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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戊戌 | 일辛丑 | 월壬子 | 년丁未 |
| 78甲辰 | 68乙巳 | 58丙午 | 48丁未 | 38戊申 | 28己酉 | 18庚戌 | 8 辛亥 |
<癸水 사령>
大明神宗皇帝萬曆三十五年丁未 我宣祖大王四十年 十一月辛丑。十二日戌時 先生生于沃川郡九龍村。
先是。母郭夫人夢呑明月珠而有身。至是父睡翁先生。適以宗家祀事。在靑山衙舍。夢孔子率諸子至家。俄而解㝃之報至。故小字聖賚[宋子大全 附錄卷二/年譜一]
선조 40 1607 정미 萬曆 35 1 11월 신축(12일), 戌時에 沃川 九龍村에서 태어나다.
광해군 6 1614 갑인 萬曆 42 8 宋爾昌에게 나아가 그 아들 宋浚吉과 함께 수학하다.
광해군 9 1617 정사 萬曆 45 11 부친 睡翁公이 진사시 합격 후 홀로 西宮에 배알하여 禁錮되다.
인조 3 1625 을축 天啓 5 19 2월, 韓山李氏와 혼인하다.
인조 5 1627 정묘 天啓 7 21 丁卯胡亂 때 학업에 힘쓰라는 부친의 서신을 받다. ○ 3월, 백형 宋時熹가 殉死하다.
인조 6 1628 무진 崇禎 1 22 4월, 부친상을 당하다. ○ 9월, 沃川 赤登江 가에 장사 지내고 형제들과 시묘살이를 하다.
인조 8 1630 경오 崇禎 3 24 服을 마치고 沙溪 金長生을 찾아가 「近思錄」, 「心經」, 「家禮」 등을 배우다.
인조 9 1631 신미 崇禎 4 25 8월, 沙溪 金長生의 상을 당하다.
인조 10 1632 임신 崇禎 5 26 懷德 宋村으로 이사하다.
인조 11 1633 계유 崇禎 6 27 9월, 생원시에 장원하다. ○ 敬陵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보름 만에 사직하다.
인조 12 1634 갑술 崇禎 7 28 4월, 宋浚吉과 嶺外를 유람하고 仁同에 가 張顯光을 방문하다.
인조 13 1635 을해 崇禎 8 29 11월, 大君 師傅에 제수되다.
인조 14 1636 병자 崇禎 9 30 겨울, 丙子胡亂이 일어나자 仁祖를 호가하여 南漢山城으로 들어가다.
인조 16 1638 무인 崇禎 11 32 別提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정축년 이후 벼슬할 뜻을 버리고 黃澗에 우거하며 학문에 힘쓰다.
인조 17 1639 기묘 崇禎 12 33 3월, 李惟泰, 尹宣擧와 함께 珍山에 모여 重峯 趙憲의 遺事를 의논하다. ○ 9월, 龍潭 縣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19 1641 신사 崇禎 14 35 金克亨과 편지로 性情의 體用說을 논하다.
인조 20 1642 임오 崇禎 15 36 尹鑴와 理氣說을 변론하다. ○ 처음에는 윤휴의 영특함을 인정하여 교유하였으나 후에 그가 朱子學을 벗어나 자신의 학설을 주장하자 斯文亂賊으로 공격하다.
인조 22 1644 갑신 崇禎 17 38 6월, 明 崇禎皇帝가 殉國했다는 소식을 듣고 擧哀하다. ○ 11월, 지평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인조 23 1645 을유 順治 2 39 5월, 楊州 石室村으로 金尙憲을 방문하여 부친 睡翁公의 묘갈명을 받다.
인조 24 1646 병술 順治 3 40 6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 모여 講하다. ○ 12월, 兪棨와 함께 愼天翊, 安邦俊을 방문하다.
인조 25 1647 정해 順治 4 41 진선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8월, 飛來庵에서 제생과 학문을 講하다.
인조 27 1649 기축 順治 6 43 5월, 仁祖가 승하하자 擧哀하다. ○ 6월, 孝宗의 소명이 있자 입대하여 〈己丑封事〉를 올리다. ○ 10월, 장령이 되다. ○ 12월, 집의가 되다.
효종 1 1650 경인 順治 7 44 스승 金集이 金堉과의 불화로 내려가자 의리상 홀로 남기 어렵다는 이유로 귀향하다. ○ 4월, 沙溪 金長生의 行狀을 짓다. ○ 11월, 宋浚吉과 함께 栗谷年譜를 교정하다.
효종 3 1652 임진 順治 9 46 金尙憲을 哭하다. ○ 11월, 李惟泰, 尹宣擧와 遯巖書院에서 만나다.
효종 4 1653 계사 順治 10 47 忠州 牧使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4월, 懷德 宋村에서 鄕飮酒禮를 행하다. ○ 5월, 金慶餘의 喪에 조문하다. ○ 윤7월, 兪棨, 尹宣擧와 黃山書院에 모이다. 尹宣擧에게 尹鑴와 절교할 것을 종용하다.
효종 5 1654 갑오 順治 11 48 2월, 집의가 되었다가 체직된 뒤 副護軍이 되다. ○ 尹宣擧, 李惟泰와 〈疑禮問解〉를 교정하다. ○ 4월, 특지로 동부승지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체직되다. ○ 兪棨, 尹宣擧 등을 皐蘭寺에서 만나 虎巖에서 뱃놀이하고 「心經」을 강론하다.
효종 6 1655 을미 順治 12 49 2월, 이조 참의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모친상을 당하다. ○ 沃川 月伊洞에 장사 지내다.
효종 7 1656 병신 順治 13 50 부모의 묘소를 懷德 板橋里로 移葬하다. ○ 윤5월, 金集의 訃告를 듣고 석달복을 입다. ○ 滄洲 金益熙의 부고를 듣다. 후에 神道碑文을 짓다.
효종 8 1657 정유 順治 14 51 5월, 服을 마치고 찬선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다. 상이 「朱子語類」, 「擊壤集」을 하사하다. ○ 8월, 사직소를 올리며 克復과 修攘에 대한 대책인 〈丁酉封事〉를 지어 密封해 올리다. ○ 10월, 상이 密諭를 내리자 마침내 경영에 뜻을 두고 兪棨와 함께 계책을 의논하다.
효종 9 1658 무술 順治 15 52 2월, 이조 참의가 되었다가 곧이어 특지로 예조 참판에 제수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 5월, 滄洲書院(表忠祠)에 金集을 추향하다. ○ 찬선이 되다. ○ 再從兄의 아들 宋基泰를 후사로 삼다. ○ 특지로 이조 판서가 되다. 연일 召對에 입시하여 治道를 논하고 경연에서 「心經」을 강하다. ○ 尹鑴의 등용문제로 尹宣擧와 편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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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 24일(기미) 재종형(再從兄)의 아들 기태(基泰)를 후사(後嗣)로 삼았다. 선생이 무릇 아들 둘을 두었으나 모두 키우지 못하였고, 또한 두 번이나 첩을 두어 모두 후사(後嗣)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딸만 낳았거나 손이 없거나 하였다. 이에 이르러 비로소 관(官)에 알리고 후사를 세우니, 실은 선생의 숙부(叔父) 습정공(習靜公)의 가운데 아들인 사부공(師傅公) 휘(諱) 시영(時瑩)의 둘째 아들인데, 어릴 적부터 뜻을 두었고 또한 일찍이 집에서 키웠다.
己未。以再從兄子基泰爲後。 先生凡生二男子。俱不育。又再卜姓。皆爲求嗣而或生女子。或無育。至是始聞官立後。實先生叔父習靜公之仲子師傅公諱時瑩第二子。而自幼注意。亦嘗鞠之于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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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종 10 1659 기해 順治 16 53 3월, 熙政堂에서 獨對하여 修攘의 일을 논하니, 효종이 은밀히 手札을 내리다. ○ 孝宗이 승하하자 慈懿大妃의 服制를 의논할 때 朞年服으로 정하였는데 尹鑴가 이에 반대하여 삼년복의 宗統說을 주장하다. ○ 孝宗의 誌文을 짓다. ○ 洪汝河의 상소로 인해 사직하여 체차되다. ○ 판중추부사가 되어 宋浚吉과 함께 山陵의 일을 의논하다. ○ 좌참찬에 제수되었으나 사직소를 올리고 도성을 떠나 懷德 蘇堤로 돌아오다.
현종 1 1660 경자 順治 17 54 李厚源의 訃告를 듣다. ○ 3월, 우찬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다. ○ 이른바 1차 禮訟이 일어나자 練服의 변경 및 許穆의 喪服圖에 반박하는 의논을 올리다. ○ 尹善道가 상소하여 慈懿大妃 服制와 山陵의 일로 공격하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병조 판서, 이조 판서, 판중추부사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사직하다.
현종 2 1661 신축 順治 18 55 祧廟의 禮에 대해 헌의하다. ○ 5월, 興政堂에 입대하여 禮訟의 전말을 진달하다. ○ 趙絅이 상소하여 윤선도를 변호하자 곧 도성을 떠나다. ○ 12월, 公州 遠基로 거처를 옮기다.
현종 3 1662 임인 康熙 1 56 1월, 興農書堂에서 族譜를 교감하다. ○ 3월, 金剛山을 유람하다. ○ 明의 멸망을 듣고 애통해 하다. ○ 10월, 礪山 黃山으로 이사하다. ○ 尹宣擧와 栗谷 年譜를 교감하다. 尹鑴의 문제로 尹宣擧를 계속 規戒하다.
현종 4 1663 계묘 康熙 2 57 1월, 宋浚吉과 연명으로 상소하여 陳戒하다. ○ 4월, 延平從祀議를 올리고, 李端相과 永寧殿의 廟制를 의논하다. ○ 8월, 俗離山을 유람하고 竹林書院에서 大享禮를 거행하다.
현종 5 1664 갑진 康熙 3 58 兪棨의 상을 당하다. ○ 趙憲과 숙부 宋邦祚의 묘표를 쓰다. ○ 11월, 俗離山에 들어가다.
현종 6 1665 을사 康熙 4 59 3월, 鄭澈의 遷葬에 참여하다. ○ 顯宗이 온천에 행차하여 부르니 行宮에 입대하다. ○ 元子의 탄생을 하례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許穆의 공격을 받다. ○ 9월, 東鶴寺에서 李惟泰, 尹宣擧와 만나 「沙溪遺稿」를 교정하다.
현종 7 1666 병오 康熙 5 60 淸州 枕流亭에 우거하다. ○ 상이 史官을 보내 계속 부르자 行在所에 나가 대죄하다. ○ 俗離山 華陽洞으로 거처를 옮기다. ○ 10월, 同春과 함께 「小學諺解」를 개찬하여 올리다. ○ 12월, 世子貳師가 되었으나 상소하여 사직하다.
현종 8 1667 정미 康熙 6 61 2월, 李䎘이 許積, 鄭太和를 논하다가 귀양가자 상소하여 대죄하다. ○ 6월, 成文濬의 墓碣銘을 지으면서 鄭仁弘에게 붙었던 일을 언급하여 마침내 成氏, 尹氏 일가와 불화가 생기다. ○ 靜庵 조광조(趙光祖)의 謫廬遺墟碑文을 짓다.
현종 9 1668 무신 康熙 7 62 李端相, 朴世采와 편지로 退溪의 物格說을 논하다. ○ 2월, 우의정에 제수되다. ○ 9월, 상이 溫泉에 행차하여 부르자 行宮에 입조하다. ○ 11월, 상소를 올려 하직하고 廣州로 물러나니 상이 閔鼎重을 보내 머물기를 권하다. ○ 체차된 뒤에 還朝하여 차자로 경계를 아뢰다.
현종 10 1669 기유 康熙 8 63 1월, 貞陵을 복구하기를 청하다. 이후 經筵과 書筵에 입시하다. ○ 2월, 차자를 올리고 都城을 떠나다. ○ 판부사 李景奭의 차자로 인해 상소하여 대죄하다. ○ 4월, 茂朱 赤裳山을 유람하고, 부친의 사당에 焚黃禮를 행하다. ○ 8월, 尹宣擧를 弔哭하다.
현종 11 1670 경술 康熙 9 64 權諰와 甲川에서 만나다. ○ 9월, 李世直의 변이 생기자 京畿에 나가 대죄하다.
현종 12 1671 신해 康熙 10 65 5월, 다시 우의정에 제수되고 특별히 世子師傅를 겸하다. ○ 7월, 〈三學士傳〉을 짓다. ○ 상소하여 사직하고 救荒策을 진달한 책자를 올리다.
현종 13 1672 임자 康熙 11 66 1월, 炭谷에 가서 權諰를 弔哭하다. ○ 3월, 三山을 유람하고 永同, 冷泉을 거쳐 돌아오다. ○ 5월, 좌의정에 제수되다. ○ 7월, 仲兄 宋時默의 상을 당하다. ○ 9월, 許積의 일로 상소하여 사직하다. ○ 10월, 石湖 尹文擧를 곡하다. ○ 11월, 同春 宋浚吉을 곡하다. ○ 紫雲書院의 비문을 짓다.
현종 14 1673 계축 康熙 12 67 6월, 〈陵誌文追刻議〉를 올리다. 寧陵(孝宗陵)의 遷陵都監 誌文製述官이 되어 천릉시의 服制議를 올리다. ○ 寧陵의 表石 문제로 金佑明의 공박을 받고, 또 당시 閔愼 일가의 喪服 문제로 尹鑴의 공격을 받자 陵役이 끝난 뒤 서울을 떠나다. ○ 尹宣擧의 墓文을 짓다. 아들 尹拯이 朴世采의 행장과 己酉擬書를 가지고 와 묘문을 부탁하였는데, 이로 인해 懷尼是非가 일어 결국 老論과 少論의 분쟁이 일어나다. ○ 12월, 영중추부사가 되다.
현종 15 1674 갑인 康熙 13 68 遷陵의 일로 상소하여 대죄하다. ○ 3월, 仁宣王后의 喪으로 상경하였다가 慈懿大妃의 服制를 논하면서 이른바 2차 禮訟이 다시 일어나자 돌아오다. ○ 6월, 李惟泰와 「沙溪遺稿」를 교정하여 마치다. ○ 7월, 都愼徵의 상소가 나오자 水原 萬義에 나가 대죄하다. ○ 8월, 顯宗이 승하하자 도성에 들어갔다가 郭世楗의 상소가 올라오자 萬義로 돌아가다. ○ 12월, 兩司의 논핵을 받아 파직되다.
숙종 1 1675 을묘 康熙 14 69 削奪官職, 遠竄의 명이 내리다. ○ 3월, 金尙憲의 墓誌를 짓다. ○ 6월, 長鬐에 圍籬安置되다. 유배지에서도 문인들과 강학을 그치지 않다. ○ 9월, 尹拯의 편지에 답하여 尹鑴와 일찍 절교하지 않은 것을 꾸짖다. ○ 鄭夢周의 神道碑를 짓다.
숙종 2 1676 병진 康熙 15 70 2월, 尹拯이 長鬐로 찾아오다. ○ 李惟泰가 甲寅禮說을 지어 종래의 禮論을 바꾸었다는 소문이 퍼져 자제들이 분개하고 있었는데, 尹拯이 李惟泰에게 편지를 보내 알리고 〈蓬山語錄〉을 지어 離間하다. ○ 7월, 李惟泰의 편지를 받다. 이후로 양측 자제간의 불화가 더욱 심해지다.
숙종 3 1677 정사 康熙 16 71 3월 22일, 夫人 李氏의 상을 당하다.
숙종 4 1678 무오 康熙 17 72 「朱子大全箚疑」를 완성하다. 또 「二程全書」를 보기 쉽게 類別로 편차한 「程書分類」를 편하고, 退溪의 「經書質疑」와 「記善錄」을 證訂하다.
숙종 5 1679 기미 康熙 18 73 4월, 巨濟島로 이배되다. ○ 「朱子語類小分」을 완성하다. 또 朱子의 年譜와 實紀를 합쳐 「文公先生紀譜通編」을 편차하다.
숙종 6 1680 경신 康熙 19 74 5월, 淸風으로 이배되다. ○ 6월, 陜川에 도착했을 때 庚申換局으로 西人이 재집권하자 석방되어 懷德으로 돌아오다. ○ 10월, 영중추부사에 제수되자 상경하여 입대하다. 당시 仁敬王后가 승하하여 慈懿殿의 服制를 물었으나 대답하지 않다. ○ 12월, 仁敬王后의 誌文을 짓다.
숙종 7 1681 신유 康熙 20 75 1월, 召對에 입시하여 「心經」을 강하다. ○ 2월, 상소하고 華陽洞으로 돌아오다. ○ 9월, 「心經釋義」를 교정하다. ○ 12월, 상소하여 文廟從祀를 논하다.
숙종 8 1682 임술 康熙 21 76 3월, 珍山에서 李惟泰를 기다렸으나 만나지 못하다. ○ 別諭가 내리자 朴世采와 함께 상경하다.
숙종 9 1683 계해 康熙 22 77 晝講에 입시하고 袖箚를 올려 국사를 논하다. ○ 3월, 상차하여 致仕하고 奉朝賀가 되다. 함께 소명을 받은 朴世采가 尹拯과 논의를 같이하자 다시 板橋로 돌아오다. ○ 6월, 「朱子大全封事奏箚箚疑」를 올리다. ○ 10월, 다시 上京하여 李端夏, 朴世采와 만나다. 이후 朴氏 門下와의 불화가 깊어지다.
숙종 10 1684 갑자 康熙 23 78 明聖王后의 誌文을 짓다. ○ 5월, 尹拯에게 답서를 보내다. 이후 尹拯과 絶交하다.
숙종 11 1685 을축 康熙 24 79 1월, 權尙夏가 찾아와 수학하다. ○ 9월, 상소하여 栗谷, 沙溪 선생과 權順長 등을 伸辨하고 尹宣擧의 毁節과 尹鑴를 편든 죄를 들어 배척하다.
숙종 12 1686 병인 康熙 25 80 權尙夏, 李喜朝, 閔泰重과 「朱書箚疑」를 교감하고 함께 俗離山을 유람하다. ○ 「朱子大全箚疑」를 간행하라는 명을 받다. ○ 10월, 南澗精舍를 짓다. ○ 金萬基에게 편지를 보내 朴世采가 편찬한 「栗谷別集」을 다시 교정하기를 청하다.
숙종 13 1687 정묘 康熙 26 81 1월, 상소하여 陳情하고 겸하여 尹拯 父子의 일을 말하다. ○ 3월, 金萬基의 訃告를 듣다. ○ 9월, 長陵 移葬에 관한 의논을 올리다.
숙종 14 1688 무진 康熙 27 82 1월, 상소하여 羅良佐의 석방을 청하다. ○ 2월, 李端夏에게 답서를 보내 尹宣擧와의 전말을 서술하다. ○ 4월, 權尙夏, 金昌協 등과 屛川을 유람하다.
숙종 15 1689 기사 康熙 28 83 1월, 元子의 책봉이 너무 빠르다고 상소하였다가 濟州로 귀양가다. 己巳換局으로 南人과 少論이 대거 등용되다. ○ 윤3월, 「論孟或問精義通攷」를 편수하다. ○ 4월, 文谷 金壽恒의 訃告를 듣고 墓誌文을 짓다. ○ 拿鞫의 명이 내려 상경하다가 6월 8일, 井邑에서 사사(賜死)되다. ○ 7월, 水原 萬義 舞鳳山에 임시로 장사 지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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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 20 1694 갑술 康熙 33 甲戌換局으로 老論이 득세하자 관작이 회복되다. ○ 水原 萬義에 梅谷書院, 井邑에 考巖書院, 忠州에 樓巖書院을 세워 祭享하다.
숙종 21 1695 을해 康熙 34 특명으로 諡狀없이 ‘文正’으로 諡號를 내리다. ○ 德源의 龍津書院, 湖西의 華陽書院을 세워 제향하다.
숙종 22 1696 병자 康熙 35 趙靜庵의 祭享書院인 道峯書院에 병향하다.
숙종 30 1704 갑신 康熙 43 門人 權尙夏가 遺命에 따라 萬東廟를 세우다.
숙종 43 1717 정유 康熙 56 왕명으로 芸閣에서 「尤庵集」과 別集을 간행하다.
경종 3 1723 계묘 雍正 1 道峯書院에서 位牌가 黜享되다.
영조 1 1725 을사 雍正 3 道峯書院에 다시 배향하고 관원을 보내 致祭하다.
영조 6 1730 경술 雍正 8 曾孫 宋婺源과 門人들이 「經禮問答」 24권을 활자로 간행하다.
영조 8 1732 임자 雍正 10 附錄과 年譜 5책을 활자로 인행하다.
영조 32 1756 병자 乾隆 21 文廟에 배향하고 領議政에 추증하다.
영조 33 1757 정축 乾隆 22 淸州 靑山으로 移葬되다. 尹鳳九가 墓誌文을 짓다.
영조 52 1776 병신 乾隆 41 正祖 즉위 후 孝宗 廟庭에 배향하다.
정조 9 1785 을사 乾隆 50 驪江 大老祠에 賜額을 내리고 致祭하다.
정조 11 1787 정미 乾隆 52 9월, 平壤 監營에서 李命植이 「宋子大全」 102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
고종 38 1901 신축 光武 5 宋秉璿이 「宋子大全隨箚」 13권 6책을 목판으로 간행하다.(李世淵의 序, 宋秉璿의 跋)
1927 정묘 南澗精舍에서 「宋書拾遺」와 함께 「宋子大全」을 重刊하다.(宋曾憲의 拾遺跋)
※기사전거: 年譜, 墓表(權尙夏 撰) 및 朝鮮王朝實錄에 의함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