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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으로 우리의 주거생활은 목조건물이어서 1000년이 넘은 대리석 건물이 즐비한 유럽과 달리 500년 이상 된 건물도 찾아보기 힘들다.
삼국시대에 중국에서 전래된 이후 불교의 사찰은 건축·조각·공예·회화 등 전통문화의 보물창고이지만, 당시의 목조건물은 하나도 없고 일부 석탑과 탑비만 전해오고 있는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1972년 경북 안동시 서후면의 천등산 봉정사(天燈山 鳳停寺)의 극락전을 전면 해체하여 수리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상량문 기록으로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공인되었다(국보 제15호).
그동안에는 일제강점기인 1916년 영주 부석사 무량수전(국보 제18호)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1376년(우왕 2)에 보수한 사실과 함께 1377년에 재축한 조사당 건물과 비교할 때 그보다 약100년~150년 전 건물로 추정하여 무량수전을 국내 최고 목조건물로 공인했었지만, 봉정사 극락전도 1363년(공민왕 12) 지붕을 중수했다는 사실 이외에 정확한 건축연도를 알 수 없는 점은 마찬가지이지만, 건축양식이 무량수전보다 앞선 12~3세기에 지은 국내 최고의 목조건물로 평가받은 것이다.
고려는 전후 7차 29년(1231~1259)에 걸친 몽고의 침입 후 원의 부마국이 되어 원의 건축양식인 주심포 기둥이 크게 유행되었지만, 그 이전까지는 통일신라시대의 건축양식을 계승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면서 삼국시대의 건축양식을 알 수 없는 현실에서 극락전을 삼국시대 건축양식으로 본 것이다.
봉정사는 신라 문무왕 12년(672) 영주 부석사에서 화엄종을 개창한 의상(625~702) 대사가 종이 봉황을 접어서 날렸다가 떨어진 곳에 절을 짓고, 봉황새 봉(鳳), 머무를 정(停)자라 했다고 한다(2013.11.06. 영주 부석사 참조). 그러나 1972년 봉정사 극락전을 수리할 때 상량문에서 봉정사는 경덕왕(742~765) 때 의상대사의 제자 능인(能仁) 대사가 창건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능인 대사가 대망산의 한 동굴에서 불법을 연구할 때 감복한 천상의 선녀가 등불을 가지고 굴을 환하게 밝혀 주어서 대망산을 ‘천등산’이라 하고, 그 굴을 ‘천등굴’이라 했다고 하는데, 지금도 천등산 정상에는 천등굴이 있다.
봉정사가는 길 |
1999년 4월 영국여왕 엘리자벳 2세가 하회마을과 함께 방문해서 더욱 유명해진 봉정사는 안동 시내에서 시외버스터미널을 지나 예천 방향으로 약16km쯤 가면 봉정사주차장이다. 안동초등학교 서편 승강장에서 51번 시내버스를 타면 약35분쯤 걸린다.
봉정사 매표소 오른쪽에는 화강암 대리석으로 ‘천등산 봉정사’란 표지석과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가는 까닭은(1989)’을 촬영한 곳이라는 동판이 세워져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어린이 1000원이다. 매표소에서 약100m쯤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퇴계가 지었다고 하는 정자 명옥대(鳴玉臺)가 있고, 명옥대를 거쳐서 산길을 5분쯤 올라가면 일주문이다.
봉정사는 금강문과 사천왕문 같은 산문이 없이 일주문에서 약200m쯤 올라가면 계곡 건너 대웅전과 영산암(靈山庵)으로 가고, 계곡을 건너지 않고 직진하면 지조암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대웅전과 극락전을 중심으로 영산암과 지조암이 좌우로 배치된 형국인데, 2층 누각 만세루(萬歲樓) 아래를 지나서 대웅전으로 올라간다.
극락전 편액 |
진여문(무량해회 문) |
만세루로 가는 길은 어느 사찰에서나 흔한 대리석 계단이 아니라 조약돌을 가지런히 놓아 만들어서 정감이 있고, 1680년(숙종 6)에 지은 만세루는 가파른 지형을 이용해서 앞에서 볼 때는 2층이지만,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단층건물이다. 정면 5칸, 측면 3칸, 홑처마 맞배지붕에 천등산봉정사라는 편액이 걸려있고, 덕휘루(德輝樓) 현판과 맞은편에 만세루 현판도 걸려있다. 두 현판 모두 1913년에 썼다. 만세루에 오르면 산야가 한눈에 들어오고, 나무로 깍은 잉어인 목어(木魚)와 법고(法鼓), 운판이 걸려있다. 범종각은 만세루 오른쪽 극락전 앞에 따로 지어졌다.
신라불교는 의상 대사에 의해서 화엄종이 성립된 이후 사찰은 탑 중심에서 법당 중심으로 바뀌고, 법당도 석가모니불을 모시는 대웅전과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으로 나뉘는데, 봉정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으로 분화된 초기 법당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석가모니를 모신 대웅전(국보 제311호)과 대웅전 서쪽에 아미타불을 모신 극락전을 나란히 지은 것은 구례 화엄사 대웅전과 각황전과 비슷하다. 다만, 화엄사 각황전은 대웅전과 90도 방향으로 짓고 대웅전 마당과 각황전 마당을 나누지 않았으나, 봉정사는 대웅전과 극락전을 나란히 짓고, 대웅전 마당과 극락전 마당 중간을 선방인 화엄강당(보물 제448호)을 지어서 가로막았다.
극락전 아미타불 |
또, 대웅전 마당에는 여느 절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석탑·석등이 없고, 극락전 마당에만 3.35m 높이의 고려시대 3층 석탑(경북도유형문화재 제182호) 1기가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 중 남쪽 2칸이 부엌이고, 북쪽 4칸은 온돌방인 화엄강당은 일제강점기이던 1930년대 자료에 의하면 정면 4칸, 측면 4칸으로서 현재의 온돌방 뒤쪽으로 4칸이 마루인 큰 강당이었다고 하지만, 현재는 종무소로 쓰고 있다. 법당이던 극락전 옆의 고금당(보물 제449호)은 승방으로 쓰고 있다.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촬영장소 기념 동판 |
안동은 공민왕이 1361년(공민왕 10) 11월 19일 홍건적의 침입을 피해서 개경을 떠나 한 달 만인 12월 15일에 도착해서 3개월간 머문 뒤 환궁하면서 대도호부로 승격시킨 고을로서 안동 곳곳에는 공민왕의 흔적이 많다.
공민왕 일행이 엄동설한에 예천 소야천을 건널 때 마을 아낙네들이 개울에 길게 늘어서 허리를 굽혀 인간다리를 만들어서 왕비 노국대장공주를 편안하게 건너게 했다고 해서 유래된 놋다리행사는 매년 정월대보름날 안동의 전통놀이가 되었지만(경북무형문화재 제7호), 1363년 극락전을 보수할 때 외부의 보마다 주상전하(主上殿下) 혹은 성수만세(聖壽萬歲)등의 글귀를 새긴 것은 혹시라도 공민왕이 봉정사에 머무르거나 둘러본 뒤 재정지원을 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을 표현한 것이 아닐까 싶다.
또, 대웅전의 불단 바닥에도 1361년(공민왕 10)에 임금이 탁자를 시주했다는 묵서명이 있고, 요사채인 무량해회의 출입문인 진여문(眞如門) 현판도 공민왕의 친필이라고 한다.
아무튼 2000년 2월 봉정사의 대웅전 지붕공사를 할 때 상량문에 ‘대웅전은 신라시대에 창건 후 500여 년만인 세종 17년(1435)에 보수했다’는 기록으로서 어쩌면 현존 최고의 건물이 극락전에서 대웅전으로 바뀔 것 같기도 하다. 상량문에는 그밖에도 2층 누각 신축과 단청 사실, 임금으로부터 토지 500결을 하사받은 내용, 당우가 75칸이나 된다는 등 사찰규모를 알려주는 상세한 내용뿐만 아니라 조선 초기에는 팔만대장경도 보관했던 사실도 밝혀졌다.
사찰이라기보다는 아담한 시골 여염집 같은 천년고찰 봉정사의 대웅전 계곡 건너 영산암은 영화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1989)’과 ‘동승(童僧: 2003)’을 찍은 곳이다.
영산암 입구의 우화루(雨花樓)는 원래 극락전 앞에 있던 건물을 옮긴 것이라고 하는데, 언제 왜 우화루를 이곳으로 옮겼는지 알 수 없으나, 극락전도 대웅전의 만세루처럼 우화루 밑으로 출입했던 것 같다. 정면 7칸, 측면 2칸의 우화루를 들어서면 응진전, 영화실, 송암당, 삼성각 등이 아담한 옛 주택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다.
봉정사는 고려중기의 건물 극락전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 건물인 대웅전, 후기 건물인 화엄강당, 만세루, 고금당 등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계보를 한눈에 볼 수 있는 훌륭한 목조건물 박물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