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출생 : 1953년 1월 24일 (59세) 대한민국 경상남도 거제시
학력 : 경희대학교 법학 학사
종교 : 천주교
배우자 : 김정숙
자녀 : 아들 문준용, 딸 문다혜
주요 경력
한겨레신문 창간위원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민주 사회를 위한 변호사 모임 부산·경남 지부 대표
부산민주시민협의회 상임위원
청와대 민정수석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청와대 비서실장
노무현 재단 이사장
혁신과 통합 상임대표
민주통합당 (부산광역시 사상구) 의원
서명
문재인(文在寅, 1953년 1월 24일 ~ )은 대한민국의 법조인·사회운동가·정치인이다.
경상남도 거제시 출생으로 1975년 경희대학교 재학 시절 학생운동으로 수감 된 적이 있으며,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다. 학생운동 전력으로 판사 임용에 실패하자, 노무현과 함께 합동법률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수차례의 인권 변호 활동을 하였다. 노무현 정부 시절 2003년부터 2006년 5월까지 청와대 민정수석·시민사회수석, 2007년부터 2008년 2월까지 비서실장을 역임하였고, 노무현 사후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의 이사장을 맡다가,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1], 2012년 6월 17일에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로 출마 선언을 하였고, 2012년 9월 16일 민주통합당 경선을 통하여 대한민국의 제18대 대통령 후보로 확정되었다.
생애 초기
1953년 거제도 피난민 수용소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함경남도 흥남 출신으로 함흥농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흥남시청 농업계장으로 근무하다가 한국 전쟁 당시 흥남 철수 작전 때 미군 군용함정(LST)에 몸을 실어 북한에서 남한으로 피난을 내려와 거제도 포로수용소의 노무자로 일하면서 가족을 먹여살렸다. 문재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부산 영도로 이사왔으며, 문재인은 현재 북한에 남아있는 이모 강병옥과 이산 가족 상봉을 한 바 있다.
학창시절
부산남항초등학교와 경남중학교, 경남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재수 끝에 예비고사 후기로 4년 장학금을 받고 경희대학교 법과대학에 72학번으로 입학하였다.
인권운동가 활동
경희대학교 법과대학 재학시절 운동권으로서 총학생회장이던 강삼재를 대신하여 당시 총학생회 총무부장로서 집회를 주도하다 1975년 4월 11일 집회 때 구속되어 1975년 6월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 8월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고 학교에서 제적당했다. 출소 후 강제징집 되어 1975년 8월 육군에 입대하여 대한민국 39향토보병사단 훈련소를 거쳐 특전사령부 예하 제1공수 특전여단 제3대대 수중폭파요원으로 복무하였다. 상병 복무 중일 때에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 때 미루나무 제거조로 투입되기도 하였는데, 당시 소속 부대 여단장이 전두환, 대대장은 장세동이였다. 6주간의 특수전 훈련을 마칠 때 정병주 특전사령관으로부터 폭파과정 최우수 표창을 받았고 자대 배치 이후 전두환 여단장으로부터 화생방 최우수 표창을 받았다. 1978년 2월 육군 병장으로 만기 제대했다.
군복무를 마치고 사법시험을 준비하여 22회 사법시험에 합격하였는데, 사법시험 합격통지서를 청량리 경찰서 유치장에서 받았다. 1982년 사법연수원을 차석으로 수료했으나, 시위 전력 때문에 판사 임용이 좌절되었고, 노무현과 사법시험 동기인 박정규(노무현 정부 시절 민정수석 역임)의 소개로 노무현을 만나 법무법인 부산에 합류하였다. 법무법인 부산에서 노무현과 연을 맺은 것을 계기로 30년가까이 가장 친한 친구이자 최측근으로 활동했다.[5] 노무현이 정치인이 되어 청문회 스타가 된 뒤에도 부산변호사협회 인권위원장을 지내면서 인권변호사로 일했으며, 부산 미국문화원 방화 사건, 동의대학교 사건 등 굵직한 시국사건을 변론했다. 한겨례신문 설립위원으로 참여하기도 하였다. 문재인은 무료로 변론을 하게 되면 자칫 사건 당사자와 가족들이 재판을 경시하는 풍조가 나타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무료 변론은 하지 않았는데, 경상대학교 교수들이 《한국사회의 이해》라는 저서를 강의했다는 이유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기소 되자 5년 간 변론을 맡아 항소심에서 승소를 하였을 때, 문재인이 받은 수임료는 고작 1백만∼2백만원대였다.
참여정부 시절
변호사 활동을 하며 정치권으로부터 러브콜을 받기도 했지만 한사코 거절했다. 특히 2002년 대한민국 제3회 지방 선거를 앞두고, 당시 대통령 후보였던 노무현이 몇차례 부산광역시장 출마를 권유했음에도 ‘나는 참모용’이라며 ‘더 나은 사람이 출마해야 한다’고 고사하였다.[6]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에도 문재인은 ‘변호사 업무에 복귀하겠다’는 뜻을 여러 차례 밝혔다.
참여정부 초대 민정수석을 지냈으나, 녹내장과 고혈압 등 건강악화로 1년 만에 청와대를 떠났다. 그러나 민정수석을 그만두고 네팔 산행 도중[7] 연락이 두절된 상황에서 영자신문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 소식을 듣고 즉시 귀국하여 변호인단을 꾸렸으며[8], 2005년 다시 청와대에 들어가 시민사회수석, 민정수석을 거쳐 참여정부 마지막 비서실장을 지냈다.
청와대 안에서 이정호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국정 상황실장 등과 함께 PK인맥을 대표했는데, ‘왕수석’으로 불리며 한나라당으로 부터 ‘왕수석인 문재인 수석의 월권과 청와대의 시스템 경시로 인해 국정 원칙이 파괴됐다’는 비난을 받으며 2인자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9] 비서실장 시절 이해찬 국무총리가 부적절한 관계에 있는 인사들과 내기골프를 쳤다는 소식을 듣고 고심하던 노무현 대통령에게 해임을 촉구하기도 하였으며[10], 청와대에서 근무하던 시절 모든 직원에게 존댓말을 쓰는 것으로 유명했고, 자신의 주장을 내세우기보다 다양한 의견을 듣고 상황을 명확하게 정리해내는 업무 스타일을 보였다.[11] 또한 참여정부 들어 검사장으로 승진한 17명 중 문재인과 이호철 비서관의 경남고등학교 동문은 한명도 없었는데, 두 사람은 아예 동창회에 얼굴을 비추지도 않았고, 고등학교 동창인 고위 공직자가 문재인의 방에 들렀다가 얼굴도 못 본 채 쫓겨난 적도 있으며, 또한 청와대 출입기자단과 단 한차례의 식사나 환담 자리도 갖지 않았다고 한다.
2006년 11월 6일 국정자문회의 의원 138명을 보궐할 때, 국정자문위원으로 추가 보선되었으며[13], 노무현 전 대통령은 문재인에 대해 ‘노무현의 친구 문재인이 아니라 문재인의 친구 노무현이다. 내가 알고 있는 최고의 원칙주의자’라고 평가했다.
참여정부 이후
노무현의 검찰 수사와 관련
문재인은 2011년 6월 14일 발간한 자신의 자서전에서 대한민국의 전 대통령인 노무현에 대한 검찰 수사 당시 수사관이었던 이인규에 대하여 “검찰은 박연차 회장의 말이 진실이라고 뒷받침할 증거를 전혀 갖고 있지 않았다. 대단히 건방졌다”고 주장하였다.[15] 이런 문재인의 주장에 대해 이인규는 수사 태도에 대하여서 “당시 노 대통령을 처음 뵈었을 때도 내가 상석에 앉거나 태도를 건방지게 해서 조금이라도 언짢게 느낄 만한 상황은 전혀 없었다. 조사 전에 한 10분에서 15분 정도 함께 있으면서 차를 마셨는데 여러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다들 알 수 있는 내용이다.” “노 대통령에 대한 조사를 마쳤을 무렵에는 내가 직접 중수부 특별조사실로 올라가서 ‘수고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하고는 20분 정도 선 채로 있었다. 그때 노 대통령은 앉아 계셨고 나는 예를 차리려고 최대한 노력했다”고 밝혔고, 문재인의 증거 주장에 대하여 “그날 조사 당일 오후 5시께 미국의 핀센이라는 기관에서 노 대통령의 딸 정연씨가 미국에서 주택을 구입한 것으로 의심할 수 있는 일종의 단서가 우리 수사팀에 도착했었다. 정연씨가 얼마짜리 주택을 구입했는지 금액을 특정할 수는 없고, 구입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내용도 아니었다. 다만 수사의 단서로 쓸 수 있는 자료였다”고 밝혔으며, 노무현과 박연차와의 대질을 하려는 발상 자체가 무례하다는 문재인에 주장에 대하여서는 “두 사람의 말이 틀리니까 어느 쪽이 진실인가 밝히기 위해서는 당연한 절차 아니냐.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한 것이다”라고 언론에 밝혔다.[16] 또 이인규는 문재인이 자신의 자서전에서 “검찰이 박 전 회장과 대통령 간 통화 기록조차 갖고 있지 않았다”며 혐의를 입증할 증거가 없다는 식으로 주장한 것에 대해서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은 처음부터 대통령이 달라고 해서 (돈을) 줬다”고 진술, “박 전 회장은 2007년 6월 말 100만달러를 전달하기 전에 청와대 만찬에 초대돼 돈을 요구받았고, (돈을 준 후)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은 만찬에 혼자 초대받아 노 전 대통령 부부와 세 사람이 식사를 했을 때 권양숙 여사가 노 전 대통령이 지켜보는 상황에서 ‘아이들(노건호씨와 노정연씨) 집이라도 사줘야 하는데…’라는 식의 얘기를 꺼냈고, 이 얘기를 들은 자신이 직원 130명을 동원해 환전한 100만달러를 측근을 시켜 청와대에 전달했다고 진술했다.” “박 전 회장은 또 돈을 전달한 뒤 노 전 대통령에게 전화를 받았고, 고맙다는 취지로 받아들였다고 진술했다.” “검찰은 박 전 회장과 정승영 사장의 청와대 출입 기록, 달러 환전 기록 등을 확보하였으나, 박 전 회장과 노 전 대통령의 통화 기록은 보존기간(1년) 경과로 이미 폐기돼 확보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
정계 입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서거 이후 장례 절차와 관련한 모든 일을 도맡았으며, 이후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이사장을 역임하였고, 특전사 출신이라는 점과 사법연수원 차석 졸업 등 이력으로 인하여 대선에서 야권 후보들 중 지지율이 높은데, 2011년 8월 언론사 여론조사에서 ‘당신이 원하는 국회의원’부문에서 지지율 1위를 차지하였고[18], 2012년 대한민국 제19대 총선에서 부산 사상구에 출마하여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 2012년 9월 16일 민주통합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논란
문재인은 2006년 부산지역 기자들과 만나 "참여 정부를 부산정권으로 안받아들이는 것 이해 안돼”, [19], “대통령도 부산 출신인데 부산 시민들이 왜 부산정권으로 안 받아들이는지 이해가 안 된다”, “한 지역에서 한 정당이 지방선거를 독점하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통합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대통령의 의지” 라고 한 발언에 대해 한나라당 대변인은 지역 감정 조장 발언이라면서 선거법 위반 여부를 조사해야 된다고 주장하였고, 민주당 대변인은 노무현 정부가 국민과 호남인을 대상으로 사기극을 펼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한나라당 정진섭 의원은 2007년 4월 24일 한국고용정보원이 문재인 청와대 비서실장의 아들을 채용하는 과정에서 비정상적인 방법을 동원했다고 주장했다. 고용정보원은 ‘문재인 아들의 경우 외부 수상경력과 외국어 실력(TOEFL 250점) 등이 높게 평가됐다’며 특혜 의혹을 부인했고[20], 문재인 측은 ‘동영상을 특정하지 않고 전산 부문으로 세부 공고를 한 부분이 오히려 특혜가 없었다는 것을 증명한다’며 관련 의혹을 일축했다.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 소장 하승수 변호사는 문재인의 책 《운명》 중 방사성폐기물처분장 부지 선정과 관련된 내용에서 사용후 핵연료를 중간저장하는 시설까지 포함하고 있었음에도 중·저준위 방폐장인 것처럼 서술하는 등 사실관계가 잘못되었다고 지적했다.
평가
부경대학교 교수 이상윤은 자신의 《안철수 등의 한판승부 - 박근혜 벗기기》에서 문재인에 대하여, 노무현 대통령 당선 이후 민정수석을 역임하고, 이후 퇴임직전 비서실장을 하는 등 권력의 핵심에 있으면서도 청탁 등 이권개입을 멀리하고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고 평가했다.
약력
2010년 8월 ~ 2012년 5월 사람사는 세상 노무현 재단 이사장
2009년 5월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위원회 및 상임집행위원장
2007년 8월 제2차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회 위원장
2007년 ~ 2008년 2월 대통령 비서실 실장
2005년 ~ 2006년 5월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2004년 ~ 2005년 1월 대통령 비서실 시민사회수석비서관
2003년 ~ 2004년 2월 대통령 비서실 민정수석비서관
1996년 부산지방변호사회 인권위원장, 민주 사회를 위한 부산-경남 변호사 모임 대표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위원/부산 지사장[24]
1987년 민주쟁취국민운동 부산 본부 상임집행위원
1984년 한국해양대학교 해사법학과 강사
1983년 법무법인 부산 대표변호사
1983년 사법연수원 12기 수료 (법무부장관상 수상)
1980년 제22회 사법시험 합격
1980년 경희대학교 법학 학사
1971년 경남고등학교 졸업
저서
《문재인의 운명(노무현 대통령과 함께한 30년 동지 문재인, 두사람의 운명 같은 동행)》. 가교. 2011년 6월 15일. ISBN 978-89-77771-88-8.
《문재인 김인회의 검찰을 생각한다(무소불위의 권력 검찰의 본질을 비판하다)》. 오월의봄. 2011년 11월 23일. ISBN 978-89-96687-52-8.
《사람이 먼저다(문재인의 힘)》. 퍼플카우. 2012년 8월 6일. ISBN 978-89-97838-02-8.
《문재인이 드립니다(꿈을 놓아버린 이 땅의 청춘들을 위한 포토에세이)》. 리더스북. 2012년 8월 8일. ISBN 978-89-01149-36-3.
제19대 총선
국회의원(사상구) 19대 민주통합당 55.0% 65,336표 1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