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온누리교회의 <5가지 핵심가치>
1. <성경 중심의 교회> 시편19 :7~11, 말씀:박종길 목사님
온누리교회의 공동체를 설명하는 데에 세 가지 개념이 있습니다.
1. 예배 공동체,
2. 성령 공동체,
3. 선교 공동체 입니다.
온누리교인에게 만약 누가 \\"온누리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이상 세 가지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우리는 온누리교회가 중시하는 <다섯 가지의 핵심가치>를 알아보고, 앞으로 5주일 동안 주일 예배시간을 통하여 함께 공부하고자 합니다.
온누리교회가 중시하는 핵심가치 5가지는
1. 성경 중심의 교회,
2. 복음 중심의 교회,
3. 선교 중심의 교회,
4. 긍휼을 베푸는 교회,
5. 예수 그리스도의 문화를 심는 교회 입니다.
오늘은 그 첫 번째 시간으로 <성경 중심의 교회>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고백합니다.
성경이 이 시대를 구원하는 복음을 담고 있는 유일한 책입니다.
첫째, 성경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합니다.
시편 19편 7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케 하고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하며.”(시19:7)
여기서 \\"소성하다\\"는 말은 \\"생기를 준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에게 생기를 줍니다.
창세기에 기록된 대로 하나님께서 흙으로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 넣으셨습니다. 성경은 사람이 흙덩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령으로 움직이고, 생각하며 인격을 갖는 영적 존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1절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태초에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혼돈과 흑암 가운데 \\"빛이 있어라\\"고 말씀하셨고,그 말씀에 따라 어둠은 물러가고 빛이 생겼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으로 질서가 생긴 것입니다.
또 요한복음에는 \\"태초에 말씀이 계시고 그 말씀은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그 말씀은 육신이 되어 친히 이 땅에 오셨으니, 그 분이 곧 예수님입니다.
따라서 성경 말씀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구약은 오실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예언이고, 신약은 오신 메시아 예수님에 대한 성취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에 대한 예표이고 그림자라면, 신약은 예수님에 대한 증거요 역사입니다.
구약은 예수님을 기다린 것이라면, 신약은 오신 예수님의 행적을 소개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의 주인공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요한복음 5장 39절에서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을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성경은 구원의 책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은 우리에게 구원에 대해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 되셔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해 주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예수님을 만나고, 그분을 통해 구원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구원의 길에 이르는 방법은 오직 예수님이십니다.
온누리교회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말씀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시는 예수님에 대한 증거임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는 <성경 중심의 교회>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으로 인해 구원에 이름을 믿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둘째, 성경은 인간의 삶에 뛰어난 통찰력을 줍니다.
시편 19편 7~9절 말씀을 봅시다.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규례는 확실하여 다 의로우니.”(시19 :7~9)
이 말씀에서 성경의 다섯 가지 특징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나,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합니다.
공동 번역 성경에선 하나님의 말씀은 \\"변함이 없다\\"라고 번역하고 있습니다.
진리, 복음, 사랑, 구원, 은혜 등에 대해 항상 일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말씀은 어리석은 사람으로 하여금 지혜롭게 해 줍니다.
둘, 성경 말씀은 정직합니다.
성경말씀은 \\"거짓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기쁨이 됩니다.
거짓말하는 사람은 복잡하지만, 정직한 사람은 복잡하지 않습니다.
정직하기에 단순할 수 있고, 단순하기에 마음으로 기뻐할 수 있습니다.
셋, 하나님의 말씀은 순결합니다.
따라서 어둠을 밝히고 사람의 눈과 마음을 맑게 하고 그 영혼까지 순결하게 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을 읽으면 모든 죄악들을 밝힐 수 있고, 그 죄악을 회개하며 정결하게 합니다.
넷, 성경 말씀은 영원합니다.
다시 말해 성경 말씀을 믿는 자들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게 합니다.
따라서 방황하지 않고 죄악과 함께 하지 않게 됩니다.
다섯, 하나님의 말씀은 의롭습니다.
곧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고, 흔들리지 않게 하며, 의에 이르게 합니다.
그래서 다윗은 시편 119편 105절에서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두운 세상을 사는 사람들에게 등대가 되고 깊은 통찰력을 주십니다.
우리는 인생을 살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게 됩니다.
뜻대로 되지 않는 일들이 너무 많이 있습니다.
따라서 실패를 경험하고 좌절을 겪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나침반이 되어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를 가르쳐 줍니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은 우리에게 교훈을 주고 생명을 줍니다.
디모데후서 3장 16절에 “성경은 전부가 하느님의 계시로 이루어진 책으로서 진리를 가르치고 잘못을 책망하고 허물을 고쳐주고 올바르게 사는 훈련을 시키는 데 유익한 책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님?
삶의 통찰력을 얻길 원하십니까?
어둠, 절망, 고통 중에서 희망을 발견하길 원하십니까?
그러면 성경 말씀을 읽으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빛이 될 뿐 아니라 삶에 통찰력을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에서 지혜를 얻고 길을 찾을 수 있습니다.
셋째, 우리는 성경을 사모하고 사랑해야 합니다.
시편 19편 10절의 말씀을 읽습니다.
“금 곧 많은 정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 :10)_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을 구원으로 인도하고 삶에 통찰력을 주기 때문에 정금보다 더 사모해야 하고, 송이꿀보다 더 달콤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사람들에게 복을 주고 마음에 용서와 평안을 주며 생명의 샘과 같은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언제든지 번복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변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보면 잠이 오고, 말씀의 뜻이 무엇인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을 점점 더 읽지 않게 됩니다.
성경 말씀이 어렵더라도 자주 읽고, 큐티하고, 암송한다면, 어느 새 정금보다, 송이꿀보다 더 영혼을 살찌울 것입니다.
성경은 총 1,189장으로 구성돼 있습니다.
구약 성경이 929장, 신약 성경이 280장입니다.
고로 우리가 평일에 3장씩, 주일에 5장씩을 읽으면 1년 만에 완독할 수 있습니다.
이 시간, 아직도 성경을 한 번도 읽어보지 않은 분이 있다면 꼭 한 번 읽어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경을 읽으면 믿음이 생깁니다.
로마서 10장 17절에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을 때 기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을 갖게 되고 그 믿음은 삶에 적용됩니다.
넷째, 성경 말씀을 믿고 그대로 지킬 때 상이 큽니다.
시편 19편 11절 말씀을 봅니다.
“또 주의 종이 이로 경계를 받고 이를 지킴으로 상이 크니이다.”(시19 :11)
우리는 성경의 말씀을 지키고 그대로 행할 때 큰 상을 받게 됩니다.
성경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지키지 않는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성경 말씀을 몰라서 예수님을 죽인 것은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고 있었지만 말씀대로 행하지 않았습니다.
마태복음 2장에 동방 박사들이 어디서 예수님은 탄생하셨는지에 대해 물었을 때,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베들레헴에서 난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께 경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많이 알아야 합니다.
충분히 읽고 배우며 연구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해야 합니다.
그럴 때 큰 상급이 주어집니다.
온누리교회가 성경 중심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행한다>는 뜻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살겠다>고 결단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뛰어난 지혜와 통찰력을 얻어 항상 승리하는 삶이 되시길 축원합니다.
3. <선교 중심의 교회> 사도행전1 :8, 말씀:조영진 목사님
2002년 월드컵 당시 16강에 올라가는 것이 꿈이였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월드컵 무대에서 1승만 거두어도 <우리의 목표를 다 이루었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4강의 대열까지 갔습니다.
그때 히딩크 감독은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남아 있다>고 얘기 하면서
<나는 아직도 승리에 배가 고프다>고 말했습니다.
그가 말한 <헝그리 정신>이 우리를 4강의 대열까지 가도록 만든 것입니다.
우리는 100년전 우리나라에 선교사가 들어올 때를 회상해 봅니다.
그 때 우리의 삶을 어땠습니까?
그 때 보다도 지금은 훨씬 더 잘 살고 있지만, 우리가 왜 선교를 하지 못합니까?
오늘 우리는 <복음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시간이 되기 바라며, 온누리 교회가 <선교의 사명>을 다 하는교회가 되기위해 몇가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첫째로, 시작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1장 8절을 먼저 보십시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 1:8)
성령님이 우리에게 오시면, 우리는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입니다.
선교는 <예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예수의 증인이 되기 위해 나의 모든 것을 다 해야 합니다.
우리가 배웠기 때문에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아닙니다.
배운것과 아는 것은 다릅니다.
선교는 <예수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전하는 것만 가지고는 <선교를 다 했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시작은 바꿔야 합니다.
그러니까 먼저 우리가운데 <성령의 역사>가 임해야 합니다.
그렇게 돼야 그런 결과가 오는 것입니다.
그럼 <성령이 임했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우리에게 <성령의 다스림>이 있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 말씀의 내용이 <복음>입니다.
그래서 복음도 <성령의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에 <돈을 사랑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람들이 돈을 사랑하면 돈에 다스림을 받아 그 사람의 의사 결정에 영향을 미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이어야 하는데, 돈으로 그 영향을 받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는 무엇으로 <다스림>을 받고 있습니까?
그것은 <성령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그런 <성령의 다스림>이 시작되면, 역사가 달라 집니다.
그래야 내가 변하고, 나를 움직여야 <남이 변하는 것>입니다.
내가 가보지 못한 캄보디아의 땅을 변하게 하려면, 내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다스림>이 있어야 합니다.
IMF가 일어난 직후, 한국에서는 놀라운 일이 벌어 졌습니다.
그것은 금모으기 운동입니다.
우리는 <나라가 힘들다>고 자기의 금덩이를 내놓는 착한 민족입니다.
<내것>을 내 놓으면, <우리의 것>이 됩니다.
그런 일을 결정한 것은 그의 마음속에 <어떤 다스림>이 있어 <내 놓는것>입니다.
이런 <다스림>으로 우리가 변해야 합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나를 움직이는 어떤 힘이 있는데, 그것이 <성령의 다스림>이란 것입니다.
그 <성령의 다스림>이 나로 하여금 \\"나를 변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과정이 바꿔야 합니다.
바꿔야 할 과정이 어떤 과정입니까?
예루살렘에서 유대와 사마리아와 그리고, 땅끝까지 입니다.
우리는 이 과정을 잘 지켜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그냥 <땅끝>으로 가려고 합니다.
그렇게 <땅끝>만 강조하다 보면, 예루살렘을 모르게 되고, 사마리아는 건너뛰어 넘어 가므로 전도가 안됩니다.
물론 <땅끝>이 중요하지만, 가장 먼저 예루살렘에 집중해야 되고, 그 과정에 있는 유대와 사마리아도 건너뛰어 넘으면 <땅끝>의 역사가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이런 것은 우리의 삶 가운데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집안에서 우리는 <영적인 선교사>입니다.
집안에서 잘해야 밖에서도 잘 할수 있는데, 우리는 밖에 나가서만 잘 하려고 합니다.
집안의 일을 건너 뛰고 나면, 밖에 나가서도 잘 할수는 없습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자기 주변을 먼저 챙기기를 원하십니다.
나의 주변, 나의 가정, 나의 일터에서 먼저 선교하고, 그 다음에 <땅끝>을 찾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수살렘은 떠나고 싶은 곳이지만, 누군가는 거기를 품고 지켜야 합니다.
그 예루살렘을 지켜야 <땅끝>의 역사가 살아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루살렘은 우리가 현재 서있는 본거지를 말하는 것이고,
유대는 우리의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고,
사마리아는 우리를 반대하는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으며,
<땅끝>까지는 미전도 종족을 의미합니다.
바로 온누리교회는 이 주어진 <하나님의 사명>을 다하기 위하여 부름받고 있습니다.
세 번째로, 내용(컨텐츠)이 바뀌어야 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그 핵심 내용이 달라져야 합니다.
사도행전 13장에 안디옥교회는 금식하고 기도하면서 “바나바와 바울을 따로 세우라”(행 13:1~3)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1, 2, 3차 전도여행을 떠납니다.
그런 바울의 수고가 있었기에 로마가 변했습니다.
이렇게 로마가 변하여 유럽이 변하기 시작하였고, 또 다시 미국이 변했기 때문에 우리 한국에도 복음이 전해진 것입니다.
그때 미국의 선교사들로 하여금 우리 민족에게 복음을 전해준 역사가 사도행전에서 우리에게 보여준 <하나님의 비젼>입니다.
그러므로 그 핵심 내용이 바뀌어 져야 복음이 전해지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비젼>은 마음에 무엇인가를 품는 것입니다.
마음에 <비젼>을 품어야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 지는 것입니다.
전도와 선교를 마음에 품을 때마다 그리스도의 역사가 변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그 주인공이 되어 보시지 않으시렵니까?
그 주인공은 바로 <당신>입니다.
한 주간도 <주님과 함께> 언제나 같이 하시기 바랍니다.
18.<초대 교회의 변화와 성장>사도행전 2:42~47, 말씀: 이태영 목사님(괌 온누리교회)
우리는 <자신의 마음>을 얼마든지 <내 자신>이 결정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 속에 선하신 <성령님>을 모셨기 때문입니다.
혹시 마귀를 마음 속에 모신 사람은 <마귀가 하라>는 대로 행동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남을 미워하는 <마음>도 <감사>로 바꿀수 있고,
<불행하다>고 생각을 하다가도 <나는 행복하다>고 마음을 바꿀수도 있으며,
<다툼>을 <사랑>으로 바꾸어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내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말씀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 (행2:42)
여기를 보면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성령의 불>이 쏟아 졌어요.
그럼, 초대 교회에 어떤 변화가 일어 났을까요?
첫째,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고 했어요.
초대교회가 성령의 <불>을 받고, 첫 번째로 변화된 것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큰 기사와 표적이 나타났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배경으로 그런 변화가 생긴 겁니다.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는 <가브리엘> 천사가 나타나,
"기뻐하라. 은혜를 입은자여? 주께서 너와 함께 하신다"고 얘기하니까,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또다시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마리아여! 두려워 마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았다.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그는 위대한 인물이 될 것이며, 가장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릴 것이다." 라는 음성을 듣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 모두 <마리아>일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잉태한 <마리아>는 아무렇게나 행동할 수 없는 것입니다.
마리아는 묵상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의 말씀>이 가슴 속에 박히어, 녹아 내리기를 축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살이 되고 육신이 되어, 살아서 움직이고 운동력이 있어서 우리의 마음을 움직입니다.
그러므로 <능력의 원천>은 하나님 말씀에 있습니다.
둘째로, 초대교회에서는 <교제한다>고 했어요.
초대 교회가 변하게 된 원인은 <성도들 간에 교제>가 있었습니다.
이 말씀은 "사랑하는 교회로 변화 되었다"는 말입니다.
코이노니아(Koinonia)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협동>과 <친교>를 나타내는 그리스어에서 유래된 말로써, 초대 교회의 <관계>를 말해주고 있습니다.
이말은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의 <협동>과 <친교 모임>을 의미합니다.
첫째로, 성도들끼리 다양한 차원에서 서로 섬기고,
둘째로,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서로 사랑하고, 어려운 사람에게 연단을 주고, 회복시켜 주고,
셋째로, 이런 활동을 통해서 <영적인 것>을 충족시켜 줍니다.
코이노니아는 물질을 나누고, 봉사하는 것만 뜻하는 것은 아닙니다.
먼저, <함께 나누어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기에서 <받는 것>의 출처는 <하나님>입니다.
우리의 교제의 대상은 첫째로 <하나님과의 교제>입니다.
우리는 그 성령님을 마음속에 품고, 나누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떠나서 생각할수 없습니다.
저는 우리들의 봉사에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봉사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모든 교제는 <하나님 안에서> 이루어 져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코이노니아>는 꼭 물질만이 아니고, <관대함>을 뜻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격>이었으며, 여러분의 <봉사> 가운데 에서도 나타나길 바랍니다.
셋째로 초대교회의 변화에 <떡을 뗀다>고 했어요.
여기에서 떡은 <성만찬>을 의미하고, "예배를 드린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매일 <예배드리는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이 예배는 매일매일 새롭게 의미있는 변화가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교제하며, 예배를 보면서, 새롭게 살아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미움과 분노와 저주는 사라지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찬송과 기쁨이 교회 안에 넘쳐야 합니다.
교회는 바로 이렇게 예배가 살아나야 합니다.
네번째로,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삶 자체가 기도"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이것은 하나님과의 친밀감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입니다.
인간은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 가고, 하나님께선 <말씀과 성령>을 통하여 응답하십니다.
<생각하는 것>과 <기도하는 것>은 다릅니다.
생각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지만, 기도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생각을 하면 인간이 보이고,기도하면 하나님이 보입니다.
생각을 하면 사상을 만들어 내고, 사람을 움직입니다.
그러나 기도를 하면 하나님을 움직입니다.
생각을 하면 남을 비판하고 열등감에 쌓이게 되고, 기도를 하면 다른 사람을 섬기게 됩니다.
생각하면 비교의식과 열등감에 빠지므로,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놀라운 일>들이 나타났습니다.
믿는 사람들은 다 함께 지내고, 서로 나누어 쓰고, 그들을 날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집마다 돌아가며 성찬을 나누고, 기쁜마음으로 식사를 했습니다.
또 마지막으로 47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모든 사람에게 칭찬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구원받는 사람이 날마다 많아지게 하셨습니다(행2:47)
42절~47절의 말씀이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여 한마디로 표시하면, <말씀>과 <교제>, 그리고 <예배>입니다.
또 성경을 두 단어로 요약하면 <예배>와 <사역>입니다.
사역에는 <보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즉,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할 <사역자>는 "본인이 원한다"고 보내는 것이 아니라, <보내심>이 있어야 합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누가 나를 위하여 거기로 갈꼬?" 라고 걱정을 하였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주여 나를 보내주소서!"
우리는 <죄사함>뒤에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어요.
우리가 하나님을 믿고 의지 했다면,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밤새도록 고기 한마리도 잡지 못했는데,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곳에 그물을 던졌습니다.
그랬더니 배 두 척에 가득차도록 <만선의 기쁨>을 누렸습니다.
거기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베드로가 고백하니까,
"이제, 너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리라"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선교의 삶>을 사십시오.
여러분은 <죄사함>을 받았으니, 이제는 <전도자>의 길로 나가십시오!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 이미 <전도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전도의 열매>가 열리고, 우리는 날마다 한 단계씩 업그레이드 된 <삶>을 살어야 합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삶속에서 매일 기븜에 넘쳐 <더해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 초대교회에서 변화된 모습을 보듯이,
우리에게도 날마다 성령님의 경험하는 그런 <열정> 을 맛보시기 바랍니다.
온누리교회의 정체성/ 마태복음 28:18~20/ 사도행전1:8/ 말씀: 하용조 목사님
2010년에 온누리 교회는 창립 25주년을 맞이 했습니다.
그동안 25년이 될 때까지 우리는 무슨 말씀을 붙들고 지금까지 달려 왔을까요?
그것은 마태복음 28장 17~20절의 말씀과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이 두 가지 말씀을 붙잡고 우리는 달려 왔으며, 지금과 같은 훌륭한 교회가 된 것입니다.
저는 제가 몸에 병을 얻어서 연예인 교회를 그만두고, 안식년 도중에 1990년도에 하와이에서 "너는 서울로 돌아가서 교회를 새로 시작해라.“ 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되었어요.
그러나 저는 ”하나님, 서울에는 수 많은 교회들이 있는데, 제가 또 교회를 만들어야 합니까?“라는 의문에, 하나님의 대답은 “그것은 사도행전적인 교회, <바로 그 교회>를 세우라.“는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면, 너희는 권능을 받지만, 너희는 너희 힘으로 못한다.
내가 성령님을 보내줄 테니, 그 능력을 받아서 그 [일]을 하라“ 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이 말씀은 1. 첫째로, 우리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니까 “성령의 권능을 받아서 교회를 만들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권능을 받는 일>이나, <능력을 받는 일>이 중요합니다.
2. 둘째로, 교회를 만들면서 교단이나 교파가 지배하는 교회가 되지 말고, 지방색이 있는 교회를 만들지 말고, 오로지 <성령중심의 교회>를 만들어 <성경적인 교회를 만들자>는 말입니다.
즉, <하나님이 원하시는 교회를 만들자>는 방향과 비전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한 눈 팔지 않고,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을 향해 달려 왔습니다.
제게 주신 이 [비전]은 날이 갈수록 더 깊어지고, 더 새로워지고 더 분명해 집니다.
여러분, [비전]은 몇 달 생각해보다가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비전]은 10년, 20년, 30년의 세월이 가도 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온누리교회는 이 비전을 따라 <선교 중심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우리 교회의 주제는 <사도행전을 실천하는 교회>입니다.
본문 말씀을 통해 이 시대에 열방을 품고, <선교하는 교회>로 세워져야 합니다.
오늘날 선교는 옛날처럼 사람이 직접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젠 위성이나 인터넷, 모바일로 선교하는 시대가 열렸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선교의 방법을 새롭게 업그레이드해서 하나가 되는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그럼, 우리가 25년 동안 붙잡은 말씀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두 가지 말씀>이고, 우리는 그 말씀을 <25년간 마음에 붙잡고 달려> 왔습니다.
1. 첫 번째 말씀은, 마태복음 28장 17~20절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그때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 때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28:18~20)
하나님께서 이 말씀을 우리에게 주셨고, 우리는 교회의 <주춧돌>에 이 말씀을 새겨 놓았습니다.
우리는 아브라함과 같이 “본토 친척의 집을 떠나서, <주님이 부르는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 곳이 어디인지는 몰라도, 주님이 떠나라면 <떠나야>만 합니다. 우리의 무대는 전 세계입니다.
과거에 한국은 보리 고개를 겪었지만, 이제는 한국이 올림픽도하고, 월드컵도 훌륭히 해냈고, G-20 정상회의를 개최하는 나라가 되었어요.
이제 우리의 사고를 바꿔야 해요.
우리가 세계를 품을 수 있는 <글로벌 KOREA>로 한국의 문화를 바꿔야 해요.
우리나라는 잘 삽니다. 이북에 있는 <북한의 위협>도 있지만, 걱정하지 마세요,
우리의 옆에는 제일 가깝게는 일본을 비롯하여, 중국과 인도가 있어요.
바로 그 넓은 중국대륙을 거쳐서, 그 <실크 로드>를 통해서, 유럽으로 복음을 전파하며 뻗어 나가야 해요.
이제 우리는 기존 신자들이 수평 이동하는 것을 떠나서, 안 믿는 사람을 <새 신자>로 만들어 <세례 주는 것>이 중요해요. 우리의 존재 목적은 새 사람을 <전도하는 것>이예요.
[이단]의 특징은 무엇입니까?
[이단]은 예수를 잘 믿는 사람만 골라서 <자기 교인>으로 만드는 일을 합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새 신자를 만드는 일>에 매달려야 합니다.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것이 우리의 [사명]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지난 25년 동안 <이러한 일>에 온 열정을 다 바쳐왔던 거예요.
그러나 이제는 교인수가 많아도, <새 신자가 보이지 않기 때문에> 안타까운 거예요.
처음 온 <새 사람>이, 이런 말을 하면, 알아들을 수 있나요? 알지 못해요.
이것은 부모가 <해산의 고통>을 느끼는 것과 같아요.
신앙의 클라이 맥스는 ① <모르는 곳에 아웃리치를 가서>,
② <모든 민족에게 복음을 나누어 주는 일>입니다.
저는 오래 전에 <사도바울의 발자취>를 따라서 터키 여행을 한 적이 있어요.
사도바울이 전도여행을 한 경로를 따라서, 그 길을 리무진 버스를 타고 갔는데도, 우리는 무척 힘이 들었지만,저는 그 길을 가면서 “그 당시의 사도바울은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니 눈물이 났어요.
사도바울은 한 영혼, 한 영혼이 소중하게 느껴져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산을 넘고 강을 건너 한마을, 한마을씩 전도여행을 계속했을 거예요.
사도바울은 말을 탓거나, 그렇지 않으면 걸어서 이 길을 갔을 것을 생각하며, 많이 울었어요.
그는 그 선교지에서 무슨 일을 했을까요?
아까 읽은 <마태복음의 말씀>을 읽으며, 그 말씀을 붙잡고 전도를 했을 거예요.
2. 두 번째로, 우리가 성경에서 붙잡은 말씀은 <사도행전 1장 8절의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행1:8)
저는 솔직히 온누리교회가 이렇게 성장할 줄 몰랐어요.
제일 크게 놀란 것은 무엇인지 아세요?
저는 젊은 날, 대학교에 다닐 때, 선교사로 나가기로 서원했어요.
그러나 내가 선교사로 나가지 않으니까, 나를 아프게 만들어서 병을 치료하러 일본에 갔는데(국내에서 있으면 사람들이 찾아오니까, 사람들을 피해서 간 곳이 일본입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병을 더 깊게 만들면서 일본에 계속 머물게 하면서, 일본에 파송된 선교사로 일을 하게 만들었어요.
능력 중에서 능력은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에게, <예수를 믿게 만드는 능력>입니다.
그것이 <증인된 삶>입니다.
사람은 ① <자기 능력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② 두 번째로 자기가 아닌 <하나님이 도와 주어야 할 수 있는 일>이 있어요.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곧 바로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세상에 남아 40일간 세상에서 제자들과 남아 있었어요.
왜 그랬을까요?
그것은 제자들에게 <비전을 일깨워주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전도하려면 심방을 자주해야 해요. 사랑을 표현하는데, 안 따라올 사람이 있나요?
그렇게 사랑이 전달되어야 그 영혼이 따라 오는 법이예요.
그래서 예수님이 40일간 세상에서 더 머물고, 그래도 못 믿으니까 <내가 떠나면 성령님이 오실 것이다.>라고 예고 하셨어요.
진정한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하는 예수님의 질문에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으로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대답합니다.
온누리교회는 이러한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부터 시작됩니다.
교회는 <신앙고백을 하는 공동체>입니다.
온누리교회도 예수님에 대한 참된 <신앙고백을 하는 것>으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교회는 점점 세속화되고, 물질화되어, 권력화 되어가면서, 반기독교 세력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우리가 본질로 돌아가 <진정한 교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세상 사람들도 더 이상 우리를 비판하거나 흔들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따라주는 사람이 없이 인도자가 있겠습니까?
모든 교인이 가슴속 깊이 이런 비전을 공유하며 나아갈 때, 이 비전은 살아 있는 유기적 생명체로 성장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는 역할을 감당하게 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이 말하는 것처럼 <건물>이 교회가 아니고,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여러분이 [교회]입니다.
<성령 받은 사람이 교회>이고,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는 사람>이 교회이고, <그런 비전을 가진 사람>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창립 25주년을 맞아 <교회를 시작했던 그때로 돌아가려고> 합니다.
25주년 행사에 모인 모든 성도가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오순절의 <마가의 다락방>에서의 성령체험을 하길 기대합니다.
그리고 <리더십 축제>를 통해 이 세상이 얼마나 더 밝아졌고, 더 정의로워졌고, 더 건강해졌는가를 보여줄 수 있길 바랍니다.
선교축제에서는 선교사님들의 헌신과 눈물과 간증이 우리 마음속에 녹아지길 바랍니다.
이제, 온누리 교회 교인은 모두 <선교사>입니다.
내년부터는 1년에 한 번 이상 모든 교역자와 성도가 <아웃리치> 현장에 나가서, 선교사들처럼 <눈물의 씨앗>을 뿌리는 성도들이 되길 소망합니다.
이제 온누리 교회가 전 세계를 누비며 걸어 다니는 선교사, 순회하는 선교사가 되어서, <하나님의 마음>을 갖게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의 본질, ①예배공동체/ 미가 6:6~8/ 말씀: 윤길중 목사님
오늘부터 3주간동안 <교회의 본질>에 대하여 ①예배공동체 ②성령공동체 ③선교공동체의 순서로 3번으로 나누어 씨리즈로 말씀드리겠습니다.
1. 첫째로, 우리는 <예배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가 되시고, 우리는 그 지체인 [몸]입니다.
우리 [몸]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심장이듯이, <예배>는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예배가 살아야 교회가 산다"는 말이 있듯이, <예배>가 살아나야 교회가 살아 납니다.
2. 두 번째로, 우리는 <성령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성령님이 예배에 기름 부으심과 은혜를 부어 주심으로 우리에게 역동성을 주십니다.
성령의 역사가 없는 <예배>는 마치 최고급 승용차가 고속도로에서 연료가 없어서 달리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3. 이와 같이 예배와 성령의 역사는 <선교>로 이어지는데, 이것을 우리들은 <선교공동체>로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대전 온누리 교회는 [큰大 + 비전 전]을 합하여 <큰 비젼>을 가진 교회로 성장할 것이고,
①예배공동체, ②성령공동체, ⑤선교공동체로써 주님의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사명을 가지고,
<아웃리치 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오늘은 첫 번째 시간으로, [예배공동체]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온누리교회에 오신 분들 중 많은 분들이 “예배가 좋다”는 말씀을 많이 하십니다.
그것은 “예배를 통해 갈급한 심령이 채워지고, 예배를 통해서 회복을 경험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하나님의 <은총의 수단>이며 <축복의 통로>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배드림>에 있어서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1) 사람들은 “예배가 좋다”는 말을 할 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나 자신이 평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가 아무리 좋은 음악과 악기를 동원하고 “성가대가 찬양을 잘한다“고 해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100% 영광을 돌렸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만이 예배의 <무한중심>이시기 때문입니다.
2) 우리들은 “예배를 보러 간다“는 말을 자주 합니다.
이 말은 ”장을 보러 간다“라는 말과 같이, <행위>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말입니다.
우리 인간은 예배를 보는 <행위>를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의 유일한 대상은 하나님 <한 분> 뿐이시기 때문입니다.
예배에는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자칫하면 하나님이 예배의 중심이 되지 못하고, 관객으로 전락할 수도 있습니다.
3) 또 “우리가 예배에 은혜를 받았습니다“라는 말을 하지만, 조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가 마치 우리를 만족시키는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닙니다. 예배는 철저히 <하나님>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아름다운 찬양과 기도를 드린다“고 해도, <하나님>을 만족시킬 수 있는 예배란 없습니다.
우리가 아무리 멋지게 예배를 드려도, 언제나 모자랍니다.
예배는 <희생의 제사>를 드리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나의 가치>를 전부 다 드려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예배 공동체>의 모습은 어떠해야 합니까? 그 기준은 어디에 있습니까?
오늘 <미가서>에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하나님의 기준>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예배를 드려야 할 지 예언자들을 통해, 잘 말씀해 주십니다.
미가서는 <질문과 대답>이라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미가서 6장 6절을 보십시오.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을 가지고 나아갈까? 1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분께 나아갈까?(미6:6)
6절에서 내가 무엇을 해야 “하나님께서 만족해 하실까?“라는 질문입니다.
1. 첫 번째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릴 때는 반드시 <희생 제물>을 가지고 나아가야 합니다.
<번제물>은 나 대신, 나의 죄를 태워드리는 제물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에서 제일 좋은, 가장 귀한 제물을 바쳐야 합니다.
여기에서 <1년 된 송아지>란 아주 귀하고, 최고로 좋은 상품을 뜻합니다.
7절에도 <희생제물>에 대해 계속 언급하고 있습니다.
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께서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수만의 강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가 내 악행을 벗기 위해 내 맏아들을 드리고 내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미6:7)
수천 마리의 숫양이나, 수만 마리의 강물처럼 흐르는 기름을 드려야 합니까?
심지어는 “내 허물과 내 영혼의 죄를 위해 내 몸의 열매인 맏아들을 바칠까요?“ 라고 묻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신제사>를 엄격히 금지하고 계십니다.
2. 두 번째로, 우리가 예배할 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이런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피로 의롭게 해주신 <은혜>만이 필요한 것입니다.
한자로 옳을[의]자를 표현할 때, 의(義) = 양(羊)과 나아(我)자의 합성어 입니다.
이 말은 무슨 의미입니까?
내가 의롭게 되기 위해서는 어린 양, “예수님의 [피 흘림]이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예배의 감동>을 잃어버리고, 그저 <형식>만을 좇게 된 겁니다.
그러나 그 <형식> 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을 드려야 합니다.
[번제물]의 진짜 의미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① <나를 대신해서 짐승이 타는 것>을 의미합니다. ② 나의 모든 [죄]를 태우는 것이죠. ③ 나의 자아가 죽는 것이고, ④ 나의 옛 본성은 죽여 버리고, “예수님의 성품을 주십시오“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예배에는 <회복>과 축복 이전에 <회개>가 필요합니다.
[헌금]도 내게 주신 모든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① 헌금은 내 것을 드리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주신 것 중에서 <내게 주신 것>에 감사하여 일부를 되돌려 드리는 겁니다. ② 그때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우리의 삶도 함께 모두 드리는 <헌신의 의미>가 담겨야 합니다. ③ 헌금의 액수보다도 <드리려는 마음>이 더 중요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성경에 있는 예배를 정리하여 보면 다음과 같이 3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1. 첫째로, 예배는 <영혼의 양식을 먹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6:35)
<예배>는 차려놓은 것을 먹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배는 <영적뷔페>라는 말이 있듯이, 우리는 예배할 때 <영혼의 만족>을 얻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음식을 주셨으므로 우리는 감사하게 생각하고, 맛있게 먹어야 합니다.
그래서 말씀은 <듣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일 예배는 <축제>가 되어야 합니다.
주부님들은 주일이 되면, 일부러라도 자녀들에게 맛있는 음식을 마련해 주세요.
그런 이유는 맛있는 것을 먹은 사람은 주일이 기다려질 겁니다. <먹는 것>이 축복입니다.
1987년에 상영된 덴마크 영화 <바베트의 만찬>을 소개합니다.
청교도 신앙을 가진 작은 마을 이야기인데, 프랑스혁명을 피해 온 <바베트>라는 여자가 가정부로 들어 옵니다. 그러다 어느 날 마침내 바베트는 복권에 당첨됩니다.
그래서 그는 마을사람들을 위해 한 끼의 식사를 제공하려고 마음 먹었어요.
왜냐하면 바베트는 프랑스 최고 식당 수석 요리사였기 때문입니다.
작은 방에 12명이 앉아 식사를 했는데, 그런데 먹는 사람들의 표정이 영 이상합니다.
맛은 세상에서 최고급 인데, 표정은 굳어져 있었어요.
이 영화는 무엇을 얘기하고 있습니까?
이것은 “요즘 <현대인의 교회>에 나타나는 <예배의 모습>과 비슷해요..
화려한 음향 시스템과 좋은 찬양 팀이 있지만, <그것을 충분히 누리지는 못하는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바베트의 만찬>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베푸는 은혜>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이 여기에서 소개하는 “청교도들과 같다“고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렇게 <최상급의 만찬>을 베풀어도 맛을 느끼지 못하는 청교도들이 <여러분들>입니다.
이것은 “예배에 은혜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감각이 무뎌졌다“는 것입니다.
<성령의 감동>이 있어야 말씀이 들리는 법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을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2) 두 번째로, 예배는 <만남>입니다. 그것도 <하나님과의 만남>을 말합니다..
중요한 분, 높은 분일수록 <만나는 시간>이 짧지만, 그 영향력은 매우 큽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우리의 인생이 바뀌어 삶이 바뀔 수 있습니다.
그런 <만남의 통로>가 바로 [예배]입니다.
시편 34편 8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 그에게 피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34:8)
이 말을 하나님이 예배를 통해서 우리에게 <예배의 맛>을 알게 해 주십니다.
3) 세 번째로, 예배는 <교제>입니다.
<성도의 교제>는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줍니다.
우리는 <한 가족>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교회>는 나무껍질과 같아서 겉은 무척 딱딱하지만, 속에 있는 나무를 보호해 줍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각 지체로 구성된 나무들인 성도들을 보호해 줍니다.
<교제>란 분위기를 좋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교제에 <주님의 임재>가 언제나 나타나길 바랍니다.
예배 공동체는 <사랑의 나눔>을 나누는 공동체가 되시기 바랍니다.
성도끼리 만날 때에 교제를 통해 <회복>되고, 따뜻한 <사랑>을 느끼시기 바랍니다.
4) 네 번째로, 예배는 <기억>이 나야 합니다.
“기억을 못한다”는 것은 <단절>을 의미합니다.
오래 전 친구가 “지금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추억이 단절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혜를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은 ”내가 하나님과 분리되었다”는 뜻입니다.
예배에서 나를 위해 죽임을 당하신 예수님을 기억하는 은혜가 얼마나 놀랍습니까?
예배는 무엇입니까?
그런 감동적인 예배를 느낄 수 있어야 하고, 그런 예배가 기억이 나야 하고,
그런 예배에 우리는 민감하게 반응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예배의 정의>는 무엇입니까?
진짜 예배는 <생명>이 살아 있는 예배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진짜 예배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참다운 예배>가 되어야 합니다.
8절을 보십시오.
“오 사람아, 무엇이 좋은지 이미 그분께서 네게 말씀하셨다. 여호와께서 네게 원하시는 것은
<공의>에 맞게 행동하고, <긍휼>을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다”
(미6:8)
8절에서 배우는 것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무엇입니까?
1) 첫 번째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공의에 맞게 행동하라“고 했어요.
[공의]에 대한 어원은 무엇입니까?
[공의]는 <공정하게 행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삶] 속에서 드리는 예배가 포함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공의가 없는 것>은 무엇입니까?
①도덕성 없는 상업, ②노동 없는 부(땀 흘리지 않고 축적된 부) ③인간성 없는 과학(과학은 있으나 과학주의는 곤란합니다) ④양심 없는 쾌락 (내가 내 돈 가지고 먹고 노는데, 누가 뭐라고 하나?)
⑤ 희생 없는 신앙등을 얘기합니다.
2) 두 번째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긍휼>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사랑>이라는 말을 좀 쉽게 풀자면 <돕는 마음>입니다.
사랑하면, <돕고자 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사랑하는 마음을 가지면, <긍휼한 마음>이 생깁니다.
긍휼에는 언제나 행동이 수반되는 게 진짜 <긍휼>입니다.
그래서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사랑은 언제나 <행동이 따라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면, <행동을 하지 말라>고 해도, 행동하게 되어 있어요.
<love in action>과 같이, 사랑은 <행동이 따르는 반응>입니다.
3) 세 번째로,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은 <겸손>입니다.
<겸손>은 무엇입니까?
<겸손>은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입니다.
<겸손>은 “우리가 피조물인 인간이다:“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겸손>은 “창조주 하나님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깨닫고,
한없이 높으신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공의, 긍휼, 겸손함],
이 3 가지가 <하나님이 원하는 것>이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고대 의대 91학번. <젊은 의사 안수형>을 소개합니다.
<그 청년 바보 의사>라는 책에서 그는 예수님과 똑같은 33세의 나이로 천국에 갔습니다.
그는 유명한 대학병원에서 근무하는 명망가이거나, 의료계의 권위자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를 사람들이 그리워 한다“는 것입니다.
그를 그리워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인데, 제일 많이 꼽는 것은 “그가 <참> 의사였다”는 것입니다.
그의 장례식장에는 사람들이 물밀듯이 밀려왔습니다.
거기에는 의사, 간호사, 병원직원들, 교회 선후배들, 대학부 제자들, 군인들, 병원 청소하시는 분, 식당 아줌마, 침대미는 도우미, 매점 앞에서 구두 닦는 분....
구두 닦는 분은 자신에게 항상 허리를 굽혀 공손하게 인사하는 의사는 “그 청년이 평생 처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는 삶으로 <예배를 표현하신 분>입니다.
삶이 예배가 된 그는 <아름다운 삶>을 사신 분입니다.
마지막으로 저는 오늘, 진짜 “생명으로 나타나는 예배가 무엇인가?“를 소개하고 싶습니다.
제가 온누리교회에 와서, 느꼈던, <삶으로 드리는 예배>의 실제 예를 몇 가지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1. 온누리교회에 오면, 예배에서 <생명의 기운을 느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배가 감동이 된 것이 아니라, 예배에 <기름부어 주심>이 나타나,
온누리교회의 예배 안에 살아서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교회의 마당에 발을 대는 순간부터 행복하고, “교회의 쓰레기 통만 보아도 은혜가 된다“는 말이 있어요. 이 말은 ”교회의 공간 가운데에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어떤 분들은 “성전 문을 들어설 때부터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는 분도 있어요.
3. “우리는 예수 안에 한가족 이라”는 노래를 불러 주면, 눈물을 모두 흘립니다.
새 신자는 물론이고, 기존 성도님들도 눈물을 흘립니다.
4. 매월 한 달에 한 번 드리는 <성찬식>에도 감동이 있어요.
하목사님과 함께 잔을 들고 노래 부를 때에, 눈물을 흘리지 않는 분들은 온누리 교인이 덜된 분입니다.
5. 성가대에서 기타 한 대로 찬양하는데, “예수 사랑해요“라는 노래를 10번 이상, 반복해서 부를 때에, <하나님의 임재>로 충만해 지는 느낌을 받습니다.
이런 때에 모든 성도들이 <예배 가운데로> 빠져 들어가는 감동을 느낍니다.
그 때 많은 감동이 있고, <눈물 바다>가 되는 것입니다.
5. 경배와 찬양 6주년 예배 때, 한동안 <숨이 멈추는 경험>을 했어요.
하 목사님이 설교하고, 하 스데반 선교사가 찬양 인도할 때에 <성령세례>가 강력하게 역사하는 감격을 누렸고요.
6. 저도 전통교회에서 예배를 드릴 때에 대부분을 졸았었는데, 여기 와서는 졸아본 적이 없었어요. 놀라운 사실은 <말씀이 들려오는 것>을 느꼈어요.
[말씀]이 나에게 씨앗이 되어, 다시 <살아나는 경험>을 했어요.
말씀을 들으며 너무나 은혜로워서, 주일 날 나를 감동시킬 하 목사님의 설교가 기다려져서 밤잠을 설친 적도 있었어요.
토요일이 되면, "목사님이 내일은 무슨 말씀으로 나를 감동시킬까?“를 염려하면서 기다렸어요.
여러분, "<말씀>이 들리십니까?“
제가 온누리교회의 대학 시절부터 느꼈던 <예배의 감동>을 여러분들도 느끼시기 바랍니다.
[예배]가 <삶>이 되고, [삶]이 <예배>가 되는 축복 속에 사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예배드릴 때에 나타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입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그런 <축복된 예배>를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교회의 본질, ②성령 공동체/ 행 2:42~47, 말씀: 윤길중 목사님
지난 주에 우리는 <교회의 본질>중에서 첫 번째 시간으로 <예배 공동체>에 대해 나누었습니다.
우리들은 예배하기 위해 세상으로 부터 <부름>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예배하기 위해 우리는 <교회>에 모였습니다.
교회는 세상에서 부름을 받은 우리들을 한자리로 모이게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왜 모였을까요?
그것은 <하나님에게 예배드리기 위해서> 모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예배하지 않으면, 다른 것에 관심을 기울이고 다른 것을 예배하게 됩니다.
[예배]는 무엇입니까?
1. 첫째, 예배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과 만나는 시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에게 예배할 때에 힘을 얻고, 능력을 얻습니다.
2. 둘째, 예배는 <교회의 심장이기 때문에> 예배가 살아나야 교회도 삽니다.
그러나 예배가 죽으면 <생명의 역동성>도 끝나므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예배의 감동이 없으면 그런 교회에는 사람들이 모이지 않습니다.
3.셋째, 예배를 잃어버린 성도님들은 <삶의 활력을 잃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예배를 회복해야 우리의 삶에도 은혜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난 주에 나누었던 교회 공동체의 본질인 <예배공동체>에 대한 요약입니다.
오늘은 그 두 번째 시간으로 <성령 공동체>에 대해 말씀 드리겠습니다.
[성령]은 무엇입니까?
[성령]은 <하나님의 영>으로 불리 우는 <살리는 영>입니다.
[성령]은 <하나님의 신>으로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에 절반 이상이 성령에 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성령님>으로 다시 오셨습니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누가>입니다.
<누가>는 누가복음과 사도행전을 같이 썼습니다.
<누가복음>은 예수님이 살아 계시는 동안 육체를 통한 하나님의 행적을 기록한 것 이라면,
<사도행전>은 예수님이 천상에서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 내용을 기록한 복음서”입니다.
그러니까 사도행전은 <성령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그래서 “기도하면서 기록했다”고 해서 <기도행전>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교회는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교회는 <베드로의 고백>에서부터 시작 되었어요.
교회는 <성령이 임하는 곳>에 교회가 세워졌습니다.
[성령]이 <교회 공동체>에 부어지니까, 그때부터 교회가 생겨났어요.
성령이 임하니까, 교회가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한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니까, 그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공동체>가 새로 탄생한 것입니다.
교회는 “베드로의 <믿음의 고백>위에 세워졌다“고 했는데, 그 근거는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16장 15~16절을 보십시오. “너희는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라고 예수님이 묻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라고 대답을 했습니다.“(마16:15~16)
이 <베드로의 고백>은 베드로 자신도 상상을 하지 못한 말인데, 얼떨결에 대답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베드로의 고백에서부터 교회는 시작 되었어요.
그러니까 성령이 임하는 곳에 <교회>가 세워집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것이니, 음부의 권세가 이것을 이기지 못하리라“
(마16:18)
그럼, 지금부터 <성령 공동체의 모습>을 살펴 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여 승천 하시면서 “<성령님>을 보내주겠다“는 약속을 하셨습니다.
사도행전 1장 4~5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그들과 함께 모였을 때 예수께서 이렇게 명령
하셨습니다.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너희가 내게 들은 대로 내 아버지가 약속하신 선물을 기다리라.
요한을 물로 세례를 주었지만, 너희는 몇 일 안에 성령으로 세례를 받을 것이다“(행1:4~5)
예수님이 승천하고, 10일이 지난 후에, <마가의 다락방>에 찾아 오셨어요.
오순절은 정확히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50일째 되는 날에 <성령이 그곳에 임한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예수님이 승천할 때 부활을 본 사람들은 500명인데, 실제로 마가의
다락방에 모인 성도들은 120명 만이 성령세례를 받았어요.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군중과 제자>는 어떤 차이가 있습니까?
“말씀을 듣고 순종하느냐? 그렇지 않느냐?“ 의 차이입니다
<군중>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실천하지 않은 사람들이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 말씀을 정확하게 실천한 사람들입니다.
그 날, 그 자리에 성령이 임하니까, 완전히 <새로운 공동체>로 탄생한 거예요.
아이가 임신 하였을 때에 그 아이는 어떤 아이인지 전혀 몰랐으나, 새 생명이 태어나 보니까
그 실체가 드러난 것입니다.
교회가 어떤 모습인지 잘 몰랐지만, 성령이 임하니까 교회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났어요.
성령 강림 후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교회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1. 첫째로, 교회는 <말씀의 공동체>입니다.
교회의 모든 일들 중에서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전통과 관습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 가장 우선시 되어야 하는 것이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인 사도행전 2장 42절을 보십시오.
“그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교제하며, 떡을 떼는 것과 기도하는 일에 전념했습니다.(행2:42)
우리는 말씀을 통해 <복음>을 배워야 합니다.
교회는 구원에 대한 진리가 우선 되어야지, 우리의 지성을 늘리는 곳이 아닙니다.
[말씀]은 <정통성>이 있어야 하고, 사도들에게 배워야 합니다.
[말씀]은 예수님에 대한 말씀 이어야하고, <구원에 대한 원리>를 확실히 전해 주어야 합니다.
[교회]는 구별된 곳입니다.
[교회]는 선택되어 뽑힌 사람들 중에서, <은혜 받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교회]는 선택받아 <부름 받은 사람>들입니다.
이런 비밀을 알고, 예배를 드려야, <예배의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온누리 교회의 성도님들은 금년 한해에 반드시 <일대일 교육>을 두 사람 이상 연결하시고,
큐티를 매일 매일 생활화 하십시오.
그리고 성경공부는 교회에서 허락하는 모임에 참석하시고, 교회가 인정하는 리더십에게 받으십시오.
이단들의 특징은 교회 밖에서 “성경공부를 하자“고 유인합니다.
그런 사이비 집단과 성경공부를 하면, <이단의 공격>에 제대로 방어 할 수 없습니다.
2. 둘째로, 교회는 <교제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온누리교회의 표어 중에서 “가르치던지, 배우던지”라는 말이 있습니다.
성도님들은 교회에 와서 “모르면 배우고, 배웠으면 가르치십시오”.
그러나 내가 가르치다 보면, 배울 때보다 훨씬 더 은혜를 받습니다.
교회를 한자로 쓸 때 가르칠 교(敎) 자를 써서, <교회(敎會)는 가르치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러나 교제(交際)의 교(交)자는 <사귈 교>자를 써서 <사귀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예수 안에서> 서로 연결 되어있는 공동체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예수 안에서> 교제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혼자가 아닙니다.
교회 공동체 안에 있을 때에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느끼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동호회와 멤버십이 <교회 공동체>와 다른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쾌락과 정서적인 충족만을 추구하기 위해 모이지만,
교회는 <예배>하기 위해 모이고, “예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모인다”는 것이 차이입니다.
교회에서 “교제를 나눈다“는 의미의 <사귐>에는 분명한 목적이 있어야 합니다.
교회에서 먹는 것만 목적으로 모이면 허무해 지고, 불안 합니다.
교제에는 <음식과 말씀과 기도>가 분명히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모이면, 우선 <영적인 공동체>로서 <영의 양식>을 먼저 나누고 나서,
그 후에 음식도 먹고, 인간적인 교제도 나누어야 합니다.
그래서 42절의 말씀과 같이 초대 교회에도 “①가르침을 받고, ②교제하며, ③떡을 떼는 것과 ④기도하는 일에 전념했다”고 기록되어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교제하며 떡을 뗀다”는 것은 <식사를 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교제에는 반드시 <예수님>이 그 중심에 있어야 합니다.
3. 세 번째로, 교회는 <기도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먼저 초대 교회에는 ① 말씀이 있었고 ② 교제를 나누고 ③ 기도하는 공동체 였습니다.
여기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자신을 위한 기도를 뛰어 넘어야 합니다.
<자신을 위한 기도> 보다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기도해야 하고, 특별히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해야 하는 것과 같이, 지경을 넓혀 나가야 합니다.
우리들이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중보기도>를 해 줄 때에 능력이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의 예로써 수능 당일 날, <순 식구>들이 같이 와서, 그 옆에서 기도해 주어야 합니다.
그것은 마귀가 24시간 역사하기 때문에, 우리들도 24시간 깨어서 기도해야 마귀를 이길 수 있어요.
4. 네 번째로, 교회는 <기적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3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움이 임했는데, 사도들을 통하여 기사들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행2:43)
성령이 임하면, <영적 권위>가 생깁니다.
<영적 리더십>은 자리나 위치가 아니라, 그 <권위>로 세상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 권위는 하나님이 부어 주시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나타나야 하고,
그 권위는 [거룩함]이 능력인 것입니다.
<거룩한 권위>는 위로부터 부어 주시는 <성령의 충만함>에서 부터 오는 것입니다.
성령이 임하면 <경외심>이 나타 납니다.
성령이 임하면 기사와 표적으로 나타 납니다.
사도행전 3장 6절을 보십시오.
“베드로는 그에게 은과 금은 내게 없지만, 내가 가진 것을 너에게 준다”(행3:6)고 말씀했듯이, <영적 리더>는 그런 권위가 있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씀한 바와 같이, 그 <영적 권위>는 그대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영적 리더의 권위>는 [성령 충만함]이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의 비극은 은과 금이 있지만, <예수그리스도의 이름>에 권세가 없으므로, 영적 권위에 대한 도전을 받는 것입니다.
5. 다섯 번째는, 교회는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4~45절을 보십시오. “믿는 사람들이 모두 함께 모여, 모든 물건을 함께 쓰며, 재산과 소유물을 팔아 각 사람에게 필요한 대로 나누어 주었습니다.(행2:44~45)
여기서 “재산과 소유물을 팔았다”는 것은 돈과 물질을 팔아서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주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에 성령 받은 사람들은 <남을 돌아보고, 도와줄 마음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들은 가족과 지역을 뛰어 넘어서서, <지평을 넓히는 사람>입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인생 뿐 만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살리기 위해, 나의 人生을 드리고자 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필요를 채워준다>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 교회의 <모든 봉사자들이 이런 마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저는 여러분들에게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욕망>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예배>도 마찬가지입니다.
나의 간절한 마음에 따라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달라 집니다.
요즘 세상은 <자기에게>만 관심이 있어요. 그래서 우리의 모습은 추한 것으로 변했어요.
교회가 비전을 잃어버렸을 때, <이기적인 집단>이 됩니다.
모든 예배의 초점은 주님께 영광을 돌리고, 사람들을 살리는데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태도>를 보십니다.
하나의 예로써, 순에서 상을 당했을 때에 가족보다 순장이 먼저 달려가고, 병원에 입원 하였을 때에 특별히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옆에서 손만 잡아주고 있어도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노인병원에 계신 분들의 말에 의하면, 본인에게는 특별한 은사가 없어도 “옆에서 <말벗>만 되어 주거나, 손만 잡고 있어도 언제나 감동이 된다“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나이가 드신 어르신들은 <사랑이 그립기> 때문입니다.
우리들도 공동체로 부름을 받았으니까, 여러분들의 은사에 따라 <서로의 필요를 채워주는 일>들을 잘 활용하여 사시기 바랍니다.
6. 여섯 번째로, 교회는 <성전 중심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6절을 보십시오. “날마다 성전에서 한마음으로 모이기를 힘쓰고, 집집마다 떡을 떼면서,
기쁨과 순수한 마음으로 음식을 나누어 먹었습니다.(행2:46)
초대 교회에서는 <모이기를 힘썼다>고 했어요.
사람들은 교회가 좋으면, 모이기 시작합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자주 교회에 오고 싶고, 성령받은 교회는 서로 모이기를 좋아하고, 성령이 떠난 사람들은 교회에 오기 싫어합니다.
그러므로 <교회 중심의 삶> = <성전 중심의 생활>을 생활화하고, <습관화>하시기 바랍니다.
7. 마지막으로, 교회는 하나님을 기쁘게 찬양하고, <주변사람들에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47절을 보십시오. “그리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받아, 주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사람들을 더 하게 하셨습니다.” (행2:47)
초대 교회 사람들은 <하나님을 찬양하고>,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공동체>가 되었습니다.
여기서 “찬양한다”는 것은 그 자체가 “기쁨의 영성을 가졌다”는 것 이므로, 이런 <기쁨의 영성>을 가지고 사시기 바랍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쳐다보면서 <교회 나올 수 있는 마음>이 생기기 바랍니다.
교인들의 태도를 보면서, 이 교회에 등록할 마음이 생기도록, <기쁨의 영성>을 나타내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예수님 보고 오는 것이지, 사람을 보고 옵니까?”라고 질문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대답은 “예수님도 보고 오지만, 사람도 보고 옵니다.”
그만큼 <우리들의 태도도 중요하다>는 것이므로, 우리의 태도에도 신경을 써야 합니다.
<성령의 공동체>는 날마다 구원받는 사람을 더하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람들을 우리에게 보내 주십니다.
우리들은 그런 분들이 잘 정착 할 수 있도록 성심 성의껏 돌봐주고 인도해야 합니다.
금년 한 해 동안 기쁨으로 예배하는 <성령 공동체>가 되시기 기원합니다.
교회의 본질-③선교공동체/ 행1:8/ 말씀: 윤길중 목사님
뉴질란드에 날지 못하는 조류, <키위 새>가 있습니다.
<키위>라는 이름은 마오리어로 수컷의 날카로운 울음소리를 지칭하지만, <키위 새>는 날개의 흔적이 깃털 안에 숨어 있어서 창공을 나를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먹을 것이 풍부하여, 뒤뚱 뒤뚱 걷다보니 새의 본질인 <나르는 것>을 잊어버린 것입니다.
혹시 우리들도 <키위 새>와 같이, 교회의 본질을 잊어버린 사람들은 없으십니까?
우리들은 <교회의 본질>에 대해서 공부하고 있습니다.
① 첫 번째 시간에는, 교회는 <예배공동체>로 모입니다.
우리는 예배드리기 위해 <부름>을 받습니다.
우리가 예배를 드릴 때에 관객은 <하나님>뿐입니다.
그 <하나님> 만이 유일하게 우리가 드리는 <예배를 받으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를 드릴 때에 이 자리에 <성령님>이 함께 하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히 나타나는 예배를 드리게 됩니다.
② 두 번째 시간에는, 교회는 <성령공동체>로 모입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성령님이 오셔서, 우리를 성령 충만하게 만들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성령의 기름 부으심과 성령 충만함을 자신이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성령님의 인도하심으로 기도 하고 싶은 생각을 하고, 말씀을 듣고 싶어 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자기의 유익과 필요를 뛰어 넘어서 [땅 끝]까지 가서, 헌신합니다.
③ 오늘은 그 세 번째 시간으로 <선교공동체>에 대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들은 [선교]라는 말만 들으면 마음을 닫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나를 부르시지 않을까?“라는 두려움에서 그런 마음이 드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교공동체>로 부르셨습니다. 오늘의 본문인 사도행전 1장 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하시고, 40일 동안 제자들과 같이 있다가 승천하시고, 10일 후에 성령을 부어 주신 오순절 날에 제자들에게 마지막으로 예수님이 지상에서 당부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선교 공동체>의 특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1. 첫 번째, “선교공동체는 위대한 사명이 있다”는 것입니다.
<위대한 사명>은 공동체의 비전과 꿈입니다.
성령을 받은 공동체는 꿈과 비전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공동체이건 <꿈과 비전이 없으면> 소멸되게 됩니다.
잠언 4장 18절을 보면 “묵시가 없으면 백성들은 망하나, 율법을 지키는 사람은 복이 있다.”(잠 29:18)
“계시가 없으면 백성들은 망한다“고 했어요.
하나님의 계시가 없으면, 성장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망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계시가 없는 비전은 그냥 바라보는 것이 아니고, 결국은 망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통찰력이 있는 메시지를 보는 것은 반드시 비전을 갖도록 만들기 때문입니다.
저는 온누리교회에 와서 <비전>이란 단어를 처음 들으면서, 온 몸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비전>은 보이지 않는 저편에 있는 <미지의 세계>를 바라 볼 수 있는 [안목]을 말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바라볼 수 있는 <비전>을 갖기를 소망합니다.
예수님의 비전은 3가지입니다.
① 십자가를 지는 일
② 교회 세우는 일
③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한 [일]은 무엇입니까?
①십자가를 지시고, ②베드로의 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는 일과, ③아직 완성 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자“는 [꿈]을 갖고 계셨습니다.
그런 꿈을 <성령공동체>를 통하여, 예수님은 <비전을 이루어 가려고> 하셨습니다.
온누리교회의 비전을 아십니까?---> 그것은 [Acts 29]입니다.
[Acts 29]의 비전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사도행전적인 비전을 갖고, 나가자”는 것입니다.
1987년에 온누리교회를 세우면서 건물의 [머릿돌]에 <우리들의 마음>을 새겼습니다.
그것은 마태복음 끝에 나오는 28장 19~20절에 기록된 말씀입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그들에게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을 것이다.”(마 28:19-20)
거기에는, 서빙고 성전의 머릿돌에 <1987년 10월. 하용조목사 드림>이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온누리교회 교역자 일동>이라고 쓰여 있지 않습니다.
거기에는, [온누리 교회 성도 일동]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저는 처음에 이걸 보면서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교회에 주신 [비전]은 한 목회자에게 주신 [꿈]이 아니라, 온누리교회 온 성도들에게 주신 [꿈]입니다.
여러분이 선택해서 온누리교회에 오신 것 같아도 그건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여러분을 온누리교회로 부르시고, 인도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온누리교회 성도들에게 [Acts 29]의 비전을 주셨고, 그 [꿈]을 여러 성도님들과 함께 이루고자 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인도하여 <선교공동체>를 만드셨고, 우리 온누리교회 성도님들은 그 사명을 완수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여기에 왔다“고 생각하지만, 그건 <우연>이 아닙니다.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입니다.
[Acts 29]는 <흩어지자>는 사명입니다.
[Acts 29]는 <흩어져서 복음을 전하자>는 온누리교회 [비전]입니다.
[Acts 29]는 <사도행전>이라는 말이지만, Acts 29는 “우리가 쓰자”는 운동입니다.
사도행전은 28장으로 끝났지만, 우리 온누리교회가 <선교공동체>의 사명을 다하기 위해
“사도행전 29장을 우리 손으로 써 나가자”는 것입니다.
우리가 교회에 모여서 무엇을 얻고자 합니까?
요한복음 10장 10절을 보십시오. “도둑은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온다. 그러나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되 더욱 풍성하게 얻게 하려는 것이다.(요 10:10)”
도둑이 오는 것은 훔치고, 죽이지만,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하게 얻게 한다>고 하셨어요.
<교회의 본질>은 이러한 “생명이 풍성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꿈을 실현하는 곳입니다.
그렇게 하면 “더욱 더 풍성하게 얻게 된다.”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을 다시 음미하면서 읽어 보십시오.
사도행전 1장 8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너희에게 오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될 것이다.” (행 1:8)
<새 번역 우리말 성경>에는 첫 번째로 나오는 단어가 <그러나>입니다.
그러나 <개역 개정판 성경>에는 <오직>이라는 말로 쓰여 있습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에 나오는 <오직>은 <그러나>라는 말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나]의 공동체”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러나]와 같이, <반전이 기대되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기 전과 믿은 이후의 삶은 완전히 달라져야 합니다.
내가 예수를 믿고 나서도, <성장하지 않는 분>이 계시다면, 그 분은 곤란 합니다.
교회는 “[그러나]의 공동체”입니다.
사람들이 예측하기 쉬운 공동체가 아니고, 반전이 있는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세상은 대세를 따르지만, 믿음의 공동체는 <그러나>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 받고도 <여전히> 변하지 않고, <어제나 오늘이나 언제나 동일하면> 안 됩니다.
성령을 받고도 언제나 동일하신 분이 계시다면, 곤란합니다.
“우리 남편이 알콜 중독에 빠졌지만, <그러나> 온누리교회에 나오면서 집에 일찍 들어옵니다.
내 아내가 우울증에 걸렸지만, <그러나> 이제는 찬송도 하고, 교회에 열심히 잘 나가요.
우리 자녀가 게임에 몰두 했지만, <그러나> 예수 믿고 나서부터, 우리 아이가 완전히 달라졌어요.“ 라는 고백과 간증이 있으시길 바랍니다.
“나도 예전에는 사람을 보면 피하고 싶었지만, <그러나> 성령 받고나서 사람들을 만나고 싶어 졌어요.“ 라고 고백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주님의 비전>을 따라가는 사람입니다.
세상은 대세를 따라 가지만, 예수 믿는 우리들은 <그러나와 같이> 반전이 기대되는 삶이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가는 사람입니다.
사도바울이 그런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일에 생명을 걸었어요.
<그러나>의 인생의 대표적인 분입니다. 성령 받으면 <그러나의 삶>을 사셔야 합니다.
2. 두 번째로, 성령이 임하면 <권능>을 받습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 나오는 <성령님의 권능>은 무엇입니까?
성령님의 <능력>은 무엇을 말하는 것입니까?
① 외적인 카리스마의 놀라운 능력도 되지만,
② 내면적인 성품을 변화시켜서 <하나님의 일>을 동참하게 만듭니다.
여기 <권능>이라는 것은 다이너마이트와 같은 파괴력을 가집니다.
세상의 권능은 지위와 재물과 인기와 권세를 말하지만, 여기서 말하는 <성령의 권능>은 “[성품]에 관련하여 헌신할 마음이 생기고, 긍휼한 마음이 생긴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이 임하면, <삶의 본질>이 바뀌는 것입니다.
성령을 받으면, 우리의 <내면의 생각>을 바꾸도록 인도해 주십니다.
3. 세 번째로, 성령이 임하면 <우리가 헌신하도록 준비하도록> 만드십니다.
성령의 권능이 생기면, <아버지의 마음>으로 헌신하도록 준비를 시키십니다.
저도 온누리교회에 와서 은혜 받았을 때, <미션>이라는 단어만 생각하면 눈물이 났어요.
어떤 청년들 모임에서 하용조 목사님이 “1~2년 헌신해 보라”고 권했을 때, 나도 모르게 벌떡 일어난 적이 있습니다. 그 집회가 끝나고 나서, 목사님을 찾아가니까, 헌신하려고 온 사람은 <저 혼자> 뿐 이었어요.
일어나기는 많이 일어났는데, 오로지 <저 혼자서> 파송을 당했어요.
그런데 거기서 느낀 것은 준비되지 않은 [저]이지만, 사도행전 20장 24절의 말씀이 나에게 감동을 주었어요.
“그러나 나는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서 내게 주신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거 하는 사명>을 다 완성하기 위해서라면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습니다. (행 20:24)
이 말씀을 그냥 읽으면 <좋은 말씀>이지만, <레마>로 역사하시면 나를 <뒤집는 역사>로 나타납니다.
성령을 받은 사람은 그 말씀이 <레마>로 들려지고, 그렇게 <헌신의 길>로 인도하십니다.
성령 받으면 <헌신 하도록>준비할 마음으로 인도하십니다.
아내와 자녀를 사랑한다면, 요리 몇 가지를 배우려는 마음도 주십니다.
일대일 제자 양육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그분을 위해서 <시간>을 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령께서 그분을 위해서 헌신하도록 <내 마음>을 움직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마음을 먼저 주시고, 우리를 그 길로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어느 날 갑자기 “너는 아프리카로 가라”고 명령하지 않습니다.
성령이 감동한 사람에게 충분한 시간을 갖고 준비하여, <스스로 아프리카에 자원하도록 유도 하시는 분>이
성령님입니다.
그래서 우리를 훈련받을 마음이 들도록 마음을 주시고, 준비시키는 분입니다.
4. 네 번째는, 성령이 임하면 <증인된 공동체>로 살게 만드십니다.
[증인]은 <순교자>라는 뜻입니다.
몽마르뜨의 언덕이라는 말은 <순교자의 언덕>을 의미합니다.
사도행전 1장 8절에서 “예루살렘과 온 유다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라는 말은 지리적인 개념이기도 하지만, 요즘에는 그런 지역적인 개념이 무너졌어요.
① 예루살렘은 가까운 곳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또 가까운 가족이나, 가까운 순 식구들을 말합니다.
② 유대는 지역적으로 보면, 대전 시내에 살고 있는 근거리 지역을 의미하고
③ 사마리아는 그 보다 더 멀리 떨어진 동아시아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④ 그러나 [땅 끝]은 전혀 <다른 타 문화권<을 의미합니다.
여기서 <땅 끝>이라는 말은 지리적인 의미로 <멀리 있다>는 말이 아니고,
“어디에 있든지 상관없이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선교지는 <멀리 있다>고 순교자의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선교지에 있어도, 주님의 꿈과 비전에 우리의 삶을 드리지 못하고, 헌신하지 못한다면,
그건 <주님의 뜻>이 아닙니다.
그러나, 대전에 있어도 우리의 삶에 헌신이 있다면, 그것은 <선교사의 삶을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후원하는 선교사도 중요한 것입니다.
누구나 다 “선교사로 떠난다“고 자원한다면, <떠난 선교사>들은 누가 후원합니까?
그러니까 우리들은 “선교의 마인드를 갖고, 어떻게 헌신 하느냐?”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의 우선 순위는 무엇입니까?
① 생명을 살리는 일이고
② 사람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서 헌신해야 합니다.
여러분의 <땅 끝>은 어디입니까?
여기에서 <땅 끝>은 지리적 개념이 아닙니다.
그 <땅 끝>은 각자가 생각에 따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에게 <땅 끝>을 가정 일수도 있어요.
그동안 교회 일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까, 자기 가정을 돌보지 못하신 분이 계시다면, 그분의 <땅 끝>은 [가정]이어야 하고, 그 분은 우선 가정으로 돌아가서 자녀와 아내를 돌보시며 먼저 가정을 살려야 합니다.
그러니까 그 분은 그 가정에서 <주님의 영광스런 사역>을 시작해야 합니다.
성령 받은 사람은 나를 뛰어 넘어,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있어야 해요.
그러나 성령 받지 않은 사람은 “남의 일에 관심이 없어요, 결국 나도 건드리지 마세요.”라고 말해요.
그래서 “나도 당신 일에 상관하지 않겠어요.“라고 일단 선을 긋고 멀찍이 물러납니다.
그러나 성령 받은 사람의 특징은 나와 상관없는 사람들에게 가슴 아픔과 긍휼함과 애틋함을 가지고,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착각하면 안 됩니다.
“나는 저 아프리카 사람은 품고 가지만, 가까이에 있는 내 가족과 내 친구들은 돌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광스런 선교 사업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의 영역을 뛰어넘어 누구나 다 품어 주고, 서로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우리의 부하 직원과 내 이웃을 더 가까이 섬겨야 합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곳이 바로 <땅 끝>입니다.
우리의 가정과 직장이 바로 내가 사역해야 하는 <현장>입니다.
그런 마음을 품고, <주님의 마음>으로 지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