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성문씨 비문의 원문
貞夫人文氏貫江城忠宣公三憂堂諱益漸之后別侍衛諱天日之女也 旣玩長歸于 贈 嘉善大 夫漢城府右尹 諱 謙益 字 子袞, 號 梅軒, 右尹公 鶴城李氏 世宗朝 名臣 知中樞院使 忠肅公 諱 藝 六世孫 直長 諱 遇春之子 以忠孝學行聞于世夫人生於 宣祖壬申二月十三日卒於乙巳 五月八日奉厝于古也前山甲坐之原生二男世歷十餘子姓蕃衍煩不能盡載舊有碑而字沏難記今諸後孫將改豎新表責余表隧之文甚勤余感顧其誠略書如右俾刻于石陰
西紀一九八三年癸亥重陽節
月城 최병민(崔炳玟) 謹撰
後孫 東煥 謹書
정부인 문씨의 관향(貫鄕)은 강성(江城)이며, 충선공 삼우당 휘(諱) 익점의 후손으로 별시위 휘(諱) 천일(天日)의 딸이다. 남편은 증(贈) 가선대부 한성부우윤 휘 겸익이고, 자(字)는 자애(子哀)이고, 호(號)는 매헌(梅軒과 혼인을 하였다. 학성이씨(鶴城李氏)는 세종조(世宗朝) 명신(名臣)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使) 충숙공(忠肅公) 이예(李藝)를 시조(始祖)로 하며, 겸익(謙益)은 그의 6세손인 직장(直長) 휘(諱) 우춘(遇春)의 아들이며, 조(祖)는 5세 어모장군(禦侮將軍) 훈련원정(訓鍊院正) 변림(變林)이고, 겸익(謙益)은 충효(忠孝)와 학행(學行)이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부인(婦人) 강성문씨(江城文氏)는 선조 5년(1572년) 임신(壬申)년 2월 13일에 태어나셔서 1605년 을사(乙巳)년 5월 8일에 돌아가셨다.
묘는 고야 앞산 갑좌(甲坐)이고. 창발(昌發), 융발(隆發) 두 아들을 두었는데 창발(昌發)은 1599년 3월 23일 태어나서 1653년 8월 15일 돌아가셔서 묘는 고야 어머니 묘 앞에 있고, 둘째 융발(隆發)은 1601년 5월 4일 태어나서 1650년 4월 20일 50세에 돌아가셨고, 묘는 유천(瘐川) 갑좌(甲坐)에 있으나 후손은 부전이다. 10여 세대(世代)가 지나는 동안 자손이 번성하여 옛날 비석에는 다 실을 수가 없고 글자 또한 난해하여 기록이 어려웠다. 모든 후손들이 후에 다시 고쳐 세우기로 하고, 그 문장이 아주 중후하고 돌아보는 감회가 깊어 간략하게 써서 위와 같이 비석에 음각하였다.
서기 1983년 계해 중양절
월성 최병민(崔炳玟) 근찬(謹撰)
후손 동환 근서(謹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