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침마다 복음의 신을 신는다.
‘나는 자연인 이다.’라는 T.V 프로그램을 보면 나도 함께 자연 속으로 빨려 들어가곤 한다. 자연 속에 사는 이들을 자주 접했었고 나도 그런 사람 중에 하나였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어린 시절, 그다지 복잡한 일도 없었을 텐데 산 속에 들어가 사는 것을 좋아했다.
자연인을 자처하며 홀로 산이나 무인도에서 사는 이들을 보면 그 사연들이 구구절절하다. 사업실패, 믿는 사람에게 당한 배신감, 건강요양, 기인들의 득도 수련, 그리고 약간 ‘똘 끼’가 있는 정신이상자…이들 중엔 내가 속한 부류는 없다. 나는 단지 신앙의 억압으로부터 벗어나고픈 심정에서 산 속에 거하기를 좋아했던 것 같다.
사춘기 시절, 어느 누구도 나의 신앙에 대한 의문에 답을 준 이가 없었다. 신앙에 대한 의문은 날이 갈수록 증폭되었고 답을 찾지 못한 나로서는 의문이 비판이 되었고 그 비판은 억압으로 되돌아와 나를 짓눌렀다. 아마도 이러한 때에 에덴동산의 그 뱀이 찾아 왔다면 영락없이 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자유한 삶을 위하여 산 꾼을 자처하며 북한산 인수봉과 도봉산 선인봉에 묻혀 살았고, 설악산 속으로 들어가 대청봉 아래에 위치한 희운각에 자리 잡고 바람과 같은 삶을 살았다. 크리스천이라는 나의 정체성을 잊지는 않았지만 나는 서서히 변질되어 가고 있었다. 물론 산을 대상으로 제사하는 ‘산제’에 머리를 숙인 적은 없다할지라도 ‘산’ 그 자체를 경건의 대상으로 생각했으니 ‘신앙의 이단아’ 되고 만 것이다. 여기에서 ‘나 홀로 신앙’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를 깨닫게 된다.
금번 방송 카메라가 찾아간 ‘자연인’은 건강 때문에 산 속에 들어왔다가 일평생을 살게 된 65세 노총각이었다. 이전에 보았던 ‘자연인’들은 사회 부적응자이거나 괴팍한 기질의 도인들이어서 별 공감이 없었는데 금번 노총각 아저씨에겐 그저 순수한 자연인으로 느껴져 나도 한 번 찾아가서 한 끼 식사라도 하고픈 마음을 들게 하는 분이었다. 고칠 수 없는 병을 얻어 산 속에 들어와 살다가 병을 고쳤고 그러다 보니 장가갈 시기를 놓쳐 노총각으로 살아가는 착하디 착한 순수한 아저씨를 대하니 나의 마음이 그에게로 달려가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이 프로그램을 보고 착한 노처녀나, 과수댁이 찾아가 준다면 그야말로 에덴동산이 될 것이란 마음이 든다.
아침에 일어난 노총각 아저씨가 군화(軍靴)를 챙겨 신고는 산으로 올라간다. ‘뱀’이 있기 때문에 군화는 없어서는 안 될 필수 장비란다. ‘뱀’이란 말에 섬칫했지만 에덴동산에도 뱀이 있었다는 생각에 미치니 인간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동물임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인지 인류에게 뱀은 어딜 가든지 따라 다닌다. 태몽으로 ‘뱀 꿈’을 꾸었다는 이들이 더러 있고 ‘구렁이 담 넘듯 한다’는 속담도 있으며 ‘용두사미(龍頭蛇尾)’란 사자성어에, ‘십이간지(十二干支)’의 동물 중 뱀은 용의 옆에 당당히 자리한다. 최근에는 뱀을 반려동물 내지는 애완동물로 같이 엉켜 사는 사람들도 있으니 뱀과 사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종류의 동물보다 밀접한 관계임에 틀림없다.
뱀을 신으로 섬기는 종족도 있지만 크리스천인 나에게 뱀은 분명 원수이다. 보기에도 징그럽고 흉측하며 소리 없이 나타나 놀라게 하고, 또아리를 틀고 있는 독사의 모습은 불같이 이글거린다. 새까만 혀는 둘로 갈라져 들랑달랑 하는 간교한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만정이 떨어진다. 그 뿐만 아니라 악을 행하는데 있어서 이 뱀처럼 지혜로운 놈이 어디 있을까? 아담과 하와를 쓰러뜨렸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까지 쓰러뜨리려 했으니 이 놈 앞에 당할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그 누구도 없을 것이다. 그러기에 ‘의인은 없으니 하나도 없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고 성경은 선언하는 것 아닌가? 뱀만 보면 그 머리를 밟았던 나도 그 뱀에 감쪽같이 속아 ‘산’을 경건의 대상으로 여겼을 정도이니 악을 향한 뱀의 지혜로움에는 경악할 지경이다. 내가 좋아할 만한 구석은 그 어디에도 없다. 사단의 상징적 존재이기에 그 머리를 밟기도 하였기만 그 속성 그 자체가 싫어 내 주위에서 보이지 않게 하려 했었다.
요즘 이 뱀이 더 지혜로워졌다. ‘복’ 또는 ‘은혜’로 위장하고 들어와서 교회를 유린한다. 건강, 부요, 명예, 권세를 주고 그것을 ‘신’으로 섬기게 만든다. 뱀으로 나타나면 쉬 밟아 버릴 수 있지만 우리가 추구하는 것들로 찾아오면 서서히, 아주 서서히 빠져들어 헤어 나오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자연인의 그 군화가 눈에 어른거린다. 아침마다 챙겨 신는 군화, 단지 뱀 때문에 신는 것이라는 그 노총각 아저씨의 경계심이 나의 마음에 이심전심 흐른다. 아침마다 ‘보혈에 적셔진 복음의 신발’을 신고 나서야 되는 이유를 새삼 마음에 새기는 시간이 되었다. <김상학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