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서의 한국사 수업에서 병자호란은 반드시 나오지만, 그저 조선 국왕 인조가 남한산성으로 피신하였다가 항복하였다고만 기술할 뿐이지 정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가르쳐 주지 않는다. 사실대로 말하면 역사 교사도 진상을 모르며 학생들은 단지 수치스러운 일이었다는 이미지만 갖게 된다.
신흥 국가 청이 조선에 침입하고 별다른 전투 없이 무조건 항복을 받은 것으로 귀결된 이 전쟁은 임진왜란 이상으로 의미가 있다. 이 전쟁을 제대로 알게 되면 국가는 무엇인가, 지배층의 의무는 무엇인가 등 많은 의문을 품을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는 자세를 가질 수 있다.
병자호란은 무능하고 어리석은 지도자가 얼마나 국가의 위신을 추락시키고 민중을 불행에 빠트리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이다. 요즈음 대한민국의 위정자들이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 지배층과 무엇이 다른가 하는 생각이 자꾸 든다.
병자년(1636) 12월 청군은 남한산성을 포위하였고 이듬해인 정축년(1637) 1월부터 청 태종 홍타이지와 조선국왕 인조(이름은 이종)는 편지를 통하여 대화하였다. 여기서 두 사람은 자신의 세계관, 가치관을 표출하였다. 이 내용을 음미하면 별 다른 설명 없이도 지도자의 자세는 어떠해야 하는지, 두 나라 지배층의 정신세계는 어떠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독자 여러분들은 제3자의 입장에서 주의 깊게 살펴보기 바란다.
(대국의 대인과 소국의 소인배들이 무엇인지, 확연히 갈리는군.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는 뿌리깊은 사대매국질의 근원은 도대체 어디로부터인가?)
저희 작은 나라는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약자가 강자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떳떳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서로 겨루려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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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묘년의 치욕을 갚겠다면서 왜 섬으로 숨느냐
정축년(1637) 1월 2일 홍서봉(洪瑞鳳), 김신국, 이경직이 적의 진중에 가서 청 태종이 이종에게 내린 조서를 받아왔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청국(大淸國) 관온인성황제(寬溫仁聖皇帝)는 조선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우리나라 군사가 지난해 동쪽 우량하(兀良哈)를 칠 때, 너희 나라가 군사를 일으켜 요격(邀擊)을 한 뒤에 또 명나라와 협조하여 우리나라를 해쳤다.
그러나 이웃나라끼리 사이좋게 지내기를 생각하여 끝내 개의하지 않았는데, 우리가 요동(遼東)을 얻게 되자 너희는 다시 우리 백성을 불러다가 명나라에 바쳤으므로, 짐(朕)이 노하여 정묘년에 군사를 일으켜 너희를 정벌하였던 것이다. 이것을 어찌 강함을 믿고 약한 자를 능멸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이라 할 것이냐?
그런데 무엇 때문에 그 후로 거듭 너희 변방 신하들을 타이르기를, ‘정묘년에는 부득이 잠시 기미(& #35210;& #32315;)를 허락한 것이다. 이제 정의로 결단을 낼 때이니 경들은 각기 여러 고을을 타일러 충의로운 사람들로 하여금 각기 책략을 본받게 하고 용감한 사람으로 하여금 자원해서 종군하게 하라.’ 등등의 말을 하느냐?
이제 짐이 친히 너희를 치러 대군을 거느리고 왔다. 너(爾)는 어찌하여 지모있는 자가 책략을 본받고 용감한 자가 종군하게 하지 않고서 몸소 일전을 담당하려 하느냐? 짐이 강대함을 믿고 추호도 서로 범하지 않았는데, 너희는 약소국으로 도리어 우리의 변경을 소란하게 하며, 산삼을 캐는 자& #8228;사냥을 하는 자를 어찌하여 짐의 도망한 백성이라 하여 데려다가 명나라에 바치느냐? 또 명나라의 공& #8228;경(孔耿 : 청나라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공유덕과 경중명을 말함) 두 장수가 귀순하여 짐의 군사가 가서 그를 응접하려 하는데, 너희 군사가 대포를 쏘아 방해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것은 함부로 전단(戰端)을 일으킨 실마리를 또다시 너희가 연 것이다.
짐의 아우와 조카 등 여러 왕이 너희에게 글을 보냈는데 어찌하여 종래에 서로 글을 통한 예가 없다고 하였느냐? 정묘년(1627)에 너희를 정벌하러 오자, 너희는 섬 가운데로 달아나 오직 사신을 보내 강화를 빌었는데, 그때 글이 오고간 상대는 여러 왕이 아니고 누구였는가? 짐의 아우나 조카가 어찌 너만 못하냐? 또 외번(外蕃)의 제왕(諸王)이 글을 보냈으나 너는 끝내 거절하고 받지 않았다. 그들은 곧 원나라 황제의 후손인데 어찌 너만 못하냐?
원나라 때에는 너희 조선이 끊이지 않고 조공을 바쳤는데, 이제 와서 어찌하여 하루아침에 이처럼 도도해졌느냐? 보낸 글을 받지 않은 것은 너의 어리석고 교만함이 이에 이르러 극에 달한 것이다. 너희 조선이 요& #8228;금& #8228;원 세 나라에 해마다 조공을 바치고 대대로 신하를 일컬었지, 옛날부터 언제 남을 섬기지 않고 스스로 편안히 지냄을 얻은 일이 있느냐?
짐이 이미 너희 나라를 아우로 대접했는데 너는 더욱 더 배역하여 스스로 원수를 만들어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 도성을 포기하고 대궐을 버려 처자와 떨어져서 서로 돌아보지 못하게 만들었다. 겨우 한 몸이 산성으로 달아나 비록 천년을 산들 무슨 이익이 있겠느냐?
정묘년의 치욕을 씻는다고 눈앞의 안락을 깨뜨리고 화를 스스로 불러서 후세에 웃음거리를 남기려 하니, 이 치욕은 또 장차 어떻게 씻으려 하느냐? 이미 정묘년의 치욕을 씻으려 생각했으면, 어찌하여 목을 움츠려 나오지 않고 여인의 처소에 들어앉아 있는 것을 달게 여기느냐?
네가 비록 이 성에 몸을 숨기고 있으면서도 생각은 욕되게 살기를 바라지만, 짐이 어찌 너를 놓아줄까 보냐?
짐의 여러 내외 왕과 문무 모든 신하들이 짐이 칭제(稱帝)하기를 권고하였음을 네가 듣고는, ‘이런 말을 우리나라 군신(君臣)이 어찌 차마 들을 수 있느냐’ 고 말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황제를 일컫는 것이 옳고 그름은 너에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하늘이 도우시면 필부라도 천자가 될 수 있고, 하늘이 화를 주시면 천자라도 외로운 필부가 될 것이다. 그러니 네가 그런 말을 한 것도 또한 매우 망령된 소리이다.
뿐만 아니라 맹약을 배반하고 성을 쌓았으며, 사신 대접하는 예가 갑자기 못해졌고, 또 사신을 보내서 너희 재상을 만나보게 했더니 계교를 꾸며 쳐서 사로잡으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이냐? 명나라를 아비로 섬기고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러한 것들은 특히 큰 죄 몇 가지를 든 것이고, 그 나머지 소소한 혐의는 이루 다 들어 말하기가 어렵다.
이제 짐이 대군을 이끌고 와서 너희 八道를 소탕할 것인데, 너희가 어버이로 섬기는 명나라가 장차 어떻게 너희를 구원하는가 두고 볼 것이다. 자식에게 위험이 절박했는데 어찌 구원해 주지 않는 아버지가 있으랴. 그렇지 않으면 이는 스스로 백성을 물불 속에 빠트리는 짓이니 억조(億兆) 중생이 어찌 너에게 원한을 품지 않겠느냐? 네가 할 말이 있거든 분명히 고하라, 막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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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열하게 꾸짖는 내용이다. 청 태종이 이종을 극도로 경멸하고 있으며 조선의 내부 사정에도 밝은 것을 알 수 있다. 아무런 대책없이 만백성을 사지로 몰아넣은 임금이 마땅히 받아야 할 비판이다. 성리학의 정치논리에 따르면 임금은 만백성의 어버이인데 자식을 병화에 희생시키고 혼자 살겠다고 버둥거리는 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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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3일 조선 국왕 이종은 답서를 보냈다.
조선 국왕은 삼가 글을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올립니다. 저희 작은 나라가 大國에 잘못을 저질러 스스로 병화(兵禍)를 초래해서, 몸이 외로운 성에 들어 위태로움이 조석(朝夕)에 임박하였습니다. 생각으로는 특사(特使)로 하여금 글을 받들어 올려 정성을 전하고 싶었습니다마는 병과(兵戈)에 가로막혀 스스로 통할 길이 없었는데, 어제 황제께서 궁벽한 두메 구석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는 의심과 믿음이 상반(相半)하고 기쁨과 두려움이 엇갈렸습니다.
이제 大國이 옛 맹약을 잊지 않으시고 분명히 가르치고 책망하시니 스스로의 죄를 알겠습니다. 진실로 저희 작은 나라의 심사를 펼 수 있는 때를 얻었는가 합니다. 참으로 다행한 일입니다. 저희 작은 나라가 정묘년의 결호(結好)를 따른 이래 10여 년 동안 정호(情好)의 돈독함과 예절의 엄숙함은 다만 대국이 아시는 바일 뿐 아니라 실로 하늘도 잘 아시는 바이고, 다만 제가 몹시 어리석어 일을 살피지 못하는 수가 많았을 뿐입니다.
변방 백성의 산삼채취와 공& #8228;경(孔耿) 때의 일이 비록 저희 작은 나라의 본심은 아니었으나 의혹을 쌓아온 잘못은 면치 못하겠습니다. 대국의 관대한 용서를 입으면 저희 작은 나라는 진실로 오래 오래 넓으신 도량 가운데 있을 것입니다.
지난해 봄의 일은 저희 작은 나라가 참으로 그 죄를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마는, 이 역시 저희 작은 나라의 신민(臣民)이 식견이 옅고 좁아서 잘못 명의(名義)를 지켜, 마침내 사신이 노여워 바로 돌아가게 하였고 따라온 사람들이 모두 장차 大兵이 올 것이라고 위협하는 바람에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君臣)은 지나친 염려를 면치 못하고 변경의 신하들을 거듭 훈계했는데, 문장을 짓는 신하가 글을 지을 때 배반하는 말이 많아 대국의 노여움을 범하는 줄 모르고 범했습니다.
그러나 감히 어찌 일이 신하들에게 나온 것이고 제가 아는 바 아니라고 하겠습니까? 사신을 잡아 가두려 했다는 말은 절대로 없는 일입니다. 어찌 대국의 총명으로도 이러한 점에 의심이 없지 않을 줄을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습니까?
명나라는 우리와 父子의 나라입니다. 대국의 군사가 여러 번 우리나라에 들어왔지마는 저희 작은 나라는 일찍이 한번도 화살 한 대 마주 대항하지 않아 형제의 맹약을 중히 여기지 아니한 일이 없었는데, 모해하는 말이 어찌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까? 그러나 이 역시 저희 작은 나라의 정성과 믿음이 미흡한데서 대국에 의심을 받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누구를 탓하겠습니까?
또한 馬장군(마부대를 말함)이 스스로 말하기를, 호의로 왔노라고 하므로 저희 작은 나라는 그 말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가서 이렇게 될 줄이야 어찌 짐작이나 했겠습니까?
아무튼 지난날의 일은 저희 작은 나라가 이미 죄 지은 줄을 알았습니다.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알면 용서하는 것은 대국이 천심(天心)을 본받아 행하고 만물을 감싸서 용납하는 바입니다. 만약 정묘년 하늘에 맹세한 맹약을 생각하시어, 저희 작은 나라의 백성들의 목숨을 불쌍히 여기시어 저희 작은 나라로 하여금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도모함을 용납하신다면 저희 작은 나라가 마음을 씻어 복종함이 오늘부터 새로이 시작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대국이 용서하시지 않으시고 기어코 군사로 추궁하려 하신다면 저희 작은 나라는 도리가 막히고 형세가 다하여 스스로 죽음을 기약할 뿐입니다. 감히 심중을 아뢰어 신중히 지시하고 가르치심을 기다리겠습니다.
(2) 은혜를 베풀어 주십시오
1월 9일 남한산성의 양식을 점검해보니 2,800석이 남았다. 일주일 정도 버틸 양이었다.
1월 10일 조선국왕 이종은 예조판서 김상헌을 보내 백제의 시조 온조왕(溫祚王)에게 제사지내게 했다.
이날 기가 막힌 사기극이 벌어졌다.
어영별장(御營別將) 김언림(金彦林)이 영의정 겸 도체찰사(都體察使)인 김류(金& #29804;)에게 청했다.
“제가 밤에 성에서 나가 적을 죽이겠습니다.”
“몇 사람이나 데리고 가서 싸우겠느냐?”
“한 사람만 데리고 가겠습니다.”
“아니, 한 사람만 데리고 가서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냐?”
“제 생각으로는 한 사람도 많습니다.”
이튿날 아침, 김언림이 적을 죽이고 그 머리를 가져왔다고 전해 왔다. 김류가 나가 앉아 그것을 받고 곧 이종에게 보고했다. 이종은 김언림에게 상으로 면주(綿紬) 3필을 하사하고 김류는 그 머리를 군문에 매달라고 명했다.
그러나 그 머리에는 한 점의 피도 묻지 않았고 살이 눈처럼 하얗게 얼어 있어 보는 사람들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그러자 원주(原州) 장관(將官) 한 사람이 달려들어 그 머리를 떼어 품에 안고 엎드려 통곡했다.
“형님, 아, 형님은 어찌하여 두 번이나 죽으셨습니까?”
알고 보니 적병이 아니라 병자년 12월 28일 전사한 장수였다. 주위에서 보고 있던 사람들이 모두 눈물을 흘렸다. 김류는 김언림을 어영부장(御營副將) 원두표(元斗杓)에게 보내 군사들 앞에서 목을 베게 하였다.
1월 13일 이종은 강화를 애걸하는 국서를 보냈다.
근자에 저희 작은 나라의 재신(宰臣)이 글을 받들고 군문(軍門)에 가서 품청(稟請)하고 돌아와 말하기를, 황제께서 장차 다음 명령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은 목을 늘이고 발꿈치를 돋구어 날마다 폐하의 말씀을 기다렸습니다마는 이제 이미 열흘이 넘도록 잘잘못의 말씀이 없으시므로 힘이 빠지고 정성이 핍박하여 다시 아뢰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직 황제께서는 통찰하시기 바랍니다.
저희 작은 나라가 전에 대국의 은혜를 입어 외람되게 형제의 의를 하늘과 땅에 밝혔으니, 비록 국토에는 구분이 있으나 정의(情意)에는 간격이 없어 스스로 자손만대에 끝없는 복이 되리라 했는데 어찌 맹약할 때 마신 쟁반의 피가 미처 마르기도 전에 의심과 틈이 생겨서 위급한 화에 떨어져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줄을 짐작했겠습니까?
그러나 그 유례를 찾아보면 모든 것이 다 저의 천성이 유약하여 잘못을 저지르고, 모든 신하가 어리석어 잘 살피지 못하여 오늘의 일이 있게 된 것입니다. 스스로 책망할 뿐 다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다만 형의 아우에게 대한 생각으로 잘못이 있음을 보면 노하여 꾸짖는 것이 물론 마땅합니다. 그러나 책망이 너무 엄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틈이 생길 것이니,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실 일이 아니겠습니까?
저희 작은 나라는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습니다. 약자가 강자에 복종하고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이 떳떳한 이치인데, 어찌 감히 대국과 더불어 서로 겨루려 하겠습니까?
다만 저희는 대대로 명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원래 군신의 명분이 정해져 있습니다. 일찍이 임진년의 난에 저희 작은 나라의 존망이 아침저녁에 달려 있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성을 물불 속에서 구해 주셨으므로 저희 작은 나라의 백성은 아직까지 마음속 깊이 새겨 지니고 있어, 차라리 대국에 죄를 지을지언정 차마 명나라를 배반하지 못합니다. 이것은 다름 아니라 그 은혜가 두터워서 사람의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기 때문입니다.
남에게 은혜를 베푸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 아닙니다. 진실로 능히 그 백성의 목숨을 구할 수 있고 그 종묘사직의 위급을 구할 수 있는 자라면, 군사를 내어 어려움을 구원하는 것과 군사를 철퇴하여 생존을 도모하게 해주는 것과는 그 일이 비록 다르지마는 그 은혜는 결국 같습니다.
지난해 저희 작은 나라가 어리석고 착각해서 일 처리를 잘못하여 여러 번 대국의 간곡한 가르치심을 입었습니다마는, 오히려 스스로 깨닫지 못하고 대국의 군사가 오게 하여 군신과 부자가 오래 외로운 성에 있어 군색하기가 또한 심합니다.
진실로 이때 있어서 대국이 마음을 돌이키시어 저희가 잘못을 버리고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셔서 종묘사직을 보존하고 오래 오래 대국을 받들게 하신다면,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들은 감격하여 장차 마음에 깊이 새겨 받들어 자손 영원한 세월에 이르도록 잊지 않을 것이요,
천하가 이를 들으면 또한 대국의 위엄과 신망에 탄복하지 않는 이가 없을 것입니다. 이는 대국이 한꺼번에 큰 은혜를 동토(凍土)에 맺고, 넓은 명예를 만국에 베푸시는 것입니다.
만약 그렇지 않고 오직 한때의 생각을 시원하게 하시고자 끝내 병력으로써 형제의 은혜를 상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아 여러 나라의 소망을 끊으신다면 그것은 또한 대국으로서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황제의 고명(高明)하심으로 어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가을이 되면 만물이 죽고 봄이 오면 소생하는 것이 천지의 도리요, 약한 자를 불쌍히 여기고 망하는 자를 구원하는 것이 패왕(覇王)의 사업입니다. 이제 황제께서는 영무(英武)한 방략으로 모든 나라를 무마 안정시키신 다음, 새로이 대호(大號)를 세우시고 관온인성(寬溫仁聖) 넉 자를 내세우셨습니다. 이는 장차 천지의 도리를 본받으시어 패왕의 사업을 회복하려 하심이니, 저희 작은 나라와 같이 전의 허물을 고치고 넓으신 비호를 받고자 하는 자는 버림받지 않을 줄 믿고, 이에 구구한 말씀을 드려 명령을 내리시기를 청합니다.
1월 16일 청군은 초항(招降 ; 항복하라)이라고 쓴 깃발을 망월봉(望月峯 : 남한산성 동쪽에 있음) 아래에 세워 놓았다.
1월 17일 청 태종이 항복을 요구하는 국서를 보냈다. 청 태종은 명과 조선의 그릇된 화이관(華夷觀)을 통렬히 질책하고 있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보내온 글에 ‘책망이 너무 엄하면 도리어 형제의 의리에 틈이 생길 것이니 어찌 하늘이 괴이하게 여기시는 바가 되지 않겠느냐’ 했는데 짐이 정묘년의 맹약을 중히 여겨 일찍이 너희 나라가 맹약을 깨트린 일을 여러 번 타일렀으나 너희는 하늘을 두려워하지 않고 도탄에 빠져있는 백성을 구원하지 않고 먼저 맹약을 배반했다.
너희 변방 신하에게 준 글을 짐의 사신 융알아대(英俄兒大 : 용골대를 말함)가 얻어, 비로소 너희 나라가 전쟁할 생각임을 확실히 알고, 짐은 곧 춘신사(春信使)& #8228;추신사(秋信使)와 여러 상인들에게 ‘너희 나라가 이처럼 무례하니 장차 너희 나라를 칠 것이다. 돌아가거든 너희 왕 이하 서민에게까지 말하라’ 고 일렀다.
이렇게 분명히 타일러 보냈으니 짐은 속임수로 군사를 일으킨 것이 아니다. 또한 글을 갖추어 너희가 맹약을 깨트리고 말썽을 일으킨 일을 하늘에 고한 뒤에 군사를 일으킨 것이다. 짐은 네가 맹약을 배반했으므로 스스로 천벌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실로 맹약을 배반했기 때문에 재앙이 내린 것인데, 너는 어찌하여 도리어 아주 깨끗하고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처럼 하늘 천(天)자 한 자를 억지로 끌어다 붙이느냐?
너는 또 말하기를 ‘소방이 궁벽한 바다 한 구석에 있어 오직 시서(詩書)를 일삼고 전쟁을 익히지 않았다’ 했으나 지난번 기미년(己未年)에 너는 까닭 없이 우리를 침노하여, 짐은 너희 나라가 틀림없이 병사(兵事)를 익히고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이제 또 말썽을 일으켰으니 너희 군사가 더욱 정예해진 것이다. 그런데도 오히려 병사를 익히지 않았다고 고집하는 것이냐? 그러나 너는 원래 군사를 좋아하는 자이니, 아직도 그만둘 생각이 없으면 이제부터 다시 훈련을 더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너는 또 말하기를 ‘임진년의 난에 나라가 존망이 아침저녁에 달려있을 때 신종황제(神宗皇帝)가 천하의 군사를 동원하여 백성을 물불 속에서 구해 주었다.’ 고 했는데 천하는 크고 또한 천하에는 나라가 많다. 너희를 구해 준 것은 명나라 하나뿐인데 어떻게 천하 모든 나라의 군사가 다 왔다는 것이냐? 명나라와 너희 나라는 허탄하고 망령됨이 한이 없어 끝내 그만두지 못하는구나. 이제 고단하게 산성을 지켜 명이 아침저녁에 걸려 있는데도 오히려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이 따위 헛소리만 하여 무슨 이익이 있다는 것이냐?
너희는 또 말하기를 ‘오직 한때의 생각을 시원하게 하고자 끝내 병력으로써 형제의 은혜를 상하고 스스로 새로워지려는 길을 막아버려 여러 나라의 소망을 끊어 버린다면 그것은 또한 대국으로서도 장구한 계책이 되지 못할까 두렵다. 황제의 고명(高明)함으로 어찌 이러한 점을 생각하지 않으랴.’ 고 했는데, 그렇다! 네가 형제의 우의를 깨트리고, 전쟁을 모책하여 군사를 조련하고, 성을 수축하고 길을 닦고 수레를 만들고 군기를 마련하여 오직 짐이 명나라 치는 것을 기다려 그 틈을 타서 몰래 군사를 내어 우리나라를 해치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우리나라에 은혜를 베푼 것이 있다고 할 수 있느냐? 무릇 이러한 것을 너희는 스스로 모든 사람의 신망을 끊지 않는 것이라 하고, 스스로 고명하다 하고, 스스로 장구한 계책이란 말이냐?
또 말하기를, ‘황제는 영무(英武)한 방략으로 모든 나라를 무마 안정시켜 새로이 대호(大號)를 세우고 관온인성(寬溫仁聖) 넉 자를 내세웠다. 이는 장차 천지의 도리를 본받아 패왕이 사업을 회복하려 함이라.’ 고 했지마는, 짐의 안팎 여러 왕과 대신들이 진작부터 이 존호를 짐에게 올린 것이다.
그러나 짐은 패왕의 사업을 회복하려 하지 않는다. 까닭 없이 군사를 일으켜 너희 나라를 멸망시키려 하고, 너희 백성을 해치려 한 것이 아니다. 군사를 일으킨 까닭은 정히 잘잘못을 펴고 밝히고자 함이다.
천지의 도리는 선행을 하는 자에게는 복이 오고, 악행을 하는 자에게는 재앙이 오므로 지극히 공평하고 사사로움이 없다. 짐은 천지의 도리를 몸소 행하여 마음을 기울여 따르고 순종하는 자는 후히 보양(保養)하고, 형세를 따라 항복하는 자는 편안하고 무사하게 해 주지마는, 명령을 거역하는 자는 하늘을 받들어 치고, 무리를 모아 악한 짓을 하거나 칼을 잡아 어지럽히는 자는 목을 베며, 완고한 백성으로 순종하지 않는 자는 가두고, 성질이 억세어 굴하지 않는 자는 깨닫도록 하며, 교활하고 속이는 자는 끝까지 나무란다.
이제 네가 짐과 적이 되었으므로 내 군사를 일으켜 여기에 왔다. 만약 너희 나라가 죄다 짐의 판도(版圖)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길러 보호하여 赤子와 같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또한 너희는 하는 말과 행동이 전연 서로 같지 않다. 內外& #8228;前後에 오고간 문서로서 우리 군사가 얻은 것 중에는 왕왕 우리 군사를 노적(奴賊)이라 불렀는데, 이것은 너희 군신이 평소에 우리 군사를 도둑(賊)으로 불렀기 때문에 말을 하는 동안에 무심코 그렇게 나온 말일 것이다.
몸을 숨기고 몰래 가지는 것을 도둑이라고 한다고 들었는데, 내가 과연 도둑이면 너는 어찌하여 잡지 않고 내버려 두어 불문(不問)에 붙이느냐? 너희가 비방하고 욕하는 짓은 이른바 속은 羊이고 겉만 호랑이 껍질이란 속담이 너를 두고 한 말이다.
우리나라 풍속에 ‘사람은 행동은 민첩한 것이 귀하고 말은 겸손한 것이 귀하다.’ 고 한다. 그러므로 우리나라는 늘 행하여 책잡히지 않고, 말하여 부끄럽지 않고자 경계한다. 그런데 너희 나라는 속이고 교활하고 간사하고 헛수작함이 날로 깊이 스며들어, 조금도 부끄러운 줄을 모르고 이와 같은 망령된 말을 거리낄 줄 모르고 함부로 하는구나!
이제 네가 살고자 하느냐? 마땅히 서둘러 나와서 양편 군사가 한 번 싸워 보자. 하늘이 스스로 어떤 처분을 내리실 것이다.
(3) 항복하면 정말 살려주시는 겁니까
1월 18일 이조판서 최명길이 답서를 작성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국왕 이종(李倧)은 엎드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께 글을 올립니다.
엎드려 밝으신 뜻을 받자오니 간곡하신 타이름을 내리셨습니다. 그 책망하심이 엄하신 것은 곧 가르치심이 지극하심입니다. 추상(秋霜)같이 매운 가운데 봄날이 소생하는 뜻이 들어 있어, 엎드려 읽고는 황송하고 감격(惶感)하여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삼가 생각하건대, 대국의 위엄과 덕이 널리 미쳐서 모든 번방(藩邦)이 입을 모아 하늘과 사람이 귀의(歸依)하여, 크신 명령이 바야흐로 새로운데, 저희 작은 나라는 10년 형제의 나라로서 도리어 흥운(興運)의 시초에 죄를 지었습니다. 마음에 반성하여 후회해도 미치지 못하는 뉘우침이 있습니다.
지금의 소원은 다만 마음을 고치고 생각을 바꾸어 지난 날의 습관을 깨끗이 씻고, 온 나라를 들어 다른 모든 번방(藩邦)과 같이 명을 쫓고자 할 뿐입니다. 진실로 뜻을 굽이시어 위급을 안전하게 하심을 입어 스스로 새로워짐을 허락하신다면 문서와 절차에 응당 행할 의식이 있을 것이니, 그렇게 행하겠습니다.
오늘에 있어서 출성(出城)하라시는 명령은 실로 어질고 죄를 감싸주시려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마는, 그러나 아직 겹겹이 둘러싼 포위가 풀리지 않았고 황제의 노여움이 대단하시어, 여기 있어도 죽고 성을 나가도 역시 죽을 것이므로, 용기(龍旗)를 멀거니 바라보고 자결하고 싶을 뿐이니 부끄러운 마음입니다.
옛날 사람의 말에 ‘성 위에서 천자를 뵙는 자는 예를 그만둘 수 없고 병위(兵威) 역시 두렵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저희 작은 나라의 소원은 이미 말씀드린 바와 같으니, 이는 아뢸 말씀을 다 아뢴 것입니다. 이는 깨달아 경계함이요 마음을 기울여 귀순함입니다.
황제께서는 바야흐로 천지의 모든 생물까지도 마음에 두시는데, 저희 작은 나라가 온전하게 살아 후하신 보양(保養)가운데 듦이 어찌 부당하겠습니까? 삼가 생각하건대, 황제의 덕이 하늘과 같아 반드시 불쌍히 여겨 용서하실 것이라 감히 진정을 토로합니다. 삼가 은혜로운 말씀을 기다리겠습니다.
예조판서 김상헌이 이 글을 보고는 발기발기 찢고 목을 놓아 통곡하였다. 김상헌이 최명길을 보고 말했다.
그대의 선친[최기남(崔起南)]께서는 선비들 사이에 도덕과 의리로서 명망이 높으신 분이셨는데, 그대는 어찌 이처럼 서슴없이 군부(君父)를 욕되게 하는 일을 할 수 있단 말이오.
최명길이 대답한다.
대감께서 나라를 위하는 충정을 모르는 바 아닙니다. 그러나 나 역시 나라와 백성의 안전을 위해 이러는 것입니다. 대감께서 이 국서를 찢으시면 나는 다시 붙이겠습니다.
병조판서 이성구가 크게 화를 내며 김상헌을 책망하였다.
대감이 이미 오래 전부터 척화를 주장하여 오늘날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대감은 후세에 비록 아름다운 이름을 얻을지언정, 군부와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들은 어찌한단 말이오. 그다지도 대의를 부르짖으면서 대감은 어찌 몸소 나가서 적에게 의로써 대항하지 못하시오.
1월 19일 우의정 이홍주(李弘& #20881;), 최명길, 윤휘가 청군 진영으로 가 국서를 전달하고 장시간에 걸쳐 의견을 절충했다. 청측은 이종의 출성 항복을 끝까지 고집하고 조선측에서는 세자의 출성 항복으로 대신할 것을 주장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더욱이 청측은 국서에서 칭신(稱臣)하지 않은 것을 비난하며 국서의 접수와 회답을 거부하겠다고 말했다.
최명길은 국서에 ‘臣’ 자를 가필하여 이날 밤 청측에 전달하였다.
1월 20일 우의정 이홍주, 이조판서 최명길, 윤휘가 해 뜰 무렵에 청군의 진영으로 가 청 태종의 국서를 받아왔다.
대청국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네가 하늘을 배반하고 맹약을 어겼기 때문에 짐이 몹시 노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치는 것이라 용서하지 않으려 했다. 그러나 이제 네가 외로운 성을 고단하게 지키다가 짐이 손수 쓴 준절히 책망하는 조서를 보고서 죄를 뉘우치고 여러 번 글을 올려 죄를 면하기를 바랬다.
짐이 넓은 도량을 열어 네가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는 것은 짐이 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킬 수 없기 때문이 아니요, 형세가 포위할 수 없기 때문이 아니라, 너를 불러서 스스로 오게 한 것이다. 이 성이야 공격하기만 하면 물론 얻을 것이요, 그렇지 않더라도 너희가 가지고 있는 마초와 군량이 다 떨어지면 네 스스로 곤궁해지므로 역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조그만 성을 취하지 못한다면 짐이 장차 어떻게 중국 본토로 내려갈 수 있겠느냐? 네게 성을 나오기를 명하여 짐을 만나보게 하는 것은, 첫째는 네가 성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함을 보고자 함이요, 둘째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한 다음 군사를 돌이켜서 나중에 仁과 信을 천하에 보이고자 함이다.
계교로서 너를 꾀여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짐이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천하를 무마하여 안정시키는 중이므로 너의 지난 번 잘못을 용서하여 남조(南朝 : 명나라)에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만약 너를 간사한 꾀로 잡는다 하더라도 크나큰 천하를 어떻게 죄다 간사한 꾀로 속여 취할 수 있겠느냐? 이는 스스로 귀순하는 길을 끊는 것이니, 이는 진실로 지혜롭거나 어리석은 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다 아는 일이다.
만약 네가 머뭇거리고 성에서 나오지 않으면 지방이 유린당하여 마초와 군량이 끊어져서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재앙의 괴로움이 날로 더해질 것이니, 참으로 한 시각을 늦추지 못할 일이다.
짐은 처음에 주모(主謀)하여 맹약을 깨트린 너희 신하를 모조리 죽이려 생각했으나 이제 네가 성에서 나와 귀순하려 한다면, 먼저 주모한 신하 몇 사람만 결박해서 보내라. 그러면 짐은 그들을 효수(梟首)하여 뒷사람들에게 경계할 것이다. 짐의 중국정복 계획을 그르치고, 너의 백성들을 물불에 빠트린 자가 그들이 아니고 누구냐?
만약 미리 주모자를 보내지 않고 네가 귀순한 후에 비로소 찾아내서 시행한다 하면, 짐은 그렇게는 하지 않을 것이요, 네가 만약 나오지 않는다면 나중에 설혹 간곡히 빌어 청한다 하더라도 짐은 듣지 않을 것이다. 특별히 깨우쳐 주는 바이다.
(4) 황제 폐하가 용서하셔도 조선 백성이 저를 용서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1월 21일 조선국왕 이종은 처음으로 신하라 자칭하면서 답서를 보냈다.
조선 국왕 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폐하께 죄를 짓고 외로운 성에 고단하게 앉아 스스로 아침저녁 멸망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전의 잘못을 곰곰 생각하니 스스로 속죄할 길이 없습니다. 비록 사정(私情)에 핍박하여 여러 번 글을 올려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구하였으나, 실은 감히 크게 노하신 황제께 꼭 바랄 수는 없는 일이었는데, 이제 성지(聖旨)를 받드오니, 전의 허물을 죄다 용서하시고 추상같으신 위엄을 늦추시어 따뜻한 봄날같은 혜택을 펴시니, 장차 동방 수천리의 백성들로 하여금 물불 속에서 벗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어찌 다만 城 하나가 온전하게 보전될 뿐이겠습니까? 군신 부자가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어떻게 보답할 바를 모릅니다.
앞서 출성(出城, 항복)하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에는 실은 의심스럽고 두려운 생각이 많았습니다. 노여움이 아직 거두시기 전이라 감히 마음에 품고 있는 생각을 다 펴지 못했는데, 이제 간곡히 이끌어 타이르심을 입으니, 참으로 옛날 사람의 이른바 적심(赤心)을 옮겨 남의 배 속에 심는다는 것입니다.
신이 대국을 받들어 섬겨온 지 10여 년에 폐하의 신의를 성심으로 복종해 온지 오래입니다. 범상한 말과 행동이 서로 부합하지 않는 것이 없었습니다. 하물며 四時와 같은 조칙(詔勅)의 명령이겠습니까? 신은 감히 이것을 염려하지 않습니다. 다만 신에게 절박한 걱정이 있는 사사로운 정을 폐하께 펴고자 하는 것뿐입니다.
조선은 풍속이 군색하고 좁으므로 예절이 잘고 번잡해서, 그 임금의 거동에 조금이라도 상도(常度)와 다른 점이 있는 것을 보면 놀란 눈으로 서로 보며 괴이한 일이라고 하므로, 만약 관습에 따라 다스리지 아니하면 끝내는 나라를 세워 나가지 못합니다.
정묘년 이후로 조정의 신하들 사이에는 아닌게 아니라 서로 다른 의견이 있었지마는, 힘써 진정시키려 하고 감히 꾸짖지 못한 것은 이것을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온 성 안의 관리와 백성들이 사세가 위급함을 눈으로 보고는 귀순하자는 의논이 한결같습니다마는, 출성(出城)의 조목만은 다 고려왕조 이래로 아직 없었던 일이라, 죽음으로써 스스로 결단하려 하고 절대로 출성하려 하지 않습니다.
만약 대국께서 출성을 그냥 독촉하신다면 훗날 얻으시는 것은 시체가 수북히 쌓인 텅빈 성일 따름입니다. 이제 이 성 안 사람들은 다 아침이 아니면 저녁에 죽을 것을 알고 있는데도 그 하는 말이 오히려 이러하니, 하물며 그 밖의 사람들이겠습니까?
옛날부터 나라가 망하는 것은 오로지 적군에게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폐하의 은덕을 입어 다시 나라를 이끌어 가게 된다 해도 오늘날의 인정으로 보아 반드시 백성들은 저를 임금으로 받들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폐하께서 귀순을 허락하시는 것은 저희 작은 나라의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하시고자 함인데, 이 한 가지 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 용납되지 못하여 끝내는 멸망하게 된다면, 이는 폐하의 불쌍히 여겨 도와주시는 본뜻이 아닐 것입니다. 또한 폐하의 막강한 군사가 천리 먼 곳에 깊이 들어와서 두 달이 채 못 되어 그 나라를 바로잡고 그 백성을 위무한다면, 이는 천하에 드문 뛰어난 공로로서 과거에 없는 일인데, 어찌 기어코 신이 출성한 뒤에라야만 이 성을 쳐 이겼다고 말할 것입니까?
폐하의 위무(威武)에는 아무런 손상이 없고 저희 작은 나라로서는 존망이 걸린 것이 바로 이 한 조목입니다. 하물며 대국은 이 성을 공격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고, 이기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뿐만 아니라 성을 공격하는 것은 죄를 나무라는 것입니다. 이제 이미 신복(臣服)했는데 성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엎드려 생각하건대 폐하께서는 예지(叡智)가 뛰어나시어 만물을 밝히 보살피시니, 저희 작은 나라의 진정과 실상을 남김없이 통촉하실 줄 압니다. 척화(斥和)를 주장한 신하들의 일을 아뢰자면, 저희 작은 나라에는 전부터 대간(臺諫)이 있어 여러 관원이 논쟁을 맡아보는데, 전번에 터무니없는 망언으로 저희 작은 나라의 백성들을 도탄에 빠트려 이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다 그들의 죄입니다. 그래서 이미 지난 해 가을에 그 허망한 말로 일을 그르친 자들을 적발하여 죄다 파면했습니다.
이제 황제의 명령을 받고 어찌 감히 거역하겠습니까? 다만 이들의 본 마음은, 견문과 학식이 편벽되고 어리석어, 천명(天命)이 어디에 있는지를 모르고 굳게 지키려고만 했기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이제 폐하께서 바야흐로 군신의 대의로써 세상을 감화시키려 하시니, 그들도 마땅히 불쌍히 여겨 용서하시는 가운데 들어가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폐하께서는 도량이 하늘과 같이 넓으시어 이미 저의 죄를 용서하셨으니, 이들 하잘 것 없는 작은 신하는 저희 작은 나라의 처벌에 맡기시는 더욱 관대하신 덕을 뵙고자, 어리석은 의견을 아뢰고 폐하의 처분을 기다립니다.
신이 이미 폐하께서 위엄을 거두시고 믿음을 펴심을 입어 저도 모르게 성심으로 귀부(歸附)하여, 생각하는 바를 모조리 털어놓다 보니 이처럼 장황하게 되었습니다. 번거로우시게 한 죄 참으로 면할 길이 없습니다. 죽음을 돌아보지 않고 아룁니다.
조선 국왕은 백성을 도탄에 빠트리고도 어떻게 하면 임금 노릇을 더하고 이씨 왕조를 지탱할 것인가 하는 생각뿐이 없다.
1월 22일 강화도가 청군에 함락되었다. 이날 새벽 예친왕 도르곤과 회순왕 경중명이 이끄는 청군이 크고 작은 선박에 각각 50~60명씩 병력을 싣고 갑곶 연안에 포격을 가하며 돌진하였다. 전년 12월 30일 강화도 건너편에 포진한 이들은 20여 일에 걸쳐 3강(한강& #8228;임진강& #8228;예성강) 하류에 산재한 선박을 모아 수리하는 한편, 민가를 헐어 수백 척의 배와 뗏목을 건조하고 수레 수백 대를 제조했었다.
갑곶 연안에는 충청수사 강진흔(姜晉昕)이 겨우 전함 7척과 수군 200명을 거느리고 갑곶을 지키고 있었다.
청군이 도하하는데 조선 군사는 싸우지도 않고 달아났다. 총책임자인 도검찰사 김경징은 부검찰사 이민구와 함께 작은 배를 타고 달아났다. 세자빈과 두 대군 등 많은 사람이 포로가 되었다. 예친왕 도르곤은 봉림대군을 예로 대우하고 병사들의 약탈을 금했다. 그러나 3일 후 도르곤이 강화도를 떠나자 수비를 맡은 몽고병들이 강화도를 대규모로 약탈하였다.
1월 23일 영의정 이하 여러 명이 국서를 가지고 청군 진영으로 갔다. 극력 척화를 주장하는 홍익한(洪翼漢)을 결박지어 보내는 일에 관한 것이었다.
조선 국왕 臣 이종은 삼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쇠약하고 피곤함이 극도에 이르러 고민하다가 글을 올렸으나, 성의가 옅어서 아직 허락을 입지 못하여 부끄럽고 송구합니다. 거듭 생각하건대, 만약 용납되지 않는다면, 군신의 명분은 구차하게 억지로 세울 것이 아니고 나라의 계책은 그만둘 수 없습니다. 비록 엄한 꾸지람을 받을지라도 어찌할 수가 없으니 폐하께서는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작은 나라는 해외의 약한 나라로서 중국 본토와는 멀리 떨어져서, 강하고 큰 나라에는 신하가 되어 복종했습니다. 고려의 요와 금에 대한 것이 그것입니다. 이제 폐하께서 하늘의 도우심을 받으시어 크게 운이 열리셔서, 저희 작은 나라와 땅이 서로 닿게 되어 복종하여 섬겨온 지 이미 오래입니다. 진실로 마땅히 남보다 앞서 귀순해서 여러 나라에 창도했어야 할 것입니다마는, 이제까지 주저한 것은 대대로 명나라를 섬겨 와서 본래 명분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신하의 절의를 변하지 않으려고 한 것입니다. 정의와 예의로서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고 생각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마는, 생각하건대 이것은 혼암하여 무례를 행하고 망령된 일을 많이 저지른 것입니다.
작년 봄 이후로 대국의 저희 작은 나라에 대한 정의(情意)는 변하지 않았는데, 저희 작은 나라의 대국에 대해 지은 잘못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므로, 대병(大兵)의 내공(來攻)은 진실로 스스로 부른 것입니다. 군신 상하가 다 두려움으로 날을 보내면서 다만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도 성덕(聖德)이 하늘과 같으시어 불쌍히 여기시므로 종묘사직의 보존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달 17일에 황제께서 ‘만약 너희 나라가 모조리 내 판도에 들어온다면, 짐이 어찌 기르고 보호하지 않으며 적자(赤子)와 같이 사랑하지 않겠느냐’ 하시었고, 20일의 말씀에는 ‘짐이 널리 길을 열어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한다’ 고 하시었습니다.
은혜로운 말씀이 알려지자 만물이 다 봄을 맞은 듯하여, 그야말로 죽은 것을 살려서 소생하게 하신 것입니다. 장차 동방 사람이 자자손손 다 폐하의 공덕을 칭송할 것입니다. 하물며 신의 몸에는 나라를 다시 이룩하는 은혜가 내리지 않았습니까? 이제 신이 신하를 일컫고 표를 받들어 올리는 것은, 번방(藩邦)이 되어 대대로 대국을 섬기기를 원하는 것이니, 이 역시 인정에서 나온 것이요, 하늘의 이치를 따르는 것입니다. 이는 신의 이른바 군신의 명분은 구차하게 억지로 세울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이 이미 몸을 폐하께 맡겼으니 폐하의 명령은 마땅히 지체 없이 빨리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마는, 아직 감히 출성하지 못하고 있는 까닭은 신의 형편이 참으로 전에 아뢴 바와 같이, 다만 이 한 조목에 신의 죽음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전(傳 : 書經을 말함)에 이르기를 ‘인간이 하고자 하는 바를 하늘이 반드시 쫓는다’ 라고 했습니다. 폐하는 곧 신의 하늘입니다. 어찌 용납해 주시지 않으시는 것이 있겠습니까? 또한 폐하께서는 이미 죄를 용서하시고 신하됨을 허락하시었고 신이 이미 신하의 예로서 폐하를 섬겼으니, 출성을 하고 아니 하는 것은 아주 조그만 예절입니다. 어찌 큰 것은 허락하시고 작은 것을 허락하지 않으시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이 바라는 것은 천병(天兵)이 물러가는 날을 기다려 친히 성중에서 은혜를 배사(拜辭)하고, 나아가 멀리서 절하여 폐하의 승여(乘輿)를 전송하고, 곧 대신을 보내서 사은사(謝恩使)를 삼아 저희 작은 나라의 성심으로 감복하고 기뻐하는 정을 표하고자 합니다. 이로부터는 사대의 예를 다 정해진 의식대로 하여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정성과 믿음으로 폐하를 섬기고, 폐하께서 또한 예의로서 저희 작은 나라를 대하시어 군신 사이에 각기 그 도리를 다하여 복을 백성들에게 끼쳐 후세에 칭찬을 받는다면, 오늘에 저희 작은 나라가 병란을 입음은 실로 자손을 위해 무한한 경사이겠습니다.
척화한 여러 신하의 일에 대해서는 전번에 올린 글에 이미 그 대략을 아뢰었습니다마는, 이들이 감히 망령된 말을 하여 두 나라의 대계(大計)를 무너뜨리고 그르쳤으니, 이는 다만 폐하께서 미워하시는 바일 뿐 아니라, 실로 저희 작은 나라의 군신이 다 함께 분하게 여기는 바입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처벌하기를 아까워하겠습니다마는, 다만 지난 해 이른 봄에 (척화론을) 앞장서 떠든 대간(臺諫) 홍익한은 천병이 서울에 이르렀을 때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내몰아서 그로 하여금 스스로 군사의 칼날을 감당하게 하였는데, 만약 그가 포로가 되지 않았다면 반드시 본토로 회군하시는 길에 어렵지 않게 붙잡아 보낼 수 있을 것입니다.
그밖에 파면되어 지방에 가 있는 자는 길이 막히어 그 거처를 찾기가 쉽지 아니합니다. 이는 사세가 의당 그러할 것이 아닙니까? 폐하의 넓으신 도량으로 너그러이 보아 넘기시고 포용하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기어코 추구(追究)하신다면, 회군하시는 날에 그들을 찾아내어 처분을 기다리고자 합니다. 삼가 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5) 엎드려 비노니 저의 피맺힌 정성을 보아서라도 살려 주십시오
1월 24일 5경(새벽 3시~5시)부터 청군이 공격을 개시하였다. 양측이 모두 화포로 공방전을 벌였다. 훈련도감의 방포훈련생(放砲訓練生)들이 정확하게 천자포를 발사해 청군에 타격을 주었다. 또한 청군의 홍이포로 인해 성이 많이 파괴되었다.
이날 공격이 실패하자 청 태종은 크게 노하여 모든 장령을 소집하고는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조선 국왕이 산성에 의지하여 오랫동안 항복하지 않고 있으니, 이제는 더 이상 그 죄를 용서할 수 없다. 내일은 전군이 총공격을 개시하여 산성을 도륙하도록 하라. 그러나 조선국왕만은 반드시 사로잡아야 한다. 내 손으로 그를 벌하리라.
이에 장수들은 다음과 같이 만류하였다.
남한산성의 험준한 지세는 실로 하늘이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이를 힘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키려 하면, 반드시 많은 사상자가 날 것입니다. 산성 주위에 구축한 목책의 경계를 강화하여 외부와의 연락을 철저히 차단하고, 저들의 힘을 소모시켜 지쳐서 항복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가장 좋은 계책입니다.
청 태종은 심사숙고 끝에 다음과 같이 지시했다.
산성이 험준하여 이를 함락시키자면 아군의 피해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조선국왕의 죄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명령대로 공격준비를 갖추도록 하라.
1월 25일 아침부터 청군은 포위망을 산성 주변 500m 지점까지 압축시켰으나 해질 무렵까지 포격만 하고 공격하지는 않았다.
1월 26일 강화도에 가 있던 전 영의정 윤방(尹昉) 등이 장계와 대군의 친서를 보내 와서 조선측은 비로소 강화도가 함락된 줄을 알았다.
이 날 군졸들의 반란 기운마저 있었다. 이들은 척화를 주장한 자들을 내놓으라고 소란을 피웠다.
1월 27일 이홍주, 최명길, 김신국이 청군 진영으로 가서 국서를 전달했다.
조선국왕은 대청국 관온인성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신이 이 달 20일에 성지(聖旨)를 받들어보니 ‘이제 네가 산성을 고단하게 지키다가 짐이 손수 쓴 준절히 책망하는 조서를 보고서 죄를 뉘우칠 것을 아니, 짐이 넓은 도량을 열어 네가 스스로 새로워지기를 허락하고 너로 하여금 성을 나와 짐을 만나보기를 명하는 것은, 첫째는 네가 성심으로 기쁜 마음으로 복종함을 보고자 함이요, 둘째는 네게 은혜를 베풀어 다시 나라를 다스리게 한 다음 군사를 돌이켜서 나중에 仁과 信을 천하에 보이고자 함이다.
이제 짐이 하늘의 돌보심을 받들어 천하를 무마하여 안정시키는 중이므로 너의 지난 번 잘못을 용서하여 남조(南朝 : 명나라)에 드러내 보이고자 한다. 만약 너를 간사한 꾀로 잡는다 하더라도 크나큰 천하를 어떻게 죄다 간사한 꾀로 속여 취할 수 있겠느냐? 이는 스스로 귀순하는 길을 끊는 것이다‘ 라고 하셨습니다.
신은 성지를 받들고는 천지를 다 용납하고 뒤덮을 폐하의 큰 덕에 감복하여 귀부(歸附)할 생각이 마음에 더욱 간절합니다. 신의 몸을 뒤돌아보건대, 죄가 산처럼 쌓여서 폐하의 은혜와 신의를 몰라보고, 분명히 뜻을 보이신 조서가 내리고 황천(皇天)이 임하셨는데도 오히려 두려움을 품고 여러 날을 배회하여, 앉아서 명령을 태만히 한 꾸지람을 쌓았습니다.
이제 듣자오니 폐하께서는 곧 어가(御駕)를 돌이키시리라 하니, 만약 빨리 스스로 나아가 용안(龍顔)을 우러러보지 않았다가는 신의 조그만 정성을 펼 길이 없을 것이니, 나중에 그리워한들 어찌 미치겠습니까? 오직 신은 장차 300년 종묘사직과 수천리 생령(生靈)을 폐하께 의탁하고자 하옵니다.
정리(情理)가 참으로 가련합니다. 만약 일에 차질이 생긴다면 칼을 들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만 같지 못하겠습니다. 엎드려 폐하의 자비를 바라노니 신의 혈성(血誠)을 굽어 살피시고 칙지(勅旨)를 내리셔서, 신이 안심하고 명에 따를 길을 열어 주소서. 삼가 죄를 무릅쓰고 아뢰옵니다.
이날 청군은 하루 종일 포격을 했다.
1월 28일 홍서봉& #8228;김신국& #8228;최명길(崔鳴吉)이 청군 진영에 가서 항복절차를 논의했다. 용골대는 제이등 절목으로 항복의 예를 치르기로 결정했음을 알렸다.
이 일은 옛날부터 규례(規例)가 있는데, 제일등 절목(節目)은 너무 참혹하니 그만두고 제이등 절목으로 하는 것이 좋겠소.
제일등 절목이란 함벽여츤(銜璧輿& #27372;)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함벽여츤이란 항복한 군주가 손을 뒤로 결박 짓고 구슬을 입에 물며 관(棺)을 짊어지고 가는 항복 의식을 말한다. 구슬은 진공(進貢)을 뜻하고 관(棺)을 짊어지고 가는 것은 승자가 죽여도 이의 없다는 의사 표시이다. 한 마디로 무조건 항복을 말한다. 진(秦)의 3세 황제 자영이 한 고조 유방에게 항복할 때 이 의식을 거행했다. 청 태종이 함벽여츤을 명하지 않고 제이등 절목을 지시한 것은 자비를 베풀었다 할 수 있다.
청측에서는 임금을 수행하는 신하와 노비를 합쳐 5백 명만 거느리고 위의(威儀)와 군사는 갖추지 말고 그믐날 항복하라 명했다.
28일 오전에도 청군의 포격이 맹렬했으나 항복이 결정되어 오후부터는 포격이 멈췄다. 이날 밤 용골대와 마부대가 청 태종의 답서를 가지고 와서 전했다.
관온인성황제는 조선 국왕에게 조서를 내려 깨우치게 한다.
보내 온 주문(奏文)을 보건대, 20일의 조칙 내용을 갖추어 진술하고, 종묘사직과 백성의 계책을 근심하면서 조칙의 내용을 분명히 내려 안심하고 귀순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달라고 청한 것은 짐이 식언하지 않을까 의심하는 것이냐?
그러나 짐은 항상 진심을 펴서 다만 전에 한 말을 반드시 실행할 뿐 아니라, 아울러 너의 훗날의 유신(維新)을 도울 것이며, 이제 전에 지은 죄를 모두 용서하고 규례를 정해서 임금과 신하가 되면 대대로 신의를 지킬 것이다.
네가 만약 지난날을 뉘우치고 스스로 새로워져서 은덕을 잊지 않고 몸을 맡겨 귀순하여 자손의 장구한 계획을 삼으려 한다면, 명나라에서 준 고명(誥命)과 책인(冊印)을 바쳐 죄를 청하고, 명나라와의 국교를 끊고 그 연호를 폐지할 것이며, 일체의 공문의 내왕에는 우리의 정삭(正朔)을 받들라.
그리고 너의 맏아들과 둘째 아들을 인질로 하고 대신으로서 자식이 있는 자는 자식을 인질로 하되 자식이 없는 자는 아우를 인질로 하라. 만일 네게 뜻밖의 일이 있을 때에는 짐이 질자(質子)를 세워 왕위계승을 하게 할 것이다.
그리고 짐이 명나라 정벌을 하게 되면 조서를 보내 사신을 보낼 것이니, 보병& #8228;기병과 수군을 조달하되 몇 만이 되더라도 기일을 정해 만날 곳을 어겨서는 아니 된다. 짐이 이제 돌아가는 길에 가도(& #26933;島)를 공격하여 빼앗을 것이니, 너는 배 50척을 내고 水兵, 창과 화포 활과 화살을 갖추어 대비할 것이며, 大兵이 회군할 때에는 마땅히 호군(& #29330;軍)의 예를 바칠 것이다.
또한 정조(正朝 : 정월 초하루)& #8228;동지(冬至)& #8228;중궁의 천추(千秋)& #8228;태자의 천추 및 경조(慶弔) 등에 다 예를 바치되, 대신과 내관(內官)에게 명하여 표를 받들고 올 것이며, 그 바치는 표전(表箋)의 격식에 대해서는 나중에 짐이 조서를 내릴 것이다. 그리고 혹 일이 있어 사신을 보내 유지(諭旨)를 전하거든 네가 사신을 만나 보아야 하고, 혹은 너의 신하가 사신을 알현하거나 사신을 맞이하고 보내는 전례는 모두 명나라에 대한 구제(舊制)대로 하여 어김이 없어야 한다.
군중의 포로는 압록강을 지난 뒤에 혹 도망하여 돌아오는 자가 있으면 잡아서 본주인에게 보내라. 만약 속환(贖還)하고자 하면 본주인의 편의에 따라 들어 줄 것이다. 포로들은 우리 군사가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 사로잡은 것이니, 너는 나중에 차마 결박지어 보낼 수 없다고 말하지 말지어다.
내외 모든 신하들과 서로 혼인을 하여 화호(和好)를 굳게 할 것이며, 새 성을 쌓거나 낡은 성을 수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너희 나라로 도망간 우량하(兀良哈)를 모두 돌려보내라.
일본과의 무역은 전과 같이 하기를 허락할 것이니, 그 사자를 인도하여 우리나라에 오게 하여라. 짐이 또한 장차 일본에 사신을 보낼 것이다. 동쪽 변경에 도피해 가서 사는 우량하와는 다시 무역을 하지 못하며, 만약 그들을 발견하거든 잡아 보내야 한다.
너는 이미 죽은 몸인데 짐이 다시 살려주어 거의 망하게 된 너희 종묘사직을 보전하게 되고, 이미 잃었던 너희 아내와 자식을 온전히 찾게 되었으니, 너는 마땅히 나라를 다시 세워준 은혜를 생각하여 훗날 자자손손이 신의를 어기지 아니하면 국가는 영원히 안전할 것이다. 짐은 너희 나라가 교활하여 반복을 잘 하므로 이에 조서로 지시한다.
숭덕 2년 정월 28일.
해마다 바쳐야 할 조공은 황금 100냥, 백은(白銀) 1,000냥, 수우각 궁면(水牛角弓面) 2백 부(副), 표범가죽 백장, 차(茶) 천포, 수달피 4백장, 청서피(靑鼠皮) 3백장, 호초(胡椒) 10두(斗), 호요도(好腰刀) 26파(把), 소목(蘇木) 2백근, 호대지(好大紙) 천권, 순도(順刀) 10파, 호소지(好小紙) 천오백권, 오조용문석(五爪龍紋席) 4령(領), 각종 화문석(花紋席) 40령, 백저포(白苧布) 2백필, 각색 면주(綿紬) 2천필, 각색 세마포(細麻布) 4백필, 각색 세포(細布) 만필, 포(布) 천사백 필, 쌀 만포를 정식(定式)으로 삼는다.
1월 29일 이종이 청 태종에게 다시 국서를 보냈다.
조선국왕 아무개는 삼가 관온인성 황제 폐하께 글을 올립니다.
저희 작은 나라에 일찍이 하나의 허튼 논의가 있어서 나라 일을 몹시 그르쳤으므로 지난해 가을 이후로 신이 그 가장 심한 자 몇 사람을 적발하여 모두 파면하고, 앞장서서 주장한 대간(臺諫) 한 사람은 천병(天兵)이 저희 국경에 도착했을 때 평양서윤(平壤庶尹)으로 내보내서 그 날로 떠나가게 했는데, 혹 천병에게 사로잡혔는지 또는 샛길로 하여 부임했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습니다.
지금 성안에 있는 자는 혹 부화뇌동한 죄는 있으나, 전번에 파면한 자와 비교하면 그 가볍고 무거움이 현격하게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전일의 조서를 뵈온 즉 실로 저희 작은 나라를 지극히 아끼는 바에서 나온 말씀이라, 만약 머뭇거렸다가는 폐하께서 미처 우리나라의 사정을 살피지 못하시고 신이 일부러 숨기는 것이 아닌가 의심하시어, 신의 성심으로 귀순하는 마음을 밝힐 길이 없게 될까 두려워 두 사람을 색출하여 보내어 군문(軍門)에 가 뵙게 하옵니다. 처분을 바라며 삼가 죄를 무릅쓰고 아룁니다.
(6) 삼전도의 항복
1월 30일 이종과 소현세자는 남융복(藍戎服)을 입고 3정승 5판서를 인솔하여 남한삼성에서 나와 삼전도로 갔다. 청 태종은 삼전도에 9층으로 된 수항단(受降壇)을 만들어 황색 장막을 치고 황색 일산(日傘)을 세웠다. 군진(軍陳)이 정연하고 엄숙하며 병기가 햇빛에 번쩍였다.
수하의 정예한 군사 수만 명이 모두 키가 크고 건장했다. 이들은 다섯 겹의 면수갑(綿繡甲)을 입고 좌우에 늘어서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은 이 날의 광경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용골대와 마부대가 성 밖에 와서 임금의 출성을 재촉하였다. 임금이 남염의(藍染衣) 차림으로 백마를 타고 의장(儀仗)을 모두 제거한 채 시종 50여 명을 거느리고 서문(西門)을 통해 나갔는데 왕세자가 따랐다. 백관(百官) 중에서 뒤처진 자는 서문 안에 서서 가슴을 치고 뛰면서 통곡하였다. 임금이 산에서 내려 가시를 펴고 앉았는데, 얼마 뒤에 갑옷을 입은 청나라 군사 수백 기(騎)가 달려왔다.
임금이 이르기를
“이들은 뭐하는 자들인가?”
하니 도승지 이경직(李景稷)이 대답하기를,
“이는 우리나라에서 말하는 영접하는 자들인 듯 합니다.”
라고 하였다.
한참 뒤에 용골대 등이 왔는데, 임금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맞아 두 번 읍(揖)하는 예를 행하고 동서로 나누어 앉았다. 용골대 등이 위로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오늘의 일은 오직 황제의 말과 두 대인이 힘써온 것만을 믿을 뿐입니다.”
하자, 용골대 등이 말하기를,
“지금 이후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는데,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 시간이 이미 늦었으니 속히 갔으면 합니다.”
하고, 마침내 말을 달려 앞에서 인도하였다. 임금이 단지 삼공 및 판서& #8228;승지 각 5인, 한림(翰林)& #8228;주서(注書) 각 1인을 거느렸으며, 세자는 시강원(侍講院)& #8228;익위사(翊衛司)의 제관(諸官)을 거느리고 삼전도(三田島)에 따라 나아갔다.
멀리 바라보니 한(汗)이 황옥(黃屋)을 펼치고 앉아 있고, 갑옷과 투구 차림에 활과 칼을 휴대한 자가 방진(方陣)을 치고 좌우에 옹립(擁立)하였으며, 악기를 진열하여 연주했는데, 대략 중국 제도를 모방한 것이었다.
임금이 걸어서 진(陣)앞에 이르고, 용골대 등이 임금을 진문(陣門) 동쪽에 머물게 하였다. 용골대가 들어가 보고하고 나와 한(汗)의 말을 전하였다.
“지난날의 일을 말하려 하면 길다. 이제 용단을 내려 왔으니 매우 다행스럽고 기쁘다.” 임금이 대답하기를
“천은(天恩)이 망극하옵니다.” 하였다.
용골대 등이 인도하여 들어가 단(壇) 아래에 북쪽을 향해 자리를 마련하고, 임금에게 자리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청나라 사람을 시켜 여창(& #33242;唱)하게 하였다.
임금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림)의 예를 행하였다. 용골대 등이 임금을 인도하여 진의 동문을 통해 나왔다가 다시 동쪽에 앉게 하였다.
대군(大君 : 봉림대군을 이름) 이하가 강도(江都)에서 잡혀왔는데, 단 아래 조금 서쪽에 늘어섰다. 용골대가 한(汗)의 말로 임금에게 단에 오르도록 청하였다. 한(汗)은 남쪽을 향해 앉고 임금은 동북 모퉁이에 서쪽을 향해 앉았으며, 청나라 왕자 3인이 차례로 나란히 앉고 왕세자가 또 그 아래에 앉았는데 모두 서쪽을 향하였다. 또 청나라 왕자 4인이 서북 모퉁이에서 동쪽을 향해 앉고 두 대군(봉림대군과 인평대군)이 그 아래에 잇따라 앉았다. 우리나라 시신(侍臣)에게는 단 아래 동쪽 모퉁이에 자리를 내주고, 강도에서 잡혀온 여러 신하는 단 아래 서쪽 모퉁이에 들어가 앉게 하였다.
차 한잔을 올렸다. 한(汗)이 용골대를 시켜 우리나라의 여러 시신(侍臣)에게 고하기를,
“이제는 두 나라가 한 집안이 되었다. 활 쏘는 솜씨를 보고 싶으니 각기 재주를 다하도록 하라.” 하니 종관(從官)이 대답하기를,
“이곳에 온 자들은 모두 문관이기 때문에 잘 쏘지 못합니다.”하였다.
용골대가 억지로 쏘게 하자 드디어 위솔(衛率) 정이중(鄭以重)으로 하여금 나가서 쏘도록 하였는데, 활과 화살이 우리나라의 제도와 같지 않으므로, 다섯 번 쏘았으나 모두 맞지 않았다. 청나라 왕자 및 여러 장수가 떠들썩하게 어울려 쏘면서 놀았다.
한(汗)은 조금 있다가 진찬(進饌)하고 행주(行酒)하게 하였다. 술잔을 세 차례 돌린 뒤 술잔과 그릇을 치우도록 명하였는데, 치울 무렵에 종호(從胡) 두 사람이 각기 개를 끌고 한(汗)의 앞에 이르자 한(汗)이 직접 고기를 베어 던져 주었다.
임금이 하직하고 나오니, 빈궁(嬪宮) 이하 사대부 가족들이 모두 한곳에 모여 있었다. 용골대가 한(汗)의 말로 빈궁과 대군 부인에게 나와 절하도록 청하였으므로 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렸는데, 사실은 내인(內人)이 대신 하였다고 한다.
용골대 등이 한(汗)이 준 백마에 영롱한 안장을 갖추어 끌고 오자 임금이 친히 고삐를 잡고 종신(從臣)이 받았다. 용골대 등이 또 초구(貂& #35032;)를 가지고 와서 한(汗)의 말을 전하기를,
“이 물건은 당초 주려는 생각으로 가져 왔는데, 이제 본국의 의복제도를 보니 같지 않다. 따라서 감히 억지로 착용하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정의(情意)를 표할 뿐이다.”
하니 임금이 받아서 입고 뜰에 들어가 사례하였다.
도승지 이경직으로 하여금 국보(國寶)를 받들어 올리게 하니, 용골대가 받아서 갔다. 조금 있다가 와서 힐책하기를
“고명(誥命)과 옥책(玉冊)은 어찌하여 바치지 않습니까?”
하니, 임금이 이르기를,
“옥책은 일찍이 갑자년 변란(이괄의 난을 말함)으로 인하여 잃어버렸고, 고명은 강화도로 보냈는데 전쟁으로 어수선한 때에 온전하리라고 보장하기 어렵소. 그러나 혹시 그대로 있으면 나중에 바치는 것이 무엇이 어렵겠소.”
하자 용골대가 알았다고 하고 갔다.
또 초구 3령(領)을 삼공(三公 : 3정승을 말함)을 불러 입게 하고, 5령을 오경(五卿)을 불러 입게 하였으며,【형조판서 심집(沈& #35583;)은 대죄(待罪)하고 오지 않았다.】5령을 다섯 승지를 불러 입게 하고,【좌부승지 한흥일(韓興一)은 강도(江都)에 들어갔기 때문에 참여하지 않았다.】말하기를
“주상을 모시고 산성에서 수고했기 때문에 이것을 주는 것이다.” 하였다. 하사(下賜)를 받은 이들이 모두 뜰에 엎드려 사례하였다.
홍서봉과 장유(張維)가 뜰에 들어가 엎드려 노모(老母)를 찾아보도록 해줄 것을 청하니, 【그들의 어미가 강도에 들어갔기 때문이다.】김석을시(金石乙屎)가 화를 내며 꾸짖었다.
임금이 밭 가운데 앉아 진퇴(進退)를 기다렸는데 해질 무렵이 된 뒤에야 비로소 도성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세자와 빈궁 및 두 대군과 부인은 모두 머무르도록 하였는데, 이는 대체로 장차 북쪽으로 데리고 가려는 목적에서였다.
임금이 물러나 막차(幕次)에 들어가 빈궁을 보고 최명길을 머무르도록 해서 우선 배종(陪從)하고 호위하게 하였다. 임금이 소파진(所波津)을 경유하여 배를 타고 건넜다. 당시 진졸은 거의 모두 죽고 빈 배 두 척만이 있었는데, 백관들이 다투어 건너려고 임금의 옷을 끌어 잡아당기기까지 하면서 배에 오르기도 하였다.
임금이 건넌 뒤에, 한(汗)이 뒤따라 말을 타고 달려와 얕은 여울로 군사들을 건너게 하고, 뽕나무 밭에 나아가 진을 치게 하였다. 그리고 용골대로 하여금 군병을 이끌고 행차를 호위하게 하였는데, 길의 좌우를 끼고 임금을 인도하여 갔다. 사로잡힌 자녀들이 바라보고 울부짖으며 모두 말하기를,
“임금이시여, 우리 임금이시여, 우리를 버리고 가십니까.”
하였는데, 길을 끼고 울며 부르짖는 자가 만 명을 헤아렸다. 인정(人定)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서울에 도착하여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으로 나아갔다.
청 태종 홍타이지의 조상 몽거티무르는 조선에 귀부한 적이 있었고 군신 관계를 맺었다. 서울에 두 차례 와서(1395, 1404) 태조 이성계와 태종 이방원을 알현하기도 했다.
오도리(吾都里)의 상만호(上萬戶) 몽거티무르(童猛哥帖木兒) 등 다섯 사람이 와서 토산물을 바쳤다.
(『태조실록』태조 4년 9월 8일)
오도리의 몽거티무르 등 세 사람이 來朝하였다.
(『태종실록』태종 4년 3월 7일)
몽거티무르에게 단의(段衣) 한벌, 삽화은대(揷花銀帶) 하나와 갓& #8228;신을 내려주고 內臣에게 명하여 음식을 대접하고 종자 10여명에게도 포백을 차등있게 주었다.
(『태종실록』태종 4년 3월 18일)
몽거티무르가 하직하고 돌아가고 그 아우와 양자(養子), 처제를 머물러 두어 시위(侍衛)하게 하여 임금이 물건을 차등있게 주고, 또 최야오내(崔也吾乃)에게 주포& #8228;면포를 각각 1필씩 주었다.
(『태종실록』태종 4년 3월 21일)
몽거티무르는 여진의 일개 부족장이었고 이성계는 일국의 군주였다. 이성계, 이방원이나 몽거티무르가 200여년 후에 자신의 자손들이 삼전도에서 처지가 뒤바뀌어 군신의 예로 만나리라고 상상할 수나 있었겠는가. 이보다 더한 인생유전(人生流轉)은 없을 것이다.
2월 2일 청 태종이 귀환길에 올랐다. 이종은 동쪽 교외까지 전송하였다.『병자록(丙子錄)』은 이 날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성 안의 사람들이 모두 잠자리에서 밥을 먹고 아침 일찍 성에서 내려왔는데, 적병이 곳곳에 수없이 있어, 평일에 늘 다니던 곳도 아리송하여 동서를 분간할 수 없었다.
적진 가운데는 우리나라 사람으로 적에게 포로가 된 이가 절반이 넘는데, 드러내 놓고 말을 하지는 못하고, 혹 어떤 이는 눈물을 흘리면서 속으로 흐느껴 울며 바라보고, 혹 어떤 이는 머리를 번 듯이 들고 합장(合掌)하며, 모두 길옆에 나와 엎드려 무슨 호소할 말이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적이 보면 반드시 철편(鐵鞭)으로 때리니 그 참혹한 모습은 차마 볼 수가 없었다.
몸치장을 하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의기양양하게 말을 달려가는 계집이 있었는데, 적에게 잡힌 관서(關西) 지방의 관기(官妓)라고 했다. 또 적병 가운데 거만하게 번듯이 누워 담뱃대를 비스듬이 빨면서 조금도 근심하고 슬퍼하는 기색이 없는 자는 어떤 심보인지 모르지마는 몹시 괘씸했다.
사대부의 처첩과 자녀들은 차마 얼굴을 드러내 놓고 남을 볼 수가 없어서 옷을 머리에 뒤집어쓰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삼전도에 있는 적의 본진에 도착하니, 세자께서 그 안에 머물러 계신데 적진의 단속이 매우 엄해서 들어가 뵈올 길이 없었다. 신하의 정으로 망극하기 이를 데 없었다.
어떤 이들은 한강을 여울로 건너는데 물이 깊어서 말안장에까지 물이 차고, 어떤 이들은 배로 건너는데 서로 먼저 건너려고 앞을 다투어 아침부터 저녁까지 혼란이 계속되었다.
적이 수레에다가 대포와 그에 딸린 장치들을 실어 가는데, 그 크기가 두 칸 대들보 만하였다. 수레는 매우 빨리 가도록 만들었고 소 한 마리가 끌고 가는데 수레 행렬이 큰길에 연이었다.
남한산성 아래에서 마포 서쪽까지, 한강에서 현석(玄石) 동쪽까지 적병이 들에 가득 차서, 남으로 내려갔던 군사가 미처 돌아갈 수가 없었다.
이 날 한(汗)이 출발하여 전하께서 동교(東郊)까지 나가서 전송하셨다. 한(汗)은 전관(箭串 : 살곶이, 서울 성동구 사근동)의 마장(馬場)을 경유하여 바로 양주(楊洲)로 향해 익담령을 넘어 서로(西路)로 나갔다. 나머지 군사도 날마다 얼마씩 돌아갔는데 2월 13일에 가서야 끝났으니, 그 군사가 얼마나 많았는지 알 수 있었다.
몽고병은 강원도를 경유하여 북도(北道)로 들어가 돌아갔는데, 그들은 모두 처음에 늙은이 어린애며 처자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가 아니라 그들 나라가 되었다고 할만했다.
전관(箭串)에서부터 서울 도성(都城)까지에는 적진(賊陣)은 없고, 죽은 우리나라 사람이 길에 가득 널려 있어, 마음이 아프고 눈이 일그러졌다.
도성 안에 들어서니 여염집들은 다 거덜이 났다. 향교동구(鄕校洞口)에서부터 좌우의 붓방(筆肆)& #8228;행랑과 대광통교& #8228;소광통교에 이르기까지 좌우의 인가는 모두 불타 버렸다. 모든 관리들이 다 대궐 안에 들어가 있는데, 정원(政院 ; 승정원)은 차비문 앞에 있고 여러 관원이 함께 정원에 들어 차 있어서 분별할 수가 없었다.
각사(各司)의 서리(書吏)들은 모두 부모 처자가 생사를 알러 나가고, 다만 정원의 이속(吏屬) 고인계(高人繼)라는 자와 호조의 이속, 병조의 이속 두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산성에서 나올 때 적에게 약탈을 당한 사람들이 있었다. 전 참의(參議) 이상급(李尙伋)은 산성에 있을 때부터 병이 있어 뒤떨어졌다가 혼자 오는데, 적이 옷을 죄다 벗겨 가서 그날 밤에 얼어 죽었다.
2월 8일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볼모가 되어 예친왕 도르곤과 함께 심양을 향해 떠났다.다음은『병자록(丙子錄)』2월 8일자 기록이다.
전하께서 세자의 가는 길을 전송하시려고 날이 샐 무렵에 창릉(昌陵) 건너편 길가로 나가셨는데, 어떤 사람이 九王이 창릉 아랫길로 온다고 말을 잘못 전하여 전하께서 황급히 어가를 몰아 거의 10리는 가셨을 때, 또 어떤 사람이 홍제원으로 해서 온다고 하여, 되돌아서서 급히 달리다가 도중에서 구왕을 만나셨다. 잠시 말을 멈추시고 이야기하신 다음 작별하신 뒤에 세자의 막차(幕次)로 돌아오셨다. 전하와 빈궁 및 대군부인은 장막 안으로 들어가시어 말씀하시고, 세자께서는 장막 밖에 계시어 모든 신하들이 나아가 절을 하고 울음으로 작별을 고했다.…
연전에 의주(義州) 역관으로 있던 한보룡(韓甫龍)이 이번에 오랑캐의 통역으로 왔는데, 그는 사대부들에게,
“저는 비록 몸은 오랑캐 땅에 빠졌습니다마는 본국을 위해 어찌 무성의하겠습니까?”
하고 저들의 상황을 낱낱히 이야기해 주었다. 그래서 내가 물었다.
“이번에 온 군사가 얼마인가?”
“20만이라 하지만 14만입니다.”
“적병이 우리나라에 와서 죽은 자가 얼마나 되는가?”
“불과 몇 만 밖에 안됩니다.”
내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적의 장수 가운데 죽은 자가 있는가?”
“직함이 우리나라 방어사(防禦使)와 같은 한의 매부가 광교산 전투에서 죽었습니다.”
“그때 심양에는 군사가 없었는가?”
“왜 없습니까? 저들이 나라를 비워 놓고 올 리가 있겠습니까? 거기도 6, 7만은 있었습니다.”
이때 다른 오랑캐 통역이 오니 보룡은 다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잠시 후 세자와 봉림대군이 출발하시니 빈궁의 시비 6명과 대군 부인의 시비 4명이 따랐다. 백관이 일시에 통곡하고, 전하 역시 연방 눈물을 씻으시었다. 이 날의 광경은 참으로 고금에 드문 일이었다.
적은 해가 뜰 무렵부터 대로를 세 줄로 행군하기 시작했다. 우리나라 사람 수백 명이 앞서 가면 오랑캐 한 둘이 뒤를 따라 가곤 했는데, 종일토록 끝이 나지 않았다. 후일 심양의 인시(人市)에서 거래된 수가 60만 명이었고 몽고군에 포로가 된 자는 이 수에 들어가지 않는다고 하니 끌려간 사람이 얼마나 많았던가를 알 수 있다.
전하께서는 참혹한 꼴을 차마 보실 수가 없으시어, 오실 때에는 큰 길로 오지 않으시고 동쪽 서산& #8228;송천길로 산을 따라 오시어 신문(新門 ; 돈의문의 다른 이름, 지금 신문로가 곧 그 문 안쪽이므로 새문안이라고 함)으로 환궁하셨다.
이때 필시(筆市) 노상에서 한 노파가 손바닥으로 땅을 치고 울면서 큰 소리로 말했다.
“여러 해를 두고 강화도를 수리하여 백성들이 의지하게 했는데, 어찌하여 오늘날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검찰 이하로 나라의 중한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날마다 술 마시는 것으로 일을 삼아 마침내는 백성들을 죄다 죽게 만들었으니, 이것이 누구의 탓이란 말이냐. 나와 너의 자식과 남편이 다 적의 칼에 죽고 단지 이 몸만 남았다. 아, 하늘이시여, 세상에 이런 원통한 일이 있습니까.”
듣는 사람이 모두 슬퍼했다.…
노파의 말은 피할 수 있었던 이 전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백성들이 어리석고 무능한 왕조를 원망하는 인심을 잘 드러낸 것이었다.
긴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