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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3장 1~10절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오늘 읽은 말씀 중에서 9절을 다시 읽겠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시는 장면입니다. 이 말씀을 하시기까지의 배경을 길게 설명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께 범죄했습니다. 범죄한 인간은 하나님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만 합니다. “하나님, 제가 죄를 범했습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하나님이 아름다운 동산을 저에게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가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당부하신 그 선악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고 하시던 그 선악과를 제 마음대로 따 먹었습니다. 아버지, 제가 이렇게 죄를 범했습니다. 저 같은 사람이 감히 용서를 받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간청했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서 달아났습니다.
이때 하나님이 아담을 찾아오셨습니다. 죄를 범한 사람이 하나님을 찾아온 것이 아니고 오히려 하나님이 죄인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하나님, 어디 계십니까?” 한 것이 아니라 “죄인아,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입니다.
아담 이후로부터 지금까지 죄인이 먼저 자기의 하나님을 찾았다는 예는 한 번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죄인을 찾아 오셔야만 했습니다. 양이 갈 길을 잃었습니다. 길 잃어버린 양은 위대한 목자가 찾지 않고는 자기 우리에 돌아갈 길이 없습니다. 요한복음 10장 14~15절에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일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보리노라” 말씀하십니다. 죄는 인간이 범하고 가슴 아파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인간이 범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범죄한 것을 알게 되는 것은 인간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입니다.
오늘 본문은 인간의 마음이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나갔음을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을 멀리 피하고 그분과 더불어 교제를 나누려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죄를 범하면 사람이 어리석어집니다. 벌거벗은 몸을 무화과나무의 잎으로 가리려 했으니 이게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7절) 나무 뒤에서 숨어서 하나님을 피하려 했으니 미친 일이 아닙니까?(8절) 하나님은 모르심이 없으십니다. 그러나 죄를 범하는 사람의 공통된 생각은 하나님이 모르실 줄 알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도 아담의 어리석음을 그대고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양심에 가책을 받는 죄도 숨겨진 것으로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기보다 인간의 안목을 더 두려워하고 있을 때가 있습니다. 사실 이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습니다. 잠언 29장 25절에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말씀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범죄한 인간을 찾아오셨습니다. 언제요? “날이 서늘할 때”라고 했습니다. 어두울 때 공포를 주기 위하여 밤에 찾아오신 것이 아닙니다. 불타는 분노로 찾아오신 것으로 오해할 것 같아 뜨거운 대낮에 찾아오신 것도 아닙니다. 급하게 벌하시려는 인상을 피하기 위해서 이른 아침에 찾아오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담을 찾으신 것은 하루가 끝나는 저녁 “날이 저물어 선들바람이 불 때 야훼 하나님께서 동산을 거니시는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는 야훼 하나님 눈에 뜨이지 않게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8절, 공동번역) 하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자비하신 하나님입니다. 범죄한 아담은 자기 친구와 이야기하듯이 그토록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던 하나님을 피해 달아나려 했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된 것입니다. 9절에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아담은 죄를 범하므로 잃어버림을 당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이 아담에게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것은 자기의 잃어버린 양을 찾는 목자의 음성입니다. 이것은 자기를 멀리 떠난 아들을 찾는 아버지의 부르짖음입니다. 범죄한 인간은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자비의 음성입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은 범죄한 그대로 내버려두었을 것입니다. 찾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사람들도 자기가 귀하게 여기지 않는 것은 찾지도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인간을 잃어버리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요한복음 13장 1절에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하십니다. 하나님은 지금 잃어버린 영혼을 찾으실 뿐 아니라 그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셨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인류를 멸망시키려고 작정하셨다면 “네가 여기 있었구나. 이 배반자, 반역자, 내 벌을 받아라. 네 앞에 음부가 있으니 너는 영원히 음부에 삼킨바 되리라”고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을 보호하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조용하고 부드러운 음성으로 찾으셨습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네가 어디 있느냐?”(9절) 짧은 물음이지만 여기에는 깊은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1. 우리의 무딘 심령을 깨우치는 질문입니다.
죄는 우리의 심령을 무디게 합니다. 그래서 죄를 범하면 범죄하기전보다도 자기의 위험을 느끼는 것이 둔해집니다. 죄는 고통 없이 양심을 죽이는 독약입니다. 사람이 죄를 범하면 그 심령이 둔해지고 마비가 되고 결국은 죄로 인해 심령이 죽습니다. 훌륭한 왕이었던 다윗이 죄를 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심각한 죄인지 몰랐습니다. 그 심령이 죄로 말미암아 둔감해져서 그랬습니다.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아담으로 하여금 생각의 여지를 주고자 한 것입니다. 이것은 “지금 너 자신을 보아라. 지금 너는 하나님 앞에서 벌거벗은 자요, 네 창조주 하나님이 계시는 것을 두려워하는 비참한 피조물이 되지 아니했느냐?”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너는 하나님을 잃어버렸어. 평화도 잃어버렸어. 기쁨도 행복도 잃어버렸어.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하고 찾으시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의 양심이 정죄하고 있는데 아직도 죄를 회개하지 아니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신 분은 안 계십니까? 여러분의 양심이 평안하십니까? 피조물이 자기의 창조자가 무서워 벌벌 떨고 있는 이 가련한 상태가 옳은 일일까요? 우리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하여 창조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기뻐하기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렇지 못한 위치에 놓여 있습니다.
인간이 계속 고집을 부리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화를 발하실 것입니다. 시편 7편 12절에 있는 말씀대로 “사람이 회개치 아니하면 저가 그 칼을 갈으심이여 그 활을 이미 당기어 예비하셨도다” 하였습니다. 칼을 가시는 하나님, 활을 이미 당기어 놓기만 하면 화살이 목표한 죄인을 향하여 날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시간 기도합니다.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가 어디 있는지 알게 도와주시옵소서. 인간의 눈을 열어 주시옵소서. 하나님의 물으심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잠에서 깨어나게 하여 주옵소서.”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어디에 계십니까? 지금은 여기 있으나 떠나가는 인생입니다. 이 주일에는 세상에 계시지만 다음 주일에는 다른 세상에 가 계실는지 모릅니다. 죄를 용서받지 못한 채 계신다면 그것처럼 불쌍한 것은 없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하는 하나님의 질문 듣고 깨어 일어납시다.
2. 이 질문은 우리의 죄를 깨닫게 합니다.
아담의 마음이 올바른 상태에 있었다고 하면 그는 자기의 죄를 온전히 자백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숨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을 하시는 하나님의 심정을 우리가 이해할 수 있을까요? 요한일서 1장 9~10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이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뱀은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처럼 된다고 하였는데 과연 그렇게 되었습니까?(5절) 천사의 옷을 입기는커녕 벌거벗은 몸이 되었습니다. 영광은 고사하고 수치만 당했습니다. 죄는 우리에게 위대하게 만든다고 말하지만 죄가 우리에게 해 준 것이 무엇입니까? 술은 우리에게 이상한 쾌감을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술 취한 후에 얻은 것이 무엇입니까? 남몰래 은밀한 죄를 범하는 분이시여,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그 즐거움은 신맛이 나고 모든 기쁨은 독이 들었습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죄를 알게 할뿐만 아니라 “네가 어떻게 그런 자리에 오게 되었느냐?”고 묻는 것처럼 들립니다. 아담은 자기가 그렇게 된 것이 하와 때문에, 하와는 그렇게 된 것이 뱀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내가 이렇게 된 것이 나 자신 때문이지 다른 사람의 잘못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자신의 선택을 자꾸만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리고 자신은 하나님 앞에 서지 않으려고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주셔서 죄를 범하는 것까지는 자유입니다. 따라서 내가 책임을 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의 죄를 깨우치고 회개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랍니다.
3. “네가 어디 있느냐?” 하신 것은 하나님의 슬픔을 표현한 말씀입니다.
“동산에서 늘 만나 이야기를 나누던 아담이 이제는 하나님을 피해서 숨었습니다. 전에는 네가 행복하더니 지금은 네가 어디 있느냐? 벌거벗고, 가난하고, 비참한 사람이 되었구나. 너는 영원불멸의 나의 형상을 지녔었는데 불쌍한 아담아, 지금 네가 어디 있느냐? 나의 형상이 네 안에서 일그러져 버렸고 이제는 마귀적인 존재가 되어 버리고 말았구나.”
하나님의 심정은 매우 아팠습니다. 부모가 거역하는 자식 때문에 가슴아파하듯이 영원하신 우리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고 부르짖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마음이 너무너무 아파하십니다. 에스겔 33장 11절에 “주 여호와의 말이니라 나의 삶을 두고 맹세하노니 나는 악인이 죽는 것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악인이 그의 길에서 돌이켜서 떠나 사는 것을 기뻐하노라 이스라엘 족속아 돌이키고 돌이키라 너희 악한 길에서 떠나라 어찌 죽고자 하느냐?”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 같습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이 슬피 울부짖음이 우리의 심령 골수에 파고 들어가 회개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탕자처럼 말해야 합니다. 누가복음 15장 18~19절에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여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얻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치 못하겠나이다”라고 말입니다. 하나님 아버지는 우리가 아직 저 멀리 있을 때에도 죄인된 우리를 보십니다. 여기 자비의 눈길로 보십니다. 자비의 팔로 우리를 안아 주십니다. 사랑으로 입맞추십니다. 누가복음 15장 22~23절에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말씀하십니다. 자비의 말씀이 있습니다. 새 옷을 우리에게 입히십니다. 놀라운 자비입니다.
마귀는 우리에게 찾아와서 말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죄를 용서함이 없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거짓말입니다. 에덴동산 나무 사이에 울려 퍼지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세요. “아담아,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느냐?”입니다.
4. 이것은 찾으시는 음성입니다.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내가 너를 찾으러 왔다. 네가 어디 있는지 내가 찾으러 왔어.” 하는 뜻이 있는 말씀입니다. “내 사랑의 눈으로 너를 발견할 때까지 나는 너를 찾겠다. 내 사랑의 손이 네게 미치기까지 나는 너를 찾겠다. 내가 너와 화해하기까지 나는 너를 계속 부르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찾으러 나오셔서 우리를 찾고야 마실 것입니다. 요한복음 12장 47절에서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지라도 내가 그를 심판하지 아니하리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다.”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이 아무리 죄를 범하고 하나님을 멀리 떠나 하나님의 간섭이 없이 내 마음대로 사는 줄 알아도 실상은 하나님께서 우리 곁에 계셨고 다스려 주셨음을 알게 되는 때가 올 것입니다.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 나는 너를 찾으러 왔노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 죄인된 인간과 하나님과의 대화가 있습니다. “하나님, 나는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너를 찾으러 왔어. 내가 너를 위해 모든 것을 행했어.” “하나님, 나는 율법에 위협 당하고 공의가 나를 미워합니다.” “그래서 내 율법의 공포를 해결하고 공의의 진노를 감당하기 위해서 왔어.” “그러나 하나님, 나는 회개할 수도 없는 처지에 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너를 찾아 왔어. 네게 회개와 사죄를 주기 위해서 보좌에 올라갔어.”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이렇게까지 나쁜 놈인 것을 모르실 것입니다.” “내가 다 알고 있어.” “그러나 하나님, 나는 죄인의 괴수였습니다.” “아니, 네가 비록 어디에 있든지 나는 너를 구원하러 왔어.‘ “그러나 하나님, 저는 사회에서 버림받은 사람입니다.” “걱정하지 마, 나는 이스라엘의 버림받은 자를 모으러 왔어.” 누구나 자기의 죄를 의식하고 있는 사람은 그 자리에서 떠나게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그 자리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회복시켜 주시고 하나님의 자녀된 삶을 살아가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은 은혜 받을 때요 지금은 구원의 날입니다. 하나님은 지금 우리가 어디 있는지 알도록 해 주시려 하십니다. “네가 어디 있느냐?” 사랑의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이제 우리의 할일은 “하나님, 제가 여기 있습니다.” 하고 있는 그대로 나서는 것입니다. 이때 하나님은 우리를 어린 양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 피로 우리의 더렵혀진 예복을 씻어 주시고, 어린 양 예수와 더불어 영원한 생명의 길에 서도록 축복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출처: 한국강해설교연구원 원문보기 글쓴이: 열려라 하늘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