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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터백성호
㉜ 예수,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멈추다
밤이 되자 예수와 제자들은 ‘최후의 만찬’을 나눈 집에서 빠져나왔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에서 벗어나 동쪽의 올리브산으로 갔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걸어서 불과 20여 분 거리다.
공기는 차갑고 사방은 어두웠으리라. 유다는 ‘예수의 죽음’을 재촉하기 위해 만찬 도중에 나가버렸다. 올리브산의 어귀쯤이었을까. 예수 일행은 산의 아래쪽에 도착했다.
이스라엘의 예루살렘 구시가지에서 새벽에 동이 트고 있다. 근처 마을에서 실제 닭울음 소리가 지금도 새벽마다 들렸다. 백성호 기자
예수는 제자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6장 31절)
구약성경의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 떼가 흩어지리라”라는 대목을 인용하며 예수는 제자들이 돌아서리라는 것을 내다봤다. 베드로는 발끈했다. 그는 “모두 스승님에게서 떨어져 나갈지라도 저는 결코 떨어져 나가지 않을 것입니다”라며 ‘오직 예수’를 피력했다. ‘세상 모두가 변해도 나만은 변하지 않으리라.’ 베드로의 심정은 그러했다. 예수 앞에서 그렇게 맹세했다.
그렇지만 예수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밤 닭이 울기 전에 너는 세 번이나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마태오 복음서 26장 34절)
그 말을 들은 베드로는 펄쩍 뛰었다.
스승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스승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있던 주위의 다른 제자들도 모두 그렇게 말했다.
예루살렘성을 나와 올리브산으로 갔다. 예수와 제자들이 밤을 틈타 밟았을 땅. 그 땅을 나도 밟았다. 당시 예수 일행은 쫓기고 있었을 것이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예수는 알고 있었으리라.
올리브산에서 내려다본 예루살렘 성전. 성전 건너편에 있는 야트막한 산이 올리브산이다. 그러니 성전에서 올리브산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백성호 기자
올리브산을 올라가다 멈춰 서서 골목의 담벼락에 기대 섰다. 그다지 높지 않은 산, 예수가 ‘베드로의 부인과 세 번의 닭 울음’을 예언한 곳은 겟세마니에 도착하기 전이었다. 그러니 이 담벼락에서 멀지 않은 장소였을 것이다. 나는 서서 예수의 어록을 묵상했다.
“오늘 밤에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예수는 나무다. 올리브산 곳곳에 서 있는 올리브나무다. 그러면 제자들은 뭘까. 또 우리는 뭘까. 그 나무에 붙어 있는 올리브 잎이다. 그런데 나무가 말했다.
“너희는 모두 나에게서 떨어져 나갈 것이다.”
청천벽력 같은 말이다. 나무가 없으면 잎은 죽고 만다. 잎은 나무에서 떨어져 살 수 없다. 그런데도 예수는 말했다. 닭이 울기 전에 너희는 세 번이나 나무를 부인할 것이라고. 그것도 자진해서 말이다.
예수와 제자 일행은 산을 더 올라가 이윽고 겟세마니에 도착했다. 올리브유를 짜는 방앗간이다. 주위에는 공동묘지가 있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오랜 세월 내려오는 유대인의 묘지가 곳곳에 있다.
올리브산의 겟세마니 동산에 있는 올리브나무. 예수 당시에 있던 올리브나무의 씨가 떨어져 다시 자라고 있다고 한다. 나무의 밑둥이 무척 굵다. 세월의 흐름을 말해 준다. 백성호 기자
겟세마니에 도착한 예수는 갈림길에 있었다. 삶이냐, 아니면 죽음이냐. 그 갈림길에서 예수는 고뇌했다. 도망치고자 마음을 먹었다면 겟세마니에서 걸음을 멈출 이유가 없었다. 곧장 올리브산을 넘어 광야가 있는 사해 쪽을 향해 멀리 길을 떠나야 했다.
그런데 예수는 여기서 멈추었다.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그는 걸음을 멈추었다. 왜 그랬을까.
짧은 생각
헬렌 켈러는
미국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날 때는
장애인이 아니었습니다.
생후 19개월 때 앓은
뇌척수막염 때문에
시력과 청력을 잃었습니다.
덩달아
언어 장애도 안게 됐습니다.
헬렌 켈러가 태어난 게
1880년이었으니,
당시에는
장애 아동에 대한 교육법이
제대로
마련돼 있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앤 설리번을
선생으로 맞아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헬렌 켈러가
남긴 말 중에
저의 가슴을 때렸던
한 토막이 있습니다.
“사흘만
세상을 볼 수 있다면
첫째 날은
사랑하는 이의 얼굴을 보겠다.
둘째 날은
밤이 아침으로 변하는
기적을 보리라.
셋째 날은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를 보고 싶다.
단언컨대,
본다는 것은
가장 큰 축복이다.”
이 글을
몇 번이나 읽으며
저는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가장 평범한 하루 속에
가장 큰 기적과
가장 큰 축복이
이미
담겨 있구나.
우리가
매일 보는 사람의 얼굴,
우리가
저녁마다 만나는 밤,
그럼 밤을 보내고
만나는 아침.
그 속에 깃든
신비와 기적을
우리는
얼마나 음미하며
살고 있는 걸까요.
눈이 먼
헬렌 켈러가
세상을,
그것도
딱 사흘만 볼 수 있다면
보고 싶었던 광경을
우리는
매일 보면서도
너무도 무덤덤하게
흘려보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그렇게
세상과 우주의
놀라운
신비와 기적에 대해
습관적 불감증을
앓고 있는 건 아닐까요.
사람들이 오가는
평범한 거리 속에 깃든
저토록 절절한 축복을
우리는 모른 채
살고 있는 건 아닐까요.
어쩌면
삶과 사람과 우주에 대해
정말
눈이 멀어 있는 사람은
헬렌 켈러가 아니라
우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왜
그럴까요.
그 엄청난
신비와 기적과 축복의
광경 앞에서
우리는
습관적으로
마음의 눈을 감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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