난하는 일체의 발언을, 가까운 벗들과 함께 하는 자리를 제외한 그 어떤 경우에도 결코 해본 일이 없다. 어쨌든 그는 적어도 저 가증스런 궤변의 달인 노무현처럼 그저 입만 살아 한몫 보려고 하는 그런 저급한 부류의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나는 그래도 김대중씨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인정은 해주고 있었던 것이다. 보다 쉽게 말하자면 김대중씨가 아무리 여러 실정을 저질렀어도 그래도 저 노무현씨보다는 훨씬 낫다는 뜻이다. 그러나 노무현의 경우는 그 양상이 완전히 다르다. 나는 물론 대선 때 그를 지지하진 않았지만, 과거 5공 청문회 이후 국민 일반에게 남아 있던 그의 비교적 긍정적인 이미지 때문이었는지는 몰라도, 적어도 그가 대선이 종료되고 당선자로 남아 있던 당시까지만 해도, 결과야 어찌 됐든 간에 이왕에 노무현씨가 대권을 잡았으니 그가 국민 앞에 약속한 바대로 선정을 펼쳐 나감으로써 조국의 번영에 기여하고 역사에 훌륭한 대통령으로 기록될 수 있기만을 바랐었다. 진심으로 말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취임한 직후부터 그 스스로 국민 앞에 노골적으로 드러내 보이기 시작한, 그 수를 일일이 다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일련의, 전혀 일국의 지도자답지 못한 저급한 언동과 기회주의적인 간교한 행태들은, 국민들의 그러한 소박한 기대를 무참히 꺽고 참담한 배신감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게다가 그는 능력과 자질, 그리고 전문성을 최우선의 자격요건으로 고려해야 할 주요 국가기관의 요직마다, 그러한 필수적 자격요건은 모조리 무시한 채, 오로지 자신과 소위 '코드'가 맞느냐, 안 맞느냐 라는 지극히 편협하기 이를 데 없는 기준만을 적용, 구 재야 운동권 출신의 좌파적 성향이 농후한 자들만 골라 배치하는 전횡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면서 자신에게 정당한 비판을 가하는 신문사들은 모조리 싸잡아 소위 '찌라시'로 매도하면서, 그저 언어도단적인 아부성 저질기사 쓰기로 일관하는 언론만이 마치 참된 민주언론인 양 호도해 대는 등 그 자신이야말로 지극히 반민주적이고 제왕적 사고에 젖어 있는 모순된 인간임을 스스로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았다. 그 중에서도 특히 조선일보(朝鮮日報)에 대한 盧 정권의 탄압은 과거 군사정권의 동아일보(東亞日報)에 대한 탄압보다 훨씬 더 야비하고 잔인하다. 군사정권이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 및 보안사 등 막강한 실세를 자랑하던 권력기관들을 총동원해 자행했던 언론탄압은 대다수 국민의 반발을 샀다는 점에서 어찌보면 오히려 순진한 면이 있었다. 하지만 노무현은 자신의 교활한 선동전술에 의해 철저히 오도된 일부국민들을 교묘히 선동, 일개 언론사를 완전히 고사(枯死)시켜 버리겠다는 악랄한 음모를 획책하면서 자신의 홍위병들로 하여금 끊임없이 이의 실행을 종용하고 있는 것이다. 비열한 '여론독재'의 전형이라 하겠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지금 국가경제가 파탄일로로 치달으면서 극심한 생활고로 인해 자살의 길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서민들이 연일 수십명을 상회하고 있는데도, 명색이 대통령이라는 자의 얼굴에서는 일말의 동정의 기색도 추호의 연민의 정도 찾아 볼 수가 없고 오로지 코드식구들과 희희낙락거리며 연일 샴페인이나 터뜨리며 샥스핀 파티에나 열중하고 있으니 어찌 이런 파렴치한 짓거리들을 목도한 국민들이 격분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그의 방약무인한 연기의 진수를 보여 주는, "내가 대통령인데 니들이 뭔 참견이냐?"라는 제목의 도저히 눈 뜨고는 봐줄 수 없는 이 천박하기 이를 데 없는 저질 드라마는 물론 여기서 그치지를 않는다. 국민에게 채널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는 5년 짜리 장편 드라마이기 때문이다. 헌정사상 초유의 대통령 탄핵소추 사건을, 그것도 미필적 고의(未必的 故意)의 의사(意思)로 야기해, 막대한 국력낭비를 초래한 중대한 과오에 대해서도 그는 국가원수로서 반성은 고사하고 또다시 극단적 이분법으로 국민을 이간질해 댈 구실은 어디 또 없는가 하고 마치 썩은 고기를 찾아 다니는 하이에나처럼 그의 시선은 늘 그렇게 본 궤도를 벗어나 그 주변의 미로를 겉돌고 있다. 즉 지도자로서 늘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마치 올림픽 결승의 무대에 오른 궁사와도 같이, 그런 진지한 마음자세로 호흡을 가다듬으며 결코 한 순간도 시선을 흩뜨리지 말고 굳건히 겨냥하고 있어야 할 국정의 핵심 타깃은 우습게 내던져 버리고, 그저 자기자신과 자신의 코드종자들만을 위해 어떻게든지 국가를 분열시키고 국민을 이간질해 댐으로써 거기서 얻어지는 반사이득, 곧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재미보기"에만 혈안이 돼 있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는 일이겠는가 이 말이다. 대통령이 국가를 운영해 나감에 있어 맹목적인 권위주의에만 의존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러운 일이라고 볼 수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리더십의 필수불가결의 구성요소인 '권위'라는 덕목까지 폄훼하거나 배격하려 들면 안된다. 왜냐하면 지도자의 말은 곧 국정의 지표가 되는 바, 이의 원활한 실행을 위해서는 필히 그 말에는 령(令)이 제대로 서 있어야 하고, 그 령(令)이 올바로 서 있을 수 있도록 하는 데에는 바로, 듣는 이로 하여금 그 말에서 나오는 진중함의 무게를 느낄 수 있게 하는 힘, 곧 경건한 카리스마를 필요로 한다. 한데 바로 이 카리스마를 제공하는 근본적 동인이 바로 '권위'인 것이다. 이렇듯 '권위'는 지도자의 필수 덕목이지만 결코 아무나 그런 자질을 가질 수는 없다. 그만한 인품과 식견을 가진 자라야만 구비가 가능한 것이다. 盧統이 줄곧 왜 그토록 '탈권위'를 강조해 왔겠는가? 그것은 바로 자신에게 권위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수평적 리더십'을 떠들며 링컨, 드골 등 세계적 지도자들과 자신을 감히 동일시하려 드는 행태도 다 자신의 그런 열등감을 숨기기 위한 자기방어기제의 발현일 뿐이다. 자, 이렇게 박정희 시대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 노정되어 온 여러 국가 지도자들의 발자취와 각각의 면면을 재조명해 보았다. 지금 노태우나 전두환 시절에 대한 향수에 젖거나 김영삼이나 김대중을 두고 위대한 지도자 운운하며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말하는 국민은 거의 없다. 그러나 박정희라는 인물은 유독 그가 사망한 지 어느덧 25주년이 다가오고 있는 이 시점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인구에 회자되며 사상 초유의 강력한 신드롬까지 유발하는 기염을 토하고 있다. 이것이 시사하는 바는 과연 무엇이겠는가? 해답은 자명하다. 바로 박정희의 사후 그 누구도, 결코 그를 뛰어넘어 보거나 적어도 그의 발 뒤꿈치 수준에라도 도달해 본 지도자가 전무(全無)하기 때문이다. 이른 바 '타는 목마름'으로 갈구해 왔던 그 '민주화'가 이 땅에 실현되면서 찾아 온, 무려 3회에 달하는 문민정권의 시대를 겪으면서 우리 국민은, 세상의 '정의'란 정의는 모두 자신들만의 전유물인 양 거들먹거리며 기고만장해 있던 그 민주투사라는 자들의, 과거 군사정권 시절보다도 더 더럽고 사악한 온갖 부정과 부패를 직접 목도하게 되면서, 거기서 받은 충격과 배신감에 치를 떨지 않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결국, 비록 독재자라는 오명을 써 오기는 했지만, 대한민국 현대사에 거대한 발자취를 남긴, 그 누구도 결코 부인할 수 없는 거인, '박정희'라는 인물에 대한 향수에 빠져 들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직접적인 동기가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분명한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결과적으로 '박정희 신드롬'을 불러 일으킨 장본인들이 바로 지금 이 순간에도 고인(故人)을 부관참시하지 못해 안달이 나 있는 바로 '민주화 운동권 세력'이니 말이다. 물론 여기에는 재야 운동권 세력들로 구성된 일련의 정권들의 그러한 도덕적 헤게모니의 상실 이외에도, 알량한 좌파 편향정책으로 말미암은 국가 정체성의 혼란 야기 및 사회불안 요인의 급증, 그리고 그에 따른 국가신인도의 하락으로 이어지는 경제의 파탄 양상도 크게 일조했다고 사료된다. 다시 말해 민주화 운동권 세력들의 3회나 연속되는 집권 이후에 나타난 연이은 실정(失政)과 부패, 도덕성 실추, 경제적 실패 등의 참담한 성적표는 바로 박정희의 강력한 리더십, 청렴성, 자기 희생, 경제성장의 업적들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기폭제가 되어 준 것이니 이는 자업자득이나 다를 바 없다는 이야기다. Ⅹ. 박정희 비판자들이 주로 내세우는 문제제기에 대한 반론. 그런데 여기에서 박정희 비판자들은 또 하나의 의문을 갖게 될 것이다. 독자제위의 이해를 돕기 위해 그들이 즐겨 쓰는 표현방식을 빌려 표현하자면 아마도 "왜 일반 국민들은 이렇게 보수세력들의 담론에 급격히 포섭되고 있는가?" 하는 물음 쯤 될 것이다. 물론 빠트릴 수 없는 감초 '조중동'을 물고 들어 가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에 대한 해답은 적어도 현재의 시점에서는 조중동과는 큰 관계가 없다. 그 해답은 위에서 상술한 바 있듯이, 이른 바 문민정부 출범 이후 모든 국가 지도자들이 박정희 시대에 공유되었던 지배적인 통치원리들의 집합체로서의 '박정희식 개발독재 패러다임'을 대체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인 것이다. 다시 말해 1990년대의 한국사회가 탈군부독재 및 민주화 정권창출과정에서 민주주의의 새로운 기반 구축에 실패했고, 변화하는 국제 경쟁체제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면서 자본·노동 간의 갈등을 조정하는 새로운 경제운용방식을 개발하지 못했으며, 성장 및 반공 이데올로기와 결합된 박정희식 민족주의를 대체할 대안적 이데올로기를 개발해 내지 못했다는 데 그 주된 원인이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박정희의 비판자들이 마치 전가의 보도처럼 늘 내세우고 있는 주장이 있다. 이에 대해서도 나는 그 해답을 시원하게 미리 내려 주고자 한다. 우선 그 주장의 요지를 정리하면 이렇다. "박정희의 지지도가 높은 또다른 이유는, 21세기를 살고 있는 사람들 중 대부분은 박정희 시대를 정확히 기억하거나 또는 알지 못하면서 막연히 향수에 빠져 있다는 점과 연관이 깊으며, 이는 현재 우리 국민 중 30대 이하는 박정희 시대를 경험하지 못한 채, 오로지 보수세력에 의해 주조된 '훌륭한' 박정희 시대를 학교교육과 언론(조중동)- 물론 요즘 '중앙일보'는 이 카르텔에서 제외돼야 마땅하다 하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조동'이라고 하면 익숙하게 들리지 않을 것 같기에 그대로 '조중동'을 고수한 것임을 밝혀 둔다.- 을 통해 습득한 것일 뿐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그 시대의 민주주의와 인권 파괴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고 단지 그 시대의 경제발전이 한국을 선진국으로 만들었다는 측면만이 중요할 뿐이다. 왜냐하면 학교교육은 당시 한민족의 가장 중요한 과제가 경제발전이라고 가르쳤을 뿐 아니라, 현실도 돈 또는 경제가 이상(理想)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박정희 비판자들이 지금껏 주장해 온 여타의 논리들에 대해서는, 비록 공감까지는 표명해 줄 수 없더라도 적어도 이해해 주려는 노력, 즉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는 관용적 태도는 늘 가져 왔던 사람이다. 따라서 그러한 일련의 문제제기들에 대해서 별달리 큰 거부감 따위는 갖지 않았었다. 대한민국은 자유 민주주의 이념을 표방하는 국가이고, 따라서 대한민국 국민에게는 사상의 자유와 더불어 자신의 견해를 자유롭게 표현할 권리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논리는 실로 이율배반적인 위선적 저의가 내포된 가증스런 궤변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황당무계한 주장을 볼 때는 화가 나는 게 사실이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은 이렇다. 먼저 박정희 신드롬의 원인이 배금주의 내지는 물질만능주의를 조장해 온 학교교육 및 언론의 보도태도와 맞물려 있다는 말인데, 나는 이 일고의 가치도 없는 주장에 대해 이렇게 일갈하고자 한다. 우선 우리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이 민주주의의 환경은 바로 역설적이게도 박정희 비판자들이 말하는 바로 그 '박정희식 개발독재의 선물'이라는 점이다. 작가 잭 트레이븐이 멕시코 금광에서 겪은 자신의 절절한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쓴 소설을 거장 존 휴스턴이 감독한 동명(同名)의 영화 '시에라 마드레의 보물(The Treasure of The Sierra Madre)'을 보면 물질이 극도로 궁핍할 때 인간은 과연 얼마나 추악하게 일그러질 수 있으며, 또한 그런 극한적 빈곤의 상황이 인간을 얼마나 잔혹하고 야비하게 만들 수 있는가를 여실히 보여 준다. 자, 생각을 해 보라. 전후 극도로 피폐해진 이 척박하기 이를 데 없었던 반도의 남쪽, 남은 것이라곤 찢어질 듯이 처절한 가난의 고통과 폐허 뿐이었던 이 서럽고 비참했던 한국 땅에 박정희라는 독보적 인물이 나타나 획기적인 경제발전을 이룩해 놓지 않았다고 한다면, 과연 지금쯤 우리가 이렇게 안락한 환경에서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을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민주주의의 발전은 경제의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다. 아울러 나는 이 논리에 내포돼 있는 그 발칙함의 저의에 또한 분노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박정희를 흠모하는 절대다수의 국민들을 그저 돈밖에 모르는 몰지각한 배금주의자 내지는 물신주의에 경도된 부르주아병 환자 쯤으로 규정하려는 간악한 저의다. 정당한 노력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그렇게 축적된 부의 일부를 사회의 그늘진 곳에 나눠 주며 '더불어 살아가는 삶의 소중한 가치'를 실천하며 사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이 사회에도 의외로 많으며 또한 그런 삶을 통해 자본주의의 폐해는 점차 경감되게 되는 것이다. 한데 위와 같은 주장에 따르자면 결국 민주주의도 실패할 수 밖에 없고, 경제발전은 아예 꿈도 꿀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또 박정희 비판론자들이 자주 내뱉는 말인 "'한강의 기적'은 박정희가 아니라, 산업현장의 여공들의 손으로 이루어진 것이므로 결과적으로 그가 없었어도 '한강의 기적'은 일어났을 것이다" 에 대해서도 한마디 하겠다. 이 역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할 때 실질적으로 그 일을 하는 것은 바로 양손이다. 따라서 머리는,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러나 머리가 없이 손만 가지고는 어떤 일도 완성할 수가 없다. 이와 마찬가지의 논리로 박정희라는 특출한 리더가 없었다고 한다면 과연 그 빈곤국에서 '성장중심의 정책'을 펼쳐 나갈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강한 리더십이 만약 없었다고 한다면 대한민국은 국민소득 100불의 문턱도 넘기 전에 벌써부터 극심한 노사분규가 야기되어 허구한 날 파업이니, 뭐니 하며 데모나 해대는 국민들의 등쌀에 경제발전은 고사하고 아예 나라는 이미 거덜이 나고야 말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명약관화한 일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요즘 박정희를 매도하는 '노무현 코드'의 태도가 그 도를 넘어 아예 인간 이하의 극도로 치사하고 야비한 작태로 표면화되고 있어 격분을 금할 길이 없기에 이 점에 대해 한마디 더 부언하고자 한다. 지금 노무현 코드는 일치단결하여 박정희 전 대통령을, 속된 표현을 빌리자면 무슨 여자에 '환장한' '색마' 쯤 되는 인물로 자칫 오인되게 할 소지가 높은 극도로 저열하고 또 비열하기 이를 데 없는 마타도어를 획책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의 여자문제가 여론의 도마에 오른 결정적 계기는 정인숙사건과 10.26이다. 그러나 "정인숙이 받은 씨가 누구의 것인가?" 하는 세인의 의혹은 이미 종결된 지 오래이며, 그 결과 박정희는 그 의혹에서 자유로워졌다. 그의 씨가 아닌 것으로 판명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10.26 당시 궁정동의 만찬에 심모 가수와 여대생 호스티스가 그의 곁에서 술시중을 든 것을 두고 본격적으로 그의 여성편력이 불거져 나오게 되었는데 필자의 개인적 견해는 이렇다. 10.26 이후 김재규는 자신의 평생의 은인이자 주군이었던 박정희를 시해하고 법정에 서게 된다. 그 때 누구보다도 그의 마음에 걸렸을 인물들은 아무 것도 모르고 자기조직의 수장이 지시하는 명령에 따랐다가 졸지에 사형을 당할 위기에 처한 박선호 대령 및 박흥주 중령을 위시로 한 자기부하들이다. 따라서 그는 자신의 범죄를 어떻게든지 합리화하고 그 당위를 확보하기 위해 혈안이 된 나머지 시해의 목적을 무슨 가당치도 않은 "민주주의를 위하여 야수의 심정으로 독재의 심장을 쏘았다"라고 둘러대다가 그게 잘 안 통한다 싶었는지 나름대로 히든 카드라고 여기며 꺼내 든 구차한 변명의 구실이 바로 박정희의 여자문제였던 것이다. 자, 그런 상황에서 그들이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하는 절박한 심정에서 한 증언만을 가지고 그를 그렇게 매도하는 것이 과연 올바른 자세인가를 나는 그들에게 묻고 싶다. 그리고 이 문제는 필자 역시 같은 남자의 입장에서 보다 화끈하고 솔직한 변론을 하고자 한다. 즉 설령 김재규를 위시로 한 당시 중정의 '채홍사'라 불리던 자들에 의해 박통의 만찬자리에 불려갔던 여자 연예인들이 다수 있었다고 해도, 당시 부인과 사별하여 극도의 외로움을 느끼고 있었을 고인이 자신의 술자리에 술시중을 드는 여성들을 좀 앉혔다고 해서 그게 그렇게 죽일 죄가 되는 것인지 묻고 싶다는 말이다. 물론 이 점만큼은 분명히 해 둔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그러한 태도가 결코 옳았다고 주장할 마음은 나 역시 추호도 없다. 만일 그가 그런 점에 있어서도 마치 베트남의 구국의 영웅 호지명이나 인도의 성자 마하트마 간디처럼 그렇게 철저히 금욕주의를 실천한 청렴 결백한 인물이었다고 한다면 금상첨화였을 것이라는 생각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그런 치사한 방법으로 트집을 잡아 고인의 모든 위업까지 싸잡아 매도해서는 안 된다. 미국을 보라. 클린턴은 별명부터가 '미스터 지퍼(Mr. Zipper)'였다. 그의 르윈스키 등과의 섹스 스캔들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 되었지만 적어도 미국인들 중에 그런 이유 때문에 클린턴을 매도하는 이들은 없을 뿐 아니라, 그의 재임 중의 여러 업적들이 그런 이유로 인해 영향을 받지도 않으며 여전히 그의 인기는 높다. 케네디는 또 어떤가? 미국인들이 가장 존경하는 대통령으로 늘 다섯 손가락 안에 꼽곤 하는 존 F 케네디는 한마디로 말해 '설명이 필요없는 희대의 플레이 보이'였었다. 마릴린 먼로를 비롯하여 그의 스캔들 리스트에 끼지 못한 여배우들은 오히려 마음을 졸였다는 웃지 못할 일설도 있다. '비판'이야 말 할 것도 없고, 설령 그것이 '비난'이라고 하더라도 거기에도 다 격(格)이라는 게 있는 것이다. 그렇기에 필자는 물론 노무현 대통령을 극도로 혐오해 온 사람이긴 하지만, 그를 비판하는 데서 한층 수위를 높여 설령 비난을 하게 되는 경우에 있어서도 그의 이중성이나 간특한 꼼수 등으로 범위를 제한한 상태에서만 집중적으로 질타를 해 왔지 결코 위와 같은 치사한 문제- 예를 들면 인터넷에서 오래 전부터 나돌고 있는 노무현씨와 모 여인과 관련한 루머- 에 해당하는 그 어떤 루머에 대해서도 일절 거론해 본 일이 없다. 필자는 보수적 성향을 지닌 국민의 한 사람임에는 틀림없지만 기실 어떤 특정 이념으로 구획된 정형화된 카테고리로의 편입은 결단코 원하지 않는 입장을 견지해 왔다. 다시 말해서 정치적으로 보혁(保革)의 어느 쪽이든지 간에 잘못하는 정책에 대해서는 준열히 비판하고, 또 어느 쪽이든 바람직한 정책을 추진하는 쪽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지지를 보내는 것이 옳다는 신념을 지녀 온 사람이다. 단 그 둘 모두가 추진하는 정책에 진정성이 담보돼 있을 때에 한해서 말이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정희 논쟁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의 입장을 고수해 왔다. 비판은 좋으나 그 비판에 과연 얼마 만큼의 진정성이 담보돼 있느냐가 중요하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판단할 때 작금의 노무현 코드의 박정희 비판의 의도는 자못 그 저의를 의심치 않을 수가 없다. 바로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고인의 그런 개인적 프라이버시에 관한 부분까지 지금 이 시점에 와서 물고 늘어지며 들먹이고 있는 걸 보니 필자는 이런 의구심을 갖지 않을 수가 없다. 현재 열우당의 지상목표는 필자가 일전에 100자 평에서도 여러 차례 강조한 바 있듯이 '열우당 장기집권 음모'의 순조로운 진행과 이의 실현이다. 얼마 전에 있었던 열우당의 '선거 연령 하향조정 입법추진' 및 '신행정수도 특별법 추진' 강행 등 일련의 역동적인 액션들은 다 이러한 음모를 실현하기 위한 사전포석이었다고 나는 본다. 따라서 위에서 내가 비판한 바와 같은 치사하고 비열한 방법의 고인 흠집내기 전략의 저의는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판단할 때 자명해 진다. 그것은 필시 차기대선을 겨냥, 현재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십대 후반에서 이십대에 이르는 청소년 및 청년 층을 주된 타깃으로 하여 박정희에 대한 극도의 반감을 조장해 표심을 쓸어 모아보겠다고 하는 지극히 발칙하고 야비한 간계의 발로임에 틀림이 없는 것이다. ⅩⅠ. 結語 박정희는 정치인이기 이전에 혁명가였다. 비록 쿠데타라는 불법적 방법을 동원했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혁명으로서의 보편 타당한 당위적 권능을 등에 업지 않았다는 이유를 들어 혹자는 그의 5.16을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진정한 의미의 혁명이라고는 볼 수 없지 않은가?" 라는 회의론을 종종 제기하곤 하지만, 그럼에도 박정희시대는 역사학적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창조의 시대였던 동시에 사회과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확실한 변혁의 시기였음에 틀림없다. 따라서 5.16은 적어도 결과론적으로 볼 때는 분명 혁명으로서의 가치를 당당히 지니는 국가 혁신의 일대 시발점이었던 것이다. 또한 박정희는 정치권력의 획득만을 목적으로 하는 통념상의 정치인이 아니라 사회의 개혁과 경제의 부흥을 목적으로 스스로의 목숨을 걸고 5.16이라는 거사를 일으킨 혁명가라는 사실을 우리는 망각해서는 안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그에 대한 평가가 극과극의 상반된 결과로 표출되고 있는 데에는,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아직도 그를 단순히 정치인의 잣대로써만 평가하려 드는 그룹과 그를 혁명가로 보는 그룹 간에 노정된 인식의 괴리현상이 일조(一助)한 측면도 없지 않다고 사료된다. 박정희를 존경해 온 국민들이라고 하여 그들이 결코 그의 모든 것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아니다. 박정희에게도 물론 과오가 있었고, 또한 그가 인간적 약점도 적지 않게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많은 국민들이 여전히 그를 존경하며 그에게서 때로 진한 연민의 정마저 느끼게 되는 또다른 중요한 이유는, 결코 그의 인생이 행복하지 못했으며 그는 조국을 위해 정녕 자신 뿐 아니라 자신의 가정마저 포기한 살신성인의 인물이었다는 점에 대한 뒤늦은 지각(知覺)에 있다. 만일 운명의 신이 우리 앞에 나타나 "박정희의 운명과 지금 자신의 운명을 맞바꿀 수 있겠는가?"라고 묻는다면 '좋다'고 응답할 사람은 결코 많지 않을 것이다. 그만큼 그의 일생은 지극히 파란만장했고 또한 매우 불행했던 비극적 개인사(個人史)였던 것이다. 박정희는 조국 근대화의 일념을 실현하기 위해 전력 투구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사랑하는 아내를 잃었고 그 자신의 목숨마저 부하의 총탄에 잃어야 했다. 주지하다시피 그에게는 손(孫)이 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자녀들 역시 불행했던 박정희가(朴正熙家)의 희생자들인 것이다. 어린 나이에 자신이 사랑하는 부모가 모두 총탄에 맞아 죽은 처참한 모습을 목도해야만 했던 근혜, 근영, 지만 삼남매 역시 조국 근대화 과정에서의 가엾은 희생자였던 것이다. 이전의 글에서도 필자가 강조한 바가 있지만 역사에 가정법이란 없다. 그리고 세상은 허울만 그럴 듯한 이상론만 가지고는 해결되지 않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바로 태초부터 우주의 본원적 모순으로 인류역사와 함께 해 온 혼돈(Chaos)의 법칙 때문이라고 본다. 혼돈은 예측을 불가능하게 하며 인과율의 법칙을 보기 좋게 배반한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 아침운동을 하려고 헬스클럽에 가던 어떤 사람이, 아무리 완벽하게 자신의 건강을 체크하며 장수에 대비를 한다고 해도, 대구 지하철 참사의 주인공과 같이 아무 이유도 없이 불특정 다수를 살해할 범행의도를 지닌 자와 같은 지하철에 탔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게 어이없는 죽음을 당하게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혼돈이다. 또한 혼돈은 때로 모순의 양립을 초래하여 사회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리기도 한다. 그러나 박정희는 이미 이러한 혼돈의 본질과 모순으로 점철된 세상의 한계를 냉철하게 꿰뚫어 보고 있었던 선각자요 일급의 지식인이었다. 그래서 그는 스스로 불행한 군인의 길을 걷기로 결심하고 선의(善意)의 악역(惡役)을 자임했던 것이다. 결국 그는 그 때까지 그 누구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했던, 오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지긋지긋한 이 땅의 가난을 몰아내고 조국을 근대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독재자라는 오명을 쓰고 심복의 총탄에 장렬히 쓰러졌다. 그는 결국 조국 근대화의 위업을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스로 살신성인(殺身成仁)의 길을 걸어간 위대한 순교자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죽음을 맞이하는 최후의 순간까지 결코 위대한 지도자로서의 의연한 풍모를 잃지 않았다. 그의 마지막 일성(一聲)인 "나는 괜찮다!"는 어찌 보면, 원로원에서 최후를 맞으면서 시저가 남긴 마지막 한마디, "부르투스, 너 마저도..." 보다도 더 품격 높은 것이었다. 그것은 지금 필자의 귓전에 마치 이런 뜻으로 들려오는 듯하다. "나는 이렇게 비참한 모습으로 세상을 떠나지만, 그래도 나는 최선을 다했기에 만족하노라, 나의 조국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라고... 박정희 대통령을 비난하는 모든 자들이여, 그대들에게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이제는 그를 고이 보내 드려야 할 때임을 명심하길 바란다. 존경하는 박정희 대통령 각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이 세상 그 어떤 지도자보다도 위대하셨습니다. 노여움 푸시고, 이제 안녕히 가십시오! 출처: http://blog.chosun.com/blog.screen?blogId=13793&menuId=5154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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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시사논객의 토론자료실 원문보기 글쓴이: 시사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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