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광야에서(출애굽기)
2024. 7. 28. 주일오전예배
벌써 7월의 마지막 주일이 되었습니다. 시간이 참 화살같이 빨리 지나가네요. 그렇지요? 시간을 값지게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주님 모시고 출애굽기 말씀을 중심으로 ‘오늘의 광야에서’라는 제목으로 다섯 가지만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하나님을 경외함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말이 요즘 교회들에서는 잘 들어보기 힘든 것 같아요. 교회 성장이나 영성 계발이나 선교 비전을 아는 데는 열심이지만 신앙의 기본이 되는 ‘하나님을 경외한다.’ ‘주님을 사모하고 그리워하고 기다린다.’ 이런 말은 듣기 어려운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출애굽기 1장에 보면 당시 애굽은요셉을 알지 못하는 왕이 들어선 시대가 되었습니다. 그 바로 왕은 히브리 민족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것을 나라의 위험 요인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국고성 비돔과 라암셋을 짓는데 히브리 사람들을 노예처럼 심하게 부려 먹었습니다. 처음에는 은밀히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를 불러다가 히브리 남자아이는 죽이라고 채찍과 당근으로 압력을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산파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바로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고 이스라엘 아기들이 잘 태어나도록 도왔습니다. 바로 왕이 그들을 불러서 왜 내 명령대로 하지 않았느냐고 물어보았을 때 지혜롭게 “내가 히브리 사람들의 해산을 도우려고 갔을 때 벌써 애기를 낳았더이다.”라고 대답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산파들에게 축복을 주셨습니다. 출애굽기 1장 21절에는 “산파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집을 왕성케 하신지라”는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물론 히브리 산파들은 축복을 받기 위해서 그 일을 한 것은 아니었지요. 자신들에게 이스라엘의 생사여탈권을 주었으니 특권인 줄로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그들은 그렇지 않고 겸손하게 주의 백성을 살려주었습니다. 어찌 보면 목숨을 걸고 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애굽에서 벌어진 일이었지만 애굽은 세상이고 세상은 언제든지 광야로 돌변합니다. ‘내가 왜 이 시대에 산파로 태어났을꼬’ 그들은 그런 원망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사람답게 ‘주님이 이때를 위해서 우리를 산파로 부르셨구나’ 생각하며 주님이 주신 영광의 기회로 삼았습니다.
이 세상은 참 쉽게 돌변합니다. 우리가 몇 년 전에 체험하지 않았습니까? 자유 민주주의 이 대한민국에 코로나19라는 팬데믹이 밀려올 때는 교회도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자유를 빼앗기고 수련회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예배 시간까지 통제받는 전체주의 시대가 갑자기 되어버렸지 않았습니까. 지금 의료계에서는 전공의 이천 명 증원에 대해 말들이 많지만 ‘성동격서’란 말이 생각나요. 어리석게도 진정한 것을 놓치고 있어요. 세계보건기구(WHO)에서는 지금 각 나라에 요구하고 있습니다. 또 다시 전염병 시대가 오면 의료주권과 초헌법적인 역할을 자신들에게 맡겨서 거주이전 주권까지 다 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종말에 나타날 세계단일정부의 한 단면이고 획책이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정부 요직과 이 나라 구석구석에 있어서 주님을 두려워하면서 이 나라를 바르게 이끌어 갔으면 참 좋겠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담대함과 지혜로 이 나라를 이끌어 갔으면 좋겠습니다. 코로나19 팬데믹 때 천국 가신 우리 목사님께서는 시청을 세 번이나 찾아가셔서 전투하듯이 우리의 예배 시간을 확보하셨습니다. “교회를 방문하는 것, 조사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지만, 예배 전에 오든지 후에 오든지 해서 예배 시간을 방해하지 마시오.” 얼마나 목사님께서 강력하게 선포하셨던지 그들이 우리 교회에 방문하는 것을 두려워했답니다. 하나님을 경외함! 너무나 소중합니다.
둘째, 성도의 정체성
하나님은 출애굽할 때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모세를 부르셨습니다. 그 나이 팔십 세 때,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노년에 하나님이 모세를 부르셨어요. 그의 경력은 화려합니다. 사십 년 동안 바로의 공주의 아들로 자랐기 때문에 왕궁에서 높은 지식과 많은 지식을 습득했을 거예요. 요즘 스팩으로 말하면 하버드 대학이나 옥스퍼드 대학, 서울 대학교를 나왔다고 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그것이 무슨 상관입니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했어요. 모세는 미디안 광야에 피해서 사십 년간 광야 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광야에 있었던 노년의 모세에게 하나님의 권능을 보여주십니다. “네가 잡은 지팡이를 땅에 던지라” 모세가 지팡이를 던지자 뱀이 되었습니다. 주인을 몰라보고 주인에게 달려드는 독사 말입니다. 그런데 뱀의 꼬리를 잡았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세와 우리 자신을 설명한 것입니다. 주인 되시는 예수님의 손을 떠나면 우리는 언제든지 독사의 새끼들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 사로잡히는 것이 성도의 정체성입니다. 떠나면 뱀이 된다는 사실을 잊지 마세요. 또 다른 모습으로 주님은 교훈하십니다. “모세야, 네 손을 너의 품에 넣으라” 모세가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그 손은 하얗게 문둥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네 손을 다시 품에 넣으라” 하셔서 모세가 다시 손을 품에 넣었다가 내어보니 어린아이 살결같이 깨끗해졌습니다. 첫 번째 사람 아담, 그 아담의 족속은 옛사람이며 다 문둥이입니다. 그러나 둘째 아담이면서 마지막 아담 되신 예수님께 속한다면, 거듭나서 새롭게 예수님께 속했기에 그 사람은 새사람입니다. 아담의 족속, 첫째 사람에 속한 옛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습니다. 옛사람은 십자가에 못을 박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생명을 힘입어서 새사람이 될 때 우리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습니다.
셋째, 성도의 승리 비결
므리바 광야, 맛사라고도 하지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좀 피곤할 때 뒤로부터 접근해서 쳐들어온 족속이 아말렉이었습니다.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그 중동 지방에 당시 가장 호전적인 족속이 아말렉 족속이었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전쟁을 치러본 경험도 없어요. 그런데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군대를 이끌고 싸우라고 합니다. 그리고 모세 본인은 높은 산에 올라가서 두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이 이기고 피곤해서 손을 내리면 이스라엘이 지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이 이기기 위해서는 노구의 몸에도 불구하고 두 손을 들어야 했습니다. 모세의 팔이 피곤해서 내려가기를 반복할 때 같이 산에 올랐던 아론과 훌이 모세를 바위에 앉게 하고 양손을 떠받들므로 해가 질 때까지 손을 내리지 않아서 이스라엘이 결국 아말렉을 진멸할 수 있었습니다. 손을 늘어뜨리면 안 됩니다. 우리 몸 된 교회가 식구님들의 가족들이 세상에 지지 않고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은 두 손을 높이 들고 주님을 추구하며 보좌의 은총을 받을 때입니다. 어떤 전략, 전술이 문제가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 속에 살아 있는 기도, 능력 있는 기도가 힘이 있는 것입니다. 두 손을 늘어뜨리지 맙시다.
넷째, 레위 지파
모세가 호렙산, 달리 말하면 시내산에서 하나님의 계명, 십계명을 받고 내려왔는데 산 아래서 그 사십 일 동안을 못 기다리고 이스라엘 백성은 금송아지를 만들고 먹고 마시며 뛰노는 난장판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모세는 그 십계명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산 아래로 내리치듯 던지면서 깨뜨려 버렸습니다. 도무지 하나님의 거룩한 계명을 받을 수 없는 이 패역함에 분노했습니다. 하나님도 모세가 했던 행동을 책망하지 않았어요. 하나님의 마음도 그랬으니까요. 그때 모세는 외쳤습니다. “누구든지 여호와의 편에 있는 자는 내게로 나아오라” 그때 레위 족속이 나아왔습니다.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라”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죽이라 했습니다. 이스라엘 진의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면서 살육이 벌어졌습니다. 주님이 그만하라고 할 때 헤아려보니 삼천 명가량이 죽었습니다. 출애굽기 32장 29절에는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으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거룩하시므로 주의 백성도 거룩해야 할 줄 압니다. 거룩은 분리가 먼저 되어야 합니다. 레위 지파의 수장인 대제사장 아론이 백성을 방자하게 만든 주동자였습니다. 부끄러운 일이지요. 백성이 우리를 위해 신상을 만들라 할 때 목숨을 걸고 “그런 패역한 일을 하지 마라! 어떻게 너희들이 지도자가 지금 산에서 주의 말씀을 받고 있는데 그것도 못 기다리고 떠들고 있느냐”고 책망했어야 합니다.
말라기 2장 5절에 보면 “레위와 세운 나의 언약은 생명과 평강의 언약이라”했습니다. 십계명을 내던진 모세의 마음은 거친 마음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의 생명과 평강이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오히려 자식들을 나무랄 때 평안이 있을 때가 있어요. 결혼을 앞둔 우리 소청년들에게 말씀드립니다. 여러분들이 교제하는 친구가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면 “당신이 정말 나를 사랑한다면 이제 주님을 믿고 함께 교회를 갑시다. 그렇지 않다면 헤어집시다.” 인정에 끌리지 말고요, 단호한 마음이 있어야 될 줄 압니다. 갈라디아서 5장 24절에 그렇게 사도 바울 선생님은 말씀을 전했습니다.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대표적으로 레위 지파를 말씀한 것이지 모든 열두 지파, 모든 주님의 몸 된 교회 성도들이 주님이 세운 이 생명과 평강을 따라 삶을 꾸려갔으면 좋겠습니다.
마지막 다섯째, 주 없이 살 수 없네
출애굽기 33장에 보면 주님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 앞서 사자를 보내어서 가나안 땅에 있는 족속들을 물리치게 해주마. 너희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이르게 하려니와 나는 너희와 함께 올라가지 아니하리니 너희는 목이 곧은 백성인즉 내가 중로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함이니라” 자기 조상들에게 약속했던 꿈의 땅, 가나안에 가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함께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중보기도를 합니다. ‘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우리 민족이 목이 곧은 백성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이제 정신 차리고 있으니 주님! 용서해주십시오. 아니면 생명책에서 제 이름을 지우시더라도 이 백성을 용서해주십시오.’ 모세는 주님께 고했습니다. “주께서 친히 가지 아니하시려거든 우리를 이곳에서 올려보내지 마옵소서” 주님 없이는 가나안에 가지 않겠습니다. 할렐루야! 주님 없이도 가나안에 가자 하는 자들은 주의 백성이 아니지요. 주님이 함께하시고 주님 모시고 가나안에 가고자 하는 모세의 이 말에 주님이 감동하셔서 “그래 내가 너희와 함께하겠고 친히 동행하리라” 말씀해주셨습니다. 아멘!
통일 지상주의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주님 없는 통일, 주의 백성 없는 통일, 아무 의미 없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님! 이 노래 한 번 함께 부르고 오늘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우리의 소원은 주님, 꿈에도 소원은 주님, 이 정성 다해서 주님, 주님이여 오셔요. 이 겨레 살리는 주님, 이 나라 살리는 주님, 주님이여! 오셔요. 주님이여! 오셔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