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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삼국유사 기이, 삼국유사 감통, 밀양박씨세보 박혁거세 알영 탄생 신화 비교]
개산팔경 박 희용
(1) 삼국사기
髙墟村長蘇伐公, 望楊山麓, 蘿井傍林間, 有馬跪而嘶. 則徃觀之, 忽不見馬, 只有大卵, 剖之, 有嬰兒出焉. 則收而養之, <박혁거세>
고허촌의 우두머리인 소벌공(蘇伐公)이 양산의 기슭을 바라보니, 나정(蘿井) 옆 숲속에서 말이 무릎을 꿇고 울부짖고 있었다. 그래서 가서 살펴보니 홀연히 말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알이 있었다. 알을 깨뜨리니 어린아이가 나왔다. 이에 거두어서 길렀는데,
五年, 春正月, 龍見於閼英井. 右脇誕生女兒, 老嫗見而異之, 收養之. 以井名名之. <알영>
5년(B.C. 53) 봄 정월에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 노구(老嫗)가 보고서 기이하게 여겨 거두어 길렀다. 우물의 이름을 따서 아이의 이름을 지었다.
(2) 삼국유사 기이편
前漢地節元年壬子古本云建虎元年, 又云建元三年等皆誤三月朔, 六部祖各率子弟俱㑹於閼川岸上議曰, “我軰上無君主臨理蒸民, 民皆放逸自從所欲, 盍覔有徳人爲之君主立邦設都乎.”
전한 지절(地節)원년 임자(壬子)(기원전 69년)(고본(古本)에 이르기를 건호(建虎-建武) 원년(25년)이니 건원(建元) 3년(138년)이니 한 것들은 다 잘못이다) 3월 초하룻날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기를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 하였다.
時乗高南望, 楊山下蘿井傍異氣如電光垂地, 有一白馬跪拜之状. 尋撿之有一紫卵一云青大卵, 馬見人長嘶上天. 剖其卵得童男形儀端羙. 驚異之, 浴於東泉 東泉寺在詞腦野北, <박혁거세>
이때에 모두 높은 데 올라가 남쪽을 바라보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우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또는 푸른 빛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고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 그 알을 쪼개 보니 형용이 단정하고 아름다운 사내아이가 있었다. 놀랍고도 이상하여 아이를 동천(東泉)(동천사(東泉寺)는 사뇌벌(詞腦野) 북쪽에 있다)에서 목욕을 시키매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讃屳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是日沙梁里閼英井一作娥利英井邉有雞龍現, 而左脇誕生童女一云龍現死, 而剖其腹得之.姿容殊麗. 然而唇似雞觜將浴於月城北川其觜撥落, <알영>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또는 아리영정(娥利英井)이라고도 한다)에서 계룡이 나타나서 왼쪽 옆구리로부터 동녀(童女)(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고도 한다)를 낳으니 자색이 뛰어나게 고왔다. 그러나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
(3) 삼국유사 감통편 선도성모
第五十四景明王好使鷹, 甞登此放鷹而失之. 禱於神母曰, “若得鷹當封爵.” 俄而鷹飛来止机上, 因封爵大王焉. 其始到辰韓也生聖子爲東國始君, 盖赫居·閼英二聖之所自也. <경명왕과 선도성모>
제54대 경명왕(景明王)이 매사냥을 좋아하여 일찍이 이 산에 올라 매를 놓았으나 잃어버렸다. 신모에게 기도하여 말하기를 “만약 매를 찾으면 마땅히 작호를 봉하겠습니다”라고 하니 잠시 뒤 매가 날아와서 책상 위에 멈추었다. 이로 인하여 대왕으로 책봉하였다. 그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대개 혁거세와 알영 이성(二聖)이 나온 바이다.
又國史史臣曰. 軾政和中甞奉使人宋, 詣佑神舘有一堂設女仙像. 舘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祖, 女爲地仙長在仙桃山, 此其像也. <김부식과 송나라 왕보의 말>
또한 국사에서 사신(史臣)이 말하였다. 김부식이 정화(政和) 연간에 일찍이 사신으로 송(宋)나라에 들어갔는데 우신관(佑神館)에 가니 한 당(堂)에 여선상(女仙像)이 모셔져 있었다. 관반학사(館伴學士) 왕보(王黼)가 말하기를 “이것은 귀국(貴國)의 신인데 공은 아는가?”라고 하였고 이어서 말하기를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닿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라고 하였다.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祭東神聖母女有娠賢肇邦之句.” 今能施金奉佛爲含生開香火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송나라 사신 왕양의 제사>
또한 송나라 사신 왕양(王襄)이 우리나라에 와서 동신성모(東神聖母)를 제사 지냈는데 제문에 “어진 이를 낳아 나라를 세웠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4) 밀양박씨세보
漢宣帝地節元年壬子秋七月聖母自仙桃山降于楊山蘿井
始祖誕降有神異祥 <박혁거세>
한나라 선제 지절 원년(BC 69년) 임자년 가을 7월에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 신이하고 상서로움이 있었다.
始祖王妃閼英氏初龍見於閼英井 始祖王妃誕降有神異祥 <알영>
시조왕비 알영씨는 처음에 용으로 알영우물에 나타났다. 시조 왕비의 탄강도 신이하고 상스러웠다.
(5) 세 종류 책에 나타난 탄생 신화와 설화 비교
양산 나정, 말, 알, 용, ‘곧 깨뜨리니 아이가 나왔다’와 ‘옆구리에서 출생한 여자아이’ 등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공통어이다. 그런데 삼국사기는 말과 알이란 말뿐이지만 삼국유사는 말은 ‘흰 말’이고, 알은 ‘보라 빛’ 등으로 구체적이다.
삼국사기는 1145년에, 삼국유사는 1281년에 간행되어 136년의 시차를 갖는다. 그런데도 후세인 삼국유사의 기록이 더 구체적이고 상세한 것을 보면 김부식과 일연 두 사람이 참고한 고대 사료나 서적이 동일하지만 취사선택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김부식은 유학자 사대부로서 “신라, 고구려 등 고대 나라들의 이적들이 믿을 것이 못 되지만 전해 내려온 사서의 기록이기 때문에 후세에 남기기 위해 쓴다”라는 그의 말대로, 안 실을 수도 없고 해서 합리성을 잠시 접고 최대한 줄여서 실었을 것이다. 반대로 일연은 민간의 신화와 설화를 불교 설화와 같은 개념으로 보는 승려의 관점에서 전래하는 사서들을 최대한 수용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삼국유사의 기록이 전래의 사서들을 더 잘 반영하였으므로 박혁거세 탄생 신화의 전모를 제대로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일연은 박혁거세거서간 신화를 수용하면서 불교와 접목시켰다. 이를 논하기 전에 삼국유사의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 탄생 신화를 살펴보도록 하자.
먼저 알의 발견과 박혁거세의 탄생일을 삼국유사는 ‘전한 지절(地節)원년 임자(壬子) 3월 초하룻날 (기원전 69년)이라고 년 월 일까지 지정하여 말한다. 특히 첨언으로 ’고본(古本)에 이르기를 건호(建虎-建武) 원년(25년)이니 건원(建元) 3년(138년)이니 한 것들은 다 잘못이다‘라 하여 정확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서 나오는 ’흰 알과 아이, 죽은 계룡의 옆구리에서 ㄲ‘ 등은 신화 이렇게 년 월 일을 정확하게 말하는 연유가 무엇이겠는가. 이날에 경주 지역에 무슨 역사적인 사실이 있었다는 말이 된다.
이미 경주에 정착하여 뿌리를 내린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다니 ’양산(楊山) 밑 나정(蘿井) 곁에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서‘ 가보았더니, ’웬 흰 말 한 마리가 무릎을 꿇고 절하는 시늉을 하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거기를 살펴보니 보랏빛 알 한 개(또는 푸른 빛 큰 알이라고도 한다)가 있었다. 말은 사람을 보자 울음소리를 길게 뽑으면서 하늘로 올라갔다‘가 품고 있는 상징을 어떻게 읽을 것인가.
6부민들은 정착민이고 박씨족은 이주민이다. 기원전 69년경의 정착민은 청동기 문명이고 흰말을 타고 달려온 이주민은 기마에 능한 철기 문명이다. ’흰말‘은 박씨족 군마들을 상징하고,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는 박씨군대의 위용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민속신앙에서 보면 ’나정‘과 ’알영정‘은 동북아시아에 광범위하게 분포된 정천신앙(井泉信仰)이고, 선도산은 몽골 서부 지역의 산신신앙(山神信仰)이다. ’6부의 조상들이 각각 자제들을 데리고 다 함께 알천(閼川) 언덕 위에 모여 의논하다니‘는 6부 백성들이 모두 알천 언덕 위에 모여 박씨족에게 저항할 것인가 항복할 것인가를 의논하였다는 말이다. 인구가 늘어나서 사회가 복잡해지고, 인접 지역 부족들과 다툼이 발생하면서 6부민들은 “우리들이 위로 백성들을 다스릴 만한 임금이 없어 백성들이 모두 방종하여 제멋대로 놀고 있으니 어찌 덕이 있는 사람을 찾아내어 그를 임금으로 삼아 나라를 창건하고 도읍을 정하지 않을 것이랴!”라는 표현대로 종합의 우두머리, 즉 군왕의 필요성을 공감하는 차에 신래한 박씨족이 새로운 지도층으로 적당했을 것이다. 감통편의 <선도산 성모>와 연결해 보면, 박씨족이 처음으로 들어 온 방향이 경주의 서쪽인 선도산 지역이다.
이미 정착하여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는 6부민들과 살육을 기피하는 빅씨족이 타협할 수 있는 방도가 무엇이었겠는가. 박씨족이 합의된 지도자, 즉 왕이 되고 6부의 부족장들이 귀족이 되는 연합 체제가 최선이었다. 단. 당장에 지배자가 되는 게 아니라 서서히 시간이 흐른 후에 자연스럽게 왕조 체제를 갖추기 위해서 타협했고, 그 방법으로 이주민 세대가 아닌 정착민 형태로서 어린 혁거세를 왕으로 추대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원만한 타협을 ’6부의 사람들이 그 탄생이 신비롭고 기이하다고 하여 떠받들었는데, 이때 이르러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로 표현하고 있다. 왕은 명목상의 대표이고 6부 귀족들이 실권을 장악하는 정치 체제로서 유력한 부족 출신의 알영을 왕비로 하였다. 또한 박혁거세거서간과 알영이 혼인하여 낳은 공주가 성장하자 양산촌 이알평에게 시집보내어 왕권과 신권의 연대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형식적인 타협을 하기까지 내적으로는 약간의 갈등과 충돌이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알과 용에 나타나고 있다.
난생설화에서 알은 일정 기간 품어야만 안에 든 생물이 스스로 알을 깨고 밖으로 나온다. 그런데 알을 발견한 6부인들은 알을 발견한 즉시로 쪼개 보았다. 궁금하기도 했지만 거부, 반대하는 뜻도 있다고 볼 수 있다. 흰말이 울고는 하늘로 날아가고 ’이상한 기운이 번개처럼 땅‘에 드리워지고 흰말이 무릎을 꿇고 절하다가 길게 울고는 하늘로 날아가는 신기한 상황에서 함부로 알을 깨보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도 쪼개 보았다는 말은 처음엔 거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강한 박씨족의 무력 앞에서 현실에 순종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어지는 알영 탄생 신화에서도 마찬가지로 은연중에 거부의 의미가 읽히고 있다. 삼국사기에서는 ’용이 알영정(閼英井)에 나타났다. 오른쪽 옆구리에서 여자아이가 태어났는데‘라고 간단히 언급하지만, 삼국유사에서는 자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삼국유사에서는 ’계룡의 왼쪽 옆구리로부터 낳았다‘라고 하면서도 ’혹은 용이 나타나 죽으매 그 배를 가르고 얻었다‘라며 이중 장치를 하고 있다. 이어지는 ’입술이 닭의 부리 같은지라 월성(月城) 북천(北川)에 가서 목욕을 시켰더니 그 부리가 퉁겨져 떨어졌으므로‘를 보면 알영 탄생에서 뭔가 석연치 않은 일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산 용이 힘이 있지 죽은 용은 힘이 없고, 죽은 용에서 태어난 아이는 이미 죽은 것과 마찬가지로 힘이 없다. 또한 ’입술이 닭의 부리 같았으니‘를 보면 처음엔 인물이 없었으나, 즉 반대가 많았으나, ’나중에 목욕을 시켰더니 떨어져 나갔다‘를 보면 나중에는 결국 왕비로 간택되었음을 나타내는 비유로서, 알영의 탄생이 순조롭지 않았음을, 즉 왕비의 간택이 순조롭지 않았음을, 왕비 자리를 놓고 6부 간에 알력과 갈등이 있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 용은 왕을 의미한다. 그런데 산 용이 아니라 죽은 용에서 꺼낸 알영이 왕비가 되었으나 실세하고 왕비 부족이 패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밀양박씨세보에서 글자 한 자 한 자 고르고 다듬어 쓴 데도 불구하고 ’始祖王妃閼英氏初龍見於閼英井‘이라 하여 ’알영‘ 다음에 ’氏‘ 자를 붙인 이유가 있을 것이다. 알영 개인으로 대표되는 한 씨족을 나타낸다고 봐야 할 것이다. 알영정은 나정과 가까운 현재의 경주시 탑동 지역으로 돌산 고허촌 사량부 정씨 소벌도리의 영역이다. 소벌도리는 양산촌 나정에서 발견된 아기 혁거세를 데려다가 키웠다. 그러니 자기 씨족 중에서 왕비를 낼 권위와 공로가 충분하다. 이 신화를 처음 지은 연대는 왕비족이 알영족에서 김씨족이나 석씨족으로 바뀐 때일 것이다. 양 성인의 신화를 통해서 초기에는 박혁거세의 양산촌과 알영의 대수촌이 왕과 왕비를 배출하며 세력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알영의 탄생 시기도 삼국사기는 ’5년(B.C. 53) 봄 정월‘이라 하고, 삼국유사는 ’이날 사량리(沙梁里) 알영정(閼英井)계룡이 나타나서‘이라 하여 혁거세와 같은 날에 태어났다고 한다.
또한 삼국사기 감통편 <선도성모>에서는 박혁거세 탄생 씨기에 대한 언급 없이 ’그 처음 진한에 와서 성자(聖子)를 낳아 동국의 첫 임금이 되었으니 대개 혁거세와 알영 이성(二聖)이 나온 바이다‘와 ’옛날에 중국 황실의 딸이 바다를 건너 진한(辰韓)에 닿아서 아들을 낳았는데 해동의 시조가 되었고, 딸은 지선(地仙)이 되어 오랫동안 선도산에 있었으니 이것이 그 상이다‘라고 하며 태어난 때를 말함이 없이 선도성모가 아들 혁거세와 딸 알영을 낳은 것처럼 묘사하고 있다.
이것은 남매 결혼으로 유교적 관점에서는 허용할 수 없는 패륜이지만 고대 사회에서 왕실은 성골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성행했음을 감안하여 만든 설화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아무리 근친혼이라 하더라도 박씨 석씨, 김씨의 신라 성골들이 남매간에는 결혼하지 않았다. 그래서 밀양박씨세보는 <김부식과 송나라 왕보의 말>을 취하지 않았다.
그런데 밀양박씨세보는, 박혁거세의 탄생 年와 장소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인용하였으나, 생일은 달리한다. 삼국유사는 탄생일을 ’3월 초하룻날‘이라 하나 밀양박씨세보는 ’가을 7월‘이라 한다. 가장 중요한 산모에서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언덕에 놓인 알‘이라 하여 하늘에서 내려왔거나 누가 슬그머니 가져다 놓은 경우로 상정하고 있다. 말이 옆에서 무릎을 꿇고 절하다가 사람들이 나타나자 안심하고 길게 울면서 하늘로 날아간 걸 보면 알을 낳은 것은 아니고 모시고 온 것이다.
그런데 밀양박씨세보는 삼국유사 감통편대로 ’성모가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가 태어났는데‘라 하여 박혁거세를 낳은 어머니로 <선도성모>로 기록하고 있다. 왜 삼국유사 감통편을 인용하였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밀양박씨세보는 고려말에 시작되어 조선초기 세조 때 집현전 박사를 지낸 51세 박중손 대에 대강이 세워진 것 같은 데, 당시는 유교 논리의 기초가 세워지던 때로서 척불정책과 함께 도교, 선교, 풍류도, 무속 등 민속신앙이 배척되고 있었다. 그런데도 불교와 도교, 선교, 풍류도, 무속 등 민속신앙의 요소가 든 <선도성모>를 시조의 어머니로 설정하였다.
그렇다면 먼저 <선도성모> 설화에 대한 분석이 우선되어야 할 것이다.
오늘날 ’巫敎‘란 개념으로 정착되고 있는 명산대천 숭배, 거석거목 기도, 산신령, 삼신할미, 성황당, 성주, 터줏대감, 굿, 점복 등 민속신앙의 원류가 이미 청동기시대부터 한반도와 남만주에서 유행했음을 단군신화, 박혁거세와 알영 신화, 동명성왕 신화, 고주몽 신화 등 대표적인 신화 외에도 지역과 성씨에 따라 곳곳에 있는 작은 신화나 이적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초창기 신라의 삼대 세력은 서쪽 선도산의 박씨족과 동남쪽 토함산의 석씨족이었다. 안동 의성 지역에서 남하한 김씨족이 북쪽에 정착했을 것이다. 세력이 둘이면 서로 우열을 다투지만 三鼎, 발이 셋이면 한쪽으로 쓰러지지 않듯이 세력이 셋이면 균형을 이룬다. 이 세력들이 경주 지역의 6부민들을 박석김 삼성 성골 연합으로 지배하면서 전개된 역사가 기원전 69년부터 기원후 356년 내물왕으로 김씨 왕조가 확립되기까지의 신라 전기 역사이다.
그러므로 박씨족은 선도산을 족보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알에서 태어닜다는 것은 이치에 전혀 맞지 않다. 족보를 만들자니 박혁거세 이전의 조상 내력을 알 수가 없다. 그렇다고 달랑 나정과 알영정 신화만을 모두에 제시할 수도 없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도입한 것이 <선도성모>일 것이다.
일연이 삼국유사 감통편에 <선도성모>를 기재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전해오지도 않는 이야기를 불교 홍보를 위한 목적에서 일부러 만들어서 삽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만약 만들어서 넣었다면 스님으로서 역사가로서 자격이 없다. 그러므로 민간에 전승되거나 고서적에 있는 <선도성모>를 채집하여 실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밀양박씨세보 편찬자들도 이런저런 사정과 상황을 살핀 연후에 세보에 <선도성모>를 족보의 제일 앞에 넣었을 것이다.
학자들은 늦어도 초기 철기 시대까지는 모계사회라고 한다. 또한 제사장, 즉 무당이 지도자 역할을 하는 집단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선도성모>는 박씨족 모계사회의 제사장인 무당이라고 볼 수 있다. ’거서간, 차차웅‘ 등의 왕호에서 그 의미를 볼 수 있다.
중국은 이미 기원전 500년부터 강력한 왕권으로 통치하는 부계 중심 사회였다. 그러나 변방은 오랑캐 소리를 들을 정도로 문화 수준이 후졌던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기원전 108년에 문명대국인 한나라가 위만조선을 멸하고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을 설치했다. 그런데 한반도에서는 기원전 50년 전후로 하여 박혁거세 신화, 동명성왕 신화, 고주몽 신화가 발생했으니, 사실 이 신화들을 언급한다는 게 중국에 비해 500년 이상의 문화 격차를 자인하는 고백일 수밖에 없다. 제자백가가 천하를 유행하고 칼과 창이 난무하는 시대보다 수백 년 후인데도 우리 시조가 알에서, 황금 궤짝에서 태어났다고 자랑하는 것이 얼마나 계면쩍고 부끄러운 일인가.
그래서 세보의 편찬자들은 ’알‘을 취하지 않고 “성모’를 취했다. 그러면서도 알영은 ‘용’을 취했다. 그런데 성모가 아기를 낳은 곳이 선도산이 아니고 선도산에서 내려와 양산 나정에 이르러 시조를 낳았다. 양산촌 나정은 선도산에서 형산강을 건너 약 6Km 정도 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 보면 남해차차웅 3년 서기 6년에 나정에 시조묘를 세워 485년까지 제사를 지내다가 487년에 신궁으로 개축하여 신라말까지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남해왕이 시조묘를 세운 곳이 나정이므로 나정이 박혁거세가 태어난 곳임이 확실하다. 그러니 편찬자들은 ‘나정’을 탄생지로 하지 않을 수 없었고, 어미 없는 자식이 없으니 모계사회이므로 ‘성모’를 어머니로 해도 과히 이치에 어긋나지 않기 때문에 취했을 것이다. 이로써 어머니와 탄생지는 얼추 맞춰 놓았다.
그런데 성모가 왜 거주지인 선도산에서 시오리나 떨어진 곳인 나정에 와서 아기를 낳았을까 하는 문제가 대두된다. 아무리 모계사회이지만 아비 없는 자식은 없고, 어머니는 거의 정확하게 배속에 든 아이의 생부를 안다. 그러므로 산일이 된 성모가 만삭의 몸으로 시오리를 걸어 갈 수가 없으니 흰 말을 타고 아기의 아버지가 사는 곳인 나정에 와서 몸을 푼 게 아니겠는가.
과연 아버지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를 살펴보자. 그 첫 번째가 양산촌 이씨이다. 나정은 경주시 탑동 지역으로 당시는 양산촌 이씨의 영역이었다. ‘陵在國都南七里曇岩寺傍南亭藪內卯坐’에서 보듯이 담엄사(담암사)가 있었고 박혁거세의 능이 있다. 박혁거세는 나정을 중심으로 태어났고 자랐고 왕이 됐고 묻혔다. 즉 양산촌 영역에 대한 기득권을 가졌다. 그러므로 양산촌 촌장 이씨가 아버지일 수도 있다. 그런데 역사에서 양산촌 촌장으로 나오는 이알평은 세보에 박혁거세왕의 사위로 기재되어 있다. 그러므로 아버지가 이씨일 경우라도 이알평의 아버지이거나 삼촌 등 친척일 것이다.
두 번째로 무산 대수촌 손씨이다. 모량부, 장복부로 불리는 손씨 영역은 선도산을 포함하는 서부 지역이다. 박씨족이 처음 진입한 지역이 모량부였다. <선도성모>가 무당 역할을 했다면 대수촌민들이 주 고객이었을 것이다. 지금도 우리 박씨에게 대대로 ”손씨는 한 가족이다“라는 말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또한 키운 분과 왕위에 오르도록 주장한 분이 있다는 말씀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런데 손씨족 중 어느 한 남자가 아이의 아버지였다면 왜 멀리 떨어진 양산촌 이씨 영역인 나정에 가서 아이를 낳았을까 하는 의문이 걸림돌이 된다.
”손씨는 한 가족이다“라는 말을 연합이라는 면에서 생각해 보자. 박씨족이 서쪽에서 들어오면서 먼저 접촉한 부족이 대수촌 손씨족이다. 갈등이나 싸움 없이 원만하게 융화한 것 같다. 지금도 박씨와 손씨는 다른 씨족들보다 만나면 뭔가 정답다. 정복욕이 강한 박씨족이 이후 차츰 세력을 넓히려고 할 때 손씨족은 우군이었다. <선도성모>가 나정에서 출산한 것은 세력을 양산촌 영역까지 넓혔다는 것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앞에서 언급한 대로 박혁거세가 탄생한 날에 박씨족이 6부족과 합의를 위한 회의를 한 날이고, 13년 후에 어린 박혁거세가 시조왕이 됐다. 물론 아버지는 박씨족 남자이다.
이렇게 가설을 수립하면 삼국사기, 삼국유사, 밀양박씨세보 세 권의 국사와 가사가 대강은 맞아들어간다. 그러나 밀양박씨 윗대의 세보 편찬자들이 <선도성모>를 어머니로 설정한 것은 본 필자가 후손의 한 사람으로서 찬성할 수 없다. 삼국유사 감통편을 취하지 말고 차라리 김부식처럼 괴력난신, 신이한 것이라는 전제하에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두 신화를 인용하였다면 오히려 가뿐했을 것이다. <선도성모>를 취해 놓으니 후손으로 하여금 온갖 상상과 가설로 수고롭게 만든다.
왜 웃대 편찬자들은 김부식처럼 쉬운 길을 두고 <선도성모>란 어려운 길을 선택했을까. 그들도 후일에 생길 여러 비판과 문제들을 예상했을 것이다.
먼저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사대 모화 사상이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들어 있는 두 글은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신화일 뿐이다. 근거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감통편의 <선도성모>는 경명왕, 김부식, 왕보, 왕양이라는 역사적 유명 인물의 말이 들어 있다. 유식하고 유명한 인물들이 한 말이므로 권위가 있고 신빙성이 높다. 그러므로 취할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선도성모>는 일연의 작품이다. 그가 근거를 갖고 썼는지 소설처럼 지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불법 홍보를 위한 의도와 목적성이 잘 나타나고 있다. 일연은 김부식, 왕보, 왕양의 말을 어느 책에서 취한지를 밝혀놓지 않았다. 또한 세 사람의 말은 어느 사서나 자료에도 나타나지 않고 있다. 경명왕이 그런 말을 했는지도 근거가 없다.
1281년 일연스님(속명 全見明)이 경주 서쪽 선도산 성모신당에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선도성모수희불사>를 채집하여 『삼국유사』에 넣은 까닭이 무엇일까? 그 이유는 홍법이라는 큰 목표를 구성하는 하나의 설화로서 충분한 가치를 가졌기 때문이다.
“지금 능히 금을 보시하여 부처를 받들고 중생을 위하여 향화(香火)를 열어 진량(津梁)을 만들었으니 어찌 장생법(長生法)만 많이 배워서 몽매함에 얽매어 있을 것인가”하며 선도성모 신앙은 몽매하고 불교는 개화되었음을 말한다. 또한 성모신모 숭배 등 민속신앙으로 쏠리는 재물이 궁극적으로 가야 할 곳은 부처 앞임을 설화를 통해 유도하고 있다.
선도산 성모가 낳은 아들이 누구라는 지명은 없다. 그러나 말미에서 혁거세와 알영으로 지칭했고, 국사, 사신, 김부식을 인용하는 정도를 넘어 송나라 관반학사 왕보와 사신 왕양의 말로 확실한 방점을 찍으며 박혁거세가 선도산 성모의 아들이요 알영이 딸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에서는 박혁거세의 출생을 달리 표현하고, 알영은 다른 곳의 우물인 알영정에서 용의 옆구리로부터 태어났다고 기술하고 있다.
아마 일연은 924년에 건립된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昌原 鳳林寺址 眞鏡大師塔碑) 비문을 읽었을 것이다. 이 탑비의 비문은 경명왕 박승영이 손수 썼는데, 그 글을 보면 불법에 조예가 상당히 깊었음을 알 수 있다. 일연은 이 비문을 근거로 하여 선도성모의 후손으로 경명왕을 설정하여 이 일화를 민들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선도성모>는 경주 선도산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민속신앙 계통의 어떤 전설에다가 박혁거세와 알영을 삽입하고, 그것을 강조하기 위하여 경명왕, 김부식, 왕보, 왕양 등 네 사람의 말을 인용 형식으로 하여 만든 불교 설화일 뿐이다.
후손으로서 일연이 한 행위가 섭섭하다. 선도성모가 중국 황실의 딸이라 하여 조선의 유일 토종 성씨인 박씨가 중국에서 유래했고, 혁거세와 알영을 남매로 하여 결혼하도록 한 것은 사대주의의 극치요 동성동본 금혼을 엄히 지키는 우리 박씨족에 대한 모욕이 아닐 수 없다.
또한 삼국사기 기이의 후반에서 ‘說者云 “是西述聖母之所誕也. 故中華人讃屳桃聖母 ‘有娠賢肇邦’之語是也.” 乃至雞龍現瑞産閼英, 又焉知非西述聖母之听現耶. 位號曰居瑟邯,或作居西干, 初開口之時自称云 “閼智居西干一起”, 因其言稱之, 自後爲王者之尊稱. ‘
’설명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이는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은 것이다. 그러므로 중국 사람의 선도성모(仙桃聖母)를 찬미하는 글에 ‘어진 인물을 배어 나라를 창건하라.’라는 구절이 있으니 이것을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는 계룡(鷄龍)이 상서(祥瑞)를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았으니, 또한 서술성모의 현신이 아니겠는가!라고 하고 왕위의 칭호는 거슬한(居瑟邯)혹은 거서간(居西干)이라고도 하니, 이는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으므로, 그의 말에 따라 이렇게 불렀으니 이로부터 임금(王者)의 존칭으로 되었다‘라고 감통편의 내용을 강조하고, ’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자신을 일컬어 말하기를 알지거서간(閼智居西干)이 크게 일어난다 하였으므로‘라 하며 박혁거세가 처음 입을 열 때에 한 말인 것처럼 ’알지‘를 ’거서간‘ 반열에 올려 언급한 것은 매우 작위적인 표현이 아닐 수 없다. 일연(一然)은 1206년(희종 2)에 태어나 1289년(충렬왕 15)까지 살다간 고려 후기의 승려이다. 경주 인근 장산군(章山郡, 현 경상북도 경산시) 삼성산(三聖山) 아래에서 출생하였으며, 속성은 김씨(金氏), 처음의 이름은 견명(見明), 자는 회연(晦然), 시호는 보각(普覺)이다. 즉 일연은 김씨족이다. 그러니 김부식과 함께 김씨족 조상을 어떻게 하든지 현양하려고 노력한다. 아기가 어떻게 ’알지‘를 알고, 왕의 호칭도 없는 때에 ’거서간‘이란 왕의 호칭을 알겠는가. 박씨족 왕인 경명왕을 등장시킨 <선도성모>와 함께 이 부분은 일연이 중립성과 합리성을 잠시 제쳐두고 자기 조상인 ’감알지‘를 왕의 반열에 올린 조작문이 아닐 수 없다. 김씨족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도 그렇지만 일연이 이와 같은 마음으로 삼국유사를 지었다면, 승려로서 사가로서 큰 실책이었다고 아니 할 수 없다. 선도성모와 죽은 용이라 하며 남의 시조를 애비 모르는 자식으로, 죽은 몸에서 난 자식으로 매도하는 것은 스님이나 사가라면 삼가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고대 사료가 소량의 금석문을 제외하고 전무한 상태에서 1145년과 1281년에 지어진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유일한 사서로서 권위를 갖는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석해 본 바와 같이 전체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역사를 포괄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으나, 자기 성씨인 김씨족의 역사를 헌양하기 위해 고래의 사서에 사적인 기사를 첨언하거나 가필 또는 조작한다는 것은 역사가의 명예를 벗어나 김씨족사가의 한계에 머무는 행태로서 경계해야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혹여 이 글을 읽는 타 성씨되는 분이 있다면 근거를 들어 이치에 맞게 반론하여주기 바란다.
이렇게 삼국사기와 삼국사기에 이치에 맞지 않은 문장이 있고, 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기이편의 신화와 삼국사기 감통편의 불교 설화를 섞어서 인용한 상대 조상들 역시 섭섭하다. 일연의 행위야 관운장이 무신이 되는 등 유명 인물이 산신, 지신, 당신 등이 되는 차원에서 이해할 여지가 있지만 명색이 당대의 유학자요 사대부라고 자부하시는 조상들께서 경주 주변 작은 산에 속한 일개 산신을 시조왕의 어머니로 기록한 것은 실책이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 후손 희용은 삼국사기, 삼국유사 기이편, 삼국유사 감통편에 나온 박혁거세거사간과 알영 왕비의 두 신화를 모두 게재한다. 후일에 눈 밝은 후손이 있어 새로 발굴되는 자료를 첨언하여 더 잘 정리한 족보를 대대손손 물려주어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 밀양박씨세보를 편찬한 분들과 김부식의 삼국사기 <알지신화>와의 관계를 살펴보자.
먼저, 엄격한 유학자인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에 들어 있는 탄생 신화를 그대로 옮겨 써도 과히 흠 될 게 없는 데도 신화성을 최소화했다. 이 족보의 저자가 왜 그랬을까?
조선 1600년대에 족보 《密陽朴氏世譜》를 편집한 박씨족 사람들은 ‘怪力亂神’을 언급하기를 꺼리는 유학자였다. 그렇다고 전혀 사료와 자료가 없으므로 300여 년 동안 전해지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무시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두 사서가 전혀 근거 없이 조작한 게 아니라 고래의 사서와 자료가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보고 취하여 기록했을 것이다. 고래의 사서와 자료 역시 민간에 구전되는 이야기들을 수집하여 기록으로 남겼을 것이다. 그래서 탄생 신화를 인용하되 신화성은 최소화했을 것이다. 500년 전에 공자가 살았으니, “박혁거세 신화를 강조하는 것은 곧 우리가 중국보다 500년이나 미개합니다”며 자백하는 꼴이 된다. 신라의 성골들은 그런 신화를 만들어서 무지한 백성들을 현혹시켜 복종하도록 하는 통치술을 썼겠지만, 합리적인 사고를 중시하는 조선의 선비들은 그런 신화가 유치했을 것이다.
그럼 고려시대 유명한 유학자인 김부식은 왜 《삼국사기》에 <박혁거세 탄생 신화>를 넣었을까? 그것은 경주 김씨 인 자기의 조상 <김알지 신화>를 넣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혁거세와 김알지는 104년의 시차를 갖기 때문에 박혁거세 신화가 있기 때문에 김알지 신화를 삽입해도 아무런 문제 될 점이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김씨 왕조가 박씨 왕조와 같은 정통성을 가질 수 있다고 계산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유치한 신화라 하더라도 그 속에 들어 있는 상징 몇 가지를 근거로 하여 당시의 역사적 사실의 뼈대를 상상해 볼 수 있다. 먼저 알 수 있는 것은 정착민과 이주민의 관계이다.
경주 지역에 선주민은 청동기 문명을 가진 이씨, 최씨, 정씨, 손씨, 배씨, 설씨 성으로 묶이는 6촌민들로서 이들은 평양 지역에 살다가 위만조선이 망하자 여러 씨족 집단이 남하하여 이미 다른 씨족들이 선점한 지역을 지나 경주에 정착했다. 이후 약 40년 후에 한사군에 복종하던 박씨족이 철기문명을 갖고 평양 지역을 떠나 남한을 통과하여 경주 지역에 도달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6촌민들이 경주의 주요 지역을 정착하여 살고 있었다. 그래서 이들은 경주의 서북쪽 변두리인 선도산 지역에 살다가 형산강을 건너 평지로 진출하면서 가까운 양산촌민들과 교류하게 되었다.
나정이 있는 양산촌이 당시에 가장 대촌이었고 세력이 강했다. 박혁거세와 알영이 결혼하여 낳은 딸이 커서 이알평에게 시집갔다. 또한 대수촌 손씨는 박혁거세를 잘 대해주었는지 지금도 우리 박씨 집안에서는 손씨를 고맙게 여기라는 말씀이 가전되고 있다.
6촌과 박씨족 두 집단은 원래 단군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을 함께 살아온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정서적인 면에서 평화적인 타협이 가능했고, 빼앗지 않고서도 주거지와 경작지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충돌하지 않고 이웃할 수 있었을 것이다. 6촌민들의 조상은 위만조선에서 중간급 층이었고, 후래한 박씨족은 더 발달한 문명을 가졌기 때문에 선주민과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결과가 어린 박혁거세를 왕으로 한 국가의 건설이었다.
신라는 선주 6촌민과 후래 박씨족이 폭력이 아니라 평화적인 방법으로 타협하며 세운 국가였다. 이어서 온 석씨족과 김씨족이 큰 충돌 없이 지배계급에 편입되었다. 그 상징이 박혁거세 신화, 석탈해 신화, 김알지 신화이고, 그 실질이 박석김 삼성의 혼인동맹이다. 석탈해는 박씨족 남해왕의 사위가 되었고, 김알지는 석탈해왕의 아들이 되었다. 이렇게 성골이 형성되었다. 이것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된 신라 초기사이다.
그러나 남아 전하는 사서의 기록은 후세에 취사선택되고 미화된 것들이다. 사서에 기록된 바와 달리 실제로는 권력 투쟁이 심각하였다. 박혁거세거서간 말기에 석탈해가 등장하여 서기 8년 남해왕 5년에 왕의 사위가 되고 10년에 죄보가 되어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왕위를 양보하려고 할 정도로 막강한 세력이 되었다. 그리하여 유리왕이 죽은 후에 곧 왕권을 장악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석탈해가 왕의 사위라고 하나, 밀양박씨세보에는 사위로 등재되어 있지 않다. 사이가 좋았다면 능히 족보에 올렸을 것이다. 그러나 없다는 것은 무언가 좋지 않은 사연이 있었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여자들은 시집가서 자식을 낳으면 시집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나 공통되는 현상이다. 석씨 족보에는 어떻게 돼 있는지 궁금하다.
석탈해 9년 서기 65년에 김알지가 계림 숲에서 등장한다. 그런데 남해왕과 유리왕의 왕비가 김씨인 것을 보면 김알지 이전에 이미 김씨족이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아마 박씨족과 함께 고조선이 망한 이후에 한반도 남동부로 진입한 것 같다. 문무왕비가 신라 경주김씨 왕실의 조상이 흉노족 김일제라 밝히고 있는데, 4년부터 23년까지 존재한 신나라가 망하자 신나라의 귀족이었던 김일제의 후손 김씨족의 한 파가 장안을 탈출하여 한반도 동남부로 왔다고 하므로 경주 북부 지역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였을 것이다. 그 세력의 실체가 김알지의 등장으로 표출됐고, 김알지가 세력을 잡아 탈해왕의 사위가 되고 대보가 되면서 김씨 왕조의 기초를 마련하게 되었다.
세력을 넓힌 김씨쪽의 여자가 남해왕과 유리왕의 왕비가 되는 결혼 동맹이 이루어지면서 탈해왕이 죽자 탈해왕의 왕자들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박씨족이 석씨 공주를 왕비로 삼아 파사왕, 지마왕, 일성왕, 아달라왕의 네 번 왕위 계승이 가능하도록 타협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러나 석씨족과 왕비들의 힘으로 아달라이사금 이후 한때 김씨 미추이사금(284~298)에게 왕위를 넘겨 주었지만 되찾아 7대 168년 동안 석씨 왕조를 유지하였다.
그러다가 세력을 축적한 김씨족은 마침내 356년 내물이사금이 석씨족을 토평하고 김씨왕조를 확립하였다. 삼국사기 내물이사금조는 ‘訖解薨 無子 奈勿繼之(末仇味鄒尼師今兄弟也) 흘해훙 무자 내물계지(말구이사금형제야, 흘해가 죽엇다 아들이 없다 내물이 이었다(말구는 미추이사금과 형제다))’라며 간단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미추왕과 내물왕은 72년의 시차가 있어 말구가 미추의 동생이기 어렵다.
위의 가설과는 달리, 같은 흉노족 김일제 후손이지만, 미추는 오환족이고 내물은 선비족이란 학설이 있다. 당시는 고구려와 연나라가 전쟁을 하던 때로서 연나라 패잔병들이 신라로 침입하였다는 학설이 있다. 이전에는 김씨 조상에 대한 언급이 없더니, 670년대에 세워진 문무왕비문에서 김일제가 조상이고 세한왕이 중시조라고 각자되어 있는 걸 보면 내물왕 김씨족과 연나라 흉노족 선비족의 이동이 연관성을 갖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이전의 박석김 성골 김씨와 내물왕 이후의 김씨는 계통이 다르다고 할 수 있다.
이전의 김씨는 수백 년 동안 박씨족과 석씨족을 대상으로 왕위 다툼을 하면서도 결혼 관계를 통해 일정한 유대감이 형성되어 있었지만, 내물왕으로 대표되는 선비족 신김씨는 그러한 유대 관계가 없으므로 흘해왕을 시해하고서 석씨족을 무참하게 도륙한 후에 박씨족과 6부민들을 제압하며 경주김씨 왕조를 확립할 수 있었을 것이다.
호공의 집을 간계로 빼앗고, 남해왕의 사위가 되어 권력을 장악할 정도로 탐욕이 강하여 왕이 된 석탈해의 핏줄을 이어받은 석씨 후손들이 홀홀히 왕위를 넘겨주지 않았을 것이다. 왕위를 두고 양쪽 간에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고, 패한 석씨족은 도륙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와 전투를 벌인 강력한 기마군단 선비족 군대에 농경족 석씨족 군대가 무참하게 박살났을 것이다. 문무왕 김법민이 자기 조상을 거짓이나 엉터리로 돌에 새기진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내물왕 후손인 경주김씨는 흉노계 선비족이다.
하여튼 간에 356년에 있은 사건은 석씨가 완전히 멸문할 정도로 참혹하였다. 2015년 인구조사에서 석씨가 약 1만 명이다. 시조 탄생이 엇비슷한 시대인 박씨족이 약 400만이고 본관 경주김씨만 190만이다. 인구의 현격한 차이는 356년 석씨족 멸문 이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 김씨족이 박씨족의 지원을 받아 석씨족들을 모두 죽이고 제사 받들 사람 몇만 겨우 살려주었단 말이 된다. 그 대가로 박씨족은 왕비족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므로 신라 왕조사는 피 튀기는 권력투쟁의 현장이었다.
박혁거세와 알영의 탄생 신화, 거서간 즉위와 왕비 간택, 박혁거세의 죽음과 사릉, 석탈해 신화와 왕위 계승, 김알지 신화 등 상징이 내포하고 있는 역사적 사실과 의미에 대한 상상과 가설이 매우 다양하다. 그러나 권력의 속성상 권력의 승계는 평화적 방법보다 어떤 형태든 강제적 방법이 작용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흉한 꼴을 후세에 보이지 않으려고 최대한 상징괴 분식으로 역사적 사실을 남긴 고대 신라인들의 고뇌가 행간마다 언뜻언뜻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