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사람들은 일이 잘 풀리거나 잘 안 풀릴 때 ‘운이 좋았다’ 또는 ‘운이 나빴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그렇다면 한 나라의 흥망성쇠와 기업의 생(生)과 사(死), 개인의 실패와 좌절에 실제로 운(運)이 얼마나 작용하는 것일까? 물론 미국의 발명가 에디슨이 한 말(천재는 99%의 노력과 1%의 영감으로 이뤄진다)처럼 성공하기 위해서는 ‘노력’이 밑바탕이 돼야 한다는 점은 두말 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에디슨이 말한 노력 이외의 부족한 ‘1%’가 혹시 동양에서 말하는 운의 또 다른 해석은 아닐까. 「이코노미스트」는 기업과 개인, 나아가 경제에도 이런 운이 작용하고 있는지, 그렇다면 얼마나 영향을 미치는지 과거 사례를 통해 들여다봤다. <편집자>
전국시대(戰國時代) 말 한(韓)나라에 여불위(呂不韋)라는 장사꾼이 있었다. 그는 당시 문화의 중심지 중 하나였던 조(趙)나라의 한단을 중심으로 열국을 두루 다니면서 값이 쌀 때 물건을 사뒀다가 오를 때 되파는 ‘매점(買占)’의 방식으로 천금을 모았다.
여불위는 어느 날 한단에서 당시 조나라에 인질로 와 있던 진나라 왕자 자초(子楚)를 우연히 본 뒤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이것이야말로 기화(奇貨:좋은 물건을 사 두면 장차 큰 이득을 본다라는 뜻)로다. 사 두면 훗날 큰 이익을 얻게 될 것이다.’ 그 길로 여불위는 조나라에서 냉대를 받으며 황폐한 초가삼간에서 어렵게 살던 자초를 찾아갔다.
당시 진(秦)나라는 소양왕이 제위에 올라 있던 기간으로 태자였던 안국군에게는 20여명의 아들들이 있었지만 태자의 총애를 받고 있던 정비(正妃) 화양부인에게는 적자가 없었다.
이에 여불위는 자초를 화양부인의 적자로 만들어 장차 진나라 왕위에 올린다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을 했다. 처음에는 여불위의 계획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이던 자초도 ‘손해볼 것 없는 장사’라는 생각으로 ‘자신이 진나라의 왕위에 오른다면 진나라 국토의 절반을 주겠노라’고 여불위에게 약속한다.
이에 여불위는 자신이 모은 재산의 절반인 500금을 자초에게 줘 조나라 고위관리들을 매수하게 하고 자신은 나머지 절반인 500금을 가지고 진나라 화양부인에게 찾아가 환심을 산다. 그뒤 여불위는 널리 식객들을 불러모아 진나라에서 세력기반을 만들고 마침내 자초를 진나라 태자로 삼는 데 성공한다.
‘시운’(時運)을 읽어라결국 안국군은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죽고 그 뒤를 자초가 이어 장양왕이 되니, 여불위는 승상까지 올라 낙양 지방에 있는 10만호의 땅을 하사받게 된다. 게다가 여불위는 자초가 태자에 오르기 전 자기 자식을 회임한 조희라는 애첩까지 자초에게 양보했는데, 그가 바로 장양왕 자초가 재위 3년 만에 죽자 13살의 나이로 왕위를 이은 정(政)이었으며 전국시대를 끝내고 중국을 최초로 통일했던 진시황제(秦始皇帝)였다.(사마천 사기(史記) 중 여불위열전)
이처럼 여불위가 막대한 권력과 재산을 거머쥘 수 있었던 데는 범부(凡夫)와 다른 세가지 대목을 짚어 볼 수 있다.
우선 사람을 볼 줄 아는 ‘눈’이 있었고 자신의 전 재산을 과감히 베팅할 수 있는 ‘결단성’이 따랐다.
또 자신의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 위한 ‘치밀한 노력’도 빼놓을 수 없다. 결국 여불위는 식견과 결단성, 노력을 바탕으로 요즘으로 치면 엄청난 ‘대박’을 터트린 셈이다.
그러나 여불위가 대박으로 가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운(運)’도 작용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여불위가 자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전 재산을 쏟아 부었지만 자초가 태자가 되지 못했더라면’ ‘자초가 제위에 오른 뒤 신의를 지키지 않았더라면’ 등 인간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운의 영역이 은연중에 작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른바 ‘시운’(時運)이 따라야 한다는 얘기다.
멀리 중국의 예가 아니라도 이러한 시운이 따라야 했던 사례는 많다. 역대 정권을 놓고 보더라도 전두환 전 대통령은 여러 면에서 오점을 많이 남겼지만 경제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의 지도력에 향수를 느끼고 있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
이 같은 현상은 전두환 전 대통령의 능력도 있겠지만 1980년대 후반 따랐던 3저(저유가·저금리·원화가치 하락)의 영향도 컸다. 반대로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 외환위기로 인해 국민적인 지탄을 받으며 쓸쓸한 퇴임을 맞아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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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 ‘국민은행’이 탄생하는 과정에도 넘어야 했던 아슬아슬한 고비가 많았다. 지난 2000년 12월 김정태(왼쪽) 당시 주택은행장과 김상훈 국민은행장이 합병을 공식 발표한 뒤 악수를 나누고 있다. |
외환위기 이후 뼈를 깎는 구조조정 과정에서도 극적인 장면은 많이 연출됐다. 지난 2001년 거대 은행인 ‘국민은행’을 낳으며 금융권 구조조정의 신호탄을 쏘아올렸던 국민·주택은행의 합병 과정에도 긴박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는 합병을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OK사인’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주택은행이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기 때문에 국민은행과의 합병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SEC의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 까탈스러운 SEC가 이런 저런 이유로 트집을 잡아 승인 결정을 이미 한 차례 연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합병추진위원회의 초조함은 더욱 컸다.
마침내 2001년 9월10일(미국시각) 유효승인이 떨어졌다. 바로 다음날은 전 세계인을 경악으로 몰고 갔던 ‘9·11 테러’ 사건이 터진 날. 당시 김정태 행장은 “SEC 결재가 하루만 늦었어도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1년 정도 연기됐을 것”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시대 흐름을 잘 타야 한다대우차가 미국의 GM에 넘어가던 시점에도 ‘운’이 일부 작용했다. 대우차의 주 채권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은 미국 GM 측의 재무책임자(CFO)가 지나치게 깐깐한 탓에 매각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당시 산업은행 총재였던 정건용씨는 “하도 막막해 손을 놓고 있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러나 꼬인 협상의 실타래는 갑자기 GM의 CFO가 바뀌면서 뜻하지 않게 풀렸다. 릭 왜고너 GM 회장이 경영혁신을 선언하며 포드에서 이름을 날리던 존 디바인을 새 CFO로 전격 영입한 것. 결국 산은은 새로운 협상 파트너를 맞아 대우차 매각이란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반면 ‘시운’을 타지 못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기업도 적지 않다. 나름대로 철저한 시장조사와 분석을 통해 전략을 세웠지만 ‘부족한 1%’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도시바는 2001년 개인용 컴퓨터(PC) 부문의 수익성이 문제가 되자 생산지를 중국으로 옮기고 해외법인의 인력을 줄이는 등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대신 플래시메모리를 향후 성장 엔진으로 잡고 PC 부문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2년 전 세계 휴대폰시장이 불황을 맞으면서 도시바의 플래시메모리 사업도 어려움에 부딪쳤다.
이 과정에서 도시바의 캐시카우가 됐던 PC 사업은 이전의 시장 지배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수익성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도시바가 생산라인을 줄이고 인력을 감축하는 동안 유통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과감하게 신제품을 출시한 델이 도시바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한 것. 2002년 전 세계 휴대폰 경기가 활황만 보였더라도 도시바의 ‘핵심 축’ 이전 전략이 성공했을 수도 있었다.
또 도시바가 반도체 부문과 더불어 원천적인 캐시카우였던 PC 부문에서 과감한 신제품 개발과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양동 작전’을 썼더라면 운이 다소 따르지 않았더라도 파고를 헤쳐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TV 제조업체였던 소니 역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케이스. 지난 2001년 마쯔시다와 히다찌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브라운관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평면 디스플레이에 합작투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소니는 합작투자의 수익성을 거론하며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자적인 브라운관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2000년에 이를 도입한 베가TV에서 브라운관 크기를 38인치까지 늘리는 쾌거를 거뒀기 때문이다.
소니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술이 브라운관 기술을 따라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란 ‘착오’를 했던 것. 그러나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술의 문제로 지적됐던 광시야각·밝기·선명도 등의 문제를 빠르게 개선하면서 경쟁적으로 LCD TV와 PDP TV 신제품을 내놓자 소니의 경쟁력 우위는 빠르게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의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운 좋은 인재를 확보하는 전략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핵심인재 확보·양성전략’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도덕성·전문능력·변화주도 역량과 더불어 운이 따르는 인재를 확보·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은 준비된 자만의 ‘특권’이 보고서는 운과 요행을 구분지었다. 운이란 ‘평소의 노력과 이에 대한 입소문으로 주변의 신뢰를 얻고 이것이 필요한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내렸다.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기록표)를 수반하지 않은 요행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쓴 김은환 연구원은 “능력이 출중해도 인덕이 없는 인재는 장기적으로 조직의 부담이 된다”면서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평소 운이 좋다고 평가받는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운 좋은 인재 중용전략’은 CEO를 포함해 고위 임원을 뽑을 때나 조직의 생사를 좌우하는 승패를 결정할 때 적절하지만 신입 사원을 뽑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 연구원은 삼성의 예를 들면서 현재 삼성전자의 핵심 캐시카우가 되고 있는 반도체 사업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직전 신사업을 성공시킨 임원에게 요직을 맏겼다는 사실을 일례로 꼽았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이나 사업가들은 한결같이 운에만 치중하면 낭패를 본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격언이 있듯이 반드시 최선을 다한 이후 인간의 도리로 어쩔 수 없는 일만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또 기업이나 개인에게 온 운을 능력으로 ‘오인’해서는 큰일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성공의 필요조건으로 노력과 재능을 갖춰야 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이후 운이라는 요소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을 때 비로소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기업이나 개인 모두 겸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하며 언제 다가올지 모를 ‘운’에 대비하는 자세가 운을 바라보는 바람직한 가치관이 될 것이다.쏘아올렸던 국민·주택은행의 합병 과정에도 긴박했던 순간이 있었다. 당시 국민·주택은행 합병추진위원회는 합병을 위해 미국 증권거래위원회(SEC)의 ‘OK사인’을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주택은행이 미국 증권거래소에 상장돼 있기 때문에 국민은행과의 합병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SEC의 승인이 필요한 상황이었기 때문. 까탈스러운 SEC가 이런 저런 이유로 트집을 잡아 승인 결정을 이미 한 차례 연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합병추진위원회의 초조함은 더욱 컸다.
마침내 2001년 9월10일(미국시각) 유효승인이 떨어졌다. 바로 다음날은 전 세계인을 경악으로 몰고 갔던 ‘9·11 테러’ 사건이 터진 날. 당시 김정태 행장은 “SEC 결재가 하루만 늦었어도 국민·주택은행 합병은 1년 정도 연기됐을 것”이라며 놀란 가슴을 쓸어내려야 했다.
시대 흐름을 잘 타야 한다대우차가 미국의 GM에 넘어가던 시점에도 ‘운’이 일부 작용했다. 대우차의 주 채권은행이었던 산업은행은 미국 GM 측의 재무책임자(CFO)가 지나치게 깐깐한 탓에 매각협상의 돌파구를 찾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졌다.
당시 산업은행 총재였던 정건용씨는 “하도 막막해 손을 놓고 있었다”고 회고할 정도다. 그러나 꼬인 협상의 실타래는 갑자기 GM의 CFO가 바뀌면서 뜻하지 않게 풀렸다. 릭 왜고너 GM 회장이 경영혁신을 선언하며 포드에서 이름을 날리던 존 디바인을 새 CFO로 전격 영입한 것. 결국 산은은 새로운 협상 파트너를 맞아 대우차 매각이란 산을 넘을 수 있었다.
반면 ‘시운’을 타지 못해 내리막길을 걷게 된 기업도 적지 않다. 나름대로 철저한 시장조사와 분석을 통해 전략을 세웠지만 ‘부족한 1%’가 있었던 것이다. 일본 도시바는 2001년 개인용 컴퓨터(PC) 부문의 수익성이 문제가 되자 생산지를 중국으로 옮기고 해외법인의 인력을 줄이는 등 몸집 줄이기에 나섰다.
대신 플래시메모리를 향후 성장 엔진으로 잡고 PC 부문의 부진을 만회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이듬해인 2002년 전 세계 휴대폰시장이 불황을 맞으면서 도시바의 플래시메모리 사업도 어려움에 부딪쳤다.
이 과정에서 도시바의 캐시카우가 됐던 PC 사업은 이전의 시장 지배력을 상실했을 뿐만 아니라 수익성마저 악화되고 말았다. 도시바가 생산라인을 줄이고 인력을 감축하는 동안 유통력을 바탕으로 시장을 확대하고 과감하게 신제품을 출시한 델이 도시바의 시장을 빠르게 잠식한 것. 2002년 전 세계 휴대폰 경기가 활황만 보였더라도 도시바의 ‘핵심 축’ 이전 전략이 성공했을 수도 있었다.
또 도시바가 반도체 부문과 더불어 원천적인 캐시카우였던 PC 부문에서 과감한 신제품 개발과 공격적인 전략을 구사하는 ‘양동 작전’을 썼더라면 운이 다소 따르지 않았더라도 파고를 헤쳐 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TV 제조업체였던 소니 역시 시대의 흐름을 제대로 읽지 못한 케이스. 지난 2001년 마쯔시다와 히다찌를 비롯한 일본 기업들은 브라운관을 대체할 새로운 기술로 평면 디스플레이에 합작투자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소니는 합작투자의 수익성을 거론하며 이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당시 소니는 ‘트리니트론’이라는 독자적인 브라운관 기술을 가지고 있었으며 2000년에 이를 도입한 베가TV에서 브라운관 크기를 38인치까지 늘리는 쾌거를 거뒀기 때문이다.
소니는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술이 브라운관 기술을 따라오려면 꽤 시간이 걸릴 것이란 ‘착오’를 했던 것. 그러나 한국의 삼성전자와 LG전자가 디지털 디스플레이 기술의 문제로 지적됐던 광시야각·밝기·선명도 등의 문제를 빠르게 개선하면서 경쟁적으로 LCD TV와 PDP TV 신제품을 내놓자 소니의 경쟁력 우위는 빠르게 소진될 수밖에 없었다.
‘인사가 만사’라는 말이 있듯이 기업의 인재 등용에 있어서도 운 좋은 인재를 확보하는 전략이 중요하다는 지적이 제기되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는 ‘핵심인재 확보·양성전략’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도덕성·전문능력·변화주도 역량과 더불어 운이 따르는 인재를 확보·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운은 준비된 자만의 ‘특권’이 보고서는 운과 요행을 구분지었다. 운이란 ‘평소의 노력과 이에 대한 입소문으로 주변의 신뢰를 얻고 이것이 필요한 때 나타나는 것’이라고 정의내렸다. 트랙 레코드(Track Record, 기록표)를 수반하지 않은 요행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보고서를 쓴 김은환 연구원은 “능력이 출중해도 인덕이 없는 인재는 장기적으로 조직의 부담이 된다”면서 “주변에 사람이 모이고 평소 운이 좋다고 평가받는 인재를 확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운 좋은 인재 중용전략’은 CEO를 포함해 고위 임원을 뽑을 때나 조직의 생사를 좌우하는 승패를 결정할 때 적절하지만 신입 사원을 뽑을 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말한다. 김 연구원은 삼성의 예를 들면서 현재 삼성전자의 핵심 캐시카우가 되고 있는 반도체 사업에 처음 뛰어들었을 때 직전 신사업을 성공시킨 임원에게 요직을 맏겼다는 사실을 일례로 꼽았다.
그러나 성공한 기업이나 사업가들은 한결같이 운에만 치중하면 낭패를 본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이라는 격언이 있듯이 반드시 최선을 다한 이후 인간의 도리로 어쩔 수 없는 일만 하늘에 맡겨야 한다는 뜻이다.
또 기업이나 개인에게 온 운을 능력으로 ‘오인’해서는 큰일을 당할 수 있다고 지적한다. 성공의 필요조건으로 노력과 재능을 갖춰야 하며 이러한 조건이 충족된 이후 운이라는 요소와 절묘한 조화를 이뤘을 때 비로소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결국 기업이나 개인 모두 겸손한 태도로 최선을 다하며 언제 다가올지 모를 ‘운’에 대비하는 자세가 운을 바라보는 바람직한 가치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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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2005년 02월 08일 774호 / 2005.02.01 13:20 입력 / 2005.02.02 13:54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