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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코스 지선3코스 해미읍성~개심사~고풍저수지~운산교 17.8k, 6.5h)
충남 서산시의 교량[橋梁]중 운산교는?
충청남도 서산시에 있는 지형지물의 위로 건널 수 있도록 만든 인공 구조물.
개설
2009년 12월 현재 서산시의 교량은 총 143개소이고, 교량의 총연장은 9,003m이다. 서해안고속국도 상의 교량은 총 44개소이고, 교량의 총연장은 4,370m로 서산시 전체 교량 총연장의 48.5%에 해당한다. 국도상의 교량은 국도 29호선, 국도 32호선, 국도 38호선, 국도 45호선 등 4개 노선으로 교량은 모두 48개소에 총연장 2,370.9m로 서산시 교량 총연장의 26.3%에 해당한다. 지방도는 31개소에 총연장 1,455.9m[국가 지원 지방도 8개소, 총연장 588.8m, 일반 지방도 23개소에 총연장 867.1m]로 서산시 교량 총연장의 16.2%에 해당한다. 시도는 20개소에 총연장 806.2m에 이른다.
변천
서산시 교량 중 제일 오래된 교량은 1965년 준공된 서산시 운산면 용장리의 미평교와 성연면 평리의 평리교이다. 이어 1968년에 서산시 성연면 평리의 신량교와 성연면 명천리의 마명교가, 1969년에 성연면 명천리의 명천교, 오사리의 사교, 운산면 신창리의 신창교가, 1971년에 해미면 삼송리의 삼송교와 부석면 가사리의 가사교가 각각 준공되었다.
현황
서산시의 교량은 크게 서해안고속국도, 국도, 지방도 상의 교량으로 나눌 수 있다.
1. 서해안고속국도
고속국도 15호선인 서해안고속국도 상에는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의 해미천교 상·하행선[500m], 고북면 신송리의 신송교 상·하행선[330m], 문주1교 상행선[390m]과 하행선[420m], 고북면 장요리의 장요교 상·하행선[270m], 운산면 신창리 신창교 상·하행선[240m], 해미면 황락리 황락천교[240m] 등 44개의 교량이 있다. 총연장은 4,370m로 서산시 교량 총연장의 49.1%에 해당한다. 이중 서산시의 대표적인 교량은 해미천교이며 해미IC 2㎞ 전방에 위치한다. 해미천교 동쪽으로는 남연군 묘와 수덕사가 있는 덕승산이 한눈에 보이고, 서쪽에는 서산 해미읍성이 있다. 해미천교 아래로는 서산 시내와 서산공군비행장에 진입하는 입구에 국도 45호선이 통과하고 있다.
2. 국도
서산시를 통과하는 국도는 국도 29호선, 국도 32호선, 국도 38호선, 국도 45호선 등 4개 노선으로 교량은 모두 46개소에 총연장 2280.6m이다. 교량이 제일 많은 노선은 서산시 해미면에서 서산 시내를 경유하여 대산읍이 종점인 국도 29호선으로 총 21개의 교량이 있다. 국도 29호선에서 가장 긴 교량은 서산시 해미면 전천리에 있는 해미2교로 101.6m이고, 다음으로 억대리의 억대교 상·하행선 90.1m, 반양리의 반양교 45m 등의 순이다. 가장 짧은 교량은 서산시 고북면 소정리의 용암교로 8.0m이다.
서산시 운산면에서 서산IC, 서산 시내 남부 외곽을 통과하여 팔봉면, 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 만리포해수욕장 방향으로 이어지는 국도 32호선에는 총 15개의 교량이 있다. 국도 32호선의 대표적인 교량은 성암대교이다. 국도 45호선에는 총 8개의 교량이 있으며 대표적인 교량으로는 산수저수지를 우회하여 한서대학교와 예산 방향을 연결하는 서산시 해미면 산수리에 있는 산수1교[255m]이다. 국도 38호선에는 총 2개의 교량이 있다.
한편 서산 지역에 소재하는 교량 중 가장 긴 교량은 성암저수지의 북서쪽을 횡단하는 국도 32호선[충청남도 태안군 소원면~대전광역시 중구] 상의 서산시 음암면 부장리에 소재한 성암대교로 550.3m이며, 두 번째로는 해미면 산수리를 통과하는 서해안고속국도 상의 해미천교로 500m이다.
다음으로 서해안고속국도 상의 서산시 고북면 신송리를 통과하는 문주교[330m], 국가 지원 지방도 상의 고북면 장요리 장요교[270m], 국도상의 해미면 산수리 산수1교[255m], 지방도상의 운산면 고풍리 고풍대교[250m], 서해안고속국도 상의 운산면 신창리 신창교[240m], 해미면 황락리 황락천교 등의 순이다.
3. 지방도
지방도는 국가 지원 지방도와 일반 지방도로 나뉜다. 서산을 통과하는 국가 지원 지방도 70호선에는 교량 8개소가 있으며, 총연장 588.8m이다. 국가 지원 지방도 70호선에서 가장 긴 교량은 서산시 지곡면 무장리에 있는 무장교로 270m이고, 다음으로 운산면 용장리의 운산교[91.3m], 지곡면 화천리의 지곡IC교[80m] 등의 순이다.
서산시의 일반 지방도는 지방도 609호선, 지방도 618호선, 지방도 634호선, 지방도 647호선, 지방도 649호선 등 5개 노선으로 교량은 모두 23개소에 총연장 867.1m이다. 교량이 제일 많은 노선은 충청남도 홍성군에서 내포 신도시를 경유하여 서산시 운산면이 종점인 지방도 609호선으로 총 5개의 교량이 있다. 일반 지방도에서 가장 긴 교량은 지방도 618호선 상의 서산시 운산면 고풍리에 있는 고풍대교 250m이고, 다음으로 운산면 용장리의 운산교[50m], 성연면 평리의 평리교[48m] 등의 순이다. 가장 짧은 교량은 서산시 인지면 애정리의 애정교로 6.0m이다.
참고문헌
『통계연보』(서산시, 2010)
『도로 교량 및 터널현황조서』(국토해양부, 2010)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운산리 토끼섬 조개더미[雲山里-貝塚]
충청남도 서산시 대산읍 운산2리에 있는 청동기 시대 조개더미.
위치
서산시 대산읍에서 동쪽으로 운산리로 향하는 도로를 따라 약 5㎞ 정도 가면 운산리 갈마리마을이 나오며, 갈마리마을을 지나면 전백마을에 이른다. 운산리 토끼섬 조개더미 유적이 자리한 토끼섬은 서산시 대산읍 운산리 전백마을의 북쪽 해안에서 300m 정도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조개더미 유적은 육지와 마주하는 토끼섬의 남쪽 해안가 사면의 하단부에 이루어져 있다.
형태
대체로 해안선을 따라 10여 m의 폭으로 50m 정도에 걸쳐 이루어져 있는데, 1m 이상 두텁게 형성되어 있다. 조개더미 유적은 굴 껍질이 대부분이며, 오랜 기간 퇴적 상태로 남아 있어 풍화가 심화되었다.
현황
2011년 현재 유물이 수습된 토끼섬은 간척에 의해 육지와 연결되어 육지화되어 있다. 주민의 전언에 따르면 조개더미가 자리한 곳으로 추정되는 지점에서 적색의 연질 토기편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적색의 연질 토기편이 수습되었다고 하나, 실물을 확인할 수 없어 정확한 시기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또한 조개더미 및 유물이 폐기되었던 시점은 과거 육지와 격리된 섬으로 유물이 전하지 않아 정확하지 않으나, 유적의 흔적으로 청동기 시대 토끼섬에 인간이 생활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주변 지역의 수습 유물 등을 고려할 때 신석기 시대 혹은 청동기 시대 유적이 존재할 가능성이 높다. 운산리 토끼섬 조개더미는 당시 서산 지역 신석기인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서산시지』(서산시지편찬위원회, 1998)
『충남지역의 문화유적』13-서산시편(백제문화개발연구원, 2001)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고풍저수지[高豊貯水池]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고풍리에 있는 농업 관개용 1종 저수지.
건립 경위
고풍저수지는 1967년 4월 5일 착공하여 1975년 12월 31일 준공되었다.
변천
2009년 가로 8m, 세로 7m 규모의 게이트[Radial Gate] 2련을 설치하는 재보수 공사를 통해 방류량이 288.9㎥/s에서 498.7㎥/s로 두 배 증가하였으며 2010년 8월 서산 지역 집중 호우에 큰 효과를 발휘하였다.
구성
제당 형식은 균일형 필댐(fill dam)이며 취수 형식은 취수탑형이다. 2011년 기준으로 구역 면적은 1,476㏊이고 제방의 높이는 33m, 제방의 길이는 227m이다. 총 저수량은 836만 톤이며, 유효 저수량은 782만 1800톤, 사수량(死水量)은 53만 8200톤이다. 유역 면적은 2,590㏊이고, 홍수 면적 63.28㏊, 만수 면적 62.35㏊, 수혜 면적은 1,293.8㏊이다. 가뭄 빈도는 10년이며, 홍수 빈도는 100년이다. 서산 지역에 있는 저수지 중에서 면적과 저수량이 가장 크다.
현황
백제의 미소로 불리는 국보 제84호인 서산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1㎞ 거리에 위치하고 있고, 근처에 가야산 용현계곡의 서산 보원사지와 삼림욕장이 있어 서산의 대표적인 관광지와 인접한 저수지이다. 현재 한국농어촌공사 서산·태안지사에서 관리하고 있고 운산면사무소로부터 3㎞ 거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지방도 618호선이 인접하여 통과하고 있다.
참고문헌
농업기반시설관리(http://rims.ekr.or.kr/)
농어촌진흥공사(http://www.ekr.or.kr/)
촌용수종합정보시스템(http://rawris.ekr.or.kr/)
인터뷰(한국농어촌공사 서산·태안지사 한영구 과장, 2011. 7. 10)
출처:(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서산 용현리마애여래 삼존상[瑞山龍賢里磨崖如來三尊像]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마애불. 국보.
개설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높이 2.8m. 서산시 운산면은 중국의 불교 문화가 태안반도를 거쳐 부여로 가던 행로상에 있다. 즉 태안반도에서 서산마애불이 있는 가야산 계곡을 따라 계속 전진하면 부여로 가는 지름길이 이어지는데, 이 길은 예로부터 중국과 교통하던 길이었다. 이 옛길의 어귀가 되는 지점에 용현리 마애여래삼존상이 있는데, 이곳은 산세가 유수하고 천하의 경승지여서 600년 당시 중국 불교 문화의 자극을 받아 찬란한 불교 문화를 꽃피웠던 것이다.
내용
묵중하고 중후한 체구의 입상인 본존(本尊)은 머리에는 보주형(寶珠形) 두광(頭光)이 있으며, 소발(素髮)의 머리에 육계(肉髻)는 작다. 살이 많이 오른 얼굴에는 미소가 있고 눈은 행인형(杏仁形)으로 뜨고 있다. 목에는 삼도(三道)가 없고 법의(法衣)는 두꺼워서 거의 몸이 나타나 있지 않다. 옷주름은 앞에서 U자형이 되고 옷자락에는 Ω형의 주름이 나 있다. 수인(手印)은 시무외(施無畏)·여원인(與願印)으로 왼손의 끝 두 손가락을 꼬부리고 있다. 발밑에는 큼직한 복련연화좌(覆蓮蓮華座)가 있고, 광배 중심에는 연꽃이, 둘레에는 화염문이 양각되었다. 이에 대하여 우협시보살(右脇侍菩薩)은 머리에 높은 관을 쓰고 상호(相好)는 본존과 같이 살이 올라 있으며, 눈과 입을 통하여 만면에 미소를 풍기고 있다. 목에는 짧은 목걸이가 있고 두 손은 가슴 앞에서 보주(寶珠)를 잡고 있다. 천의는 두 팔을 거쳐 앞에서 U자형으로 늘어졌으나 교차되지는 않았다. 상체는 나형(裸形)이고 하체의 법의는 발등까지 내려와 있다. 발밑에는 복련연화좌가 있다. 머리 뒤에는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중심에 연꽃이 있을 뿐 화염문은 없다.
좌협시보살은 통식(通式)에서 벗어나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을 배치하였다. 이 보살상은 두 팔에 크게 손상을 입었으나 전체의 형태는 충분히 볼 수 있다. 머리에는 관을 썼고 상호는 다른 상들과 같이 원만형(圓滿形)으로 만면에 미소를 띠고 있다. 상체는 나형이고 목에는 짧은 목걸이를 걸쳤다. 허리 밑으로 내려온 옷자락에는 고식의 옷주름이 나 있다. 발밑에는 큰 꽃잎으로 나타낸 복련대좌(覆蓮臺座)가 있다. 머리 뒤에는 큰 보주형 광배가 있는데, 그 형식은 우협시보살의 광배 형식과 같다.
의의와 평가
이 삼존상은 『법화경』의 수기삼존불(授記三尊佛), 즉 석가불·미륵보살·제화갈라보살을 나타낸 것이다. 『법화경』 사상이 백제 사회에 유행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가장 중요한 사료이다. 따라서 이 불상은 백제 불교사 내지 사상사 연구에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또한 조선시대 사찰에 건립된 응진전(應眞殿) 수기삼존불의 가장 오래된 원조로서의 의의가 있다.
참고문헌
『문화재대관』국보 1(한국문화재보호협회, 대학당, 1986)
『국보』2 금동불·마애불(황수영 편, 예경산업사, 1984)
『한국조각사』(문명대, 열화당, 1980)
「서산백제마애삼존불상」(황수영, 『진단학보』 20, 진단학회, 1959)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산보원사지[瑞山普願寺址]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사찰터. 사적.
내용
지정면적 102,886㎡. 1987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상왕산(象王山, 307.1m) 서남쪽 계곡의 보원마을에 있었으나, 1970년대 일대의 대대적 목장경영으로 인하여 마을주민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고 현재는 절터만 남아 있다. 절터에는 10세기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보물, 1963년 지정)를 비롯하여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당간지주·오층석탑·법인국사보승탑·법인국사보승탑비 등의 유물과 초석이 남아 있다. 특히 1968년 절터에서 백제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9.5㎝)과 통일신라시대의 금동여래입상(높이 7.5㎝)이 발견되었다. →보원사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개심사[開心寺]
충청남도 서산시 운산면 상왕산(象王山)에 있는 삼국시대 백제의 승려 혜감이 창건한 사찰.
개설
대한불교조계종 제7교구 본사인 수덕사(修德寺)의 말사이다.
역사적 변천
654년(의자왕 14) 혜감(慧鑑)이 창건하여 개원사(開元寺)라 하였다. 1350년(충숙왕 2)처능(處能)이 중창하고 개심사라 하였으며, 1475년(성종 6)에 중창하였다. 그 뒤 1740년(영조 16) 중수를 거쳐 1955년 전면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내용
현존하는 당우로는 1963년 보물로 지정된 대웅전을 비롯하여 1984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명부전, 1997년 충청남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심검당, 무량수각(無量壽閣)·안양루(安養樓)·팔상전(八相殿)·객실·요사채 등이 있다. 가람배치는 북쪽의 대웅전을 중심으로 좌우에 심검당과 무량수각의 당우를 놓고 그 전방에 누각건물을 배치하고 있어, 조선 초기의 배치법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그리고 명부전과 팔상전 등은 대웅전과 안양루를 잇는 남북 자오선(子午線)의 주축이 되는 일반적 가람배치형식에서 벗어나 있다. 건축양식은 다포계(多包系)·주심포계(柱心包系)·익공계(翼工系)의 형식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
당우 가운데 대웅전은 1484년(성종 15)에 건립한 건물이며, 내부에는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지장보살을 봉안하고 있다. 심검당은 그 남쪽으로 ㄴ자형의 다른 요사와 함께 연결되어 있고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이며, 주심포계양식의 건물로서 그 형태가 단아하다. 정면 6칸, 측면 3칸의 무량수각은 자연석 초석 위에 원주의 기둥을 사용하였고, 포작(包作)은 익공계이며, 처마는 겹처마에 팔작지붕이다. 안양루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이며, 내부의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연등천장이다.
명부전은 무량수각 동편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맞배지붕으로 측면에 풍판(風板: 비바람을 막기 위해 연이어 대는 널빤지)이 있는 조선 초기의 건물이다. 명부전 내부에는 철불지장보살좌상과 시왕상(十王像)이 봉안되어 있는데, 기도의 영험이 신통하다 하여 참배객들이 끊이지 않고 있다. 팔상전은 명부전 북쪽에 위치하며 정면 3칸, 측면 3칸의 주심포 건물로 문수보살상을 봉안하고 있다. 이 밖의 문화재로는 대웅전 앞의 오층석탑과 청동 향로가 있다. 이 절에서 개판된 장경으로는 1580년(선조 13) 개판된 『도가논변모자리혹론(道家論辨牟子理惑論)』과 1584년에 개판된 『몽산화상육도보설(蒙山和尙六道普說)』·『법화경』 등이 있다.
참고문헌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권상로, 동국대학교출판부, 1979)
『한국고인쇄기술사(韓國古印刷技術史)』(김두종, 탐구당, 1974)
「사찰(寺刹) 개심사(開心寺)에 관한 연구(硏究)」(이혜숙, 이화여자대학교대학원석사학위논문, 1980)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서산 해미읍성[瑞山海美邑城]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에 있는 조선전기 에 축조된 석축 성곽. 읍성. 사적.
내용
해미는 1414년(태종 14)에 충청병마절도사영이 덕산(德山)에서 이곳으로 옮겨진 뒤 1651년(효종 2)에 청주로 이전할 때까지 군사전략상 중심지였다. 읍성은 1491년(성종 22)에 축조되었으며, 영장(營將)이 머물면서 서해안 방어를 맡았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당시 절도사영이 해미현의 동쪽 3리에 자리하였는데,돌로 쌓은 성으로 둘레는 3,172척이고, 높이는 15척이며, 우물 3곳과 군창(軍倉)이 설비되어 있다고 기록되었다.『해미읍지(海美邑誌)』에는 성벽의 둘레가 6,630척이고, 높이가 13척이며, 성벽을 돌출시켜 쌓은 치성(雉城)이 380첩(堞)이며, 적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서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이 2곳이라고 하였다. 또한 남문은 3칸인데 무지개 모양의 문인 홍예(虹霓)와 2층의 다락을 두었다고 하였고, 동문과 서문은 3칸이지만 북문은 없다고 하였으며, 우물이 6곳으로 성 밖에는 호(壕)가 없다고 하였다. 이러한 기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설치된 충청병마절도사영과 해미읍성은 별개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순신(李舜臣)이 1579년(선조 12)에 충청병마절도사영에서 훈련원봉사(訓鍊院奉事)로 근무한 적이 있다.
현재 성벽의 둘레는 2㎞ 정도인데, 남문인 진남문(鎭南門)과 함께 동문·서문이 있다. 성 안에는 동헌(東軒)·어사(御舍)·교련청(敎鍊廳)·작청(作廳)·사령청(使令廳) 등의 관아(官衙) 건물이 분포해 있다.
해미읍성은 현재 전하는 우리나라의 읍성 가운데 가장 잘 남아 있는 유적이다. 읍성의 표본으로 삼기 위해서 성 안에 자리하였던 민가와 학교 등을 철거하고 연차적인 보수 공사를 실시하였다. 곧 1974년에는 동문과 서문을 복원하였고, 1981년에는 성 안의 일부 지역을 발굴하였다. 그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客舍)터가 확인되었고, 현재의 아문(衙門)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터가 발견되었으며, 관아를 둘러쌌던 돌담의 자취도 확인되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문화재대관』(충청남도, 1985)
『해미읍성내건물지발굴보고서』(충남대학교박물관, 1981)
『문화재대관』사적편(문화재관리국, 1976)
『서산군지』(서산군지편찬위원회, 1975)
「조선시대 ‘해미읍성’의 축성과 기능변천: 충청병영성에서 호서좌영으로」(임선빈,『역사와 담론』58, 2011)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해미[海美]
충청남도 서산지역의 옛 지명.
내용
이곳은 정해(貞海)·여미(餘美) 두 현을 합한 지명이다. 정해현은 고려 태조 때 몽웅현(夢熊縣)의 아전 한씨(韓氏)가 큰 공로가 있어 대광(大匡)의 작호를 내리고 홍주(洪州)의 속현이었던 고구현(高丘縣)을 분할하여 정해현으로 만들어서 그의 본관(本貫)으로 삼았다. 1018년(현종 9) 운주(運州)에 붙였다가 뒤에 감무를 두었다. 여미현은 본래 백제의 여촌현(餘村縣)이었는데, 757년(경덕왕 16) 여읍(餘邑)으로 고쳐 혜성군(槥城郡)의 속현으로 하였다. 고려 초에 다시 여미라 고쳤으며, 1018년 운주에 붙였고, 1106년(예종 1)에 감무를 두었다. 1407년(태종 7) 정해·여미 두 현을 합하여 해미로 고치고 정해를 그 치소로 삼았고, 1413년 현감을 두었다. 1895년(고종 32) 군(郡)이 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 때 서산군에 병합, 1917년 해미면이 되었다. 1995년에는 서산군과 서산시가 통합되어 서산시가 되었다. 해미읍성은 1418년(태종 18) 충청도에 설치된 두개의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 중 하나로 1491년(성종 22)에 완성되었으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1651년(효종 2)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옮겨졌고 해미영(海美營)이 설치되었는데 이는 충청도의 5개영 중 하나로 호서좌영(湖西左營)이라 칭하였다. 염조포(鹽祖浦) 부근에 안회산(安回山) 봉수가 있어 서산의 북산(北山) 봉수를 받아 면천(沔川)의 창택산(倉宅山) 봉수와 연결되었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여지도서(輿地圖書)』
『대동지지(大東地志)』
『충청남도지(忠淸南道誌)』(충청남도지편찬위원회, 1979)
『한국지명총람』(한글학회, 1974)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23-10-11 작성자 명사십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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