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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0월 4일 수요일 저녁, 한국전쟁 중에 이판일 장로의 집에 가족과 성도들 20여 명이 모여 예배를 드렸다. 발각되면 목숨까지 걸어야 하는 일이니 가히 순교적 신앙이라 할 만하다. 공산군이 들이닥쳐 예배는 중단되었다. “이 악질 반동 새끼들! 오늘 남김없이 다 죽여 버리가써! 하지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딱 한 번 기회를 준다. 너희 중에 이제라도 예수를 믿지 않겠다고 손들고 나오면 살려 주가써! 자, 시간 없으니끼니 빨리 나오라우!” 살인자들의 살벌한 으름장에도 손들고 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성도들은 3km를 걸어 형장의 길로 끌려갔다. 머슴 출신 좌경세력에게 이판일 장로는 몽둥이로 뒤통수를 맞고 쓰러졌으며, 흥분한 공산군들은 교인들을 죽창으로 찌르고 몽둥이로 때려죽이고, 모래 구덩이에 쓸어 넣고 생매장 했다. 그날 이판일 장로의 가족 13명과 교인 7명, 다른 날 28명, 모두 48명 교인이 예수님 이름으로 순교하였다.
가족 13명을 포함, 교인 48명이 순교한 현장
이판일의 아들, 이인재 집사가 결혼하여 목포에서 살며 죽음을 피했는데 해군함정이 임자도에 상륙하던 날, 길 안내자로 동행한다. 이인재 집사는 군인들과 함께 지역의 공산군들을 10명을 체포하기에 이르렀다. 그날 밤 그는 교회의 싸늘한 마루에서 기도하고 있는데 새벽녘에 음성이 들렸다. 문준경 전도사님의 평소 말씀이다. “다 용서하고 사랑해야 하나님 기뻐하신다. 용서하는 자가 진정한 승리자다.”
이일재 목사
다음날 가해자들을 즉결 처형 하는 현장에서 군 지휘관은 이인재 집사에게 총을 주며 복수할 기회를 주었다. 이때 이인재 집사는 “지휘관님, 이 사람들은 마땅히 죽어야 할 죄인들이지만 공산 사상을 버리고 예수님을 믿겠다고 하면 살려주길 바랍니다.” 간곡히 요청하여 허락을 받는다. 가해자들은 모두 살아나게 되고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이인재는 마을 이장을 자원하여 살인자들과 좌익 부역자들 보호에 나선다.
이런 이인재의 용서는 수복 후 대한민국 곳곳에서 일어났던 보복 살상이 임자도에서는 발생하지 않는 기적을 이룬다. 한국전쟁 직전에 임자도의 인구가 1만3천 명이었고, 21%인 2천7백여 명이 희생되지만 임자도에 평화가 찾아온 것은 이인재의 핵폭탄 같은 용서와 화해의 영향력이라고 평가받고 있다. 이인재 집사는 전쟁 직후 논 다섯 마지기를 팔아, 좌경세력이 가장 많았던 지역에 교회를 직접 건축하고 교회 간판을 붙였다. 1954년에는 직접 그 교회에 교역자로 부임하여 목양하였다. 놀라운 것은 그 교회에서 17명의 목회자와 장로가 배출되었다. 이인재 목사의 6남매 모두와 손자가 목회자로 헌신하였다.
6남매 모두 목회자로 헌신했다.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조카이며, 상담대학원 대학교 총장인 정태기 박사가 증언하기를, “이인재 목사님이 마지막 목회지인 임자의 진리교회에 부임하였을 때 주민들은 성자가 돌아왔다면서 대환영을 했습니다. 믿지 않던 주민들이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였고, 교회는 두 배로 부흥했습니다. 마을주민 대부분이 예수 믿는 자들이 되었는데 이것이야말로 진정한 부흥의 역사라고 평가합니다. 제가 1959년에 증도에서 임자도로 이사 갔는데 좀 깨인 사람들은 다 진리교회를 다니더군요. 전쟁 때 이인재 목사님이 가해자들을 보복했더라면 진리교회는 부흥하기가 어려웠을 겁니다.” 라고 평가하였다.
진리교회는 이인재 목사의 아들 이성균 목사를 강청하여 담임목사로 청빙했다. 이 목사 부부는 오늘도 조부와 선친의 순교 정신을 이어가기 위해 ‘사명’ 찬양을 읊조린다. “주님이 홀로 가신 그 길 나도 따라가오....”
이인재 목사와 자녀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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