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성일 : 2010. 10. 24. 19:07
■ 민광민 묘갈명(閔光旻墓碣銘)
[생졸년] 1622년(광해군 14)~1701년(숙종 27) / 수 79세
회덕현(懷德縣) 북쪽 삼정동(三政洞)은 여흥(餘興) 민씨(閔氏)가 대대로 조상들의 산소를 모신 곳이고 그곳의 유좌(酉坐)의 언덕은 현감(縣監) 민광민(閔光旻)의 산소이다. 6대조 이조정랑(吏曹正郞) 민수(閔粹)의 산소는 그 위에 있다. 할아버지는 부사(府使) 증판서(贈判書) 민여검(閔汝儉)이고 아버지는 증정랑(贈正郞) 민평(閔枰)으로 산소는 동쪽에 있다.
나의 문정(文正) 선조인 우암(尤庵) 선조께서 2대의 묘갈문(墓碣文)을 지었는데 판서공(判書公)의 묘갈 문에는 “판서공의 손자와 증손들이 모두 효도와 의리가 있고 질박하고 정직하다”라는 말이 있고 정랑공(正郞公)의 묘갈문에는 “정랑공이 죽은 후, 그의 아들 민광신과 민광민이 화목과 우애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 내가 기꺼이 벗을 삼았다”라는 말이 있다. 슬프다! 이것은 백세동안 증거가 될 만하다.
공(公)의 자(字)는 소욱(少旭)이다. 민씨는 동방의 큰 성으로 대대로 알려진 인물과 현달(顯達)한 벼슬이 있었다. 5대조 민구손(閔龜孫)은 전적(典籍)으로 증찬성(贈贊成)이고 고조 민제인(閔濟仁)은 좌찬성(左贊成)으로 호가 입암(立巖)이었다. 그의 덕(德)과 사실은 문정공(文正公) 우암(尤庵) 선생께서 지으신 신도비문(神道碑文)에 자세히 나타나 있다.
증조 민사용(閔思容)은 벼슬이 군수로 증참찬(證參贊)이고 외할아버지는 선비인 진주(晉州) 소백복(蘇百福)이다. 공은 천계(天啓) 임술년(壬戌年)에 태어나 64세에 대신(大臣)의 추천으로 감역(監役)에 올랐고 그 이듬해 명성황후(明成皇后)의 신주(神主)를 태묘(太廟)에 모실 때 감조관(監造官)을 한 공으로 전례(前例)에 의거해 사재감(司宰監)의 주부(主簿)로 승진되었고 그 해 겨울 양구현감(楊口縣監)으로 나갔다가 1년이 되지 못해 병으로 물러났다. 80세에 경운리(景雲里)에서 돌아가셨다.
공은 어려서부터 깊은 사랑으로 부모를 섬겨 부모의 곁을 떠나지 않았고 부모에게 대답할 때에는 항상 조심하였다. 정랑공(正郞公)의 손과 발이 불편하여 일어나고 않을 때 사람의 도움을 받을 정도였는데, 공이 항상 성심으로 부축하고 받들어 남을 시키지 않아 부모가 ‘우리 집의 효성스런 아들’이라 칭찬하였다.
아버지•어머니 상(喪)에 몹시 슬퍼하였고 제사에 정성을 다하여 평생동안 부모를 사랑했으며 큰형을 엄한 아버지처럼 섬겨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반드시 상의하여 행했고 40년 동안 형과 같이 지냈다. 어느 날 오륜(五倫)을 조목별로 노래를 만들었는데,「사친장(事親章)」에는 “달고 맛있는 음식만 어찌 효(孝)가 되겠는가?
부모의 귀와 눈을 즐겁게 하리라. 온정(溫情)만이 어찌 효(孝)가 되겠는가? 부모의 마음과 뜻을 즐겁게 해드리리라”라고 하였고 “태산이 높은 것이 아니고 부모의 은혜가 높고 바다가 깊은 것이 아니고 부모의 은혜가 깊으니 한 번 걷고 한 번 말을 할 때 부모를 잊지 말라”라고 하였다.
임금에게 충성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아내에게 모범이 되고 벗을 대할 때 말을 각각 의롭게 했으니 진실로 독실하게 행동하는 군자라고 말할 만하다. 일찍이 스스로 기상옹(冀常翁)이라 호(號)를 하였다. 이 뜻은 오랫동안 쉬지 않고 꾸준히 학문한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작은 서첨 한 개를 만들어 ‘성(誠)•경(敬)•독(篤)•실(實)’ 네 자와 ‘비례물시(非禮勿視)•청(聽)•언(言)•동(動)’등 7자를 써서 스스로 경계를 삼았다. 매일 일찍 일어났고 아무리 한가한 날이라도 웃옷을 벗지 않고 글을 보고 자식들을 가르치는 일 이외에는 하지 않았고 게으른 모습을 하지 않았고 여러 놀이 기구를 옆에 높지 않았다.
말하기를 “글을 읽다가 몸이 피곤하면 책을 덮고 고요히 앉아 예 성현의 기상을 생각하면 나의 가슴이 시원해지는 듯 하다. 하였으니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것이 없다면 이것을 알 수 있겠는가?” 집이 원래 가난하였지만 마음은 넉넉하였다. 먹은 음식으로 마음을 더럽히지 않았다.
또 공은 일찍부터 돈을 버는 일에는 생각을 하지 않았고 곤궁했지만 의리를 잃지 않는 사람이라 말할 수 있었다. 자제들을 법도로 가르쳤고 자제들은 밖에서 돌아오면 공은 반드시 갓을 바르게 쓰고 단정하게 하였다. 아무리 어린아이라도 방탕한 행위를 하면 공이 엄하게 꾸짖었다.
자제들은 감히 평상시의 옷을 입고 공을 볼 수 없었다. 또 쓸데없는 말과 장난스런 얼굴빛을 못하도록 하여 가정의 바르고 엄숙함은 잘 다스려진 조정과 다른 점이 없었다. 사람과 물건을 대하는 데에도 항상 인(仁)과 서(恕)를 주장하여 비록 노비들의 잘못이 있지만 온화한 말로 경계를 하고 경솔하게 매질하지 않았다.
공이 말하기를 “집안의 어른이 되어 집안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노비들의 잘못으로 성난 목소리와 얼굴빛을 한다면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라고 하였다. 벼슬할 때에도 말하기를 “벼슬을 하는 사람이 일은 살피지 않고 아랫 관리들에게 죄만 준다면 이것은 눈을 보지 못하는 봉사에게 몽둥이만 주는 것과 같다”라고 하였다.
어느 날 행랑채에 살던 노비가 어둔 밤에 창고 안에 있던 벼를 훔치다가 차고 있던 칼을 빠뜨리고 갔는데, 이튿날 아침 집안사람들이 칼을 주어 주인을 찾으려고 하자 공이 말리며 말하기를 “이 칼이 한 번 나가면 도둑이 부끄러워 할 테니 어찌 한 가마의 벼로 사람의 약한 행동을 드러낼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시가(時價)에 따라 밭을 샀는데 밭을 판 주인이 이미 공에게 밭을 팔았지만 절반은 자신의 것이라 고집하면서 말하기를 “처음부터 모두 팔지 않았다”라고 말하니 공이 따지지 앟고 말하기를 “옛날에 밭두둑도 사양한 사람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 두 가지의 일을 보게 되면 공이 평소에 공부한 실상을 알 수 있다. 공은 천성이 온후하고 너그럽고 깨끗하며 단정한 태도와 말이 신중하였는데, 이러한 효도와 우애로운 행동은 천성에서 나왔다.
또 학문에 힘써서 자식된 입장에서는 부모의 뜻을 잘 이었고 부모가 되어서는 본받게 행동을 하여 사대부 집안의 품위를 잃지 않아 우암(尤庵) 선생의 칭찬을 받았고 후세에 기록할 만한 일과 행동이 있었다. 아! 어질다. 『논어(論語)』에 “근본이 세워지면 효와 공경의 도리가 나온다”라고 쓰여 있으니 공이 이것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부인 칠원(漆原) 윤씨는 도사(都事) 윤정기(尹廷琦)의 딸로 시집가기 전에는 부모에게 효도를 했고 시집가서는 남편에게 순정하여 옛 여사(女士)의 행동이 있었다. 부인은 공보다 1년 먼저 태어났고 공보다 31년 먼저 죽어 공의 산소 왼쪽에 부장(祔葬)하였다.
6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민원중(閔元重)은 효도로 좌랑(佐郞)을 증직(贈職) 받았고 둘째 민경중(閔慶重)도 효도로 참봉(參奉)을 제수 받았지만 출사(出仕)하지 않았고 큰아버지에게 양자를 나갔다.
셋째 민응중(閔應重)도 효도로 복호(復戶)를 받았다. 넷째는 민도중(閔度重)•다셋째는 민영중(閔永重)•여섯째는 민하중(閔厦重)이다. 딸은 안유석(安裕奭)에게 출가하였다. 서자로는 민강중(閔康重)과 민상중(閔庠重)이 있다.
큰아들 민원중에게는 민진일(閔鎭一)과 족숙(族叔) 민재중(閔載重)에게 양자 나간 민진태(閔鎭泰)과 민진오(閔鎭五), 사위 유익운(柳翼運)이 있다. 백부(伯父)에게 양자 나간 둘째 민경중(閔慶重)은 효도로 교관(敎官)을 증직 받은 민진운(閔鎭運)과 민진형(閔鎭逈)•사위 임수원(任遂元)•이구(李構)•박정상(朴鼎相)을 두었다.
셋째 민응중(閔應重)은 양자인 민진삼(閔鎭三)과 사위 박창수(朴彰壽)와 이성시(李聖時)를 두었다. 민도중(閔度重)은 아들 민진구(閔鎭九)와 사위 변창하(卞昌夏)•김역(金域)을 두었다.
다셋째는 아들 민진의(閔鎭義)•민진기(閔鎭紀)와 사위 이위(李葳)를 두었다. 여섯째는 아들 민진홍(閔鎭弘)•민진귀(閔鎭貴)를 두었다. 증손 이하는 많아 기록하지 않는다.
지금 5대 손인 민동혁(閔東爀)이 일가 사람인 민치장(閔治璋), 민태호(閔太鎬)와 함께 비석을 세우려고 했는데 일이 중요하다고 하여 나에게 비문을 부탁하니 내가 사양할 수 없어 이와 같이 기록하고 명(銘)을 계속한다.
명(銘)에 이르기를. “효(孝)가 있고 덕(德)도 있으며 수(齒)도 했고 벼슬(爵)도 하여, 이런 일이 대를 이었으니 내가 명(銘)을 쓰는데 부끄럼이 없도다. 이 비석 영원하리라”
통정대부 승정원 동부승지 겸경연관 송달수(宋達洙)는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
자료재공 : 후손 민황기
수종재집(守宗齋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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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縣監閔公 光旻 墓碣銘 - 宋達洙
懷德縣北三政洞。驪興閔氏世葬之地。而維玆負兌之原。故縣監諱光旻之墓也。六世祖吏曹正郞粹之葬在其上。祖府使贈判書汝儉。考贈正郞枰之葬在其東。我文正先祖。實銘兩世墓碣。而判書公碣文。有曰公之孫曾皆孝義質直。正郞公碣文。有曰公歿後其子光晨,光旻。和愛絶常。余樂與爲友。噫。此足以考徵於百世矣。公字少旭。閔氏爲東方大姓。世有聞人達官。五世祖龜孫典籍。贈贊成。高祖齊仁左贊成。號立巖。世德與事實。詳著於文正先祖所撰神道顯刻。曾祖思容郡守。贈參贊。外祖士人晉州蘇百福。公生于天啓壬戌。六十四。用大臣薦。拜監役。翌年。以明聖王后祔太廟監造官。例陞司宰主簿。其冬出監楊口縣未周年。以病遞。年八十。考終于景雲里。公自兒少。事親有深愛。侍側不離。應對必謹。正郞公手足痿痺。起居須人。而公每誠心扶持。不使人代勞。父母稱之曰。吾家孝兒。前後喪。哀戚甚至。而祭盡其誠。以寓終身慕。事伯兄如嚴父。事無巨細。必咨禀而行。同居一室四十年。湛樂如一日。嘗條列五倫。作歌以叙之。其事親章曰。甘旨豈徒孝。當以悅耳目。溫凊豈徒孝。當以樂心志。又曰。泰山匪高。父母恩高。河海匪深。父母恩深。一擧足一出言。不敢忘父母。其於忠君悌長刑妻待友詞各盡義。信乎爲篤行君子之言也。嘗自號企常翁。盖取爲學常久不息之意也。作一小帖。書誠敬篤實四字。及非禮勿視聽言動七字以自警。日必夙興。雖閑居不去上衣。看書敎子外。了然無一事。惰慢之容。不設於身。戲玩之具。不留於側。嘗曰。讀書氣卷。掩卷靜坐。想得古聖賢氣像。則吾之胷次。亦自灑然。非有所默契於心。何以知其然也。家素貧而處之裕如。不以口腹累其心。亦未嘗有營利之計。公可謂窮不失義者也。敎子弟有法度。其從外來謁。必整冠斂容以待之。雖幼少輩。者有放過。則嚴加警責。子弟不敢以褻服見。亦不敢有闌語戲色。家庭整肅。無異治朝。至於待人接物。常主仁恕。雖婢僕過失。必溫言戒誨。不輕施捶楚曰。爲家長。不能齊家。而因奴輩有過。以聲色加之。甚爲可羞。莅官御吏。亦曰。爲官者不能明察。而乃反課罪下吏。則是瞽者之杖也。一日廊下奴偸竊庫中租。昏夜急遽。遺其佩刀。明朝家人得之。欲推刀主。公止之曰。此刀一出。渠必羞愧。豈可以一斛租。彰人惡行耶。嘗準價買田。田主旣賣而還執其半曰。初不盡賣。公不辨曰。古有讓畔者。觀於此數事。可驗公平日用工之實也。公溫厚寬裕。容儀端潔。言語愼重。孝友之行。根於天性。而又能從事問學。爲子而善繼。爲父而足法。不失士夫家規。得蒙大賢稱賞。而推之事爲。綽有可述。嗚呼賢哉。魯論所謂本立而道生者。公實有之。配漆原尹氏。都事正基女。在家而孝。從夫而順。有古女士行。生後公一年。歿先公三十一年。祔公墓左。擧六男一女。男長元重孝。贈佐郞。次慶重以孝除參奉不就。出後伯父。次應重以孝給卜。次度重,永重,廈重。女適安裕奭。庶出康重,庠重。曰鎭一。鎭泰出後族叔載重。鎭三出後叔父。鎭五,柳翼運。長房子婿也。曰鎭運孝。贈敎官。鎭迥,任遂元,李構,朴鼎相。二房子婿也。曰鎭三卽三房所後子。而朴彭壽,李聖時。其二婿也。曰鎭九,卞昌夏,金棫。四房子婿也。曰鎭儀,鎭紀,李葳。五房子婿也。曰鎭弘,鎭貴。六房子也。曾孫以下。多不盡錄。今五代孫東爀。與其族致璋,太鎬。將謀竪碣。而以事契之重。托以墓銘。誼不當辭。遂爲之序次而係以銘曰。
有孝有德。有齒有爵。有類永錫。我銘無愧。不磷者石。
수종재집 > 守宗齋集卷之十一 / 墓碣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