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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 퓌뷔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Hope〉
퓌뷔 드 샤반(Puvis de Chavannes)이 1872년도 그린 위 작품의 제목 [희망]은 원제가 바로 L'Espérance 다. "희망찬 기대"의 "희망"이다. 이 작품은 1870년에 시작한 불로전쟁(Franco-Prussian War)이 1871년에 끝나고 전쟁후 프랑스 국가재건을 바라며 그렸다. 1872년 파리 살롱에 출품되었던 [희망]은 황폐한 풍경을 배경으로 국가재건을 희망하는 상징(symbol)으로 참나무 가지(Oak twig) 하나를 들고 있는 한 젊은 여인을 상징적으로 그리고 있다.
그가 사용한 회색조의 그림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정적 고요함을 그려내어 내성적인 사색을 풍긴다.
우리에게 회색조는 비오기 전 흐린 하늘을 암시하지만 샤반은 회색조를 통해서 군중들에게 고요할 것을 요청한다. 마치 불로전쟁 이후 재건과 자유를 갈망하는 들뜬 민중들의 심정 속에 불붙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그림이라 볼 수 있다. 그의 마음 속에는 자유와 평화에 대한 열망과 환희 가득하지만 다시 본디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당부하는 듯 하다.
샤반이 [희망]작품에서 "희망"을 차분하고 섬세한 젊은 여인으로 대변한 것에 대해 출품당시 몇몇 비평가들로부터 혹평을 받았다. "희망"을 좀 더 강인하고 성숙한 여인으로 대변해야했었다고 제안한 것이다..
그 [희망]의 뮤즈가 잘알려진 몽마르트에 있던 많은 예술가들의 뮤즈였던 수잔 발라동(Suzanne Valadon, 1865-1938)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높지 않다. 실제로 샤반과 수잔 발라동이 몽마르트에서 만나 화가와 모델의 관계이였지만 이 작품의 뮤즈가 발라동이 아닌 이유는 우선 그녀가 7~8세때 이 작품의 뮤즈였어야한다. 발라동은 1865년생이고 [희망]은 1872년 살롱 출품작이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미술사학자들에 의하면 수잔 발라동이 파리 몽마르트에서 15세때에 1880년에 모델로 데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피에르 퓌뷔 드 샤반 Pierre Puvis de Chavannes 은 19세기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벽화가 중 하나로 색채, 기법, 구성에서 후기 인상파의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벽화 작품으로 아미앵의 피카르디 박물관, 소르본 대학, 판테온의《성 주느비에브》 등이 있고 주요 작품으로《희망》, 《가난한 어부》, 《하얀 바위》등이 있다.
피에르 퓌뷔 드 샤반(Puvis de Chavannes)
1824년 리옹에서 태어났으며 1898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본명은 피에르 퓌비 드 샤(Pierre Puvis de Chavannes)이다. 23세 무렵 처음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한 뒤 화가가 되고자 결심하고 앙리 셰페르(Henry Scheffer)의 화실에서 1년 정도 공부한 뒤에 들라크루아와 쿠튀르의 화실에서 일했다.
19세기 프랑스의 벽화가 가운데 가장 뛰어난 벽화가 중의 하나로 평가되며, 색채와 기법, 구성면에서 반 고흐나 모리스 드니를 포함한 후기 인상파 화가들에게 찬사와 존경을 받았다. 또한 앙리 마티스도 샤반의 목가적인 아름다움을 높이 평가했다.
작품 《전쟁 War》을 통해 화가로서의 명성을 얻었으며, 이 작품은 1861년 국가에서 매입했다. 이 때부터 파리에 머물며 파리뿐만 아니라 다른 도시에서 벽화작업을 활발히 전개했다. 벽화 작품으로는 아미앵의 피카르디 박물관(Musee de Picardie), 소르본대학, 보스턴의 공공도서관, 판테온의 《성(聖)주느비에브》(1874) 등이 있다.
《희망》, 《가난한 어부》(1881), 《하얀 바위》 등 주요 작품들은 유럽과 미국의 여러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1894년 프랑스 화가 협회(National Society of French Artist)의 회장이 되었다.
샤반의 그림들에서 배경 모델은 멀리 떨어진 산을 배경으로 신성한 작은 숲에 기대어 눕거나 거울 같은 호수에서 목욕을 하고, 숲길을 돌아다니거나 명랑하게 웃음 짓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름다운 여인들, 늘 옷을 벗고 있는 어리고 매력적인 여인들이 지상 낙원의 배경에서 살고 있다. 상징주의 화가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는 이런 그림으로 뭇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했으며, 19세기 후반 공공건물의 실내를 장식했다.
인상주의자들처럼, 이 귀족풍 벽화의 거장인 샤반느(Pierre Puvis de Chavannes)는 관습에 젖어 있던 샬롱이 정한 여러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웠다. 하지만 그는 관습을 조롱하는 아방가드르 작가들과는 달리 자신만의 신고전주이 스타일을 개발했다. 전통적인 미의 기준을 갖고 있던 동시대인들은 야외 풍경을 그리는데 있어서 색깔을 희미하게 처리하는 것보다 그의 스타일을 더 마음에 들어 했다. 그가 공들여 그린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 뮤즈, 요정들은 남녀 관객 모두에게 즐거움을 선사했다.
몽마르트르 예술가촌의 수많은 예쁜 소녀들은 피갈에 자리한 그의 아틀리에에서 누드모델이 도어 주었다. 그들은 노동자의 하루 평균 임금인 2프랑의 수고비를 받았고, 특별히 좋은 모델이거나 밤샘 작업을 하는 경우에는 이보다 몇 배 많은 돈을 받기도 했다. 샤반느는 적당한 모델을 만나면 서 있거나 앉아 있는 자세, 정면 누드나 후면 누드 자세로 큰 캔버스에 여러 번 그렸다. 그는 이들의 얼굴을 여러 가지 방식으로 이상화하거나 관객을 눈길을 살며시 피하는 자세로 그렸다. 어떤 경우에는 남자 또는 여자 모델 한 명의 이미지에서 신화 인물 12명을 족히 그려 내기도 했다.
샤반느가 벽화를 그릴 때 선호했던 주제들은 고대 그리스 신화, 종교적 이야기, 그리고 역사적 사건이다. 수많은 기초 연구를 한 뒤에 그는 아틀리에에서 큰 캔버스에 최종 그림을 그린 다음, 각각의 건물 담벼락에 밑그림으로 이용했다. 그가 그린 이런 종류의 작품들 중 가장 유명한 것은 파리의 팡테옹에 있는 〈성 주느비에브의 어린 시절〉이다. 이 벽화의 흐린 색채와 분명한 윤곽선은 마치 부조와도 같은 인상을 준다.
신고전주의 화가인 샤반느가 1887년(?)에 그린 후 몇 차례 복제되었던 〈해변의 젊은 여인들 Young Girls by the Seaside〉은 '유겐트슈틸 (Jugendstil: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걸쳐 독일에서 유행한 미술 양식으로, 프랑스의 아르누보Art Nouveau 운동에 비견된다)' 운동의 전조가 되었다. 이 그림은 거품에서 태어나는 비너스를 알레고리 기법으로 표현한 것인데, 깊고 푸른 바닷가의 갈색 모래 사장ㅇㅔ 눕거나 서 있는 세 명의 소녀를 그렸다. 이 그림의 한가운데에 서 있는 소녀는 마치 머리를 말리려는 듯 붉은빛이 도는 갈색 머리카락을 두 손으로 들어 올리고 있다. 이 장식적인 작품은 후에 현대미술가들에게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 예를 들어 피카소(Pablo Picasso)는 1918년 자신의 그림 〈목욕하는 사람들 Bathers〉에서 이 주제를 빌려 온다.
샤반느의 모델들은 대부분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관능미를 발산하는 15세 소녀 쉬잔 발라동(Suzanne Valadon)만큼은 예외다. 이 소녀보다 마흔 살이나 나이가 많았던 샤반느는 1880년에 이 소녀를 자기 집으로 데리고 온다. 쉬잔 발라동은 세탁부의 딸이었으며, 서커스단에 들어가기 전까지는 몽마르트에서 다양한 일을 전전해야 했다. 하지만 그네에서 떨어진 다음, 곧 이 직업도 포기해야 했다. 그녀는 갈색 머리에 크로 파란 눈, 약간 굽은 코, 그리고 상당히 여성스러운 용모를 갖고 있었다.
탄탄한 가슴과 팔, 등, 엉덩이, 다리 등 키 154센티미터의 이 어린 소녀 쉬잔 발라동이 소유했던 모든 것은 다양한 관점에서 관찰되면서 샤반느의 그림에 여러 캐릭터로 변형되어 나타났다. 그 한 예가 〈뮤즈 여신들이 즐겨 찾는 신성한 숲 The Sacred Grove, Beloved of the Arts and Muse〉에 묘사된 많은 여인들이다. 한편, 쉬잔 발라동은 여러 남성 캐럭터의 모델이 되기도 했다. 예를 들어 위의 그림에 등장하는 소년의 팔은 월계수 잎을 따는 발라동의 팔 모양을 그린 것이다.
샤반느는 쉬잔 발라동이 그림에 소질이 있다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되었다. 발라동은 샤반느가 그림을 그리고 색을 혼합하며, 붓을 사용하고 명암을 이용하는 모습을 주의깊게 지켜보았다. 그리고 마침내 샤반느의 테크닉을 모방함으로써 그녀는 자신만의 완벽한 스타일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1883년 가로 32센티미터, 세로 45센티미터 크기의 종이에 파스텔로 〈자화상〉을 그림으로써 그녀는 작지만 나름대로 의미 있는 걸작을 탄생시켰다. 샤반느는 인상주의자 르누아르(Pierre-Auguste Renoir)와 함께 이 재능있는 제자가 첫 누드화 전시회를 열 수 있도록 용기를 북돋아주고, 공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었다. 20세기 내내 쉬잔 발라동은 초기 모더니즘 운동의 가장 중요한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그녀의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Maurice Utrillo) 역시 미술가로 명성을 얻었다. 쉬잔 발라동은 아이의 아버지 이름을 평생 비밀로 간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