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피앙(기표), 시니피에(기의), 레페랑(지시체)
기호학의 기초인 구조주의 언어학의 기본개념은 알아야 했으므로 소쉬르의 기본 개념 몇가지를 설명하는것으로부터 시작했다. 우선 시니피앙(signifiant)과 시니피에(signifie). 이것은 ‘의미하다’라는 뜻의 불어 동사 signifier에서 파생된 것으로 시니피앙은 ‘의미하는것’, 시니피에는 ‘의미되어진것’이라는 뜻이 된다. 이 보통명사가 소쉬르의 구조언어학에서 기표(記表), 기의(記意)라는 혁명적인 개념으로 변했다.
생소한 단어가 나타났다고 해서 어렵게 생각할 것은 없다.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시니피앙)이고, 그 단어들의 의미가 기의(시니피에)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책’이라는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는 기표이고, 그것이 의미하는 ‘책’이라는 개념은 기의이다.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라는 말이 어려우면 우리가 ‘책’이라고 썼을 때의 글자, 그리고 우리가 ‘책’이라고 발음할 때의 음성적인 물질성이 바로 시각적, 청각적 이미지이다. 이 ‘책’이라는 기표가 의미하는 내용은 ‘글자가 인쇄된 종이들의 묶음’이라는 개념이다. 이 개념이 바로 기의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말하는 모든 단어들이 기표와 기의라는 얇은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
똑같은 의미의 단어가 왜 나라마다 다른가를 생각해보면 기표와 기의의 분리가 쉽게 이해될것이다. 예컨대 우리가 ‘책’이라고 하는 것을 영어는 book, 불어는 livre라고 하니 말이다. 결국 기표는 내용 없는 겉 껍데기이고, 그것이 어떤 기의와 결합되었을 때만 의미가 발생된다. 그러고 보면 ‘책’이라는 기표가 반드시 ‘책’이라는 의미를 가져야 할 필연적인 이유는 하나도 없다. 그저 한국이라는 사회 안에서 사람들이 ‘이러저러한 사물은 책이라고 하자’라고 정했을뿐이다. 영어권에서서는 그것을 book이라고 정했고, 불어권에서는 livre라고 정했을 뿐이다. “기표와 기의의 관계는 자의적이다”라는 소쉬르의 말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기호에서 지각될수 있는 부분이 기표(시니피앙)이고 부재하여 우리의 지각이 감지할수 없는 숨겨진 부분이 기의(시니피에)이다. 덴마크의 언어학자 옐르슬레우(Hjelmslev)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 대신 표현(expression)과 내용(contenu)이라고 말했는데, 이 용어가 좀 더 쉽게 다가올지 모르겠다. ‘책’이라는 기표와 ‘글자가 쓰여진 종이묶음’이라는 기의가 합쳐져 ‘책’이라는 의미가 발생한다. 이것이 의미작용이다. 그러므로 의미작용(signification)은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일어난다. 한편 기표와 기의가 지시하는 현실 속의 대상은 지시체(指示體)(referent)이다. 예컨대 우리가 ‘황소’라는 단어를 말할 때 그 음성적, 활자적 물질성은 시니피앙이고, 그것이 뜻하는 바의 의미는 시니피에인데 여기서 지시된 대상, 즉 현실 속의 황소는 ‘지시체’ 혹은 ‘지시대상’이다.
막연하게 확고부동한 하나의 덩어리로 인식하고 있던 말들이 미세한 두 겹으로 분리되어 있다는 사실에 학생들은 잠시 혼란을 느끼는 듯 했다. 편안한 의식을 잠시 뒤흔든 이 가벼운 충격이야말로 인문학의 첫걸음이라고 나는 감히 말하고 싶다. 사물 속의 물자체(物自體), 가시적인 것 속의 비가시적인것, 존재 속의 무(無), 현상 뒤에 숨겨진 이데아의 세계로 거슬러 올라가는 서구 철학의 전통이 모두 이 미세한 두 겹 분리에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무의식적 현상도 개인의 의식 속에 깊이 파묻힌 시니피에에 다름 아니다. 하나의 소설 작품에서도 소설을 구성하고 있는 언어적 형식은 시니피앙, 소설 속에서 말해지고 있는 이야기는 시니피에라고 말할수 있다. 이것은 광고나 영화 분석에서도 마찬가지이고, 소설 전체, 영화 전체만이 아니라 부분 부분의 형식과 내용에도 적용되는 개념이다.
데노타시옹과 코노타시옹
데노타시옹(denotation)과 코노타시옹(connotation)은 옐름슬레우가 처음으로 말했으나 롤랑 바르트가 차용하여 널리 퍼뜨린 이후 기호학의 중요한 개념으로 정착했다. 기표와 기의의 결합에서 의미작용이 생기는데, 이 의미작용 역시 두 개의 층위가 있다. 그 첫 번째 층위가 데노타시옹으로, 이것은 단어의 ‘글자 그대로의 의미’ ‘명백한 의미’ 혹은 ‘상식적인 의미’이다. 우리말로는 외시(外示)라고 한다. 우리가 사전에서 찾아보는 말들의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의미작용의 두 번째 층위인 코노타시옹은 한 단어가 가진 사회 문화적 연관 혹은 이데올로기적 연관을 지시하는 개념이다. 예컨대 니그로(negro)라는 단어는 글자 그대로의 사전적인 의미는 ‘피부가 검은 사람’이라는 뜻이지만, 사회, 문화적, 이데올로기적인 의미는 ‘백인 사회에서 천대받는 유색인종’을 뜻한다. 이것이 코노타시옹이고 우리말로는 공시(共示)라고 한다. 외시는 단 하나지만 공시는 무수하게 많을 수 있다. 윌든(Wilden)은 데노타시옹을 디지털 코드로, 코노타시옹을 아날로그 코드로 간주하기도 했다.
모든 기호에는 외시와 공시가 있다. 외시의 층위에서 기호는 기표와 기의가 결합되어 있다. 그런데 공시는 이 기호, 그러니까 ‘니그로’라는 시각적, 청각적 물질성과 ‘검은 피부의 사람’이라는 의미가 결합된 이 기호를 다시 하나의 시니피앙으로 삼아 그것의 시니피에를 찾는 것이다. 그러므로 코노타시옹은 외시적 기호를 시니피앙으로 삼아 거기에 또 다른 시니피에를 추가시키는 2차 의미작용이다. 따라서 시니피앙과 시니피에를 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분석의 수준에 달려 있다. 한 쪽 층위에서 시니피앙인 것이 다른 쪽 층위에서는 시니피에가 되기 때문이다. 바르트는 이런 2차 의미작용을 넘어 세 번째 단계의 층위도 있다고 말한다. 다름 아닌 신화의 층위이다.
마릴린 몬로의 사진을 예로 들어보자. 외시적 수준에서 이것은 마릴린 몬로라는 한 배우의 사진이다. 그리고 공시적 층위에서 이것은 한 여배우가 표상하는 글래머, 섹슈얼리티, 아름다움을 뜻한다. 그러나 세번째 단계에서 이것은 헐리우드적 신화, 그리고 글래머 배우가 만들어내는 아메리칸 드림을 뜻한다. 이것이 신화의 단계이다. 이 세 번째의 신화적, 이데올로기적 의미작용은 주류 문화의 세계관을 드러낸다.
기호와 커뮤니케이션
기초적인 용어를 익혔으니 이제 기호학으로 진입해 보기로 하자. 사전적인 의미에서 기호학이란 기호의 과학이다. 그러나 현대의 문화연구에 폭넓게 적용되고 있는 기호학은 엄밀히 말해서 기호의 성격과 기능 작용을 연구하는 기호학이 아니라 의미에 관한 이론이다. 프랑스의 대표적 기호학자인 그레마스(Algirdas Julian Greimas, 1917-1992)는 기호학을 “의미의 생성과 파악의 조건”을 규명하는 이론이라고 정의하고, 담화(discours)를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여기서 담화는 언어로 쓰여진 텍스트뿐 아니라 비언어적 언어, 즉 몸짓, 그림. 영상 등과 같은 모든 매체로 이루어진 텍스트를 뜻한다. 따라서 기호학은 담화를 통해 나타난 모든 의미 활동들의 조건들을 규명하는 것이다.
그럼 기호란 무엇인가? 기호란,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 사물(또는 사건)을 대신하거나 재현하는 그 무엇, 즉 사실이 아니라 가상이며 허구이다. 화폐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자신은 비어 있으면서 외부로부터 가치를 부여받는 존재이다. 그런데 인간은 의사소통에 필요한 메시지를 구성하기 위해 청각, 시각, 시청각, 후각의 기호들과 제스추어를 사용한다. 동물도 의사소통을 하지만 인간에게 있어서 의사소통은 거의 생존의 필수적인 조건이라 할수 있다. 다른 인간들과의 의사소통이 없는 인간은 아무리 생존에 필요한 공기와 음식을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한다 해도 그의 삶은 인간으로서의 삶이라고 할 수 없다.
메시지를 주고 받는 커뮤니케이션에서는 메시지의 송신자와 수신자가 있어야 한다. 송신자(emetteur)는 수신자(recepteur)에게 말, 그림, 글, 몸짓등을 통해 하나의 메시지를 보낸다. 이때 송신자가 보낸 메시지를 수신자가 이해하고, 이번에는 자기가 송신자가 되어 또 다른 형태의 메시지를 되돌려 보내면(feed-back) 그것이 바로 커뮤니케이션이다. 우리의 일상생활은, 아니 우리의 인생은 이런 관계의 끊임없는 교환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때 우리의 메시지를 보내는 수단이 바로 기호이다. 기호의 과학, 즉 기호학이 현대의 중요한 학문으로 떠오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의 상호 소통 관계는 주로 이미지나 소리의 관계에 근거해 있다. 따라서 메시지의 수단중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적 기호, 즉 말(parole)과 글(ecriture)이고, 두 번째로 중요한 것이 시청각적 요소와 도상적(圖像的) 기호(signes iconiques)이다. '아이콘적(도상적) 기호‘라는 용어는 글자가 아닌 모든 이미지 형태의 의사소통을 말한다. 기호학이 왜 주로 언어적이거나 시청각적, 혹은 아이콘적인가를 설명해주는 대목이다. 미국의 언어학자 퍼스(Charles Sanders Peirce, 1874-1914)는 언어 체계 이외의 모든 유사 재생산 체계를 ‘아이콘적’이라고 불렀다.
도상(icone), 지표(indice), 상징(symbole)
아이콘의 말이 나온 김에 퍼스의 세 가지 유형의 기호 분류에 대해서 좀 더 알아 보자. 도상 기호의 지배적 원리는 유사성이다. 즉 도상은 주로 유사성에 의해 그것의 대상을 표상한다. 퍼스 자신은 도상 기호의 예로 그림과 사진을 들었다. 이때 그림은 물론 추상화가 아니라 실물과 흡사하여 혼동을 줄 정도의 사실적 그림이다. 오늘날에 와서 도상의 전제 조건이 되는 유사성은 시각적인 것 뿐만이 아니라 청각적, 후각적인것등 광범위한 영역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를테면 바나나의 인공 향료는 바나나의 도상이 될 수 있다. 별개의 두 항목이 의미론적 공통성에 의하여 관계를 갖는다는 점에서 엘람(Elam)은 도상을 은유(隱喩)(metaphore)에 비교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연극 무대 위에 걸쳐 놓은 대형 녹색 천은 녹색이라는 공통적 특성에 의해 숲이라는 무대 배경을 대체해 준다. 이 경우 녹색 천은 은유적 대체를 이용한 도상적 기호가 되는 것이다. 야콥슨(Roman Jacobson)은 은유적 대체가 언어 표현뿐 아니라 모든 예술 활동의 기본이 된다고 말한 바 있다.
퍼스의 두 번째 기호 분류는 지표이다. 하나의 기호가 어떤 역동적 대상과 갖는 실재적 관계에 힘입어 부각될때 그 기호를 지표라고 한다. 고유명사가 가장 좋은 예이다. 병의 징후도 역시 지표이다. 화재를 알려주는 연기도 또한 지표이다. 벼락에 대한 청각적 시각적 기호인 천둥과 번개, 또는 호흡기 점막 염증에 대한 징후로서의 기침등이 지표이고, 모래 위나 눈 위에 남겨진 발작국과 같은것도 인간이나 동물이 지나갔음을 알리는 지표로서의 자연적 기호이다.
이처럼 지표는 지시 대상과 실재적 관계를 갖거나 인과관계를 가지는 기호를 폭넓게 지칭한다. 역시 엘람은 지표가 인과관계나 공간적 인접성에 의한 관계를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이것을 환유(換喩)(metonyme)와 비교했다. 환유의 예로 많이 이용되는, 미국 대통령을 지시하는 백악관이나, 영국 시민을 지시하는 우산, 실크 해트등이 다름 아닌 지표인 것이다. 연극이나 영화 속의 어떤 소도구가 그것을 항상 착용하고 사용하는 인물과 그의 행동을 지시하는 경우, 그것은 환유적 성격을 가진 지표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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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스의 세 번째로 기호 분류인 상징은 그것이 해독될 의미 안에서만 대상과 관여하는 기호이다. 이때 의미의 도구로서의 기호와 대상 사이에는 아무런 유사성이나 근접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상징의 가장 대표적인 예로서 퍼스는 언어를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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