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거실 한쪽 벽에 커다란 한국화 한 폭이 걸려 있다. 바닷가의 풍경을 그린 작품인데
빨간 갯펄이 너무도 생뚱맞고 낯설어, 보는 이들로 하여금 작품성을 의심케 하지만
멀리 순천에서 정성스레 가슴에 안고 천리길 찾아준 남편 지인의 정리가 눈물겨워 차마 그 그림을
홀대할 수 없기에 버젓이 남계와 백포, 월포 선생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어 걸어두고 있다.
영화 '취화선'에도 등장하는 수려한 순천만의 그 붉은 갯펄은 함초, 즉 나무재의 색깔때문이란다.
나무재는 개펄 가까이서 보면 잎이 녹색 바탕에 자색 융털의 비로도 빛깔이지만 멀리서 보면
온통 발그레하니 붉은 색으로 나타난다.
한가할 때 거실에 앉아서 순천만의 갯펄을 감상할 때면 문득, 어린 날의 나무재에 얽힌 얘기 하나가
내 가슴에 와 안긴다.
초등학교 5학년 때던가? 새마을 운동의 일환으로 정부는,저녘이면 마을 주민들을 학교 운동장에
모아 놓고 계몽 뉴스와 영화를 보여주거나 국악공연을 관람케 했다. 군청의 문화공보실에서 주관하는
이 행사는 연일 17일 계속되었다. 김제에는 17개의 면이 있는데 하루에 1개의 면에서 이 행사를
치뤘기 때문에 17일 내리 조퇴를 했지만, 군청에서 학교에 나와 동생의 공연출연을 위한 협조의
공문을 보내서 우리는 무리없이 행사에 동참할 수 있었다.
오전수업이 끝나면 출연진과 스탭이 군청에 모여 함께 공보실의 전용 마이크로 버스를 타고
예정된 학교에 갔는데 공연이 시작되기 전, 면장이나 또는 그 지역 유지의 집에서 마련한 성찬의
저녘식사가 제공되었다. 때로는 유명한 음식점에서 저녘식사를 하기도 했는데 깔끔하고 정성스레
마련된 저녘식사의 즐거움은 초등학교 5학년생에겐 너무나 큰 것이었다.
광활면이었던가? 이날도 그 지역 유지의 집에서 저녘을 베풀었는데 상이 휘어질 듯한 음식상이
나왔다. 입맛이 까탈스러웠던 난 처음 대하는 음식은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서 입맛을 본 후에
입에 맞는 음식을 먹곤 했는데 그날은, 유난히 향긋한 나물이 입맛을 당겼다. 그 향과 맛에 이끌려
한 가지만 탐하는 나를 스승이신 강종철 선생님께서 유심히 바라보시더니
"아가 그 나물이 그렇게 좋으냐? 맛 있지? 그것이 나무재란 것인데 몸을 차게 하기 때문에
목에 해롭다. 그 나물 많이 먹으면 너 있다가 소리할 때 목 안 나오니 조심해야 한다.
너무 과하면 설사를 할 수도 있어."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씀하시는 선생님이
어린 소견에 야속하기도 했을 뿐더러 쉽사리 젓가락질을 멈출 수도 없었다.
이윽고 한 초등학교의 넓은 운동장에 무대가 설치되고 대한뉴스가 상영된 후 공연이 시작되었다.
전주에서 온 홍정택 명인과 부인인 김유앵 명창, 그리고 두 사람의 여류명창, 강종철 선생님과
우리 자매가 총 출연진인데, 공연의 중간 순서인 우리 자매의 차례가 되었다.
언제나 무대에만 오르면 날아갈 듯 좋은 컨디션으로 방실방실 웃으면서 꾀꼬리 같이 맑은 소리에
춤까지 덩실거리며 끼를 주체 못하는 동생과 함께 무대에 올랐다. 단가에 이어 흥보가 중중모리 대목을
부르는데 목이 빗장을 가로지른 듯 답답하고 중간 음역대를 발성하는 정도로도 식은 땀이 흘렀다.
고음부에서는 아예 목소리가 터져 나오질 않으니 그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만 싶었다.
동생도 함께 나무재를 먹었을 테지만 그 애는 무슨 일이 있었느냐는 듯 깨끗하고 자신있게
고음부를 내지르며 특유의 신명을 발산, 춤까지 덩실덩실 추다 못해 팽이처럼 뱅그르르 돌기도
하는 것이다. 덕분에 중간 박수가 터져 나왔다. 고음부에 브레이크가 걸린 나는 동생의 자신감 있는
모습이 한편으로는 고마웠지만 거의 원맨 쇼처럼 행해진 그 무대의 추억은 훗날까지 두고두고
악몽으로 날 괴롭혔다.
동생 덕분에 갈채 속에 식은 땀 범벅이 되어 무대를 내려온 내게, 선생님께서 다가오시더니
뒷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조용히 닦아주셨다.
"어때, 많이 힘들었지? 거 봐라. 선생님 말씀을 잘 들어야지.
너는 목이 약해서 늘 찬음식을 조심해야 한다. 매운 음식 같이 자극이 심한 음식도
목에 해롭고 과식도 소리하는 사람에게는 장애란다. 너무 심하게 운동을 해서 많은 땀을 흘려도
목에는 좋지 않고. 오늘을 경험삼아 평생 내 말을 가슴에 새겨둬야 한다."
어머니의 식단에 나무재는 아주 드물게 등장하는 메뉴이기도 하지만, 자라 결혼을 해서도
나무재는 우리들 주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식재료가 아닌 탓에 자주 먹지는 않는다.
간혹 시장이나 길거리에서 상인 아낙네의 커다란 함지박에 담긴 나무재를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사서 요리를 하는데 지금도 그 향과 맛은 충분히 매력적이다.
정말, 스승님의 말씀처럼 체질 탓인지는 몰라도 몇 젓가락 입에 넣지도 않아서 배가 싸르르
트는 것을 보면 나무재와 나는 좋은 인연이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무재를 먹는 대신에 나무재로
붉게 물든 순천만의 그림을 거실에 걸어두고 생각으로만 나무재를 먹는다.
첫댓글 함초, 그 이름이 '나무재'로 불린 것을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나무재, 갯펄의 그 풀이 그리 맛난 음식인지도 이제야 알았습니다.
가슴에 불지피듯 붉게 타는 그 빛이 그토록 찬 음식일줄이야 누군들 알았겠습니까?
그리고,'나무재의 추억'을 읽고 이렇게 감동이 일 줄 그 누가 알았겠습니까?
보라 선생님의 추억 속에 흠뻑 빠졌다 갑니다.
고맙습니다.
해월 선생님 나무재가 함초라는 것을 얼마전 달구지님의 글을 통해서 알게 되었답니다.
나무재의 향이 독특할 뿐 아니라 맛이 짭조롬하면서도 쌉쌀해서
좋아하지 않는 이들도 많더군요.
고맙습니다.
보라사부님 이 나무제는요 띁어서 바로삶아서 먹으면 목은 잘모르지만 배가좀 살살 아프담니다
그늘에다 하루정도 말려서 삶아먹으면 겐찮습니다 그맛나는 고사리도 바로는 목먹듯이 이나무재도
고사리처럼 삶아서 말리면 아마도 아무탈이 없을겄같은데요 저이는 한자루씩 띁어다 그렇게 먹었지요
달구지님, 덕분에 나무재가 함초라는 것을 알게 됐답니다.
향긋하고 약간 쌉싸름한 맛이 있는 나무재를 잘 무쳐 놓으면 정말 맛있더군요.
서울에서 자란 저로선 함초니 나무재가 뭔지는 모르겠으나 보라선생님의 선생님께서 보여주신 제자사랑의 마음이 느껴지네요!
판소리 입문의 첫 스승이신 강종철 선생님과의 인연도 너무나 슬프게 꼬여버렸죠.
강선생님의 사모님 또한 내게 춤과 가야금을 가르쳐 주신 스승님이신데....
제가 중학교에 진학할때 강선생님이 상경하셔서 국립창극단에 입단하고
저는 또 서울로 진학해 전통예고에 들어가면서 전공선생님이 바뀌면서
스승과 제자의 인연이 끝을 맺게 되었죠. 훗날까지 스승과 제자 사이에 깊은 상처와 앙금이
남아서.... 두고두고 마음이 아프답니다. 강선생님과 사모님께서 엄청 저희 형제를 아끼셨거든요.
특히 사모님의 저에 대한 사랑은 갚을 길이 없을 정도였고요. 훗날 국립창극단에 동생이 입단하면서
그 갈등의 골이 회복 불가능하게 패이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