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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朝鮮)의 이십사(二十四) 절기(節氣)
○ 월력(月曆)을 바탕으로 하는 24 절기(節氣)는 인간(人間)이 살아오면서 축적(蓄積)된 여러 현상을 모아 만든 것이며, 이 근본(根本)은 농경 족(農耕族)들일 것이다. 『절기(節氣)는 음력(陰曆)을 쓰는 농경(農耕)사회에서 양력(陽曆)과 관계없이 만들었지만, 태양(太陽)의 운동을 바탕으로 한 탓에 결과적으로 양력(陽曆)의 날짜와 일치하게 된다. 』고 설명하고 있다. 또한 『달력을 보면 24절기는 양력(陽曆)으로 매월 4∼8일 사이와 19∼23일 사이에 오는데, 이는 절기(節氣)와 절기(節氣) 사이가 대략 15일 정도이며, 어떤 때는 14일이나 16일이 되기도 하는데. 그것은 지구(地球)의 공전 궤도가 타원형이어서 태양(太陽)을 15° 도는데 걸리는 시간이 똑같지 않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이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농경사회(農耕社會)는 계절(季節)에 특히 민감(敏感)할 수밖에 없는데, 계절(季節)따라 씨를 뿌리고, 그것을 수확(收穫)하는 시기(時期)와 날씨를 알 수 있어야 했기 때문일 것이다. 씨 뿌리기와 수확 철을 모른다면 낭패를 당한다.
유목종족(遊牧種族) 역시 계절(季節)따라, 수초(水草)를 따라 이동(移動)해야 했기 때문에 필요했을 것이나, 그들은 대개 스텝건조기후대에서 생활을 영위했기 때문에 농경(農耕)을 주로 하는 사람들이 필요한 것과는 많은 차이가 있다. 이것은 본인의 생각일 뿐이다. 유목종족에겐 사실 <24절기>는 무관(無關)할 것이다. 그들은 계절이 바뀌거나 가뭄으로 풀이 자라지 않고, 사람과 가축이 마실 물이 없으면 새로운 곳으로 계속 이동(移動)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 백과사전. 카페 등에서 찾아 본 결과 『우리나라에서 사용하던 달력은 삼국시대(三國時代)에 백제(百濟)가 중국의 송(宋)나라에서 들여온 원가력(元 嘉 曆)을 사용했던 기록이 있으며, 그 후 조선(朝鮮) 세종(世宗) 때에는 일종의 태음력인 칠정 산 내 편(七 政 算 內 篇)과 외편(外篇)의 역법을 만들었는데, 칠정(七政)이란 역 목(曆 目)· 태양(太陽)· 태음(太陰)· 중성(中星)· 교식(交 食)· 오성(五星)· 사 여성(四 餘 星)의 7개 천문을 일컫는다. 실제의 달력을 사용한 것은 조선조 효종(孝宗) 4년(1653년)에 청(淸)나라에서 수입된 서양천문학에 영향 받은 시헌력(時 憲 曆)을 채용한 때이고, 현재 사용되는 태양력(太陽曆 : 양력)은 고종(高宗) 32년 (1895년)이 처음이다.』 라는 설명으로 마무리가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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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史記) 오제(五帝) 본기(本紀) / 황제(黃帝) 편을 보면,
《軒 轅 之 時, 神 農 氏 世 衰. 諸 侯 相 侵 伐, 暴 虐 百 姓, 而 神 農 氏 弗 能 征. 於 是 軒 轅 乃 習 用 干 戈, 以 征 不 享, 諸 侯 咸 來 賓 從. 而 蚩 尤 最 為 暴, 莫 能 伐 . 炎 帝 欲 侵 陵 諸 侯, 諸 侯 咸 歸 軒 轅. 軒 轅 乃 修 德 振 兵, 治 五 氣, 蓺 五 種,〔六〕<中略>. 》
〔六〕集 解 駰 案 : 蓺, 樹 也. 詩 云「蓺 之 荏 菽」. 周 禮 曰 「榖 宜 五 種」. 鄭 玄 曰 「五 種 ,黍 、 稷 、 菽 、 麥 、 稻 也』. 索 隱 藝, 種 也, 樹 也. 五 種 即 五 穀 也, 音 朱 用 反. 此 注 所 引 見 詩 大 雅 生 民 之 篇. 爾 雅 云 「荏 菽, 戎 菽」也. 郭 璞 曰 「今 之 胡 豆」, 鄭 氏 曰 「豆 之 大 者」 是 也. 正 義 蓺 音 魚 曳 反. 種 音 腫 。
● 주해(註解) : 鄭 玄 曰 『五 種 ,黍 、 稷 、 菽 、 麥 、 稻 也』: <정현이 말하기를, 오종(五種 : 즉 오곡)은 찰기장(黍). 메기장(稷). 콩(菽). 보리(麥). 벼(稻)이다.>
● 이러한 기록을 보면, 황제(皇帝)때도 오곡(五穀 : 오종)이 있었다는 말이며, 재배했다는 것을 증거(證據)하는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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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漢 書 卷 四 . 文 帝 紀 第 四 편을 보면,
《春 正 月 丁 亥, 詔 曰 : 「夫 農, 天 下 之 本 也, 其 開 藉 田,〔一〕朕 親 率 耕, 以 給 宗 廟 粢 盛. 民 謫 作 縣 官 及 貸 種 食 未 入, 入 未 備 者, 皆 赦 之.』 : 봄 정월(正月) 정해, 조서(詔書)를 내려 말씀하시기를 ; 『농사(農事)는 천하(天下)의 근본(根本)이라, 적전【藉 田 : 제왕이 친히 가는 전지】을 만들라. 짐【朕 : 황제가 자신을 이르는 말】이 친히 솔선하여 밭을 갈아, 열매가 맺으면 기장(곡식)을 담아 종묘(宗廟)에 보태겠다. 현(縣)의 관리들은 백성들이 벌을 받아 곡식의 종자를 빌리지 못했거나, 아직 준비하지 못한 자는, 모두 사면하라 하였다.》
(註釋)〔一〕 臣 瓚 曰 : 景 帝 詔 曰 『朕 親 耕, 后 親 桑, 為 天 下 先』: 신하 찬(瓚)이 이르기를, 『경제(景帝)는 조서에서 말하기를, 짐(朕)이 친히 경작하고, 왕비(王妃)는 친히 양잠(養蠶)을 하는 것이 천하의 우선이다.』라 말씀하셨다. <설명코자 하는 부분만을 발췌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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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 자 천 하 지 대 본 <農 者 天 下 之 大 本) - 농업(農業)은 천하(天下) 사람들이 살아가는 큰 근본(根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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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九 月, (中略) 詔 曰 :「農 , 天 下 之 大 本 也 , 民 所 恃 以 生 也. 」 : 구월, 조서(詔書)에서 이르기를, 농사(農事)는 천하(天下)의 큰 근본(根本)이다. 백성들이 믿고 의지하는바 삶이다. 》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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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옛 사람들은 <농사를 천하의 가장 큰일>이라고 생각했고, 또 실천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이는 당연한 이야기일 것이다. 인간(人間)은 먹어야 살고, 체력을 유지하고, 자손을 낳고,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며, 이는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알 수 있는 “본능(本能)”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농경(農耕)을 위주로 하는 곳은 당연히 많은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며, 그곳엔 씨를 뿌릴 농지(農地)가 있고, 그 씨앗들이 싹을 트고, 생육할 수 있는 물이 있어야 하며, 자라는 동안 누군가가 도움을 주어야만, 풍성(豊盛)한 수확을 거 둘 수 있다.
벼의 어린모를 심고, 보리 씨앗을 뿌리고, 콩을 심고, 기장을 뿌려 씨앗이 잘 자랄 수 있도록 충분한 물과 거름을 주고, 잡초를 뽑아주며, 태양의 따사로움을 충분히 받아 열매가 알차게 맺도록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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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러한 것은 지구(地球)의 대부분 지방(地方)에서 행하는 보통의 것이나, 특이한 지형지리(地形地理)를 갖고 있는 곳은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곳이 있다.
【 현대의 실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고대(古代)와 중대(中代)를 말하는 것이며, 근세(近世)는 19세기 이전을 말한다.】
곧 《동토(凍土)지대, 건조(乾燥)지대, 사막(沙漠)지대, 초원(草原)지대, 산악(山嶽)지대, 염분(鹽分) 또는 로(鹵)지대》등이다. 여기서 “중앙아시아”가 <조선(朝鮮)의 조정(朝廷)이 있었다.>고 하는 곳은 <사막(沙漠)지대와 초원(草原)지대, 건조(乾燥)지대>가 함께 존재(存在)하고 있는 곳이다.
이곳은 아주 건조한 곳이라서, 야산(野山)엘 가보면 나무가 자라지 못해 벌거숭이가 대부분이며, 단단한 흙속을 터널처럼 뚫어 굴속에 사는 사람도 있으며, 이곳에 종교(宗敎)시설이나 여러 사원(寺院)들이 들어서 있으며, 불상(佛像)도 조각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사람이 죽어 매장(埋葬)을 해도 부패(腐敗)가 되지 않아 수백(數百)년 전의 “미라”가 많이 발견되기도 한다. <사마르칸트>의 박물관을 가보면 그것을 쉽게 볼 수 있다고 한다.
<본인은 그곳엘 가보지 못해 직접 확인하지 못했으나, 그곳을 여행한 분의 여행기록을 본 것이다.>
본인이 이곳과는 조금 다른 곳이지만 사우디아라비아 사막(沙漠)지대【이라크와 쿠웨이트 가까운 접경의 사막지대에서 미 공병단과 함께 2년여 생활을 했다. 또 1,900 고지에서도 수년을 살았으며, 전형적인 모래사막,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오직 모래만 쌓여있는 곳에서도 살았다.】에서 수년(數年)을 살았는데, 이곳은 모래와 자갈과 띄엄띄엄 백초(白草)와 가시가 많은 풀과 유난히 멋스런 향기와 울긋불긋한 색깔을 자랑하며 꽃이 피는 앉은뱅이 가시나무, 또 그 나무 밑에 굴을 파 놓고 사는 50cm가량의 큰 누런 도마뱀【상상외로 큰 도마뱀인데, 사막에 수없이 많이 있다. 당시 이것을 생포해 고아 먹은 분도 여럿 있었다.】과 낙타(駱駝)와 말(馬)과 양(羊)떼들과 이를 몰고 다니는 유목민들, 그들이 사는 천막, 유목민 그들의 어깨엔 총이 매여 있고, 허리엔 단검을 차고, 회초리 하나들고 가축들을 돌보는 곳이다.
섭씨 45도 정도의 열을 계속 받으면, 바위위에 운동화를 신고 있어도 발바닥이 뜨겁다는 것을 느낄 정도의 열기를 내 뿜는 그곳을 맨발로 서 있는 유목민의 어린 소녀! 그 녀의 한 손엔 어김없이 회초리가 들려있음을 볼 수 있다. 또한 그 소녀의 뒷발굽을 보면, 대략 2cm 정도의 두터운 살이 박혀있어 뜨거움을 별로 느끼지 못하도록 단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들의 이러한 생활은 일, 이 십년(十年)이 아닌 수천(數千)년, 수백(數百)년전의 그 생활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을 뿐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옷감의 재료(材料)와 천막의 재질(材質), 그리고 생활도구와 총이다.
이들의 주식(主食)은 밀 가루 빵으로 우리나라 ‘전’과 같이 넓게 만들어 구워 그것을 조금씩 찢어 그 안에 ‘소스’를 넣어 싸 먹는다. 또 가끔은 양고기를 먹는데, 솥 바닥에 쌀을 깔고, 적당한 양의 물을 넣은 다음, 그 위에 양을 올려놓고, 불을 때 익히는데, 후에 그 쌀은 양고기 기름으로 인해 노랗게 익어 먹음직스럽다. 양고기는 살을 뜯어 먹으며, 노랗게 익은 쌀밥은 손으로 집어 먹으면 된다. 그러나 우리는 비위가 약해 처음 먹는 사람에게는 고역(苦役)이 될 수 있다. 음식점의 양고기 꼬치는 아주 맛이 좋은데, 붉은 양파, 토마토, 고추를 썰어 넣은 ‘소스’와 함께 먹는다면 가히 ‘일품요리’라 할 수 있다. <한국인들은 미리 시장에서 쌈과 고추와 마늘을 사 가지고 비닐봉지에 넣어 가지고 간다. 양고기 고치를 먹을 때 싸먹으려고 말이다.>
오아시스가 있는 곳엔, 밀과 수박, 대추야자나무 등과 일반적 나무들이 자라고, 또 필요한 것은 재배도 물론 한다. 오아시스 근원지엔 그곳에 시멘트와 돌로 조그만 방죽처럼 만들어 놓고, 각 농지(農地)로 수로(水路)를 만들어 물을 대며, 이곳에서 어린 아이들은 수영도 곧 잘 한다. 내가 본 그 수로(水路)는 당시 현지인의 말에 따르면, 오십년 이상 된 것이라고 했다. 아마도 영국 또는 독일인들이 만들어 놓은 것 같았다.
비는 일 년에 몇 차례 그것도 겨울철 몇 차례 소나기처럼 내릴 뿐 그 나머지 기간은 오직 태양뿐이다. 또 3, 4월 계절이 바뀔 때가 되면 소위 “한 라 스 바람”이 폭풍처럼 몰아치는데 그 땐 모래 산이 하나 갑자기 생겨나고, 있었던 모래언덕이 흔적 없이 사라지기도 하며, 세상천지가 암흑(暗黑)이 되어 꼼짝없이 그곳에 마냥 섰거나 앉아 있어야 한다. 다행히 그곳에 조그만 장애물(障碍物)이라도 있다면 최대한(最大限) 빨리 엄폐(掩蔽)할 수 있어야 한다. 잊지 말 것은 수건이나 천으로 전 얼굴과 목 등을 모래가 들어가지 않도록 최대한 감싸는 것은 필수적(必須的)인 행동이다.
이곳지방을 가면, 고속도로(高速道路) 노견(路肩) 쪽 수백(數百) 미터에 “콜타르”를 무식할 정도로 뿌려놓았다. 이게 무엇인가하면, 모래가 날려 도로(道路)에 쌓이는 것을 방지하고, 도로(道路)라는 것을 알게 해주는 역할을 한다.
이런 폭풍이 몇 회 지나가는데, 어떻게 알 수 있는가하면, 저 멀리 북쪽 하늘이 갑자기 깜깜해지니 그곳을 바라보면, 천지(天地)가 온통 암흑(暗黑) 같은 것들이 몰려오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참으로 장관(壯觀)이다. 이때부터 최대한 기동력(機動力)을 발휘하여 엄폐(掩蔽)할 곳을 찾고, 얼굴에 천을 두르고, 소매 단추를 끼고, 마침 차가 있다면 모든 창문을 닫고, 그곳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이것이 기본적(基本的) 방어(防禦) 매뉴얼이다.
이곳의 명물(名物)은 바로 “수박”이다. 멀리서 오는 것이나 이곳의 “수박”은 동그란 것이 아니라 호박처럼 길쭉한 모양을 가지고 있으며, 대단히 크다. 그것의 맛은 기가 막힌다. 또한 대추야자는 그것을 숙성시켜 만든 것은 설탕보다 더 달며, ‘샤이’라는 홍차는 그들은 우리가 물을 마시듯 한다.
이들의 습성(習性)은 유목종족의 똑같은 모든 것을 그대로 답습(踏襲)해 왔기 때문에 철이 되면, 차에 천막(天幕)과 살림살이와 낙타(駱駝)와 말(馬)과 양(羊)떼를 몰고 이동하곤 한다. 이러한 이들의 생활과 풍습(風習)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또한 이들은 부족(部族)의 족장(族長)에게 절대 복종(服從)함은 기본적 의무(義務)이다. 이들은 이렇게 따로 따로 유목(遊牧)생활을 하기 때문에 가족(家族)단위로, 종족(種族)단위로 생활을 하며, 이들에게는 도둑질, 여인을 범하는 것, 살인(殺人)등은 가차 없는 쌍 벌의 벌칙(罰則)이 따른다. 곧 도둑질하는 자는 그 손을 자르고, 배상해야 하며, 여인을 범한 자는 참수(斬首)를 당하며, 살인(殺人)을 한 자 역시 참수(斬首)당하는 무서운 형벌(刑罰)이 가해진다. 또한 유목(遊牧)종족의 경계를 허락 없이 침입(侵入)하는 자는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이들은 총과 칼을 항상 가지고 다니며, 때로는 위협사격도 한다.
○ 이들의 이러한 풍습(風習)을 무식(無識)한 것이라 매도(罵倒)한다면, 그 분은 이 사람들보다 더 무식(無識)한 자이다. 이러한 악조건(惡條件)하에서, 많은 무리들이 서로 떨어져 가족단위로 이목(移牧)생활을 할 때, 적들의 침입, 노략질 하려는 자, 원수를 갚으려는 자, 부녀자를 빼앗으려 하는 자, 가축을 훔치려는 자들이 침입했을 때, 가족(家族)의 생명과 가축(家畜)을 지켜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가축을 잃어버린다면 그 가족들은 굶어 죽게 되며, 또 사랑하는 가족들을 적(敵)으로부터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 “코란!” 회교도(回敎徒)들에겐 목숨과도 같은 존재일 것이다. 회교(回敎)는 기독교(基督敎)에서 파생(派生)된 것이며, 그 교리(敎理)는 당시의 사회(社會)풍습(風習)을 그대로 담고 있다. 이것은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었고, 신성(神聖)시 되었을 것이며, 지금도 그 내용은 아주 과학적(科學的)으로 만들어져 있다. 물론 회교(回敎) 역시 과격파(過激派)와 온건파(穩健派) 등 그 교리(敎理)를 해석(解釋)하는 것에 따라 다른 종교(宗敎)와 같은 맥락이다.
○ 우리는 이해(理解)하기 어려운 것이나, 그 땅에 살고 있는,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당연한 것이다. 『 그 땅, 그 백성(百姓), 그 풍속(風俗), 그곳의 기후(氣候), 그곳의 산물(産物), 그곳의 지형지리(地形地理)등에 맞게 되어 있기 때문이며, 그들은 그 교리(敎理)와 함께 생활(生活)의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 아내를 여럿 두는 그것은 당시의 사회상(社會相)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가 있다. 부족(部族), 종족(種族)간의 수없는 싸움으로 매일 죽어나가는 것은 남자들인 장정(壯丁)들이다. 이렇게 죽어나가는 장정(壯丁)들은 아버지요, 또 아들이요, 또 남편이다. 이들이 싸움터에서 죽고 나면 그 아내, 또 자식과 나이 많은 부모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는 일, 이래서 이런 것이 생겨난 것이며, 자선(慈善)은 어린 아이들이나 나이 많은 사람들, 홀로 사는 사람들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다.
○ 이러한 종교(宗敎)가 중앙아시아에 전파(傳播)되어 일상(日常)화되었다면, 그곳은 “회교”가 태어난 곳과 비슷한 기후와, 지형과, 산물과 풍습을 가졌을 때일 것이다. 현재를 말하는 것이 아닌 그곳에 “회교(回敎)”가 전파(傳播)될 때를 말하는 것이다. 또한 당시에 그곳의 군주(君主)가 회교(回敎)신자(信者)였을 경우, 전파는 급속도로 빠르게 진행됐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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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중앙아시아가 “조선(朝鮮)의 중국(中國)”이라고 했을 때, 모든 것은 그곳의 기후(氣候)와 산물(産物), 지형지리(地形地理), 풍속(風俗), 방향(方向), 종족(種族)과 백성(百姓) 등이 적절(適切)에게 조선(朝鮮)의 옛 기록과 부합(附合)될 수 있어야만 가능하다.
또한 주위(周圍) 각 나라와의 관계, 주위의 부족(部族)이나 종족(種族)과의 관계, 농경(農耕)과 유목(遊牧)의 괴리(乖離), 영토의 지리적(地理的) 구도(構圖), 산(山)과 하천(河川)과 호수(湖水)등의 천연적(天然的)인 지형(地形), 각각의 팔도(八道)와 그 주현(州縣), 팔도(八道)의 특색(特色)과 주현(州縣)의 특색(特色), 동쪽과 남쪽의 바다(海)등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들이 산적(山積)해 있는 것이 바로 “중앙아시아 조선(朝鮮)설”이다. 특히 그곳에서 “팔도(八道)”를 배치 할 곳이 없다.
※ 『<대륙조선(大陸朝鮮)>은 <아시아/조선>을 담을 수 있으나, <아시아/조선>은 <대륙조선(大陸朝鮮)>을 담을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근세(近世) 격동(激動)시대에 그곳을 남김없이 파괴(破壞)했다는 식의 논리(論理)는 “그곳이 조선(朝鮮)의 중국(中國)이 아니었다.”는 것을 스스로 말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이해(理解)를 구(求)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유물(遺物), 유적(遺蹟)은 파괴(破壞)가 가능할 지라도, 지형(地形), 지리(地理)마저 완전 파괴(破壞)한다는 것은 불가능(不可能)하기 때문이다. 또한 사막(沙漠)지대나 초원(草原)지대가 근세(近世) 기후(氣候)의 변화(變化)로 인해 새롭게 생겨난 것이라는 논리(論理)는 과학적(科學的)으로 전혀 입증(立證)이 되지 않는 논리(論理)이다. 전한서(前漢書)를 보면, 당시에도 현 신 강성(新疆省)과 그 서(西)쪽 지방은 지금과 비슷한 환경(環境)을 기록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수량(水量)의 변화로 인한 사막(沙漠)의 확대(擴大)나 축소(縮小)등은 그 면적의 변화일 뿐 근본적인 것은 아니다. 산(山)에 나무가 자라지 않아 대부분 벌거숭이산이 많은 것은 기후(氣候)와 지질(地質)에 관한 것으로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 중요한 것은 동쪽지방인 신 강성(新疆省)과 그 동쪽지방에 대한 의문(疑問)일 것이다. 그러면 “중국(中國)”의 동쪽지방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에 봉착(逢着)된다. 도대체 무엇이 있었을까?
그 넓은 동서(東西) 일만(一萬)리 땅에, 남북(南北) 일만(一萬)리 땅에, 수많은 백성(百姓)들이 수만(數萬)년, 수천(數千)년을 살면서, 이루어 놓은 많은 것들은 무엇이었느냐 하는 문제다. 이게 핵심(核心) 과제(課題)일 것으로 생각된다.
더하여, 현재로 보면, 대륙의 땅은 대부분 황인(黃人)종이며, 중앙아시아 지방은 백인(白人)에 가까운 덩치가 크고, 색목인(色目人)이며, 눈은 깊고, 코는 높으며, 수염과 몸에 털이 많이 나 있는 종족들이다. 물론 그곳 역시 종족(種族)이나 부족(部族)간에 다소(多少) 차이는 있을 수 있겠으나, 같은 부류라 해도 상관없을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조선(朝鮮) 역시 다민족국가였다는 옛 기록에 따른다 하더라도 변경(邊境)지방에 곧 <관북(關北)의 여인들은 얼굴이 희고, 체구가 크다>는 기록으로, 이것을 말하여 <남남북녀【南男北女 : 함 관 남쪽지방의 잘 난 남자와 함 관 북쪽지방의 잘 난 여자를 말하는 것이며, 이곳 여인들은 베 짜기를 아주 잘 한다. 이것은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양탄자와 같은 것일 가능성이 많다. 가격이 금값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라는 말이 생겼을망정, 이것은 소수의 특별한 것이기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조선(朝鮮)의 많은 백성(百姓)들은 백인(白人)이 아닌 황인(黃人)이었다는 말이 된다. 똑같이 얼굴이 희고, 체구가 큰 인물들이었다면 특별히 기록할 일도 없거니와 “남남북녀(南男北女)”란 말은 생길 타당성이 없다.
본인은 『조선사(朝鮮史)를 위해 다양(多樣)한 의견(意見)과 주장(主張)을 받아들인다. 그러나 의견(意見)과 주장(主張)은 조선(朝鮮)의 각 나라와 그 시대의 사회상과 객관적인 합리성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래 24절기에 관한 것은 인터넷 상에서 카피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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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봄 절기(節氣)
➊ 입춘(立春) - 02월 04일 또는 05일 : 추운 계절이 지나가고, 봄에 들어선다.
➋ 우수(雨水) - 02월 18일 또는 19일 : 내리던 눈은 그치고, 비가 온다.
➌ 경칩(驚蟄) - 03월 05일 또는 06일 : 겨울잠을 자던 개구리가 땅밖으로 나온다.
➍ 춘분(春分) - 03월 20일 또는 21일 : 봄기운이 늘고, 밤과 낮의 길이가 같다.
➎ 청명(淸明) - 04월 04일 또는 05일 : 따듯하며, 맑은 봄이다.
➏ 곡우(穀雨) - 04월 20일 또는 21일 : 촉촉하게 내리는 봄비 맞으며 새싹이 움튼다.
(2) 여름 절기(節氣)
➊ 입하(立夏) - 05월 05일 또는 06일 : 더위가 시작된다.
➋ 소만(小滿) - 05월 21일 또는 22일 : 식물의 푸름이 조금씩 대지를 뒤덮는다.
➌ 망종(茫種)_06월 05일 또는 06일 : 씨를 뿌려 한해의 농사를 시작한다.
➍ 하지(夏至)_06월 21일 또는 22일 : 여름의 한 가운데. 낮의 길이가 가장 길다.
➎ 소서(小署)_07월 07일 또는 08일 : 작은 더위.
➏ 대서(大署)_07월 22일 또는 23일 : 큰 더위.
(3) 가을 節氣
➊ 입추(立秋) - 08월 07일 또는 08일 : 사색의 계절 가을이다.
➋ 처서(處署) - 08월 23일 또는 24일 : 더위가 한 풀 꺾인다.
➌ 백로(白露) - 09월 07일 또는 08일 : 일교차가 커지면서 이슬이 맺힌다.
➍ 추분(秋分) - 09월 23일 또는 24일 : 가을의 가운데, 밤과 낮의 길이가 같아진다.
➎ 한로(寒露) - 10월 08일 또는 09일 : 이슬도 차갑다.
➏ 상강(霜降) - 10월 23일 또는 24일 : 서리까지 내린다.
(4) 겨울 절기
➊ 입동(立冬) - 11월 07일 또는 08일 : 추운 겨울에 접어든다.
➋ 소설(小雪) - 11월 22일 또는 23일 : 눈이 조금 내린다.
➌ 대설(大雪) - 12월 07일 또는 08일 : 큰 눈이 내린다.
➍ 동지(冬至) - 12월 21일 또는 22일 : 겨울의 한 가운데, 춥다.
➎ 소한(小寒) - 01월 05일 또는 06일 : 작은 추위가 몰려왔다.
➏ 대한(大寒) - 01월 20일 또는 21일 : 큰 추위가 몰려왔다. 겨울이 다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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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와 같은 절기(節氣)가 탄생(誕生)된 것으로 보면, 농경 족(農耕族)들이 만든 것이라 생각이 들며, 그곳은 사계절(四季節)이 있는 지방일 것이다.
○ 어느 곳이던 “조선(朝鮮) 땅”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인의 자유(自由)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自由)을 향유(享有)할 수 있는 것은 그에 따른 책임(責任)과 의무(義務)와 사회적(社會的) 도리(道理)가 필요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본인이 <아시아/조선>을 주장하는 분들을 비난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아쉬운 점을 말씀드리는 것이니, 결코 오해 없기를 바랍니다. 이것은 나의 생각을 피력(披瀝)하는 것이며, 여러분들의 마음이나 본인의 마음이나 조선사(朝鮮史)의 영역(領域)을 찾고자 하는 마음은 똑같습니다. 가는 길은 지름길, 돌아가는 길이 있으나, 목적지(目的地)는 같습니다. 오해 없으시길 바랍니다.
2011년 11월 12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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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중앙아시아가 과거 농사가 체계적으로 경영돼지 않았던 건 누구나 아는 일반상식일 겁니다.
그러나, 뭄무님 말씀대로 꼭히 전체 농사가 다 않 돼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묵은 땅이라 과일,채소 같은건 뭐든 심으면 기가 막히게 잘 자란단 얘기도 있거든여...
문젠 이거죠...왜 땅을 묵혔냔 겁니다.
그들은 농사의 가치보단...유목을 중요시 했던 전통때문에 그랬단 것이며...
구한말에도...극동의 고려인들 데려다 논농사를 시도했어야 했을 정도로...특히나 습지작물인 쌀에 대해선 잰벵이였으며...
이 쌀을 주식과 조세기준으로 삼던 그 대륙조선과는 거리가 먼...서역의 방계조선(숙신)족들이란 제 생각입니다.
선천적으로 밭농사나 논농사를 잘 하려면...
당바닥닦에서 쪼그리고 움직이는 자세에 대한 특유의 운동성들이 몸에 배 있기 마련인데...
현 몽골이든 중앙아든...땅바닦에서 허리 구부리거나 쪼그리고...한 일주일만 잡초 매 보라 하면...
차라리 나에게 죽음을 달라 성전을 선포할 일입니다.
천부적으로 농사는 체질에 맞지 않는 문화풍토란 것이죠...
그나마 유럽인들은 농노들이 뻣쩍 서서라도 농사는 가능하긴 하지만여...
대륙조선의 중국이 거기라면...
대륙조선 역사엔...양 몇 마리 낙타 몇 마리를 경상도,전라도...등...어디에서 조세로 징수했고...
전쟁을 위해 강화도에 양 몇 백마리 소 몇천마리를 비치해 두고 그 먹이 꼴(풀)들을 몇 만 섬 비치했단 기록이...
조선왕조실록 전체에 널널했어야 당연한 것이었을 겁니다.
그러나 매일 곡물...그것도 습지대 산물인 쌀만 나옵니다.
고로 조선은 중앙아가 아니다란 결론이 나옵니다.
중앙아는 여진조선(숙신)일 뿐인 겁니다.
시헌력을 맹근 이는 아담 샬입니다. 백인이지요. 그 전에는 이십사절기 잘 안 지켰습니다. 아담 샬이 시헌력을 만들자 일본은 그거 쓸 수 없다고 자기들의 역법인 '정향력' 을 만들었지요. 정향력은 시헌력보다 덜 정확했지만, 끝까지 일본은 명치유신 때까지 백인이 만든 역법을 안 썼습니다.
24절후백인발명설이 사실일수밖에 없는 이유는, 흐리멍텅한 동방족들이 서역인들멘키로 시간관념이 정확하지 않다는 것 하나만 봐도 알 수 있는것 아니겄습니까.
드레이크님, 24절후는 한자로 표현해야 제대로인데 그렇다면 한자도 백인들이 발명하고 사용한 문자라는 의미인가요?
예수회원들이 적당한 한자를 갖다 붙였을 수도 있지요. 예를 들어 '곡우' 는 곡식과 비라는 뜻인데 그게 뜻이 통하는 말인지요? "백로" 도 그렇고 말입니다. 별주부전은 프랑스 선교사가 쓴 책입니다 (나폴레옹이 언급됨). 동양을 치려면 그 정도의 공부는 했지요.
서역의 24절기는...태양이 젤 짧아지는 깃점인 12월 22일도 애초엔 못 잡아낸 수준입니다.
중국과 잉카는...정확하게 동지를 찝고 있었으나...
양이들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를 태양절로 했기에...2일이나 차이가 나는 후진국들였습니다.
그걸 로마황제 누구의 생일을 달력에 삽입해 차이가 났다 둘러대는데...
로마추장 생일을 달력에 삽입하다고...태양절(동지날)이 바뀔 이유는 전혀 없는 이치이고 보니...
그 변명질들이 유치하다 하겠습니다.
아는 자들은 서양의 천문학은...지들도 인정하듯...무굴(明?)의 울르그벡(세종&안평대군?)을 선지자라 합니다.
이전의 서역 천문학은 동이의 방계문명인 슈메르&스키타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