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국이상국후집 제3권 / 고율시(古律詩)
자질(子姪)에게 보이다(示子姪) 장단구(長短句)長短句
가엾어라 이 한 몸 / 可憐此一身
죽으면 백골 되어 썩어지리니 / 死作白骨朽
자손들 세시마다 무덤에 절하더라도 / 子孫歲時雖拜塚
그것이 죽은 이에게 무슨 상관 있단 말가 / 其於死者亦何有
하물며 이 세상 하직한 뒤에 가묘에서도 멀어지면 / 何況百歲之後家廟遠
어느 자손이 찿아와 성묘하고 돌볼까 / 寧有雲伋來省一廻首
앞에선 누런 곰이 울고 / 前有黃熊啼
뒤에는 푸른 외뿔소가 소리치리라 / 後有靑兕吼
고금의 무덤은 부질없이 다닥다닥한데 / 古今墳壙空纍纍
넋이 있고 없는 것을 뉘라서 알리요 / 魂在魂無誰得究
시름없이 앉아 스스로 생각해보니 / 靜坐自思量
살아 생전에 한잔 술로 입 축임만 못하네 / 不若生前一杯濡我口
자질들에게 이르노니 / 爲向子姪導
이 늙은이 너희들 괴롭힐 날 얼마나 되랴 / 吾老何嘗溷汝久
일부러 짐승 잡으려 말고 / 不必擊鮮爲
술 준비나 부지런히 하렴 / 但可勤置酒
①천 꿰미의 지전 사르고 술 올려도 / 紙錢千貫奠觴三
죽은 뒤야 받는지 않는지 어떻게 알리 / 死後寧知受不受
호화롭게 장사지내는 것도 나는 바라지 않는다 / 厚葬吾不要
헛되이 묘구 도둑 가져가게 할 뿐이라 / 徒作摸金人所取
① 천 꿰미의 지전 : 중국 고대부터 장사를 지내거나 귀신에게 제사할 때는 반드시 폐백이 있었으며 구슬이나 비단을 사용했는데, 행사가 끝나면 함께 묻곤 하였다. 한대(漢代)에 와서는 돈[錢]을 사용했고, 위(魏)ㆍ진(晉) 이후에는 종이돈[紙錢]을 썼다고 한다. 《封氏聞見記 紙錢》
ⓒ 한국고전번역원 | 이훈종 (역) | 1979
탁주 일배 (濁酒 一杯)
死後千秋萬歲之名 (사후천추만세지명)
不如生時獨酒一杯 (불여생시탁주일배)
"죽은 후 천추만세까지 이름이 전해지는 것이
살아 생전에 탁주 한잔만 못하다." 는 뜻입니다
고려의 대문호 이규보(李奎報)선생께서 그의 아들과 조카에게 준 시자질(示子姪)이란 시를 보면 노인의 애틋한 소망이 그려져 있습니다.
죽은 후 자손들이 철따라 무덤을 찾아와 절을 한들 죽은 자에게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으며 세월이 흘러 백여 년이 지나 가묘, 사당(家廟,祠堂)에서도 멀어지면 어느 후손이 찾아와 성묘하고 돌볼 것이냐고 반문했습니다.
찾아오는 후손 하나 없고 무덤이 황폐화되어 초목이 무성하니 산 짐승들의 놀이터가 되어 곰이 와서 울고 무덤 뒤에는 승냥이가 울부짖고 있을 것이 자명하다고 했지요.
산에는 고금의 무덤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지만 넋이 있는지, 없는지, 누구도 알 수 없다고 탄식하여 사후(死後)세계를 연연하지 않았습니다.
이어서 자식들에게 바라는 소망을 다음과 같이 썼습니다.
靜坐自思量(정좌자사양) 조용히 앉아서 혼자 생각해 보니
不若生前一杯儒(불약생전일배유) 살아 생전 한 잔 술로 목을 축이는 것만 못하네.
我口爲向子姪道(아구위향자질도) 내가 아들과 조카들에게 말하노니
吾老何嘗흔汝久(오노하상흔여구) 이 늙은이가 너희를 괴롭힐 날 얼마나 되겠는가?
不必繫鮮爲(불필계선위) 꼭 고기 안주 놓으려 말고
但可動置酒(단가근치주) 술상이나 부지런히 자주 차려다주렴
아!
요즘 세상에 어느 자식이 이 소망을 들어 줄 것인가?
사후(死後)의 효(孝)보다 생시(生時)의 효가 진정한 효(孝)이로다.
【장달수님의 한국학 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