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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는 「사람들은 진실을 말하든지 혹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는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다시 한번 요약하고 있다. 여기에 대한 반론은 간단할 것이다. 거짓이나 허위가 없다는 것은 세상의 사실과 일치하지 않는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런 방식으로 궤변을 반박하지 않고 「거짓말이 없다」는 소피스트적 논리를 역이용하여 반박한다.
소크라테스: 「만일 인간이 거짓말을 할 수 없다고 한다면, 또한 거짓말을 생각할 수도 없을 게 아닌가?」
디오니소도로스 : 「그렇네. 생각할 수 없네.」
소크라테스: 「그럼 잘못된 의견 같은 것도 없지 않겠나?」
디오니소도로스: 「있을 수 없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이 세상에는 무지도 무지한 사람도 없을 걸세. 왜? 만일 무지가 있으면, 그것은 사물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 되니까.」
(• • •)
소크라테스 : 「디오뉘소도로스, 자네는 의론을 위한 의론을 하고 있나? 혹은 진심으로 아무도 무지하지 않다고 주장하는가?」
여기서 무지(無知) 혹은 「무지한 자」란 단순히 「모르는 자」라기 보다는 오히려 「모르면서 떠드는 자」를 말한다. 자신이 모른다는 것을 알고 가만히 있는 사람을 무지한 자 혹은 무식한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사람은 오히려 현명한 사람이라고 한다. 잘 모르면서 아는 체 하고 심지어는 아는 사람을 이기려는 사람들이 많다. 서양에서도 사정은 비슷하다.
그런 면에서 무식한 자란 실은 거짓을 말하는 자 혹은 좀 더 친근한 표현으로는 「엉터리 말을 하는 자」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의 말 즉 「만일 무지가 있으면, 그것은 사물에 대해 거짓으로 말하는 것이 되니까.」 라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의 전제는 「거짓이 없다」보다 「무지가 없다」가 더 명백한 잘못이라는 것이다. 둘다 비슷하게 잘못된 생각들인에 하필 후자가 더 잘못이라는 것은 쉽게 이해할 수 없다. 아마도 추측컨대 당시 소피스트들이 「덕을 가르친다」, 「지식을 가르친다」 라고 광고하고 다녔기 때문에 그들에게 「무지가 없다」 혹은 「모두가 똑똑하다」 혹은 「모두가 지자들이다」라고 하면 그들의 영업상 큰 손실이 발생하기 때문에 그들은 「무지가 없다」는 말을 싫어했는지도 모르겠다.
「거짓이 없다」 혹은 「무지가 없다」는 이론은 소피스트 자신들도 실은 믿지 않는 것이다. 단 그들은 자신의 논증 능력을 뽐내기 위하여 잠시 그런 논리를 펼친 것뿐이다. 그들 역시 「덕을 가르친다」 혹은 「지식을 가르친다」고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이 말장난을 한다」 즉 「의론을 위한 의론을 하고 있나?」 라고 비난한 것이다.
이렇게 하여 소크라테스는 간단히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물리친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반박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즉 소크라테스는 단지 말의 뜻을 풀이하여 반박한 것이고 무슨 새로운 논리나 이론에 의거하여 반박한 것은 아니다.
결론적으로 『에우튀데모스』 편의 두 가지 서로 연결된 소피스트들의 궤변 즉 ① 소위 「배우는 자는 무지하다」 ② 「거짓말은 없다」는 궤변에 대한 플라톤의 반격은 큰 효과가 없다.
그래서 이 문제는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다시 철저하게 다루어진다.
(8) 새장의 비유
플라톤의 『에우튀데모스』편은 학습의 문제를 다루었다. 그런 과정에서 지식의 소유(所有) 문제가 나타난 바 있었다. 지자(知者)는 지식을 이미 가진 자, 즉 소유한 자였다. 이는 인식의 과정 혹은 학습의 과정을 사물화한 것이었다. 지식을 마치 물건처럼 이리 저리 가지고 다니는 것으로 본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지식을 사물화(事物化)할 경우 학습의 역설이 나타남을 위에서 언급한 바 있다.
학습의 역설을 풀기 위하여 『테아이테토스』 편에서 다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시도한다.
『에우튀데모스』편에서 소피스트 디오뉘소도로스는 「안다는 것은, 그 때 지식을 얻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었다. 그리고 「배우는 사람은 아직 지식을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배우는 사람은 모르는 사람이고, 아는 사람은 배우지 않는다」라는 명제를 남긴바 있었다. 이를 필자는 「학습자-무지론」이라고 개념화한 바 있다.
『테아이테토스』 편은 감각을 근본으로 삼고 지식의 문제를 추구한다. 그런데 단순한 감각만을 지식이라고 볼 수 없음을 앞에서 밝혔고 지식은 판단 혹은 의견이라고 밝힌 바 있다. 이는 문장 혹은 명제의 형식으로 나타난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서 다시 오류 가능성의 딜렘마가 등장했었다. 즉 지각과 사고의 ㅡ잘못된ㅡ 결합에서 오류가 발생한다. 이 지점에서 『테아이테토스』 편은 『에우튀데모스』편과 합류한다. 오류 혹은 거짓말의 문제이다. 『에우튀데모스』편은 ㅡ소피스트의 궤변이기는 하지만ㅡ 학습이 불가능하다 라는 사상을 담고 있었다. 아는 자는 배울 필요가 없고 모르는 자는 모르는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다는 2분법이었다. 더 나아가 소피스트들은 「거짓말이 없다」 혹은 「오류는 없다」라는 사상을 홍보한다.
이 문제에 대한 『테아이테토스』 편의 대책은 소유와 소지를 나누는 것이다. 소유(所有)는 영어로 having이라고 변역되어 있고 와 소지(所持)는 possession이라고 번역되어 있다.
예를 들어, 옷을 구매하여 가지고 있는 것을 소유(所有)라고 하고 산 옷을 입고 다니는 것을 소지(所持)라고 한다. 여기서는 지식의 소유와 소지를 언급한다.
밀납비유로 말한다면 지식의 소유는 형적(形迹)만 있는 경우이고 소지는 형적에 대응하는 지각이 있는 경우이다.
밀납의 비유는 지식의 생성을 원초적으로 나타낸다. 그런데 우리는 그런 원초적인 지식의 생성과 더불어 이미 형성된 지식을 재활용하는 경우가 많다. 즉 한 때 배운 것을 활용하거나 혹은 한 때 경험한 지식을 기억하여 활용하는 경우 등이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플라톤은 새장의 비유를 언급한다.
특히 「새장의 비유」는 학습의 딜렘마를 해소하기 위한 이론이기도 하다. 여기서 학습은 처음부터 모르는 것을 아는 것이 아니라 이미 「알았던 것」 즉 「과거에 배우거나 경험한 지식」을 다시 알게 되는 경우를 말한다. 이 경우 소피스트들의 궤변 즉 「허위가 없다」, 「거짓이 없다」는 주장을 명료하게 반박할 수 있다.
플라톤은 판단-지식론을 통해서 지식이 단순한 감각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재료에다가 정신적 작용이 가해져야 한다는 것을 밝혔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지식의 내용과 형식을 구분한 것이다.
이른바 새장의 비유 (the allegory of aviary)이다. 여기서는 지식을 새장 안의 각종 새에 비유한다. 새장은 인간 혹은 개인의 정신을 말한다.
소크라테스 : 그럼 생각해 보게. 지식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나. 사람은 이것을 소유하고는 있지만 소지(所持)하고는 있지 않다. 이것은 마치 누가 비둘기나 그 밖의 어떤 날짐승을 붙잡아, 비둘기장에서 기르고 있는 경우와 같은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어느 의미에서는 그가 그 새들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언제든지 소지할 수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고 생각되지 않겠나?
이런 비둘기장을 플라톤은 인간의 마음-영혼에 비유한다. 그리고 지식을 찾는 것을 주인이 새장 속에서 자기가 원하는 새를 잡는 일에 비유한다.
「새장의 비유」는 「밀납의 비유」에서 출발한다. 즉 밀납 위에 찍힌 형적(形跡)들이 다시 어떤 창고에 모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새장이란 여러 기억과 지식이 모여있는 것을 비유적으로 말한 것이다. 컴퓨터 용어로 말하면 「메모리 칩」에 해당한다. 인간의 마음 속에는 온갖 데이터들이 축적되어 있다. 또 학습은 그 새장에 새가 채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처음에는 새장에 새가 없었으나 배우고 경험하는 과정을 통해서 점점 새장에 새들이 많아진다.
이런 의미에서 새장은 기억 혹은 「기억의 창고」라고 할 수 있겠다.
소크라테스 : 그럼 아까 우리가 어떤 가상적인 것으로 일종의 납과 같은 것을 마음 속에 간직하려고 하였는데, 바로 그처럼 지금도, 한번 더 마음속에 일종의 비둘기장 같은 것을 만들어 놓지 않겠나? 그리고 거기에는 온갖 종류의 새들을 기른다고 하세.
(• • •)
그것은 사람이 아직 어렸을 때에는 그 그릇은 공허하다고 말해야 하며, 새들 대신에 지식을 대치하여 생각해 보아야 하네. 그리고 누가 지식을 자기 소유로 하고, 그것을 그 울타리 속에 넣어 두기만 한다면, 그 지식의 대상으로서의 이미 있었던 사물을 그는 습득하였다거나 혹은 발견하였다고 할 수 있을 걸세. 그리고 안다는 것은 이와 같은 것이라고 하겠네.
“새장의 비유”를 통해서 지식의 습득과 학습 등이 설명된다. 어릴 때는 새장이 텅 비어 있는 상태이다. 여기에 날짐승을 붙잡아 넣는 것이 학습이다.
또 한 때 소유했던 지식이라고 해도 잊어 버리는 경우가 있다. 즉,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다” 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도구가 바로 새장의 비유이다.
“알고 있는 것을 알고 있지 않다” 는 것은 일상적으로 일어 나는 사건이지만 소피스트들의 공격 즉 지(知)와 무지(無知)의 2분법을 따르면 이 현상이 설명하기 어려워진다. 또 그들은 「거짓은 없다」는 주장을 통하여 말하는 사람은 모두가 항상 참된 말만 한다는 궤변을 전개한 바 있었다.
사람이 한 때 배워서 아는 지식이라고 하더라도 그는 항상 이를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과거의 지식을 다시 기억하고 새로 이를 배워야 한다. 즉 스스로 다시 학습을 해야 한다. 이것이 “새장 속의 새를 잡는다” 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지식의 소유와 소지의 관계와 같다.
그리고 오류 문제도 다시 설명된다. 『에우튀데모스』 편에서 소피스트들은 「거짓이 없다」 혹은 「허위가 없다」는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거기서 소크라테스는 이를 반박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논리가 명백하지 않았다.
즉 위에서 말한 소유와 소지의 구별을 통해서 오류의 발생이 다시 설명된다. 여기서는 주로 이론적 지식, 예를 들어서 수학적인 지식의 오류가 다루어진다. 가령 숫자 11과 12를 혼동하는 경우이다. 이를 플라톤은 “새장 속에서 보통 비둘기 대신에 들비둘기를 붙잡는 것과 같다” 라고 비유한다.
이처럼 새장 모델에서 오류와 학습 등이 다 설명된다. 즉 오류란 닭을 잡으려는 사람이 꿩을 잡은 경우이다.
학습의 의미는 엄밀히 말하면 두 가지이다.
첫째는 처음으로 새를 잡아서 새장에 가두는 것이다. 이는 지식의 습득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은 「밀납의 비유」를 통해서 이미 알려졌다.
둘째는 이미 아는 지식을 다시금 기억하고 활용하는 경우이다. 이는 위의 인용문이 말하는 것처럼 새장에서 놀고 있는 새를 다시 붙잡는 경우이다.
이 새장 모델의 장점은 지식획득이나 학습에서 오류와 착각의 문제를 잘 설명할 수 있다는 점이다.
밀납의 비유를 통해서 플라톤은 지식의 근본적인 생성을 밝혔고
새장의 비유를 통해서는 지식의 축적과 관리를 설명한다.
그런데 이런 과정에서 다시 오류와 착각의 문제가 해명된다.
소피스트들은 「오류가 없다」 혹은 「말하는 사람은 누구나 진리를 말한다」라는 궤변으로 세상을 어지럽게 했었다.
「새장의 비유」에서 오류란 위에서 말한 것처럼 「새장에서 보통 비둘기 대신에 들비둘기를 붙잡는」 경우였다.
# 새장의 비유의 문제점 : 오류의 출처
밀납의 비유와 새장의 비유를 통해서 플라톤은 소피스트들의 궤변을 완전히 해소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것이 지식과 학습 문제의 끝이 아니라 어떤 새로운 문제를 야기한다. 거짓이나 허위는 「A를 B로 보았다」는 구조로 되어 있다. 이를 흔히 착각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새장 비유의 언어로는 보통비둘기를 들비둘기로 보는 경우이다.
물론 상식적으로 비슷한 두 사물 사이에는 그런 실수가 용인될 수 있다. 이런 현상은 상식적으로는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 누구나 이런 실수 내지 착각을 경험하고 있다.
들비둘기나 보통비둘기의 경우 비둘기에 대해서 잘 모르는 사람의 경우 양자를 혼동하거나 잘 알지 못하여 양자를 서로 같은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지식의 소유(所有)와 소지(所持)의 차이를 통해서 학습을 정당화했다. 또 이를 통해서 『에우튀데모스』 편에서 제기된 「학습자-무식론」을 논파했다. 그리고 거기서 제기된 학습의 두 번째 의미를 다시금 강화한다.
학습자는 이미 아는 것을 토대로 더욱 많이 알게 되는 과정에 있는 자이다.
『에우튀데모스』 편에서 소크라테스가 말한 학습의 이중적인 의미는 ① 「모르는 것을 처음 알게 된다」 혹은 「모르는 것과 접한다」. ② 「이미 아는 것을 토대로 하여 더 배운다」 였다.
그런데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는 소유와 소지 개념을 이용하여 다시 정리한다.
소크라테스 : 그렇다면 우리로서는, 여전히 이것을 비둘기 사냥이나 획득(所有化)과 견주어 보면서 이와 같은 것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겠나?
그 경우에 사냥에는 두 가지가 있네.
하나는 소유에 앞서서 소유하기 위해 행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이미 소유하고 있는 자가, 전부터 소유하고 있던 것을 손에 넣기 위하여 행하는 행위이네.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배워서 그 지식을 이미 이전부터 자기의 것으로 만든 것, 즉 그것을 자기가 알고 있었던 것에도 부합시키는 것으로, 따라서 다시 되풀이하여 같은 것을 배운다고 하겠네.
그것은 사람이 각 사물의 지식을, 전부터 소유하고 있기는 하였지만, 곧 이것을 사고(思考) 가까이 소지하고 있지 않았던 것을, 다시 파악하고, 또 소지하려고 할 경우의 학습(學習)이라네.
지식의 소유와 소지에 대한 약간 불명료한 서술이 있기는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 플라톤은 지식의 원천적인 획득과 다시 이를 확인하는 과정을 구별하고 후자를 학습이라고 지칭한다. 이런 학습은 예를 들어서 「문자(文字)를 알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읽으려고 하는 경우나」 또는 「수(數)를 계산하는 기술을 알고 있는 사람이 무엇을 계산하고」 있는 경우이다.
따라서 「학습자-무식론」은 논파된다.
소유와 소지 개념을 통해서 학습을 다시 정리한 플라톤은 그러나 새로운 문제와 직면한다. 소크라테스는 다음과 같이 실토한다 :
그러나 우리를 괴롭히고 있는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다른 보다 더 난처한 것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이네.
위에서 말한 여러 가지 이론을 통하여 오류(誤謬) 혹은 거짓이 있다는 것은 밝혀졌다. 오류는 무지(無知)에서 온다.
이런 오류는 새장의 비유나 밀납의 비유로 설명이 안 된다. 오류나 착각은 심리학적으로 충분히 이해가 되지만 논리적으로 문제가 있다. 즉 도대체 왜 그런 일이 발생하는지 하는 것이다. 다시 플라톤의 언어로 표현한다면 지식에서 왜 무지가 발생하느냐 하는 것이다. 특히 수학적 오류의 경우 이런 문제는 심각하다. 예를 들어 11을 12로 본 경우이다.
경험적 오류나 착각은 그 자체가 완전히 오류는 아닐 수 있다. 즉 집비둘기를 들비둘기로 착각했을 때 양자 모두 비둘기라는 점은 같다. 즉 개념은 파악이 되었으나 세부 사항에서 오류를 범한 것이다. 그러나 5+6=11을 5+6=12로 계산하면 이는 깨끗한 실수이다.
소크라테스 : 첫째로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한 지식을 소지(所持)하고 있으면서도, 무지의 소치에서가 아니라,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그 지식의 대상이 되어 있는 것에 무지하다는 것과, 또한 그것과 상위(相違)한 다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일이 있을 터이지만, 말이 통하지 않는 터무니 없는 소리란 이런 것이 아니겠나? 지식이 옆에는 붙어 있는데, 마음이 전혀 모르고 있어, 모든 일에 무지하다고 하거든. 이런 식으로 주장한다면, 무지(無知)가 옆에 붙어 있어, 사람이 무엇을 알려고 하거나, 또 눈이 먼 사람이 무엇을 보려고 하는 것도 ㅡ만일 이른바 지식이 이미 사람들을 경우에 따라 무지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한다면ㅡ 아무 방해도 되지 않는 것이 되네.
위의 문장의 뜻은 내가 A를 알고 있었는데 지금은 A를 모른다면 즉 잊어버리고 있다면 그 원인이 무엇일까 하는 문제이다. 여기서는 잊어버림, 망각 등은 답이 되지 못한다. 이를 플라톤은 「무지가 지식을 밀어내기 때문이다」라고 생각한다. 즉 지식 바로 옆에 무지가 있어야 비로소 이런 현상이 납득된다. 「밀납의 비유」에서 이런 문제는 「마음속의 밀납에 찍힌 대상의 형적(形跡)이 사라졌다」라고 하면 그만이지만 이 역시 마찬가지 난점에 부딪힌다. 지식과 진리 역시 변화와 소멸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위 문장에서 「보는 사람이 맹인이 되어 보지 못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는 「마치 맹인이 보는 것」과 같은 일이다.
만약 새장 속에 새 즉 지식만 있다면 무지(無知)는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결국 이 말은 새장 즉 인간의 영혼 가운데 무지가 있다는 말이 된다. 그리고 당시 아마도 「지식이 무지를 낳는다」라는 속설(俗說)이 있었던 것 같다. 어쨌든 알고 있던 지식을 모르게 될 수가 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지식이 무지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새장의 비유」를 통해서 「거짓이 없다」 혹은 「무지가 없다」는 소피스트적인 궤변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이번에는 도리어 무지(無知)가 있다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
소크라테스의 곤란한 문제 제기에 대해서 「테아이테토스」는 「무지(無知)도 마음속에 있는 것이 아닐까?」라고 해결을 시도해 본다.
테아이테토스 : 그렇다면, 아마도 우리의 상정이 잘못된 것이 아닐까요? 그 새(鳥)를 단지 지식이라고 상정한 것이 잘못이었을 것입니다. 오히려 무지(無知)도 마음 속에 함께 끼어들어 돌아다닌다고 상정해야만 하였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을 손에 넣으려는 사람도 때로는 지식을 얻기도 하지만, 때로는 무지를 얻기도 하며, 동일한 것에 대해서도, 혹은 그 무지로 말미암아 잘못 생각하는 수도 있고, 혹은 그 지식에 의해 올바로 생각하는 수도 있다고 보아야 했을 것입니다.
「새장의 비유」를 확대하여 이제는 「무지(無知)라는 새도 그 새장 안에서 놀아다닌다」 라고 추론한다.
지식과 무지의 병존(竝存) 그리고 교환(交換)등은 일상적인 현상이긴 하지만 철학적으로는 문제가 된다.
파르메니데스의 “있음은 있다, 없음은 없다” 라는 2분법의 세례를 받은 플라톤은 「지식과 무지의 병존」사상 동조할 수가 없었다. 「지식이 없음」과 「지식이 있음」은 상호 교환될 수가 없다. 특히나 하나의 동일한 영혼 속에 지식과 무지가 동시에 있으면 안 된다. 즉 지식이 무지가 될 수 없고 반대로 무지가 지식이 될 수가 없다. 이런 면에서는 차라리 소피스트들의 궤변 즉 「무지는 없다」가 논리적으로 더 선명하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오히려 무지(無知)도 마음 속에 함께 끼어들어 돌아다닌다고 상정해야만 하였을 것입니다」라는 철없는 테아이테토스의 말에 대해서 쉽게 수긍을 못한다.
이런 면에서 무지가 없다고 하거나 있다고 하거나 모두 문제가 발생한다. 이런 면에서 지식론 혹은 인식론의 정립이 요구된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편에서는 아직 그런 해결책은 없다.
(9) 추론-지식 이론
「판단-지식」론은 밀납의 비유를 통해서 인식의 근본적인 형성을 추구했다. 그리고 새장의 비유를 통해서는 학습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러나 새로운 문제가 등장했다. 즉 지식과 무지가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즉 「지식이 무지로 변한다는 현상」을 새장의 비유는 설명할 수 없다. 이는 달리 말하면 진리의 기준이나 가능조건을 확립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오류가 발생하는 경우와 그렇지 않고 절대로 발생할 수 없는 조건이 확립되어야 자식과 진리의 문제를 제대로 해결할 수 있다.
이는 <국가> 편의 “선분의 비유”를 통해서 비로소 달성된다. 즉 절대로 오류가 없는 정신의 부분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테아이테토스> 편에서는 이런 것이 아직은 없다. 인간의 영혼은 여전히 오류와 무지에 동시에 노출이 되어 있다. 칸트식으로 말한다면 경험적인 의식과 선험적인 ㅡ혹은 초월론적인ㅡ 의식이 구별이 안 되고 있다.
밀납의 비유와 새장의 비유는 모두 판단-지식론에 포함된다. 이런 시도가 완전히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결함을 지닌다.
지식의 정의 내지 가능조건을 찾는 또 다른 시도는 추론-지식론이라고 한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지식은 올바른 판단+설명이다」 ㅡtrue judgment with an accountㅡ 라는 새로운 지식의 형태가 나타난다. 이는 다음과 같이 표현된다 :
소크라테스 : (• • •) 당면한 일이지만 「가장 궁극적인 의미에서, 지식이란, 참된 생각에 이론이 부가되어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대체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말하고 있는가?」 하는 것이네.
그러나 이는 판단-지식에 대한 해결책은 아니라 실은 이것의 보충이다. 헤겔식으로 말하면 추론-지식 즉 “올바른 판단+설명” 으로서의 지식은 판단-지식의 지양(止揚)이 아니다.
이 부분은 플라톤의 기본적 인식론인 「판단-지식론」을 보충하는 성격을 가진다. 판단-지식은 문장-지식 혹은 명제-지식과 같은 말이다. 즉 지식은 문장에 있다는 것이다. 단 논리적으로 문장은 명제라고 한다. 따라서 논리학적으로 판단=명제=문장이다.
즉 지식은 올바른 판단(의견)+설명이라는 학설이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서 반대하는 사람들이 나타난다. 그들은 합성된 것은 알 수 있고 합성의 요소들은 알 수 없다고 주장한다.
이는 마치 칸트와 비슷하다. 칸트는 인간의 감각이나 정신을 통과하지 않는 물자체(Ding an sich)는 알 수 없고 다만 인간의 감각과 사고를 거친 현상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리고 만일 누가, 요소는 본질상 요소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합친 것은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그를 가리켜 고의이건 아니건 아이들의 장난을 하고 있는 자라고 생각하지 않겠나?
여기서 지식의 「본질상 요소는 알 수 없다」는 것은 감각적 데이터를 말한다. 판단-지식에 의하면 지식은 판단의 단계, 즉 지각에 사고가 더해짐으로써 가능해진다. 그런데 이런 이론에 대해서 반대한 사람들이 있었던 것 같다. 그들은 플라톤이 주장하는 「판단-지식론」을 두고 위의 인용문처럼 「본질상 요소는 알 수 없는 것이지만, 이것을 합친 것은 알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이었다.
「플라톤의 <테아이테토스>는 지식의 단계적 발전이론이다」라는 견해가 있다. 즉 지각-지식, 판단-지식 그리고 추론, 즉 판단+설명 으로 인식론이 발전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 벤저민 조웨트의 이론 즉 지식은 1)감각, 2)의견, 3)추론의 순으로 발전한다 고 한다. 그런데 1)과 2)의 관계는 대립이나 2)와 3)의 관계는 대립이라기 보다는 보충이다. 즉 3)이 2)의 보충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1)과 2)의 관계를 조금 더 말하다면 1)은 소피스트 특히 프로타고라스의 인간척도론과 인식의 상대주의, 주관주의 등을 대표한다. 2)를 통해서 1)을 비판한다.
조웨트(B. Jowett)는 추론이란 말을 쓴다. 추론은 여기서 판단+설명에 해당한다. 혹은 올바른 판단(의견)+설명을 추론이라고 표현한다. 영어로는 knowledge = true opinion with an account 라고 한다.
우리도 편의상 이런 지식 이론을 추론-지식이라고 하자.
위에서 말한 것처럼 당시에도 칸트주의자들이 있었다. 그들의 입장은 이렇다 : 인식은 주관과 객관의 합성이다. 이에 대한 지식은 가능하다, 그러나 합성되기 전의 상태는 인식불가능하다 라고 주장한다. 정확히 말하면 인식의 주관이 감각적 자료를 가공하기 전의 상태, 인식의 원천적 데이터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물자체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인식의 주관적 요소와 객관적 요소는 구별되고 전자는 인위적, 인간적이 부분이므로 진정한 대상에서 분리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소크라테스 :
나는 어떤 사람으로부터, 별로도 이런 이야기를 들은 것 같네. 그것은 우리도 우리 이외의 것들도, 합성(合成)되어 있는, 기본적인 것이, 예컨대 그것의 요소(要素)와 같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걸세. 다시 말하면 그것들은 각각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에 국한되는 한, 단지 그 명칭을 부를 수 있을 뿐이며, 그 이상으로 달리 아무 것도 부가하여 말할 수 없다네.
그러니까 <있다>거나 <있지 않다>고도 말할 수 없다는 걸세.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경우 이미 유(有)나 비유(非有)가 거기에 첨가되기 때문이네.
여기서 플라톤의 논적(論敵), 즉 칸트주의자들은 지각-지식 이론에는 동의를 하지만 그 진실성을 의심한다. 그들은
인식에서 언어의 요소를 빼라고 한다. 즉 “A가 있다” 고 말하는 경우 “있다” 는 말은 A라는 사물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있다” 는 말은 모든 사물에 공통된 표현으로 실은 그 사물에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말할 경우 이미 유(有)나 비유(非有)가 거기에 첨가되기 때문이네” 라고 소크라테스는 논적의 주장을 전달한다. 그 뿐 아니라 그 사람은 심지어는 “바로”, “각각”, “그것”, “단지” 등의 표현들도 빼라고 한다. 이런 것은 사물에는 존재하지 않고 오직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다. 칸트식으로 말하면 감각에 작용하는 오성의 개념들, 범주들을 제거하라는 것이다.
위의 인용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언어에서 주로 명사만 인정한다는 뜻이 숨어있다. 즉 언어가 세상을 반영한다고 할 때 ‘명사 외의 것들은 모두 사유가 첨가한 것들이다’ 는 사상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각각 그 자체로서, 자기 자신에 국한되는 것」 이란 표현은 명사 혹은 명사구를 말한다. 예를 들어서 사과 혹은 빨간 사과 등이다. 이런 명칭들은 사물과 일치되는 것으로서 의미를 가진다. 그러나 그 외의 단어들 즉 있다, 없다, 각각, 단지 등의 단어들은 자체로서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첨가된 것이다. 즉 정신이 사물에 첨가한 것이다. 혹은 합성된 것이다. 특히 대명사류 즉 인칭대명사, 재귀대명사, 지시대명사 (예를 들어 그것 it, 그 자체, itself, 이것 this) 등이 언급된다. 이 말은 일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들은 문장 외에서는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요소와 합성이란 주제가 등장한다. 즉 판단-지식론은 합성에서 이루어진다. 지식의 요소는 두 가지이다: 사물과 비(非)사물이다. 사물은 그에 상응하는 이름을 가지는 반면 비사물(非事物)은 오직 언어 안에서만 존재한다. 아니 이들은 순수한 이름이다. 그들에게 상응하는 실체는 없다.
이는 지식에 대한 철저한 감각적 환원주의를 말한다. 이런 입장이 주관주의와 상대주의로 타락하는 것을 위에서 밝힌바 있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 이 주장은 상당한 호소력을 가진다. 왜냐하면 「A가 있다」 는 표현과 「A」는 실은 같은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플라톤은 이 주장에 반대한다.
즉 지식은 재료와 형식의 합으로 이루어진다: 감각의 재료에 사고 즉 이성적, 언어적 부분이 결합되어 비로소 이루어 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식의 객관적인 부분, 혹은 요소적인 부분 역시 인식가능하다. 이를 플라톤은 설명(account) 혹은 추론된 진술(reasoned statement) 라고 한다, 둘 다 logos의 번역이다. 즉 어떤 지식을 말할 때 그 구성요소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을 하면 완벽한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가령 “소크라테스(Socrates)” 라는 사람을 언급할 때 그의 이름의 철자 (s+o+c+r+a+t+e+s) 도 함께 말하면 정보가 확실하다는 논리이다.
그런 내용이 소위 추론-지식 이론, 즉 지식은 올바른 의견+ 설명(logos)이다 는 사상의 핵심이다.
판단-지식론에 의하면 지식이란 사물적 표현과 비사물적 표현의 결합으로 이루어진다. 혹은 객관적 요소와 주관적 요소의 종합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철저한 경험주의자들은 지식에서 주관적 요소 혹은 순수 언어적인 요소는 인위적으로 추가된 것이니 이를 지식에서 삭제하라고 한다.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전체와 부분의 문제를 언급한다.
그러나 이런 지식의 정당화는 완전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비유적으로가 아니라 단언적으로 지식에서 요소의 성분을 지적하고 이를 밝혀야 하기 때문이다.
플라톤은 설명 혹은 근거(logos) 개념을 세 가지로 열거한다.
편의상 설명 대신 근거(根據)라는 말을 쓰겠다. 근거 혹은 설명이란 지식의 요소를 분석하는 일이다.
지식은 감각자료+언어의 종합이며 이는 어떤 단일한 형상을 가진다. 숫자의 비유로 말하면 2+4=6 이란 식에서 6이 지식에 해당한다. 추론 지식이란 6을 말할 때 그 구성요소인 2와 4를 같이 언급해주는 것이다.
또 이런 맥락에서 플라톤은 사륜마차(waggon)의 비유를 든다.
가령 그것은 바로 헤시오도스가 사륜마차에 대하여 <마차를 만드는 데도 백가지 재목이다> 라고 말한 그것이라네. 그 백가지 재목이 무엇인지 나도 일일이 말할 수 없고, 또 자네도 말할 수 없을 걸세.
보통은 사륜마차의 기능과 사용 방법 등을 알면 그 사람은 사륜마차에 대한 지식을 가진 것으로 치부된다. 그러나 사륜마차의 재료에 대해서 아는 전문가, 즉 100 가지 재료에 대해서 아는 사람은 더 잘 아는 사람이다. 이것이 추론적 지식 즉 의견+설명으로서의 지식이다. 결국 설명이란 사물의 본질을 아는데 있어서 그 기능이나 목적뿐 아니라 재료와 성분까지 아는 것을 말한다.
설명 혹은 추론적 지식은 명제적 지식, 판단으로서의 지식에 대한 하나의 보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판단-지식의 근본적인 취약점 즉 오류 가능성을 지양(止揚)할 수는 없다,
역시 지식의 정의에 관한 난제(아포리아)를 벗어 나지 못한다.
즉 판단에 설명을 더한다고 그 판단의 진실성이 보장되지는 않는다. 즉 새장의 비유에서 나타난 문제 즉 「없는 새를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를 밝히지는 못하고 있다.
5. 플라톤의 『국가』 : 철인(哲人) 왕 과 형상 이론
(1) 『국가』 ㅡ 플라톤 철학의 독립선언
앞의 3장에서 우리는 플라톤이 대화 "테아이테토스"에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를 비판한 것에 대해 연구했다. 여기서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이론 (Flux-Theory) 과 관련을 가지고 있었다.
「테아에테토스」의 인식론에서는 '지식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이 풀리지 않았다. 「테아에테토스」의 인식론은 주관적인 관점에서 접근했다 : 나의 인식, 나의 판단, 나의 이성을 출발점으로 하는데 이를 경우 객관적인 인식이 보장될 수 없다. 한편 필자는 <플라톤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Parmenidean Being)를 통해 지식 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본다> 라고 했다.
플라톤은 『테아이테토스』 대화를 통해 철학의 도전과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 왔고 그 결과 플라톤의 『국가』편에서 플라톤의 철학의 자기ㅡ주장이자 독립 선언을 할 수가 있었다.
이 대화에서 소크라테스의 관심은 바뀌어 진다: 『국가』의 소크라테스는 분명히 플라톤 자신의 사상을 대변한다. 이전의 대화에서 소크라테스는 실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혼합이라고 봐야 한다.
또 다른 차이점은 전에는 소크라테스가 윤리와 도덕 등 주로 개인의 가치로 다루는 반면 『국가』에서는 주로 국가와 정치의 문제를 언급한다는 점이다. 그간 보이지 않던 플라톤의 형제들이 드디어 대화의 현장에 나타나 소크라테스와 더불어 사회와 국가의 개혁을 열렬히 토론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의 관심은 실천적이고 개혁 지향적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국가 전체의 개혁을 원했고 이상적인 국가를 어떻게 수립할 것인가를 연구했다. 그는 실제로도 자신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플라톤은 시라쿠스 왕 디오니시오스 2세와 함께 시칠리의 시라쿠스 왕국의 국가 개혁에 참여하려고 시도했었다. 이 디오니시오스 2세는 플라톤이 철인왕으로 만들려고 했던 사람이다. 물론 이는 실패로 끝났다.
『국가』에서 나라의 조직, 국민의 덕목, 통치, 교육에 관한 이야기들이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분명하고 체계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그러나 플라톤의 반대파인 소피스트들은 그들의 전문기술의 판매(주론 변론술)에만 만족하지 않고 가치의 상대주의를 옹호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당대의 가장 위대한 궤변가 프로타고라스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라고 말했다. 이것은 나의 관심이나 이해가 가치나 진실 혹은 정의의 기준이라는 것을 의미했다. 간단히 말해서 소피스트들은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옳다」와 같은 논쟁의 방식을 가르치고 팔고 있었다. 이 논리는 특히 재판 변론에 적용되었다. 의뢰인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게 변호사의 논리인 셈이다. <재판에서 이겨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변호사의 마음은 소피스트의 <인간 만물척도> 교리에 반영되어 있다.
프로타고라는 그에게 변론 기술을 배운 사람이라면 재판에서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과장된 광고를 냈다고 한다. 또 "자기한테 배운 졸업생이 재판에서 패소하면 등록금을 받지 않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또 다른 소피스트들은 정의는 강한 사람들에게 이익을 주는 사회 시스템이라며 정의의 개념을 왜곡했다. 트라시마코스는 "정의는 강한 자의 이익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부자나 권력자들이 더 많은 이익을 보는 사회적 시스템이 정의(正義)라고 하는 것이니 이는 도덕의 이상과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지식의 상인 소피스트들은 이런 주장을 공개적으로 했다. 이와 같이 궤변론자들은 상대주의의 가치론을 공공연히 외쳐 당시 사회를 더욱 혼란스럽게 했다.
그런 허식적인 상대주의를 파괴하는 것이 플라톤의 역할이었다. 이것은 앞에서 다루었다. 플라톤은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올바른 가치 개념을 확립하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궤변론자들에게 뒤떨어지지 않기 위해서는 플라톤은 가치의 객관성을 증명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러나 현대에도 가치 개념의 본질을 파악하기는 매우 어렵다.
(2) 국가의 3계급설과 영혼의 3분설
플라톤의 "국가"는 제1장부터 제5장까지 국가와 다양한 직업의 구성을 다룬다. 국가는 세 계급으로 나뉘어진다. 첫째는 지배계급(수호자)이고, 둘째는 군대 계급, 셋째는 생산계급(농부, 장인, 상인)이다. 그리고 각 계급은 직무에 따라 각기 미덕을 가지고 있다: 첫째의 덕은 지혜인데 이는 형상(=이데아, 에이도스)에 대한 지식을 말한다. 둘째 계급의 덕은 용기, 셋째의 덕은 절제이다.
국가의 지배를 받고 있는 세 종족이 존재했던 것처럼, 개인도 세 가지 원리를 지니고 있다고 가정할수 있네.
국가에 세 가지 서로 다른 계급이 있는 것처럼 개인의 영혼에도 서로 다른 세 가지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위에서 말한 지혜에 해당하는 이성적인 부분, 용기의 부분 그리고 욕구의 부분이다. 이를 영혼의 3분설이라고 한다. 용기 혹은 기개(氣槪)는 사유의 보조적 기능이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이는 하나의 독립된 원리로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정의란 이 세 계급과 덕목이 서로 균형을 이룬다는 것이다. 정의, 지혜, 용기, 절제를 플라톤의 4대 덕목 즉 4주덕(主德)이라고 한다.
(3) 철학자 왕
그런데 플라톤은 지배계급이 철학을 알아야 한다는 다소 뜬금없는 주장을 한다. 이른바 철학자 왕(Philosopher King)의 사상이다. 플라톤이 말하는 철학자는 형상에 대한 지식을 가진 사람이다. 이 책의 화자인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한다.
철학자들은 창조와 소멸에 의해 동요되지 않고, 언제나 확고한 실재를 제시해줄 만한 학문에 대해서 적극적인 열의를 가지고 있는 걸세.
여기서 철학자들은 이데아 학문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형상의 본질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와 같다. 창조와 소멸과 같은 현상계(現象界 : phenomenon) 밖에 있는 본체계(本體界) 혹은 예지계(睿智界, noumenon)의 세계에 존재하는 형상이나 '존재'를 아는 사람이 바로 철학자이다.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의 존재 개념에 형상(form, idea)을 대입했다.
그런 사람은 세속적인 욕망이나 이기적인 욕심에 탐닉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는 최고의 존재, 즉 선과 미의 형상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통치자는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도자들의 부패로 나라가 재앙을 면할 수 없다. 또한 통치자는 애국심이 강해야 한다. "통치자가 될 사람들은 여러 가지 쾌락과 고통 속에서 갈고 닦은 애국자들임을 증명해야 한다“ 고 한다.
이 부분은 한국의 현실을 보면 잘 이해할 수 있다. 잘못된 지도자들 때문에 국민들은 많은 고통을 받고 있다. 지도자들이 국가 전체의 이익보다는 정당이나 집단이기주의에 빠지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나라를 어느 특수 계층의 행복을 위해서가 아니라 전 국민의 행복을 위해 이끌어 나가야 하네.
이처럼 어떤 특정 계급만이 아니라 모든 계층이 두루 행복한 공동체를 국가 혹은 공화국이라고 한다. 이를 담보할 지도자는 철학적 지혜를 갖춘 왕이다. 이를 보면 플라톤은 민주주의를 좋아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 그리스의 민주주의가 공화국의 이념 즉 위의 인용문에 나타나 있는 전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특수 계층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사회로 변질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주의는 가장 좋은 정치 시스템이기는 하지만 대중들의 감정에 호소하는 한 중우정치나 카리스마정치 혹은 금권정치 등 타락한 정치로 변질된다는 것을 우리는 숱한 역사적 경험을 통해서 알고 있다.
그래서 플라톤은 "철학자들이 왕이 되지 않는 한, 우리 국가나 인류에게도 악(惡)으로부터의 종식은 있을 수 없다"고 말한다. 철학자가 왕이 되어야 비로소 이상적인 국가가 실현된다고 한다.
즉 정치적 권력과 철학적 정신이 모체가 되어, 많은 사람들의 소질이 현재처럼 길러지지 않도록 억제되지 않는 한, 여러 나라들의 불행은 제거되지 않을 걸세.
그러니까 정치권력과 철학적 지능이라는 이 두 가지가 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철학자 왕 개념은 플라톤이 드디어 실재(reality)에 대한 확고한 신념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철학자 왕’이라는 사상은 당시에 상당히 황당한 일로 여겨질 수 있었다. 플라톤도 이를 걱정했다. 이를 대중들에게 이해시키거나 납득시키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이와 같은 말은 전부터 내가 입밖에 내기를 꺼려했던 걸세. 상식 밖의 이야기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네. 그리고 나라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생활이나 공동생활에서 행복을 가져 올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네.
플라톤 당시나 지금이나 철학자 왕의 컨셉은 수긍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 현실성 여부를 떠나서 이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놀라운 발상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형 글라우콘은 소크라테스의 입에서 나오는 철학자 왕 이야기에 놀라면서 그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웃통을 벗어 젖히고 무기를 들고 상기(上氣)하여 달려들 것을 각오해야” 한다고 경고를 한다.
이는 마치 예수님이 천국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나라의 도래를 선포할 때 이를 지상의 신흥 왕권 탄생으로 오해한 당시 유태의 지도자들과 로마의 관리들이 예수를 미워하고 박해한 것과 같은 종류의 오해였다. 플라톤은 철학자 왕 이론 때문에 실제로 박해를 받았는지는 모르나 문제는 본인이 그런 걱정을 했다는 것이다.
(4) 형상이론(이데아설)
플라톤이 이처럼 남들이 쉽게 이해하지 못할 말을 하는 것은 나름대로 철학적 지식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바로 그가 진리를 보았기 때문이다. 궁극적 실체에 대한 확고한 인식과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의 체계가 바로 이데아 설 혹은 형상이론이다.
이는 다시 말해서 <테아이테토스> 편의 온갖 인식론적 문제들이 이제는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파르메니데스주의와 헬라클레이토스주의가 절충, 종합이 되었고 판단ㅡ지식과 오류의 문제가 인식론적, 인간학적으로 해결되었음을 말한다. 인식론의 문제는 인식론적으로 해결될 수 없고 도리어 존재론의 확립을 통해서 해결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왜냐하면 감각에 기초한 지식은 오류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존재와 인식의 지향적 관계가 확립이 되어야 한다. 이는 곧 설명될 “동굴의 비유” 그리고 “선분의 비유” 등을 통해서 성취된다.
철학자가 이렇게 뛰어난 이유는 그가 실재(reality)에 대한 지식을 가지기 때문이다. 결국 플라톤 자신이 실재(實在)를 확실히 알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이데아설 혹은 형상이론이다.
이데아설의 요지는 사물에는 그 본질이 있다는 것이다. 사물 즉 개별적이고 물질적인 존재들은 모두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는 유한적 존재이다. 이들은 생성, 소멸되는 필멸(必滅)의 존재들이고 인간은 감각을 통해서 이들을 인식한다. 이들은 만물 유전의 법칙에 복종한다.
이런 개별적인 사물들은 그 본성 혹은 기능을 따로 가지고 있다. 이를 이데아(idea) 혹은 형상(form)이라고 한다.
플라톤의 표현을 따르면 아름다운 것들은 ㅡbeautiful thingsㅡ 아름다움 자체를 ㅡbeauty itselfㅡ 내포하고 있다고 한다. 아름다움 자체가 아데아이다. 이데아는 개체와 달리 영원하다. 이는 사유의 대상이다. 파르메니데스가 사유와 존재는 일치한다 라고 했는 데 이데아, 형상은 감각의 대상이 아니라 사유의 대상이며 따라서 영원하고 불변적이다. 이는 파르메니데스의 “부동적 존재” ㅡimmovable beingㅡ에 해당한다. 이런 사물의 본질, 이데아, 형상을 직관하는 사람이 철학자이다.
개체와 형상의 관계를 플라톤은 여러 가지로 설명하는데 모방과 참여가 대표적이다: 개체가 형상을 모방한다 ㅡimitationㅡ, 개체는 형상에 참여한다 ㅡparticipationㅡ.
플라톤의 철학자란 그의 생각이 아름다움 자체를 인식하는 사람을 말하며, 그는 그 자체로 아름다운 것과 거기에 참여하는 것을 구별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자체의 미(美) " 또는 "미(美) 그 자체"를 형상, 즉 아름다운 것의 형상이라고 부른다. 플라톤에 따르면 <아름다운 여성을 포함한 아름다운 것들은 후자가 전자를 모방하거나 후자가 전자에 참여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라고 한다.
미의 형상(이데아) 이란 아름다운 것들 사이의 공통적인 요소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아름다움의 본질은 단순명료하게 정의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미의 정의(定義)를 균형, 조화, 개성, 생동감, 매력 등 여러 가지 시도가 있으나 어느 하나 만족스럽지 못하다.
미의 개념이 이처럼 파악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항상 아름다움의 개념에 대해서 생각하고 말한다.
“생각할 수 있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존재한다” 라고 파르메니데스는 주장했다. 그런 점에서 미의 형상은 개념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ㅡ어디엔가에ㅡ 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이데아들의 세계를 후대에는 예지계 혹은 본체계 ㅡnoume naㅡ라고 불렀다. 이는 현상계와 ㅡphenomenaㅡ 반대되는 개념이다.
보이는 아름다운 것들과 달리 <아름다움 그 자체>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이는 이해될수 ㅡ생각될ㅡ있다고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플라톤의 형상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를 암시한다. 우리가 2장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파르메니데스의 존재는 불변적이고 가지(可知)적이다. 존재와 생각은 동일하다.
파르메니데스의 존재의 의미 즉 사유되는 것은 존재이다 에 근거하여 플라톤은 사유될 수 있는 것을 여러 개로 보았다. 즉 플라톤의 형상(=이데아, 에이도스)은 복수(複數)이다. 예를 들어서 아름다움, 선, 정의(正義)의 형상 등이 있다. 따라서 플라톤의 존재는 다원적이다. 그리고 원론적으로 선(善) 뿐만 아니라 악(惡)도 형상이 있다고 봐야 한다. 소크라테스와 글라우콘의 대화는 다음과 같다:
미(美)와 추(醜)는 서로 다른 양자가 아니겠나?
물론입니다.
그렇다면 양자(兩者)는 각각 하나가 아니겠나?
그렇습니다.
그리고 정의(正義)와 불의(不義), 선(善)과 악(惡) 등의 모든 실재(實在=이데아)에 대해서도 똑같이 말할 수 있을걸세. 즉 그 자체는 하나이지만 여러 가지 행위와 연결되고 물체와 결합되며, 서로 연관되어 도처에 모습을 나타내기 때문에,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겠나?
물론입니다.
선과 악, 미와 추 그리고 정의와 불의 등은 원래 하나의 존재이지만 이들이 여러 가지 행위와 연결되고 물체와 결합되면서 하나가 아니라 많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플라톤의 형상-이론은 가치와 도덕의 문제에 두드러지게 관심을 갖고 있다. 이는 그의 원래적 관심 곧 사회 개혁 이라는 실천적 관심을 반영한 것이다.
형이상학적인 토대를 통해서 가치 문제를
해결하고 드디어는 이상적인 국가의 모습까지 디자인하게 된 것이다.
(5) 의견 (doxa) ㅡ 현상계의 부분적 긍정
그러나 플라톤의 형상-이론은 파르메니데스적인 존재뿐만 아니라 헤라클레이토스의 만물유전 이론에도 근거한다.
파르메니데스는 또한 변화와 생성의 필요성을 알고 있었지만 변화의 세계를 학문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따라서 그는 변화의 세계를 진실과 반대되는 의견(doxa), 망상(illusion)의 방식이라고 묘사했다. 파르메니데스는 결과적으로 전자와 후자를 연결시킬 수 없었다. 두 세계는 나란히 있을 뿐이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존재(存在)와 헤라클레이토스의 생성(生成)이라는 두 세계를 연결시키려 한다. 이것이 이데아설이다.
플라톤은 이데아 설 내에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인식 능력의 구별이라는 방법을 고안한다. 이를 “선분의 비유” 이라고 한다.
『국가』 4권에는 영혼의 3분설이 나왔는데 이는 주로 국가철학과 실천철학의 관점에서 영혼의 구조와 기능을 분석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데아설의 전개와 더불어 난제가 등장한다. 그것은 위에서 언급한 형상과 개체의 인식 문제이다. 사물 속에 형상이 내재한다고 할 때 문제는 어떤 사람은 형상을 인식할 수 있고 어떤 사람은 이를 인식할 수 없다. 형상의 ㅡformㅡ 인식은 철학자 내지 지혜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다른 문제는 형상과 개체의 관계 문제였다. 위에서 이를 모방과 참여로서 언급했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아름다운 사물은 인정하지만, 미 자체는 알지 못하며, 그것을 인식하도록 인도하여도 따라가지 못하는 자는 꿈을 꾸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 • •)
그렇다면 지금 말한 것과는 반대로 미의 본질이 실재한다는 것을 믿고, 그 본질과 그 본질을 본뜬 것을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 즉 본뜬 것을 본질로 생각하지 않고, 전자와 후자에 대해 혼돈하거나 착각을 일으키는 일이 없는 사람을 꿈꾸고 있다고 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으면 눈을 똑바로 뜨고 있는 사람으로 간주해야 할까?
(• • •)
분별있는 사람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으며, 사색하는 인간은 한갓 의견(意見)을 소유하고 있다고 말하는 것이 옳지 않겠나?
여기서 의견이라고 번역한 것은 원문에는 doxa이다. 의견(意見) 혹은 억견(臆見) 이라고 번역한 doxa는 파르메니데스에게서는 생성과 소멸을 믿는 인식을 말한다. 즉 비진리(非眞理)를 믿는 소박한 일반인들의 의식이 doxa 이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무명(無明)이다. 색즉시공(色卽是空) 임을 모르는 속세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나 파르메니데스와는 달리 현상계를 어느 정도 수긍하는 플라톤은 의견(doxa)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인식의 가치를 부여한다. 의견과 현상을 무지와 지식의 중간단계로 본다. 무지(無知)의 대상은 무(無) 혹은 비존재(非存在)이다. 위의 인용문에 나타난 의견을 가진 자, 즉 이데아를 알지 못하고 의견만을 가진 속세의 인간들도 완전히 바보들은 아니다.
이런 측면에서 플라톤은 진리와 비진리, 존재와 무 사이에서 제 3의 지대를 설정한다. 후대에 현상(現象)으로 불리워진 영역이다.
이는 존재와 비존재를 왔다 갔다 하는 영역이다. 이는 지식보다는 어둡고 무지보다는 밝은 영역이다.
그런데 우리가 <동시에 존재하면서 존재하지 않는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는 무엇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그와 같은 것은 참으로 <존재하는 것>과의 중간에 놓여야 하며, 거기에 대응하는 것은 <지식>도 <무지>도 아니고, <지식>과 <무지>의 중간에 나타나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 아닌가?
그것은 옳은 주장입니다.
결국 이제 중간적인 위치에 놓이는 주인공이야말로 <의견> 이라고 하는 것을 알게 된 셈일세.
<의견>의 영역은 생성, 소멸, 변화하는 현상계는 존재와 비존재의 중간 영역이다. 이것은 헬라클레이토스의 만물 유전의 영역이다. 흐르는 강물처럼 변하는 세상이다.
물론 이런 생각은 큰 문제를 가지고 있다.
현상계와 더불어서 그 배후에 있는 실재(實在)를 아는 자, 곧 철학자는 인간 중에서 가장 신적(神的)인 자가 된다. 그는 사후의 세계에서 축복을 누린다고 한다.
우리는 앞에서 ㅡ테아이테토스 부분ㅡ에서 지식을 의견 혹은 판단이다 라는 플라톤의 주장을 살폈다. 또는 “지식 = 올바른 의견 + 설명” 이라는 추론 지식을 살펴 보았다. 이런 사고방식이 <국가> 편에서도 이어지고 있다. 단 <국가>에서는 지식과 의견이 구분, 분리되고 있다. 의견은 지식보다 낮은 단계로 강등(降等)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견의 영역은 살려지고 있다. 이는 환상이나 착각의 영역이 아니다.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지식과 무지의 중간 영역이다. 생성, 소멸하는 영역이며 눈으로 보는 세계이다.
철학자가 아닌 일반인들이 아는 세계이다. <국가> 6권에서는 다시 이 의견의 영역을 세분화하고 확대한다.
(6) 선분의 비유 : 의견(doxa)의 영역의 세분화 및 학문이론
<국가> 5권에서는 지식과 무지의 중간 영역을 설정하고 이를 의견의 영역이라고 규정했다. 그런데 이런 분류만으로는 당시 모두가 인정한 기하학의 영역이 포함이 안 된다. 플라톤이 상식이나 소피스트류의 상대주의 인식론을 넘어서 객관적 지식의 영역을 긍정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의 수학에 있었다. 이것 때문에 고대 그리스의 지성계는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인생무상(人生無常) 등으로 쉽게 빠질 수가 없었다. 피타고라스의 기하학으로 대표되는 그리스의 기하학은 진정한 지식의 세계가 있음을 보여주었다. 정의(definition), 정리(proposition), 공리(axiom) 그리고 증명(proof) 등으로 이루어지는 기하학은 어느 누구도 그 영원성과 객관성 그리고 진리성을 부인할 수가 없었다. 이것이 상대주의, 경험주의, 회의주의 등을 막아주는 방부제 역할을 한다.
형상의 발견을 통해서 불변적인 지식의 존재를 확신한 플라톤은 그러나 다른 문제에 부딪힌다. 수학적 지식과 예술의 영역이다. 따라서 국가 6권에서는 형상과 의견이라는 2개의 존재 영역을 4개로 확장한다.
플라톤의 존재론은 크게 가지적 영역과 가시적 영역으로 나누어 진다. 전자는 다시 철학적 직관 ㅡNoesis (νόησις)ㅡ, 추리 ㅡ
Dianoia (διάνοια)ㅡ로 나누어지고 후자는 지각 ㅡPistis (πίστις)ㅡ 그리고 상상력 ㅡEikasia (εἰκασία)ㅡ 으로 나누어진다.
철학적 직관은 이데아, 형상의 직접 인식하고, 추리는 수학적 철학적 추론을 하며 지각은 가시적 사물의 인식(현실: 생성, 변화의 세계)을 하고 상상력은 예술 창조 등과 관련한다, 즉
현실의 모방을 한다. 플라톤은 이를 한 개의 선분을 4등분하여 표시한다.
가시적 세계(visible world, sensible world)는 다시 상상력과 지각의 두 부분으로 나뉘어지고, 가지적 세계(intelligible world)는 추론와 철학적 직관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진다. 즉 세계를 이성적인 부분과 감성적인 부분으로 나눈다.
즉 세계는 상상력 ㅡ 지각(신념) ㅡ 추론(오성) ㅡ 철학적 직관 (이성)의 4 부분으로 구성된다. 이를 "선분의 비유"라고 한다.
문제는 4가지의 서로 다른 지식들이 하나의 선분 위에서 표현되고 있다는 점이다. 높고 낮은 차이는 있지만 이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를 모두 통괄하는 것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선의 이데아”이다 ㅡ the idea of good ㅡ. 또 이는 다른 이데아들 예를 들어서 정의(正義)나 미(美)보다 더 근원적이다. 달리 말하면 정의나 미 역시 선에 포함된다.
“선의 이데아”는 지식(과학)이나 진리보다 더 높다. 선의 이데아는 태양에 비유되고 있다. 태양은 모든 가시적인 것들을 보이게 해주고 동시에 영양을 주고 자라게 한다.
태양은 대상과 인식기관의 중간에 서서 양자를 연결하는 고리와 같다. 물체와 눈이 있어도 빛이 없으면 보지를 못한다.
“선의 이데아” 역시 그런 역할을 한다. 플라톤은 “선의 자식들”이란 표현을 쓴다. 선의 이데아는 대상(이데아)과 그 지식 사이에 서서 양자를 연결한다. 이런 면에서 선의 이데아는 존재와 본질의 원인이다. 이는 이데아 중의 이데아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인식되는 것>에는 <진리>를 부여하고 <인식하는 것>에는 그 기능을 부여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實在)라고 할 수 있지 않겠나? 더구나 그것은 지식과 진리의 근원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할 걸세.
근대 철학의 용어로 말하면 선의 이데아는 주관과 객관의 결합내지 통일을 상징한다. 즉 인식의 대상에게는 진리를 부여라고 인식의 주체에게는 아는 힘을 부여하는 것이 선의 이데아이다. “선 자체”는 지식과 진리의 근원이다.
또한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선의 이데아 때문에 모든 종류의 지식과 그 대상이 그 차이에도 불구하고 하나로 연결이 된다고 할 수 있다.
유명한 “동굴의 비유”는 선분의 비유를 좀 더 극적으로 나타낸 것이다. 선의 실상(=이데아)를 모르고 사는 사람들은 어두운 동굴 속에 사는 죄인들과 같다. 왜냐하면 세상의 사물들은 이데아의 복사 내지 모조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동굴 속의 수인들은 태양을 볼 수 없고 태양이 만든 그림자만 보고 산다.
철학자는 그들을 동굴 밖으로 인도하여 실재의 사물들을 보여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설령 그들이 싫어하거나 당황할지라도 ‘미 자체’ 혹은 ‘선 자체’를 보여 주어야 한다. 그런에 그런 이데아들은 육신의 눈으로가 아니라 영혼의 눈으로 보여진다; 즉 그들은 가시적인 존재가 아니라 가지적인 존재들이다.
6. 흔들리는 형상이론 : 플라톤의 대화편 『파이돈』 분석
엘리스 출신인 파이돈은 소년 시절에 전쟁에 휘말려 노예로 팔려나갔다. 이후 아테네에서 소크라테스와 접촉하게 되었는데, 소크라테스는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그를 자유인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그는 소크라테스의 임종에 참석했고, 플라톤은 그의 대화 중 하나를 그의 이름을 따서 『파이돈』으로 명명했다.
플라톤의 성숙기의 대화 『파이돈』은 위대한 걸작으로 그 주제들은 영혼의 불멸설, 인식론으로서의 기억 이론 (=상기설), 존재론으로서의 이데아론, 철학은 죽음에 대한 준비로서의 철학의 역할을 묘사하고 있다.
(1) 영혼의 불멸ㅡImmortality of Soulㅡ과
영육이원론 (靈肉二元論)
이 책의 부제는 영혼에 관하여 (On the Soul)이다.
플라톤의 저서로 이 책은 '영혼에 대하여'라는 부제를 가지고 있다. 그 대화가 설정되어 있는 시기와 장소는 바로 소크라테스가 죽는 당일 아테네의 감옥 속, 이른 새벽부터 해가 넘어갈 때까지의 사이이다. 그리고 이 저작이 실제로 플라톤에 의해서 집필된 연대는 소크라테스 사후 14~15년이 지난 뒤라고 추정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파이돈 [Phaidon] (철학사전, 2009)
파이돈의 큰 주제는 영혼의 불멸이다. 이 책에서 소크라테스는 “철학자는 죽음에 임하여 기쁠 수밖에 없다는 까닭과, 또한 죽은 후에 저 세상에서 가서 가장 큰 복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한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과 육체의 분리라고 가르치면서 이는 원래 죽음이란 완전한 파멸이 아니라. 영-육 이원론에 근거하여 영혼이 육신을 떠나는 것으로 본다. “철학자는 죽음을 연습하는 자”이다.
대화의 주인공인 소크라테스는 이 모든 철학 이야기에서 가장 적합한 모델인 것 같다. 소크라테스의 삶과 말은 사실 영혼의 불멸을 암시하고 있다. “변명” 을 보면 그런 것이 보인다.
그런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플라톤은 영육 이원론과 영혼의 불멸이라는 학설을 통해서 더욱 강화시키고 있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죽음들의 하나로 여겨지는 소크라테스의 추억을 그 제자인 플라톤이 학문으로서 경배하는 것으로 보인다.
서양 문화의 거룩한 전통인 된 플라톤의 학설 영혼의 불멸설과 영육이원론은 그러나 “무(無)는 없다, 존재만 있다” 라는 파르메니데스의 사상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위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무는 없다, 생성은 없다 라고 할 때 현상계를 설명할 수가 없게 되어 엠페도클레스, 데모크리투스 같은 다원론자들이 나와서 “실재(reality)는 불변이다, 원소, 원자 같은 실재들이 상호간에 결합하거나 분리하는 것이 현상계의 생성, 소멸, 변화를 의미한다 라고 하여 파르메니데스주의를 완화, 보충했다.
플라톤 역시 그런 맥락에서 형상을 불멸의 실재로 놓고 형상과 개체의 관계를 이데아설로 설립했다. 그런 맥락에서 죽음이란 무(無)가 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영혼과 육체의 분리로 봐야 한다.
플라톤의 영육이원론과 영혼의 불멸설은 그 이후 크리스트교와 결부되면서 서양의 중요한 문화적인 전통이 되었다.
(2) 형상이론의 보편화
소크라테스는 덕(德)의 본질을 학문적으로 규명하려고 노력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러나 그의 제자인 플라톤은 마침내 덕(德)의 본질을 상정하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덕을 이데아(idea, eidos) 혹은 형상(Form)으로 본 것이다.
덕의 형상 혹은 이데아론에 기초하여 플라톤은 형이상학의 체계를 수립할 수 있었고, 나아가 철학자-왕인 나라, 이상국가, 모든 계급이 행복한 나라의 기초를 닦을 수 있었다.
『파이돈』의 주제는 영혼의 불멸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숙고에서 발생한 나타난 영혼의 불멸 사상은 형상 이론과 직접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탄생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을 말한다. 영혼은 탄생 이전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다가 어느 순간 육체를 입고 세상에 들어온 것이다.
영혼은 또한 인식론에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형상의 인식은 눈과 귀가 아니라 영혼을 통해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국가』 에서는 이데아의 인식이 철학적 직관 혹은 이성(reason)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했다. 그 반면 『파이돈』 편에서는 형상의 인식 기능을 영혼 혹은 정신에 부여한다.
영혼의 불멸성과 형상이론의 밀접한 관계를 예시하기 위하여 플라톤은 동일성 ㅡidentityㅡ 이라는 범주를 예로 든다. 즉 “같은 사람”이라고 할 때 형용사 “~같은” 은 실은 명사 “같음”에서 유래한 다는 것이다. 플라톤의 용어로는 “같음” 자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결국 같은 것들이란 <동일한 것> 자체는 아닐테지?”
소크라테스가 이렇게 물었네.
“저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소크라테스 선생님.”
“그런데 이와 같은 것들이 <동일한 것> 자체와는 같지 않지만 자넨 이와 같은 것에서 <동일한 것> 자체를 파악하게 되고 인식하게 되는 것이 아니겠나?”
세상의 어느 두 물건도 완전히 동일하지는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동일성을 파악한다. 즉 “같은 개 두 마리” 라고 할 때, 그 “같은”이다. 두 마리의 개는 비슷하긴 해도 “서로 같다” 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위의 인용에서 <동일한 것> 자체란 동일성의 형상을 말한다. 플라톤은 동일성이라는 객관적인 존재가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심지어는 모든 감각적인 것들은 <동일한 것> 자체 곧 그 형상에 도달하려고 한다는 말도 한다.
그렇다면 모든 감각적인 것들이 <동일한 것> 자체에 이르려고 하지만, 거기에 달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감각을 통해야만 되는 것이란 뜻이 아니겠나?
감각 때문에 동일성의 인식이 방해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 영혼은 출생 전에 이미 동일성을 알고 있었다. 그러다가 세상에서 같은 나무 혹은 같은 돌 등의 동일한 사물들을 보게 되면 동일성의 형상을 기억하고 인식한다는 것이다.
즉 영혼의 불멸설을 통해서 형상 인식을 정당화한다. 출생전의 영혼은 이데아를 보고 있었는데 출생 즉 영혼과 육체가 결합되는 과정에서 이데아를 잊어버리고 흐릿한 감각만을 본다는 것이다. 여기서 상기(想起)설이 나온다. theory of recollection 즉 참된 인식, 곧 이데아의 인식은 상기(想起), 기억(記憶)이라는 것이다. 학습 역시 상기를 통해서 설명된다.
우리는 앞에서도 이미 말했지만 영혼이 지각의 수단으로서 육체를 사용할 때, 즉 다시 말해서 시각이나 청각 그 외의 다른 감각기관을 사용할 때 ㅡ 육체를 가지고 지각한다는 것은, 곧 감각을 통하여 지각하는 것을 의미하므로 ㅡ 그 경우에 영혼은 육체에 끌려 변화하는 것 속으로 휩쓸려들어가, 방황하며 혼수상태에 빠지고 마치 술취한 사람처럼 어리둥절할 것이 아닌가?
감각기관을 사용하는 것은 술취한 상태와 같다고 한다. 그 반면 지식 혹은 지혜란 영혼이 자기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 불변하는 것을 직관하는 상태이다.
(3) 참여이론, 형상-원인론(형상인)
영혼 불멸과 상기설을 통해서 형상의 존재론, 인식론을 설립했지만 여전히 남은 문제는 형상과 개체의 관계이다. 형상의 존재는 이 세상 즉 감각과 물질의 세상이 아니라 저 세상 즉 영혼의 세상, 출생전이나 사망 후의 세계에 속한다. 현상계는 영혼이 육신과 결합함으로서 생기는 혼돈의 세계, 술취한 듯한 세계이다. 이 경우 현실 세계를 무시하고 관념적인 이상(理想)세계에만 ㅡideal worldㅡ 빠져 살 수 있다. 또한 플라톤의 원래적 관심인 도덕적, 정치적 참여와 개혁 역시 현실 세계를 지향한다. 이데아 세계만큼이나 이 세계 즉 생성과 소멸의 세계도 중요하다. 따라서 상기설, 영혼불멸설로만 플라톤의 열정을 달랠 수는 없다. 실은 이 세계가 더 중요하다. 많은 사람들이 폭정(暴政)과 소피스트들의 거짓으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특히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는 페리클레스의 황금 시대 이후 점점 변질이 되어 중우정치, 금권 정치, 참주 정치가 행해져 시민들의 삶이 극도로 피곤해진 상태였다. 이는 무엇보다도 소크라테스 재판에서 나타난 것처럼 민주주의 하의 재판이 불공정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은 민주주의가 아니라 군주주의 즉 철학자 왕정을 꿈꾸었다.
동일성의 형상을 통해서 형상의 선재(先在)성, 초월(超越)성을 깔끔하게 정리한 플라톤은 이에 만족하지 않고 다시 형상의 내재성과 원인성을 강조한다. 즉 형상은 개체 속에 들어 있고 또 형상은 개체의 원인이라는 사상이다. 이는 형상과 개체의 관계를 다시 규정하는 일이었다: 즉 개체의 세계가 <국가>에서는 태양의 그림자의 세계로 나타났다. 이 때 형상과 개체의 관계는 원형-모방의 관계였다.
그런데 <파이돈>에 와서 개체와 형상의 관계는 근본적으로 참여설 혹은 수용설에 의해서 규정된다. 참여설 : 개체가 형상에 참여한다. 수용설 : 형상이 개체를 수용한다.
다시 말해서 “개체가 형상에 참여함으로서 형상의 성질을 가진다” 혹은 “개체 속에 형상이 들어와서 형상의 성질을 나타나게 한다” 는 것이다.
플라톤은 개체가 형상에 참여한다고 하지만 내용적으로 볼 때, 그 반대로 형상이 개체에 참여한다고 볼 수도 있다.
개체ㅡ형상 간의 관계에 일대 변환이 온 것이다. 빛과 그림자 혹은 원형과 복제품 같은 상하(上下), 주종(主從)의 관계가 아니라 거의 동반자 관계로 변화한 것이다. 둘의 지위가 비슷해진다. 아래 인용문과 같이 큰 것, 작은 것의 형상은 하나의 개체에 둘이 동시에 포함되어 있다.
내가 기억하기에는 이와 같은 견해에 합의를 본 후 각각 형상(eidos)이 존재하며, 다른 것들은 여기에 참여함으로써, 그 명칭을 얻게 된다는 것에 동의하였을 때, 그 분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였다고 기억하네.
<그렇다면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보다는 크고,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자네가 주장할 경우에, 자네의 주장은 실제로 심미아스 속에 둘이, 즉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파이돈>의 상기설 부분에서는 개체는 술취한 상태로까지 격하된 바 있었다. 달리 말해서 시각적인 표상들이 관념적인 형상에 비교해서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나 <파이돈>의 후반부는 참여설 혹은 원인설로 나타나고 이 경우 개체의 지위는 사물의 그림자나 모방 혹은 술취한 사람에게 보이는 모습이 아니라 상당한 실재성(reality)를 획득하게 된다. 즉 <파이돈>의 후반부에서는 형상의 존엄성과 더불어 개체의 위치도 상향 조정된다.
특히 이 문제는 수학적 대상들의 지위와 인식의 문제와 직결된다.
<국가>에서 수학은 이데아와 마찬가지로 가지적(可知的)인 영역에 귀속된 바 있다.
11. 수학적 개체들은 그 형상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가령 원의 그림과 형상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그림은 개체를 말하고 형상은 정의(definition) 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한 점에서 같은 거리에 있는 점들의 집합을 원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는 컴퍼스를 이용하여 이 원리에 따라 원을 작도할 수 있다.
이처럼 기하학의 경우 형상과 개체의 관계는 아주 명쾌하다. 플라톤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없으나 필자가 한번 만들어 본 것이다.
그런데 대수의 경우 이런 관계가 상당히 분간이 되기 어렵다.
즉 숫자 1이나 빵 한 개의 경우 이에 대한 형상이 무엇인지 알기 어렵다. 숫자 1은 형상과 개체의 구별이 어렵다. 그러나 형상-개체 2분법을 철저히 고수하는 플라톤의 경우 이를 설명하는데 문제가 발생한다.
그리고 큰 소리로, 무엇이든지 존재하는 것은 그 본질에 참여하기 때문이며, 다른 까닭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고, 단지 그것들이 각각 그 본질(=형상)에 참여하는 것만을 안다고 말하며, 또한 둘의 원인은 오직 둘 자체에 있으므로, 이것이 둘을 둘로 되게 하는 것이며, 또 하나 자체에 참여함으로써 어떤 하나가 생기게 된다고 단언할 수 있을 것이 아닌가?
위의 문장의 의미는 이렇다. 진, 선, 미 등의 추상적인 가치 개념뿐만 아니라 수(數)에도 형상이 있다는 주장이다. 1에는 1의 형상이 있고 2에는 2의 형상이 있다는 것이다. 숫자 2와 2의 형상이 구별된다는 것이다. 이 말도 이해는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숱한 “숫자 2” 혹은 개수 “두 개”가 있고 어느 경우나 우리는 동일한 2를 인식하기 때문이다. 그 동일한 2의 관념을 2의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를 말로 표현하면 “2가 2되는 것은 2의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라고 된다. 마찬가지로 1은 1의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에 1이 된다. 이런 구별을 하는 것은 이해는 되지만 상당히 인위적이고 관념적인 구별이라고 할 수 있다. 머리 속에 있는 1의 관념과 가시적으로 나타난 숫자 1이나 한 개 등이 다르다고 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국가>와 비교해 볼 때 <파이돈> 대화편의 특징은 플라톤은 무엇보다도 형상의 역할을 ㅡ사물의ㅡ 원인으로서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함께 형상은 사물의 원인으로 규정된다. 즉 원인과 참여라는 것이 형상ㅡ개체의 새로운 관계이다.
위의 인용문에서 나타난 것처럼 형상은 개체의 원인이다. 즉 하나가 하나되는 것은 하나의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하나의 형상이 그 개체의 원인이다.
아름다움 그 자체, 선 그 자체, 큼 그 자체 등은 모두 원인으로, 즉 현실적으로 아름다운 것들, 선한 것들 그리고 큰 것들의 원인으로 규정된다.
나는 언제나 누구나 알고 있는 많은 사람들의 논란이 아름다움 자체와 선 자체 그리고 큰 것 자체며, 그밖에 모든 것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여, 다시 처음부터 출발하려고 하네. 만일 자네가 이것을 인정한다면, 그리고 여기에 동의를 한다면, 그 원인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영혼의 불멸에 대해서도 입증할 있으리라고 생각하네.
이 문장은 그의 이데아설에 대한 강조 및 확인을 말한다. 이는 다시 말해서 형상ㅡ개체 설이 문제시되었고 또 의문과 도전이 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 문장 바로 다음에 앞에서 언급한 수의 형상 문제가 진술되었다. 물론 수의 형상이 있다는 쪽으로 결론이 나긴 했으나 뭔가 개운하지가 않았다. 위의 언급처럼 플라톤의 사유를 따라가면 결국 “1이 1되는 것은 1의 형상에 참여하기 때문이다” 라는 것이 된다. 이는 상당히 동어반복적인 ㅡtautologyㅡ말이다.
“파이돈”에는 새로운 종류의 형상의 기능이 나타난다: 형상은 개별자들로 하여금 그 자신에 따라 나타나게 한다. 형상이 개별자에게 작용을 가한다.
(4) 대(大)와 소(小)의 역설
이 문제들 외에도 비교의 형용사들 즉 "큼" 또는 "작음"은 또한 그들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심미아스는 소크라테스보다는 크고, 파이돈보다는 작다고 자네가 주장할 경우에, 자네의 주장은 실제로 심미아스 속에 둘이, 즉 큰 것과 작은 것이 있다고 말할 수 있게 되지 않겠는가?>
이 말은 다시 말하면 심미아스라는 개체 안에 큼의 이데아(형상)와 작음의 이데아(형상)가 각각 동시에 있다는 말이다.
소크라테스, 심미아스, 파이돈 3인의 키를 재는 경우
파이돈이 가장 키가 크고 심미아스가 중간 키, 소크라테스가 가장 작다. 파이돈는 큼 자체만 있고 소크라테스는 작음 자체만 있지만 심미아스는 둘 다 가지고 있다, 즉 큼과 작음을 가지고 있다.
심미아스 안에서 큼과 작음이 투쟁에 임하게 되고, 심미아스가 키가 소크라테스를 능가할 때 큼의 형상은 작음의 형상을 밀어내게 된다. 반대로 심미아스가 파이돈(Phaido)와 함께 키를 재면 작음의 형상이 큼의 형상을 배척하게 된다.
위에 따르면 심미아스가 소크라테스보다 크고 파이돈보다 작다면 심미아스에는 큼과 작음이 동시에 존재한다고 할 수 있다. 플라톤은 심미아스의 큼을 심미아스 자신과는 더욱 구별한다. 즉 심미아스의 큼은 심미아스라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큼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큼은 어떤 사람이 가진 속성이 아니라 스스로 존립하고 이리 저리 날아다니는 비행기 같은 것이다.
이렇게 기이한 설명을 하는 이유는 큼, 작음 등이 비교에 의해서 발생하는 지식이라는 것을 플라톤이 싫어하기 때문이다. 즉 두 사람이 키를 비교할 때 어느 한 쪽이 머리 하나 만큼 더 크다고 하자. 플라톤은 이 신장의 차이 즉 머리 하나가 양자의 크고 작음의 원인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즉 양적 차이를 비교에 의해서 발생하는 현상이 아니라 큼과 작음을 실체화, 형상화 하는 경우 이런 주장이 나타난다.
형상은 모든 것의 원인이다. 심미아스의 작음은 심미아스라는 남자에게서 오는 것이 아니라 작음의 형상에서 오는 것이다. 서로 다른 두 가지 형상, 즉 큼과 작음이 심미아스라는 한 남자 속에 공존하게 된다.
심미아스라는 남자는 작음과 큼의 매개체 또는 수용체로 간주되어 진다. 그런데 대(大) 와 소(小)는 서로 반대 개념이다. 따라서 한 사물이 동시에 크거나 작을 수는 없다. 이를 어기면 논리 법칙의 위반이 발생한다. 모순율 위반. 그래서
작중의 소크라테스는 대(大)와 소(小)가 서로 밀치고 도망간다고 한다. 형상들 간에 이동과 도피가 일어난다.
나는 자네가 나의 견해에 동의해 주기를 바라고 이같이 설명하는 것이네. 왜냐하면 나는 이처럼 생각하기 때문에, 즉 큰 것 자체는 큰 동시에 작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우리 속에 있는 크기 자체도 작게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네. 그리고 그 큰 것 중에는 두 가지 일 가운데 하나가 일어날 걸세. 즉 그 반대의 것인 작은 것이 다가올 때에는 그 자리를 양보하거나 또는 그것이 가까이 옴에 따라서 사라져 버리거나 하네.
밀치기의 행동을 통해 대립자들의 형상은 자신의 정체성을 보존한다: 큼은 크게, 작음은 작게 남아있다. 따라서 한 형상이 다른 형상과 충돌하는 경우는 없다. 이는 상당히 인위적이고 부자연스러운 설명이다. 즉 형상의 성립이 비교라는 인간의 행위에 의해서 좌지우지된다. 심미아스가 파이돈에게 접근하면 큼의 형상이 심미아스에게 머물게 되고 작음의 형상은 그에게서 도망간다. 반대로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접근하면 이번에는 반대로 작음의 형상이 큼의 형상을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양적 비교 개념을 실체화할 때 생기는 기이한 일을 필자는 『대소의 역설』이라고 명명한다. 플라톤의 이상주의(Idealism)에 따르면 이데아 혹은 형상들이 개체 안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또 양보한다. 이런 형상들은 실은 사물의 속성이라고 불리면 더 합당하게 설명될 수 있다. 즉 개체를 실체(substance)로 놓고 형상을 속성(attribute)로 놓으면 적절하게 들린다. 이런 이유에서 플라톤의 제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와 속성을 그의 형이상학과 논리학의 근본적인 범주(範疇)로 삼았다.
『대소(大小)의 역설』이 생기는 이유는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플라톤이 수학적, 양적 개념을 실체화, 형상화하기 때문이다. 큼의 존재는 불변이다. 큼 자체, 작음 자체가 있다는 것이 플라톤주의이다. 이런 비교의 개념들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비교를 통해서 발생한다. 위에서 언급한 것처럼 비교의 개념들은 반성(反省) 개념이다. 이들은 사물에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에만 붙어 있는 고유한 정신적 개념들이다. 대(大)와 소(小)의 개념을 ㅡ근대철학적으로ㅡ 오성(悟性) 개념으로 보았더라면 대소의 역설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와 소 등의 비교 개념이 비교되는 사물과는 구별되어 어디엔가 존재한다고 본 것은 플라톤의 위대한 업적이다. 왜냐하면 비교하기 전에 이미 대소의 관념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실재하는 것에는 아무런 변화와 생성이 없다. 형상이 실재 (reality)이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파르메니데스의 존재 교리를 그대로 따른다.
그러나 수학적, 양적 개념들을 실체화, 형상화하는 것은 결국 형상이론의 약화 내지 붕괴를 가져오는 원인이 된다.
7. 이데아설의 부정과 『파르메니데스』 대화
(1) 제 3인간 논변
필자는 지금까지 2400년 동안 플라톤의 작품으로 믿어온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 그리고 "정치가"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쓰여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여기서는 주로 "파르메니데스" 대화를 논할 것이다. 이 대화편은 근본적으로 플라톤의 학설인 이데아설 내지 형상설을 부정하는 것이 그 목적이다. 그런 면에서 이는 플라톤이 썼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면이 많다. 필자의 주장은 이 대화는 플라톤이 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저자는 아리스토텔레스이다.
「파르메니데스」 대화편이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귀속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우선 이 대화편은 플라톤 철학의 핵심 가치인 형상이론 혹은 이데아설을 부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도 아주 냉소적인 방식으로 이루어 진다는 점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만년(晩年)의 플라톤이 과거의 자기 학설을 반성하고 비판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데아설 부정은 플라톤 자신의 부정이라는 점에서 이를 수용하기는 어렵다. 다시 말해서 이데아설 혹은 형상이론의 부정은 플라톤의 위대한 업적들인 국가 철학의 부정, 교육철학의 부정, 소피스트 논박의 부정 그리고 영혼의 불멸설도 부정하게 된다. 따라서 후기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 등은 플라톤이 썼다고 볼 수 없는 정황적인 증거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런 간접적인 증명을 떠나 실질적으로 텍스트 안에서 그 증거를 찾아야 한다.
필자의 주장의 기본적인 이유는 이 두 대화적 작품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오르가논)와 형이상학은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와 관련이 있다. 두 문서 집단의 친밀한 관계는 아리스토텔레스가 '파르메니데스'와 '소피스트'를 저술한 것을 함축하고 있다. 두 문서 집단 간의 생각의 동일성은 사람의 동일성을 확실히 해 준다. 두 저서는 모두 플라톤주의와 파르메니데스주의 양자를 모두 비판한다. 전자는 플라톤주의 비판에 중점이 있고 후자는 파르메니데스주의 비판에 중점이 있다.
플라톤주의 역시 그 핵심 근거가 파르메니데스의 「부동(不動)의 존재」에 있었다. 즉 참다운 존재는 불변이다. 이데아가 이 참다운 존재에 해당한다. 이데아설의 부정은 위에서 본 것처럼 형상이론이 보편화될 때 빠지게 되는 난점 때문에 발생한다. 그 중의 중요한 것이 바로 『대소(大小)의 역설』이었다. 『파이돈』 편에 처음 나타난 대소의 역설은 『파르메니데스』 편에서는 모순적, 자기 파괴적으로 (self-defeating) 전개가 되어 플라톤주의를 와해시키는 발판이 된다.
플라톤주의와 더불어 파르메니데스주의도 부정된다 : 아리스토텔레스 입장에서는 근본적으로 “존재(存在)만 있다 무(無)는 없다” 는 파르메니데스주의가 부정되어야 한다 : “무(無)도 있다” 가 성립되어야 한다. 이는 『소피스트』 편에서 이루어진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은 플라톤주의 뿐만 아니라 파르메니데스주의도 부정, 극복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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