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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흥 토요장터와 동학농민기념관 장흥은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다. 득량만과 보성만의 뻘에는 키조개와 낙지가 득실하여 일제강점기 때는‘금량만’이라고 부를 정도로 풍요로웠다. 그런 물산이 집결하는 장흥장은 한때 나주 영산포의 홍어시장, 함평의 학다리 우시장과 더불어 전남의 3대 시장으로 뽑혔다. 그러나 농촌인구가 줄어들고 대형마트가 들어서면서 장흥의 재래시장은 소규모 장터로 전락했고 근근이 명맥만 유지했다. 그러자 민관이 합심해 5일장을 다시 살렸고, 장흥 토요장은 호남 제일의 장의 영광을 되찾았다. 인근 목포나 영암뿐 아니라 멀리 경상도 진주에서도 남도의 풋풋한 먹을거리를 찾아 일부러 장흥을 찾아올 정도로 남도 최대의 장터다. 단순히 물산을 사고파는 공간이 아니라 잊혀가는 추억까지 장바구니에 담을 수 있기에 주말에는 3만 명의 인파가 북적거린다. 약쑥, 냉이, 달래, 표고버섯, 생약초 등이 가득해 겨우내 입맛을 잃은 식도락가에게 기쁨을 준다. 닭머리와 벼슬까지 보기 쉽지 않다. 예전 시골 장터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정육점 통유리에는 방금 잡은 소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하얀 칠판에는 오늘은 관산읍 외동리 김OO의 소를 잡았노라고 큼지막하게 쓰여 있다. 소고기 한 근을 저렴하게 구입할 수 있는데 값도 싸지만 당일 잡은 신선함은 따라갈 수 없다. 먹음직스럽게 썬 고기를 들고 인근 식당에 가져가 상차림비만 주면 상추와 함께 입에서 살살 녹는 한우를 맛볼 수 있다. 버섯을 좋아하면 버섯식당, 야채를 좋아하면 야채식당, 구미에 맞는 식당을 고르면 된다. 어물전 주인이 맛보기로 건네준 꼴뚜기를 씹는 맛도 장터가 주는 재미다. 매생이는 동백기름을 바른 어머니의 머리칼 같다. 잘 뭉쳐서 비녀만 꽂으면 쪽머리가 되는 것 같다. 실보다 가느다란 선에는 어찌 저런 풍미가 나오는지 장흥의 바다가 궁금하다. 장흥 특산물인 매생이국도 먹어보고, 때깔 좋은 생선을 감상하며 어슬렁거리는 호사도 즐겨본다. 시장 2층은 장흥 청넌들 창업매장. 드라마 대물에 등장했던 곰탕집 탐진강 지금은 조용하지만 7월 말 8월 초가 되면 이곳은 장흥정남진 물체장. 지상 최대의 물싸움 퍼레이드와 EDM 풀파티도 열광의 도가니로 바뀐다. 이리 적막하니 오히려 이상하다. 장흥물축제. 젊은이들은 물론 외국인까지. 장흥이 들썩인다. 지상 최대의 물싸움 아파트 한 동 한 면을 물축제 홍보 장흥동학농민 혁명기념관 장흥의 석대는 동학의 최후의 격전지다. 이곳의 패배로 인해 동학 농민군은 흩어지고 만다. 그 아픔의 현장이 석대 들녘. 외세에 총칼에 처참하게 패배했지만 불의에 항거한 그 정신은 4.19, 5.18, 촛불정신으로 이어졌다. 공주 우금치 전투에서 1만명이 희생되었고, 동학의 지도자들은 지도자는 해사명령을 내리고 몸을 숨겼다. 남쪽으로 밀려온 농민군은 광주에 도착했고 당시 광주 지역에서 가장 큰 세력인 손화중은 농민 해산명령을 내렸다. 이에 굴하지 않고 남으로 내려간 곳이 장흥의 석대. 이곳에는 이방언,이사경, 이인환등 대점주들이 활발히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 집강소를 설치하고 최후의 항전을 대비했다. 장흥의 탐관오리들을 척결했고, 각종 전술을 사용해 병영성을 점령했다. 한편. 일본군과 관군은 나주에 진을 치고 있었고 동학군은 장흥에서 전열을 갖추고 최후의 격전을 준비했다.조일연합군은 650명, 농민군은 3만명. 그렇지만 일제의 신식 무기에 맥없이 쓰러졌고 무려 2천명의 사망자를 내고 뿔뿔희 흩어졌다. 어찌나 피해가 컸던지 쓰러진 시산이 산을 이루었고 탐진강 강물은 붉은 색으로 흘렀다고 한다. 전열이 흩어지고 농민군은 남쪽 관산 옥산까지 밀려갔지만 그곳에서도 피의 희생이 늘었다. 앞은 일본은 뒤는 바다. 수장될 수밖에 없는 농학농민군. 이들을 구해준 이는 바로 소년사공 윤성도 동학농민군의 최후의 선택지는 완도, 고흥, 진도 일대의 섬이었다. 소년뱃사공 윤성도는 야음을 틈타 농민군을 먼 바다 섬으로 실어 날랐다. 금일도, 평일도, 약산도, 소량도, 충도까지 배를 몰았다 외딴 섬으로 들어간 농민군은 성까지 바꾸면서 목숨을 건졌다. 장태란 대나무를 타원항 항아리 모양으로 엮어 그 안에서 닭과 병아리를 키우는 것인데 이것을 변형시켜 장태 안에 볏짚을 가득 넣고 방어용 엄폐물로 활용했다. 가로 6미터, 세로 2미터 30여명이 장태 뒤에 몸을 숨길 수 있다고 한다. 대접주 이방언이 장태를 고안했으며 장성 황룡촌 전투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접주 이방언을 장태장군이란 별호를 얻었다. 둥근 계단을 따로 올라가면 전망대가 나온다. 옥상에서 바라본 석대들녘. 동학농민의 마지막 항전지다. 그 피의 현장. 너무나 평온한 모습이 야속하게 보인다. |
첫댓글 장흥 #1 장흥 토요장터와 동학농민기념관-대물에 등장했던 모놀대장님..화면발이 너무 잘받네요^^
금년도 멋진 한해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