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림 3주(다) 기뻐하라 12,12,16 루가 3, 10-18
김형수 비오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주님,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주님, 믿음의 문을 열어주십시오.』
대림 첫 주 전례는 깨어 기도하라고 했습니다. 둘째 주 전례는 회개하라고 했습니다. 셋째 주 전례는 기뻐하라고 합니다. 왜 내가 기뻐할 수 있습니까?
오늘 제일독서로 봉독된 스바니야 예언서(3,14-18)는 환성을 울리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하면서 이유를 들었습니다.『주님께서 너에게 내리신 판결을 거두셨다. 너의 원수들을 쫓아내셨다. 하느님은 승리의 용사이신데 네 한가운데에 계신다. 그 하느님께서 너를 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며 사랑으로 너를 새롭게 해 주신다.』어느 영어판 성경은 17절을 아주 쉽게 번역했습니다.
『The Lord your God is with you, 주 너의 하느님이 너와 함께 계시는 분이시다.
he is mighty to save. 그분은 구원하실 때 능력이 있는 분이시다.
He will take great delight in you, 그분은 너로 인해 즐거워하시는 분이시다.
he will quiet you with his love, 그분은 사랑으로 너를 재우시는 분이시다.
he will rejoice over you with singing.』 그분은 너를 노래하며 즐기시는 분이시다.
화답송으로 봉송하는 이사야서(12,1-2, 5-6)는 노래합니다. 『주님은 나의 힘이다. 주님은 나의 굳셈이시다. 주님이 나를 구원해 주셨기에 기뻐한다. 그러니 구원의 샘에서 물을 길으라.』 2독서로 봉독된 필립비에서 바오로는 교우들이 기뻐해야하는 이유를 밝혔습니다.『주님께서 가까이 오셨으니,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어라. 그러면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이다.』 바오로가 기뻐하란 편지를 보낸 곳은 감옥이었습니다. 그는 감옥에서 온갖 고난을 겪으셨습니다. 불편한 것도 많았습니다. 억울한 것도 많았었습니다. 힘도 많이 들었습니다. 괴로웠습니다. 몸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가시라고까지 표현한 질병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바오로는 기뻐하라고 하셨습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은 박해를 받으면서도 기뻐했답니다(사도행전5,14 참조). 『사도들은 예수님 이름 때문에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했답니다.』 그분들의 기쁨의 원천은 주님이셨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어서 기뻤습니다.
오늘 복음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군중이 세례자 요한에게 질문했습니다.『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요한의 대답은 단순했습니다.『두벌 옷을 가진 사람은 나누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하고, 속이거나 협박하지 마시오.』 아주 기본적인 이야기입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자선(慈善) 역시 그렇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기본적인 일입니다. 너무 어렵게 자선을 생각하고 있었다면 반성해야 합니다. 요즈음 TV에서 구세군 냄비에 1억 원짜리 수표를 넣은 다음 유유히 사라진 사람의 이야기가 한창입니다. 그분이 쪽지를 남겼답니다. 『부모님은 이웃에게 정도 많이 주고 사랑도 주고 많은 것을 나눠주셨습니다. 그러나 평생 호강 한번 못하시고 쓸쓸히 생을 마감하고 고인이 되셨습니다. 부모님의 유지를 받들어 작은 씨앗 하나를 구세군의 거룩하고 숭고한 숲속에 띄워 보냅니다.』
오늘 전례에서 내가 기뻐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교회가 권하는 대로 내가 자선을 베풀 수 있기 때문에 기뻐합니다. 왜 내가 자선을 베풀어야합니까? 『주님이 오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오심이 바로 자선이기 때문입니다.』 자선이란 무엇입니까? 나누는 생활입니다. 남모르게 나눌 때 자선이라고 합니다. 주님의 표현처럼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할 때 자선이라고 합니다. 동네방네 떠벌리며 나눴다면 그것은 자랑이지 자선은 아닙니다. 가난한 사람들 속에서 가난하게 살다가 세상을 떠난 마더 데레사의 일화가 기억납니다. 어느 기자가 물었답니다.『어떻게 기도합니까?』 마더 데레사가 대답했답니다. 『그저 듣습니다.』 기자가 다시 물었답니다. 『그럼 하느님은 무엇을 하십니까?』 마더 데레사가 대답했답니다. 『그 분도 들으십니다.』 세상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가운데 계셨던 마더 데레사의 기도가 듣는 것이라는 점이 경이롭습니다. 보통으로 사람들은 청하고 또 청할 뿐입니다. 심지어는 하느님이 만든 세상이니, 하느님이 책임지라고 억지를 부리기 일쑤입니다. 그런 마음에는 자선이 떠오르지 않습니다.
우리 사회에 한동안 인터넷에 떠도는 아름다운 이야기가 있습니다.
다섯 살짜리 여동생이 일곱 살짜리 오빠에게 헌혈한 이야깁니다. 헌혈하면 죽는 줄 알고 오빠를 살리기 위해서 헌혈을 했다는 이야깁니다. 그런데 저는 선천성 재생불능성 혈액 암에 걸린 초등학교 6학년생에게 일어난 일들을 알고 있습니다. 방림동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대모님이 주동이 되어서 어린 소녀를 살리는 운동을 벌였습니다. 1억 원이 있어야 수술이 가능하다는 서울 성모병원의 말씀 따라 전국적으로 모금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수술은 전남대 병원에서 황박사가 맡았습니다. 동생의 골수를 빼내어서 환자인 언니에게 이식하는 수술이었습니다. 외할머니가 극구 반대하면서 딸에게 말했습니다. 『골수를 빼면 죽는다. 딸 하나만 잃지 둘 다 잃으면 어쩌려고 그러냐?』 아무리 의사가 말해도 믿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수술이 진행되었습니다. 언니는 살아났습니다. 동생도 아무렇지 않았습니다. 수술이 끝나고 몇 년이 지난 다음 중학생이 된 두 자매가 나를 찾아왔습니다. 제가 동생에게 물었습니다. 『주위에서 골수를 빼면 죽는다고 그렇게 난리를 쳤었는데, 그때 너 무섭지 않았니?』 동생이 대답했습니다. 『수술을 하면 언니가 산다고 신부님이 말씀하셨잖아요. 다른 말은 기억이 없어요.』 참사람은 그런 것인가요? 참된 자선은 그런 것인가요?
나눔의 대상은 물질만이 아닙니다.
많이 있다고 나눌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두벌 옷이란 말을 생각해봅니다. 무엇이겠습니까? 글자 그대로 추위를 막는 옷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음의 추위는 옷으로 막아지지 않습니다. 지금 세상에선 더욱 그렇습니다. 우리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사건들이 너무 많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누가 우리를 보호하여 주겠습니까? 바로 하느님이십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신뢰와 희망을 잃지 않고 살아갑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나누어야 할 것이 바로 신뢰와 희망이고 사랑입니다. 또한 신뢰와 희망으로 사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두벌 옷의 정체입니다. 이 모습을 나눌 때 진정한 의미의 자선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선을 베풀 때의 자세에 대한 불교의 가르침이 의미를 지닙니다.
부처님 어록에 『죽을 때 무엇을 가지고 가는가?』라는 말씀이 있답니다. 부처님이 말씀하셨답니다.『마치 그림자가 항상 따라다니듯이 공덕(公德)과 악행(惡行)이 생사를 넘어서 따라다니는데, 공덕(功德)은 저 세상에서 든든한 후원자(後援者)입니다.』 후대 사람들이 토를 달았습니다. 『우리가 죽어서 가지고 가는 것은 자신이 생전에 지은 업(業)뿐입니다. 악행과 공덕의 업만을 짊어지고 갈 뿐입니다. 공덕을 지으면 사후에도 든든한 후원자를 가지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보시에 대해서 유난히도 강조하셨습니다. 결국 나눔의 가르침이 없다면 불교는 결코 종교가 될 수 없을 것입니다. 추우면 추울수록 없는 사람은 더욱 힘겨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주교회의 사회복지위원회 위원장 김운회 주교님은 담화문을 발표하셨습니다.
『국가가 보편적 복지(福祉)를 실천하더라도 가난한 이웃을 위한 교회의 역할은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지금 우리사회는 경제 성장을 통해 엄청난 부를 누리게 됐지만 양극화는 더 확대되고, 미국과 유럽의 경제악화로 우리나라의 경제 현실은 더욱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가장 고통 받는 이들은 바로 가난한 이웃입니다. 아직도 우리 주변에는 끼니를 걱정하고 한 몸 누울 곳을 걱정하며 눈물과 한숨으로 살아가는 이웃들이 많습니다.
정치권은 물론 각계각층에서 보편적 복지를 중심으로 복지 논쟁이 한창입니다. 이제 복지는 더 이상 정책(政策)을 책임진 이들이 선의로 베푸는 시혜(施惠)가 아니라, 모든 이가 마땅히 누려야 할 권리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가톨릭교회는 그리스도의 모범과 가르침을 따라 사회의 약자들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왔습니다. 자선은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입니다. 자선은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참사랑 안에서 행하는 자선은 자신의 삶과 신앙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합니다. 자선은 세상을 맑고 향기롭게 합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자선의 특성을 살펴봅니다.
자선은 속죄의 길입니다(토빗12,9; 루카3,7-11). 자선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는 길입니다(신명15,7-11; 잠언22,9; 루카14,12-14). 자선은 영원한 생명으로 가는 길입니다(마태19,16-21; 25,34-40; 로마2,7; 갈라6,7-10). 자선은 바로 자기 자신을 위한 행위입니다. 집회서는 사람의 자선이 하느님께는 인장(印章)과도 같다고 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선행(善行)을 눈동자처럼 보존해 주시고, 인간의 자녀들을 회개하도록 하십니다(집회17,22 참조).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지금 여기서’ 적극적으로 자선(慈善)을 실천해야 합니다. 값싼 동정이 아니라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으로 참다운 자선을 실천해야 합니다. 가난한 이들의 자유(自由)와 품위(品位)를 존중하면서 겸손하게 실천해야 합니다(마태6,3-4 참조).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