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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학원강사모여라 원문보기 글쓴이: 삼미자
지금부터 쓸 글은 제가 지금까지 보고 들은 많은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나름 검증되었다고 생각하는 이야기들을 중심으로 서술하는 내용입니다. 고로, 다소 오류가 있을 수 있고 어쩌면 반박이 가능할 수도 있으나, 최소한의 교양적 수준의 지식으로 읽어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다른 글들과는 달리 오로지 제 머리 속에서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저작권 따위는 개나 줘버리라 해도 상관없습니다.
1. 관측의 시작
1) 농경 문화와 관측
아시다시피 오리엔트 지역에 해당하는 이집트 나일강 유역과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농경 지역입니다. 그 곳은 비옥한 땅, 그 터전인 강의 범람 등에 의해 농사를 짓기가 용이했습니다. 이는 정착된 곳에서 인류가 농경 문화를 형성할 수 있는 기반이 됩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1년이란 주기를 인식하게 됩니다. 특히 동식물들의 삶과 죽음이 크게 1년이라는 시간적 간격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트끼면서 이는 많은 종교에도 반영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특히 나일강 유역의 이집트 문화권에서는 별의 운동을 인지하게 됩니다. 천랑성(시리우스) 라는 별이 1년을 주기로 일정한 장소에 확실하게 나타난다는 것을 오랜 관측을 통해 인지하게 되고, 이것이 농사와도 밀접한(홍수 등) 관계를 맺게 됨을 알게 됩니다.
그러면서 특히 이집트를 즁심으로 천문(별의 움직임)을 알고자 관측이 시작되게 되고, 비록 초보적이지만 별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게 되며 이는 이후 그리스에도 영향을 주게 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만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그 특유의 개방적 지형에 의해 특정 민족 등이 오랜 기간 동일한 장소에서 활동함에 제약을 받고 계속 타민족들이 유입됨으오 인해 이집트와 같은 장시간에 걸친 계획적이고 안정적인 관측이 힘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됩니다.
2) 관측과 건축
아시다시피 피라미드같은 건축물은 방위와 큰 관계를 맺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1-2천년에 걸친 관측과 축적된(비록 아마도 사제나 귀족, 왕족에 국한되었겠지만) 지식은 그런 일들이 가능하게 했으리라 봅니다.
이는 농경에도 영향을 주어 상당히(당시로서는) 좋은 수확량 등을 유지하게 되어 농경과 함께 상업의 발달에도 영향을 주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는 이후 오리엔트 지역과 아나톨리아, 또는 유럽 동부 지역 등과의 활발한 교류와 함께 문화 융합에도 영향을 주었을 것입니다.
나아가 그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수학과 과학 지식은 이후 그리스의 자연 철확 등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나아가 알렉산더 이후 헬레니즘 문화가 로마에 연결되는 과정에서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사료들이 꽤 있는 것으로 압니다.
3) 그리스의 자연 철학
그리스는 기본적으로 폴리스를 중심으로 한 지방 자치적 성격을 띤 국가 연합이라 볼 수 있다 생각합니다. 게다가 다양한 섬지역은 다양한 자연 환경과 함께 다양한 문화를 이끌어 내었을 뿐 아니라 타 문화와의 다양한 교류를 이끌어 내기에 충분했을 것입니다.
이는 문화 충돌 등을 통해 겪은 다양한 인간적 사상의 혼란 속에서 종교나 사상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고, 그를 기반으로 한 자연 철학, 즉 '나'를 둘러싼 자연이 과연 어떻게 존재하는가 하는 추상적 개념도 더욱 쉽게 다룰 수 있게 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특히나 이집트의 발달된 문화는 그것을 더욱 부채질했으리라 봅니다. 그리스 자연 철학 초기나 중기에만해도 이집트로 유학을 간 철학자군이 많았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중에는 탈레스, 피타고라스 등은 당대의 내로라 하는 철학자들로서 명성을 날리기도 했었죠.
이집트 등의 다양한 문화 접촉을 통해 그리스는 자신들만의 자연 철학을 공고히 다져나가기 시작합니다. 특히 물성론에 있어서는 다양한 고찰(관측은 좀 경시했지만)을 통해 만물의 근원에 대한 다양한 생각들이 나옵니다. 교과서에도 나오는 탈레스,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토스 등등이 다양한 관점에서 물질의 근원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위에서도 잠시 이야기 했지만, 그리스 인들은 실제 관측은 크게 이끌어내지는 못했다는 것입니다. 물론 예외적으로 달이나 태양 등과 같은 천체 등에 대한 연구는 간간히 있었지만, 대부분의 관측 사료는 아마도 이집트의 것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만큼 관측에 있어서는 이집트의 수준이 상당히 뛰어났다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그로 인해 로마 시대와 중세시대까지 천문 관측 등에 대한 유럽인들의 관심은 저조해질 수 밖에 없게 됩니다.
2. 천동설의 압승
1) 아리스토텔레스의 천동설
아시다시피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플라톤의 제자입니다. 즉, 사상적 흐름과는 별개로 소크라테스-틀라톤-아리스토텔레스로 이어지는 사제의 인연은 아마 세계 전체적으로도 보기 드물 정도로 인류의 역사를 뒤흔든 인연들이라고 생각됩니다.
플라톤은 이데아라는 사상을 통해 기본적으로 물질과 그 기반이 되는 관념을 분리합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좀더 물질쪽으로 가까워져서 신과 같은 절대자와 그를 통해 이루어지는 물적 관계를 추구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는 사실 중요한 것으로 이후 등장하는 신학 중심의 중세 철학에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양한 서적을 통해 다양한 분야의 일들을 다루었는데, 사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조야하고 쓸데없는 만들만 많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아니, 심지어 헛소리를 통해 사람들의 사상적 발전을 저해했다는 생각까지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류의 사상적 흐름을 크게 묶어내고 그것을 통해 이후 발생되는 철학과 과학의 근간을 형성한 것 자체는 의의가 크다고는 봅니다.
아무튼 그의 다양한 내용 중 크게 다루어질 것 중 하나가 바로 천동설입니다. 그는 별들의 운동을 통해 절대자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을 구분하고자 한 것이 아닐까 생각이 듭니다. 그의 지동설은 어느 정도 자연철학에서 이미 정립된 내용들을 통합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별들의 관측에 있어서 가장 골치아픈 것들 몇 개 꼽으라고 할 때 꼭 나타나는 것이 수성, 금성의 운동과 화성,목성, 토성의 운동입니다. (사실 그것들이 다른 별들에 비해 당연히 잘 보이니 관측이 더욱 잘 된 것이 무리는 아닙니다.)
수성과 금성은 반드시 초저녁이나 새벽녘에만 가능합니다. 그리고 또 태양 근처에서만 보입니다. 이 별들은 태양 주변에서만 관측되므로 한 낮이나 밤에는 절대 보이지 않는 별들이지요. 게다가 위치도 계속 바뀝니다.
화성, 목성, 토성은 1년을 주기로 운동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일정한 궤도를 자신들만의 시간을 가지고 운동합니다. 게다가 하늘을 가로질러 움직이지요. 그리고 가끔 역행이라고 해서, 다른 때와는 정반대의 방향으로 돌아갔다가 다시 원래의 방향으로 움직입니다.
다른 별들은 1년을 주기로 움직이는데다가, 하늘이 움직인다고 치면 별 자체는 움직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기 때문에 고정된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항성이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반대로 수성, 금성, 화성, 목성, 토성은 설명한대로 계속 움직이기 때문에 행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런 운동에 대한 개별적인 이론이 필요했고, 그래서 나온 것이 주전원입니다. 그리고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주전원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천동설을 확립하게 됩니다.
2) 천동설의 의미
천동설은 쉽게 말하면 지구가 움직이지 않고 다른 존재들이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아리스토텔레스의 의도처럼) 하늘의 법칙과 땅의 법칙이 서로 다르다는 의미도 역시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하늘은 신과 같은 존재가 존재하면서 인간이 사는 세상과는 전혀 별개로 움직이는 셈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는 이후 스콜라 철학이나 교부 철학 등에도 아주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입니다.
3) 아리스타르코스의 지동설과 참패
아리스타르코스는 거의 들어본 적이 없는 철학자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동설을 다루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한 번쯤은 들어볼만한 이름인 것이, 그야말로 인류에게 지동설이라는 개념을 처음으로 제시한 사람으로 알려져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보자면, 이 역시 이집트 쪽의 영향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후에 다시 말하게 될 것으로 봅니다.
아무튼 그는 천문 관측을 통해 다른 이들과 다른 가정을 합니다. 만일,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면 어떻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이는 당시로서는, 아니 오늘날 보더라도 너무나 혁신적인 아이디어입니다. 왜냐하면 인간의 편견 자체를 부정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코페르니쿠스때도 이야기할 것 같습니다만 인간이 발전함에 있어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인간 자신입니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감각을 최우선적으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자신의 감각과 다른 상황이 되면 아주 혼란스러워합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멀미지요.
여하튼, 인간의 감각으로는 당연히 땅은 고정되어 있습니다. 움직인다고 생각 조차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자신이 발딛고 서 있는 이 땅이 심지어는 돌고 있다는 이야기는 엄청한 혁신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의 관측과 추론을 토대로 자신의 감각을 뛰어넘어 지구가 돌고 있다는 개념인 지동설의 초기 형태를 주장하게 됩니다. 우선 지구가 공전을 해서 1년이 만들어지고 자전을 해서 밤낮이 생긴다는 이야기와 함께 계절의 변화와 별의 운동을 어느 정도 다루게 됩니다.
그러나, 알다시피 이 이야기는 무참하게 무시됩니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감각과 논리를 중심으로 하는 자연철학자들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인데다가 아리스토텔레스 등의 영향이 너무 막대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통해 그의 이론은 거의 사장되는 아픔을 겪습니다.
4) 헬레니즘, 프톨레마이오스 그리고 로마
알렉산더 대왕 등에 의해 헬레니즘 문화가 형성되고 그를 이어 이집트에는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가 들어서게 됩니다. 그 유명한 클레오파트로도 이 왕조의 후손입니다.
헬레니즘 문화가 형성되면서 그리스의 많은 사상과 철학들이 주변에 영향을 미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이집트 역시 그리스의 문화를 많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도서관을 중심으로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화하기 시작합니다.
그 와중에 나온 사람이 바로 프톨레마이오스로서(왕조와는 관련이 없는 듯 합니다) 이전의 그리스 문화와 함께 이집트의 천문 자료와 관측 자료를 토대로 상당히 엄밀한 수준의 천동설을 주장하게 됩니다. 수학적, 기학적 기반을 두고 있는 이론이기 때문에 상당히 정교했고 몇몇 사실들을 제외하고(사실 이게 상당히 중요한 것들입니다만) 대부분의 관측 자료를 만족한 수준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중심이론으로 두고 천문 이론을 전개하게 됩니다.
그 이후 거의 천년 이상을 이 이론을 뒤엎을 수준의 정교하고 체계적인 천문 이론이 등장하지 않았기에 프톨레마이오스의 이론과 저서는 공고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고, 아리스토텔레스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천문 이론으로서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권위를 갖게 됩니다.
이는 이후 로마로 이어집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는 근간이 되는 기초 학문보다는 건축이나 토목, 상업과 관련된 학문, 법률학 등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그리스의 자연 철학 수준을 뛰어넘지 못하게 됩니다. 동시에 그리스의 많은 사상과 철학은 그 수준에 머무르게 되고 학문적으로 정체기를 맞이하게 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3. 중세 유럽과 이슬람 문명
1) 알렉산드리아의 몰락
헬레니즘 시대를 기점으로 절정에 달한 그리스 자연 철학은, 로마가 이집트를 침공하여 알렉산드리아를 몰락시키고 그 터전인 도서관등을 제거함으로써 쇠퇴하기 시작합니다.
로마 시대에서 세네카나 플라니우스 같은 철학자 집단이 있긴 했지만, 그 수준이 거의 헛소리에다가 그리스 시대의 철학 내용을 답습한 것에 불과한 것으로 보입니다.
2) 로마의 몰락
이후 그리스도교의 전성기가 찾아오면서 특히나 그리스-로마 종교에 대한 탄압이 시작됩니다. 그것을 통해 그리스 철학까지도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그러나 앞서 말했듯이 아리스트텔레스나 프톨레마이오스의 사상과 이론은 그리스도교의 유일신 사상과 맞물려 볼 수 있기 때문에, (특히나 삼위일체 교리의 확립 이후) 그것들을 토대로 신학을 중심으로 한 철학이 발전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서로마의 몰락과 중세 봉건 체제의 등장, 교황권의 강화 등을 기반으로 하여 신학 철학이 점점 득세하게 되고, 인간 중심으로 사물을 바라보던 그리스 철학은 더더욱 발 붙일 곳이 없어지게 됩니다. 동로마 역시 그리스 시대의 철학을 받아들이고는 있지만 그것을 기반으로 철학적 발전을 이루기보다는 실용적이거나 군사적인 목적의 내용들을 강화하기에 급급했던 듯 보입니다. 아니면 신학을 더욱 공고히 하거나.
3) 이슬람 문명의 발전
그와 반대로, 로마의 몰락을 기반으로 그리스 문화를 접하게 된 이슬람 지역의 문화군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활발한 이론과 실험을 전개하게 됩니다. 특히 프톨레마이오스나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은 이슬람 과학 발전의 토대가 됩니다.
나아가 그것을 바탕으로 한 천문 관측의 발전과 연금술의 발달은 이슬람 문명이 주변 문명에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데 큰 보탬이 된 것으로 보입니다. 그 과정에서 나온 군사적 발전이나 천문학을 통한 농업, 상업 발전 등은 아무래도 이전과는 큰 차이를 보이게 된 듯 합니다.
사실 오늘날 쓰는 많은 과학 용어 중에 이슬람으로부터 온 것들이 많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 중 하나입니다. 10세기 때만 해도 이슬람의 과학적 토대는 유럽쪽보다는 훨씬 나아보였으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발전 역시 실용적 목적, 군사적 목적이 주 였고, 그를 토대로 혁신을 이루기 보다는 안정과 확장을 중시한 연구들이 대부분이었다는 점은 역시 안타까운 점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역시 이슬람도 종교 중심의 문화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나 생각을 하게 합니다.
4. 십자군 운동과 중세의 몰락, 르네상스
1) 십자군, 중세 스스로 제 그릇 걷어차기
뭐 유명한 이야기이지만 교황이 자신의 종교적 역량을 강화하고 영토도 넓히고 경제도 발전시키는 많은 목적을 가지고 십자군을 발동시킵니다. 1차는 어찌어찌 성공해서 예루살렘도 차지하고 기반도 마련했지만 이후 이슬람 권의 대대적인 반격에 힘입어 처참하게 퇴패하게 됩니다.
이는 교황권의 몰락 뿐 아니라 봉건 귀족들의 경제적, 군사적 기반도 송두리째 날려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나아가 왕권의 강화, 심지어는 왕권신수설까지 확립하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이렇게 이야기 할 수 있죠. '왜 그랬는지..'
2) 인간의 재등장
교황권이 몰락했다는 것과 함께 이슬람의 뛰어난 문명을 접하게 된 중세 유럽인들은 그를 통해 그리스와 이집트의 찬란한 문화를 재조명하게 됩니다. 이슬람에 유입되었던 그리스 시대와 이집트 시대의 서적과 이론들은, 십자군 참패의 원인을 분석하던 사람들에게는 참신한 자료임에 다름이 아닐 것이었습니다.
교권이 무너진다는 것은, 그를 통해 억눌려있던 인간에의 감정이 되살아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의 인적, 물적 지원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왕권으로서는 그러한 분위기를 더더욱 강화시킬 필요가 있었을 것입니다. (뭐 의도적으로 그런 것은 아니었을지라도)
그리고 인간 중심의 사상이라면 무엇보다도 그리스 철학, 나아가 그리스 자연 철학이 으뜸이었을 것이고, 많은 사상가들이 이를 집중적으로 수집하고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합니다. 이탈리아 지역을 중심으로는 인문학적 연구가 심화된 듯 하지만, 영국, 프랑스, 독일 일대에서는 자연 철학과 연금술을 중심으로 한 자연 과학적 고찰이 상당히 심화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것은 르네상스라는 혁명을 통해 인간이 중심으로 되었을 때 인간 스스로가 발견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탐구라는 큰 틀을 형성하게 됩니다.
5. 코페르니쿠스 혁명
1) 아리스타르코스의 재등장과 코페르니쿠스
코페르니쿠스기 살던 시대는 그래도 아직은 종교적 영향력이 쎘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 역시 신학을 공부하게 됩니다. 그러나, 신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느 정도 엘리트에 해당했기 때문에 다른 이들보다 정보를 접할 수 있는 범위가 훨씬 넓었을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역시 아리스타르코스, 비운의 철학자의 저서를 접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 새로운 세계, 지동설이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겠지요.
위에서도 잠시 이야기했지만, 인간은 자신의 감각을 최우선적으로 의존하게 됩니다. 그렇기에 지동설이라는 학문은 정말이지 터무니 없는 이야기로 받아들여졌을 것입니다(처음엔). 그러나 그 역시 이집트 쪽의 관측 자료와 당시의 천문 자료들을 많이 접해보았을 것이고, 그것은 지동설이 천동설보다 더욱 깔끔하고 확실하게 천문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을 눈치채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나름대로 자신만의 세계 내에서 지동설을 확립해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역시 혼자만의 진행이라 그런지 여기저기 한계는 보이게 됩니다. 원운동에 대한 집착은 그 중 하나입니다.(사실 원운동은 천동설의 핵심 이론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그는 종교에 몸담았었기 때문에 그가 발표할 내용이 얼마나 터무니없어 보이고 위험한지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죽기 직전까지 자신의 이론을 내보이지 못하고, 그가 죽을 때 쯔음에 책을 출판하게 됩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책은 교황권에 의해 금서로 지정되게 됩니다.
2) 티코 브라헤와 케플러, 앙숙의 조화
그 와중에 천동설의 지지자로서 천동설을 확고한 이론으로 정립하기 위해 노력한 천문학자가 등장합니다. 티코 브라헤는 자신만의 야망을 가지고 연구를 위해 덴마크 왕에게 천문대를 요구하고 관철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거대한 규모의 천문대를 설립하고 수많은 관측 자료를 '눈'을 통해 모으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망원경 같은 것은 생각도 못했기 때문에 모든 관측은 눈을 통해 이루어졌습니다. 사분의, 육분의 같은 것들이 그런 목적으로 만들어져 쓰였고, 그것들을 통해 만들어진 자료들은, 오늘날 보기에는 조잡할 지언정, 상당한 수준의 정밀성을 가지고 잇었습니다.
게다가 티코 브라헤는 당시로서는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의 천문 관측 자료를 수집하고 그를 통해 천동설을 입증하려고 노력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관측자였지 이론가는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당시 유명한 수학 능력과 이론 능력을 가진 케플러를 영입하고 그를 통해 자료들을 분석하게 합니다.
그러나 둘은 성격이 엄청난 반대였다고 합니다. 특히나 브라헤는 불같은 성격이어서 그와 계속 마찰하게 되고, 연구는 지지부진하게 됩니다. 그러던 와중에 브라헤가 결투를 원인으로 하여 급사하게 되고 그의 방대한 자료는, 격렬한 법정 소송 끝에, 티코 브라헤의 가족이 아닌 케플러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과학적으로나 인류에게 있어서나 다행한 일입니다.)
이렇게 해서 '눈으로 관측한 최후의 천문 관측자'인 티코 브라헤를 끝으로 천동설에 대한 노력은 서서히 사그라들기 시작합니다.
3) 케플러의 3법칙
우여곡절 끝에 자료를 받은 케플러는 10년 이상의 처절한 연구에 들어갑니다. 그리고 그 관측 자료를 통해 다양한 사실들을 알게 되고 이후 3가지의 법칙을 발표하게 됩니다.
가. 타원 운동
천동설은 기본적으로 하늘에 대한 법칙을 인간의 법칙과 분리시킵니다. 그리고 그 가장 핵심에 있는 것이 바로 원운동입니다. 사실 우리 주변에서는 완벽한 원운동을 보기가 힘듭니다. 오늘날에는 기계의 힘을 빌어 원운동을 볼 수 있게 되었지만 인간의 능력으로 원운동을 이끌어내기한 정말 어렵습니다. (쥐불 놀이도 원운동을 시키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천문 학자들은 원운동으로 보이는 천체의 운동을 하늘의 법칙으로 인지하게 되었고, 그것은 천년 이상을 이어온 이론이었습니다.
그러나, 케플러는 정교한 관측 자료를 토대로 항성에 대한 행성의 운동은 원운동이 아닌, 원운동에 가까운 타원운동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사실 그로서도 이 사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듯 합니다. 말 그대로 편견에 의한 주저함을 느낀 셈입니다.
원은 중심이 1개입니다. 그러나 그 중심을 한 직선 방향으로 늘려나가 2개로 만들면 타원이 됩니다. 이는, 운동의 중심이 2개가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사실 타원 궤도에 대한 연구는 이미 그리스 시대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니었습니다. 단지, 그 사실 자체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던 것이지요.
나. 면적 속도 일정의 법칙
이 이야기는 그림으로 설명하는 것도 쉽지만, 개념적으로도 어렵지 않습니다. 쉽게 말하면 태양에 가까워진 행성은 더 빨리 돌고 태양에서 멀어진 행성은 느리게 돈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뉴턴 등에 의핸 만유인력의 기본 원리에 적용되게 됩니다. 즉, 거리가 가까우면 힘을 세게 받아 더 큰 가속도를 얻고 멀어지면 느려진다는 이야기의 실례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그 원리까지는 생각하지 못하고, 행성의 운동의 한 법칙으로서만 받아들인 셈입니다.
다. 조화의 법칙
이건 그냥 행성의 공전주기의 제곱이 공전 궤도의 장반경(타원의 지름 중 긴 쪽)의 세제곱에 비례한다는 이야기인데요. 어렵긴 합니다만 사실 이 내용은 나중에 이렇게 정리가 됩니다.
뉴턴은 만유인력의 성질을 따지면서, 그 힘은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한다는 사실을 알아냅니다. 즉, 거리가 멀어질수록 작용하는 힘은 제곱에 반비례해서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별의 공전 궤도를 통해 별의 공전 궤도를 알 수 있게 되는 셈입니다.
이 3개의 법칙을 통래 케플러는 지동설의 이론적 기반을 이끌어내게 됩니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법칙을 나열한 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지동설이 성립하는 근본 원인을 이끌어낼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이후에 제기되게 됩니다.
4) 갈릴레이. 그래도 지구는 돈다.
갈릴레이는 최초의 근대 과학자로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가장 큰 이유는, 고찰이 아닌 실측과 경험을 통해 이론을 이끌어나가고자했기 때문입니다. 합리론이 중시되었던 과학 철학내에서 경험론을 도입한 셈입니다. 사실 자연 철학도 합리론을 중시했더고 볼 수 있지요.
그는 관성과 같은 중요한 과학적 사실들을 연구하기도 했지만, 천문 이론에도 관심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코페르니쿠스의 사상에도 관심을 보였고 지동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게 되었지요.
무엇보다 그가 지동설을 인정하게 된 계기는 망원경입니다. 사실 그는 망원경을 발명한 사람은 아닙니다.(그렇게 잘못 알고 계시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다만, 그는 망원경을 통해 우주를 바라본 최초의 사람임에는 거의 확실합니다.
그가 발견한 사실들은 꽤 됩니다. 달의 요철, 금성의 변화, 목성의 위성 등등.....그리고 이 발견들은 천동설을 송두리째 날려버리게 되는 큰 증거들로 제시되게 됩니다.
계속 이야기했지만 천동설은 우주의 법칙이 지상의 법칙과 다르다고 주장합니다. 그리고 우주는 신에 의해 지배되므로 완전하고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달에 요철이 있다? 달이 매끈하지 않다? 이건 대발견이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목성에 달이 있다는 것은, 지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 존재다 있다는 의미이고, 이것은 신의 자식은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카툴릭 사상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이단인 것입니다. 나아가 금성의 겉모습이 달처럼 주기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우주의 존재가 완벽하거나 깔끔하지 않다는 또 하나의 증거가 됩니다.
나아가 금성의 모습은 천동설로서는 정말 설명하기 어려운 부분입니다. 즉, 천동설이 틀렸다는 반증이 되는 셈이고, 그것을 기반으로 하는 카톨릭의 이야기가 틀렸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이는 교황권으로서는 절대 받아들일 수 없는 이야기 입니다.
게다가 교황의 친구로서 우대를 해주었던 갈릴레이가 책을 통해 교황을 비꼬고 비난을 한 모습으로 비춰져서야 교황으로서도 가만히 냅둘 수는 없었겠지요. 당연히 종교 재판이 열리게 되고 갈릴레이는 지동설을 부정하고 언급할 수 없게 됩니다.
뭐 사실 갈릴레이가 '그래도 지구는 돈다'라고 말을 했다지만 사실 거짓말일 가능성이 크다 합니다. 자서전의 저자가 끼워넣었던 듯 하다는 것입니다. 피사의 사탑에서 공을 떨어뜨린 실험도 그런 종류가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도 상당히 많은 듯 합니다.
아무튼 코페르니쿠스의 저서가 금서로 지정된 이후 갈릴레이가 이런 꼴까지 당해서는 지동설의 명맥이 끊기지 않나 싶긴 해도, 사실 이미 근대 과학의 연구는 그 흐름을 가속화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론적으로 튼튼해지고 있는 지동설은 거의 확립된 이론으로 정리가 되어나가도 있었습니다.
5) 지동설의 승리, 프린키피아
사실 뉴턴은 우리가 아는 이미지와는 상당히 다릅니다. 그는 조폐 공사에 있으면서 동전의 모서리에 요철이 생기게 했습니다. 그것이 오늘날까지 내려왔지요.(모서리를 깎아 동전의 금이나 은을 빼돌리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연금술을 연구하면서 다양한 실험을 했던 것으로 압니다. 무지개 색을 7개로 정한 엉터리 주장도 이 사람이 이끌어 냅니다.
뭐 이런 부분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인류 역사의 가장 위대한 천재 몇 중 하나로 꼽히는 이유 중 가장 큰 것은 바로 만유인력이라는 것을 이끌어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만유인력은, 질령을 가진 모든 물체는 아주 작은 인력을 반드시 주고 받는다, 뭐 그런 내용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우주의 어느 곳에서나 동일합니다. 거리가 멀수록 거리의 제곱에 반비례해서 힘은 약해집니다. 그리고 아무리 멀어도 반드시 힘은 (오래 걸리긴 해도) 작용합니다.
이것이 왜 중요하냐 하면, 이것을 통해 천문 관측 내용을 모조리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지동설을 근간으로 해서.
사실 이 내용은 원래 발표하려 했던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그런데, 친우인 헬리(헬리 헤성의 발견자 그 사람입니다)가 별들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를 하던 중 그가 이미 만유인력을 알게 되고 그것을 통해 천문 이론을 확립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서둘러 발표하게 된 것입니다. 이런 점에 있어서 헬리 역시 프린키피아의 주요 인물 중 하나인 셈입니다.
만유인력을 통해 많은 내용들이 설명되면서 결국 천동설은 그 설득력을 거의 상실합니다. 뭐 종교에 심취한 아주 일부의 사람들이나 천동설을 계속 믿을 뿐이 되었고, 지동설이야말로 일반적으로 가장 인정받는 천문 이론이 된 셈입니다. 사실 천동설은 말만 많지 오류 투성이에 설명도 복잡하기만 해서 더더욱 신뢰가 안 갔는데, 지동설은 깔끔하게 쉽게 설명하고 있으나 말 다한 셈입니다.
사실 이 이론들은 이집트적 사상의 영향도 받았다는 말들이 많습니다. 뉴턴 역시 프리메이슨의 일원이었다고 하는데, 프리메이슨은 이집트의 사상을 많이 받아들였다는 점을 보았을 때 약간이나마 일리는 느껴지게 하긴 합니다. 그러나 정설은 아니니 믿거나 말거나 인 셈입니다. 그러나, 이집트의 과학적 우수성이 폄하되고 있는 상황에서는 다시금 돌아볼 이야기 이기도 합니다.
6) 최후의 일격, 연주 시차의 발견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맥을 유지하던 천동설에 최후의 일격을 가한 것은 연주 시차의 발견입니다.
사실 다른 내용들은 어거지일지언정 천동설로도 어떻게든 설명은 해낼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주 시차의 존재만은 천동설로는 절대 설명을 할 수가 없는 내용입니다.
연주시차란, 한 별이 1년을 주기로 아주 조금씩 좌우로 흔들리는 간격을 의미합니다. 그 각도의 단위는 1초입니다. (시간의 초가 아닙니다.) 원의 중심을 360등분하면 1도가 됩니다. 1도를 1/60로 나누면 1분이 되고 그 1분을 다시 1/60으로 나누면 1초가 됩니다. 즉, 1도는 60*60=3600초인 셈입니다. 그리고 연주 시차가 1초가 되는 거리를 1pc이라고 정했습니다. 1pc은 약 3.26광년입니다.
1광년은 빛이 1년동안 가는 거리 입니다. 빛의 속도가 약 300000km/s(1초에 30만 km 가는 속도)이니 1광년이란 300000*60*60*24*365km에 해당하는 것입니다. 뭐 생각하기만 해도 어질어질한 숫자인데요. 1pc은 거기에 또 3.26을 곱해야 합니다. 그런데 더 엄청난 것은 1pc인 거리의 별들은 거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보다 수천 수만 수십만 이상의 별들이 거의 대부분입니다.
연주시차는 거리에 반비례합니다, 그러니까 거리가 멀수록 연주시차는 더 작아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일반적인 별들의 연주시차같은 것은 눈으로는, 아니 일반적인 망원경으로도 거의 관측 불가입니다. 고해상도 고집적의 망원경 정도래야 확실하게 보입니다.
그러니 지동설의 가장 큰 아군인 연주시차를 통해 천동설을 무너뜨리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었지요. 특히나 뉴턴 당시에는 말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망원경이 발달하고 연주 시차가 조금씩은 관측되면서 결국은 천동설은 완전히 무너지게 되고, 우리 인류는 지동설의 발판위에 천문을 이해하게 된 것입니다.
지금까지 정말 오랜 시간 긴 이야기를 해왔는데 여기까지 읽어주신 분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보았듯이, 천동설과 지동설의 이야기는 인간에 대한 사싱의 다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면 인간을 지배하던 신과의 싸움이기도 했고 또 일면 자연의 중심으로 버티고 서 있으려도 했던 인간 자신의 자존심 싸움이기도 했습니다.
결국 인간은 신은 이겼지만(비유적으로) 우주의 중심이 되지는 못 했다는 셈입니다. 이는 결국 사상적으로 인간의 한계와 위대함을 동시에 느끼게 해주는 대목이기도 하고, 과학 또는 진실을 통해 인간이 극복해나가야 할 것이 얼마나 많고 힘든 것이가 하는 것에 대한 깊은 고찰을 하게 하기도 합니다.
이후 허블의 발견을 통해 우주의 아주 구석탱이에서 먼지 덩어리가 된 우리이기는 해도, 그래도 지성의 힘으로 그런 것을 알아낸 것은 참 대단하다고 봅니다. 아는 것만큼 모르는 것이 더 많아지니 인간의 한계도 느껴지긴 합니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들은 일상 생활에서도 종종 나오므로 많은 참조가 되길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