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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가의 작곡자 친일파 안익태 선생과 작사자 윤치호에 가곡 선구자!
2018년에 "tv N" 에서 방영된 "윤식당 2" 의 현장인 스페인 남쪽 카나리아제도 테네리페섬의
가라치코 마을을 찾아 레스토랑을 보고는 돌아오는 길에..... 마드리드에서 비행기를 환승해
1시간 20분 거리인 마요르카섬 팔마시에 도착해 애국가의 작곡자 안익태 선생댁을 찾았습니다.
마요르카섬의 중심인 스페인 광장 Pl d'Espana 에서 시티 투어 버스 City Tour Bus 를 타고
벨베르성을 지나기에, 버스 기사에게 물으니 선생의 집이 있는 Hotel Valparaiso 까지
는 운행하지 않는다기에... Pl Gomia 에서 내려서 택시를 타니 기본요금 거리로 금방 입니다.
안익태 선생 Career P'eaktai AHN 의 주소는 Carrer de Josep Costa Ferrer 4, Palma 인데
“안익태선생 유택” 동판이 달린 우체함에는 LEONOR AHN TALAVERA +0034 655 212
ahn.leonor@gmail.com 이라고 적혀 있으니 선생의 따님이 외손주와 함께 거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나? 아무리 벨을 눌러도 굳게 닫힌 대문은 열릴줄을 모릅니다. 머나먼 마요르카섬
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서야 한다는 얘기인데.... 하기사 몇년전에 네델란드 헤이그에 이준
열사 기념관 방문 때도 문이 닫혀 헛걸음을 했으며, 백두산에 2번이나 오르고도 안개로 인해
푸른 천지를 보지 못했으니 내가 박복한가 봅니다? 해서 우편함에 메모지만 남기고 돌아 섭니다.
애국가의 작곡가인 안익태 (1906∼1965년) 선생은 2차대전 중 독일을 떠나 스페인으로
넘어와 스페인 여성과 결혼 하였으며 1946년에는 마요르카의 교향악단 초대
지휘자로 초빙되어 섬으로 들어와서는 마요르카 문화예술계에 큰 공헌을 했다고 합니다.
선생 사후 25년만인 1990년 주택이 팔릴 위기 에 처하자 ‘인터불고 창업자’ 로 스페인
교포 권영호 회장은 25만 달러를 주고 집을 매입해 대한민국 정부에 기증 했으니....
2016년 12월 안익태 기념관 이 되었다는데, 호안 미로 뮤지엄 근처 (입구는 다름) 입니다.
안익태 거리 CAREER D'EAK TAI AHN 가 생겼으며 기념관은“세째 딸 레오노르 안” 이 운영
하고 있으니 1층은 악보와 사진, 기록물등 안익태 선생의 유품을 전시하는 기념관이고
2층은 주택 으로 사용한다는데...... 레오노르 안의 아들이 “미구엘 익태 안” 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후진국이던 1960~1990년 까지는 “저작권등 지적재산권” 개념 자체가 없었으니
외국 음반 은 물론이고 대학가에서도 미국이나 유럽에서 책을 한권 사와서는 무단으로
인쇄해 팔고 대학교재로 썼으니... 이른바 해적질(도둑질)을 하면서도 부끄러움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1996년 12월에 선진국 모임 OECD (경제협력개발기구) 에 가입하게 되면서 이제는
저작권등 지적재산권 을 보호하지 않을수 없는 처지가 되었는데, 그중 하나가 애국가이니
개인이 부르는건 상관없지만 관청, 학교, 회사나 단체에서 공식행사 를 할 때가 문제입니다.
애국가의 저작권은 대한민국 정부나 국민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안익태 선생의 유족인 스페인
여인 로리타 안과 그 딸들에게 있으니, “계약을 맺고 애국가를 공식행사에서 부를 때 마다
저작권료 돈” 을 지불해야 하는데, 우리는 무단으로 사용했으니... 이는 “도둑질” 에 해당합니다.
역대 대한민국 정부는 무지의 소치인지 아니면 태만 인지.... 정부 수립 50년이 지나도록
동해(일본해) 호칭 문제에 대해 전혀 무관심했 듯, 애국가 문제도 늑장을 부리다가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으니 돈을 주고 저작권
을 사는 것이 정상적인 방법 이지만 문제는 “국민감정” 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음이라.....
예전에는 12월이 되면 거리의 가게마다 경쟁하듯 크리스마스 캐럴송 이 요란했는데 요즘은
캐럴송을 아예 들을수가 없으니... 이는 가게 주인들이 저작권 사용료를 주기 싫으니
아예 곡을 틀지 않는 것인데, 김광석 사태등! 이제는 저작권이 정착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본인이 죽어도 유족에게 70년간 저작권 이 있는지라 2003년에 대한민국 정부는 로리타 안여사
와 딸 등 유족과 교섭해 2005년 3월 16일 애국가 저작권을 무료로 기증 받았는데
완전한 무상 인지? 아님 독립 유공자 후손으로 인정(연금 지급?)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안익태 선생은 평양 숭실중에서 3.1 만세 사건으로 퇴학된 후에 일본으로 건너가서
도쿄 구니다치 고등음악원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가 신시내티 음악원에 입학한
후에 신시내티 교향악단에서 첼로주자로 있다가 1934년에 헝가리로 건너가
도야니에게 작곡을 배웠으며 1937년 헝가리 부다페스트 교향악단 지휘자가 됩니다.
1936년에 선생은 손기정 선수가 일장기를 달고 참가한 베를린 올림픽에 즈음해 남의 나라 이별
의 노래 올드랭사인 곡으로 애국가를 부르는 현실을 마음 아프게 생각해 애국가를 작곡
해서 조선 선수와 함께 불렀으며 임시정부에 애국가 곡을 보내 윤치호가 작사를 했다고 합니다!
애국가 작사자로 훗날 친일파 윤치호 를 얘기하자면...... 영어 “liberty” 는 동양에 그 개념
자체가 없어 불교 경전에서 찾아 “自由(자유)” 라는 조어(번역)를 만든 일본의 선각자로
1만엔권 지폐에 나오는 후쿠자와 유기치는 그가 저술한 “문명의 개략” 이 1875년에
조선에 입수되면서 문명개화론은 김옥균과 윤치호 등 조선의 청년들을 사로잡게 됩니다.
1881년 박정양을 대표로 홍영식등이 신사유람단 으로 일본에 가는데 이때 수행원 유길준 은
귀국하지 않고 후쿠자와가 건립한 게이오의숙 에서 수학했으며, 수행원 윤치호 도 2년간
더 머물며 다음해 4차 수신사 박영효와 김옥균, 서광범 이 오자 5명은 “후쿠자와 유기치”
에게 사사하는데 2년뒤 갑신정변 실패후 박영효는 후쿠자와의 도움으로 친린의숙을 엽니다.
박영효와 김옥균, 윤치호, 서재필과 유길준 등 조선 청년들은 후쿠자와 유키치 가
“일본 문명개화의 주역” 이라는 것이 조선에 이미 알려졌기에......
이토 히로부미나 이노우에 가오루 대신에 그를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한 것입니다.
1884년 김옥균등이 일으킨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는 일본의 선각자 후쿠자와 유기치니
일본 메이지유신 같은 개혁을 꿈꿨던 거사가 실패하고 주역들 일부가 처형을 당합니다.
그러자 낙담한 후쿠자와 유기치는 소중한 인재들을 잃었다며 대성통곡하고는...
식음을 전폐하면서 시사신보 신문에 격정에 넘친 “조선독립당의 처형” 이란
글을 발표하는 한편으로 조선의 야만적인 형벌을 비인도적 이라며 규탄 합니다.
“일본군의 정훈교재로도 쓰이기도 했던 시사신보” 사장 후쿠자와 유기치는 귀국하는 박영효
에게 인쇄기와 잉크, 금속 활자와 종이에 인쇄공 이노우에 까지 붙여주니..... 다음해
1883년에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 “한성순보” 는 후쿠자와에게 사사한 유길준이 발행합니다.
우리나라 조선에는 고려시대 부터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활자인 금속활자가 있었지만 하루 인쇄
가능 부수가 "20여부" 에 불과하니..... 조선시대에도 "대량인쇄는 목활자" 를 사용해 왔는지라
신문에는 일본의 금속활자가 필요했던 것인데, 1884년 갑신정변의 실제 설계자는 후쿠자와니
김옥균이 실패하고 망명하자 후쿠자와는 자기 집에 머물게 하고 “시녀를 첩” 으로 주기도 합니다.
우리나라에는 옛날부터 “애국가는 수십개” 가 있었으니... 최초로는 1896년 독립협회 회장인
친러파 이완용 (독립문 현판 글씨를 쓴 조선 명필로 후일 을사 5적) 의 주도로 독립문
정초식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 의 멜로디로 부른 작사
미상 애국가 (후렴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 죠션 사람 죠션으로 길이 보죤하세") 라고 합니다.
두번째로 “대한제국의 애국가” 는 1901년 고종이 초빙해 궁정 악대를 맡긴 독일 작곡가 "프란츠
에케르트" 가 1902년 작곡해 고종 생신때 궁정악대가 불렀는데, 프란츠는 22년전인 1879년에
일본 해군악대에서 근무하다가 1888년 황궁에 근무하면서 1890년에 일본 국가 “기미가요” 를
작곡해 천황(일왕) 생일에 불렀다니.... 일본 국가와 조선 애국가를 같은 사람이 작곡한 것이지요?
안익태 선생은 1940년 일본 정부의 기원 2600년 기념축전 사무국이 요청한 “황기 2600년
기념봉축 음악을 작곡“ 했고 같은해 12월 도쿄 가부기좌 (歌舞伎座) 에서 초연
되었는데..... 이 곡은 이후 독일을 비롯한 유럽에서도 연주 되었으니 이를 계기로
1941년 안익태 선생은 부다페스트를 떠나 독일의 베를린으로 주 활동 무대를 옮깁니다.
국민일보에 따르면 안익태는 친(親)나치 음악가였던 독일의 거장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제자가
되었고,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 지휘자가 됐는데.... 당시 베를린 필 또한 나치 선전에
활용된 침략의 전령사이자 나팔수였으니 베를린 필 자료실장은 슈트라우스가 안익태를
후원한 이유에 대해 “당시 내세울 만한 일본 출신 지휘자가 없었기 때문” 이라고 했습니다.
6.25 후 안익태 선생이 작곡한 “한국 환상곡” 은 1942년 일본의 괴뢰인 만주국 수립 10 주년을
기념해 작곡하고 일장기와 만주국기가 걸린 무대에서 지휘했던 "만주국의 자기 표절”이며....
일본 천황(일왕)을 찬양하는“에텐라쿠”를 작곡했고 군국주의 “日獨會 일독회” 의 경제적 후원
을 받았으며 독일에서 생활할 때에 주독 일본 영사관의 신세 를 졌다는 “친일파” 논란이 있습니다.
기미가요는 "천황의 통치시대는 천년만년 이어지리라, 작은 돌이 큰 바위가 되고, 그 바위에 이끼
가 낄 때까지" 라는 가사인데... 안익태가 1941년 기미가요를 연주했다는 문건이 발견됐으니
안익태를 오랫동안 후원했던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 (주독 베를린 공사관 참사관)
가 1952년 일본 음악 잡지 <레코드 예술>에 기고한 글로 제목은 '안익태군의 편모(片貌)' 입니다.
기고문에 따르면 일본 외교관 에하라 고이치는 독일- 소련 전쟁이 시작되던 1941년 명치절
아침에 부쿠레슈티의 일본 공사관 의식에 참여했는데.... 기미가요 제창때 피아노를
연주하는 청년이 있었으니 지휘자 겸 작곡가 안익태로 이후 전쟁으로 유학이 어려워지자
독소전쟁이 시작되던 해 부터 베를린의 자기 집에서 그와 함께 살게 됐다" 라고 적었습니다.
안익태는 그날 오후 에하라씨를 왕립음악당 연주회에 초대하였는데 “음악당은 만원이었고
곡목은 자작곡인 월천악 (에켄라쿠- 일본 궁중아악) 과 베토벤 교향곡 6번이었는데
조선인이 월천악을 교향곡화한 것에 대해 기이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 궁정
에도 아악이 있으니....... 배리에이션이 나타났고 교향시는 우아한 월천악의
멜로디에 조선의 궁정악을 더하여 극적인 효과를 내며 내 가슴을 울렸다” 고 적었습니다.
안익태는 1944년 베를린에서 나치 치하의 파리로 가서는 팔레 샤이요에서 3일간 베에토벤
축제를 시도했으니 첫째 날은 티보와 바이올린협주곡을, 둘째 날은 코르토와 황제 협주곡
을, 그리고 셋째 날에는 베토벤 교향곡 9번을 지휘하여 성황리에 마치고는 베를린의
에하라 고이치의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바로 중립국인 스페인의 바르셀로나로 갑니다.
1942년에 만주국 건국 10주년을 축하하는 “큰 관현악과 혼성합창을 위한 교향적 환상곡
‘만주’ ” 를 작곡하였고 1943년 7월 독일 제국음악원 정식회원이 되었으며 1944년
독일의 패망이 짙어지면서 활동무대를 중립국인 스페인으로 옮겼는데,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그의 “애국가” 는 사실상 국가로 되었고 1965년 9월 16일 사망했습니다.
이런 친일파 논란은 음악가 홍난파나 현제명도 마찬가지인데 최남선, 이광수, 윤치호,
장지연, 박영효, 이용구, 서정주, 노천명, 모윤숙, 김동인, 주요한, 김동환, 김활란
이 그러하며.... 3.1 기미 독립선언서 민족대표 33인 중에서도 한용운과 손병희 등
10여인 을 빼고는 최린 등 상당수는 지조를 지키지 못하고 "친일파로 변절" 하였습니다.
“선구자” 노래는 알려진 것 처럼 이름모를 독립군 이 작사한걸 조두남 작곡으로
일제시대 부터 불리운 것은 아니니, 윤해영이 작사하고 조두남이 작곡한
유랑민의 설움을 담은노래가 ‘용정의 노래’ 인데 1944년 봄, 만주 영안의
신곡 공연장에서 발표되었으며 윤해영은 친일단체 "영안 협화회 회원" 입니다.
조두남 또한 같은 해에 '간첩은 날뛴다’ 와 ‘징병제 만세’ , ‘황국의 어머니’
를 발표한 대표적인 친일파 인데..... 해방 이후 '눈물젖은 보따리’ 나
‘흘러온 신세’ 가 어처구니 없게도 “말 달리던 선구자” 로 바뀐 것이네요?
일송정 푸른솔은 늙어 늙어 갔어도 , 한줄기 혜란강은 천년두고 흐른다
지난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 지금은 어느곳에 거친꿈이 깊었나
하지만 윤해영등은 천성이 악한 것은 아니고 민족의 양심은 있으니 해방후 ‘동북인민
행진곡’ 등 민족의식을 고양한 노래도 작사했고 북한에서 ‘분배받은 땅’ 등 노래를
지었으니 친일파 라기 보다는 시류에 따라 살았던 보통 사람, 소시민이라 해야 할러나?
하기사 을사오적에서도 으뜸인 이완용도 처음에는 모든 다른 대신들 처럼 친청파 였다가
1895년 청일 전쟁에서 일본에 패하자 친미파가 되었고 이후 러시아가 주도해서
프랑스와 독일을 끌어들인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요동반도를 토해 내놓자 친러파로
바뀌었으며 1904년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친일파가 되었으니... 대개 그러합니다?
하기사 친일파들이 음악가와 시인 그리고 문인뿐이겠습니까? 1904년 8월 18일 구 독립협회
회원들 중심으로 조직된 유신회의 송병준은 이용구의 진보회와 합쳐 10만이 넘는 “일진회”
를 만들었으니 송병준에게 “한일합방의 공적” 을 뺏길까 조급해진 이완용은 한국 최초
근대 소설인 혈의 누 를 쓴 이인직 을 데라우치 통감에게 보내 한일 합방 공적을 가로챕니다.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 는 17세 일본 도진샤, 21세 상해 중서서원, 24세부터 미국 에모리대
에서 공부하던 1907년에 애국가 가사를 썼으며 귀국후 독립협회 회장, 대성학교 교장을
지내며 민족의 힘을 키웠고 1912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사건인 105인사건 주모자로
3년간 복역했으나 만년에는 친일 강연에 중추원과 조선임전보국단으로 친일에 앞장 섭니다.
해방후에 국회는 “반민특위” 를 설치하니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노덕술, 사찰과장 노운하등 친일
반역자들이 잡혀오는데 모두들 구차한 변명으로 일관했으나 오직 한사람“ 천황폐하가 우리
조선인을 적자로 거두어주신 큰 은혜에 감읍해 뼈와 살과 혼도 철저한 일본인이 되어야 한다”
고 외친 “이광수” 만은 죄를 시인했는데... 그 이유를 묻자 “일본이 몇백년 갈줄 알았다” 라나요?
조선인 밀정들은 독립운동가들을 잡아 고문하는등 일본인 순사보다도 더 악질이었으니 우리 어머니
말에 의하면 저들은 집집마다 다니며 밤에 불을 끄고 목화씨를 빼서 실을 만들라치면 적발해서
손톱까지 뽑았다고 하는데.... 한 짓이 있는지라 해방이 되자 달아났으나 준비없이 진주한 미군정은
이들을 불러 특채해 치안을 맡겼고 이승만 정부에서 는 대한민국 경찰 수뇌부를 독차지 하게 됩니다.
이승만 대통령은 자기 정권유지를 위한 세력인 친일파 경찰들이 반민특위에 의해 처단을 당하게
되자.... 친일파를 처단하자고 주장하는 자들은 “빨갱이” 라며 국회 프락치 사건을 만들어
국회의원들을 구속하고 윤기병 서울중부경찰서장과 윤명윤 종로경찰서장의 지휘로 경찰관
80여명이 총을 들고 반민특위를 습격해서는 무력으로 해산시키니 친일잔재 청산은 무산 됩니다.
안익태 선생의 친일 여부를 떠나서 선생의 유족들이 애국가 저작권을 대한민국에 무상
(?) 으로 기증해 준데 대해 고마운 마음에 종이에 몇자 적어서 우편함에 넣고 빈
집을 향해 절을 하고는... 되돌아 내려오면서 애국가의 작사자 윤치호를 생각해 봅니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는 오랜 조사와 토론 끝에 애국가 작사자 윤치호에 대해 확정 표결
을 해서 11대 2 압도적 결과가 나왔으나 애국가의 작곡가와 작사자 두명 모두가 친일파
인 점이 마음에 걸리는지라 결정을 유보하고 ‘미확정’ 으로 발표한게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윤치호 선생은 애국가를 국가(國歌) 의 개념으로 지은 것이 아니라... 우리 국민의 계몽과 단결을 위해
애국적 찬송가로 지었다” 라는데 “당시 그의 노래가 배재학당을 비롯한 기독교 학교로 확산되고,
3·1운동 기간 민중이 선택하고 임시정부가 수용해 광복후 자연스레 대한민국이 채택했던 것” 입니다.
“윤치호 선생은 1907년 애국가 가사와 후렴이 같아 원형으로 보는 ‘애국적 찬미가(무궁화가)’ 를 1897년
8월 13일 조선 개국 505주년 기념식 때 기념가로 작사했으며 (서재필의 취재노트 Editorial Note)....
“독립협회 주최 행사에서 배재학당 학생들이 ‘무궁화 노래(National Flower)’ 를 불렀다고 하는 내용이
2013년 발간된 아펜젤러 전기(아펜젤러와 한국: The Appenzellers: Who They Preached) 에 나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