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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보고와 제주 법화사
장보고의 본명은 궁복(弓福) 혹은 궁파(弓巴)다. 일본 승려 엔닌의‘입당구법순례행기’에는 장보고(長寶高)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의 생애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서남해안 지방의 토호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장씨 성은 당나라에 있을 때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장보고의 유년시절에 대한 정보도 없다. 8세기 후반 경에 완도, 혹은 그 인근에서 출생하여 유년기를 보냈을 것으로 추측할 뿐이다. 그 후 청년으로 성장한 장보고는, 자기보다 10세가량 어린 고향의 후배인 정년(鄭年)과 함께, 풍운의 꿈을 안고 당으로 건너간다. 당시 신라에서는 골품제로 인한 신분 제약으로 뜻을 펼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장보고는 당나라 서주(徐州)로 건너갔다. 30세쯤에 서주(徐州) 무령군 소장(武寧軍 小將)이라는 군직(軍職)에 올랐다. 무령군의 주요 임무는 당 조정에 반기를 든 평로치청의 번수 이사도(李師道)가 이끄는 평로군을 소탕하는데 선봉에 서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사도가 이끄는 평로군은 819년에 완전 토멸되었다. 장보고는 무령군의 일원으로 평로군 진압전에 참전하여 그 전공을 인정받아 소장직에까지 승진했다. 장보고는 828년 이전의 어느 시기에 당나라에서 귀국했다. 신라로 간 그는 신라 제42대 임금인 흥덕왕을 만나 완도에 청해진(완도)을 설립할 것을 요청했다. 김우징 등의 왕족이 이를 찬성하여 마침내 허용되었다. 흥덕왕에게서 1만 병사를 얻어 청해(淸海, 완도)에 진을 설치하고 청해진 대사가 되었다. 그가 청해진(淸海鎭)을 설치한 동기는 신라 근해에 출몰하여 신라인을 사고파는 노예무역선을 소탕하는데 있었다. 그는 이미 무령군에 복무하던 시절 동포들이 해적선에 강제로 끌려와 도처에서 매매되는 현장을 목격하고서 의분을 느꼈다. 당시 서남해안에서는 당의 해적들이 신라인을 노략질하여 노비로 팔거나 무역선을 약탈하는 일이 많았다. 청해진은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에 걸쳐 설치된 군진(軍鎭)의 하나지만 건설 당초부터 독자적인 성격이 강했다. 청해진이 건설된 뒤 그는 해적을 소탕하여 서남해안의 해상권을 장악한다. 당과 신라, 일본을 잇는 해상 무역로를 통한 무역활동을 주도하기 시작한다. 해상무역을 통한 일종의 해상왕국을 형성했다. 장보고는 당나라, 일본, 남방, 서역과 아랍의 여러 나라와 무역을 하여 많은 이익을 취했으며, 아울러 큰 세력을 이루었다. 이때 신라의 국력이 잠시 회복되었다. 장보고의 세력은 차츰 국제적으로 커진다. 중국에 유학한 일본 승려 엔닌은 그에게 정중한 편지를 써서 귀국할 때의 뱃길을 부탁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무역활동을 통해 확보한 경제력을 배경으로 중국의 산동성 문등현 적산촌에 법화원(法華院)이라는 절을 세웠다. 이곳에는 500석을 수확하는 장전(莊田)이 있었으며, 많은 승려가 머물며 정기적으로 법회를 열고 청해진과의 연락기관 역할도 했다. 장보고는 경제력과 무력을 배경으로 중앙의 권력 쟁탈전에도 개입한다. 838년(희강왕 3) 희강왕이 피살되고 민애왕이 즉위한다. 그러자 김양(金陽)은 군사를 모집하여 청해진으로 와서 먼저 와 있던 김우징을 만나 장보고에게 도움을 청했다. 장보고는 정년(鄭年)으로 하여금 군사 5,000명을 이끌고 김양과 함께 경주로 진격하게 했다. 이들은 중앙군을 물리치고 경주에 침입하여 민애왕을 살해하고 김우징을 신무왕으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중앙정부에서까지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845년(문성왕 7)에 왕이 장보고의 딸을 차비(次妃)로 들이려 했다. 그러나 진골귀족들은 그가 해도인(海島人)이라는 이유로 반대하여 성사되지 못했다. 그러자 그는 이듬해 중앙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중앙정부는 무력으로 그를 토벌할 능력이 없었다. 얼마 후 조정의 밀명을 받고 거짓 투항해 온 옛 부하 염장을 위해 주연을 마련하여 크게 환대했다. 이때 염장이 장보고의 장검으로 그를 참수했다. 그가 죽은 때는 846년 봄이라고 한다. 다만 일본의 자료에는 841년 음력 11월에 참수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청해진의 세력은 그 뒤에도 얼마 간 유지된다. 그러다 851년에 청해진을 없애고 주민을 벽골군(지금의 김제)으로 옮긴다. 일본에서는 교토 시 북쪽의 히에이산(比睿山)에 세운 적산선원에서 장보고를 적산대명신(赤山大明神)으로 받들고 있다. 16세기 센고쿠 시대의 명장 다케다 신겐은 장보고를 가문의 수호신인 신라대명신(新羅大明神)으로 받들었다. 교토의 연력사(엔랴쿠지)에서도 일본 승려 엔닌이 세운 장보고 기념비를 발견할 수 있다. 중국에서는 장보고가 산동성 롱청(榮成)시에 세운 적산법화원(赤山法華院)에서 그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제주도 서귀포시 하원동 법화사 경내에 장보고 석상이 지난 2006년 8월 11일 우뚝 세워졌다. 장보고상이 천년 고찰인 이곳 법화사에 세워진 것은 장보고가 이 사찰을 창건했기 때문이다. 그 뒤 역사의 격동기 때마다 전면에 등장한 법화사는 고려 충렬왕 때 중건된다. 그 뒤 조선시대 초기 때까지도 번창했던 이 사찰은 17세기경에 폐사가 되는 비운을 겪는다. 잊혀져가던 법화사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0년도부터였다. 법화사 주지로 부임한 시몽 스님은 본격적으로‘법화사 복원운동’에 나섰다. 당시 3천 평에도 미치지 못한 사찰의 부지를 해마다 사들이면서 지금은 무려 3만평의 부지를 확보했다. 이 부지위에 대웅전을 비롯 구품연지, 백련당, 구화루 등을 차례로 복원했다. 장보고상이 세워진 날은 법화사가 주최한 제2회 연꽃축제의 첫날이었다. 이틀 동안 치러진 축제 첫날 장보고상 제막식을 가진 것이다. 높이가 무려 6미터 가량인 장보고 석상은 법화사 입구에 자리 잡았다. 제작자는 전북 익산시 금마면 일심석재의 석공예 명장인 김옥수씨(55)가 맡았다. 법화사는 불세출의 영웅 장보고와 대원제국의 제4세 쿠빌라이칸(원세조-고려국 충렬왕의 장인), 고려 25대 충렬왕, 원세조의 공주이면서 충렬왕의 왕비인 장목왕후, 자금성을 건설하고 북경으로 수도를 옮긴 명나라 성조 영락제와도 매우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장보고는 제주에 법화사를 창건함으로써, 이를 해상 축으로 하여 광활한 해상 왕국을 구축했다. 따라서 법화사는 해상 왕국의 한 축일뿐 아니라 해상왕 장보고의 정신적 의지처였다. 그러나 창건 연대를 알 수 있는 사적이나 문헌기록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여러 문헌 기록에 따르면 중건된 시기는 원나라 탐라총관부가 제주에 설치된 충렬왕 원년(1275년) 이후의 일로 보인다. 발굴 과정에서 출토된 기와의 명문 중에‘시중창16년기묘필(始重創十六年己卯畢)’을 보면 고려 충렬왕 5년(1279년)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제주도는 일찍부터 한반도는 물론 중국 일본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이미‘탐라’라는 국호를 가지고 고구려, 백제, 신라 등과 문물을 교류하고 있었다. 이들과 탐라와의 관계는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예속되어 있으면서 계속되었다. 그러면서 탐라국의 독특한 문화와 역사를 발전시켜 왔다. 제주도는 장보고 전성기까지의 170여 년간 동아시아의 바다를 왕래하던 탐라 무역상인들을 통하여 관세음보살 신앙이 자연스럽게 유포되었을 것이다. 탐라 사람들이 신라 일본 당나라와 교역을 벌이던 그 때 그들 나라에는 불교가 성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목적을 가진 장보고의 법화사는 하원 땅에 창건되었을 것이다. ( 정복규 논설위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