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가 미국의 공습을 받고 있다는 뉴스가
포연을 내 뿜는 선명한 컬러 사진과 함께 신문의 1면을
가득 채우고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남의 나라에서, 남의 나라 국민이 폭격받고 있는
공포를 우리는 굳이 상상해 가며 겁에 질리지는 않습니다.
완전히 강건너 불구경이니까요.
내 발등에 떨어진 불이 되어야 겁이 엄청날 겁니다.
전쟁이 사람의 운명을 어떻게 바꿀까요?
전쟁이 없는 동안의 인생은 자기의 노력 여하에 따라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다 할 것이지만,
전쟁은 한 개인의 운명을 어디로 내칠지 모릅니다....
1990년 여름. 영국 히드로 공항.
여름휴가로 들뜬 분위기의 공항대합실에 왁자한 한국어가 반갑게 난무하고 있었습니다.
제각기 하나하나의 사연을 가지고 외국여행을 나온 이야기와
오랫만에 만난 한국사람에 대한 반가움으로 공항안은 즐거운 축제였습니다.
제각기 가진 하나의 사연에 제가 가진 사연은 이랬습니다.
당시 다니던 회사에서 영국으로 기계를 발주했는데, 그 기계의 성능검사라는
그럴 듯한 핑게를 억지로 만들어 내어, 1주일간의 유럽여행과 아울러 보름간의
영국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이었지요...
옆자리에 계시던 40대 초반의 한국인 부부와 아이들은 쿠웨이트 주재원으로 계시다가
한국으로 3달간 휴가를 가시기 위해 전 가족이 쿠웨이트에서 영국으로 나오셨고,
또 옆의 반바지 차림의 청바지 대학생은 홍익대 미대출신으로 영국으로 유학을 왔는데
같이 공부하는 일본여학생의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일본여학생을 환송하기 위해 나왔다고
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면서도 그 당시의 분위기가 소리없는 슬로모션으로 떠 오릅니다.
그 분들 다 들 무얼하고 계시는지..
/*곁가지로 흐르는 이야기입니다만,
88년 올림픽기간때는
홍콩첵랍콕 공항에서 디자이너 앙드레김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당시 저의 몰골은
하늘색 싸구려 기성양복에 하얀 양말신고, 깡총한 짧은 넥타이를 메고,
자수간첩 기자회견할 때 하는 머리를 하고 있었고요.
앙드레 김은 당시 7~8세의 양아들을 세일러복 입혀 손 잡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앙드레김에게 다가갔습니다.
경상도 머스마가 정중히 표준말을 쓰면서 이랬지요.
"앙드레 김 선생님 아니십니까? 반갑습니다."
그 때, 하늘이 무너질 듯 놀라던 앙드레김의 얼굴이라니...
외국공항에서 한국사람을 만났기 때문에? NO!
영화배우 최은희씨가 홍콩에서 북한공작원에게 납치된 기억이 생생하던 때라,
덩치가 산만하고 시커먼 놈이 이상한 억양의 인사말을 하니
저를 북한 공작원으로 봤기 때문이었습니다.
"아~ 저 한국에서 왔습니다."
그제서야 안도하면 반갑다고 손을 내밀던 앙드레김..
맞잡았던 손에서 느껴지던 미세한 떨림이 아직도 기억납니다.*/
음..
완전히 옆길로 빠졌습니다.
다시 본론으로..90년의 영국히드로 공항으로 돌아갑시다.
그렇게 한국사람들이 유치원 동창 만난듯이 반갑게 서로 이야기하는 사이로
키가 거의 2m 가까이 되어 보이는 사람들이 길다란 가방을 울러메고 츄리닝 차림으로
우리 한국 사람들 사이로 지나 갔습니다.
보기에는 20대 쯤으로 보이는데 한결같이 콧수염을 길렀고,
우리 한국사람들 사이로 뻣뻣하게 지나가면서 미안한 표정하나 없이
건방지게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건방스럼이 줄줄흘렀습니다.
세상천지에 지녀석들 밖에 없는 행동이었지요..
지나가는 녀석들의 등짝에 써 있는 영어를 읽어보니
"쿠웨이트 펜싱팀"이라 되어 있었습니다.
자식들이 그래.. 펜싱을 하는 운동선수에다가..
천지가 다 자기것 같은 20대에다가..
패거리라는 의식이 작용했겠지요..
별다른 충돌과 그 녀석들과의 기억에 남을 에피소드는 더 없었습니다.
공항대합실에서의 건방진 녀석들을 비행기 탑승하기 위해
출국Gate에서 한번 더 본 것 밖에는요..
스쳐지나가는 인연이었겠지요..
열 몇시간의 비행 후 김포공항에 내렸습니다.
김포공항의 TV에서는 긴급뉴스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이라크 쿠웨이트 침공!"
쿠웨이트?
천방지축 까불던 그 쿠웨이트 펜싱팀 녀석들은?
분명히 자기나라 비행기를 타는 것 봤는데...
그리고 같은 비행기를 타고 3개월간 휴가를 위해 한국으로 돌아 온,
쿠웨이트주재원 아저씨 가족은..
전쟁이란 운명의 장난 속으로 아무 것도 모르고
들어 간, 20대의 쿠웨이트 젊은이들의 운명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한발 차이로 가족을 모두 데리고 쿠웨이트를 빠져나온 주재원 아저씨는
또 어떤 감회가 들었을까요?
전쟁이 흔들어 버리는 인간의 운명이라고나 할까요..
오늘 아침 신문보고 갑자기 그 기억이 생각나 적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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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운명. 앙드레 김.
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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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03.21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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