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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춘천시에는 춘천지역 교회가 시작된 곰실공소, 춘천교구가 시작된 죽림동 주교좌성당, 한국전쟁에서 순교하신 사제들을 모신 성직자 묘역, 한국전쟁에서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는 소양로 성당 등 가톨릭 성지가 있습니다.
강원지역에 천주교가 전래되고, 교우촌이 형성된 것은 크게 원주 ·횡성지역, 춘천 ·홍천지역, 영동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습니다. 강원지역은 험준한 산맥과 지리적 폐쇄성으로 교우들이 박해를 피해 정착하여 전교활동을 하기에 유리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세 개의 권역 중 원주 ·횡성지역은 신유박해 때 신태보 베드로가 40여 명의 용인지역 교우들과 풍수원으로 이주하여 가장 먼저 교우촌을 형성하였습니다. 영동지역은 1866년 병인박해 때 교우들이 금광리, 내곡동 등지로 박해를 피해 이주한 기록이 전해집니다.
춘천지역은 신유박해 때 황사영 백서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된 황심 토마스(1757~1801)를 추국한 기록에 따르면 춘천 북산 지역에 천주교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됩니다. 1882년 교세통계표에는 춘천지역 샘밭, 물이울, 버들골 등이 기록되어 있고, 또한 1900년 뮈텔주교의 강원지역 사목방문 기록을 보면 춘천시 북산면 추곡리, 춘천시 동내면 고은리(곰실) 등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 곰실 공소(춘천교구의 요람) (순례지)
춘천지역에 가톨릭 본당의 역사는 1896년 엄주언 마르티노 가족이 곰실(춘천 동내면 고은리의 옛 지명) 에 이주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엄주언(嚴柱彦) 마르티노는 1872년 12월 10일(음) 춘성군 동면 장학리 노루목에서 4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착하고 총명하던 그는 열아홉 살이 되던 해인 1891년 우연히 “천주실의”와 “주교요지”를 읽고 감명을 받은 나머지 구도에 나설 것을 결심하였습니다. 그로부터 2년 후인 1893년 늦가을에 그는 맏형과 함께 일곱 식구를 모두 데리고 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인 경기도 광주 천진암을 찾아가 그곳에 움막을 짓고 어렵게 지내면서 교리를 배워 이듬해에는 형과 함께 세례를 받았습니다. 1896년 마르티노의 나머지 가족도 다 영세한 후, 마르티노는 굳은 전교 사명감을 품고 고향에 돌아왔습니다.
고향에 돌아온 엄주언 일가는 친척과 이웃으로부터 천주학쟁이로 따돌림과 수모를 당하였지만, 윗너브랭이라는 곳에서 어렵사리 화전을 일구어 가며 묵묵히 살기 시작하였습니다. 주경야독하며 근검하게 사는 그의 모습에 사람들이 차츰 감동하여 가르침을 청하기에 이르렀으며, 윗 너브랭이에서 살림과 농지를 늘려 아랫 너브랭이로 옮겼다가 다시 곰실 공소로 옮긴 후 조촐한 ‘강당’까지 마련하였습니다.
곰실공소에서 공소 예절을 보게 되자, 물구비 · 춘천 · 화천 · 양구 순으로 공소를 순방하던 정규하 신부가 곰실에서 해마다 40-50명씩 세례를 줄 정도가 되었습니다. 곰실 공소 교우들은 엄주언 회장 지도하에 자선 봉사와 엄하고 독실한 모범적 신앙생활에 전념하면서 마침내 300명 가까운 수로 늘어났습니다. 1920년에는 제대로 규모를 갖춘 공소를 건립하고 지역을 세 구역으로 나누어 실로 모범적인 신앙 공동체로 성장하였습니다.
곰실공소의 신자 수가 증가하면서 상주사제의 필요성이 인정되어 1920년 풍수원 성당에서 분리되어 춘천지역 첫 본당으로 설립되었으며, 1920년 9월 초대 김유룡 필립보 신부가 부임하였습니다. 곰실 본당이 설립될 때 관할 지역은 춘천, 인제, 가평, 양구, 화천, 홍천 등 6개 군에 15개의 공소, 신자 수는 약 1천여 명에 달했습니다. 김유룡신부는 활발한 전교활동을 위해 춘천 시내로 이동하기로 마음 먹었으며, 곰실 공동체는 교우 전원이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에 가입하여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을 통해 몇 해에 걸쳐 푼푼이 애써 모은 돈에 논까지 팔아 약사리(藥師里) 고개 현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인 당시 김영식의 대자의 집(약사리 148번지)을 사서 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춘천 본당의 옛 성당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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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당이 춘천으로 옮겨간 후 곰실 본당은 공소로 변경되었고, 1969년 11월 20일 죽림동 본당에서 효자동 본당이 분가한 후에는 효자동 본당 관할 공소가 되었습니다. 춘천교구는 1998년 11월 11일 성 마르티노 축일에 죽림동 본당의 모체가 된 곰실 공소에서 선교 활동을 펼쳤던 평신도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을 비롯해 평신도 사도직을 모범적으로 수행하며 춘천지역 선교의 초석이 된 평신도들을 기리기 위해 ‘평신도 추념의 날’을 제정하여 매년 기념하고 있습니다.
2006년 9월 15일, 춘천 교구는 곰실 공소가 죽림동 주교좌본당과 춘천 교구 자체의 발상지라는 의미를 살려 효자동 본당 관할에서 죽림동 주교좌본당 관할로 옮겼으며, 곰실 공소 내부를 새롭게 단장하여 2009년 11월 11일 교구장 장익 주교의 주례로 중창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현재 곰실 공소는 거두리 본당 관할로 변경되었습니다.
2. 죽림동 주교좌성당
죽림동 주교좌 성당(등록문화재 54호)의 전신(前身)은 ‘곰실 본당’입니다. 곰실 본당은 1920년 9월 22일 공소에서 본당으로 승격되어 춘천지역의 첫 본당이 되었으며, 김유룡 필립보 신부가 첫 본당 사제로 부임하였습니다. 김유룡 신부의 서한에 의하면 부임 당시 곰실 본당의 관할 지역은 춘천, 인제, 가평, 양구, 화천, 홍천 등 6개 군, 15개의 공소로 약 1천여 명의 신자가 있었습니다. 곰실 본당에 부임한 김유룡 신부는 활발한 전교 활동을 하기 위하여 춘천시내로 진출할 마음을 먹고 애련회(愛煉會, 연령을 위한 단체)를 조직하여 가마니짜기, 새끼꼬기, 짚신삼기 등으로 기금을 조성해 죽림동 성당 아래 골롬반 병원 터와 아랫마당 그리고 수녀원 터에 있던 집을 구입·개조하여 1928년 5월부터 성당으로 쓰게 되었습니다.
1939년 4월 25일 춘천 지목구가 서울대목구에서 분할되면서, 새 지목구의 초대 지목구장으로 당시 광주 지목구장인 오원 맥폴린(Owen McPolin) 신부가 겸임하였으나 임지에 가서 직접 사목활동을 하지 못한 채 얼마 후 춘천 본당 주임으로 있던 퀸란(Quinlan, 具) 신부를 대리로 임명하였습니다. 퀸란 신부는 1940년 12월 8일 2대 지목구장이 되었습니다.
1938년 10월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춘천 본당 6대 주임으로 부임한 퀸란 토마스 신부는 부임 직후 약사리 고개 언덕에 있는 도토리밭을 매입하여 현재의 성당 자리를 마련하고, 1950년에 죽림동 본당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춘천 지목구는 1955년 9월 20일부터는 대목구, 1962년 3월 10일부터는 교구로 성장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현재의 죽림동 성당은 김유룡 신부와 곰실 교우들이 마련한 터와 퀸란(Thomas F. Quinlan, 토마스) 신부가 추가 매입한 부지 위에 세워졌습니다. 죽림동 성당 건립은 일찍 계획되었으나 일제강점기 외국인 구금과 연금 등으로 착공이 지연되다가 해방과 더불어 미군부대의 도움을 얻어 1949년 4월5일에 착공하였습니다. 1년 여 공사가 진행되어 완공을 앞두고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며, 공산군의 포격과 유엔군의 반격 공습을 거치는 중에 건축을 중단한 성당의 한쪽 벽이 무너지고 사제관과 부속건물이 대파되었습니다. 전쟁 중이었음에도 1951년 8월에 제13대 본당 주임으로 부임한 커머포드(Comerford, 孔) 신부는 마당에 천막을 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서서히 복구 준비를 했으며, 1953년에 복구는 대부분 완료되었습니다.
한국전쟁 때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가 살아 온 퀸란 신부는 함께 피랍되었다가 평안북도 수용소에서 순교한 페드릭 번 주교의 뒤를 이어 한동안(1953-1957년) 교황사절 서리를 겸하였습니다. 1955년 9월 20일 춘천이 지목구에서 대목구로 승격되자 퀸란 신부는 11월 23일 초대 춘천 대목구장으로 부임하면서 주교로 서품되었습니다. 이듬해인 1956년 6월 8일, 춘천교구와 죽림동 성당 주보 축일인 예수성심 대축일에 새로운 모습을 갖춘 주교좌성당의 봉헌식이 성대히 거행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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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14일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춘천 교구장에 착좌한 장익 요한 주교는 죽림동 본당 제22대 주임 이정행 요한 신부와 함께 노후된 죽림동 성당 건물 중창을 계획하였습니다. 많은 이들의 협조와 가톨릭 미술가회 소속 중진 작가들의 적극적 참여로 1998년 4월부터 다섯 달에 걸쳐 성당 안팎 공간의 형태는 역사적인 모습 그대로 보존한 채 전례 거행에 합당하고 예술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성당으로 변모시켰으며, 9월 14일 십자가 현양 축일에 중창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또한 죽림동 성당 터를 마련하고 주교좌성당의 기초를 놓은 엄주언 마르티노 회장의 공적을 기리고 전교 사업을 목적으로 춘천교구 가톨릭 회관을 건립해 ‘말딩회관’이란 이름으로 1999년 4월 24일 축복식을 가졌습니다.
죽림동 성당은 우리나라 1950년대 석조 성당 건축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건물로 인정되어 2003년 6월 25일 등록문화재 제 54호로 등록되었습니다. 2012년 말딩회관 내에 본당 역사전시실 축복식을 가졌으며, 2013년 6월 14일 춘천교구장 김운회 주교는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 기공식을 하고 공사를 시작해 그해 12월 1일 축복식을 거행했습니다.
죽림동 성당 성역화 사업은 성전이 지닌 역사와 아름다움을 살리면서 근현대 신앙 증인들과 순교자들의 삶을 기억하고 현양하기 위해 마련된 사업으로, 성 골롬반 의원 폐원과 성 골롬반 수녀원 이전으로 확보된 성당 앞 부지에 전정 · 중정 · 회랑 등을 지어 새롭게 단장하였습니다. 2014년 6월 1일에는 교구 주보이자 본당 주보인 예수성심상(오광섭 작)을 새로 제작하여 시내 중심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성당 입구 언덕 위에 설치하고 축복식을 올렸습니다.
3. 죽림동성당 성직자 묘역 (성지)
죽림동 성당의 뒤뜰에는 성직자 묘역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곳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거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순교자들이 함께 모셔진 성스러운 곳이기도 합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춘천시에서는 그 이튿날인 6월 26일 아침부터 포탄이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남침이 시작된 바로 다음 주일인 7월 2일, 퀸란 토마스 지목구장 신부가 본당 미사를 드리는데 인민군이 들이닥쳐 성당 안에서 공포를 쏜 후 20여 명의 교우가 지켜보는 앞에서 캐나반(Canavan, 孫) 보좌신부와 함께 체포해 연행해 갔습니다. 그 후 소위 ‘죽음의 행진’이 시작되어 교황사절 페드릭 번(J. Patrick Byrne) 주교를 비롯한 외국인 사제, 수녀, 개신교 목사 등 수백 명이 평안북도 어느 험한 산비탈로 끌려가 강제 수용되었는데, 캐나반 신부도 번 주교처럼 그곳에서 모진 고생과 추위를 못 이겨 선종하였습니다.
그래도 1953년 4월까지 34개월간의 포로 생활에서 기적같이 살아서 돌아온 사람 중에는 퀸란 토마스 신부와 홍천본당 크로스비 필립보(Philip Crosbie, 趙) 신부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묵호성당 라 파트리치오(Patrick Reilly) 신부, 소양로성당 고 안토니오(Anthony Collier) 신부, 삼척 성내동성당 진 야고보(James Maginn) 신부는 모두 아일랜드 출신으로 1950년 남한에서 피살되었습니다.
이밖에도 춘천 지목구에서는 6.25 전쟁을 전후로 평강 본당의 백응만 다마소 신부가 연행되어 옥사했고, 의주 본당의 김교명 베네딕토 신부가 행방불명되었으며, 연길 · 함흥 · 원산 지역의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신자들의 남하를 헌신적으로 돕던 양양 본당의 이광재 티모테오 신부 또한 1950년 6월 24일 공산군에게 연행되어 원산 와우동 형무소에 갇혔다가 10월 9일 총살당하였습니다.
이렇게 6.25 전쟁 중에 순교하거나 납북된 후 모진 고생 끝에 살아 돌아와 선종한 성직자들의 시신은 죽림동 성당 뒷마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에 모셔져 있습니다.
이 묘역에는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고 안토니오신부, 라 파트리치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있고, 북한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이광재 티모테오, 캐나반(Francis Canavan)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살아남아 교황사절과 춘천교구장으로 교구의 초석을 놓은 퀸란(具仁蘭, Thomas F. Quinlan) 주교의 묘도 함께 있습니다.
이들 중 고 안토니오 · 라 파트리치오 · 진 야고보 · 백응만 · 김교명 · 이광재 신부는 현재 하느님의 종 ‘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안건으로 시복 절차가 진행 중입니다.
2017년 9월 17일 춘천교구 교구장 김운회 루카 주교는 6·25전쟁 순교자들이 묻혀 있는 죽림동 주교좌 예수성심 성당의 교구 순교자 묘역과 모든 사제의 모범인 이광재 디모테오 순교자가 마지막까지 사목하던 양양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 성당 두 곳을 성지로 선포했습니다.
4. 성 파트리치오 소양로성당 (순교사적지)
소양로 성당은 1950년 1월 5일 죽림동 본당에서 분가·설립되었으며 ‘성 파트리치오(Patricius)’성인을 주보로 모시고 있습니다. 당시 춘천지목구장이었던 퀸란(Thomas F. Quinlan, 토마스) 몬시뇰은 죽림동 성당을 새로 짓기 시작하면서 춘천 시내에 또 하나의 성당을 건립할 계획을 세우고 1949년 가옥이 포함된 땅을 구입한 후 가옥을 개조하여 성당으로 사용하기로 하고 고 안토니오(Peter Anthony Collier) 신부를 초대 주임 신부로 임명하였습니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봉의산 남쪽 기슭에 관사로 쓰던 한옥집을 개조하여 성당과 사제관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소양로 본당의 관할 구역은 봉의동, 요선동, 낙원동, 소양로 1·2·3가, 근화동 1-2가 일대였으며, 신자수는 약 250명이었고, 관할 공소로는 금산과 발산이 있었습니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발발하자 위험한 상황이 닥칠 것을 대비하기 위해 성체를 옮겨 놓고 신자들에게도 피신하라고 권고하며 사태를 지켜보았습니다. 하지만 전시상황이 점점 나빠지자 6월 27일 죽림동 성당으로 이동하던 중에 공산군에게 체포되었습니다. 이후 심문들 받고, 공지천변으로 끌려가면서 함께 잡혔던 복사 김경호 가브리엘에게 총격이 있으면 얼른 엎드리라고 이야기 하였습니다. 마침내 총격이 시작되자 고 신부는 그를 끌어안고 넘어져, 자신은 죽음을 맞으면서도 다른 이를 살리는 살신성인이 모범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하였습니다.
콜리어 신부의 순교 이후 한국 전쟁이 계속되는 동안 소양로 본당에는 신부가 파견되지 못하고, 휴전이 되면서 1954년 8월에서야 서울 대신학교(현 가톨릭대학교 성신교정) 교수로 있던 선종완 라우렌시오 신부가 2대 주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당시 교구장 퀸란 주교는 한국전쟁으로 순교한 사제들을 기념하기 위해 세 곳(소양로, 성내동, 묵호)에 성당을 신축하였는데, 그중 소양로 성당이 첫 번째로 건축되었습니다. 1956년 4월 3대 주임 버클리(J. Buckley, 夫) 야고보 신부가 성당 신축 공사에 착수해 같은 해 9월 3일 국내외 여러 은인과 교우들의 도움으로 90평 규모의 성당을 완공하고 봉헌식을 거행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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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건축한 대부분의 성당이 고딕양식이었는데 반해 소양로 성당은 반원형이라는 독특한 형태로 건축되었습니다. 내부는 제대를 중심으로 회중석이 부채꼴 모양으로 퍼져 있어, 신자들이 제대에 가까지 다가가고, 사제와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설계된 것입니다. 이러한 형태는 유럽에서도 1960년대 이후에 드물게 나타나고, 한국 천주교 교회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된 형태입니다. 성당 건축을 진두지휘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버클리 신부가 1953년 교황 비오 12세(Pius XII)에 의해 선포된 성모 성년 때 로마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현 소양로 성당과 비슷한 성당에서 기도를 바치며 선교지에 돌아가 성당 지을 기회가 생기면 꼭 이와 같은 성당을 짓겠다고 스스로 약속한 것을 지키기 위함이었다고 합니다.
소양로 성당은 건축기법에 있어서 고전적 요소와 현대적 요소가 적절히 혼합된 형태입니다. 아치형 버팀벽, 천장 몰딩 등은 교회건축에서 흔히 사용되는 고전적 기법인 반면에, 외형을 반원형 평면으로 하고, 실내외 의장과 제단 주변을 소박하게 처리한 점은 현대건축이 추구하는 단순성 측면에서 높게 평가할 만합니다. 또 원형창 유리화를 제대 십자가 조형과 일치시키고, 보존상태가 양호한 점이 높은 평가를 받아 2005년 4월 15일 문화재청으로부터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161호로 지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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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양로 성당은 2007년 2월부터 2010년 7월까지 5차에 걸친 보수 정비 사업을 통해 설립 당시와 같은 형태로 복원되었습니다.
소양로 성당은 이러한 건축사적 의미 외에도 ‘고 안토니오 신부 순교 기념성당’이라는 의미도 지니고 있습니다. 고 안토니오 신부는 우리나라 "근 ·현대 신앙의 증인 81위(홍용호 프란치스코 보르지아 주교와 동료 80위)” 에 포함하여 시복 절차가 진행 중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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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주교관 (순례지)
주교관은 춘천교구장 주교의 거처이자 선교사들이 교구 일을 돕거나 기거하는 거점으로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1958년에 건립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외국인 선교회 풍으로 지었는데, 유별나게 서향으로 세운 것은 햇빛이 아쉬운 아일랜드 풍습의 영향으로 보입니다. 6.25 전쟁이 끝난 뒤, 포격으로 피해가 많았던 춘천에 아일랜드 풍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현재까지 보존이 잘 되어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습니다.
춘천교구 신앙교육의 요람인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춘천 수련소는 1959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선교사들이 강원도 지역 선교를 담당할 수녀를 양성할 목적으로 지었습니다. 이 건물은 1969년까지 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녀회의 수련소로 사용되다가, 이후 1976년까지 예수의 카리타스 수녀회에서 운영하는 여자대학생 기숙사로 사용되기도 하였습니다. 1977년부터 가톨릭교육원으로 이름을 바꾸어 춘천교구 신앙교육의 산실이 되었으며, 가톨릭농민회와 야간학교인 청솔학원 운영 등 사회교육의 역할도 하였습니다. 1979년부터 1985년까지는 착한 목자 수녀회에서 미혼모 보호소인 마리아의 집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이 건물은 1959년에 처음 짓고 1962년에 늘려 지었습니다. 지어진 시기가 다른 두개의 건물을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하나의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건축학적으로 가치가 있으며, 장소적으로도 강원도 지역 선교활동의 중심지였다는 점에서 의미가 큽니다. 이곳 구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 춘천수련소는 2019년 2월 등록문화재 7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참고문헌]
ㅇ 강원지역 교우촌 현황 연구, 이원희, 교회사연구 제48집, 2016.
ㅇ 가톨릭굿뉴스
* 성지 : 성인·복자·하느님의 종들이 순교했거나 묻힌 곳이자 전례가 가능한 곳
* 순교사적지 : 성지 이외의 순교자들과 연관된 곳
* 순례지 : 순교자들과 직접 관련은 없지만, 신앙선조들의 삶과 영성이 담겨있거나 교구장이 신자들의 영적 선익을 위해 순례하도록 지정한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