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후손을 위하여 만나를 간수함
출 16:31-36
31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32 모세가 이르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령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
33 또 모세가 아론에게 이르되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
34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그것을 증거판 앞에 두어 간수하게 하였고
35 사람이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 자손이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 곧 가나안 땅 접경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만나를 먹었더라
36 오멜은 십분의 일 에바이더라
출 16:31-36 / [만나에 관한 그 다음 이야기] 이스라엘 사람은 하늘에서 내린 양식을 ㄱ) 만나라고 이름지어 불렀다. 그것은 고수씨 같이 생겼는데 희고 맛은 꿀을 섞어 만든 과자와 같았다. (ㄱ. 히. 만-`무엇이냐'라는 뜻이다) 32) 모세가 말하였다. `다음은 여호와께서 명령하신 것이다. `이 만나를 한오멜 가득 담아 잘 보관해 두어라. 그리하여 너희 후손이 대대로 이것을 보고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이끌어 낼 때 광야에서 먹인 먹거리인 것을 알게 하도록 하여라.' 33) 모세는 또 아론에게 말하였다. `항아리를 가져다가 만나 한 오멜을 담아 대대로 여호와 앞에 두어 잘 보관하도록 하십시오.' 34) 아론은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만나를 증거판 앞에 보관하도록 하였다. 35) 이스라엘 사람들은 정착지에 다다르기까지 40년 동안 떠돌아다니면서 만나를 먹었다. 36) 한 오멜은 10분의 1에바이다.
하나님께서 항아리 하나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대대로 간수하라고 명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광야생활을 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하여 내려주신 하늘양식을 그 후손들에게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만나라고 하였으며(31)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준 양식을 ‘만나’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이 처음 만나를 보았을 때, “이것이 무엇이냐”(만 후)라고 물었던 것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만나는 상상 속의 양식이 아니라 실제 이스라엘 백성이 먹어본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그 맛도 꿀 섞은 과자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자녀들에게 좋은 것으로 공급해주시는 좋으신 아버지입니다.
너희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32-34) 하나님께서 만나 한 오멜의 분량을 항아리에 담아서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을 위해 보관할 것을 명하셨고, 아론이 명령하신 대로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앞에 두어 보관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만나를 실제 눈으로 보지 못한 이스라엘 백성의 후손들에게 나중에 조상들이 광야에서 먹었던 양식을 보여줌으로써,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어떻게 먹이시고 공급하셨는지를 알게 하기 위함입니다. 즉, 만나를 후손의 신앙 교육의 자료로 사용하기 위함입니다. 이처럼 하나님께서 중하게 여기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입니다. 그러므로 코로나 상황이라할지라도 교회는 다음 세대의 신앙 교육에 힘써야 하며 부모들 역시 자손들의 신앙 교육을 위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이 공급해주셨던 은혜의 체험을 간증하며 신앙 전수에 힘써야 합니다.
사십 년 동안 만나를 먹었으니(35-36)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공급하신 기간은 40년입니다. 실제적으로는 출애굽 후 한 달 하루가 지난 2월 16일부터 만나가 내리기 시작하여, 가나안 땅의 소산을 먹은 다음 날인 출애굽 41년 1월 15일에 그쳤으므로 정확히 39년 11개월 동안 만나를 먹은 것입니다(수 5:10-12).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만나를 주신 근본 이유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는 것입니다(신 8:3). 그러므로 하나님의 백성은 늘 겸손한 마음으로 하나님의 공급하심과 하나님의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야 합니다.
적용: 지금까지 신앙생활 하면서 “이것은 정말 하나님이 하신 일이다”라고 당당히 말할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이 얼마나 있습니까? 그 신앙의 체험을 자녀들과 손주들에게 들려주어 당신의 신앙이 다음 세대에 전수되기에 힘쓰시길 바랍니다.
“기억하라”(Remember) 성경에서 많이 자주 나오는 하나님의 언어입니다. 무엇을 기억하란 것인가요. 하나님께서 건져주시고 복 주신 과거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수많은 위기를 돌파한 과거의 경험들이 오늘의 어려움을 극복하는 힘이 되기 때문입니다. 홍해를 갈라 주신 하나님, 애굽 병거들과 기병들을 몰살시키며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호해 주신 하나님, 만나와 메추라기로 광야에서도 먹여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라는 것입니다. 과거는 오늘을 위한 좋은 스승입니다.
< 설 교 >
감추어진 만나
출 16:31-36 / 정기남 목사
인류의 종말이 가까워질수록 우린 무엇이 필요합니까?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시급합니다. 특히 우린 작은 책을 요구하여 받아먹어야 한다. 우리는 작은 책에 대해서 최대의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작은 책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할 그러한 때에 우리가 살고 있다. 작은 책은 천사의 손에 들려져 있는데, 이것을 달라고 간절하게 간청하는 사람만이 받는다고 했다. 마지막 때에 작은 책은 남김없이 먹고 소화시켜야 할 책인데, 이 책을 먹을 때는 입에서는 꿀같이 달고 맛이 있다. 이것을 달다고 했다. 그러나 받아먹고 나니, 너무도 써서 이것을 좋아하는 자들이 많지 않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작은 책을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이 적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작은 책은 달라고 간청하는 사람만이 받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말씀을 사모하고 달라고 간청해서 받아먹어야 합니다. 적극성을 가지고 달라고 간청하고 받아서 배우고 그 말씀을 먹고 소화시켜야 한다. 특히 오늘 이 만나를 통해서 말세에 대한 계시의 복음을 먹을 것인데, 이를 위하여 기도하는 마음으로 영적으로 깨어 있어서 말씀을 받아야 하겠습니다.
◎출16:31‘이스라엘 집이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부르니, 고수풀 씨앗 같으며, 하얗고, 그것의 맛은 꿀 섞은 전병 같더라’ 개=‘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더라’고 했다. 만나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었던 양식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빵(요6:48~50), 예수님을 가리킨다. 만나를 성경에 찾아보면 이렇습니다.
① 민11:7‘만나는 마치 고수풀 씨(깟씨)같고, 그 색깔은 마치 델리엄(진주) 색깔과 같은지라’고 했다.(깟씨와 같고 진주같은 만나)
② 출16:14‘깔린 이슬이 없어지고는, 보라, 광야의 지면에 작고 둥근 것이 놓였는데, 마치 땅 위 의 흰 서리같이 미세하더라’(이슬이 마른 후에 내린 만나)
③ 출16:31‘하얗고, 그것의 맛은 꿀 섞은 전병(과자)같더라’(하얗고 꿀 섞은 전병 같은 만나)
④ 계2:17‘감추어진 만나’
⑤ 출16:4‘하늘로부터 양식을 비처럼 내리리니’(비처럼 내려진 양식, 신비의 음식, 참으로 만나 는 신비로운 음식이다)
본문 33절에서‘항아리 속에 감추어둔 만나’를 볼 수 있다. 이방인의 우상 제물은 신전에서나 시장에서 식당을 경영하는데서 또는 길거리 노점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며, 아무나 먹을 수 있다. 그리고 그 음식을 팔기도 합니다.(고전 10:25‘고기시장에서 파는 것은 무엇이나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그런데 이 만나는 지성소 안 법궤 속에 감추어져 있었다(히9:4‘만나를 담은 금 항아리’ 출16:33‘항아리 속에 만나’)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품속에 영원 전부터 감추어진 만나인데 유대인들의 눈에는 지금까지 감추어져 있는 비밀이다. (눅19:42‘너의 눈에서 감추어졌느니라’ 골2:3‘그의 안에는 모든 지혜와 지식의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만나는 히=‘이것이 만나다’(출16:15에‘이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함이라’하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 백성들이 40년 동안 광야에서 먹었던 하늘의 양식으로 이것은 신약시대에 오실 예수님을 상징한다. ☆ 요6:48~51까지 읽음, =‘나는 그 생명의 빵이라. 너희의 조상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고, 죽었으나, 이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빵이니, 그것을 먹는 자는 죽지 아니하리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누구든지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또 내가 줄 이 빵은 세상의 생명을 위하여 줄 나의 살이라’고 하시니라. 아-맨
성경에 만나에 대해서 여러 모양으로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지식을 계시하여 줍니다. 생명의 빵,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생명을 위한 나의 살이라고 말씀하셨다. 또한 내 살은 참된 양식이라고 했다(6:55), 또한 참된 빵(6:32)이라고 하셨다. 또한 하늘 양식(시78:24)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영적 양식이라고(고전10:4)했다. 하늘에서 내린 만나를 거두어서 먹게 한 양식(출16:16)이다.
Ⅰ.하늘로부터 비같이 내린 양식(만나)
비처럼 내리신 만나는 (봄, 씨 부리는 복음 전파시대). 출16:4‘그때에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보라, 내가 하늘로부터 양식을 비처럼 내리리니, 백성들은 나가서 매일 일정한 양을 거둘 것이요, 이로써 나는 그들이 내 법대로 행하는지 행하지 않는지 시험하리라”고 했다. 하늘로부터 양식을 비처럼 내려 주셨다.
신32:2‘나의 가르침이 비처럼 내릴 것이요,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힐 것이며, 연한 풀잎 위에 이슬비 같고 풀밭에 소나기 같으리로다’고 했다. 여기서 비의 종류는 네 가지이다. ① 나의 가르침이 비처럼 내릴 것이요, ② 내 말은 이슬처럼 맺힐 것이며, ③ 연한 풀잎 위에 이슬비 같고, ④ 풀밭에 소나기 같으리로다,고 했다. 여기서 내리는 비, 맺히는 이슬, 풀잎 위에 이슬, 소나기 등이 있다. 비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칩니다. 생명의 말씀, 영생의 말씀이요, 교훈의 말씀을 상징합니다.
비가 내리지 않으면 그 어떤 식물도 살지 못하고 죽습니다. 아합 왕 시대에 바알 우상 숭배 때문에 3년 6개월 동안 비가 내리지 않았다. 여러분! 우상을 섬기는 곳에는 비가 내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옥토에 내리는 단비와도 같다. 그래서 30배 60배 100배로 자라게 하는 봄비이다.
신8:3,마4:4‘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을 너로 알게 하심이니라’고 하셨다. 이 말씀은 비같이 내리는 하나님의 영원한 교훈의 말씀입니다. 이 교훈은 이른 봄에 내리는 단비처럼 우리들의 마음 밭을 촉촉하게 적시어 주십니다. 이슬이나 비가 오지 않으면 땅이 황폐하게 되며, 결국 쓸모없는 땅이 되고 맙니다.
Ⅱ.밤에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
‘이슬이 밤에 진영에 내릴 때에 만나도 그 위에 내렸더라’(민11:9절).밤에 내린 이슬은 여름을 의미한다. 여름은‘恩惠時代’를 상징하는데, 이슬이 밤에 내릴 때에 만나도 같이 내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만나는 민11:4-9에서‘고수풀 씨(깟씨)같고, 그 색깔은 마치 데리엄(진주)색깔과 같은 것이라 여기서 매우 중요한 것을 발견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는“혼혈의 무리가 있다.(출12:38), 이들은 잡족들이다. 잡족들의 씨는 이집트인들을 가리킨다. 이들은 유월절도 없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서 온 자들이다. 이들이 광야에 나와서 탐욕을 품고 원망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집트에 있을 때 거저먹었던 생선과, 오이와, 멜론과, 부추와 양파와 마늘을 먹고 정욕이 넘쳤는데, 이제는 우리의 혼이 말라 버리고 우리의 눈앞에는 만나밖에 아무것도 없구나, 하고 원망합니다. 위에서 말씀한 야채는 모두가 여름에 나는 음식이요, 이것은 이집트 산이다. 이것은 육신의 정욕제이다. 그러니까 광야에는 야채류가 있을리 없다. 만나 외에는 없다. 만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영의 양식인 동시에 그것은 영력제에 속한다. 이집트의 양식은 파라오의 신전의 우상 제물이다. 광야의 양식은 하늘로부터 내려온 생명의 빵, 예수님이었다.
유월절이 없는 혼혈족 이집트인들에게 있어서 만나는 감추어진 비밀이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원망은 하나님의 비밀을 알지 못할 때 생기는 것이다. 오늘 본문 출16:31에 보면‘만나의 모양을 보여주고 있는데, 고수풀 씨앗 같으며, 하얗고, 그것의 맛은 꿀 섞은 전병 같더라’고 했다. 그런데 이 만나를 백성들은 거두어서 맷돌에 갈기도 하고, 또는 절구에 찧기도 하고, 또는 가마솥에 삶았다. 이렇게 해서 과자를 만들었고, 그 맛이 기름섞은 과자 맛 같다고 했다. 이 만나는 밤에 이슬이 진영에 내릴 때에 함께 내렸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말하기를 만나는 하얗고 광야에 내릴 때 그것을 손으로 거두었다고 했습니다. 이슬은 여름에 내리는데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을 본 자는 아무도 없다, 이와 같이 하나님이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신 道成人身의 秘密을 아는 자는 아무도 없다. 예수님은 죄악의 깊은 밤, 아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神秘의 이슬로 이 땅에 내려오신 생명의 빵이십니다. 그런데 이 만나를 맷돌에 갈고, 절구통에 찧고, 가마솥에 삶았다는 것은 우리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 주 예수께서 인류 대속을 위한 수난 과정을 보여 주는 동시에 기름섞은 과자 맛은 죄 없는 성결의 미를 말해 주는 것입니다.
특히 만나를 맷돌에 갈았다는 것은 무엇을 말해주는가?
만나가 맷돌에서 갈아져 가루되는 것은 첫째, 깨어지는 단계를 말한다. 맷돌에서 가루가 되는 것은 깨어져야 한다. 그래서 고분 가루가 된다.
다음으로 절구통에 찧는다는 것은 연단의 단계이다. 이 연단의 과정을 통해서 껍질이 벗겨지듯이 형식과 외식이 제거되는 것을 말한다. 또한 가마솥에 삶는다는 것은 완숙한 단계를 말한다. 펄펄 끓는 솥에 푹 익혀야 한다. 여기서 맷돌, 절구통, 가마 등은 모두가 여자가 사용하는 기구들이다. 우리는 교회를 통하여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의 과정을 연수함으로서 그리스도의 완성된 인격을 형성하게 된다는 것을 가리켜 주고 있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생명의 빵을 먹는 자들은 이집트의 모든 생각을 깨뜨리지 않고는 안 된다. 완전히 세상의 생각을 깨뜨려야 한다. 자아를 철저하게 깨뜨리고 가루가 되어야 한다. 이것을 깨뜨리고 가루가 되기 위해서는 멧돌이 필요하다. 이 맷돌속에 들어가서 갈아지고 절구통속에 들어가서 계속해서 찧고 다져져서 부추,파, 마늘, 오이, 생선같은 = 4 =
본래적인 인간의 독하고 더러운 죄의 냄새가 제거되면서 형식과 외식의 본능적인 포장이 벗겨지는 것이다. 이렇게 더럽고 냄새난 겉포장이 벗겨져야 한다. 철저히 독한 죄의 외식이 박살나고 벗겨져 야 한다. 그렇다고 완성된 그리스도인의 인격으로 변화된 것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100도로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서 내가 철저히 삶아져야 한다. 그때서야 완숙된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단에게 한번 미혹된 자들은 그들이 주장하는 잘못된 교리를 버리지 않고 그 교리가 맞는 것처럼 주장한다. 그러므로 하늘에서 내려온 참된 빵이신 예수님의 참된 진리는 그들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만나가 되어버린다.
계2:17에서 발람과 니콜라당의 교훈을 이기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하고 맙니다. 그러나 주께서 그들에게 기회를 다시 주었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계속해서 기회가 주어지고 있다. 그리므로 기회가 주어졌을 때 다시한번 깨어지고 가루가 되고, 다져져서 가마에 삶아지고, 그래서 기름섞은 과자 맛을 낼 때에 그것을 먹을 수만 있다면 감추어진 만나를 주시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Ⅲ.이슬이 제거된 후 내린 만나
‘깔린 이슬이 없어지고는, 보라, 광야의 지면에 작고 둥근 것이 놓였는데, 마치 땅 위의 흰 서리같이 미세하더라’(출16:14). 내린 이슬이 없어지고 작고 둥근 만나가 내렸다. 여기서 말한 작고 둥근 만나, 이슬이 마른 후에 내린 이 만나는 가을에 내린 만나요, 가을은 환난시대를 의미한다.(환난시대의 만나는 작고 둥글고 흰 서리같이 미세한 만나이다.) 이슬은 여름에 많이 내리지만 서리는 가을에 내린다. 특히 늦가을에 내린다. 여기서 마른 후에 내린 만나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슬이 마른 후라는 것은‘이 땅에서 은혜시대가 끝이나고, 환난시대를 말하고 있다. 은혜시대 즉 여름이 지난후, 가을 추수기가 되는데, 이때에 내린 만나는 작고 둥굴고 흰 서리같이 미세하다고 했습니다.(16:14).
여기서 작다는 것은 인자 예수님을, 작은 책의 진리를 말한다(계10:10), 그리고 둥글다는 것은? 無始無終한 永遠한 福音(계14:6)을 말하고, 또한 흰 서리같이 미세하다는 것은 선지자 예수님을 상징하고, 예언의 말씀을 상징한다(왕상19:12).
Ⅳ.장막에 있는 자를 위한 양식(만나)
장악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한 양식은(예비처 시대를 말한다). 출16:16‘이것이 주께서 명령하신 것이니 각 사람은 자기의 식량에 따라 거두라. 즉 너희 가족의 식량에 따라 거두라. 즉 너희 가족의 수에 따라 각 사람이 한 오멜씩 거두되 너희 각 사람은 장막 안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도 거두라’하셨느니라, 하더라. 장막 안에 있는 양식을 취하려고 했다. 예수님은 영원한 우리의 처소요, 하늘에 있는 장막이다(시90:1), 그리고 예수님은 우리가 있을 하늘 처소를 예비하러 가셨습니다. 그 처소가 마련되면 다시 오시는데 그때 우리를 그곳으로 영접하리라고 말씀하시었다(요14:2~3)
이스라엘 광야생활은 일시적으로 장막에 우거하는 생활이었다. 카나안에 안착하기까지 구름기둥, 불기둥을 따라서 쉴새없이 이동해야 했다. 우리는 이 세상 나그네 길, 천국 가는 순례자이다.
대환난이 오면 하나님이 예비하신 광야 예비처로 도망가서 그곳에 숨어야 한다(계12:6). 그때는 온 세상이 666 짐승의 표 없이는 아무도 양식을 구할 수 없고 짐승 우상에게 경배하지 않는 자는 몇이든지 죽임을 당하는 때이다(계13:15~18). 이슬이 마른 후, 광야지면에 작고 둥글며 서리같이 미세한 만나는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해서 취한 것과 같이 은혜시대가 끝난 후에는 두 증인이 증거하는 진리의 작은 책인 영원한 복음, 예언의 말씀을 들어야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예비처 성도를 위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미리 간직해 두신 양식이다. 이스라엘의 광야 길을 인도했던 구름기둥, 불기둥은 마지막 때에 나타날 두 증인의 모형이기도 합니다.
Ⅴ.해가 뜨거워지면 녹은 만나
해가 뜨거워지면 만나는 녹았다.(심판시대)를 가리킨다. 출16:21‘그들이 매일 아침 그것을 거두되, 각 사람이 자기의 식량을 거두고, 해가 뜨거워지면 그것이 녹더라’고 했다.
⑴ 이스라엘 자손들이 거둔 것이 많기도 하고, 적기도 하였으나, 오멜로 되어 본즉 많이 거둔 자도 남음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각기 식량대로 거둔 것이다.‘그들이 오멜로 되어 보니, 많이 거둔 자도 남은 것이 없고, 적게 거둔 자도 부족함이 없이 그들 각 사람이 자기의 식량에 따라 거두니라(출16:18). 이 말씀의 의미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재림하시어 인류를 심판할 때는 가진 자나, 못 가진 자나, 다같이 똑같이 된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심판은 너무도 공정하다는 뜻이다. 각 사람의 행위대로 된 것이나 심판결과의 공성은 누구에게나 동일합니다.
사24:1~3‘보라, 주께서 땅을 공허하게 하시고, 황폐케 하시며, 뒤집어엎으시고, 그 거민들을 멀리 흩으시니, 백성이 제사장과 마찬가지일 것이요, 여종이 여주인과 마찬가지일 것이요, 빌려 주는 자가 빌리는 자와 마찬가지일 것이며, 이자를 받는 자가 이자를 그에게 내는 자와 마찬가지일 것이라. 그 땅이 완전히 공허하게 되며 완전히 약탈당하리니, 이는 주께서 이 말씀을 하셨음이라, 아-멘
⑵ 모세의 말을 청종치 아니하고 더러는 아침까지 둔 자는 모두 벌레가 생기가 냄새가 나서 버렸다고 했다. 탐심은 우상숭배이다(골3;5). 이 교훈을 발람의 교훈에서도 볼 수 있다. 우리가 분명히 명심하고 기억할 것은 하늘의 영생의 빵을 먹는 자는 탐심을 버려야 한다. 만나는 벨레가 나서 못 먹듯이 영혼을 해치는 모든 벌레는 탐욕에서 생겨나고, 탐욕은 곧 불순종에서 오는 것이다(욘4:7) 주님의 명령이 곧 영생이다(요12:50). 하늘의 감추인 만나는 진리를 순종하는 자에게 내리는 영생의 양식이다.
⑶ 해가 뜨거워지면 만나는 녹더라고 했다.(출16:21)
예수님은 의로운 태양이시다. 치료의 광선을 발하신다(말4:2) 그 빛 아래는 모두 이슬같이 녹을 것이다. 그 날에는 달빛이 햇빛 같겠고, 햇빛은 7배가 되어 일곱 날의 빛과 같이 될 것이다(욘4:8) 이 동풍은 하나님의 심판의 바람인 것을 알아야 한다.
Ⅵ.제 7일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은 만나
이것은 1 천년 안식시대를 말한다.
출16:26~30‘육 일 동안은 너희가 그것을 거둘 것이나, 칠일째는 안식일이니, 그 날에는 아무것도 없으리라’하더라. 백성 중 몇 사람이 칠일 째에 거두러 나갔으나, 아무것도 얻지 못하더라. 주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시기를“너희가 언제까지 나의 계명들과 나의 법도들을 지키기를 거부하겠느냐? 보라, 주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었노라. 그러므로 주가 여섯째 날에 이틀의 빵을 너희에게 주나니, 너희 각인은 자기 처소에 있고 일곱째 날에는 자기 처소에서 아무도 나가지 말지니라” 하시니라. 그러므로 백성이 칠일 째에 쉬니라. 아멘. 지금 말씀을 통하여 나타난 대로 제 칠일 째는 안식일이며 이날에는 만나가 내리지 않았다. 그리고 만나를 거둘 수 없다.
그 대신 제 6일에는 갑절로 내렸다. 하나님께서는 이것으로 그 백성의 순종 여부를 시험하셨던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는가? 여섯째 날에 이틀의 빵을 거둔 것은 육천년이 다 되어지는 이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천년 안식시대가 되기 전 이때는 은혜가 갑절이나 넘치는 시대임을 볼 수 있다. 이때에 주 하나님은 우리의 순종 여부를 보고 시험하실 것이다. 오늘 본문 31절을 보면 “이스라엘 집이 그것의 이름을 만나라 부르니, 고수풀 씨앗 같으며, 하얗고, 그것의 맛이 꿀 섞은 전병 같더라”고 했다.여기서 {깟씨)고수풀 씨앗 같다는 것은“인자 예수님을”상징하고, 하얗다는 것은 “예수님의 성결을” 말하고, “맛은 꿀 섞은 전병 같더라”는 것은 주 안에서 누리는 안식과 평안과 기쁨의 참된 의미를 말씀해 주고 있다. 주 안에서만 인생의 참된 평안과 기쁨이 있다.
하나님의 豫言의 計算法은 하루가 천년같고 천년이 하루같다(벧후3:8). 6일은 6천년 말에 재림하시어,(구약 4천년, 신약 2천년) 인류를 심판하고, 이 땅에 천년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이때가 실낙원의 회복입니다. 즉 잃었던 낙원을 이제는 다시 회복되는 복락원이 됩니다. 인류에게 참 평화와 영원한 안식시대가 도래하는 것입니다.마라나타!
Ⅶ. 항아리 속에 감추어진 만나
출16:33‘모세가 아론에게 말하기를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가득 채워서 주 앞에 두고, 너희 후대를 위해 간수하게 하라” 항아리는 돌로 만든 것인데, 돌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대제사장만이 1년에 한번 밖에 들어가지 못하는 지성소 법궤 안에 간직하여 영원히 기념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런데 B.C 586년에 느브갓네살 왕에 의하여 하나님의 성전이 파괴당할 때 범궤는 하늘로 옮겨져 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감추어진 만나는 버가모 교회시대에 이기는 자에게 주시겠다고 공개된 약속은 참으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가 구약시대 돌 항아리 속에 감추어진 만나는 유대 땅 베들레헴(빵집), 말구유에 탄생하신 생명의 빵이신 예수님의 몸으로 이해되어져야 한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지금까지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신29:4), 돌 항아리 속에 감추인 만나는 지금까지 그들에게는 영원히 감추어진 비밀이다. 이와 같이 현대 교회도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를 주지 않는 자에게는 마지막 때 계시의 말씀 작은 책의 비밀은 영원히 숨겨진 감추인 만나가 될 것입니다.
만민 앞에 공개되어 있으나 발람과 리골라 교훈을 회개치 않는 자에게는 영원히 숨겨진 비밀이다. 분명하게 이기는 자들에게만 알려지는 진리이다. 참으로 예수님은 지성소 법궤 안에 있는 항아리 속에 감추어진 신비의 만나입니다.
※ 비같이 내린 만나:(봄= 복음 전파기)
※ 밤에 이슬과 함께 내린 만나=(여름: 은혜시대) 깨어지고, 다져지고, 가루가 되어서 가마솥에 삶 아져서 맛이 있는 기름 섞은 전병과 같은 만나,
※ 이슬이 마른 후에 내린 만나=(가을: 환난시대) 작고 둥글고, 흰 서리같이 미세한 만나,
※ 장막에 있는 자들을 위하여 있는 양식=(예비처 시대)
※ 해가 뜨거워지면 녹아진다(심판시대)
※ 제 7일 안식일에는 내리지 않음(안식시대)
※ 항아리 속에 감추어진 만나(영원시대)
우리는 이것을 깊이 마음판에 새겨서 남은 때에 이 사명을 바로 감당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계2:17‘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지어다.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감추어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하리라. 또 그에게 흰 돌을 주리니,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서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아멘. 여기서 보면 분명히 이기는 자에게 감춰진 만나를 주어서 먹게 한다고 햇습니다. 그리고 그에게 하얀 조약돌을 주리니 그 돌에는 새로운 이름이 기록되어서 그것을 받는 자 외에는 아는 사람이 없으리라, 고 했습니다. 우리는 귀를 내어놓고 성령께서 교회들에게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 이기는 성도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끝까지 먹이신 하나님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먹도록 내려주신 만나는 어떤 양식이었습니까? 모양은 갓씨같고, 색은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고 했습니다.(31절) 민수기 11:8절에서는 기름 섞은 과자 맛 같더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하늘의 곡식”“신령한 식물(食物)”등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이것 한 오멜(2.2ℓ)을 항아리에 담아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두돌비(십계명이 새겨진 돌판)와 함께 궤에 넣어 여호와 앞에 두게 했는데 그것을 법궤(언약궤)라고 했습니다.(34절, 히9:4절 참조) 이것은 하나님의 자비가 영원하고, 필수적임을 상징하고 그의 의로우심을 기억하며 특별히 그의 “생명의 참 떡”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특별히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기억해야 한다는 것은 인간의 본성의 연약함과 불완전함을 인정한다는 것이 전제(前提)되는 것입니다. 자비란 연약한 인간성을 아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선하심 안에서 그들을 용납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념일(안식일, 유월절, 오순절, 무교절, 성막절 등)을 제정하신 것도 이스라엘 자손들로 하여금 그의 자비하심을 영원히 기억하게 하시고저 함인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 두돌비나, 아론의 싹난 지팡이(민17:8), 만나와 같은 물질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잘 보존하지 못하고 잃어버렸기 때문입니까? 전화로 불타버린 것입니까? 괴도 루팡이 가져가 버린 것입니까?
이제는 그러한 것들이 없어도 되기 때문입니다. 꼭 기억해야 할 것 한가지면 족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바로 “십자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부활에 대한 위대하신 자비와 참되심을 영원히 기억하고 우리의 마음을 깨우쳐야 됩니다. 그 사건 한 가지만 가지고도 우리는 사죄와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충분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성수주일의 절대준수와 성탄절, 성금요일, 예수 승천일 등 이와 같은 기념일을 기억하며 구속받은 은혜에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고 만나의 특별한 교훈을 잊거나 소홀히 생각해서도 안됩니다. 만나를 내려주신 은혜에 대한 교훈은 어떤 점입니까?
(1)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신8:4, 마4:4)
(2) 일용할 모든 양식은 하나님께서 주신다는 것(마6:2)
(3) 만나는 우리에게 생명의 떡인 하늘에서 내려오신 그리스도를 기억케 해 줍니다. 그래서 성경은 “너희의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취어 있음이니라”(골3:3)고 했습니다. 항아리에 담아 증거 판 앞에 두었던 만나(언약궤가 만들어지기 전)는 상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분명히 “감추었던 만나”(예수그리스도))(계2:17)로서 영원한 우리의 영적인 자양분을 의미한 것이었습니다.
2. 하나님은 문제를 주시고 해결 해 주십니다
선생님들이 학생들을 가르칠 때 문제를 주고 풀게 하므로 지식과 지능을 키우는 것 같이 하나님도 문제를 주시고 시련과 환난을 통하여 우리를 강하게 양육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문제 앞에서 떨고 당황하여 절망할 때 하나님은 종국적으로 해결 해 주시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깨닫고 의지하게 하시며 영광을 받으셨습니다.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문제와 시험을 주신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을 바로 알고 믿음으로 세상에서 담대할 수 있고 위경 중에도 평안을 누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것은 곧 자신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승리했음을 자축하는 것이요. 그들이 하나님 중심으로 더욱 공고히 연합되게 하려는 것이었음을 아셔야 합니다. 교회에서도 교역자와 지도자들을 신뢰하고 높이는 것은 그만큼 성도들이 결속되어 영적으로 풍성함을 함께 누리게 되기 때문에 결국 자기가 복을 받게 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감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들에게 혹독한 시련을 주셨는데(홍해사건, 마라, 굶주림) 따지고 보면 결국 그들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런데 왜 감사하지 못했습니까?
①노예근성 때문 ②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이 없어서 ③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우리가 분명히 깨달아야 할 것은 문제를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해결 못할 때 반드시 해결 해 주심을 믿고 아브라함처럼 믿음이 더욱 견고해져서(롬4:20) 하나님께 감사해야 하겠습니다.
3. 하나님의 훈련방법
하나님은 영구적인 법을 주시면서 훈련시키셨습니다. 그것은 율법이었습니다. 제일 처음 주신 율법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을 주신 목적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격적인 내면생활을 개발하시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노예로 있을 때에는 자유가 없는 대신 책임도 없었습니다. 자유와 책임이 없는 사람은 사고(思考)(생각)할 필요가 없습니다.
애굽에서는 시키는 대로 하면 되었고 주는 대로 먹으면 끝났습니다. 또 지금까지 두 달 보름동안의 광야에서는 어려움을 만날 때마다 믿고 신뢰하면 해결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부터 훈련은 하나님께서 보장하시고 역사하시며 일정한 법을 주시면서 그 법대로 살아가며 자유도 누리고 반면 책임도 감당하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나도 매일 하루분만 거두고 6일째는 2인분을 거두라고 자유를 주셨지만 그 중 어떤 백성은 자유를 잘못 사용했으므로 하나님을 노엽게 했던 것입니다. 자유에는 반드시 책임이 수반되어 있습니다. 자유 할수록 기준이 없으면 그것은 방종이고 무질서와 혼란이 옵니다. 신자에게는 자유에 대한 책임이 꼭 필요합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함은 당연한 것이고 그 하나님의 당부하심을 지킨다는 것은 그만큼 감사하고 신뢰한다는 증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생명의 떡)를 내려 주시면서 제일 먼저 주신 율법이 주일성수인 것을 우리는 명심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입니다. 자유는 결코 탐욕의 수단이 아닙니다. 책임은 성숙한 자가 누리는 특권이며 반면에 성숙한 인격인(신앙인)의 척도라는 것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만나를 주시되 언제까지 주셨습니까? 이스라엘자손이 사람 사는 땅에 이르기까지(가나안땅) 40년 동안 계속 만나를 먹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책임지시되 끝까지 책임져 주십니다. 죽을 때까지만 아니라 저 천국에 들어갈 때까지 책임져 주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나를 증거판 앞에 두라
출애굽기 16:31-36 / 손재호 목사
우리는 지난 두 주간에 걸쳐서 매일 만나를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과 안식일에는 만나를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같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께서 모세로 하여금 만나를 오멜에 담아 증거판 앞에 두어 후손들로 하여금 교훈을 삼게 하시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살펴보는 가운데 만나를 증거판 앞에 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배우고, 이 말씀이 오늘날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 배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오늘 본문 31-32절을 보면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고도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 모세가 가로되 여호와께서 이같이 명하시기를 이것을 오멜에 채워서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 하셨다 하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명하시기를 만나를 오멜에 채워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고 명하셨습니다. 오멜은 고체량의 단위로 오늘 본문 36절에 보면 오멜은 에바의 십분의 일이었습니다. 한 에바가 22리터니까 한 오멜은 2.2리터가 됩니다. 한 오멜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에서 하루 분량의 양식이었습니다(출 16:16). 하여튼 33절에 보면 이에 모세는 아론에게 이르기를 “항아리를 가져다가 그 속에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여호와 앞에 두어 너희 대대로 간수하라”고 하였습니다. 34절에 보면 아론이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대로 만나 한 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앞에 두어서 간수하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원문에 보면 ‘판’이라는 말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문맥상 증거판 앞에 두라고 한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호와께서 왜 만나 한 오멜을 증거판 앞에 간수하라고 하시는 것입니까? 32절을 다시 보면 “너희 대대 후손을 위하여 간수하라. 이는 내가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너희에게 먹인 양식을 그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니라”고 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낼 때에 광야에서 먹인 양식을 그 후손들에게 보이기 위하여 만나 한 오멜을 담아 증거판 앞에 두라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나 한 오멜을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앞에 두라고 하는 것은 단지 광야에서 40년 동안 먹은 것이 만나라는 것을 증거하기 위함만이 아닙니다. 그렇게 40년 동안 만나를 먹게 하신 그 만나 속에 선조들의 불신과 반역의 증거가 함께 있었다는 것을 증거 하기 위함인 것입니다. 히브리서 9:3-4절에 보면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일컫나니. 금향로와 사면을 금으로 싼 언약궤가 있고 그 안에 만나를 담은 금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와 언약의 비석들이 있고”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증거궤 안에 들어있는 것은 두 돌판과 만나 항아리와 아론의 싹난 지팡이 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모두 하나님을 반역한 증거들 입니다. 두 돌판과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만 간략히 보면 처음 받은 돌판은 금송아지 사건으로 깨어지고 두 번째 돌판을 다시 만들어 보관하게 된 것입니다(출 32장 34장). 그러니 이것도 반역의 증거가 담겨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론의 싹난 지팡이는 민수기 16-17장에 보면 단순히 모세의 권위에 도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에 도전한 반역을 증거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약궤 안의 이 세 가지 물건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들의 반역을 증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증거물 위에 언약궤 뚜껑을 덮어 가립니다. 그리고 그 뚜껑에 피를 바름으로 속죄를 받는 것입니다. 이것이 언약궤에 나타나는 하나님의 계시인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은 만나를 중심으로 일어나는 이스라엘의 불신과 반역을 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인자와 긍휼의 풍성함을 함께 보고자 합니다. 우리는 지난 두 번에 걸쳐서 일용할 양식과 안식일에 대한 말씀을 통하여 만나와 연결시켜 보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날마다 일용할 양식만을 거두라고 하셨는데도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더러는 많이 거두어 남겨둠으로 다음날 벌레가 생기고 냄새가 났습니다. 그리고 제 육일에는 이틀 분의 양식을 거두고 안식일에는 거두러 나가지 말라고 하셨는데도 더러는 거두러 나갔습니다. 이러한 행동들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한 반역의 행위였습니다. 이러한 반역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40년 광야생활 동안 계속하여 만나를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와 같은 것이 함께 증거 되어지는 것이 바로 만나 한 호멜을 항아리에 담아 증거판 앞에 두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오늘은 이 만나를 신약을 중심으로 우리의 영원한 양식과 비교하여 보려고 합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무슨 양식을 위하여 살고 있는지를 보고자 합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만나를 먹고 살았지만 이 만나를 먹고 사는 것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원하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것임을 알게 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신명기 8:2-3절을 보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사십년 동안에 너로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네 마음이 어떠한지 그 명령을 지키는지 아니 지키는지 알려하심이라.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기초해서 보면 여호와 하나님께서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40년 동안 광야로 인도하시고 그 광야에서 만나를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존재임을 알게 하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의 시험에 실패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계속해서 만나만 있으면 살겠다고 하는 것이 드러나는 장소가 바로 광야였습니다.
그러면 오늘날 우리들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죽겠다는 심정이 듭니까? 날마다 말씀을 듣지 못하면 하루 종일 밥을 먹지 못한 주림보다 더한 주림이 있습니까? 솔직히 그렇지 않지요. 말씀을 듣지 않아도 잘 삽니다. 이것은 우리가 병이 든 증거입니다. 우리가 밥을 먹지 않아도 늘 배가 더부룩하게 부르면 그것은 정상이 아니잖아요. 위장에 병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밥맛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밥을 먹지 못하면 점점 건강이 악화되어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떠합니까? 하루 종일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아도 멀쩡하게 살고 있지 않습니까? 하루가 아니라 일주일, 한 달, 아니 일 년, 몇 년 동안 하나님의 말씀을 먹지 않아도 멀쩡히 잘 살고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영적으로 깊이 병들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먹어도 죽는 양식이 없으면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런데 먹고 영원히 사는 양식을 위하여서는 걱정이 없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말씀이 없어도 지금까지 잘 살아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가 무엇을 위하여 애를 쓰고 살려고 하는지 자기 자신을 잘 살펴봐야 합니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애를 씁니까? 아니면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애를 씁니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물어야 합니다.
요한복음 6:26-27절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오병이어 사건 이후에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 예수님께서는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표적이란 요나의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통해 영생을 얻게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고 따르는 것이 아니라 단지 먹고 배부르기 위해 따라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먹고 배부른 그러한 음식은 썩는 양식이라는 것입니다. 오병이어로 오천 명이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았지만 그러나 그 떡을 먹었다고 영생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않는 양식 곧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썩지 않는 양식이란 무엇입니까? 요한복음 6장에서 증거하시는 예수님 자신의 살과 피가 썩지 않는 양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6:53-58절을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 살아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인하여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인하여 살리라. 이것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니 조상들이 먹고도 죽은 그것과 같지 아니하여 이 떡을 먹는 자는 영원히 살리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이 양식을 어떻게 먹는 것입니까? 요한복음 6:27-29절에 보면 오병이어 사건을 경험하고 자기를 따르는 많은 무리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썩지 아니하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라”고 하셨습니다(27). 그때 무리들이 묻기를 “우리가 어떻게 하여야 하나님의 일을 하오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28). 그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 하나님의 일이다”고 말씀하셨습니다(29).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살이 찢기시고 피를 흘리심이 우리로 하여금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임을 알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기도문에서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것은 단지 그날 먹을 양식만을 위해 기도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매일 만나를 거두라고 하신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여 살아야함을 배웠습니다. 그렇습니다. 주기도문에서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신 참된 의미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7:24-25절을 보면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에 보면 창조주께서는 천지의 주재자로써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않고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고 합니다. 오히려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분이시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이분을 의지하는 것이 참으로 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단지 하루하루의 양식을 달라고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나 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6:31-32절을 보면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를 구하는 것은 이방인이 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기도에는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이방인이 구하는 것을 구하라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가 “위에 있는 매일의 양식”이라는 뜻입니다. 즉 하늘의 양식이며, 온전한 양식을 구하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에게 복음을 전하고 계실 때 제자들이 마을에 가서 먹을 것을 구하여 와서 잡수시라고 합니다. 그때 예수님께서 나의 먹을 양식은 따로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하셨습니까? 요한복음 4:34절에 보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의 양식은 자신을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는 것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아버지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 말을 알아듣지 못하였습니다. 그래서 누가 음식을 갖다 드렸는가 하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은 무엇이어야 합니까? 날마다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일용할 양식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영생하도록 있게 하는 양식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것입니다. 말씀이 살과 피를 입고 오셔서 그 살과 피를 주심으로 우리에게 영생의 양식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성도에게 일용할 양식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일용할 양식입니다. 그러니 초대교회 성도들은 날마다 모인 것입니다. 날마다 떡을 뗀 것입니다. 이것은 단지 식사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주님의 죽으심을 다시 오실 그날까지 기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밥 먹을 때마다 예수님의 살과 피를 기억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성도의 진정한 양식인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언약궤를 중심으로 진을 치고 언약궤를 중심으로 행진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의 중심에 늘 언약궤가 놓여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언약궤 안에 만나 항아리를 둠을 통하여 무엇을 계시하고 있는 것입니까? 너희가 썩을 양식을 위하여 살지 말고 썩지 아니할 양식을 위하여 살라는 증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나를 거두어 다음날까지 남겨두었더니 썩어버린 것입니다. 그러나 안식일에는 썩지 않았습니다. 주님 안에 살지 않는 모든 것들은 결국 썩어질 것들입니다. 아무리 수고하고 애를 쓴들 썩는 양식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심고 있습니까? 무엇을 기대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썩어질 것을 심으면 썩어질 것을 거둘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을 위하여 심게 되면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우리의 삶을 증거 해 보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심는 것이 육체를 따라 심는 것인가, 성령을 따라 심는 것인가를 점검하라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10절을 보면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진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찌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그러므로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한마디로 심는 대로 거둔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말씀 중에 하나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오해합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것이 헌금을 많이 하면 부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많이 하면 할수록 가난하여지는 것이지 어떻게 부자가 됩니까? 그러므로 헌금을 많이 하여 부자가 되는 것이 복이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는 것 자체가 이미 복입니다.
그러면 심는 대로 거둔다고 하는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둔다는 것입니다. 심는 대로 거두는 것은 분명한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거두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거두게 됩니다. 돈을 벌려면 투자를 하여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하지 않고 정말 애를 써서 잘해야 합니다. 그러면 분명히 거두게 됩니다. 운동을 하면 몸이 건강해지듯이 육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하는 만큼의 결실을 얻게 됩니다. 농부가 봄과 여름에 부지런히 땀흘려 씨를 뿌리고 가꾸면 가을에 풍성히 거두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배짱이처럼 놀았으면 거둘 것이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심은 대로 거두는 법칙입니다.
그런데 무엇이 문제입니까?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 거두기는 거두는데 무엇을 거둔다는 것입니까? 썩어진 것을 거두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즉 성령의 뜻을 따라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는 것입니다. 성령을 위하여 심는데 썩어질 것을 거두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육체를 위하여 심으면서 영생을 기대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육은 육이요, 영은 영인 것입니다. 육은 성령의 일을 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각양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은 목사 잘 섬기면 복 받는다는 말이 아니라 영생의 말씀에 관심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심은 대로 거둔다는 말씀의 문맥에서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령을 따라 심는 자는 그 열매가 바로 눈앞에 나타나지 않습니다. 오래 기다려야 합니다. 그러나 육체를 따라 심는 경우는 몇 달 만에, 아니 몇 일 만에 드러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썩어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을 따라 심는 자들은 낙심하지 말고 기다리는 것입니다. 피곤하지 않으면 때가 되면 거두리라는 것입니다. 성령을 따라 심는 길은 좁은 길이요, 오래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낙심도 되고 피곤하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농부가 오래 기다려 열매를 거두듯이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면서 기회 있는 대로 성령을 따라 믿음의 가정에 착한 일을 하며, 성령을 따라 심을 때 반드시 거두게 됩니다.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주셔서 우리로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우리의 거울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우리로 썩어질 것들을 위하여 심는 자가 아니라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심는 자들이 되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