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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팩션연재 마지막 무관생도들 140817
이 원 규
제2부
5 조국이 우리를 부른다
이응준의 출정
1918년 8월 하순, 이응준은 러시아 극동 연해주의 항구도시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일본군 파견 사령부로 가라는 전속명령을 받았다. 일본은 미국 · 영국 · 프랑스와 함께 러시아의 공산주의 혁명을 저지하기 위한 국제간섭군을 연해주와 시베리아 동부에 파병했다. 병력이 11개 사단 17만 명에 달했다.
연해주에는 동포들의 항일투쟁 조직이 있다는 것을 응준은 알고 있었다. 평생의 은인이며 그를 사위로 점찍은 이갑 참령이 망명투쟁을 하다 쓰러진 곳이기 때문이었다. 일본군은 공산혁명 저지라는 목적 외에 조선인들의 독립운동 조직을 말살하려 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그것을 위협하는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편으로는 반가운 것도 있었다. 연해주 파견은 이갑 참령이 묻힌 곳, 약혼녀인 정희에게 가까이 가는 기회이기도 했다. 사령부가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정희가 있는 니콜스크 우수리스크는 멀지 않았다.
전속명령서에는 뜻밖의 첨부사항이 들어 있었다.
8월 23일 오전 10시 15분 신바시(新橋)역 출발 히로시마(廣島) 행 특급열차를 탈 것. 이태왕(李太王) 전하의 환후 위문차 경성으로 가시는 이왕세자(李王世子) 전하와 동승할 것. 연해주 파견 12사단으로 전속되는 38연대 염창섭 중위도 같은 임무를 가짐.
같은 사단 예하 연대에 있는 홍사익을 만나고 떠나고 싶었으나 홍사익의 연대는 기동훈련 중이었다. 간단한 편지를 써 보내고 짐을 꾸렸다.
출발일 아침, 역으로 가니 염창섭은 이미 도착해 있었다. 1914년 6월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이 되어 여러 부대로 흩어지며 헤어졌으니 4년 만의 만남이었다. 염창섭은 교토 주둔 38연대로 갔었다.
응준은 염창섭과 악수하고 가볍게 포옹했다.
“반갑다. 작년 결혼한 일 늦었지만 축하한다.”
염창섭은 그의 어깨에 얹힌 턱을 끄덕거렸다.
“고마워. 결혼 때 경조금 보내준 것도 고맙고.”
두 사람은 영친왕을 보좌하며 기차를 타고 떠났다. 차를 마시거나 식사를 할 수 있는 테이블이 붙은 4인승 좌석과 침대 하나가 있는 특등석이었다.
영친왕은 두 달 전 육사를 졸업하고 견습사관 근무 중이었으며 군복 차림이었다. 이응준과 염창섭이 나이도 거의 열 살 위이고 유년학교와 육사 선배에다 상급자였으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패망한 왕조의 왕세자는 앉으라고 앞좌석을 손으로 가리켰다.
“유년학교 시절, 홍사익 생도를 만났지. 지금 어느 부대에 있느냐?”
두 사람은 좌석에 앉았다. 영친왕의 말에 이응준이 답했다.
“홍사익은 도쿄 제1연대 소속입니다.”
영친왕 옆에는 일본 황실에서 나온 수행 사무관이 앉아 있었다.
영친왕이,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지금까지 걸어온 이야기를 듣고 싶어 했으므로 두 사람은 삼청동 무관학교 시절부터 이야기를 시작했다. 가장 중요한 사건 두 가지는 안중근 의사의 이토 저격 때 벌어진 일과 강제합방이 공포된 날 대성통곡하고 아오야마 묘지에 모여 뒷날 조국이 부르면 달려가자고 다짐한 것이었는데 이야기할 수 없었다. 수행사무관이 수첩에 적고 있기 때문이었다.
일요하숙에 모여 국수를 끓여 먹으며 학습조를 만들어 시험에 대비한 일,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일본인 생도들과의 축구경기, 우등상을 받은 홍사익과 윤상필 이야기가 중심이었는데 영친왕은 재미있는지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들었다.
점심을 최고급으로 얻어먹었다. 영친왕이 식곤증 때문에 침대로 갔으므로 이응준은 염창섭과 함께 무연히 차창 밖을 내다보며 시간을 보냈다.
히로시마에 도착하자 영친왕은 두 중위에게 악수를 청했다.
“잘 가거라. 그리고 전선에서 무사하게 돌아오라.”
영친왕은 히로시마를 떠나 곧장 현해탄을 건너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을, 이응준과 염창섭은 동해를 거슬러 올라가 블라디보스토크로 가는 군수송선을 타야 했다.
수송선 출항은 다음날 오전이었다. 파견부대 주력이 아직 승선하지 않았으므로 두 중위은 미리 배정받은 선실을 같이 쓰며 하룻밤을 보냈다.
“패망한 나라의 왕세자인데 철이 없으신 것 같기도 하고…. 결국 하고 싶었던 말은 하나도 못하고 말았어.”
응준이 한숨을 쉬며 하는 말에 염창섭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영친왕 전하나 우리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이게 아니다 아니다 하며 그냥 사는 거지.”
대한제국의 마지막 무관생도들 중 성적 서열 1번으로 일본 유학길에 올랐던 염창섭은 체념하듯이 말했다. 그러고는 가방에서 중국어 회화책을 꺼내들었다. 언제고 일본이 만주와 중국을 점령하고 동아시아 전체를 지배할 것이므로 중국어가 필요할 것 같아 3년 동안 열심히 중국어를 익혀 거의 능통해졌다고 했다. 동시베리아 전선은 중국과의 국경인 흑룡강(黑龍江. 러시아 지명 아무르 강)이 포함되어 있어 자신은 중국어 때문에 파견되는 것이라고 했다.
“아버님도 여러 번 편지로 중국어 공부를 권하셨고 아내도 곁에서 줄곧 권했어.”
이응준은 염창섭이 친일 군수의 아들이며 한일합병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였던 생도시절을 떠올렸다.
창섭이 다시 말했다.
“아내는 이화학당 중학부 나왔어. 교토에 오게 해서 고등여학교에 입학시켰지. 중위 봉급이 쥐꼬리만 하니 어떡하나. 아버님이 돈을 대 주셨지. 자네의 보성학교 후배인 내 아우 상섭이 말이야. 그놈도 도쿄에서 교토로 와서 부립(府立)중학을 졸업했지. 지금은 다시 도쿄로 가서 게이오대학에 들어갔지.”
응준은 창섭의 아내 자랑, 아우 자랑에 맥이 빠졌다. 창섭이 유년학교 본과 다닐 때 아우를 도쿄로 불러 공부시키더니 아내까지 여학교에 입학시킨 것이 일본에 순치당하는 표본적인 경우일 것이기 때문이었다.
다음날 아침 국제간섭군으로 가는 주력부대가 승선하고 수송선은 출항했다. 점심시간에 장교식당에서 후배인 이종혁 소위를 만났다. 이응준과 염창섭은 반색하며 후배를 끌어안았다. 이종혁은 후쿠오카 연대에서 보병소대장을 하다가 부하들을 이끌고 전선으로 가는 것이었다.
술이라도 한 병 구해 회포를 풀고 싶었으나 전선으로 가는 수송선이라 그러지 못했다. 세 조선인 장교는 갑판으로 나갔다.
“이 소위, 넌 어떠냐? 일본 병사들을 지휘하는 게 말이다.”
응준이 이종혁에게 물었다.
대한제국 무관학교, 도쿄 유년학교와 육사 재학 중 성격이 여린 탓에 여러 번 어려운 고비를 넘겼던 이종혁은 어깨를 폈다.
“일본 병사들이 절대복종하니 참 통쾌하지요. 육사 졸업 후 휴가로 고향 갔을 때 일본 헌병 놈들이 군림하는 걸 봤어요. 겨우 상등병 계급장을 붙인 놈이 예방주사 맞지 않았다고 젊은 아기 엄마를 발길로 차고 따귀를 때려 코피가 났어요. 그런데 병사 놈들이 내 앞에 고개 숙이고 복종하니 얼마나 통쾌합니까? 그러나 마음 밑바닥엔 무거운 바위가 놓여 있어요. 조국이 일본에 짓밟혀 신음하는데 나는 여기서 뭘 하고 있나 하는 거지요. 그래서 자다가도 벌떡벌떡 일어납니다. 우리는 합방 직후 통곡하며 아오야마 묘지에 모여 조국이 부르는 날 군복 벗고 달려가 독립전쟁 전선에 서자고 맹세했지요. 정말 그런 날이 올까요?”
이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선택된 운명을 안고 있어. 하필 나라가 기울 때 무관학교에 갔고 ‘오로지 너희가 나라의 희망이다’하는 말을 들으며 떠나왔지. 언제고 민족이 떨치고 일어날 때가 올 거야. 그러면 우리는 일본과 싸워야지. 그게 우리 숙명이니까.”
이응준은 푸른 바다 위로 야단스럽게 날아가는 날치들을 바라보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가 가는 연해주엔 동포 항일조직이 많아. 이종혁 소위는 보병소대장이니 러시아 적군과 전투하겠지만 동포 무장조직을 소탕하는 임무를 가질 수도 있지. 염 중위와 나는 단독 파견이야. 우리 동포들을 상대로 정보공작을 하게 될지도 몰라. 부디 크게 불행한 일이 생기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염창섭과 이종혁은 같은 마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러시아로 가는 수송선은 세토나이카이를 통과해 시모노세키 부근을 돌아 동해로 나아갔다. 그리고 하루 만에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했다. 세 사람은 거기서 뜨거운 포옹을 하고 헤어졌다.
응준이 사령부에서 맡은 임무는 사령부 고급부관인 아마노(天野) 대좌의 보좌역으로서 대민관계를 담당하는 것이었다. 조선인 협조자들을 통해 러시아인과 중국인, 조선인 독립운동 조직의 정보를 수집해 분석하는 일도 했다. 지금까지 그 임무를 일본인 장교가 해왔는데 통역이 필요 없는 조선인 장교가 맡으면 좋겠다고 현지 사령관이 판단해 육군성에 요청했고 그가 지명 파견된 것이었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신한촌(新韓村)이라는 조선인 집단촌이 있었고, 도시 근교는 물론 연해주 일대에 조선인들이 많이 살고 있었다. 러시아 연해주가 황무지였을 때 두만강을 건너와 개척한 것이 조선인 유민들이었고 그래서 이미 러시아 국적을 갖고 있거나 부를 축적한 사람들도 많았다. 강제합방 전후 많은 애국지사들이 망명해왔고 이갑 참령도 그 중 하나였다. 이갑은 안창호 · 이종호 · 신채호 · 유동열 선생 등과 함께 만주 밀산(密山)에 무관학교를 세우기로 결의하기도 했다.
최재형(崔才亨 1860~1919) · 홍범도(洪範圖 1868~1943) · 안중근 등 애국지사들은 군대를 꾸려 두만강을 건너 국내진공을 감행하기도 했다. 최재형과 홍범도는 동포사회의 정점에 서 있었으며 두만강 국경지역인 포시에트에서 다시 일어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7년 전로(全露)한족회중앙총회도 조직했다. 그러나 일본군의 대규모 파병으로 인해 그즈음 숨을 죽이고 있었다.
한인사회당도 일본군의 골칫거리였다. 공산주의에 찬동하는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김립 등이 주도하여 블라디보스토크 800km 북쪽 도시 하바로프스크에서 조직했는데 산하에 군사부가 있고 무장조직으로 파르티잔 부대를 두었다. 파르티잔 부대는 러시아 백군 및 일본 파견군에 맞서 싸웠다. 그러나 그해 6월 적군과 함께 하바로프스크 방어전에 참가했다가 패배해 괴멸상태에 이르러 있었다. 이응준이 있는 블라디보스토크에도 한인사회당의 비밀조직이 들어와 있었다.
그는 어느 날 신한촌의 한 동포 지도자가 밀고하는 내용을 듣게 되었다.
“한족회가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을 호소하기 위해 밀사를 파견하려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알았소.”하고 퉁명스럽게 대답하고는 그 보고를 묵살했다.
그 사실을 숨기고 밀고자가 다른 장교와 접촉 못하게 하기 위해 온갖 애를 썼고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넘어갔다.
한족회의 애국지사들도 만났다. 안중근 의사의 아우 안정근(安定根 1885~1949)은 병원을 열고 있었고 또 다른 아우인 안공근(安恭根 1889~1940)은 니콜스크 우스리스크에 살면서 가끔 블라디보스토크로 왔다. 이갑 참령이 북만주 무링(穆陵)에 머물 때 안정근의 옆집에 살며 투병하느라 신세를 졌고 우수리스크에서는 안공근에게 그랬으므로 안 씨 형제들은 응준의 존재를 잘 알고 있었다.
이응준은 안공근을 통해 장차 아내가 될 정희와 장모가 될 참령 부인 소식을 들었다. 참령이 별세하자 부인은 남고 정희는 짐을 꾸려 경성으로 떠났다고 했다. 진명여학교에 복학해 학업을 마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는 정희와 엇갈리는 길이 아쉬워 긴 한숨을 쉬었다.
‘내가 육사 시절 휴가로 경성에 갔을 때 너는 참령님 병구완을 위해 우수리스크에 와 있었고 내가 이제 이곳으로 오니 너는 이미 경성으로 떠났구나.’
그는 손에 낀 반지를 어루만지고 품속에 넣고 다니던 사진을 꺼내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안중근의 아우들과 한족회 사람들은 일본군 장교로 와 있는 이응준을 이미 고인이 된 이갑 참령의 사윗감이라는 이유만으로 친밀하게 대했다. 물론 비밀은 털어놓지 않았으며 그들과의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간극이 있었다.
어느 날 안공근이 말했다.
“지금 연해주 조선인의 정신적 지주는 최재형 노야(老爺)와, 홍범도 대장이지요. 최재형 어른, 이분이 연추(延秋)의 읍장을 지내시기도 했지만 우리는 최고로 존경하는 분이라 ‘노야’라고 부릅니다. 이분은 소년시절 노비 신분으로 모국 땅을 떠나 연해주로 왔고 연추 항구에서 배가 고파 몰래 러시아 상선에 승선했지요. 선장의 총애를 받아 6년간 세계를 돌며 경험을 넓혔고, 그 후 러일전쟁에서 통역으로 일하고, 군납업으로 거부가 됐지요. 하지만 재산을 모두 항일투쟁에 바쳤어요. 이갑 참령님을 비롯해 연해주로 망명해온 투사들치고 그분 도움을 받지 않은 이는 없었어요. 수많은 의병이 먹고 입고 훈련할 수 있는 실질적인 힘은 모두 그분에게서 나왔지요. 최재형 노야의 근거지인 연추는 두만강에서 가깝지요. 러시아인들은 안치혜라고 부릅니다. 1908년 최 노야께서 군대를 꾸려 내 형님에게 맡겨 고국진공을 감행하게 한 곳도 연추였어요. 형님이 함경도 신아산(新牙山) 전투에서 패하고 돌아와 동지들과 단지맹세를 한 곳도 거기였어요.
홍범도 대장은 갖바치 출신으로 의병을 일으켜 삼수 · 갑산에서 명성을 떨치다가 힘이 다해 연해주로 와서 재기하려고 애썼어요. 총 한 자루를 사기 위해 이 도시 부두에서 하역노동도 하고 최근까지 철도 공사장에서 노역을 했지요. 일본군이 워낙 많이 쏟아져 들어와 지금은 웅크리고 있지만 최재형 노야님과 홍범도 대장은 다시 일어날 겁니다.”
물론 일본군이 아는 정보의 한계 안에서만 말한 것이었다. 그 이상은 물을 수도 없었고 말해 줄 리도 없었다,
두어 달이 지나 현지 임무와 사정에 익숙해지자 그는 이갑 참령의 묘소 참배 길에 올랐다. 직속상관인 아마노 대좌는 특별 허락을 내리며 말했다.
“너 때문에 우수리스크 주둔부대는 준(準)비상사태에 들어갈 거다. 거기 조선인들은 반일성향이 강해서다. 각별히 조심하라.”
이응준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기차를 타고 북쪽으로 올라가 우수리스크 역에 내렸다. 집을 찾아가자 참령의 부인이 맨발로 달려 나왔다.
“자네가 웬일인가?”
일본으로 떠나고 8년 만에 일본군 장교가 되어 나타난 그에게, 장차 사위가 될 사람이라선지 부인은 그렇게 하대를 하며 말했다.
집에는 부인 말고도 이갑 참령의 친형인 이휘림(李彙林) 선생이 머물고 있었다. 선생은 아우인 이갑과 비슷한 시기에 서간도에 망명, 류허현(柳河縣) 싼위안바오(三源堡)에서 이회영(李會榮) ․ 여준(呂準) ․ 이상룡(李相龍) ․ 이동녕(李東寧) ․ 김동삼(金東三) 등과 자치단체 경학사(耕學社)를 조직하고 재무를 맡았던 애국지사였다.
응준은 두 분을 거실로 모시고 들어가 큰절을 올렸다.
“제가 불민하여 참령님 돌아가신 뒤에야 찾아왔습니다.”
절을 받으며 부인은 그의 손가락에 낀 약혼반지를 바라보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정희도 반지를 꼭 끼고 다니네. 한 번도 뺀 적이 없어.”
그는 어른들과 함께 묘소를 향해 걸었다. 소식을 듣고 안공근도 오고 마을 사람들 여럿이 따라왔다.
묘소에는 ‘한국인 이갑지묘’라고 새긴 비석이 서 있었다.
“참령님, 응준이가 왔습니다. 이제 온 걸 용서하십시오.”
그는 무덤에 큰절을 하고 목멘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한족회와 한인사회당 등 항일조직의 움직임과 최재형 · 홍범도 등 지도자들의 동태를 밀정이나 밀고자들로부터 보고받아 처리하는 일은 점점 늘어났다. 보고서를 작성할 때마다 깊은 갈등에 빠졌으며 양심 때문에 밤잠을 자지 못했다. 몸에 이상이 왔다. 위궤양 증상이 시작된 것이었다. 먹는 대로 토하고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체중이 15kg 이상 줄었다. 급격히 체력이 떨어져 걷기도 힘든 몸이 되었다.
탈출해 최재형 노야와 홍범도 대장을 찾아갈까 생각도 했으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현재 몸 상태로는 한 시간도 내달리기 어렵고 부대에서 자신의 갈등을 짐작하고 동태를 감시하고 있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하루 한 끼도 먹지 못할 정도로 병이 깊어지고 신경쇠약 증세까지 생기자 야전병원 군의관들은 후송치료를 상신했다. 다음해 1월말 결국 본국 후송명령이 떨어졌다.
지석규의 결심
1919년 1월 5일은 새해 첫 일요일이었다. 이 날 오전, 지석규 중위는 효고현(兵庫縣) 히메지(姬路)에 있는 부대 앞 하숙집에 있었다. 지난해 여름까지 아내가 딸아이를 데리고 와서 머물렀던 셋집인데 아내가 경성으로 돌아간 뒤 하숙으로 눌러 앉은 곳이었다. 집주인 내외가 선량하기 때문이었다.
아침에 죽을 먹었는데도 속이 쓰렸다. 그는 위장병이 심했다. 몇 달 전까지 아내가 곁에서 챙겨주는 음식을 먹을 때는 낫는 것 같기도 했었으나 다시 나빠지고 있었다. 아내는 2년 반을 그의 곁에 머물렀었다. 오래 떨어져 산데다가 언제고 자신은 독립전쟁 전선으로 탈출할 것이므로 지금이 아니면 같이 지낼 시간이 별로 없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붙잡아 두었었다. 그러나 아들을 누님 댁에 맡기고 온데다 다시 임신하고 입덧이 심해 아내가 더 머물기는 어려웠다. 그래서 경성으로 보냈는데 정초가 되니 새록새록 그리워졌다.
제법 큰 그의 방에는 코다츠가 있었다. 아침 식사 후 주인집 여자가 이글이글 타는 숯불화로를 코다츠에 넣어주어 방안은 훈훈했다. 그는 코다츠 옆에 의자를 끌어다 놓고 프랑스 소설 번역판을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새해가 조선민족에게 희망이 가득 담긴 서광을 비추며 다가왔음을 알고 있었다. 신문과 잡지를 통해서였다. 새해는 분명히 세계 약소민족과 피압박 민족에게 비상한 자극과 희망을 안겨주며 시작되고 있었다. 미국 윌슨대통령은 ‘민족자결에 대한 선언’을 했고 소련의 레닌 정부도 볼셰비키 혁명에 성공하면서 약소민족의 강제병합을 무효화하고, 러시아 영토 안의 모든 민족에 대해 러시아로부터 분리되어 독립정부를 가질 수 있다는 자결권을 인정한다고 선언했다.
가장 발 빠르게 움직인 것은 김광서 선배였다. 지난해 늦가을 희망의 빛이 보인다고 판단하는 순간 주저 없이 행동에 나섰다. 이곳저곳 몸이 아프다고 병가(病暇)를 내고 국내로 들어가면서 지석규와 홍사익을 불러 놓고 말했다.
“마침내 기다리던 때가 왔다. 내가 앞장서 고국으로 간다. 이응준은 연해주에 출정했으니 어쩔 수 없지만 너희도 곧 경성으로 와라.”
지석규와 홍사익과 함께 그러겠다고 약속했다.
주인집에 손님이 왔는지 대문에 달린 작은 종이 울었다. 얼마 후 방문에서 노크 소리가 나고 주인여자의 음성이 들렸다.
“중위님, 부인이 오셨어요.”
급히 문을 연 그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정말 아내가 온 것이었다.
“아니, 연락도 없이 어떻게 왔어요?”
아내는 봉싯한 배를 앞세운 채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보고 싶어서 견딜 수 없어서 왔지요.”
깊은 눈빛을 보고 뭔가 연유가 있을 거라고 느끼면서 아내를 가볍게 포옹했다.
“잘 왔어요. 그런데 정말 내가 보고 싶어서 온 거요?”
그의 팔에 안긴 채, 세상에서 가장 소중하다는 듯이 그의 등을 쓸어내리던 아내가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천도교 교주이신 손병희(孫秉熙) 선생님의 명을 받고 밀사로 왔어요.”
아내는 그의 품에서 떨어져 나가 방문 밖을 살폈다. 주인집 사람들이 조선말을 전혀 모른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했다.
“손병희 선생님은 동경유학생회에 대해 많이 알고 계셨고 당신에 대해서도 잘 아시고 계셨어요. 일본군 장교의 아내인 저를 밀사로 보내면 무난할 거라고 판단해 제게 임무를 맡기신 거구요. 밀서를 가져올 수가 없어서 손병희 선생님이 적어주신 대로 외웠어요. 잊어먹을까 봐 먼 길 오는 동안에도 백 번은 더 외웠어요.”
그녀는 손병희 선생의 명령을 암송했다.
“일. 만천하에 독립을 외칠 좋은 기회가 왔소. 미국에서는 이승만(李承晩) 박사와 안창호 선생을 파리강화회의에 보내 독립을 청원하려고 애쓰고 있소. 중국 상해(上海)에서는 신한청년단이 김규식(金奎植) 선생을 보낼 것이고 러시아 연해주에서도 대표를 파견할 것이오. 경성에서도 누군가를 파견할 것이오.
이. 국내에서는 민족대표회의를 구성,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펼쳐 민족을 떨쳐 일어나게 하고 전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키려 하오. 동경 유학생들도 동참해야 하오. 그곳이 일본의 심장부이기 때문이오.
삼. 우리는 지석규 중위 그대가 육사 출신 장교들을 이끌어 왔고 동경 유학생들의 신뢰를 받고 있음을 알고 있소. 유학생들에게 상황을 알리고 하나로 결속시켜 집단투쟁을 준비하게 하시오. 이것은 민족대표회의가 보내는 명령이오.”
아내의 말이 끝나자 그는 다시 한 번 반복하게 해 받아 적었다. 받아 쓴 종이를 양말 속에 접어 넣고, 아내를 코다츠 옆에 눕게 했다. 긴장이 풀린 아내가 편안히 잠든 뒤 그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민족 대표기구가 구성돼 거국적인 봉기를 계획 중이며, 중심인물인 손병희 선생이 나의 존재를 알고 아내를 밀사로 보냈다. 나는 조국을 위해 무엇이든지 해야 한다.’
그는 자신의 의지를 다짐하듯 두 주먹을 부르쥐었다.
토요일이 되자 그는 아내를 하숙집에 머물게 하고 유학생회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도쿄로 떠났다. 그러나 교토에서 기차를 갈아타다가 헌병대의 제지를 받았다. 소속부대의 위수지역은 효고현에 한정되므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위수지역을 벗어날 때 부대장의 허락을 받는 규정이 있지만 거의 무시되어온 것이었다.
기차역을 통제하는 헌병 중위가 난처한 표정을 하며 말했다.
“지금 연대장님에게 전화를 해서 허락을 받는다면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그는 도쿄 행을 단념했다. 무언가 이상하게 다가오는 느낌, 조선 출신 장교들을 주의 깊게 관찰하는 듯한 직감이 있어서였다.
히메지로 되돌아온 지석규는 그 임무를 아내에게 맡겼다. 아내는 두 아이를 그의 누이에게 맡겨 놓고 온 터였고 4월초 셋째 아이를 출산할 예정이라 어차피 돌아가야 할 사람이었다. 그는 재도쿄조선학생학우회 간사인 백남규의 하숙집 주소를 아내에게 외우게 했다
“걱정 마세요. 당신에게 전했듯이 전할게요.”
아내는 도쿄를 경유해 조선으로 가는 귀로에 올랐다.
사흘 뒤, 아내가 보낸 우편엽서를 받았다. 일본어로 쓴 엽서에는 무사히 시모노세키에 도착해 관부연락선을 탄다는 말과 함께 위장병이 걱정되니 술을 끊으라는 당부가 적혀 있었다. ‘위장병’과 ‘술’은 임무를 완수했다는 암호였다.
며칠 뒤, 그는 광무(光武) 황제가 서거했다는 신문기사를 읽었다. 교토에서 발행한 그 신문은 조선 이왕가의 전왕(前王)인 이태왕(李太王) 전하가 급환으로 별세했으며 3월 3일 조선식 국장인 인산(因山)이 치러질 것이라고 보도하고 있었다.
2월초, 이응준에게서 편지가 왔다.
석규 형에게
형에 대한 그리움이 곡진한데도 이 아우가 불민하여 그간 격조했습니다. 형수님과 조카 들은 무고한지요?
나는 며칠 전 히로시마 위수병원에 후송 와 있습니다. 형처럼 전투 중 부상 입은 건 아 니고 업무에 고심이 많아선지 위장이 엉망이 됐습니다. 못난 탓이지요.
곧 요양 휴가를 받을 수 있을 듯합니다. 그때는 도쿄에 가서 머물 생각이고 경성으로 가게 해달라고 청원할 생각입니다.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우정은 변치 말자고 한 언약 늘 잊지 않고 지냅니다.
늘 강녕하소서.
아우 이응준 올림
우정은 변치 말자고 언약 맺었다는 말은 요코하마의 맹세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는 쾌유를 바란다는 답장을 썼다.
2월 9일, 그는 신문을 보고 가슴이 뛰었다. 어제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독립만세 시위를 벌여 60여 명을 구속했다는 기사였다.
“아, 젊은 후배들이 이렇게 앞장서는구나!”
그는 중얼거리며 손병희 선생의 밀사 책무를 완수한 아내를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이 하루 빨리 고국으로 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차분하게 군대의 울타리를 벗어나는 길을 궁리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김광서 선배처럼 병을 이유로 장기휴가를 내는 수밖에 없었다. 군병원에는 그의 위장병을 치료해온 군의관이 있고 진료 기록이 있었다.
‘군의관이 질병 휴가에 동의할 정도로 위장병을 악화시키자.’
일단 그렇게 결심이 서자 매일 저녁 과음하여 토하고 난 다음날 아침을 안 먹고 병영으로 들어갔으며 몸을 마구 굴렸다. 한 달이 지나자 얼굴이 까맣게 타들어가고 몸이 야위어 갔다. 군의관은 손을 홰홰 저었다.
“낫는 게 아니라 더 악화되고 있소.”
육사 2년 선배인 중대장도 걱정했다.
“안되겠군. 부인이 간호하면 좋겠는데 지난번에 왜 금방 돌아가셨나?”
그는 낯을 찡그린 채로 대답했다.
“큰애가 학교를 다니는데다 작은애도 있고 또 뱃속에 셋째가 생겨서요.”
“그거 참 큰 문제군.”
중대장은 안 됐다는 표정을 해보였다.
부대에서는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평소에 보여준 성실성 때문이었다.
그는 두 번째 단계로 들어갔다. 전술학 서적을 외우듯이 익히는 것이었다. 탈출할 때 전술학이나 무기의 제원과 사용법을 기록한 화기학 서적을 몇 상자 갖고 간다면 조국의 독립전쟁에 더없이 큰 도움을 줄 것이었다. 그러나 대여섯 권이라면 몰라도 분량이 많으면 사전에 의심 받을 것이었다. 그는 중요한 사항을 수첩에 까맣게 메모하며 마치 사관생도 시절 시험 공부하듯 열중했다.
그때 경성에 있는 김광서 선배에게서 엽서가 왔다. ‘격조한 채 만나지 못하니 요코하마에 갔던 추억이 떠오른다. 곧 다시 만나 회포를 풀자’는 내용, 탈출하자는 연락이었다. 지석규는 즉시 자신의 마음도 그러하며 곧 경성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는 답신을 보냈다.
그리고 며칠 후인 3월 1일에 경성에서 독립만세 운동이 폭발적으로 일어난 사실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이제 됐어. 우리 민족이 떨쳐 일어나는 거야.”
지석규는 두 주먹을 부르쥐었다. 그리고 며칠 후 기어이 6개월간의 요양 휴가증을 손에 넣었다.
3월 중순, 지석규가 도착했을 때 경성에서는 만세시위가 간헐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경부선 열차를 타고 오는 동안 승객들이 수군거린 말들에 의하면 지방 도시들까지 만세시위가 불길처럼 퍼지고 있었다.
그는 집에 도착해 짐을 풀고 사직동 김광서의 집으로 달려갔다. 계급이 같은 중위인데도 김광서가 대문을 열자마자 차렷 자세로 서서 경례했다. “선배님, 늦어서 죄송합니다.”
김광서는 답례도 하지 않고 덥석 그의 손을 잡아 집 안으로 끌어들였다.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쯧쯧 혀를 찼다.
“물어 보나 마나 뻔하군. 병가를 내기 위해 위장을 망쳤군. 홍사익과 이응준은 어찌 됐어?”
“홍사익은 사령관 표창도 받아가며 열심히 근무하는 것 같고 이응준은 히로시마 위수병원에 후송 와 있습니다. 요양휴가를 받아내려 애쓰고 있습니다. 곧 둘 다 올 겁니다.”
김광서는 아내가 내온 차를 권하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장엄한 광경을 처음 봤어. 종로통 만세시위 말야. 나도 모르게 섞여 들어가 만세를 불렀어.”
지석규는 어서 말하라는 뜻으로 고개를 여러 번 주억거렸다.
“3월 1일 그날 윤치호(尹致昊) 선생과 점심을 먹고 YMCA 회관에 가 있었어. 사복차림이었지. 내가 집에 가려고 막 회관을 나와 몇 걸음 걸었을 때 “대한민국 만세!” 함성이 들려왔어. 잠시 후 태극기를 든 청년 군중이 종로통을 가득 메우고 밀물처럼 밀려갔어. 나는 자신도 모르게 군중 속으로 들어가 목이 메어 만세를 불렀지. 종로 전체가 들끓는 듯하고 만세 시위 군중은 종로에서 경운궁 앞을 거쳐 진고개 일본인 거주지역으로 몰려갔어. 남학생뿐만 아니라 여학생들도 허다했어. 헌병대와 경찰이 시위대로 파고들어 군도와 곤봉을 휘두르며 연행하기 시작했어. “동포여! 각성하라! 죽을 때까지 싸우자!” 여학생들이 끌려가며 소리치고 있었어. 백여 명의 청년학생들이 몰려가 피 흘리며 싸워 여학생들을 헌병에게서 빼앗았지. 진고개의 헌병 경찰은 여차하면 총을 쏠 기세였어. 거대한 용처럼 꿈틀거리는 시위대는 머리를 돌려 동대문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어. 나는 해질 때까지 만세시위에 끼여 있다가 수백 명의 경찰과 군인들에 포위돼 해산당할 때 신속하게 골목으로 숨어들었어. 연행되어 가면 군인의 몸이라 군사재판을 받았을 거야.”
김광서는 심호흡을 하여 격정을 가라앉힌 뒤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나는 고국에 돌아와서 많은 사람들을 만났어. 함께 황실특파유학생으로 유학길에 올랐던 내 친구들, 대부분 일본에서 대학 마치고 와서 식민지 조선사회의 핵심으로 성장해가고 있지. 대표적인 인물이 보성학교 교장인 최린 형, 불세출의 문인으로 명성을 날리는 최남선이지. 최린 형은 만세 시위 주동혐의로, 최남선은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혐의로 구속돼 있지.
훨씬 연배가 많은 선배들도 날 보고 싶어 했어. YMCA 운동 선구자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선생은 우리 독립전쟁 전선의 신흥무관학교에 대해 은밀히 말씀하셨어.”
“독립운동 진영이 무관학교를 세웠어요?”
“그래. 강제 합병되던 무렵, 애국지사들은 독립운동 기지를 건설해 청년들을 훈련시켜 때가 오면 독립전쟁에 집중시킨다는 목표를 갖기 시작했대. 이회영 · 이시영(李始榮) 등 6형제분들, 아버지 이유승(李裕承) 대감이 이조판서를 지냈고 삼한갑족으로 불릴 만큼 부자였으므로 물려받은 재산이 많았지. 그런데 재산 전부를 깨끗이 조국독립에 쓰자고 결의하고 모두 처분했다고 하네. 그걸 모두 싸들고 서간도로 가서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대.
서간도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라는 곳에 자리잡았고 여준 ․ 이상룡 ․ 이동녕 ․ 김동삼 선생 등 선각자들이 거기 모여들었고, 자치단체도 만든 모양이라. 경학사, 부민단(扶民團), 그런 자치단체를 조직해 동포들을 이끌고 있다고 하네. 무관학교가 처음엔 지원자도 적고 그랬는데 만세운동이 일어난 뒤 청년들이 앞 다퉈 모여들어 군사학 교관이 부족하다 하네.”
지석규는 머릿속이 환해져서 김광서에게 몸을 기울였다.
“우리가 갈 곳이 거기군요.”
김광서는 귓속말을 했다.
“서간도에서 온 밀사를 만났어. 북만주에도 홍범도 · 김좌진 장군들이 탄탄한 세력을 이끌고 있대. 서간도와 남만주 쪽은 신흥무관학교라는 사관 양성기구를 갖고 있고, 북만주 쪽은 연해주에서 무기조달이 쉬워 장비면에서 우위에 있대. 방금 자네가 말한 대로 우리가 갈 곳은 신흥무관학교야. 그래서 나는 결심을 굳히고 토지를 매물로 내놓아 처분하기 시작했고 자네들에게 암호 편지를 보낸 거야”
“잘하셨습니다.”하고 지석규는 머리를 끄덕였다.
“자네 동기생 조철호 말이야.”
김광서 선배가 갑자기 생각나는 게 있는지 지석규를 바라보았다.
“군대 휴직하고 오산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는 조철호 말인가요?‘
“그래. 그 사람이 우리보다 앞장섰네. 독립운동을 하려고 국내를 탈출해 만주로 가려다가 체포당했대. 신문에 안 났지만 쉬쉬 소문이 돌고 있지.”
“아, 생각지도 않던 친구가 앞섰군요.”
“그러게 말일세. 이응준과 홍사익, 이 친구들이 어서 와야 할 텐데.”
“꼭 올 겁니다.”
지석규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그렇게 말했다.
홍사익, 육군대학 입학 후보자가 되다
3월 중순, 홍사익은 갑자기 사단사령부로 전속명령을 받았다. 부랴부랴 중대장 업무를 후임자에게 인계하고 사령부로 갔다. 뜻밖에도 곧장 사단장실로 오라는 명령을 받았다.
사단장 사토 가스히로(佐藤勝弘) 소장(少將)이 말했다.
“너를 긴 시간 주목해 왔다. 그래서 결정했는데 올해는 이미 마감이 지났고 내년 육군대학 응시후보자로 추천하려 한다. 그래서 공부할 수 있게 보직을 옮겨준 거다. 업무는 없다. 앞으로 1년간은 열심히 공부하는 게 네 업무다.”
홍사익은 자신이 잘못 들은 건가 생각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내 말을 알아들었느냐?”
사단장이 그렇게 말했을 때 그는 정신을 차렸다.
“넷, 알았습니다.”
사단장이 미소를 지으며 다가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네가 조선 출신이어서 어려움이 많다. 네가 불합격하면 내가 우스워진다. 그러니 분발해서 공부해라.”
“넷.”홍사익은 군화 뒤끝을 붙이고 꼿꼿이 서며 큰소리로 답했다.
홍사익은 중위로서는 빠르게 중대장을 맡았었다. 중대장 6개월 만에 사단사령부로 올라온 것도 놀랍지만 육군대학이라니, 사단장의 말은 충격적이었다.
육군대학은 출세를 보장하는 보증수표와도 같았다. 졸업하면 승진가도를 달리게 되고 별을 달아 장군이 될 가능성이 컸다. 육군대학을 나오지 않으면 아무리 탁월한 장교라도 대좌에 머무는 것이 관례였다.
육군대학은 소위로 임관하고 3~6년이 지난 장교들 중에서 신입생을 뽑는데 정원이 겨우 70명이었다. 매년 육군사관학교에서 졸업생이 800명 안팎으로 배출되므로 10분 1만이 들어갈 수 있었다. 희망자가 자꾸 누적되므로 입시 경쟁률은 30:1이 넘었다. 각 사단이 2명을 추천 상신하면 학과시험과 면접시험으로 선발하는데 우선 사단에서 추천 받는 일부터가 하늘의 별 따기였다. 사단에는 중위와 대위급 장교가 200명이 넘었다. 각 사단은 그렇게 보낸 장교가 합격하면 명예와 영광으로 여겼다. 그것은 사단장 개인의 앞날과도 관련이 깊었다. 추천한 부하장교가 육군대학을 나와 장군이 되면 자신이 퇴역한 뒤에도 군부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가 알기에 육사 700여 명의 26기 그의 동기생들 중 오카자키 키요사부로(岡崎淸三郞)는 이미 지난해 입시에 합격해 재학중이었고 유년학교 시절부터 1등을 다툰 엔도 사부로와 야나기다 겐조, 같은 구대 동급생이었던 와치 다카지, 가케사 사다아키(影佐禎昭), 다나카 류가치(田中隆吉) 등이 이 해에 사단장 추천을 받아 응시자로 결정되어 시험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중 야나기다와 와치는 같은 사단에 있어서 찾아가 축하인사를 하기도 했다. 조선 출신이 추천 될 리가 없는 일인데다 자신은 언제고 탈출해 독립전쟁 전선으로 갈 것이므로 꿈도 꾸지 않았다. 그런데 사단장이 이미 결심을 굳힌 듯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홍사익이 사단장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해 가을, 연대 기동훈련의 결과를 놓고 참모본부에서 온 평가관들의 질문을 받은 일 때문이었다. 대강당에서 공개적으로 펼쳐진 평가회에서 ‘가장 탁월했던 부대이동이었다’는 지적을 받고 그는 무대 위로 불려 나갔다. 가상적인 도상(圖上)훈련을 펼치고 공격부대를 운용하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는 1개 중대의 특공대를 운용해 적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것이 성공으로 끝나자 질문이 쏟아졌는데 모두 받아넘겼다. 그가 동서양 공격 전술과 전훈(戰勳)에 대해 통달해 있는 것과 임기응변으로 대처하는 것을 보고 평가관들은 혀를 내둘렀다. 그는 그 일로 사령관 표창을 받았다.
그 뒤 사단장과 참모들의 주목을 받으면서 그는 자기가 지휘하는 중대를 사단 최고의 중대로 만들었다. 야간사격 때 소총 가늠쇠에 고목의 뿌리에서 나온 인광(燐光)을 붙여 조준함으로써 명중시키는 요령이라든가, 무장구보를 할 때 닥쳐오게 마련인 심폐의 한계를 4단계 호흡법으로 넘어선 것 따위가 성공의 열쇠였다.
다시 그 일로 군단장 표창을 받았다. 중대장은 대위급이 맡는 보직이었다. 워낙 탁월해 중위인 그를 중용했는데 눈부시게 빛나자 사단장이 추천 결심을 한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인으로서 육군대학을 나온 사람은 아직 없었다. 육사 26기 추천이 가능한 첫해는 추천하지 못하고 내년을 약속하며 사령부로 불러올린 것이었다.
사단장실을 나왔을 때 그의 몸은 땀에 젖어 있었다. 짜릿한 감격이 몸을 훑으며 내려가고 눈앞에 희망의 문이 활짝 열리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잠깐이었다. 머릿속에 지석규와 이응준, 그리고 김광서 선배의 얼굴이 함께 떠올랐다.
이제 때가 왔다. 내가 먼저 경성으로 가니 너희들도 와라. 그렇게 말하고 간 김광서 선배의 음성이 환청처럼 들렸다. 우리들의 맹세와 가련한 내 조국은 어떻게 할 것인가. 그때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육군대학 입시에 대비하려면 미국 · 영국 · 프랑스 · 독일 · 러시아 등 세계열강과의 국제관계, 그리고 조선반도 통치문제에 대한 분석도 해야 할 것이었다. 우선 그것에 매달려 보자. 이참에 냉정하게 현재의 국면을 파악해보자. 그렇게 결심한 그는 다음날 곧장 모교인 육사 도서관으로 갔다.
거기서 교수들의 연구용 자료들까지 열람할 수 있었다. 그는 우선 파리강화회의의 진행과, 3·1 만세운동과 관련한 일본의 주요 신문 기사와 논설을 읽었다. 미국 영국 · 프랑스 등 세계열강의 대응에 대한 것도 모두 찾아 읽었다. 일본 국내신문들은 만세시위 참가자들을 폭도로 부르고 있었다. 얻은 결론은 우리 편이 아무도 없다는 것이었다.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창한 미국도 일본 편이었다. 만약 만세운동이 무장투쟁으로 이어진다면 일본을 돕기 위해 조선에 출병할 것이었다.
3·1 운동에 관한 파악과 분석을 끝낸 그는 중국인 량치차오(梁啓超)의『조선망국사략』을 원문 그대로 읽었다. 소년시절부터 한문에 능통한 그였으므로 완벽하게 소화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대한제국 황실이나 조정이 무능하고 한심하게 대응한 태도를 읽고 그는 수없이 절망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우리나라가 망했구나!’
그는 더 많은 자료를 읽기 위해 도쿄제국대학 도서관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도 육대 재학생과 응시예정자들에게 열람기회를 주는 것이 관례였다. 아침식사를 하고는 사령부 숙소를 나와 전차를 타고 제국대학 도서관으로 가서 온종일 자료를 헤쳐 나갔다. 거의 매일 한두 권 대출을 해 와서는 자정이 넘도록 통독하며 매달렸다.
어느 날 이응준에게서 편지가 왔다. 전임지인 제1연대를 거쳐 새 임지인 사단사령부로 온 것이었다. 편지는 히로시마 위수병원에서 위장병이 낫지 않아 도쿄제1위수병원으로 이송됐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다음날 오후 홍사익은 도쿄제대 도서관에서 사단사령부 숙소로 돌아가는 길에 코우지마치(麹町)에 있는 위수병원으로 갔다.
“사익이 왔구나.”하고 응준이 병상에서 일어서는데 몸이 야윈데다가 얼굴에 병색이 짙어 사익은 가슴이 뭉클하고 콧마루가 시큰했다.
병실 안에 일본인 장교들도 있어선지 응준은 산책하고 싶다며 앞장섰다. 병원은 웬만한 학교보다도 넓었으며 산책로에는 벚꽃이 만발해 있었다. 두 사람은 벚꽃 나무 밑을 걸었다.
“무쇠처럼 단단하던 네 몸이 야윈 걸 보니 연해주서 마음고생이 컸구나.”
사익의 말에 응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말도 마라. 몸도 망가지고 미쳐버리는 줄 알았다. 지금은 좀 나아진 거야. 히로시마위수병원에 보름 동안 있었으니까.”
두 중위는 사람들 왕래가 적은 벤치에 앉았다. 계속 도쿄에 있었던 홍사익보다는 전쟁터에 다녀온 응준이 할 이야기가 더 많았다. 출정명령을 받고 염창섭과 함께 영친왕을 옹위해 히로시마까지 간 이야기, 수송선 갑판에서 이종혁을 만난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블라디보스토크 도착 후의 인상, 이갑 참령 묘소참배, 그곳의 동포 항일조직에 관한 정보를 파악하고 분석해야 했던 고통스런 보직, 그리고 최악의 위궤양에 대해 털어놓았다.
“군복을 벗고 탈출해 홍범도 장군이니 최재형 노야를 찾아가고 싶었어. 그러나 감시가 심해 그럴 수 없었어. 탈출한다 해도 체포될 가능성이 구십구프로였어. 세상을 더 살아봐야겠지만 그런 고통스런 시간은 아마 내 인생에 더 없을 거야.”
응준은 울먹이며 말했다.
홍사익은 팔을 뻗어 친구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네가 수송선에서 염창섭과 이종혁에게 했다는 말처럼 그건 우리들의 숙명이야. 우리는 그렇게 선택됐어.”
이제부터 홍사익이 말할 차례였다. 그는 응준이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입을 열었다.
“나 사단사령부로 옮겼다. 네 편지는 연대로 갔다가 사령부로 나를 찾아 왔지. 아직 확정된 게 아니지만 나 육군대학에 갈 거 같다.”
“뭐? …지금 육군대학이라고 했냐?”
응준이 크게 눈을 뜨며 벤치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그래, 사단장이 강력하게 밀고 있어. 오늘도 제국대학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온 거야.”
사익은 차근차근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했다. 기동훈련에서 사령관 표창을 받은 이후 그의 중대가 야간사격과 무장구보에서 1등을 기록해 최고의 중대로 선정되어 다시 표창장을 받은 일, 그리고 갑자기 사단사령부로 발령받고 사단장에게서 직접 들은 말을 이야기했다.
응준은 머리를 끄덕였다.
“너는 내 친구지만 역시 대단하다. 좋은 군벌 가문 출신 장교들이 육군대학에 가기 위해 죽어라 발버둥치고, 실전기록을 쌓기 위해 동시베리아 영하 30도 추위 속에 목숨 걸고 뛰는데 그 어려운 관문을 뚫다니 말이다.”
홍사익은 이참에 자신의 충정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요코하마의 맹세는 내 가슴에 단단한 나무처럼 박혀 있어. 사단장을 만나고 나오는 순간 그걸 생각했지. 내 조국을 어찌해야 하는가. 나는 요즘 우리나라가 망국에 이른 과정과 세계열강의 역학구도를 집중분석하고 있어. 1860년대 일본 조야에 등장한 정한론(征韓論)의 전개과정에서부터 ‘일본은 미국의 필리핀 점령을 인정하며 미국은 일본의 조선 점령을 인정한다. 미국 · 영국 · 일본은 실질적 동맹관계이다’라고 한 1905년 가쓰라-태프트 밀약까지의 전개과정, 일본이 러일전쟁 승전 후 포츠머스에서 강화조약을 맺으면서 ‘조선반도에서의 일본의 우월권을 승인한다’는 조항을 넣은 과정을 모두 파악했지. 그런 다음 보호조약과 합병조약까지 파고들고 있어. 좀 더 파고들면 우리나라 독립운동에 대한 방향도 분명히 잡을 수 있을 거야.”
해가 기우는지 벚꽃나무 그림자들이 길게 드러눕고 있었다. 저녁식사로 죽을 먹고 약을 복용해야 한다고 하며 응준이 일어섰다. 두 사람은 천천히 병동을 향해 걸었다.
응준이 말했다.
“너처럼 연구를 통해 민족독립 문제에 접근하는 거도 필요하겠지. 비관적인 결론이 안 나오기를 바라네. 나는 요양휴가를 얻어내려 해. 휴가 얻으면 경성으로 갈 거야. 김광서 선배 곁으로 가서 탈출을 계획해야지.”
두 사람은 곧 다시 만나기로 약속하고 병동 앞에서 헤어졌다.
이응준의 귀국
홍사익이 문병을 다녀간 다음날, 이응준은 김광서 선배가 보낸 엽서를 받았다. 위장병을 걱정하며 경성에서 와서 치료 받는 길을 찾으라는 말, 요코하마에 간 추억이 새롭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어서 경성으로 오라는 암호연락이었다.
응준은 며칠 뒤 진단서를 받아냈다. 위궤양이 심각하게 진행되고 있고 신경쇠약 증세도 있어 6개월 이상의 자택요양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곧이어 병원장의 요양휴가 허락을 받은 그는 아자부 구에 있는 전 소속부대로 가서 직속상관들에게 인사를 하고 동료 장교들을 만났다.
다음날, 귀국길에 오르기 위해 밤 기차표를 끊어 놓고 신바시역에서 홍사익을 기다렸다. 육군 중위 정복을 입고 장교용 여행가방을 든 차림이었다. 간밤에 미리 군용전화로 통화하며 약속한 터라 홍사익은 제국대학도서관에서 곧장 올 것이었다.
고국으로 돌아가기 위해 신바시역에 오니 감회가 컸다. 이 기차역은 1909년 9월 6일 44명의 마지막 무관생도들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고국을 떠나 도쿄에 도착한 바로 그곳이었다.
응준이 역 광장을 천천히 걸으면서 그 시절을 더듬고 있는데 홍사익이 왔다. 보름 만에 만나는 것이었지만 두 사람은 어깨를 끌어안는 포옹을 하고 음식점을 찾아 갔다. 응준이 아무거나 먹어도 된다고 했으나 사익은 따뜻하게 데운 일본식 청주 사케와, 전복을 넣은 흰죽과 생선요리를 시켰다.
“얼굴이 지난번보다 좀 나아 보인다. 너를 고국으로 보내니 술 한잔은 해야지.”
홍사익은 응준에게 술을 권하고 자기 잔도 받았다. 잔을 부딪어 건배한 다음 찬찬한 시선으로 응준을 바라보았다.
“감회가 어떠냐?”
응준은 사케를 혀를 적실 정도로 조금씩 음미하며 마셨다.
“내 뜻대로 된다면 다시는 여기 안 올 테니까 감회가 크지. 신바시는 우리가 십 년 전 도착했던 데니까.”
응준은 그렇게 말하고 지난 보름 동안의 일에 대해 이야기했다. 경성으로 돌아가 김광서 선배를 만나고, 아마 지석규도 올 것이므로 함께 탈출계획을 세울 거라는 말도 했다. 가방을 끌어당겨 권총을 꺼냈다.
“권총은 개인 지급 장비니까 탈출 길에 필요할 듯해 가져가네. 내 결심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고 이갑 참령님과의 다짐을 확인하는 것이기도 해. 삼청동 무관학교 편입 후 첫 외출을 나갔을 때 참령님이 내 손에 쥐어주시며 ‘군인은 총과 같다. 나라가 위기에 처한 때에 군인은 조국을 지키는 총이 될 수도 있고 조국을 쏘는 총이 될 수도 있다’고 하셨지. 26식 권총 같은 거야.”
그때 외출에서 복귀한 응준이 그 말을 한 걸 기억하는지 사익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분명한 음성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너는 홍사익이 어떡할 건가, 어떤 결심을 하고 있나 알고 가야겠지.”
“그래, 지석규까지 경성에 모여 널 기다릴 테니까.”
이응준은 정색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홍사익은 찬찬한 시선으로 응준을 바라보았다.
“보름 전 너를 만난 뒤에도 나는 계속 우리 조국의 문제를 파헤쳤어. 얻은 결론은 아직 독립전쟁을 할 때가 아니라는 거야. 3·1만세 운동은 애국자들의 순진한 열정에서 나온 거야. 파리강화회의에 맞춰 전 세계에 독립 지원을 호소하려는 발상, 미국 대통령 윌슨이란 자가 외친 민족자결주의에 기대를 건 것도 그랬어. 미국과 일본은 필리핀과 조선을 각각 나눠먹기로 밀약한 사이이고 함께 세계대전 승전 동맹국, 러시아 연해주에 국제간섭군을 파병한 동맹국이야. 미국이 우리 편을 들 리가 있나? 천만의 말씀이지. 3·1만세 운동이 무장투쟁으로 발전해서 일본의 조선반도 지배에 위험이 온다면 미국은 아마 일본을 도와 조선반도에 출병할 거야. 약육강식의 원리, 그게 우리 민족에게도 엄정하고 혹독하게 적용되고 있어. 이런 판국에 무장투쟁으로 일본에 맞서봤자 1퍼센트도 승산이 없어. 전략은 냉철해야 해. 지금은 때가 아냐. 일본 군복 벗어던지고 독립투쟁에 투신하는 건 거룩한 용기가 되긴 하지만 자기희생이 될 뿐이야. 나는 더 기다려야 한다고 생각해. 언제고 하늘이 내리는 기회가 올 거야”
홍사익의 설명을 다 듣고 이응준은 손을 내저었다.
“집중연구를 했으니 네가 보는 국제관계의 역학구도는 정확하겠지. 3·1만세 운동이 한계를 드러내며 실패한 걸로만 봐선 안돼. 민족을 각성시켜 해방투쟁으로 힘을 집중할 수 있는 계기를 불러 왔다고 나는 생각해. 내가 가 있던 러시아 연해주, 그곳의 동포 항일조직은 금방이라도 터질 화산 밑의 용암처럼 꿈틀거리고 있었어. 북간도도 그렇다는 정보를 읽었어. 그게 터질 거야.”
홍사익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거룩한 열정이지만 맹목적이지. 아직 때가 아니라는 건 내 신념이야. 경성으로 가거든 김광서 선배와 지석규에게 분명히 내 말을 전해 줘.”
이응준은 대답하지 않고 길게 한숨만 쉬었다.
홍사익이 간곡한 얼굴을 하고 다시 말했다.
“당연히 맹세했으니 나도 육군대학이고 뭐고 다 던지고 가야지. 하지만 지금은 아냐. 나는 육군대학에 가고 싶어. 고급 지휘관, 고급 참모 출신도 독립군에 필요할 거야. 그리고 나까지 합류하면 모두가 위험해져. 내가 갈 길은 무단이탈밖에 없는데 사단장이 기어이 나를 잡아들일 거야.”
이응준은 대꾸하지 않았다. 보름 전 만났을 때 이미 동반 탈출은 어려울 거라고 판단한 터였다. 홍사익이 분명한 성격을 가진 건 아는 바이지만 막상 못 간다는 말에 할 말이 없었다.
사익은 팔을 뻗어 응준의 권총을 집어 자기 앞에 놓고는 그 위에 손을 얹었다.
“이 권총에 맹세한다. 나 홍사익은 뒷날 독립전쟁 전선에 갈 것을 맹세한다.”
홍사익은 십여 년 우정을 나누며 단 한 번도 식언한 적이 없으며 신뢰를 잃은 적이 없었다. 사익의 말대로 사익까지 합류하여 탈출하기는 어렵다는 생각, 육군대학을 나와 고급장교가 된 뒤 탈출해도 된다는 생각이 스쳐갔다. 응준은 사익의 옆으로 옮겨 가서 팔을 뻗어 사익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널 믿는다. 경성으로 가서 김광서 선배와 지석규에게 설명할게.”
이응준은 4월 2일 경성에 도착했다. 육사에 재학하던 1912년 여름방학에 온 후 일곱 해만에 돌아온 것이었다. 일곱 해 전에 그랬던 것처럼 역 앞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원동 이 참령 댁으로 갔다. 이번에도 정희는 없었다. 원동 집은 일곱 해 전처럼 청지기가 지키고 있었다.
“이걸 어쩌나. 정희 아씨는 진명여학교 만세 부르는 일에 앞장섰다가 체포당해 고초를 겪고 닷새 전 어머니와 함께 고향 숙천으로 떠났다오.”
청지기의 말을 듣고 그는 가슴이 철렁했다. 서른 살 먹은 육군 장교답지 않게 애처로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었다. 이번이 세 번째 숨바꼭질이었다. 일곱 해 전 왔을 때는 아버지의 병구완을 위해 떠나 집에 없었고, 참령이 별세한 직후 러시아 연해주로 출정한 그가 니콜스크 우수리스크에 있는 집을 찾아갔을 때는 공부를 계속하기 위해 경성으로 떠나고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삼청동 지석규의 집으로 갔다. 마침 외출하려고 막 군화를 신다가 인기척에 대문을 연 지석규는 눈을 크게 뜨며 반색을 했다.
“때마침 잘 왔네. 지금 나하고 같이 갈 데가 있네.”
지석규의 아내가 아들과 딸을 거느리고 대청을 내려와 인사를 했다.
그는 조카처럼 귀엽고 소중한 아이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석규 아내는 셋째를 임신해 만삭의 몸이었다.
그녀가 말했다. “나는 이 달에 셋째를 낳을 거예요.”
“잘하셨습니다, 형수님.”
“이 사람아, 뭘 잘했다는 거야?”하고 웃으면서 지석규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대문을 나와 골목길에 발을 디디면서 지석규가 다시 말했다.
“자네 지금 어디서 왔나?”
“한 시간 전에 기차역에 내렸고 원동 참령님 댁을 들러서 왔어. 정희는 만세시위 때문에 옥고를 치르고 모친과 함께 숙천으로 떠났대.”
골목을 벗어나 큰 길로 나오자 멀리 두 사람의 모교인 대한제국무관학교 건물이 보였다. 기기서 보낸 시간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밀려왔다.
“정희 씨뿐만이 아니야, 이친구야. 자네 아우 영준이도 붙잡혀서 서대문감옥에 갇혀 있어.”
지석규의 말에 그는 발을 멈추고 섰다.
“뭐라고?”
“어제야 알았어. 자네 아우 이름을 아니까 배재 재학생 구속자 명단에서 확인한 거네. 만세시위를 독려하는 전단을 돌리다가 체포당했어. 그래서 오늘 김광서 선배님과 함께 감옥에 면회를 갈 참이었네. 우리가 일본군 장교니까 면회가 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네.”
“나 대신 신경 써 줘서 고맙네.”
응준은 물기에 젖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정희 소식을 들었을 때처럼 가슴이 다시 먹먹해졌다.
“김광서 선배님은 어떻게 지내?”
그의 물음에 지석규는 착잡한 표정을 했다.
“감시를 피하기 위해 탕자처럼 생활하고 있지. 경성 시내에 온갖 소문이 자자해. 소문 중 하나가 경성 최고의 요정인 명월관에서 경성 최고 기생 현계옥(玄桂玉 1897-?)과 놀아나고 있다는 거야. 나의 배재학당 동창들은 소문을 전하면서 그러더군. 김광서, 그 사람이 선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재산이 많긴 하지만 명월관 출입이 다 뭐냐고. 명월관은 나라 팔아먹는 일에 앞장선 대가로 이권을 차지해 졸부가 된 친일파 놈들이 기생을 끼고 노는 데가 아니냐고 말이야. 나는 그게 탈출을 위한 위장이라고 말할 수는 없었지. 한 친구가 해괴한 소문이 있다고 말하더군. 현계옥은 현정건이라는 독립투사의 정인인데 의친왕 이강이 갖고 놀고 김광서 중위까지 끼어들어 사각관계가 됐다고 말이야.”
지석규는 혹시 미행하는 사람이 없나 주변을 살피고 다시 입을 열었다.
“나라가 망했으면 왕자들 중 하나라도 의병을 이끌고 싸우다 전사했어야지, 일본에 빌붙어서 생활비 받아쓰는 주제가 아닌가. 참, 자네 연해주 파병 길에 염창섭하고 영친왕이 탄 기차에 동승했다고 신문에 났더군. 영친왕은 아직도 철이 없던가?”
“응, 그냥 그렇게 유약해 보였어.”하고 응준이 답했다.
“의친왕 이강은 여자를 대여섯 거느리고도 모자라서 여염집 여자를 기웃거린다더군. 그런 사람과 같이 놀아나며 비난 받으니 김 선배의 위장은 성공하고 있는 거지.”
“자네는 세상의 그런 평판을 김 선배님에게 말하지 않았나?”
응준의 말에 지석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더니 껄껄 웃더군. ‘명월관뿐만이 아니고 사축동(司畜洞)에 가면 중국요릿집 여화원(麗華園)이 있는데 거기도 내 단골이야.’ 하더군. 그래서, 도대체 나는 안 데려가고 누구와 마시냐고 말했더니 황실유학생 동기들이라더군. 유학 떠날 때 우리들하고 똑같은 다짐을 했대. 조국을 지키는 기둥이 되자 약속했었대. 지금 식민지가 된 이 나라로 돌아와서 대개들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더군. 최린이나 최남선처럼 3·1 만세 운동에 앞장서 감옥에 간 사람도 있지만 대부분 그런 모양이야.”
이야기를 하며 걷다보니 김광서 선배를 만나기로 했다는 종로통의 YMCA 회관 앞이었다. 회관 건물에서는 중학과정 학생들의 수업이 막 끝났는지 교모를 쓴 학생들이 입구 쪽에서 밀려 나왔다. 그 속에 섞여 나오는 김광서 중위를 발견하고 이응준은 육사 출신답게 차렷 자세로 서서 날렵한 동작으로 경례했다.
김광서 중위는 답례하고 그와 악수를 하면서 마침 자신의 뒤를 따라 나오는 백발 성성한 노인을 향해 돌아섰다.
“선생님, 무관학교 재학 중 일본으로 가서 육사를 나온 지석규 중위와 이응준 중위입니다.”
“오, 그렇군요. 나는 이상재라는 사람이올시다.”
이응준은 지석규와 함께 부동자세로 서서 경례했다. 일본으로 건너가기 전부터 이미 이름을 들었던 민족지도자이기 때문이었다.
이상재 선생과 헤어진 뒤 김광서는 지석규와 이응준의 팔을 끼고 골목으로 끌고들어가며 속삭였다.
“시절이 시절인 만큼 도처에 밀정들이 깔려 있어.”
응준이 서대문감옥에 혼자 다녀오겠다고 했으나 김광서와 지석규는 부득부득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래서 세 사람은 전차를 타고 감옥이 있는 현저동으로 갔다.
서대문감옥의 접견실에서 응준은 창살을 가운데 두고 아우와 마주 섰다. 영준은 미결수이지만 미성년이어서 붉은 죄수복이 아닌 푸른 죄수복을 입고 있었다.
“나는 조금 전 경성에 도착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냐?”
“괜찮아요. 재판까지 가지는 않고 석방될 테니 걱정 마셔요.”
영준은 고문당해 몸이 아파서인지, 아니면 감시자가 있어서인지 그렇게 말했다.
영치금과 사식을 넣어주고 돌아서면서 그는 가슴이 쓰렸다.
세 사람이 사직동 166번지 김광서 중위의 집에 도착한 것은 뉘엿뉘엿 해가 질 무렵이었다. 김광서의 아내와 여덟 살 먹은 큰딸과 네 살 먹은 작은딸이 서양식으로 지은 저택의 대리석 계단 아래 나란히 서서 인사하며 손님들을 환영했다.
이응준으로서는 말로만 들었지 처음 와 보는 대저택이었다. 김광서는 술 한 병과 술잔과 대구포를 들고 나오더니 저녁 새들이 야단스럽게 우는 후원으로 두 사람을 데리고 갔다. 거기 맑은 샘과 ‘경천각(擎天閣)’이라고 쓴 한문 현판이 달린 작은 정자가 있었다.
“여기서 이응준이 온 걸 환영하는 환영주를 한 잔 하고 저녁상이 차려지거든 사랑채로 가세.”
세 사람은 경천각에 앉아 술을 한 잔씩 나눠 건배하며 재회의 감회를 나누었다.
몇 순배 돌았을 때 큰딸이 와서 저녁상이 차려졌음을 알렸다. 사랑채로 옮겨 안주를 든든히 먹으며 술잔을 기울였다.
김광서가 말했다.
“사람이 맹세는 할 수 있으나 실천은 어렵다. 우리가 피 끓던 젊은 시절에 아오야마 묘지에서 한 약속이나, 요코하마 주카가이에서 했던 단지맹세도 마찬가지야. 우리보다 앞서 조철호가 만주로 탈출했고, 이제 우리가 탈출한다면 임관한 33명 중 여럿이 뒤따를 거야.”
김광서 중위는 술잔을 들어 단번에 마셔버리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의친왕 이강 공이 소문처럼 엉망은 아냐. 정신이 살아 있고 망명의 뜻이 있는 거 같아. 지석규 중위도 와 있다고 말하자 조용히 부를 테니 한 번 같이 만나자고 하더군. 그 때는 이 중위도 같이 가세.”
“네, 선배님.”
이응준은 아까 YMCA 회관으로 갈 때 지석규에게서 들은 이강에 대한 세상의 평판을 생각하며 대답했다.
세 사람은 10년 전 유년학교 시절에 김광서 선배가 학교로 찾아와 준 일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김광서가 이응준을 향해 팔을 쭉 뻗쳐 빈 잔을 내밀었다.
“넌 왜 홍사익이 이야기를 안 하는 거야?”
이응준은 심호흡을 했다.
“사익이는 뒷날 탈출하겠다 했습니다. 사단장이 육군대학 입학준비를 하라고 했답니다.”
김광서와 지석규는 놀라 동시에 어깨를 폈다.
응준은 홍사익을 두 차례 만난 일을 사실 그대로 자세히 이야기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김광서 중위가 길게 탄식 같은 한숨을 쉬었다.
“홍사익이 못오는구나. 생도시절부터 비범하더니 조선인 최초로 육대에 가는구나. 하지만 사단장의 행동은 우리 조선인들을 동화시키려는 고급책략일 수도 있어. 어쩔 수 없지. 우리끼리 가야지.”
지석규가 머리를 끄덕였다.
“홍사익은 신실한 사람이니 믿어야지요. 뒷날 올 겁니다.”
김광서 중위가 다시 술병을 잡았다.
“이응준, 말해 봐라. 네가 가 있던 연해주의 독립운동 조직은 어떠냐?”
응준은 반 년 동안 보고들은 내용을 자세히 이야기했다. 최재형 노야와 홍범도 대장이 어떤 사람이며, 그들이 독립군 부대를 만들기 위해 얼마나 절치부심하고 있는가도 들려주었다. 김광서와 지석규는 주의 깊게 들었다.
“대단한 분들이군. 일본군이 국제간섭군 명분을 잃고 철수하면 무장세력을 조직해 일어서겠군. 그분들이 지휘하는 독립군과 충돌하지 않고 네가 빠져 나온 건 불운 속의 행운이지.”
지석규 중위가 말했다.
그것은 정말 이응준에게 불운 속의 행운이었다. 세 사람이 대화를 나누고 있던 1919년 4월 2일 바로 그 날부터 일본군은 연해주에서 토벌작전을 벌여 수많은 항일 조선인들을 학살했다. 조선인 공동체의 정신적 지주인 최재형 노야는 4월 6일 우수리스크 역에서 총살당했다. 이응준이 계속 연해주에 있었다면 일본군이 동포들을 학살하는 그 비극적인 상황 속에 놓였을 것이다.
반대로 불운일 수도 있었다. 홍범도는 토벌에서 살아남아 무장세력을 조직해 북간도로 건너갔고, 1920년 6월 청사에 빛나는 펑우둥(鳳梧洞 봉오동) 대첩을 벌여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했다. 만약 이응준이 몸이 망가져 후송되지 않고 탈출해 홍범도에게 갔다면 일본군 전술을 속속들이 아는 참모가 되어 독립운동사에서 별처럼 빛나는 이름이 됐을 것이다.
그리고 세 사람은 앞날을 예측하지 못했다. 김광서와 지석규가 서간도로 탈출해 신흥무관학교 교관이 되어 애국청년들을 가르치고, 제자들이 독립군 초급 지휘관이되어 또 하나의 청사에 빛나는 전투 청산리대첩을 이끌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김광서가 연해주로 가서, 비호처럼 빠른 독립군 기병대를 조직해 여기저기서 벼락 치듯 일본군을 공격하며 ‘백마 탄 김일성 장군’이라는 전설의 주인공이 되고, 뒷날 지석규가 광복군사령관이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김광서는 술상 위에 팔을 괴고는 손짓을 하여 두 사람을 끌어당겼다.
“나는 서간도 독립운동 조직과 계속 접촉해 왔다. 지금 신흥무관학교는 우리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지석규와 이응준은 고개를 끄덕여 가겠다는 결의를 표시했다.
“나는 가끔 미행당하는 걸 느낀다. 우리 셋이 모였으니 감시가 더 심해질 거다. 나는 계속 난봉꾼들과 어울리는 탕자가 되려고 한다. 너희들도 딴청을 부려라.”
“알았습니다.” 이응준은 지석규와 입을 맞춰 대답했다.
세 사람은 9년 전 요코하마에서 그랬던 것처럼 폭음을 하고 김광서의 집 사랑채에서 잤다. 달라진 것이 있다면 홍사익이 빠졌다는 것, 그리고 삼십대 나이에 접어들었으며 아내와 자식들과 약혼녀를 두었다는 사실이었다.
응준은 이틀 동안 김광서 선배의 사직동 집에 묵으며 경성에 머물렀다. 김광서 선배의 황실유학생 동기인 내과의사 김태진에게 위장병 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어느 날 진료가 끝난 뒤 김태진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던 중에 이태희가 평양에서 서경(西京)의원이라는 병원을 차리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평안도 숙천으로 정희를 찾아가려 했던 참이라 그는 다음날 평양행 기차를 탔다. 기차에서 읽으려고 『동아일보』를 산 그는 어제 이상재 선생이 체포되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분과 접촉했으므로 언제 연행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불안했다.
평양 도착 이틀 후, 그는 이태희의 병원에서 정희와 재회했다. 이태희가 사촌누이에게 이응준이 왔으니 빨리 오라는 편지를 쓰고 마차를 전세 내어 100리나 떨어진 숙천 땅으로 보냈던 것이다.
희고 갸름한 얼굴에 눈이 아름다운 처녀가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아침부터 병원 대기실에 나와 연신 출입문을 바라보며 기다렸던 응준은 읽던 책을 놓고 일어섰다. 오랜 세월 그리워하고 만나지 못한 정희였다.
“이제 찾아와서 미안하다.”
정희는 주르르 눈물을 흘렸다. 응준은 다가가 손을 잡았다.
정희는 대기 중인 환자들이 바라보는 것도 모르고 그의 가슴에 머리를 기댔다.
“세 번이나 길이 엇갈린 걸 저도 알고 있어요.”
스무 살과 열세 살 때 헤어져 10년 만에 그렇게 재회한 두 사람은 병원 내실로 가서 다탁을 사이에 두고 서양식 안락의자에 마주 보며 앉았다. 그는 비로소 정면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릴 적의 모습이 역력히 남아있었지만 스물세 살의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으로 변해 있었다.
“아까는 가슴이 떨려서 쓰러지는 줄 알았어요.”
정희는 아직도 진정이 안 되는지 눈을 감고 가슴에 손을 얹었다. 그 모습이 애처롭고 사랑스러워서 응준은 그녀 옆으로 가서 앉았다.
정희는 쑥스러운 듯 고개를 숙이며 자기 손의 반지를 들여다보았다.
“이걸 보며 오늘을 기다렸어요.”
그는 손을 내밀어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잡았다.
“늘 네 걱정을 했다.”
“저도 그랬어요.”
그녀의 얼굴은 기쁨과 슬픔, 그리고 감사와 안심의 빛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 옛날 철없는 시절 같았으면 울고 웃고 감정을 드러낼 텐데 이제는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그래서 더욱 품위 있고 아름다워 보였다.
그녀는 그의 넓고 든든한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이제 안심이라는 듯 눈을 감고 한참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더니 어느 순간 고개를 들어 눈부신 듯이 그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이렇게 잘 생겼어요? 옛날에도 그래서 어린 내 가슴이 뛰었는데.”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