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록에 관한 시 모음> 천상병의 '오월의 신록' 외
+ 오월의 신록
오월의 신록은 너무 신선하다.
녹색은 눈에도 좋고
상쾌하다.
젊은 날이 새롭다
육십 두 살 된 나는
그래도 신록이 좋다.
가슴에 활기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늙었지만
신록은 청춘이다.
청춘의 특권을 마음껏 발휘하라.
(천상병·시인)
+ 아름다운 신록
신록을 예찬하고 싶다
신록은 바다 속 같다
단물이 난다
벌레가 먹기 좋고
새들이 숨어서 노래하기 좋다
나도 산길을 거닐다 신록에 미쳐
파랗게 질린다
신록 속에는
사랑의 비결이 많다
(이생진·시인, 1929-)
+ 신록
고목나무에 꽃
피었네
지상에선 검은 흙을 뚫고 나온 애벌레 한 마리가 물 묻은 머리를 털고
이제 막 그것을 치어다보네
(이시영·시영,
1949-)
+ 신록新綠
봉사 기름값 대기로
세상을 살아오다가
저 미풍微風 앞에서
또한 햇살 앞에서
잎잎이 튀는 푸른 물방울에
문득 이 눈이 열려
결국
형편없는 지랄과 아름다운
사랑이
한 줄기에 주렁주렁 매달린
사촌끼리임을 보아내노니,
(박재삼·시인,
1933-1997)
+ 신록
삶의 턱마다 고단한 방황의 병을 앓다가
회복을 꿈꿀 때 찾는 새벽
산길,
비온 뒤 숲 속은 짙푸른 녹즙 향기를 토해놓고
안개를 풀어 꿈을 준다
촉촉한 풀밭을 밟으면 세상은 녹색의 장원,
아직도 색 바랜 아카시아 꽃잎은 가시에 걸려 있고
새들은 숲과 풀밭 사이로 숨바꼭질한다
흐르는 물소리에 귀를 씻고 신선한
새벽 공기로 눈을 씻는다
시달린 영혼의 순수 회복을 꿈꾼다.
(이지영·시인)
+ 신록
강산
화려하게 붉던
4월은 가고
연두색 치마 펄럭이듯
신록의 춤이 곱다
젓 냄새 엄마 품의
여린 이파리들
촉촉함에 윤이 나고
맑은 바람 숨쉰다
(윤의섭·수필가 시인)
+ 신록
예찬
봄비 그친 뒤 더욱 다가서는
자연이 빚어놓은 연초록 세상
온통 신록 숲 물결치는 계절
경이로운
윤기 흐르는 이파리
녹음 스쳐 오는 바람 향기로움
생기발랄함 넘쳐나는 푸르른 날
점차 짙어져만 가는 푸른 산
풋풋한 사랑 가득 담고픈 마음
(손병흥·서양화가 시인)
+ 신록
눈이 시린 파란 하늘
하늘 이고 선 우뚝한 산
푸르름 잔득 쌓아놓은
싱그러운 초록의 숲
환하게 웃고 있는 맑은 햇살
깊은
숲 속에
숨어 핀 작은 들꽃들
잎새에 맺혀 있는 영롱한 작은 이슬방울
지루한 장마가 끝난
칠월 한여름은
그렇게 상큼한 환한 웃음이었다.
(이영균·시인, 1954-)
+ 오월 신록
바다 속을 헤엄치듯
투명과 해맑음으로
때묻지 않은 순수
바람도 손 못 댈 초록 빛
온갖 협잡과 오욕으로
만신창이 된
속세의
신음을 벗어나
자연 앞에 서면 숨이 트인다.
어릴 적 걷던 냇가와
보리피리 불던 밭둑
들꽃
만발한 언덕이
신록 앞에서 되살아난다.
오염된 영혼과
타락할 뻔한 눈빛도
때묻지 않은 잎새 앞에서
자연인으로 돌아간다.
(박인걸·목사 시인)
+ 5월의 신록 - 정원 잔디를 깎고 나서
오늘도 초여름의 햇살이
적당히 쏟아지는 뒤뜰에 나서면
온통 눈에 들어오는 것은
초록 일색이다
발아래 잔디밭과
담장 안팎의 각종 수목들이
5월의 신록을 맘껏 자랑하고 있다
눈을 들어도
눈을 돌려도
눈을 떨구어도
눈을 감아보아도
모두 초록으로 색칠되어 있다
거울에 비쳐보는 초로의 내 모습도
그 사이에 초록으로 말없이
물들어 있다
(오정방·재미 시인, 1941-)
+ 신록을 떠나며
다시 돌아보는 마음에
물감이
배인다.
푸르고 싱싱한 언덕을 내려오며
공연히 쓸쓸해지던
우리들의 청춘시절
그래, 그랬었지.
헤어지는 빛깔은
더욱 푸르고
흔들며 떠나는 손수건은
더욱 오래 기억에 남는 법.
(강남주·시인, 1939-)
+ 신록
고향이 멀어
슬픈 사람들에겐
뜻 없이 눈부신 신록의 날씨도
칼처럼 아프다
채찍처럼 무겁다
고향은 만리 밖
노자는 없는데
뜻 없이 계절은 신록이어서
미치도록 푸르게 소리지르면
고향에 못
가
슬픈 사람들은
온몸에 푸른 멍든다
풀 길 없는 강물에
두 눈 멀고 만다.
(문정희·시인,
1947-)
+ 신록 속에 서서
흙탕물 쏟아져 내리던
전쟁의 악몽과 화상
여기선 신록조차 눈에
서툴러
다른 나라의 풍경화 같네
역사의
배반자라는
낙인찍힌 우리들이기에
이 시간에도 온갖 죄악을
아편처럼 씹으면서
갈수록 비참한 살육의
설계도를 그리면서
거룩한
신록의 계절을
모독하는 무리들!
그러나 우리들 가슴속에는
마르지 않은 희망의 샘줄기
어둠의 세기 복판을
운하처럼 흐르고 있다
기어이
이 물줄기 타고 가리라
통일과 평화의 저 언덕까지
(이은상·시조시인, 1903-1982)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초여름 시 모음> 김상옥의 '푸른 초여름' 외
+ 푸른 초여름
세상엔 말도 노래도 다 사라진다.
네가 옹아리를 시작하면 ―
물에 뜬 수련, 수련 속의 이슬도 구른다.
꿈꾸듯 네 긴 속눈썹 깜박이면 ―
강보에 싸인 채 요람이 흔들린다.
좜좜좜 네 작은 손등의 푸른 초여름―
(김상옥·시인,
1920-2004)
+ 초여름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허형만·시인, 1945-)
+ 초여름
고운 님 얼굴 닮은
마음으로
가만가만
불어오는
명주바람 앞세우고
싱그러운 연초록
잎사귀 사이로
은빛 햇살 쏟아져
아늑거리는 신록의
꿈을 안고
여름 너 벌써 왔구나!
(김용수·시인, 전남 완도 출생)
+ 초여름
푸른 제복 입은
계엄군처럼 몰려오는 듯하다
신록이 우거진 계곡마다
새소리 요란하고
전신주
피뢰침은
천둥번개 받아들일 준비로
여념이 없다
연둣빛 사연 우체통마다
그득하게 쌓이고
하늘은
먹장구름처럼 찌푸린 채
빗방울 후드득 떨어질 듯 분주하다
구슬땀이 또르르 구르고
아랫도리가 하마 흥건하다
(반기룡·시인)
+ 초여름
개구리 울음소리 자욱한 밤
윤전기(輪轉機)에서 거듭 찍혀 나오는
신문기사마다 개골개골개골
펄쩍펄쩍 뛰어다니는 개구리 울음소리
굵은 활자로 우는 맹꽁이 소리에
초여름 밤은 더욱
소란스레 깊어간다.
(양수창·시인, 1953-)
+ 설레이는 초여름
철렁이는 초여름
흐르는
강가에 서면
빙어같이 튀어 솟는
그대 향한 그리움
돌아서면
그렇게 귀엽던 당신
가시밭 넝쿨 장미로
피었으니
어여뻐 죽겠네
죽겠네
내 마음 쓸어
편지를 쓰면
펄펄 뛰는 내 가슴
옛 추억
속에
포옹하네
(서문인·시인, 1962-)
+ 초여름 숲
여린 갈잎이
미풍에 하늘거리고
이름 모를 잡초들
짙은 향을 풍기는
초여름 숲에 누우면
몸은 구름 위로 뜨고
마음은 무아(無我)의
원(原)인간으로 돌아간다.
신(神)은 인간을
숲에서 빚었으리.
보드란 흙에
풀잎 향을 섞었으리.
숲에만 오면
순한 양이 되고
어머니 품보다 더 편안해
언젠가 영원히 돌아갈 품
(박인걸·목사
시인)
+ 초여름 밤의 비가
개구리 자지러질 듯
밤꽃 향내음 물씬한 교성
하,
부끄러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그리움
그리움 총총히 박힌
하늘 자락에 걸어놓은 시계가
깜빡 졸다 떨어진
침상에는
설운 초여름 밤이 드러눕는다.
눅룩한 어둠을 가로질러
밤꽃 꺾어 내게 올
그 길에
촛불 하나 켜 놓았었는데
뽀얀 안개 쓱 문지르고
성큼 들어서는 아침,
햇살이
참 눈부셔라.
(이복란·시인)
+ 초여름 풍경
날이 덥다
보이지 않는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새들의 울음소리에 나뭇잎들이 시든다
더운 날 나무에게는 잦은 새 소리가
불안처럼 느껴진다
익어가는 토마토마다 빨갛게
독기가 차 오르고
철길을 기어가는 전철의 터진 내장에서
질질질 질긴 기름이 떨어진다
약속에 늦은 한낮이
헐레벌떡
달려온 아파트 화단엔
기다리는 풀 풀벌레도 없다
아이의 손에 들린 풍선이 터진다
지나가는 사람들에게서
고무 타는
냄새가 난다
(김재혁·시인, 1959-)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
<여름 시 모음> 허형만의 '초여름' 외
+ 초여름
물냄새
비가 오려나 보다
나뭇잎
쏠리는
그림자
바람결
따라 흔들리고
애기똥풀에 코를 박은
모시나비
지상은
지금 그리움으로 자욱하다
(허형만·시인, 1945-)
+ 여름
감나무 잎이 창을
덮어
건너 아파트 삼층 여자의 창이
안 보인다
감나무는 내 눈을
우리 집 안방으로 돌린다
(나기철·시인,
1953-)
+ 여름 일기·1
여름엔
햇볕에 춤추는 하얀 빨래처럼
깨끗한 기쁨을 맛보고
싶다
영혼의 속까지 태울 듯한 태양 아래
나를 빨아 널고 싶다
여름엔
햇볕에 잘 익은 포도송이처럼
향기로운
매일을 가꾸며
향기로운 땀을 흘리고 싶다
땀방울마저도 노래가 될 수 있도록
뜨겁게 살고 싶다
여름엔
꼭 한 번
바다에 가고 싶다
바다에 가서
오랜 세월 파도에 시달려 온
섬 이야기를 듣고 싶다
침묵으로 엎디어 기도하는
그에게서
살아가는 법을 배워 오고 싶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혹서일기
잎 하나 까딱
않는
30 몇 도의 날씨 속
그늘에 앉았어도
소나기가 그리운데
막혔던 소식을 뚫듯
매미 울음 한창이다.
계곡에 발 담그고
한가로운 부채질로
성화같은 더위에
달래는 것이 전부다.
예닐곱 적 아이처럼
물장구를 못 치네.
늙기엔 아직도 멀어
청춘이 만리인데
이제 갈 길은
막상 얼마 안 남고
그
바쁜 조바심 속에
절벽만을 두드린다.
(박재삼·시인, 1933-1997)
+ 여름밤
저인망의
어둠이 온다
더 많이 군데군데 별 돋으면서
가뭄 타는 들녘 콩싹 터져오르는 소리 난다
가마솥 가득 푹 삶긴
더위
솥검정 같은 이 더위를 반짝반짝 먹고 있다
보리밥에 짱아찌 씹듯
저 별들이 먹고
있다
(문인수·시인, 1945-)
+ 그늘
만들기
8월의 땡볕
아래에 서면
내가 가진 그늘이
너무 작았네
손바닥 하나로
하늘
가리고
애써 이글대는
태양을 보면
홀로 선 내 그림자
너무 작았네
벗이여,
이리 오세요
홀로 선
채
이 세상 슬픔이
지워지나요
나뭇잎과 나뭇잎이
손잡고 한여름
감미로운 그늘을
만들어 가듯
우리도
손깍지를
끼워봅시다
네 근심이
나의 근심이 되고
네 기쁨이
나의 기쁨이 될
때
벗이여,
우리도 서로의
그늘 아래 쉬어 갑시다
(홍수희·시인)
+ 美
삶이
한 번뿐이듯
죽음도
한 번뿐이다
단 한 번 태어난
죽음 -
기릴
일이다
연못에서는
잉어가
수면을 깨며
날개를 젓는다
여름이 가고 있다
(박용하·시인,
1963-)
+ 그 여름의 끝
그 여름 나무 백일홍은 무사하였습니다
한차례 폭풍에도 그 다음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아
쏟아지는 우박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습니다
그 여름 나는 폭풍의 한가운데 있었습니다
그 여름 나의 절망은
장난처럼 붉은 꽃들을 매달았지만
여러 차례 폭풍에도 쓰러지지 않았습니다
넘어지면 매달리고 타올라 불을 뿜는 나무
백일홍
억센 꽃들이 두어 평 좁은 마당을 피로 덮을 때,
장난처럼 나의 절망은 끝났습니다
(이성복·시인,
1952-)
+ 여름 능소화
꽃의 눈이 감기는 것과
꽃의 손이 덩굴지는 것과
꽃의 입이 다급히
열리는 것과
꽃의 허리가 한껏 휘어지는 것이
벼랑이 벼랑 끝에 발을 묻듯
허공이 허공의 가슴에 달라붙듯
벼랑에서
벼랑을
허공에서 허공을 돌파하며
홍수가 휩쓸고 간 뒤에도
붉은 목젖을 돋우며
더운 살꽃을
피워내며
오뉴월 불 든 사랑을
저리 천연스레 완성하고 있다니!
꽃의 살갗이 바람 드는 것과
꽃의 마음이 붉게
멍드는 것과
꽃의 목울대에 비린내가 차오르는 것과
꽃의 온몸이 저리 환히 당겨지는 것까지
(정끝별·시인,
1964-)
+ 여름 낙조
왜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나는 지금 만 권의 책을 쌓아 놓고
글을 읽는다
만 권의 책, 파도가 와서 핥고 핥는 절벽의 단애
사람들은 그렇게 부른다
나의 전 재산을 다 털어도 사지 못할 만
권의 책
오늘은 내가 쓴 초라한 저서 몇 권을 불지르고
이 한바다에 재를 날린다
켜켜이 쌓은 책 속에 무일푼
좀벌레처럼
세들어 산다
왜 채석강변에 사느냐 묻지 말아라
고통에 찬 나의 신음 하늘에 닿았다 한들
끼룩끼룩 울며 서해를
날으는 저 변산 갈매기만큼이야 하겠느냐
물 썬 다음 저 뻘밭에 피는 물잎새들만큼이야
자욱하겠느냐
그대여, 서해에 와서 지는
낙조를 보고 울기 전에
왜 나 채석강변에 사는지 묻지 말아라
(송수권·시인, 1940-)
+ 당신의
여름을 사랑합니다
겨울은 덥지 않아서 좋고
여름은 춥지 않아서 좋다는
넉넉한 당신의 마음은
뿌리 깊은
느티나무를 닮았습니다
더위를 이기는 열매처럼
추위를 이기는 꽃씨처럼
꿋꿋한 당신의 모습은
곧고 정직한
소나무를 닮았습니다
그런 당신의 그늘이 편해서
나는 지친 날개 펴고
당신 곁에 머물고 싶은
가슴이 작은 한
마리 여름새랍니다
종일 당신의 나뭇가지에 앉아
기쁨의 목소리로
행복의 노래를 부르게 하는
당신은 어느 하늘의
천사인가요
나뭇잎 사이로 파아란 열매가
여름 햇살에 익어가고 있을 때
이 계절의 무더위도 신의 축복이라며
감사히 견디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이채·시인)
* 엮은이: 정연복 / 한국기독교연구소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