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 교회의 신앙이라고 해서 개혁 신앙과 신학을 이야기한다 하더라도 그것 자체가 우상이 되기 쉽습니다. 개혁을 한다는 것이 중요하지 ‘개혁 신학’이라는 체계를 죽겠다고 쥐고 있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배웠으면 깨닫고 거기에 자기를 비춰 보고, 자기 자신의 사상 체계를 비추어 보아서 완고한 것이나 그릇된 것이나 자기 식 생각에 그냥 서 있으면 다른 것을 평가하는 평가의 척도나 혹은 원칙(principle)으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들을 언제든지 다시 신선하게 비판해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주 옳다고 확신하고 받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자기가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도리를 좀 더 받아 가면, 그 거룩한 도리를 좀 더 알았다는 새로운 지식의 터 위에서 그것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비추어서 확인해 보고 옳은 것은 더욱 확신을 가지고 굳혀 가고 미비한 것은 보충해 나가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 정신의 태도인 것입니다.
무엇이든지 자기뿐 아니라 교회가 전통적으로 ‘이것은 옳다’ 하고 한번 정해 놓으면, 거기에 의해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교 행동을 하고 행사를 하는데, 그러한 종교 행동이나 행사에 대해서 덮어놓고 맹종(盲從)하고 맹목적으로 나아갈 때에는 거기에 무서운 오류가 스며들고 뻗어 나가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마음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고 또 하나님께서 가르치신 법에 대해서 우리의 마음자리를 어떻게 취하고 있습니까? 가령 데살로니가 사람과 같이 자꾸 설득해야 비로소 그 말을 받아들입니까, 아니면 베뢰아 사람과 같이 말씀 자체에 깊이 들어가서 받은 내용을 말씀에 의해서 자기가 증험하고 확인하고 살아갑니까? 그렇지 않으면 아덴 사람과 같이 무슨 새로운 소리를 자꾸 해 주어야만 하고 그렇지 않으면 흥미가 없다고 생각합니까? 말씀의 내용을 깊이 가르치고 그것을 들어 버릇하면 자꾸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는 폐단이 생깁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자기네의 생활에는 별로 접촉이 안 됩니다. 아덴 사람들이 바울에게 새로운 소리를 듣기 원하니까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도리를 새로운 소리라고 전하지 않고 어떤 미지의 신의 단, 즉 알지 못하는 신의 단이라는 것을 인용해서, ‘너희 속에 있는 이미 있는 것을 내가 이야기하겠다. 너희들은 벌써 단까지 만들었다. 그 미지의 신이라는 것이 너희 속에 갈구의 대상으로 있지 않으냐? 나는 그것을 이야기하겠다’ 해서 새로운 소리는 없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의 변증, 혹은 변론의 시작이었습니다.
이런 것들에 비추어서 우리를 돌아볼 때에, 우리들은 항상 말씀을 들은 다음에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반성하고 자기를 다시 도마 위에 놓고 총 평가를 하고 붙일 것을 다시 붙이고 잘못된 것은 다시 제거하는 일이 자연스럽게 항상 우리에게 반복되고 있습니까, 그렇지 않고 말씀을 이론으로만 자꾸 가지고 있습니까? 개혁 신학이라는 이론을 신학교 가서 쭉 배우면 별수가 생깁니까? 한우충동(汗牛充棟)의 서적들을 다 읽어 가지고 신학을 섭렵(涉獵)해서 안다고 해서 별스럽게 하나님 나라에 큰 보탬이 될 만한 것이 그 사람에게서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의 거룩한 능력으로 나에게 존재할 때에만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말에 있지 아니하고 오직 능력에 있음이라”(고전 4:20) 하신 대로 능력에 있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