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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식의 시험을 당하게 될 가능성은 끝이 없다. 복잡하든지 단순하든지 간에 다양한 인간관계의 목록만큼이나 이곳 저곳에서 다양한 일이 벌어진다. 오직 내가 마음을 주는 사람들만이 나를 상처 입힐 수 있다는 말은 맞는 말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에게 더 많은 것을 기대한다. 어쨌든 우리는 그들에게 우리 자신의 많은 부분을 내주었기 때문이다. 기대가 높을수록 실망도 깊다.
이기심이 우리 사회 전반을 지배하고 있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들의 일만 돌보느라 주변 사람들의 상처를 돌아보지않고 무시한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다. 마지막 때에는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딤후 3:2)라고 하신 성경말씀은 매우 정확했다. 우리는 이 말씀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해당되는 것이기를 바라지만 바울은 교회 밖의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교회 안의 사람들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상처 입고 고통 받고 비통에 빠진다. 그들은 실족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사탄의 덫에 빠졌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다.
이것이 그들의 잘못일까? 예수님은 사람이 이 세상에 살면서 전혀 실족하지 않고 살 수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도들이 이런 일을 겪게 되면 충격을 받고 당황하고 놀라게 된다. 우리는 오로지 자신만이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고 생각한다. 이런 태도는 우리를 아주 상처 입기 쉬운 상태로 만들고 상한 마음의 깊은 뿌리에까지 이르게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런 시험에 대비하기 위해 무장해야 한다. 왜냐하면 어떻게 대처하느냐에 따라 자신의 미래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실족시킨 상태로 계속 머물게 하려면 함정이라는 것을 눈치 채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자존심때는 자만심으로 자신을 위장하게 한다. 자존심은 자신의 실제 상태를 인정하지 못하게 한다.
한때 나는 몇 명의 목회자들에게 심각한 마음의 상처를 입은 적이 있었다. 사람들이 내게 와서 "저는 그분들이 목사님께 그런 일을 했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가 않아요. 혹 상심하지는 않으셨어요? 라고 물었다. 그러면 나는 즉시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상처 받을 게 뭐가 있겠어요?"라고 대답하곤 했다. 나는 실족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를 부인했고 그것을 억누르려고 했다. 나는 실족하지 않았다고 스스로를 납득시키려고 했지만 실제적으로는 실족했다. 그저 자존심이 내 진정한 마음 상태를 파악하지 못하도록 위선적인 가면을 씌웠을 뿐이었다.
자존심은 진실을 마주할 수 없게 만든다. 그리고 당신의 시각을 왜곡시킨다. 모든 것이 다 잘 되고 있다고 생각할 때는 아무것도 변화시킬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자존심이 당신의 마음을 무감각하게 만들고 통찰력을 흐리게 한다. 또 올무에서 벗어날까 봐, 마음을 돌이켜서 회개하지 못하도록 방해한다.
자존심은 당신 자신을 희생양으로 여기도록 만든다. '나는 부당한 취급을 당했어. 나를 완전히 잘못 판단했어. 그러니까 내가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당연한 거야'라고 생각하게 된다. 자신은 결백하고, 부당한 책망을 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용서하려는 마음도 들지 않는다. 하지만 당신 스스로는 자신의 실질적인 마음 상태를 모르고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서는 아무것도 감출 수 없다. 단지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는 이유로 실족이라는 덫에 걸려들면 안 된다.
*주님은 이어서 말씀하셨다. "내가 가장 곤고했던 때에 나와 가장 가까웠던 내 친구들이 나를 버렸다. 유다가 나를 배신했고 베드로가 나를 부인했으며 남은 내 제자들도 각기 제 살길을 찾아 도망쳤다. 오직 요한만이 멀리 떨어져서 나를 따라왔다. 나는 3년간 그들을 보살피고 먹이고 가르쳤다. 그러나 내가 이 세상의 죄를 위하여 죽을 때 나는 그들을 용서했다. 나는 나를 버렸던 내 친구들로부터 나를 십자가에 못 박았던 로마 군병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용서했다. 그들이 내게 용서를 구한 것도 아니었지만 나는 조건 없이 용서했다. 나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가 사랑의 씨앗을 뿌렸기에 아버지 나라의 많은 아들과 딸들에게서 사랑을 거두리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나의 희생 때문에 그들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들에게 기대를 갖고 있다면 그들은 나를 허탈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들이 내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그만큼 실망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내가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다면 어떤 보답을 받게 되더라도 축복으로 받을 수 있을 것이며 빚질 것도 손해 볼 것도 없다.
우리가 관계를 맺고 있는 누군가에게 어떤 것을 기대하거나 요구하게 되면 그때부터 실족할 수 있는 조건이 갖춰지게 된다. 더 많이 기대하면 기대할수록 실족할 가능성은 커진다.
*우리는 상처를 입게 되면 우리 마음을 보호하고 앞으로 더는 어떤 상처도 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벽을 쌓게 된다. 자꾸 낯을 가리게 되고 상처를 입힐 것 같은 두려운 상대는 입구에서부터 모두 거절한다. 또 빚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걸러 낸다. 우리는 그들이 그 빚을 모두 갚을 때 까지 접근하지 못하게 한다. 오직 우리 편에 있다고 믿어지는 사람들에게만 우리의 삶을 열어 보인다.
하지만 '우리 편' 이라고 믿었던 사람들 역시 우리를 자주 실족하게 한다. 그러면 우리는 그 상황을 고쳐 보려고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하는 벽 위에 벽돌 하나를 더 쌓아 올린다. 그러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이 보호 장벽은 죄수를 가두는 감옥이 돼 버린다. 그때부터는 누가 들어오려고 하든지 조심스러워하게 될 뿐 아니라 두려워서 감히 요새 밖을 내다볼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다.
실족한 그리스도인들은 보통 내향적이고 내성적이 된다. 자신의 권리와 개인적인 인간관계를 아주 조심스럽게 방어하려고 애쓴다. 앞으로는 어떤 상처도 받지 않기 위해 대책을 강구하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하지만 상처 받는 위험을 무릅쓰지 않는다면 조건 없는 사랑을 줄 수가 없다. 조건 없는 사랑은 상처 입힐 권리를 주는 것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사랑은 보답을 구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상처 입은 사람들은 점점 더 자기 중심적이 되고 자기 만족을 추구하게 된다. 그런 분위기를 타고 하나님의 사랑은 점점 차갑게 식어 간다.
*실족한 그리스도인들은 생명력을 받아들이기는 하지만 두려움 때문에 빗장을 열고 방출하지 못한다. 결과적으로 들어온 생명력조차 실족함과 상처라는 감옥과 두꺼운 벽 속에 힘 없이 고이고 만다. 신약 성경에서는 이런 벼들을 견고한 진이라고 묘사하고 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고후 10:4-5.
이 견고한 진은 유입된 모든 정보를 가공하는 사고 패턴을 만들어 낸다. 처음에는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세웠을지라도 그 진들이 하나님에 대해 알고 있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가로막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고통을 불러일으키고 진실을 왜곡시키는 원인이 돼 버린다.
우리가 과거의 상처들, 거부당했던 일, 이런저런 경험들을 통해 모든 것을 걸러내게 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불가능해진다. 즉, 우리는 하나님의 진실성을 믿지 못하게 된다. 살아가면서 경험하는 사람들과의 관계를 통해 기준을 정하게 되고 그에 따라 그분을 판단하기 때문에 그분의 선하심과 성실하심을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다. 그분은 거짓을 모르신다(민 23:19). 그분의 방식은 우리 사람들과 다르고 생각하시는 것도 우리와 다르다(사 55:8-9).
사람들이 실족했을 때 자신의 처지를 옹호하고 지지해 주는 성경
구절을 찾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분별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 없이 하나님 말씀에 대한 지식만 갖는 것은 자만심과 율법적인 태도를 갖게 하여 우리를 교만하게 하기 때문에 아주 파괴적인 힘을 갖는다(고전 8:1-3). 이는 용서하지 못하는 마음을 회개하지 못하게 하고 자신을 정당화하도록 만든다.
이런 상황이 사탄에게 속아 넘어갈 수 있는 분위기를 조성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지식은 그저 기만에 이르게 할 뿐이다.
*사도 바울은 이처럼 시험에 빠진 사람들이 지식에 대한 열정은 가지되 그것을 적용하지 않음으로 변화되지 못하리라는 것을 미리 내다보고 예언했다. 그는 이런 사람들을 "항상 배우나 끝내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는" (딤후3:7) 사람들이라고 평했다.
만약 사도 바울이 오늘날까지 살아 있다면 자신이 예언했던 그대로 진행되고 있는 것을 보고 통탄했을 것이다. 바울은 많은 형제와 자매들이 성경 지식을 쌓을 수 있는 캠프와 세미나 등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좀더 이기적이고 성공적인 삶을 살기 위해 '새로운 계시록'을 찾아다니는 사람들을 목격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많은 목회자들이 ‘의로운 이유’들 때문에 소송을 하려고 법정에 드나드는 광경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출판업계와 라디오 방송에서 실명을 거론하며 하나님의 아들과 딸들을 공격하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는 특별한 성령의 은사를 가진 교인들이 은사로 인한 마음의 상처와 공격을 피하려고 이 교회에서 저 교회로 옮겨다니는 것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모두가 형제 자매를 용서하지 못하면서 입술로는 그리스도를 구주로 고백한다. 사도 바울이 이 세대를 보면 이렇게 부르짖을 것이다. "회개하라, 위선적이고 이기적인 세대여! 기만적인 태도를 벗어던져라!"
이런저런 세미나와 성경 학교에 참석하고 새로운 계시들에 대해 최신 정보를 갖추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 심지어 얼마나 많이 기도하고 공부했는지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만약 당신이 시험에 빠져서 실족하고 남을 용서하지 못하며 죄를 회개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진리에 이른 것이 아니다(딤후3:7). 당신은 사탄의 꾀에 걸려들었고 당신의 위선적인 삶 때문에 다른 사람들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을 뿐이다. 어떤 예언의 말을 하든지 간에 열매는 다른 말을 하고 있다. 당신은 진리가 아니라 기만과 위선이 가득 담긴 쓴 물을 뿜어 내는 샘이 되고 말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 나라에서도 성도들이 다른 성도들을 희생시켜서 자신을 보호하려고 하거나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 배신하는 일이 생기게 된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고통스러운 배신감이 생기게 된다. 누군가를 배신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계명을 저버리는 행위라 할 수 있다. 또 한 번 배신하면 진심에서 우러나는 회개가 뒤따르지 않는한, 다시는 그 관계를 회복할 수 없다.
배신은 곧바로 증오로 이어진다. 그리고 증오는 아주 심각한 결과를 동반한다. 성경에는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요일3:15) 기록하고 있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성도들이 시험에 빠져 실족하고 배신하고 증오하게 되었다. 가정과 교회 안에 이런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이제는 아주 일반적이고 정상적인 행동인 것처럼 여겨질 정도다. 우리는 너무 무뎌져서 목사가 목사를 법정으로 끌고 가는 것을 봐도 슬퍼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부부가 이혼 소송을 제기하는 것도 이제 더는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회의 분열도 이제는 일상적인 일일 뿐 새로울 것도 없다. 목회 활동에 있어서도 정치적인 성향이 전에 없이 최고조에 달해 있다. 그리고 그것이 마치 하나님 나라 또는 교회를 위해 가장 유익한 것처럼 위장한다. …
예수님은 부당한 일을 당하셨을 때 이를 되갚지 않으셨다. 그분은 모든 것을 올바르게 판단하시는 하나님께 자신의 영혼을 맡기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예수님의 본을 따르라고 말씀하셨다.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리스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당하시되 위협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공의로 심판하시는 이에게 부탁하시며” 벧전 2:21-23.
* 그는 이런 생각으로 자신을 위로했을 것이다. '내 손아귀에 잡히기만 하면 죽여 버릴 거야! 내게 이런 일을 저지른 대가로 죽여 버릴 거야! 꼭 대가를 치르게 할 거야.'
만약 요셉이 실제 이런 태도를 보였다면 하나님께서는 그를 그 지하 감옥에서 그대로 썩게 내버려 두셨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가 그런 마음을 품고 감옥에서 나왔을 경우, 이스라엘 열두 지파의 우두머리 열 명을 죽였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 중에는 유다도 있는데 그의 혈통에서 그리스도께서 나실 예정이었다.
그렇다. 요셉을 부당하게 대한 이들은 바로 이스라엘 조상들이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그들이 큰 나라를 이루리라고 약속하셨다. 그들을 통해서 결국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예정이었다. 그러나 요셉이 시험에 지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은 그의 삶 속과 형제들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획을 성취하실 수 있었다. 만약 요셉이 시험을 이기지 못했더라면 하나님의 총체적인 계획이 무너졌을 것이다.
*시편 기자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시 105:16-17).
누가 요셉을 보냈는가? 그의 형제들인가? 아니면 하나님이신가? 증인 두 명의 입을 빌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요셉은 그의 형제들에게 "나를 이리로 보내신 것은 형님들이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성령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자!
이미 언급했다시피 어떤 인간이나 악한 영이라도 당신의 삶을 향한 하나님의 계획을 바꿀 수 없다. 당신이 이 진리를 굳게 붙잡으면 진리가 당신을 자유롭게 할 것이다. 하나님의 의지로부터 당신을 떼어 놓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당신 자신이다.
이스라엘 자손들을 떠올려 보자. 하나님은 이스라엘 자손들을 애굽인의 속박에서 자유롭게 하고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시기 위해 인도자 모세를 보내셨다. 모세는 사막에서 한 해를 보낸 후에 정탐꾼들을 보내어 그 약속의 땅을 돌아보게 했는데 그들 중 대부분은 돌아와서 불평을 늘어놓았다. 그들은 자기들보다 더 크고 강한 군대로 무장한 나라들을 보고 두려워했던 것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을 제외하고 모든 사람들이 그 정탐꾼들의 말에 동조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죽게 하려고 그곳으로 인도하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그 세대의 이스라엘 자손들은 이처럼 시험에 빠져 실족함으로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주리라고 약속하신 땅에 들어가지 못하게 되었다.
*어느 쪽이 유익한가? 당연히 사탄의 함정에 빠지는 것보다 자유로워지는 것이 훨씬 더 유익할 것이다.
우리는 세상 그 어떤 것이라도 실제로 일이 벌어질 때까지 주님이 모르게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사탄이 만약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요리할 수 있었다면 우리는 진작 모두 제거 당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들은 열정적인 사람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언제나 이 권고의 말씀을 기억하자.
“사람이 감당할 시험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고전 10:13.
여기서 말하는 '피할 길'은 막연한 의미가 아니다. 분명한 방법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마주치게 될 모든 불리한 상황을 이미 앞서 꿰뚫어 보시고 그 시험을 피할 수 있는 미리 계획된 정확한 길을 알고 계신다. 그리고 더욱 놀라운 것은 하나님의 계획이 실패한 것처럼 보이는 일도 만약 우리가 계속 순종하고 실족하지만 않는다면 결국에는 계획을 완성시키는 방편이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마음에 새기자 "그런즉 너희는 하나님께 복종할지어다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 (약 4:7). 우리는 실족하지 않음으로써 마귀를 대적할 수 있다. 꿈과 비전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하고 다르게 나타날 수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약속은 없어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뜻을 실패로 돌아가게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우리의 불순종 뿐이다.
요셉이 그의 형제들 때문에 겪은 것과 같은 고통을 경험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 않다. 원수들이 그런 짓을 했더라면 그만큼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짓을 자행한 자들은 그와 피를 나눈 형제들이었다. 그들은 그를 격려하고 지지하고 보호하고 돌봐 주어야 할 사람들이 아닌가! 요셉의 경우보다 더 나쁜 시나리오가 존재할 수 있을까?
그러나 요셉이 그러한 관계에서 비롯된 극심한 상처를 어떤 태도로 반응하고 극복했는지를 보라. 결국 하나님은 겸손과 인내로 고난을 대한 요셉을 영광스럽게 하시고 축복하셨다. 신실하신 하나님을 신뢰하며 당신의 상처를 극복하자. 시련을 허락하신 하나님이 당신에게 큰 복을 주시려고 기다리고 계신다.
*다윗은 사울이 죄 없는 사람을 죽이고 자기도 죽이려고 했지만 그를 죽이지 않았다. 다윗은 복수가 자신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의 손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물론, 바로 그 시점에서 사울을 없애는 것이 더 쉬웠을지도 모른다. 다윗을 위해서나 이스라엘 사람들을 위해서도 그렇게 하는 것이 더 편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는 온 나라가 목자 없는 양 떼처럼 될 것을 우려했다. 사실,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위험을 감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이었겠지만 그가 사랑했던 백성들을 미친 왕으로부터 구원하지 않는 것은 더 힘든 일이었을 것이다. 다시 말해, 백성을 사울 왕으로부터 벗어나게하는 것이 오히려 백성을 위하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힘들게 했다. 자신을 죽이려는 생각을 유일한 위안거리로 삼고 있는 왕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결정을 내렸다.
다윗은 처음 사울을 용서해 주었을 때 이미 자기 마음의 결백을 증명했다. 하지만 사울을 죽일 수 있는 두 번째 기회가 왔는데도 다윗은 그를 해치지 않았다. 어쨌거나 사울은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왕이기에 하나님의 손에 심판을 맡긴 것이다.
오늘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다윗과 같은 상처를 입을까? 우리는 물리적인 칼로만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다른 종류의 아주 큰 칼, 즉 혀를 통해서 서로를 파괴한다. "죽고 사는 것이 혀의 힘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혀의 열매를 먹으리라”(잠 18:21).
교회들은 분열되고 가족은 해체되고 부부는 갈라선다. 친구와 가족, 지도자들 때문에 시험에 빠져서 서로를 향해 고통과 분노로 날카로워진 말들을 던진다. 비록 정보는 확실할지 모르나 동기는 불순하다.
잠언 6장 16~19절에서는 여호와께서는 거짓을 말하는 망령된 증인과 형제 사이를 이간하는 것을 미워하신다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인간관계나 다른 사람의 명성을 이간하거나 해칠 의도로 말을 옮기게 된다면 비록 그 말이 사실일지라도 하나님을 모욕하는 일이 된다.
*다윗이 하나님께 심판을 맡긴 것은 참으로 현명한 행동이었다. 이렇게 질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 사울을 심판하기 위해 하나님은 누구를 사용하셨습니까? 하나님의 종인가요? 답은 블레셋 사람들이다. 사울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전장에서 죽었다. 그 소식이 다윗에게 전해졌을 때 그는 환호하지 않았다. 다윗은 통곡했다.
한 남자가 다윗에게 와서 자신이 사울을 죽였다고 자랑했다. 그는 이 일로 다윗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거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결과는 그의 예상을 뒤엎었다. 다윗은 “네가 어찌하여 손을 들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 죽이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였느냐?"라고 말하며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삼하 1:14-15),
다윗은 사울과 그 아들들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가를 지어서 그 노래를 유다 사람들에게 가르치도록 했다. 그리고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의 죽음을 기뻐하지 않도록 블레셋 도시의 거리에서 그들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말라고 명했다. 그는 조가에서 사울이 죽은 곳에는 비도 내리지 않고 곡식도 거두지 못할 것이라고 선포하며 애도를 표했다. 그리고 온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사울을 위하여 애도할 것을 요구했다. 이것은 실족당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 실족당한 사람이라면 "마땅한 죄값을 받은 것이다"라고 말했을 것이다.
더 나아가 다윗은 사울의 남은 가족을 죽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에게 친절을 베풀었다. 그는 그들에게 땅과 음식을 주었고 후손 중 한사람인 므비보셋에게는 그의 식탁에서 먹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다. 이것이 실족당한 사람의 행동인가?
다윗은 비록 자신의 지도자요, 아버지로 섬기고 싶었던 사람에게 버림 받았지만 그가 죽은 후에도 여전히 그 충심을 버리지 않았다. 당신을 사랑하는 지도자, 혹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하지만 당신을 파멸시키려는 사람이라면 어떤가? 당신도 다윗처럼 심한 상처를 받을 수 있다. 그럴 때 분노나 복수의 마음을 품게 하는 사탄의 덫을 조심하라. 그 모든 상황을 다 아시는 하나님 앞에 당신의 마음을 내어드리고 죄를 짓지 말기를 바란다.
*현실을 똑바로 보자, 세상에서 완벽한 목사는 오직 예수님 한 분뿐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여러 가지 문제를 정면으로 맞서서 돌파해 보려고 하지 않고 달아나 버리려고 할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으레 실족하여 떠나게 된다. 그리고 곧 흠 없고 완벽한 목회 리더십을 갖고 있는 교회를 찾기 위해 헤매고 다닌다. …
많은 사람들이 교회를 마치 간이식당처럼 생각한다. 자신에게 좋은 것을 고르고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문제만 없다면 마음껏 머물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 당신이 갈 교회를 선택하는 사람은 당신이 아니다. 하나님이시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각자가 원하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 그 원하시는 대로 지체를 각각 몸에 두셨으니" (고전 12:18)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점을 잘 기억해 두자. 당신이 만약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곳에 있다면 사탄은 당신을 내쫓기 위해서 공격할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이 심어둔 곳으로부터 사람들을 뽑아내려고 안간힘을 쓴다. 만약 사탄이 당신을 뽑아낸다면 사탄이 이긴 것이다. 하지만 당신이 그런 갈등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다면 사탄의 계획을 무산시키는 것이다.
*가인은 하나님의 조언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인정을 받으려고 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분이 정하신 은혜의 기준(아벨의 희생물)에 따라 행하는 사람의 헌물만 받으신다는 것을 보여 주셨다. 그리고 '선과 악에 대한 지식' 의 범위(가인의 종교적 행위) 내에서 시도된 헌물은 거절하셨다. 하나님은 가인에게 그가 선을 행하면 인정 받을 수는 있으나 생명의 희생 없이는 죄가 여전히 그를 지배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가르치셨던 것이다.
하지만 가인은 그런 하나님께 화가 났고 실족했다. 죄를 회개하고 옳은 방식을 택하여 그 상황을 자신의 인격 단련의 기회로 삼지 못하고 그의 분노를 아벨에게 터뜨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대적했다. 그래서 그는 아벨을 죽이고 말았다. 그러자 하나님은 가인에게 말씀하셨다.
“땅이 그 입을 벌려 네 손에서부터 네 아우의 피를 받았은즉 네가 땅에서 저주를 받으리니 네가 밭을 갈아도 땅이 다시는 그 효력을 네게 주지 아니할 것이요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 창 4:11-12.
가인이 가장 두려워했던 것은 하나님께 거부당하는 것이었지만 그는 심판을 자초했다. 그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기 위해 활용했던 매개체(땅)가 이제는 자기 때문에 저주를 받게 되었다. 피 흘림(살인 행위)이 저주를 불렀다. 땅은 이제 더는 그에게 그 효력을 주지 않을 것이며 열매는 크게 고생해야만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실족한 그리스도인들은 열매를 맺을 수 있는 능력을 잘라내 버린다. 예수께서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 사람의 마음을 땅에 비유하셨다. 가인의 벌판이 불모지가 된 것처럼 실족한 사람들의 마음은 비통함 때문에 황폐해지고 타락하게 된다. 실족한 사람들도 기적을 경험하고 언변이 뛰어나고 능력 있는 설교를 하고 사람을 치유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은 성령이 주신 선물이지 열매가 아니다. 우리는 선물이 아니라 그 열매로 심판받게 될 것이다. 선물은 주어지는 것이지만 열매는 경작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인이 그 범죄의 대가로 도망치는 자, 방랑하는 자가 될 것이라고 말씀하신 대목에 주목하자. 오늘날 교회에도 영적인 탈주자, 방랑자가 수없이 많이 있다. 그들이 가진 찬양하는 재능, 가르치는 재능, 예언하는 재능을 섬기던 교회에서 인정 받지 못하면 가차없이 떠난다. 그들은 목적 없이 배회하면서 상처를 갖고 다닌다. 자신들의 재능을 인정해 주고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는 완벽한 교회를 찾아 헤맨다.
*죄와 인연을 끊은 사람은 하나님께 온전히 순종하는 그분의 자녀다. 그는 성숙한 그리스도인이다. 그는 자신의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방법을 선택한다. 예수께서 고난당하신 일로 인하여 순종을 배우신 것처럼 우리도 우리가 겪게 되는 어려운 일들을 통해서 순종을 배우게 된다. 우리가 성령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게 되면 고난과 갈등의 시기를 겪으며 더욱 자라고 성숙하게 될 것이다. 성경에 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를 자라게 하는 것이 아니다. 그 비결은 바로 순종이다.
교회 안에서 20년간 그리스도인으로 살았고 여러 가지 성경구절을 인용할 수도 있고 수천 번의 설교를 듣고 많은 책을 읽었으면서도 여전히 영적 기저귀를 차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 사람들은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될 때마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방식대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애쓰게 된다. 그러면 항상 배우지만 진리의 지식에 이를 수 없다(딤후 3:7). 그들은 실제로 말씀을 삶에 적용하지 않기 때문에 진리를 깨닫는 단계에 도달하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지면 진리가 우리의 인생을 좌우하게 될 것이다. 그저 마음속으로 그분의 뜻에 동의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하나님의 영에 실질적으로 순종해야 한다. 불순종하면 아무리 그분의 뜻을 배우더라도 성숙할 수 없다.
*우리가 실족이라는 미끼를 물고 분노를 품게 되면 다른 사람들의 죄가 우리 마음속에 그대로 있게 된다. 우리가 분노와 씁쓸한 적의를 가진 채 교회나 인간관계를 떠나게 되면 그와 똑같은 태도를 가슴에 품고서 다음 교회나 다른 인간관계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때는 문제가 생기면 관계를 벗어던지기도 쉬워진다. 그리고 이제는 이전에 생긴 상처를 포함해서 새로운 관계에서 형성된 상처까지 처리해야 한다.
통계에 의하면 이혼한 커플이 다른 사람과 재혼해도 60~65%가 다시 이혼하게 된다고 한다. 그들은 첫 결혼 때와 같은 방식으로 재혼 생활을 하기 때문이다. 이전 배우자를 용서하지 못했던 마음이 다음 결혼의 미래와 가능성을 방해한다. 상대방을 비난하면서 자신이 책임져야할 부분과 인격적 결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아 버린다. 게다가 상처에 대한 공포감은 더 심해진다.
이런 일은 비단 결혼과 이혼 문제에서만 발생하는 것이 아니다.
*그는 이세벨에게서 달아났던 엘리야의 이야기를 예로 들었다(왕상18-19장), 엘리야는 바알과 아세라 상을 섬기는 거짓 선지자들을 처형했다. 그들은 온 나라 사람들을 우상숭배로 이끌었고 이세벨의 식탁에서 먹었던 자들이다. 이세벨이 엘리야가 행한 일을 알고서 스물네 시간 내에 엘리야를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그녀에게 당당히 맞서기를 바라셨지만 엘리야는 도망가 버렸다. 그는 크게 낙심하여 죽기를 구했다. 그는 그의 사명을 감당할 만한 상태가 아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에게 천사를 보내어서 구운 떡과 물을 마시게 해 주고 40일 밤낮을 달려 호렙산까지 도망가도록 허락하셨다.
그가 호렙산에 도착했을 때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신 첫 마디는 “엘리아야, 네가 어찌하여 여기 있느냐?" 였다. 이 질문은 매우 이상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그 긴 여행에 필요한 음식을 주셨고 그가 달아나도록 허락하셨는데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느냐?"라고 물으신다는 것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님은 엘리야가 어려운 상황을 피해서 달아날 마음을 먹었다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그것을 허락하셨다. 하지만 하나님이 질문하신 것을 보면 엘리야가 달아나는 것이 하나님의 본래 계획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너는 네 길을 돌이켜 광야를 통하여 다메섹에 가서 이르거든 하사엘에게 기름을 부어 아랍의 왕이 되게 하고(왕상 19:15). 이후 엘리사와 예후의 다스림 아래서 사악한 여왕 이세벨과 그녀의 사악한 통치는 다 무너져 내리게 되었다. 이 모든 사역은 엘리사에 의해서도 완성되지 못했다. 하나님께서 그의 뒤를 잇도록 기름 부으라고 명하신 그의 계승자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내 친구 목사가 내게 말했다. “만약 우리가 어려운 상황을 피하기로 마음을 결정하면 하나님은 그것이 하나님의 완벽한 뜻이 아닐지라도 그것을 허락하신다네.”
* 나는 설교할 때 종종 사람들에게 내 음성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음성을 기대하고 귀를 기울이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는 때로 메모를 하느라고 바빠서 그저 들리는 대로 모든 것을 기록하는 데만 급급하다. 이렇게 하다보면 성경 구절에 대해서 지적으로 이해하고 해석할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것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이다.
우리가 단지 머리로 이해하는 지식만 갖추고 있으면 두 가지 현상이 발생한다. 첫째, 허황된 속임수나 감정 위주의 사상에 쉽게 물들 수 있다. 둘째, 우리의 지성에 얽매이게 된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분의 교회를 세우시는 확고한 토대가 아니다. 하나님은 계시의 말씀 위에 교회가 세워지리라고 말씀하셨지 암송한 성경 구절 위에 세우겠다고 하시지 않았다.
성령으로 충만한 목회자의 설교를 듣거나 그런 분의 책을 읽을 때 우리는 우리의 영혼을 뒤흔드는 말씀이나 구절을 찾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자신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다. 그것은 어둠 속에서 빛을 비춰 주고 통렬한 영적 깨달음을 준다. 시편 기자가 "주의 말씀을 열면 빛이 비치어 우둔한 사람들을 깨닫게 하나이다" (시 119:130) 라고 노래한 것처럼 빛을 비추고 깨달음을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마음'으로 들어오는 것이지 '지성'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또 그들 사이에 그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눅 22:24
이 광경을 한번 상상해 보자. 예수께서는 장차 자신이 대제사장들에게 넘겨져, 사형 선고를 받고 로마인들에게 조롱받고 채찍에 맞고 결국 죽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일에서 자신을 배신하는 자가 같은 상에 앉아서 함께 먹는 사람이라고 하셨다.
제자들은 이 일에 대하여 서로 묻다가 결국 그들 중에서 누가 가장 큰 자가 될 것인지에 대해 논쟁을 벌이게 된다. 이것은 유산을 놓고 싸우는 자녀들처럼 아주 도리에 어긋난 행동이었다. 아무도 예수님에 대해 걱정하지 않았다. 더 좋은 위치와 권력을 차지하려는 획책뿐이었다. 정말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인 행동이다.
내가 예수님이었다면 그들에게 내 말을 제대로 듣기나 했는지, 신경을 쓰기나 하는지 물었을 것이다. 우리는 이 사건을 통해서 우리 주님이 얼마나 사랑과 인내심을 가지고 주님의 길을 걸어가셨는지 알 수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수님의 처지였다면 "모두 다 나가라! 내가 가장 어려운 때에 너희는 너희 생각만 하는구나!" 하고 말했을 것이다.
제자들 중에서 이 논쟁을 시작한 사람이 누구였을지 대부분 짐작할 것이다. 바로 시몬 베드로다. 그는 제자들 중에서 가장 두드러진 개성의 소유자였으며 가장 먼저 나서서 말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는 걸핏하면 다른 제자들 앞에서 자신이 유일하게 예수님을 쫓아 물 위를 걸었던 일을 상기시켰을 것이다. 또는 자신이 가장 먼저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에 대해 깨달았던 일을 들먹였을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과 함께 산에 갔을 때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주님의 모습이 어떻게 변했었는지에 대해 자랑스럽게 이야기했을 것이다. 그는 열두 제자들 중에서 자신이 가장 뛰어나다고 어지간히 자부하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자부심은 사랑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자만심에서 나온 것이다.
예수께서는 모두를 둘러보시며 말씀하셨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큰 자는 젊은 자와 같고 다스리는 자는 섬기는 자와 같을지니라 앉아서 먹는 자가 크냐 섬기는 자가 크냐 앉아서 먹는 자가 아니냐 그러나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눅 22:25-27).
*베드로는 사명의 집을 건축할 토대는 갖추었으나 하나님 나라에 필요한 재료로 짓는 것이 아니라 강한 의지나 개인적인 자부심 같은 것으로 짓고 있었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자신의 지위가 달라지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그가 한 말들은 '이생의 자랑' (요일 2:16)에서 비롯되었다.
자만심은 그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온전히 갖추게 할 수 있을 만큼 강한 재료가 아니다. 자만심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결국 그를 파괴할 것이다. 자만심은 하나님의 천사장이었던 루시퍼가 가지고 있었던 성격적 결함이다. 자만심은 결국 루시퍼를 타락시켰다(겔 28:11-19).
이제 누가복음 22장 31절에서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자.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자만심이 원수로 하여금 들어와서 베드로를 키질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 놓았다. 키질sift 이라는 단어는 그리스어 'siniazo'로 번역된다. 이 단어의 뜻은 '체로 흔들어서 걸러내는 것' ' (내부 선동으로 사람의 믿음을 뒤엎으려고 하는 행동을 비유함)이다.…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느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눅 22:32.
예수께서는 베드로가 믿음을 완전히 빼앗길 수도 있을 만큼 강한 기질을 부디 피할 수 있도록 해 달라고 기도하시지 않았다. 주님께서는 그 시험 가운데서도 믿음이 떨어지지 않도록 기도하셨다. 예수께서는 이런 시험을 통해서 새로운 성품이 드러나게 된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그것은 베드로가 자신의 사명을 감당하고 그의 형제들을 강하게 하는데 필요한 부분이었다.
원수가 의도하는 바는 탁월한 잠재력을 지닌 그를 파괴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 키질을 통해 다른 목적을 이루고자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은 원수가 베드로 내부의 모든 면을 흔들 수 있도록 허락하셨다. 뒤흔들릴 필요가 있는 것은 모두 흔들 수 있도록 하셨다.…
어떤 생각이나 태도든 간에 이기심이나 자만심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라면 깨끗이 제거될 것이다. 이런 지독한 키질을 당한 결과, 베드로의 모든 자만심은 사라졌고 남아 있는 것은 하나님의 확고한 토대뿐이었다. 그는 자신의 진정한 상태에 대해 눈뜨게 되었을 것이고 죽은 것은 사라지고 익은 열매는 추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진실한 토대로 더욱 가까이 다가가게 되었을 것이다. 그는 더 이상 독자적으로 활동할 수 없었고 주님과 상호의존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
베드로는 용감하게 주님의 말씀에 맞섰다. "주여 내가 주와 함께라면 감옥이든지 죽음이든지 함께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말은 성령의 감동으로 된 말이 아니라 자기과신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는 앞으로 큰 흔들림을 겪게 될 것에 대해 어떤 조짐도 읽지 못했다.
*뱀은 여자에게 속삭이면서 그녀가 하나님을 알고 있는 방식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하나님은 진정으로 너희를 생각하시는 게 아냐, 그분은 좋은 일은 너희에게 금하고 계셔, 그분은 너희가 생각하는 것만큼 너회를 사랑하고 있지 않는 게 틀림없어. 그분은 좋은 하나님이 아닐 거야." 그녀는 이런 말에 속아 넘어갔고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거짓말을 믿었다. 그때 죄를 지으려는 욕망이 솟아올랐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제 더 이상 그녀에게 생명이 아니라 율법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고전 15:56)는 말씀대로였다.
원수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이런 식의 방법을 쓴다. 그는 아버지 하나님의 성품이 자녀들의 눈에 잘못 비취도록 왜곡시킨다. 우리는 모두 아버지, 선생님, 직장 상사, 통치자와 같은 윗사람들을 겪으면서 때로 이기적이고 사랑이 없는 사람들을 보게 된다. 이들은 권위를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에 우리들은 쉽게 그들의 본성을 하나님의 본성에 투영시키게 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근원적인 권위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악한 마귀들은 우리가 세상 아버지들을 바라보는 방식을 이용해서 아주 기술적으로 하나님 아버지의 성품에 대해서도 곡해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이 오시기전에 아버지들의 마음을 자녀들에게로 돌이키리라고 말씀하셨다(말 4:6). 하나님의 성품과 본질은 그분이 세운 리더들을 통해 보여질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마음의 상처를 치유하는 촉매제가 될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파멸시키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믿을 때, 또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에 어떤 일을 하시든지 혹은 하지 않으시든지 그것이 우리에게 최선이기 때문이라고 믿을 때 우리는 그분께 온전히 자신을 맡길 수 있게 된다. 기꺼이 주를 위해 목숨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이 될 것이다.
*예수님께 자신을 온전히 드리고 주님의 돌보심에 맡기게 되면 당신은 이제 당신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실족할 리 없다. 상처 받고 실망하는 사람은 자신을 위해 주님이 해 줄 수 있는 것들을 보고 주님께로 온 사람들이다. 그분 자체를 보고 온 사람들이 아니다.
그런 태도를 갖게 되면 아주 쉽게 실망하게 된다. 자기중심적인 생각은 근시안적인 태도를 낳는다. 믿음의 눈으로 당면한 상황들을 볼 수 없게 된다. 우리의 삶을 온전히 주님께 헌신하면 그분의 성품을 이해하게 되고 그분의 기쁨을 함께 나눌 수 있게 된다.
우리는 현실적인 상황이나 환경으로 판단할 때 쉽게 실족하게 된다. 성령의 눈으로 보지 않기 때문이다. 때때로 하나님은 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느끼는 방식대로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만큼 응답해 주지 않을 때가 있다. 하지만 되돌아보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고 하나님의 지혜로우심을 느낄 수 있다.
때에 따라서 우리 아이들도 내가 가르치는 방식이나 논리를 이해하지 못하기도 한다. 때로는 아이들이 성숙하지 못해서 가르침을 잘 이해하지 못하거나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때도 있다. 하지만 그들이 자라면 이해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내 가르침이 그들의 순종이나 사랑, 성숙한 태도 등을 시험하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우리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이런 상황에서도 믿음이 있다면 이렇게 속삭일 것이다. "이해는 못하지만 하나님을 믿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분의 말씀을 우리가 아주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를 바라신다. 우리는 살면서 관계를 맺게 되는 이런저런 사람들의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으로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예수님이 뭔가를 말씀하실 때는 그 말씀 그대로다. 우리가 불성실하더라도 예수님은 성실하고 신의가 있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사회나 문화 따위를 초월해서 진리와 완전무결함에 도달해 계신 분이시다. 그렇기 때문에 주님이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고 말씀하셨다면 그것은 완전한 진실이다.
게다가 복음서에 이 말씀이 단 한 차례만 나오는 것도 아니다. 예수님은 아주 여러 번 말씀하셨다. 용서에 대한 이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하고 계신 것이다. 예수님이 상황에 따라 어떻게 달리 말씀하셨는지 몇 가지 더 예를 들어 보자.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면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잘못을 용서하지 아니하시리라” 마 6:14-15.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눅6:37.
주기도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갚을 것이 없는지라 주인이 명하여 그 몸과 아내와 자식들과 모든 소유를 다 팔아 갚게 하라 하니 그 종이 엎드려 취하며 이르되 내게 참으소서 다 갚으리이다 하거늘 그 중의 주인이 불쌍히 여겨 놓아 보내며 그 빚을 탕감하여 주었더니”마 18:25-27%
이제는 이 예화를 실족당한 마음에 적용해 보면 어떻게 되는지 살펴보자. 실족을 한 번 당하면 빚이 한 번 생기게 된다. 예화에서 그는 "다 갚겠다"라고 했다. 따라서 용서를 하게 되면 빚을 탕감해 주는 것과 같다.
갚을 수 없는 큰 빚을 진 종을 탕감해 준 왕은 하나님 아버지를 대변한다. 골로새서 2장 13~14절은 "또 범죄와 육체의 무할례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이 그와 함께 살리시고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하시고 우리를 거스르고 불리하게 하는 법조문으로 쓴 증서를 지우시고 제하여 버리사 십자가에 못 박으시고"라고 말한다.
우리는 도저히 갚을 수 없는 빚을 탕감받았다.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빚은 갚을 길이 없다. 하나님께 우리가 범한 죄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구원을 선물로 주셨다. 예수님이 우리의 빚을 대신 감당하셨다. 우리는 이 종과 왕의 관계를 보며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를 떠올릴 수 있다.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동료 한 사람을 만나 붙들어 목을 잡고 이르되 빚을 갚으라 하매” 마 18:28.
*1데나리온은 대략 노동자의 하루 임금에 해당하는 돈이었다. 오늘날로 하면 일백 데나리온은 아마도 4천 달러 정도 할 것이다. 계속 읽어 보자.
“그 동료가 엎드려 간구하여 이르되 나에게 참아 주소서 갚으리이다 하되 허락하지 아니하고 이에 가서 그가 빚을 갚도록 옥에 가두거늘” 마 18:29,30
그의 동료 좋은 그에게 꽤 큰 빚을 졌다. 1년치 임금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금액인 것이다. 당신에게 만약 1년 월급의 3분의 1이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이 남자는 45억 달러를 막 탕감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이는 그가 평생을 벌어도 벌 수 없는 돈이다.
우리가 서로 간에 지게 되는 빛의 크기는 우리가 하나님께 진 빛의 크기에 비하면 4천 달러와 45억 달러의 차이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누군가로부터 아주 부당하고 억울한 대접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을 대적하여 범죄한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어쩌면 당신은 자신보다 더 억울하고 원통한 일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예수님이 어떤 일을 당하셨는지 기억해 보자. 그분은 죽임을 당할 이유가 전혀 없는 분이다. 죄 없고 흠이 없는 분이다.
'남을 용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크게 용서받았는지를 잊어버린 사람이다. 예수님이 당신을 영원한 죽음과 고통에서 건져 주셨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면 조건 없이 다른 사람을 용서해 줄 수 있을 것이다.
*유다서에서는 교회 안에서 두 번 죽은 사람들을 묘사한다. 두번 죽는다는 뜻은 그리스도가 없을 때 한 번 죽은 것이고 그리스도 때문에 다시 생명을 얻었으나 그분의 길에서 영원히 벗어남으로써 다시 죽게 된다는 의미다.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 와서 다음과 같이 변명하며 자신을 정당화하려할 것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 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 7:22-23). 그들은 주님을 알고 있었다. 그들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이적을 일으키기도 했다. 하지만 주님은 그들을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떤 사람들을 안다고 하실까? 사도 바울은 “또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도 알아 주시느니라”(고전 8:3)고 했다. 하나님은 자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아신다.
하지만 당신이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다만 나를 상처 입힌 이 형제는 사랑하지 않습니다"라고 말한다면 당신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것이다. 당신은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는다. 성경은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요일4:20)고 했다. 속이는 것은 아주 끔찍하게 나쁜 일이다. 왜냐하면 속아 넘어간 사람들은 진심으로 자신이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분명히 틀렸는데도 옳은 길에 있다고 믿는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지 않는 사람은 자신의 마음을 속이는 것이다.
*만약 예수님이 우리가 그분께 다가가서 "우리가 잘못했습니다. 주남이 옳았습니다. 용서해 주십시오"라고 말하기를 기다리셨다면 십자가에서 우리를 용서하지 못했을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주님은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고 외치셨다. 예수님은 우리가 먼저 다가가서 모든 잘못을 회개하기도 전에 우리를 용서하셨다. 사도 바울의 권고를 마음에 새기도록 하자.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하고" (골 3:13). 그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2).
*마음을 치유하고 고통에서 벗어나려면 먼저 자신이 상처 받았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때로 자존심 때문에 우리는 상처 받고 실족한 사실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일단 내가 내 상태를 인정하고 나자 나는 주님을 찾을 수 있었고 주님께서 내 마음을 고치실 수 있도록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
“무엇보다도 뜨겁게 서로 사랑할지니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느니라” 벧전 48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쉬운 일이다. 그것은 '허니문 사랑' 결점을 파악하기 전의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람들의 결점을 보게 되면 그때부터 그들을 사랑하는 것은 어려운 문제가 된다. 우리가 그들의 희생양이 되었을 때는 특히 더 그렇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랑은 우리를 더욱 성숙하게 해 주고 우리의 마음을 더욱 강하게 단련시켜 준다.
*우리는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성장하게 된다. 평안할 때는 좀처럼 그런 기회가 오지 않는다. 주님과 함께 순례의 길을 가는 동안 우리는 언제나 어려운 지점을 지나게 된다. 그러나 이때 피해 버리면 안 된다.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주님 안에서 완전한 성도의 모습을 갖추는 데 필요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만약 달아나 버린다면 당신은 성장에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될 것이다.
우리는 어려운 장애물을 극복해 나가는 동안 더 강해지고 더 관대한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님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어려운 일을 헤치고 나왔는데도 이런 감정을 느낄 수 없다면 아마도 당신은 실족한 마음에서 회복되지 못한 것일 수 있다. 회복되고 안 되고는 당신의 선택이다. 상처를 입고서 다시는 회복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것도 그들의 선택이다.
예수님은 고난을 당하시면서 순종에 대해 배우셨다. 베드로도 고통스러운 일을 통해서 순종을 배웠다. 바울도 힘들고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 순종을 배웠다. 당신은 어떤가? 당신도 순종을 배웠는가? 그렇지 않으면 강퍅해지고 냉담하고 차가워지고 증오와 분노에 차 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순종을 배우지 못했다.
깨진 독에 물을 붓는 것처럼 어떤 경우에는 분노를 떨쳐 버리기가 쉽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래도 응어리를 풀고 자유로워지기 위해 애쓰고 노력하면서 뚫고 지나가야 한다. 그런 과정을 겪으며 당신은 성장하고 성숙하게 될 것이다.
*성숙해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게 그리 쉽다면 누구나 다 이룰 수 있는 일일 것이다. 여러 가지 힘든 저항에 부딪히게 되기 때문에 성숙한 삶을 이루는 사람은 많지 않다. 특히 우리 사회의 세태가 경건하지 못하고 이기적이기 때문에 성장을 방해하는 여러 가지 요소에 부딪히게 된다. 이 세상은 '공중의 권세 잡은 자' (엡 2:2)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성숙함에 도달하려면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한다. 우리는 이기적인 풍조가 지배하는 세상을 거스르며 서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그가 개척한 교회들이 있는 세 도시를 각각 다시 찾아 갔다. 제자들의 마음을 더욱 강하고 튼튼하게 북돋워 주기 위해서였다. 바울이 그들을 격려하는 대목을 보면 흥미로운 점을 찾을 수 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하면서 그들을 격려했다.
“복음을 그 성에서 전하여 많은 사람을 제자로 삼고 루스드라와 이고니온과 안디옥으로 돌아가서 제자들의 마음을 굳게 하여 이 믿음에 머물러 있으라 권하고 또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 하고” 행 14:21-22
그는 쉬운 인생을 보장하지 않았다. 그는 이 세상의 기준에 의한 성공을 약속하지 않았다. 그는 그들이 기쁨으로 여정을 마치려 한다면(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 '환난' 이라고 하는 많은 저항에 부딪히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힘과 서로 먹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롬 14:19
이 말씀은 실족당한 사람에게 어떻게 다가가야 할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이다. 우리가 불만을 품고 다가간다면 화평을 도모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면 오히려 상처 입은 사람을 더 어렵게 만들 수도 있다. 우리는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화평을 도모하려는 태도로 다가가야 한다. 이것이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길이다.
나는 어떤 일 때문에 나에게 상처를 입거나 화가 난 사람들이 있으면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맹렬히 비난했다. 나는 이기적이고 인정 없고 교만하고 무례하고 잔인하다는 말을 들었고 더 심한 말을 들은 적도 있었다.
그러면 자연히 나는 이렇게 말하게 된다. "아니에요. 전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들은 나를 잘못 알고 있어요."
하지만 내가 이렇게 나를 옹호하면 할수록 그들의 실족한 마음에 더욱 기름을 붓게 되는 격이다. 이것은 화평을 추구하는 자세가 아니다. 자신을 두둔하고 '나의 권리'를 이야기하면 진정한 화평은 다가오지 않는다.
대신에 나는 그들이 말하고 싶은 것을 다 말할 때까지 내 입을 다물고 그들의 말을 듣는 법을 배웠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내가 그들의 말을 존중하고 있으며 내 태도나 의도에서 혹시 그런 점이 있는지 잘 살필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내가 그들을 상처 입힌 점이 있다면 미안하다고 말했다.
이와 다른 경우로 그들의 말이 맞을 때는 바로 그것을 인정하고 "당신이 맞습니다.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
다시 말하지만 화해를 도모한다는 것은 우리 자신을 낮춘다는 뜻이다.
*“너를 고발하는 자와 함께 길에 있을 때에 급히 사과하라그 고발하는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내어 주고 재판관이 우리에게 내어 주어 옥에 가둘가 염려하라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네가 한 푼이라도 남김이 없이 다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서 나오지 못하리라” 마 5:25-26
자존심은 스스로를 두둔하지만 겸손은 수긍하며 이렇게 말한다. "당신이 맞습니다. 제가 그런 식으로 행동했었군요. 부디 용서해 주시기 바랍니다."
“오직 위로부터 난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견과 거짓이 없나니” 약 3:17.
경건한 지혜는 기꺼이 양보할 줄 아는 것이다. 사적인 의견 충돌에서 목을 뻣뻣이 세우고 완고하게 구는 것이 아니다. 경건한 지혜를 따르는 사람은 진리에 위배되지 않는 한, 다른 사람에게 양보하고 다른 사람의 시각에 맞추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음 것임이요” 마 5:0
주님은 화평을 유지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화평을 유지하는 자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평화 유지에 반하는 대결 구도를 피하려고 한다. 진리에 대하여 타협을 하게 되는 상황이 오더라도 그렇게 한다. 하지만 그가 유지하는 평화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오래 가지 않을 피상적이고 불완전한 평화일 뿐이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사랑으로 다가가서 지속적인 평화를 구축하고자 진리를 가지고 대결한다. 그는 거짓되고 피상적인 관계를 바라지 않는다. 그는 솔직함과 진실과 사랑을 원한다. 그는 정치적인 미소로 상처를 감추려 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실패를 모르는 용감한 사랑으로 평화를 구축한다.
하나님과 우리 인류의 관계가 바로 이런 것이다. 하나님은 어느 누구도 멸망하는 것을 바라지 않으신다. 하지만 우리와의 관계 유지를 위해서 진리에 대하여 타협하지는 않으신다. 하나님은 피상적인 언어가 아닌 진실한 언약이 바탕이 된 화해를 원하신다. 이를 통해 이루어진 화해 관계는 사랑의 띠를 더욱 견고히 매게 되고 어떤 악한 것들이라도 그 띠를 끊을 수 없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그분 자신의 생명을 버리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