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도비란?
대개 무덤 남동쪽에 남쪽을 향하여 세우는데,
신도(神道)라는 말은 사자(死者)의 묘로(墓路), 즉 신령의 길이라는 뜻이다.
신도비는 원래 중국 한(漢)나라 양진(楊震)의 고대위양공지신도비(故大尉楊公之神道碑)에서
비롯되어 당시는 종2품 이상의 관계(官階)를 지녔던 사람에 한하여 세웠다.
한국에서는 고려시대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이나 전하는 것이 없고
다만 《동문선(東文選)》 기타 문집에 비문(碑文)이 전할 뿐인데
당시는 3품 이상의 관직자 무덤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시대에는 2품 이상에 한하여 세우는 것으로 제도화하였다.
충무공 이수일
1554(명종 9) ∼ 1632(인조 10))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효종 때 북벌계획으로 유명했던 이완대장의 아
버지이다. 자는 계순이며 호는 은암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1554년(명
종 9)에 충주 서촌의 시곡에서 태어났으니 지금의 음성군 감곡면 영
산리이다.
조선 현종때 세워진 이 비는 이조판서 金壽恒이 전(篆)하고 領相 李敬與가 찬(撰)했으며 한성부판윤 金佐明이 서(書)하였다. 비의 크기는 420×97×27
1623년 인조반정에도 가담하여 공을 세웠다. 이듬해 이괄의 난때에
는 평안도병마절 도사겸 부원수가 되어 안현에 진을 치고 이괄의 무
리를 크게 깨트려 공을 세웠다.
반란 초기에는 너무나 황급했기 때문에 우선 훈련되지 않은 부곡의병
사 200여명을 이끌고 서쪽으로 나가 서흥에서 반란군을 막으려 했으
나 적은 사잇길로 하여 서울로 향하고 있었다. 이수일은 원수 장만
을 만나서 병졸 천여명을 얻어가지고 장단에 도착하였다. 이곳에서
작전계획을 세운 뒤에 부하를 격려하며 앞서 나아가고 원수와 생봉
정춘신·남이흥 등은 뒤에 떠나 이수일과 함께 우선 안현을 사이에
고 좌·우에 진을 쳤던 것이다.
이 공으로 진무공신 2등에 녹훈되고 계림군에 봉해 졌다가 부원군에
추봉되고 형조판서에 이르게 되었다. 1632년(인조 10)에 79세로 별세
하니 좌의정에 증직되고 뒤에 충무라 시호했다. 이수일은 어질고 화
순하여 병졸들과 같이 식사를 하는 등 행도을 같이 하였으므로 모두
그를 잘 따랐다. 적을 잘살피고 기회를 보아 승산이 있음을 확인한
뒤에 싸우니 패하는 일이 없었다.
이수 [螭首]
이(螭)자는 본래 뿔이 없는 용 또는 교룡(蛟龍)을 가리키는 글자이다. 그 용어와 양식은 중국에서부터 사용한 것으로, 본래는 이기(彛器)·비액(碑額)·석주(石柱)·석계(石階)·인장(印章)·종(鐘)·정(鼎) 등의 표면과 머리 부분에 용의 형체를 조각하여 장식한 것을 말한다. 이 가운데 비액의 이수가 형체나 크기로 보아 가장 대표적인 것이어서 오늘날의 일반적인 개념이 되었다.
전액
비의 상단부나 개석에 비의 명칭을 새겨 제액(題額)이라고 하며 일반적으로 전서로 쓰면 전액(篆額)이라 하고 예서로 쓰면 예액(隸額)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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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부 [龜趺]
시대가 변하면서 용의 모습 외에 해태 모습을 한 것도 있고,
사실적인 거북 모양에서 점차 변형되어 장중한 것,
패기에 넘치는 것, 우아한 것 등 형태를 달리한 것이 많다.
지의류
지의류에 관한 화석 기록은 별로 없다.
지의류는 균류와 조류가 각각 독립적으로 진화하다가
최근에 지의류로 결합되어 진화되었으리라 보이지만
언제, 어떻게 이루어진 것인지는 확실히 알려져 있지 않다.
더욱이 이러한 공생 관계의 확립은 균류와 조류를 퍼져나가게 하는 새로운 역할을 했다고 본다.
지의류에서만 볼 수 있는 조류인 트레보욱시아속은 토양 속에서
독립생활을 하던 조류로부터 진화되어온 것으로 보인다.
계림부원군 이수일 장군에데한 설명
부원군이란?
조선시대 왕의 장인이나 친공신(親功臣)에게 주던 작호(爵號).
고려 충렬왕 이후부터 나타나는데, 이 당시에도 왕의 장인이나 공신에게 내려준 듯하다.
조선시대에는 외척의 세력을 누르기 위해 1417년(태종 17) 2월 외척봉군과 1444년(세종 26) 7월 부마봉군을 없애면서, 종실과 공신만을 봉군했다. 그뒤 1470년(성종 1) 4월 친공신을 부원군에 봉하면서 왕의 장인도 함께 부원군에 봉해진 듯하다. 〈경국대전〉에서 친공신과 왕의 장인을 정1품으로, '부원'을 더해 '부원군'으로 부르도록 법제화했다. 받는 사람의 본관을 앞에 붙여 불렀고, 같은 부원군이 생겼을 경우에는 옛 지명이나 다른 글자를 넣어 불렀다. 초기에는 직접 정치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했으나, 중기 이후 정치에 참여하면서 많은 문제점이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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