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 <플라워 킬링 문>
개인적 비극을 넘어, 특정한 인종이나 민족과 같이 바꿀 수 없는 특성에 의해 받게 되는 고통과 비극은 특별한 전율을 만나게 한다. 내가 나의 자유의지로 살아갈 수 없는 원인이나 이유가 바로 사회적으로 규정된 모습이라는 사실에서 절망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아메리칸 인디언이다. 거대한 땅덩어리 위에서 평화롭게 공존하던 인디언들은 백인들의 이주와 약탈에 의해 점점 땅을 빼앗겼고 결국 ‘인디언 보호지’라는 제한된 공간 속에 갖혀 버리고 말았다. 완전한 패배자로 전락한 인디언들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20세기 초 미국에서는 아주 특별한 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미국 정부는 인디언들에게 미국의 일부 땅을 ‘보호지’라는 명분으로 제공하였다. 그것은 치욕적인 게토와 같은 폐쇄된 영역이었다. 하지만 한 인디언 부족에게 제공된 땅에서 석유가 발견되자 사건은 이상한 방향으로 발전한다. 석유로 얻은 수익으로 인디언들은 부유해졌으며, 여유로운 자금을 가지고 백인들을 고용하는 특이한 사태가 발생한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행복의 시작이 아니었다. 오히려 또다른 비극을 예견하는 불행의 조짐이었을 뿐이다. 부가 넘치자 사악한 욕심을 지닌 백인들은 그들에게 접근하였고 특히 아들이 없고 홀어머니와 네 자매의 인디언 가정이 집중적 타겟이 되었다. 네 자매와 관련된 사람들이 죽어갔고 자매들도 하나하나 사망한 것이다. 그럼에도 정부는 살인사건에 무관심하였으며 내부의 보안관들도 무능하였다.
정부의 무관심에 분노한 인디언 부족은 사건 해결을 위해 미국의 대통령을 직접 면담하였고 미국 정부에 거액의 찬조금을 지불한 이후에야 본격적인 수사가 시작된다. 살인 사건의 근본적인 이유는 석유 수익금을 차지하기 위한 백인들의 비열하고도 계획적인 음모였다. 인디언 땅에는 인디언들과 좋은 친분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는 한 인물이 있었다. 그는 여성들만 살고 있는 가정의 땅에서 발생하는 석유 수익권을 차지하기 위해 자신의 조카를 둘째 딸에게 접근시켰고 다른 딸들은 킬러들을 고용하여 제거하였던 것이다. 다른 가족들이 사라져야 수익권이 둘째 딸에게 이전되고 그 딸이 죽으면 자신의 조카에게 모든 재산이 돌아가기 때문이다.
영화는 크게 두 부분으로 구분된다. 전반부는 인디언 가족에게 친절을 베푸는 마을의 유지 헤일(로버트 드 니로)와 딸에게 접근한 조카(레오나드르 디 카프리오)가 결혼에 성공하여 가정을 이루고 그 이후 다른 딸과 그 가족을 제거하는 일련의 사건을 보여준다. 백인들의 끔찍하고 비열한 음모는 그들만의 행위는 아니었다. 이들 이외에도 수많은 백인들이 딸에게 접근하여 재산을 탈취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었고 그들은 욕망을 실현시키기 위해 서로가 경계하였던 것이다. 결국 둘째 딸만을 남기고 모든 가족이 사라진다. 둘째 딸도 안전하지 않았다. 유전적으로 당뇨병을 알고 있는 딸을 없애기 위해 인슐린과 함께 딸을 서서히 죽게 만드는 약물이 몰래 투입되고 있었던 것이며 그것은 헤일와 조카의 암묵된 합의로 진행되고 있었다.
후반부는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정부 수사관들의 활동과 범죄 혐의에서 벗어나려는 헤일와 그 가족들의 갈등 그리고 추악한 기업 카르텔의 모습이 그려진다. 여기에서 흥미로운 영화적 전개는 인디언들에게 친절하고 정의로운 모습이면서도 이면에서 벌이는 헤일의 잔인한 음모가 어떻게 진행되었는가가 밝혀지고 그것에 맹목적으로 순종하면서도 끊임없이 혼란스러워하는 조카의 행동이 충돌하는 점이다. 조카는 분명 부에 대한 욕망으로 이 사건에 개입하고 수많은 살인사건에 직접적으로 행동하지만 또한 자신의 아내와 아이들에 대한 인간적 애정 때문에 여전히 혼란스러워 한다. 결국 내면적 갈등 이후 조카는 삼촌인 헤일의 범죄를 폭로하는 것으로 영화의 외형적 결론은 마무리된다. 20세기에도 진행된 인디언들에 대한 백인들의 끔찍한 착취와 파괴행위였던 것이다.
이 영화는 1920년대 미국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토대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화적 흥미를 떠나 실제 사건이 어떻게 마무리되었는가를 아는 것은 영화에 대한 또 다른 관점을 제공한다. 영화 에필로그에서는 헤일와 조카 모두 20년 이상의 중형을 선고받았지만 모두 3년 이내 가석방되었으며 한때 언론에 주목을 받았던 이 사건은 모두의 기억에서 사라지면서 인디언들의 비극은 대부분의 사람들에는 묻혀버린 과거가 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참으로 허망한 결론이다. 수많은 인디언들과 그 가족들이 죽음을 당했고 인디언 사회를 절망으로 몰아갔던 사건이었지만 범법자들은 제대로 된 처벌을 받지 못했고 정의는 사라진 것이다. 누구도 그들의 죽음의 무게에 관심 갖지 않은 것이다.
마틴 스콜세지가 감독한 이 영화는 인디언들의 비극을 날카롭고 진지하게 접근하면서 비극의 실체에 접근한다. 중요 배역을 연기한 로버트 드 니로와 레오나르드 디 카프로리의 원숙한 표현력이 안타까웠던 사건의 진실을 다시금 복원한다. 인디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차별과 비극 그리고 고난의 시간은 개별적 인간의 독립과 자유가 얼마나 어려운가를 증언한다. 결국 파괴되고야 마는 한 가정의 종말은 인간의 자율성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보여주는 모습이다. 내가 속한 공동체와 나에게 새겨진 수없이 많은 낙인은 나의 삶을 결정하고 나의 운명을 통제한 것이다. 현재 전 세계를 재앙으로 물들이고 있는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갈등>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또한 내가 속한 공동체의 생존과 그것을 부추기는 허구의 민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에 포섭된 인간들의 파괴적 절멸 행위인 것이다. 그럼에도 탈출이 불가능한 것은 나에게 부여된 고유한 현실 때문이다.
‘인디언’이기 때문에 겪어야 했던 비극, 그들의 생김새, 언어, 종교 등은 그들을 규정하는 하나의 실체로 작용했으며 그들이 겪었던 과거를 지속적으로 강요하고 있다. 인디언이 아닌 한 인간으로 살아갈 수는 없는 것인가? 누구도 특정한 명칭으로 고통받는 삶을 살기 원하지 않을 것이다. 보통의 인간 모두에게 허용되고 누릴수 있는 권리와 자유만이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특정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는 보호되고 누군가는 버려지거나 파괴되는 경우는 ‘정의’라는 말의 허구성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영화 <플라워 킬링 문>의 가장 큰 인상은 현실의 냉혹한 허무이다. 범죄의 중요성과 비례하지 않는 범죄자들에게 가해진 정의의 무게가 부실하다는 것이다. 마치 이스라엘이 자신 국민들의 죽음을 신성시하면서도 가자의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의 목숨들에 대한 파괴를 ‘정의’라고 떠드는 허위처럼 말이다. 수많은 허구적 가치를 설파하면서도 현실의 죽음을 막지 못하는 인간들의 무능과 위선은 인간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행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공하고 끊임없이 인간을 허무하게 만든다. 영화도 현실도 무력감이 지배할 뿐이다.
첫댓글 - 인간의 욕심을 힘에 의해 정당화시키는 정의, 인간의 자율성이 얼마나 무력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