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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속의 달과 운수납자
1. 물속의 달
청정수월도량淸淨水月道場! 이는 조석으로 부처님께 올리는 축원문의 한 구절로
‘물속에 비친 달 같은 도량’이라는 뜻이다.
사찰의 주소 뒤에 관용구처럼 따라붙는 구절이기도 하다.
수많은 시주들과 대중들의 노력으로 일군 거룩한 도량이 물속의 달이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굳이 의미를 따져보자면 두 가지 의미로 읽을 수 있다.
첫째는 기원자가 머물고 있는 장소를 불전에 고하는 것이다.
물론 대상은 부처님을 향하고 있지만 자신의 위치를 스스로 환기하는 것에 가깝다.
자신이 서 있는 처소를 진리의 공간으로 긍정하고, 보살행을 펼칠 무대로 긍정하는 의례인 셈이다.
둘째는 자신이 서 있는 장소가 실체 없는 것임을 환기하는 것이다.
날마다 물속의 달이라고 되뇌며 자신이 머무는 공간이 집착할 것이 못됨을 각인하는 것이다.
첫째가 실천의 장소에 대한 긍정이라면 둘째는 대상에 대한 집착의 부정인 것이다.
결국 수월도량의 요지는 지금 머물고 있는 장소에 집착하지 말라는 것이다.
부처님의 일생을 돌아보면 한곳에 머물지 않는, 길 위의 삶이었다.
길 위에서 태어나셨고, 진리를 찾아 길을 갔으며,
깨침을 얻은 뒤에는 진리를 전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부처님은 열반에 드는 순간까지 그렇게 길 위에 계셨고,
수행자들의 삶 역시 이와 같은 유행遊行의 삶이었다.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은 우기雨期에는 정사精舍에서 안거를 했지만
비가 그치면 다시 길을 떠났다. 자연히 머무는 장소에 집착할 여지가 없었다.
그래서 수행자를 운수납자雲水衲子라고 불렀다.
창공에서 떠가는 한 점 구름처럼, 쉼 없이 흘러가는 냇물처럼 머물지 않고 떠가는 삶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출가자에게 장소는 정착할 곳이 아니라, 끝없이 버리고 떠나야 할 곳이다.
무엇이든 손때가 묻으면 애착이 가기 마련이고, 한곳에 오래 머물면 그곳에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금강경』에서는 ‘무주심無住心’을 강조한다.
그 무엇에도 머물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도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이런 마음을 유지하기 위해
스님들은 매일 조석으로 자신이 머물고 있는 장소를 수월도량이라고 환기했다.
일렁이는 물속에 비친 허상과 같은 것일 뿐 의지하고
집착할 대상이 아님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주문처럼 되풀이하는 이 내용은 자신에게는 집착을 끊는 자기 암시가 되고
다른 수행자들에게는 경책의 의미가 되었다.
2. 두 명의 선지식
그러나 한국불교의 현실을 돌아보면 수월도량이라는 주문은
그야말로 의례적 구두선에 불과함을 느끼게 된다.
목하 한국불교는 총무원장 선거를 앞두고 두 진영으로 갈라져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겉으로는 각자 대의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사태의 발단은 이명박 정부 시절
봉은사 주지 교체를 둘러싼 갈등이 시초였음을 아는 사람들은 알고 있다.
작금의 사태를 바라보면 출가자 역시
물질적 욕망을 떨쳐버리지 못한 범부일 뿐이라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가 없다.
그런데 불과 40여 년 전 두 분 큰스님들의 행적을 보면 모두가 그런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된다.
작년 여름 광덕 큰스님의 전법행에 대한 구술사를 녹취하기 위해 창원 성주사로 흥교 스님을 찾아뵈었다.
동산 대종사의 제자였던 흥교 스님은 은사스님께서 입적하신 이후
20대 젊은 나이 때부터 광덕 스님을 지근거리에서 모셨던 분이다.
필자는 흥교 스님으로부터 봉은사에 얽힌 소설 같은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광덕 스님과 지효 스님이었다.
두 스님은 모두 근·현대 한국불교의 대선지식이었던 동산 스님의 제자들이었다.
지효 스님은 용성 스님과 동산 스님의 뒤를 이어
범어사의 선맥을 계승한 이름난 선승으로 추앙받는 분이었다.
특히 불교 정화에 목숨을 걸었던 6비구를 대표하는 선승이기도 했다.
스님은 비구·대처 간의 갈등이 정점으로 치닫던 1955년 6월 정화불사의 정당성을 주장하며
할복割腹한 사건으로 유명하다.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시위용이 아니라
상처가 너무 깊어 장기가 모두 쏟아져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반면 광덕 스님은 종무행정과 전법교화에 탁월한 업적을 남긴 스님이다.
광덕 스님 역시 동산 스님 문하에서 참선 수행을 오래 했지만
스님의 활약상은 정화불사 이후 종법의 초안과 행정적 초석을 다지는 분야에서
남다른 면모를 발휘했다. 법학을 전공한 청년이었던 광덕 스님은
1950년 동산 스님을 찾아 범어사로 들어갔다.
스님은 그곳에서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재가자의 신분으로 스님들과 함께 수행하고,
정화 이후에는 대처 측으로부터 사찰을 인수받는 일에도 참여했다.
고 처사로 불리며 범어사에 머물던 광덕 스님은 사찰의 대소사 업무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해
마치 주머니 속의 송곳처럼 두각을 나타냈다.
젊은 인재를 눈여겨보던 동산 스님의 권유로 마침내 출가자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
3. 말 한마디에 주인이 바뀐 봉은사
정화불사가 어느 정도 수습되어 가던
1965년 광덕 스님은 39세의 나이로 20여 명의 대중과 함께 봉은사 주지를 맡게 되었다.
스님은 도량 곳곳에 ‘청정막방일淸淨莫放逸’이라고 써 붙이고
대중들을 엄격하게 통솔하며 승풍을 바로 잡아갔다.
뿐만 아니라 사중에 대학생 수도원을 개설하여 불교의 미래를 짊어질 인재들도 육성하고 있었다.
그렇게 2년이 흐른 어느 날 사형 지효 스님이 10여 명의 수행자들과 함께 봉은사로 찾아왔다.
그리고 봉은사에 중앙선원을 설립해야겠다는 뜻을 밝혔다.
사찰운영의 새로운 모범을 확립해 가고 있던
광덕 스님과 대중들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광덕 스님은 조용히 운집종을 치게 했다.
이윽고 봉은사 대중들과 지효 스님과 함께 온 대중 등 30여 명이 봉은사 큰방에 모였다.
광덕 스님은 대중들을 향해 사형의 뜻을 전하고
기존에 머물던 대중들을 향해 “우리가 봉은사를 떠나자!”고 말했다.
너무 급작스럽게 닥친 일인 데다 임기가 아직 2년이나 더 남아 있었다.
마땅히 갈 곳도 준비되지 않았던 터라 반대하는 스님도 있었다.
강남의 노른자 땅이 된 지금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당시에도 봉은사는 유서 깊은 전통사찰이었기에 딸린 토지가 많았다.
그렇게 규모 있는 사찰의 주지를 맡아 행정체계를 바로 잡고,
승풍을 진작하면서 봉은사의 사격은 날로 일신되고 있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떠나자니 대중들이 반발하는 것은 당연했다.
그때 광덕 스님은 “생사를 걸고 자기 찾는 공부를 한다고 하고,
부처님 되는 공부를 한다고 하는데 우리가 걸림돌이 되어서야 되겠느냐?
봉은사가 무엇이라고!” 하면서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
누구보다 격하게 반대해야 할 당사자가 그렇게 말하니 더 이상 이의를 제기할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광덕 스님과 20여 명의 대중들은 하루아침에 짐을 꾸려 봉은사를 떠났다.
마치 영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놀라운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퇴거를 반대하는 스님들을 향해 광덕 스님이 던진 말은
“생사를 걸고 수행하겠다는데 방해해서 되겠느냐?”였다.
사찰은 목숨을 걸고 자기의 본래 자리를 찾는 수행자들을 위해 탄생한 곳이다.
그래서 마조 스님의 도량은 ‘부처를 뽑는 장소’라는 뜻을 담아 ‘선불장選佛場’이라고 불렸다.
그와 같은 승가의 정신세계를 이해한다면 “그까지 봉은사가 뭐라고!” 하며
대중을 설득하던 스님의 마음은 이해되고도 남는다.
출가자의 본질적 명분 앞에 아무리 큰 절이라도 ‘그까짓 것’이 되고 마는 것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당시 이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흥교 스님은 20대의 젊은 비구였다.
중앙선원을 설치하겠다는 사형의 말 한마디에 두말없이 봉은사를 내주고 산문을 나서는
광덕 스님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사형들의 모습을 통해서 출가자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
승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깨달음이 전율처럼 일어났다.
정착해서 잘 살아가던 봉은사를 비워주고 정처 없이 나서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바로 그 순간 젊은 비구의 가슴에는 뜨거운 감동이 솟구쳐 올랐던 것이다.
정말 대단한 사람들과 함께 수행하고 있다는 생각에 표현할 수 없는 자부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혜가 선사는 “불안한 마음을 찾을 수 없는 곳에서 비로소 마음을 쉬었다(覓心無處始心休).”고 했다.
마찬가지로 육신 하나 기댈 곳 없는 바로 그 텅 빈 순간에 비구들은 진정한 수행자의 삶을 회복했던 것이다.
철저한 무소유의 상황으로 산문을 나서는
그들의 가슴에는 출격장부出格丈夫의 품격과 당당함이 넘쳐났음을 짐작할 수 있다.
4. 삼륜三輪은 본래 공적하다
여기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하나 더 있다. 말 한마디에 봉은사를 차지한 지효 스님에 관한 것이다.
스님 역시 수행을 명분으로 절을 차지하기 위해 그렇게 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스님은 단지 수행에 전념할 수 있는 도량을 마련하고 싶었을 뿐이다.
애초 정화불사는 수행을 위해 출가한 스님들이 수행할 곳 하나 없는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촉발되었다.
정화의 의도 자체가 그랬기에 수행하기 좋은 곳에 선원을 건립하겠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했다.
그런데 막상 봉은사에 들어가 보니 수행처로는 적절한 곳이 아니라고 판단한 듯하다.
이후 지효 스님은 도봉산 천축사와 봉은사를 맞바꾸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이재에 밝은 사람이라면 누가 봐도 납득할 수 없는 교환이었지만
천축사 입장에서는 호박이 넝쿨째 들어오는 격이었다.
지효 스님은 그렇게 봉은사를 내주고 대중을 이끌고 천축사로 들어가
6년 동안 두문불출하며 무문관無門關 수행을 했다.
스님의 이런 행로는 봉은사에 대한 욕심이 손톱만큼도 없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분들은 자신들이 머무는 도량을 정말 수월도량으로 인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래서 광덕 스님도 지효 스님도 모두 수행자들을 위해 미련 없이 봉은사를 내려놓을 수 있었다.
두 분은 큰 사찰을 내려놓음으로써 오히려 값을 매길 수 없는 정신적 자산을 얻었다.
이 이야기는 물질에 의해 종교가 오염된 작금의 상황에서 보면 전설처럼 아득한 말씀이 아닐 수 없다.
녹음이 짙어가던 도량에서 이 말씀을 듣자니 선의 황금시대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돌아보니 현실은 삭막하기 이를 데 없다.
40년 전에는 말 한마디로 봉은사 주지 자리가 오고 갔지만 아무런 갈등도 후유증도 없었다.
그런데 지금은 봉은사 주지 자리가 갈등의 단초가 되고, 감정의 앙금이 되어
한국불교 전체가 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40년 전 두 스님과 작금의 한국불교는 도대체 무엇이 달라서 이런 차이가 생겼을까?
예나 지금이나 봉은사는 그대로 있다. 주지 자리를 내놓는 사람도 있고, 받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그때는 젊은 비구에게 전율이 오는 감동을 주었는데
지금은 왜 반목과 갈등의 씨앗이 되었을까?
부처님은 삼륜三輪이 공적空寂해야 한다고 하셨다. 주는 물건, 주는 사람,
받는 사람이 본래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주어도 주었다는 생각이 없어야 하고,
받았으되 받았다는 생각이 없을 때 비로소 삼륜은 청정해지고 공적해진다.
40년 전 봉은사를 요구하는 스님은 의도가 법답고 깨끗했다.
그리고 사찰을 넘겨주는 스님 역시 그 뜻을 바로 알고 아름답게 떠났다.
주지가 바뀌고, 대중들이 바뀌었지만 아무것도 오고 간 것이 없는 것처럼 사찰도 세상도 고요했다.
새가 날아간 하늘처럼 주되 준 바 없고, 받았지만 받은 바 없는
그런 모습은 젊은 비구의 가슴에 커다란 울림을 주었다.
다시 현재로 돌아와 보자. 과연 지금 종단은 삼륜이 공적하고 청정한가?
받는 사람과 주는 사람의 마음이 법답고 깨끗했다면 주는 것도 없고, 받는 것도 있을 수 없다.
온 바도 없고 간 바도 없기에 마음도 고요하고 종단도 세상도 고요할 것이다.
물속의 달과 같아서 받으려 해도 받을 것도 없고, 주려 해도 줄 것도 없는 것이 삼보정재다.
물속의 달과 같은 허깨비에 홀려 인천人天의 스승이 되어야 할 출가자들이 갈등하고 싸운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인가? 그때는 왜 옳았고 지금은 왜 틀린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안타까운 마음으로 승가를 바라보는 불자들은 20대 젊은 비구를 전율케 했던
가슴 떨리는 그 감동을 지금도 간절히 기다리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서재영
동국대 선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선의 생태철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동국대 연구교수, 조계종 불학연구소 선임연구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한국선학회 집행위원장 등을 지냈다. 현재 불광연구원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며,
조계종 환경위원, 불교평론 편집위원 등으로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선의 생태철학』, 『간화선 수행의 성찰과 과제』,
『아침바다 붉은 해 솟아오르네』 등이 있으며 40여 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월간 불광 2017년 10월호>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