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대통령 과연 누가 잘했나! - 2015. 03. 13
정치대12기. 전)화성시의회 의원 박길양
(상편)필자는 모정당의 인사가 국회의원의 자격은 물론 국민이 될 자격도 없는 자가 막말을 하며 우리의 대통령을 마치 나치전범인냥 히틀러 묘역에나 가서 참배를 하라는 식의 말을 하기에 우리의 역대 대통령의 레임덕에 대하여 짚어보고자 한다. 이에 우리의 초대 이승만(李承萬)대통령을 보면 1948년8월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한 건국대통령으로 투철한 국가관과 자주독립정신을 바탕으로 소련의 공산주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반공이념과 한반도에 공산위성국가를 세우려는 조선로동당 김일성위원장의 공산주의가 기존 민주질서를 전복하려는 선전과 투쟁수단을 저지하고 국민에게 자유와 권리를 심어주는 민주주의 국가관을 확립한 민주국가 건국에 사명을 완수하였다. 특히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면서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건의한 것을 계기로 임시의정원에 의하여 탄핵·파면되었으나 1945년 12월부터는 김구·조소앙·김성수등과 함께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관하였고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하였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초대와·2,·3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1952년의 사사오입 개헌을 하여 1960년에 4대 정.부통령 선거에서 연임 되였으며 단호한 반공정책으로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국제적으로 비민주적인 지도자라고 비난받았고 정부수립과 관련하여 제주4.3무장폭동과 여수반란사건을 통하여 대한민국을 전복하려는 공산세력의 총공세와 남한의 5.10총선 교란을 막아내며 국가보안법을 제정하고 토지개혁등의 효과적인 반공정책을 수행하였다. 한편 이승만 대통령은 6.25전쟁 중 탁월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쟁취하였고 안보의 울타리를 튼튼히 하고 김일성이 이끄는 공산집단과 남로당의 세력에 조직적으로 대응하였으나 이승만정부는 장기집권을 위한 사사오입 개헌과 3.15부정선거에 의하여 4.19학생혁명과 부정선거의 규탄으로 정권은 타도되었고 이승만대통령도 사임하고 미국하와이로 망명하여 자유당 정권은 붕괴하게 되였다. 이어 제4대 윤보선(尹潽善)대통령은 4.19혁명에 의해 이승만정권이 붕괴됨에 민주당후보로 대통령에 당선되어‘60년 8월13일부터‘62년 3월23일까지 재임하였으나‘61년인 5월16일 군사쿠데타로‘62년에 쫓기듯이 사임을 하고 민정당을 창당하여 출마하였으나 박정희에게 낙마하고 제5대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이 등장하며 국민소득은 60달러 수준이었다. 박정희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의 건설과 포항제철를 비롯한 중화학공업을 육성하여 근대화를 이룩하였으며 박정희대통령은‘63년과‘67년에 이어‘71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었고 국민운동인 새마을운동을 전개하여 보릿고개을 타파하고 민주화가 절대빈곤에 우선할 수 없다는 논리로 독재와 장기집권하여 한강의 기적을 이루는 산업화에 초석을 다졌다.
한편 월남파병과 서독에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여 차관과 외화를 확보하였고 현지 방문시 전세기로 서독을 방문한 박대통령은 우리광부들이 일하던 함보른 광산을 방문하여 광산입구에 도열하여 박대통령일행을 맞은 광부와 간호사들에게 우리도 한번 잘살아보자 좀더 참고 고생하자는 격려와 육영수여사가 도열한 간호사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누며 한 간호사에게 고향이 어디냐고 말하는 순간 간호사는 대답대신 울음을 터뜨렸다는 일화는 그동안 쌓인 설움이 폭발하여 그 자리에 있던 광부와 간호사들은 말할것도 없고 박대통령을 비롯하여 환영 나왔던 광산악대와 동행한 취재기자들도 눈물을 흘려 애국가가 시작되었으나 흐느낌에 마지막 소절까지 부르지 못하였다. 그 후 국가발전을 위해서는 장기집권이 필요다고 판단하였으나 당시 헌법에는 3선까지로 제한하고 있어‘75년 대선에서 김대중이 집권하게 될 확률이 높아지자 유신헌법의 개헌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바 전라도에서도 압도적으로 지지하여 개헌에 성공하고 장기집권을 하게 되었고 산에 나무 한그루를 심는데도 관심을 가지고 추풍령식 조림이라 하여 나무를 식재할 줄만 벌채하고 나무를 심은후에 심은 나무가 자라면 나머지 줄의 나무를 벌채하여 조림하는 방법까지도 제시하였기에‘73년도 산림과에 근무할때는 추풍령식 조림현장을 견학하여 산에 푸르름을 유지시키는 현실을 보았으나 10.26사건으로 비운의 운명을 다함에 권력의 무상함을 느끼게 하였다.
(중편)
한편 제10대 최규하(崔圭夏)대통령이‘79년12월21일에 등장하였으나‘80년 8월15일에 하야하여 짧은 임기를 마치었고,‘80년9월1일 제11대 전두환((全斗煥)대통령이 등장하여 물가안정과 삼청교육대를 설치하여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하며 사회를 안정시켰으며‘86년 아시안게임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고 88서울올림픽을 유치하고 예금과 재산실명제를 위한 주민등록전산화작업을 하였으나 온라인이 연동되지 않아 시행은 지연되었고 통치자금을 부정축재하여 지탄받는 대통령이 되였다. 또한 제13대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88년 2월25일에 취임하여 제6공화국의 단임직선 대통령제를 시행하였고‘88년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언론자유화와 전교조 불법화 정책대응하고 북방외교 정책을 효과적으로 추진하여 남북한 UN동시가입 등을 이룩하였으나 주택건설 200만호를 달성하고자 무리한 건설을 하여 아파트 가격이 급상승하였고 비자금을 축적하여 지탄받고 반환하였다. 이어 정치구단의 제14대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1990년1월에 노태우.김영삼.김종필이 3당합당을 선언하고 대선에 합세하여 93년2월25일 문민정부를 출범시키고 예금금융실명제를 도입하고 역사바로 세우기와 전직대통령인 전두환 노태우대통령을 법정에서 구속하였고 구조선총독부를 철거하고 신군부의 하나회 등을 해체하고 사상초유의 IMF 외환위기로 국가경제가 뿌리째 흔드는 위기를 맞이하였고 차남 현철의 정치개입과 비리에 연루되자 심복인 이인제의원을 대통령후보에 출마시켜 김대중 정권을 출범시켰다 할 것이다.
다음은 정치10단의 제15대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등장하여 IMF외환위기와 햇볕정책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대중문화를 개방하여 국민의 정부라고 말하며 남북정상회담을 이끌어 내어 6.15남북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2000년12월에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였고 2002년 한일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하였다. 하지만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6.15남북공동선언을 통하여 반국가단체의 수괴와 통일원칙을 무시하고 연방제와 연합제의 혼합방식의 통일안에 합의하여 헌법과 보안법의 실체를 흔들었고 종북세력이 득세하는 내부분열을 가져왔다. 한편 김대중대통령은 국민들을 속이고 현대그룹 정몽헌회장을 앞세워 4억5천만 달러를 김정일의 해외비자금 계좌에 비밀 송금하는 대북의혹사건을 발생시켰고 김홍업과 홍일 두 아들이 권력형비리에 연루되는 부정행위에 얼룩졌다. 또한 이회창후보가 670억의 비자금을 관리하고 있다고 주장하자 노태우 전 대통령한테 20억원을 받았다고 김대중대통령은 인정하였고 미국으로 망명간 前 안기부직원 김기삼은 프런티어타임스와의 인터브에서 김대중대통령의 비자금규모는 최소 6천억 원에서 1조원으로 스위스와 홍콩등지에 분산 예치하였고 국내 굴지의 방산업체인 H사에서 수백억원의 뇌물을 받고 모금융회사를 특혜 분양을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한편 최측근인 박지원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현대측에서 대북사업 협조 명목으로 150억원을 받은 혐의로 구속 수감되었다.
또한 62억원의 실명전환설이 제기되어 검찰이 수사하자 중단을 요청하며 수사를 강행하면 대선은 없어지고 민란을 각오해야 할 것이라며 당시 김태정 검찰총장과 김영삼전대통령을 협박하여 수사는 중단하였고 김대중대통령의 부정축제를 계속수사 할 경우 구속은 피할 수 없었다고 김영삼대통령은 회고록에 기술하였다. 또한 네가티브 전략으로 이회창후보의 아들들에 병역비리 의혹을 여론화함으로 여론조사결과 지지율이 20%급감 하였다. 한편 김대중 대통령은 자민련의 김종필 총재와 DJP연합을 만들었고 1997년11월에는 자유민주연합 박태준의원까지 합세한 DJT연합을 발족하였고 그래도 신한국당에 이회창후보가 우세하자 김대중대통령은 김영삼 전대통령과 밀약하여 차남인 현철의 정치개입과 비리 등으로 대쪽 같은 이회창정권이 출범하게 되면 청문회 등에 설 것이 우려되어 심복인 이인제의원을 대통령에 출마시켜 국민신당을 창당하고 대선에 합류함으로 역사상 처음으로 야당이 정권교체를 이룩하였으며 김대중 대통령은 집권초기에는 IMF외환위기 극복에 총력을 기울여 조기에 경제적위기를 수습하였지만 인위적인 소비정책으로 집권말기에는 집값폭등을 초래하였지만 한국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노벨상평화상을 수상하였으나 로비의혹이 제기되어 국내적으로 언론과의 불협화음이 있었고 김대중대통령은 부축재의 온상인양 아태재단을 비롯한 비자금설과 15억달러의 불법 대북송금설로 국민들에 지탄을 받았다.
(하편)
이어 제16대 노무현(盧武鉉)대통령은 2003년 2월25일에 취임하여 권위주의 척결하고 전시작전통제권을 회수하였으며 한미FTA를 조인하고 불법어로 행위의 근절시켰고 선거공영제를 실시와 행정수도 이전을 확정하였으나 2008년에는 박연차게이트와 관련하여 노무대통령의 비자금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노무현대통령의 친형인 노건평이 구속 되였다. 또한 선물을 받아 버렸다는 1억짜리 피아제 고급시계 2개와 2012년2월에 딸 노정연의 미국 뉴저지주 허드슨 클럽아파트 차명매입과 계약금 전달과정에서 경연희에게 13억원을 환치기 방식으로 송금하여 외국환관리법을 위반한 노정연을 조사하였다. 하지만 노무현대통령의 서거로 수사는 중단하였으나 2012년 월간조선 12월호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노무현대통령은‘김정일 앞에서 위원장께서 너희가 뭘한게 있느냐고 하시지만 우리도 열심히 하였습니다’라고 하였고‘그러니까 차기정권에 쐐기를 박자는 것 아닙니까’라는 내용을 보면 어떤 정상회담의 외교경로에도 없는 굴욕적인 회담을 하였으며 10.4공동선언문의 협약내용을 보면 노무현대통령은 NLL선은 합의되지 않은 선 이라고 하였고, 북이 늘 주장하는 국제법상 영토선 기준에 맞지 않는 합의되지 않은 선이라는 주장을 인정하였고 우회적으로 NLL선을 무력화 하였다. 한편 북핵을 사실상 용인하였고 북핵이 포기되지 않은 상태에서 종전추진이 협의 되었으며 북한에 조선공단을 조성하여 주고 철도와 고속도로의 개.보수 지원을 약속하고 국군포로의 송환이나 납북자의 송환은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은 회담을 하였다.
또한 주한미군의 수도권에서 지방으로 나가게 하였고, 전시작전권도 미국으로 부터 환수하고 있지 않습니까라고 말하였고 최근 반미여론을 조성한 결과 우리안보에 가장 위험한 나라가 미국.일본이고 세 번째가 북한이라고 하였다는 내용과 또한 해외순방길에서 북한의 핵개발에 당위성을 말하며 왜, 인도의 핵개발은 되고 북한의 핵개발은 안되는가 라고 설득하고 다녔다고 하였다. 한편 국방은 일본과 중국을 대비하여 방어태세를 확립하고자 강화하는 것이라고 말하였고 노무현대통령은 김정일위원장과 부시대통령 세 사람이 종전선언회담과 평화협정을 맺자고 제의하였다. 노무현대통령은 붉은 악마로 대변되는 세대혁명을 에너지원으로 해 2003년 노무현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브랜드는 참여정부였다. 집권이후 전 국민적 차원에서 참여정부라는 진정성을 체험해보고 공감할 수 있는 구체적 이벤트는 없었다. 하지만 노무현대통령의 탄핵을 둘러싼 여야간 공방과 헌법재판소 심판사태는 국민에겐 참여 이벤트라기 보다는 한바탕 국력만 소진한 분란으로 마무리 되었다. 한편 노무현대통령은 권위주의 탈피한 최초의 탈권위주의 대통령으로 오히려 야당에서는 대통령다운 제왕적 리더십을 요구하는 일마져 벌어졌고 집권 후반기에는 개혁과 정권의 무능함을 보여 보수층의 결집을 가져왔다.
이어 제17대 이명박(李明博)대통령이 출범하였고 이명박대통령은 저탄소 녹색성장을 유도하고 4대강사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으며 G20 정상회의 개최국과 의장국으로 세계질서의 구심점역활을 하여 경제, 에너지, 자원, 기후변화 뿐만아니라 기아와 빈곤퇴치등 글로벌이슈를 논의하였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을 유치하고 경제 대통령을 내세운 이명박대통령은 글로벌 금융위기를 잘 헤쳐 나왔으나 민심의 평가는 냉정하고 광우병파동과 4대강사업을 둘러싸고 국론은 보수 진보로 나눠져 적대감이 고조되었다. 하지만 이명박대통령은 집권기간내내 고소영코드인사와 강부자내각의 회전문인사로 국민들의 지탄을 받았다. 한편 30여개의 국가와 FTA를 확대추진하였고 세일즈외교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있으나 자원외교는 실패하였으며 소통력 부족으로 국민들의 공감을 받지 못하고 비난 받는 가운데 임기를 다하였다. 이어 18대 박근혜(朴槿惠)대통령은 경제살리기에 중점을 두어 매진하며 원칙이 바로선 남북교류 협력을 추진하고 통일대박론을 주장하기에 평가는 지양하고 역대정부의 남북교류협력기금 등을 이용한 대북지원사업을 살펴보면 김영삼 정부는 2천314억원을 지원하였고 김대중 정부에서는 8천557억 원을 지원하였다. 한편 노무현 정부는 1조8천824억 원으로 가장 많이 지원하였고 이명박 정부는 413억 원을 지원하여 천안함 폭침사건과 연평도폭격사건을 당하는 혹독한 대가를 치루었다. 이에 전직 대통령의 업적과 실정에 대한 분석을 마치고 필자는 광복70주년과 정부수립 70주년에 대비하여 우리에 대통령상을 재조명하고 건국이념을 확립하여 역사를 바로 세우는 계기가 되길 기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