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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비의 근원 p.181
인류 역사를 관통해서 볼 때, 전 단계의 미신을 부인하고 없애는 것은 유물론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이런 유물론은 더 높은 단계인 신비의 출발이다.
숨 에르고 코기토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p.182
다른 것은 다 부정할 수 있어도 생각하는 내가 존재한다는 것만은 부정할 수 없다. <데카르트>
이 세상에는 참나(眞我, true atman)만 존재하고 나머지는 다 환영이다.
각은 참나가 하는 것이다. 우주는 참나가 만들어내는 꿈이다. <청담>
존재하는 것은 브라흐만(梵)뿐이다. 우주는 브라흐만의 꿈이다 <『우파니샤드』>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는 데카르트의 명제는 엉터리 명제이다.
기계가 생각하면 기계가 존재하는가? 당신은 절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기계는 절대로 생각을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하거나, '설사 기계가 생각하더라도 기계가 존재한다고는 할 수 없다'라고 주장할 것이다. 이 주장은, 물질적인 기계는 존재하지만, 물질을 넘어선 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런 식으로 생각하면, 왜 내가, 단지 생각한다는 이유로, 존재해야 하는가! 왜냐하면 데카르트의 논리에 따르면 생각하지 않는, 사실, 생각을 할 수 없는 기절한 사람이나 코마에 빠진 사람은 그 순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존재한다고 선언한 것은 육체적인 몸이 아니므로 다른 사람이 대신해서, 기절이나 코마에 빠져 의식이 없는 사람의 그 순간의 (비물질적인) 존재 여부를 결정해 줄 수는 없는 일이다.
생각한다는 사실을 자기 존재의 증거로 삼는 사람들은 사실은 영혼이나 신비로운 존재를 믿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실제로는, 생각한다는 사실을 존재의 증거로 삼지 않는다. 그들에게 존재의 증거는 대상의 영혼, 진아, 참나, 주인공의 존재 여부이다.
'기계 앞에 장막을 쳐서 가리고 기계와 대화를 할 때, 혹은 모니터를 통해서 기계와 문자로 대화할 때, 사람이 그 기계가 인간인지 기계인지 판단할 수 없으면 그 기계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봐야 한다'라는 튜링 테스트(Turingtest)가 있다. 지금도 일부 기계는 부분적으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며, 일부 미래학자들은 수십 년 내로 인간의 의식과 동일한 의식을 지닌 기계가 발명될 것이라고 예측한다.
인간이 생각을 한다고 해서 인간이 존재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다. 당신이 생각하는 인간은 혹시 영혼이나 참나 또는 眞我는 아닌가? 뇌(腦)가 아니라 영혼(靈魂), 참나, 진아(眞我), 주인공(主人公)이 생각한 것이라고 미리 가정한 것 아닌가? 따라서 당신이 해석한 데카르트의 명제는 다음과 같이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영혼이 존재한다.' 데카르트의 본뜻은 분명 이러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뇌의 송과선(松科腺)에 살고 있는 (난쟁이 모양의)조그만 사람(영혼)'인 호문쿨루스를 믿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의 발언은 또 이렇게 바꿀 수 있다.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호문쿨루스가 존재한다.' 이렇게 보면 데카르트의 주장은 하나도 지적인 주장이 아니다.
데카르트의 주장은, 본질적으로, '호문쿨루스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호문쿨루스는 존재한다'와 다를 바가 없다. 이 문장은 'A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A는 존재한다'의 구조를 갖는다. 그러면 '생각을 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존재해야 한다'라고 해야 한다. 그러나 데카르트나 당신은 설사 생각을 하는 기계를 목격할지라도, 절대로 그 기계가 존재한다고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대신, '그 기계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기계적으로 정보를 뱉어 낼뿐'이라고 간주할 것이다.
데카르트는 동물은 고통을 못 느낀다고 생각했다. 단지 고통을 느끼는 것처럼 보인다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데카르트는 '동물은 생각할 수 없다'라고 생각할 것이다. 다른 서양인들처럼 기독교 영향으로 동물은 영혼이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개를 키워본 사람은 누구나 개가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의 '코기토 에르고 숨'은 엉터리 주장이다. 그 총명한 데카르트가 이런 엉터리 주장을 한 것은, 아마 당시에 아직 뇌신경망(腦神經網)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腦神經網은 물질이다. 그러므로 데카르트의 예는 인간의 사유(思惟)가 물질적인 과학발전에 상당 부분 종속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이 보여주고 있다. 과학, 종교, 철학의 역사는 환상(幻想), 망상(妄想), 공상(空想), 상상(想像)의 역사이다. 이 세 분야의 차이는 과학은 옛 幻想⋅妄想⋅空想⋅想像을 가차없이 냉혹하게 부수어가는 과정이고, 종교는 첫 환상⋅망상⋅공상⋅상상에 죽기살기로 집착하며, 철학은 버티고 버티다 더 참을 수 없는 지경이 되면 뒤늦게 옛 환상⋅망상⋅공상⋅상상을 포기한다는 것이다.
동물에 대한 데카르트의 견해로 볼 때, 데카르트의 의견은 아무리 좋게 해석해도 이렇다. '영혼이나 호문쿨루스가 없는 존재는 생각을 할 수 없다. 그런데 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므로 영혼이나 호문쿨루스가 있다.' 이런 말은 그냥 영혼론일 뿐이지, 그 외에는 일고(一考)의 가치도 없다. 만약 영혼론이 아니라면 데카르트의 말은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생각하는 현상이 존재한다'란 토톨로지(tautology-동어반복)에 지나지 않는다.
차라리 거꾸로 말하는 것이 옳다. '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 숨 에르고 코기토 ! 다시 말하자면 이렇다. '(나에게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나는) 생각한다.' 이 말은 '스마트폰에 계산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계산한다'와 동일한 구조이다. 혹은 '자판기에는 판매 소프트웨어가 존재한다. 그러므로 판매한다' 와도 같은 구조이다. (중요한 점은 '생각을 할 수 있게 하는 소프트웨어나 알고리듬이 자기이지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리고 중요한 점은 이 소프트웨어가 진화한다는 점이다. 단세포동물인 아메바나 원시적인 생물인 지렁이는 의식이 없고, 생각하지 못한다. 거의 자판기 같은 자동기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 몸의 백혈구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단세포생물로부터 어류⋅파충류⋅포유류⋅영장류를 거쳐 지금의 몸과 마음으로 진화했다. (그리고 이렇게 진화를 할 수 있는 이유는 생물이 無我(무아)이기 때문이다. 無我이므로 몸과 마음의 모습과 기능이 바뀔 수 있다. 즉 無常(무상)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과 더불어 물질적인 고통과 정신적인 고통이 발달하고 증가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진화의 역사는 苦(고) 증가의 역사이다. 물질계와 정신계를 느끼고 인식하게 하는 신경계와 의식의 발달은 [새로운 종류]의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낳는다 : 신경계가 발달하지 못한 곤충은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 인식이 실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그 괴리로 인한 고급 고통이 발생한다. 이른바 '나[自我(자아)]'에 관련된 존재론적인 고통이다. 가장 진화한 인간만이 갖는 가장 진화한 고통이다. 고통도 진화한다는 말이다. 이렇듯 지구생물체 35억 년 진화의 역사는 바로 三法印(삼법인)의 具顯(구현)이다! 그리고 자신의 생체 유전자와 습성과 지식이 후손과 문화를 통해서, 진화에 진화를 거듭하면서, 35억 년 동안 끝없이 이어진 것은 윤회이다)
그 과정에서 생각하는 마음(소프트웨어)과 뇌신경망(하드웨어 : connectome)이 생기고 발전한 것이다. 생각하는 능력은 정확히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고통을 느끼는 능력인 '육체적 고통과 정신적 고통의 가짓수와 强度(강도)' 역시 진화의 순서와 일치한다). 단세포생물<어류<파충류<포유류<영장류<인류 순서이다. 그러므로 더욱더 '숨 에르고 코기토'(나는 존재한다. 그러므로 생각한다)가 옳다. 즉, 처음부터 생각하는 존재(영혼⋅아트만⋅참나⋅진아⋅신성⋅영성)가 있어서 그 존재의 의지와 설계에 따라 인간의 몸과 마음이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물질적인 과학 발전의 뒷받침이 없는 형이상학이나 신학은 거짓말쟁이 절름발이 신세로 전락한다. 단지 시간의 문제일 뿐이다. 인류 역사가 증명하듯이, 조만간에 진실이 밝혀질 것이기 때문이다. 데카르트가 결정적인 증거이다. 데카르트는 위대한 철학자이자 과학자였지만 몇 가지 심각한 오류를 범하였다. 신(神)이건 인간이건, 도도한 과학 문명발달 앞에서 후대까지 변함없이 명성을 유지하며 조금도 체면을 구기지 않고 버텨낼 자는 거의 없다.
청화스님의 有我論 : 유사 브라흐만(梵) 이론 p.187
자기가 망상(妄想)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때까지는 망상이 지속된다. <망상역학 제1법칙>
자기의 망상(妄想)과 동일한 망상을 가진 사람을 만나는 것은 최고의 행복이다. <행복의 제1법칙
우리나라 禪僧(선승)들은 문제성 있는 발언으로 유명하다. 10여 년 전에 입적하신, 곡성 태안사에 주석하시던 淸華(청화) 스님은 청정한 계행과 日中食, 長坐不臥(장좌불와) 등 치열한 수행으로 명성이 자자한 스님이셨다. 유명 여류소설가(남지심)의 실명 구도 소설의 주인공이 되기도 하였다. 스님은 간화선(看話禪)을 하지 않았으며, '아미타' 수행을 하였다. 이 아미타 수행법은 불교 수행법 중 가장 유일신교에 가까운 수행법일 것이다. 이 점을 염두에 두고 청화스님에 대한 다음의 비판(批判-비평하고 판단함)을 읽으면 도움이 될 것이다.
청화스님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튜브, "다시 듣고 싶은 고승들의 주옥같은 법문 - 제01회 청화스님"을 참조하시기 바란다. 27:05부터 듣기 바란다.)
"부처님이 모양으로 안 계신다고, 그래서 부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 에너지'로 계십니다."
도대체 '우주 에너지'란 무엇인가? 氣(기)인가?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인가? 혹시 암흑 에너지일 가능성은 없는가? 이 정체불명의 용어 '우주 에너지'는 무슨 뜻인가? 누구든 成佛(성불)하면 그 순간 우주 에너지로 변하는가? 부처만 우주 에너지이고, 우리 무명 중생은 우주 에너지가 아닌가? 무명(無明) 중생(衆生)은 無明(무명)에너지인가? 관측 불가능한 다크(dark-無明) 에너지가, 관측이 가능한 브라이트(bright-明) 에너지로 바뀌는 것이 成佛인가?
이상하다. 아주 이상하다. 우주 에너지로 바뀐 부처님은 태양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 것일까? 여분(餘分)의 에너지를 제공함으로써, 태양의 수명을 더 늘리는 역할을 하는 것일까? 우주 에너지인 부처의 에너지양은 얼마나 되는 것일까? 유한(有限)일까? 무한(無限)일까? 부처님이 우주 에너지라면 이 에너지를 잘 추출해 씀으로써, 한 번이라도 삐끗하면 치명적(致命的)인 환경오염을 초래(招來)할, 원자력발전소를 없애는 방법은 없을까? 혹시, 말로만 우주 에너지이지 실제로는, 아무런 쓸모없는 에너지인 것은 아닐까? 거지들은 말한다: 우리는 우주적인 사랑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밥 한 그릇 주는 조그만 사랑이 필요할 뿐이다!
"조그만 티끌 속에도, 이 공기 속에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생불멸하게 부처님은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계셔서 없어지지 않는 부처님이라니, 부처님은 언제부터 기독교 신이나 힌두교 신과 같은 존재가 되었는가? 佛心空相(불심공상) 不生不滅(불생불멸) 아닌가? 부처님을 실체화하다니 有神論(유신론) 아닌가? 부처님이 아득한 과거에도 티끌 속과 공기 속에 있었다면, 우리도 지금 티끌 속과 공기 속에 있다고 해야 한다! 우리가 티끌 속에 있다니, 이 무슨 해괴한 말인가? 이 말은 대체 어떤 실제적인 영양가가 있을까? 우리는 지금 여기 지구에 있으면서 동시에 북극성이나 마두상(馬頭狀) 은하(銀河)에 있는 것일까? 그리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포항에서 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같은 시각에 서울 광화문에도 있는 것일까? 이런 주장은 도대체 무슨 효력이 있는 것일까? 이 말은 분명 힌두교의 아트만 이론이다. 아트만 이론에 의하면 모든 것이 아트만을 가지고 있다. 티끌도 공기도 2억 마리 정자도 각각 아트만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아트만은 브라흐만이므로, 브라흐만은 어디에나 있다.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생불멸하게 브라흐만은 항시 있다. 소위 梵我一如(범아일여) 이론이다.
대한항공기 폭파범 김현희가 전향하여 기독교인이 되었다. "평생 종교가 금지된 공산주의 국가에 살던 사람으로서, 신을 믿는 것이 힘들지 않았느냐"라는 질문에 그녀는 놀라운 대답을 했다. "주체사상에서 김일성을 빼고 그 자리에 신을 넣으면 되었다. 그래서 오리혀 쉬웠다." 바로 이런 일이 한국 불교에서 벌어지고 있다. ‘梵我一如’에서 ‘梵’을 참나, 眞我, 佛性 등으로 바꾸면 된다.
"그러기에 佛心充滿(불심충만)의 법계라."
2억 년 전에서부터 6,500만 년 전까지, 인간은 존재하지도 않았고, 1억 년 넘게 지구가 티라노사우루스같이 흉악하게 생긴 육식 공룡들로 뒤덮였을 때도, 지구는 佛心으로 충만하였던 것일까? 더 멀리 거슬러 올라가 빅뱅이 일어나기 전에도 우주는 佛心으로 충만한 것일까? 불심이 무슨 신이라도 되는 것일까?
"이 법계에는 사실은 '부처님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부처님의 에너지'는 위에 등장한 '우주 에너지'와 동일한 것일까? 도대체 무슨 말인가? '우주 에너지'라는 말도 생경한 용어인데, '부처님의 에너지'라니 이건 또 무슨 뜻인가?
"그러기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우주 에너지라, '우주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도대체 '우주의 생명'이란 무슨 말인가? 새로운 생명체인가? 전 우주가 부처라는 단일 생명체란 말인가? 이 이론은 힌두교의 梵(범) 또는 브라흐만과 어떻게 다른가? 이름만 다르다 뿐이지, 혹시 같은 것은 아닌가? 석가모니 부처님은 前生에 雪山 童子 시절에도 우주 에너지, 우주 생명이었는가? 우리도, 지렁이, 아메바, 에이즈 균, 에볼라 균도 다 우주 에너지이고 우주 생명인가? 아니면 중생이 부처가 되는 순간에 그제서야 우주 에너지가 되는 것인가? 이 에너지는 물리학에서 말하는 에너지와 같은 것인가? 아니면 도교의 氣인가? 앙리 베르그송의 엘랑 비탈인가? 혹시 인도 전통의학인 아유르베다 (고대 힌두교의 대체의학 체계, 삶의 지혜 또는 생명과학의 뜻) 사이비 치료사 디팩 초프라의 量子(양자-quantum)에너지인가? 우리말로 하자면, 디팩 초프라는 한약에 스테로이드를 섞는 대신에, 量子 에너지로 버무린 한약을 팔아먹은 것이다. 자본주의라는 풍요로운 溫床(온상)에는, 디팩 초프라 같은 사기꾼들이 여기저기서 마구 창궐하고 있다.
"따라서 그 우주의 생명 자리 부처님은… 부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정당할 때는 부처님의 호념이 있습니다."
위에 인용한 청화스님의 발언은 “부처님은 항상 遍在(편재)한다. 즉 기독교 창조주처럼 옴니프레즌트(omnipresent-어디에나 있는, 편재하는)라는 말”이다. 기독교의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계곡을 지날 때도, 주 여호와 하나님이 함께하시니”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항상 遍在하는 부처님은 기독교인도 이슬람교도도 護念(호념)하시는가? 선한 사마리아인도 護念하시는가? BC 1700년 경의 함무라미왕 시대에도 사람들을 護念하였는가? 乾期(건기)의 세렝게티 초원에서 새끼들이 굶어 죽기 일보 직전의 암사자가 물소를 공격하면, 부처님은 암사자와 물소 둘 중에 누구를 護念하시는가? 백악기(白堊紀-6700만 년 전~6500만 년 전)의 티라노사우루스(육식공룡)도 護念하셨는가? 소ㆍ말ㆍ개ㆍ돼지ㆍ닭ㆍ오리ㆍ뱀장어ㆍ붕어ㆍ모래무지ㆍ가물치ㆍ오징어ㆍ문어ㆍ모기ㆍ거머리ㆍ바퀴벌레ㆍ시궁쥐도 護念하시는가? 그리고, 에이즈 균도 에볼라 균도 護念하시는가? 공중의 새 한 마리도 보살핀다는 기독교의 창조신과 비슷하지 않은가? 언제부터 부처님이 우주 중생들의 복지를 담당하게 되셨는가? 그것도 잠시 쉼도 없이 하루 24시간 동안, 영원히! 시작도 없는 과거부터 끝도 알 수 없는 미래까지!
이상의, 아래에 모아놓은, 청화스님의 말씀은 언뜻 보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지만 기독교 시인들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찬가나, 이슬람 시인들의 알라에 대한 찬가 역시 아주 아름답기는 마찬가지이다. 노벨문학상에 빛나는 인도의 자랑, 타고르의 브라흐만(梵)에 대한 찬가ㆍ헌사인 시집 『기탄잘리Gitanjali-1909-신께 바치는 노래』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러나 아름다운 것이 꼭 진리인 것은 아니다. 지극히 아름다운 찬가의 주인공들인, 야훼와 알라와 브라흐만과 아미타불이 동시에 사실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적어도, 넷 중의 셋인, 75%는 가짜이다. 지극히 아름다운 것은 동시에 지극히 거짓일 수 있다!
"부처님이 모양으로 안 계신다고, 그래서 부처님이 안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부처님은 '우주 에너지'로 계십니다." "조그만 티끌 속에도, 이 공기 속에도, 과거나 현재나 미래나 영생불멸하게 부처님은 항시 계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佛心充滿(불심충만)의 법계라." "이 法界에는 사실은 '부처님의 에너지'로 충만해 있습니다." "그러기에 아까 말씀드린 바와 같이, 부처님은 우주 에너지라, '우주의 생명'이란 말입니다." "따라서 그 우주의 생명 자리 부처님은… 부처님은 언제나 어디에나 계시기 때문에, 우리의 행위가 정당할 때는 부처님의 護念이 있습니다."
청화스님은 흠잡을 데 없이 청정한 삶을 사신 분이다. 돌아가실 때까지 치열하게 수행한 분이다. 그러나 그 철학은 虛點(허점)이 너무 많다. 기이(奇異)한 힌두교적이고 신비주의적인 有我論적 철학을 가지고 계셨다. 자신의 사상ㆍ견해에 대한 깊은 성찰이 부족했다. 아마 아무도 반론을 제기한 적이 없었던 것이 그 이유일 수가 있다. 그래서 市場(시장)의 우상(偶像)이 되면 급속도로 진짜 偶像으로 질주한다. "心身을 바쳐 道를 닦은 수행자는 모든 것을 다 알 것"이라는 대중의 妄想ㆍ幻想이 偶像을 창조한다.
▶네 가지 우상 : 영국의 철학자 베이컨이 그의 저서 ≪노붐 오르가눔≫에서 서술한, 인간 지성에 근거한 네 가지 편견이나 선입견. ❶집단의 공통된 성질에서 생기는 문제인 種族(종족)의 우상. ❷개인의 특성이나 상황에 따른 관점에서 비롯된 洞窟(동굴)의 우상. ❸언어를 사용하므로 언어가 사고를 제한하는 市場(시장)의 우상. ❹전통이나 권위 따위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劇場(극장)의 우상을 이른다.
그는 아미타수행에 穿鑿(천착-깊이 파고 듦)하였는데, 그에게 아미타불은 法界를 가득 채운 '常住不變(상주불변)하고 遍在(편재)'하는 '기독교 신'과 같은 존재였다. 불교 근본 가르침인 無我論(무아론)에서 십만팔천리나 벗어나고 말았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잘못된 생각을 100% 확신을 가지고 주장할 수 있다. 大腦新皮質(대뇌신피질-지성과 감성의 중추인 새로운 뇌)이 지나치게 발달한 인간은 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을 한다. 인류 역사는 환상ㆍ망상ㆍ공상ㆍ상상의 역사이다. 그러므로 평소에 당신의 知性을 벼리고 벼려 吹毛劍(취모검)으로 만들어, 어처구니없는 환상ㆍ망상ㆍ공상ㆍ상상(幻想ㆍ妄想ㆍ空想ㆍ想像)이 다가올 때마다. 그리고 당신 마음속에 惡性의 幻想ㆍ忘想ㆍ空想ㆍ想像의 싹이 올라오는 즉시, 가차없이 목을 날려버리시라.
부처님이 아리아인들이 1,000년 동안 제조한 환상ㆍ망상ㆍ공상ㆍ상상에 칼[(般若智慧-반야지혜의 취모검)]을 들이대셨듯이, 지금은 2,500년 동안 제조된 일체의 환상ㆍ망상ㆍ공상ㆍ상상에 칼(과학으로 보강된 반야지혜)을 들이댈 때이다. 지금껏 인류가 발전시켜 온 과학(자연과학과 인문 사회과학)이, 이 일을 하고도 남을 정도로, 비약적으로 발전했기 때문이다.
참나 : 무비 스님의 한 물건(一物)
이 글에서는 참나가 존재한다는 假定하에서
어떤 어처구니없고 이상한 결론이 도출되는지 논할 것이다.
참나는 상락아정(常樂我淨)이라고 가정한다.
한 물건(一物) : 遍在(편재-omnipresent)하고 全知全能한 존재
(전지전능-omniscient omnipotent) p.194
"여기에 한 물건이 있어서 이름도 모양도 없으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모두 꿰뚫고 있으며, 아주 작은 먼지에도 들어가지만, 온 우주를 다 에워싸고도 남는다. 안으로는 불가사의한 신통 묘용을 다 갖고 있으며 밖으로는 온갖 존재에 일일이 다 맞추어 응하고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주인 노릇을 하고 천지 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한다.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이 크고 높아서 그와 짝을 할 수 없다."
<무비 스님의 [직지 강설 하] 111쪽>
성철 스님과 동산 스님 등 위대한 승려를 배출한 남방의 총림 범어사(梵魚寺)에 주석하시는 무비 스님은 우리나라에서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學僧이다. 항상 진지한 자세로 수행하시고 공부하시는 분으로 불교계에서 크게 존경을 받으신다. 하지만 무비 스님이 자신의 저서『直指講說』에 인용한 윗글은, '한 물건(一物)'이라는 괴이한 존재에 대한 강고(强固)한 믿음을 표출하고 있으며, 심각한 문제점을 맹렬하게 분출하고 있다.
'아주 작은 먼지에도 들어가고 온 우주를 다 에워싼다'라는 표현은 힌두교 아트만(我) 또는 브라흐만(梵)을 표현하는 데 쓰인다. 먼지에도 아트만(我)이 있고, 우주에도 브라흐만(梵)이 있다. 베단파 不二論에 따르면 梵(범)은 我(아)이다. (梵我一如). 당신의 '한 물건(一物)'은 분명 아트만이나 브라흐만이다. 우주에 편재(遍在)한 존재이다. 진실로 당신의 '한 물건'은 온 우주를 다 에워싸고 있는가?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시라. 특히 출근 시간에 늦을까 봐 택시를 잡아탈 때, 중요한 회의에 늦을까 봐 안절부절못할 때, 사랑하는 사람의 임종을 지키지 못할까 봐 노심초사할 때, 스스로 자신에게 물어보고 답하시라. 정말 우주를 에워싸고 있는지. 당신의 한 물건이!
'한 물건(一物)'이 안으로 불가사의한 신통 묘용을 다 갖고 있다니, 아메바나 모기의 '한 물건'이 무슨 신통 묘용을, 그것도 불가사의한 신통 묘용을 가지고 있다는 말인가? 금방 손바닥에 맞아 죽을 줄 모르고 널따란 나대지 이마에 앉아 피를 빠는 모기의 '한 물건'은, 어찌하여, 불가사의한 신통력은 고사하고, 목숨을 잃지 않고 배를 채울 수 있는 적절한 식사 장소를 택하는 최소한의 소박한 능력조차 없다는 말인가?
'한 물건'이 '밖으로 온갖 존재에 일일이 다 맞추어 응한다'라니, 아메바나 모기나 쇠똥구리가 언제부터 온갖 존재에 다 맞추어 응하고 있는가? 쇠똥구리는 소똥이 아니면 관심이 없다! 회충ㆍ촌충ㆍ편충ㆍ요충(의 한 물건)은 인간의 몸 밖의 세계에는 관심도 없으며 일일이 맞추어 응하는 일도 없다. 대량 살상용 무기(WMD), 구충제가 위장으로 쏟아져 들어올 때, 이 기생충들의 '한 물건'은 도대체 어디서 무얼 하는 것일까? 구충제의 효능에 맞추어 응해서 기꺼이 육신이 살해당하게 하는 일을 하는 것일까?
'한 물건'이 '하늘과 땅과 사람에 있어서 주인 노릇을 한다'라니, 당신의 '한 물건'은 다른 사람의 주인 노릇을 하는가? 그런데 다른 사람의 '한 물건' 역시 당신의 주인 노릇을 하는 건 아닌가? 그럼 서로, 상대방의 주인 노릇을 하는 것인가? 말이 서로 엉켜, 말이 되지 않지 않은가? '한 물건'이 '천지 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한다'라니, 당신의 '한 물건'도 천지 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하고, 다른 사람의 '한 물건'도 천지 만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한다는 말인가?
그럼 같은 천지 만물과 삼라만상을 두고, 73억 사람들의 73억 '한 물건들'이 동시에 왕 노릇을 하는가? 게다가 아메바, 모기ㆍ회충ㆍ민촌충ㆍ갈고리촌충ㆍ편충ㆍ요충ㆍ쇠똥벌레의 '한 물건들'도 천지 만물과 삼라만상의 왕 노릇을 하고 있는가? 갈고리촌충의 '한 물건'은 자기 몸을 박멸하는 구충제의 '왕'인가? 당신의 가슴에 손을 얹고 대답해 보라. 당신은 당신의 직장 부하를, 천지 만물 삼라만상의 왕은 고사하고, 당신의 왕으로 인정한 적이 있는가?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우주에는 단 하나의 '한 물건'만 존재하고, 모든 생물ㆍ무생물은 이 '한 물건'의 顯現(현현)인가? 이는 정확히 힌두교의 梵我一如 사상 아닌가? '브라흐만 轉變說(전변설)' 아닌가? 이 사상이 불교에 유입된 것이 '水不離波(수불리파), 波不離水(파불리수)'라는 사상이다. 水(물)와 波(물결)는 같은 것이다. 즉 우주 마음 또는 宇宙識(우주식)이라는 대양에 일고 있는 수없는 파도가, 개인마음 또는 개인의식이라는 힌두교 사상이다.
문제는 이런 有我論적인 사상이 禪宗(선종)ㆍ敎宗(교종)ㆍ출가자ㆍ재가자 할 것 없이, 한국 불교계 전체에 만연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런 類(류)의 신비주의적이고 초월적인 사상은 중생의 삶에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찌르는 듯한 사바세계의 고통의 광풍이 불어오면, 有我사상은 힘없이 보랏빛 옅은 안개처럼 흩어진다. 불교인들이 사회발전에서 다른 종교인들에 비해서 뒤처지는 결정적인 이유일 것이다. 초기 경전들을 보라. 부처님은 지극히 실용적인 분이다. 동물 희생제의(犧牲祭儀), 하늘에 제사 지내기, 종교의식 등에 대해서 날카로운 지성으로 비판하신다. 도대체 이런 황당한 '한 물건' 철학은 어디에서 솟아난 것인가? 그리고 어떻게 버젓이 부처님 가르침이라고 행세하는가?
출처 : 강병균 교수 역저. 어느 수학자가 본 기이한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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