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도록 빗소리는 줄기차게 들렸다. 비 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깊은 잠을 못 자고 얕은 잠을 자는데 계속 꿈이다. 꿈은 왜 꾸게 될까. 생각지도 않았던 곳을 방문하기도 하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람들을 만나기도 한다. 꿈이라는 것이 참 신기하다. 내 무의식 속에 든 세계를 꿈이라는 형상으로 보여주는 것일까. 꿈을 깨어 현실을 깨닫고 생각해보면 그 꿈이 시사 하는바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새벽꿈에는 온 가족이 우리 집에 모여 죽을 먹었다. 집 앞에 있는 참 옻을 잘라 넣어 옻 죽을 끓였다고 했다. 아버님은 쓸데없는 것 넣었다고 꾸지람을 하시고, 마침 손님이 왔다기에 나가보니 친정집 뒤란이다. 대밭으로 길이 난단다. 벌써 많이 다듬어진 대밭을 보다가 집으로 들어왔는데. 어머님이 내 밥만 남았다고 주셨다. 밥은 없고 나물만 가득 담긴 소쿠리였다. 나물 중에서도 고사리나물이 쇠고기처럼 말랑말랑했다. 나는 밥도 없이 고사리나물을 먹었다.
꿈을 깨고 일어나 아침을 챙겼다. 여전히 창밖은 토닥토닥 비 오는 소리 정겹고, 새벽 잠 없는 남편은 몇 시간을 무료하게 거실에서 죽친다. 남편은 새벽 형이고, 나는 올빼미 형이니 어쩌랴. 밥상을 차릴 동안 남편은 다시 방에 들어가 언 몸을 녹인다. 타고 난 팔자를 무슨 수로 바꾸나. 그냥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지. 아침을 먹고 꿈 해몽 책을 폈다. 새벽 꿈 풀이를 해 보니 아귀가 맞다. 내가 아무리 어른들을 위해 살아도 가장자리에서 고생만 진탕 하고 좋은 소리 못 듣는다는 거다.
할 수 없지. 그것도 내 업인 걸. 내게 주어진 업을 깨끗하게 풀어내 다음 생에는 짊어지지 않는 것이 상책인 걸. 오늘은 아들이 2년 만에 한국에 들어오는 날이다. 어떻게 변했을까. 아들의 모습이 궁금하다. 목소리만은 씩씩한데. 배낭을 메고 달포가 넘게 유럽을 휘돌고 돌아오니 거지꼴이지 싶다. 무사히 돌아오는 것만도 고맙고 기특하다. 어미가 시부모 님 가장자리에서 고생하고 산 공이 자식에게 간다면 고맙지.
오늘은 할일이 많다. 나물거리도 챙겨야 하고, 조기도 손 봐야 하고, 찰시루떡도 찾아와야 하고, 가래떡도 해야 하고, 두부도 해야 한다. 도토리묵이 잘 돼서 기분 좋다. 제철에 먹는 것에 비하랴마는 묵이 찰지고 잘 돼 좋다. 음식 한 가지라도 맛있으면 여러 가지 음식 차리는 것보다 낫지 싶다. 외국처럼 한 가지만 간단하게 만들어 덜어먹는 식습관을 가지는 것도 바람직하지 싶다. 각자 그릇은 각자가 씻는 것도 괜찮다 싶다. 아들이 오면 간단하게 한 끼 해결하는 음식을 배워놔야겠다. 나이 들 수록 간단, 간편하게 생활을 옹송거리는 것이 나은 것 같다.
어차피 자식에게 기대 살 세대는 아니니까. 내 힘으로 살다가 병원신세 안지고 내 힘으로 이승 떠날 준비 철저히 해야 한다. 그것이 지금 오륙십 대가 잘 살다 가는 길이 아닐까 싶다. 아들은 돌아오자마자 복학을 한다. 또 떨어져 일 년을 살 것이고, 대학 졸업하면 어디든 취직을 해서 제 앞길 개척해 나갔으면 좋겠다. 남의 자식들 취직해서 돈 번다는 말을 들으면 은근히 부럽다. 내가 늙긴 늙었나보다. 농사도 힘이 달리니 자급자족 정도만 지어 살았으면 싶다. 그러자면 두 아이가 제 밥벌이라고 해야 하는데. 딸 때문에 자꾸 가슴앓이를 한다. 저도 생각이 있겠지.
포근한 날씨에 봄을 재촉하는 비는 고물고물 내리고 설이 코앞이다. 설 연휴, 민족 대이동이 언제까지 계속될까. 올해는 설 연휴가 길어서 원활한 소통의 장은 될까. 예전과 달라서 설 하루만 복작거리다 설 이튿날이면 시골도 다시 텅텅 빈다. 모두 제 식구 거느리고 돌아가기 바쁘다. 노인들은 다시 허전해서 눈물짓고, 다시 기다리는 삶이 시작 된다. 그러다 이승 떠나고, 요양원이나 병원에 가서 마지막을 장식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