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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인트갈라디아서 제 13 강 '약속의 사람'
본문: 갈 3:15-18
15-형제들아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람의 언약이라도 정한 후에는 아무나 폐하거나 더하거나 하지 못하느니라
16-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17-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18-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Introduction: 사람에게는 누구나 소중히 여기는 것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아이나 어른이나 별 차이가 없습니다. 시골에 사는 제 조카의 경우를 예로 듭니다. 지금 7살입니다. 그런데 이 녀석이 3-4살 때 가진 버릇 중에 이런 게 있습니다. 쭈쭈를 먹을 때 꼭 자기 엄마의 털쉐터 단추를 붙들고 먹는 것입니다. 아마도 아기때 이 옷으로 자주 이불처럼 덮어 주었던 모양입니다. 그래서 자기에게 따뜻하고 친숙한 느낌을 준 모양입니다. 그 후로 한 이년 동안 여름에도 상관없이 우유먹을 때 꼭 이 쉐터의 단추를 붙들고 먹습니다. 없으면 난리가 납니다. 자기에게는 아주 소중한 물건인 모양입니다.
제 큰 딸에게도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녀석은 분홍색의 학교가방을 무척이나 좋아합니다. 학교에 별 취미가 없었던 저와는 좀 다른 모양입니다. 이 가방을 늘 메고 다닙니다. 잘 때도 자기 침대 한 켠에 두고 자야 합니다. 자다가 깨서 가방이 없으면 울면서 가방을 찾습니다. 자기에게는 대단히 소중한 물건으로 여겨지는 모양입니다. 이렇게 아이들에게도 좋아하는 물건이 한 둘은 있습니다.
욕심 많은 어른들은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파카 볼펜을 아주 좋아합니다. 이제는 거의 딴 볼펜을 잘 안 씁니다. 그것으로 안 쓰면 영감이 잘 안 떠오를 정도입니다. 몇 년전에 존경하는 한 선교사님께서 미국 갔다오시면서 이 볼펜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그 후로 줄 곧 이 볼펜만 애용하게 됩니다. 그래서 나름으로 제겐 소중한 물건입니다.
이런 현상은 사람들 누구에게나 있는 듯 합니다. 한 두 가지는 자기가 아끼는 것들이 있습니다. 이것을 분실하거나 못 쓰게 될 때 징크스가 생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 상황이 좀 심해지만 그것을 매니아라고 부릅니다. 어떤 물건이나 대상에 거의 빠져든 수준을 이렇게 부릅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좋아하고 소중하게 여깁니다.
어떤 음악에 대해, 어떤 영화 감독에 대해, 어떤 물건에 대해 빠져듭니다. 비전문가임에도 불구하고 전문가이상의 실력을 갖춘 경우도 있습니다. 최근 한 신문에 전투기를 아주 좋아하는 한 청년에 대한 기사가 났습니다. 파일럿 지망생이었으나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후 이 청년은 전투기를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영문학도지만 이 청년의 꿈은 전투기같은 것을 다루는 무기컨설턴트가 꿈이랍니다. 그래서 영어를 공부한다고 합니다. 각종 전투기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습니다. 전문가도 놀랄 정도랍니다. F-18과 F-15를 소리만 듣고도 구분한답니다. 공군출신인 저도 안되는 것을 군대도 안간 청년이 해냅니다. 보통 좋아해서는 안되는 수준입니다. 이런 사람을 매니아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사람에게는 한 두 가지 정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것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소중히 여기는 것들 중에 하나가 약속이 될 수 있습니다. 사람 사이에 맹세로서 하는 약속은 대단히 소중한 것입니다. 왕건이라는 드라마를 보시는 분들 있을 것입니다. 고려가 몹쓸 괴질로 고생합니다. 그 때 고려왕 왕건이 견휜에게 동생이 되는 굴욕을 참으며 그 병에 대한 약을 구합니다. 그러면서 둘 사이의 약속으로 자기 친족을 서로 맞바꾸어 데리고 갑니다. 일종의 약속이요, 맹세입니다. 그런데 고려에서 이 사신을 독살합니다. 약속은 깨어지고 다시 전쟁이 일어납니다. 맹세의 파기는 곧 생명의 손실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약속이 그 만큼 소중하다는 말입니다.
몇 주 전에 민성형제와 보라 자매의 결혼식이 있었습니다. '검은 뿌리 파뿌리 맹세'란 게 있습니다. 소위 결혼서약입니다. '사랑하겠습니까?' 주례자가 물었을 때 신랑의 씩씩한 대답이 청중을 웃게 했습니다. 그것은 기쁘고 흐뭇한 웃음입니다. '그 참 신랑 쓸만하네' 어른들은 속으로 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사랑하겠습니까?'하는 질문에 신랑이 '네--에!' 하며 뒤의 톤을 올려 '제가 왜 그래야하죠'식의 의문을 표한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식장이 술렁일 것입니다. 또 '--예--'하고 모기소리로 대답해 보십시오. 신부의 얼굴이 일그러지기 시작할 것입니다. 두고 두고 바가지 대상이 됩니다. 예비신랑 여러분, 하객들이 배를 잡고 웃더라도 크게 대답하십시오. 그 소리의 크기만큼 신부의 사랑도 커집니다. 잊지 마세요. 왜 이렇습니까? 약속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너무도 소중한 맹세의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며칠 전 대우자동차가 미국의 General Motors에 매각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잘 보면 그 계약과정을 MOU라고 부르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말은 Memorandum of Understanding의 준말인데 우리말로는 '양해각서'라고 합니다. 주의할 것은 이것이 아직 본 계약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론 법적인 효력도 어느 정도 있고 계약이 거의 다 된 상태라고 봐도 되지만 아직 최종 계약은 아닙니다. '마음이 거의 통했다' 이 정도로 보면 됩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을 다 놓을 단계가 아닙니다. 조금이라도 자신들이 손해일 듯 하면 손 뗄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선진국 사람들은 계약에 치밀합니다. 그만큼 이런 약속과 맹세를 소중히 여기는 전통입니다. 또 그것이 한 공동체의 발전에 많은 영향을 주기도 합니다. 맹세를 소중히 여기는 곳에는 경제적 번영도 함께 한다는 것은 역사의 귀한 교훈입니다.
오늘 본문 15절을 보십시오.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사도 바울은 일상생활의 예를 들겠다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무슨 예를 듭니다. 사람 사이의 약속을 예로 듭니다. 사람 사이의 언약, 즉 약속이라도 정해지면 함부로 폐하거나 더하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사람 사이의 약속도 아주 중요함을 강조합니다.
당시 바울이나 갈라디아 교회들이 살던 그리스문화에도 그런 바탕이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 문화를 보아라. 약속을 소중히 여기는 전통이 있질 않느냐?' 이렇게 반문하는 것입니다. 당시 그리스문화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를 지배하던 로마문화도 마찬가지입니다. 로마하면 법입니다. 법의 기초가 뭡니까? 사람 사이의 약속입니다.
바울이 얘기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자 보아라, 사람 사이의 약속도 이처럼 중요하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냐?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와 하신 맹세이다' 이러면서 자신의 논리를 전개해 나가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약속의 소중함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약속, 즉 언약의 중요성입니다. 그 약속의 내용이 무엇이냐하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나아가 약속의 사람이 가지는 특징들도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내용입니다.
Point 1: 약속
먼저 무엇이 하나님 약속, 즉 언약의 내용인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약속의 본질에 관한 말씀입니다. 16절을 보겠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하나를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
이 말씀은 창세기 13장과 17장, 그리고 22장에 나오는 말씀입니다. 바울의 아주 날카로운 구약해석입니다. 그의 구약에 대한 귀한 지식이 복음을 드러내는 도구로 사용됩니다. 그의 관찰의 내용이 뭡니까?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여러 번 반복해서 약속의 말씀을 주십니다. 15장에는 소위 횃불언약이라는 것도 등장합니다. 재물을 쪼개어 놓고 횃불이 그 사이를 지나갑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명예를 걸고 하시는 약속입니다.
그렇게 소중하게 아브라함과 하시는 약속의 내용이 뭡니까? 바울은 하나님께서 복수의 후손, 즉 많은 후손을 약속하신 것이 아니고 단수의 씨, 한 사람의 후손에 하나님의 약속이 집중된다고 말합니다. 그 한 사람이 누구냐 바로 그리스도라고 밝힙니다.
자, 이제 아브라함과 했던 하나님의 언약들을 떠올려 봅시다. 창세기 12장에서 26장에 걸쳐 나오는 아브라함의 생애를 생각해 봅시다. 많은 약속들이 나옵니다. 땅에 대한 약속이 있습니다. 모래알 같은 자손과 수많은 민족들에 대한 약속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 약속이 어떻게 아브라함에게 이루어지나를 보세요. 아브라함이 땅을 얻었습니까? 그에게 수많은 자손과 민족이 생겨납니까? 천만예요. 현실적이고 계산적으로 따지면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이 됩니다. 부도수표를 발행한 것입니다. 아들도 하나, 그것도 우여곡절과 오랜 인내 후에 사라에게서 겨우 하나의 아들을 얻습니다. 시체말로 달랑 고추하나입니다. 이것이 약속의 성취입니까?
아브라함도 이것을 쉽게 안 것은 아닙니다. 약속하시고서 너무나 더디게 이루시는 하나님 때문에 속상해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말씀을 붙듭니다. 약속의 씨가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그 과정에 이삭을 겨우 겨우 얻게 됩니다. 또 말씀을 붙듭니다. 자 아브라함의 약속을 붙든 삶, 말씀을 붙든 삶의 결국이 무엇입니까? '무엇인지는 정확히 모르지만 이 약속의 자녀 이삭에게 뭔가 엄청난 것이 들어있다.' 바로 이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놀랍고 너무 너무 거창한 약속이다. 이것을 깨달아 간 것입니다. 마침내 이삭에게서 너무나 귀한 형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그는 믿음으로 이삭에게서 그리스도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메시야를 소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과 힘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자, 모리아 산 위의 아브라함을 보세요. 이삭을 제사하려는 아브라함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제사하라시니 나는 그 말씀에 순종한다. 그러나 이 아들에게 하나님의 씨의 약속이 들어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내가 오늘 죽일지라도 이 아들은 반드시 살아난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씨앗이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책임지실 것이다.' 여기까지 나아간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이 여기까지 온 것입니다. 이삭에게서 하나님의 씨, 그리스도의 형상을 발견한 것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큰 믿음입니다.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부르십니다. 당황하신 듯 그리고 기쁘신 듯 아브라함을 황급히 부르십니다. 이 놀라운 믿음을 아브라함에게서 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문을 얻으리라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 이는네가 나의 말을 준행하였음이라.'
여러분, 이제 우리의 약속을 한 번 살펴봅시다. 여러분에게는 어떤 약속이 있습니까? 아니면 여러분은 어떤 약속을 기대하십니까? '아버지, 올해는 꼭 파트너를 주쎠야 합니다. 올해는 꼭 직장을 주씨옵소서. 추석이 힘듭니다. 아버지, 이것만은 이번에 주십시오. 이것이 너무도 필요합니다.'
다 귀한 간구입니다. 또 마땅한 요청일 수 있습니다. 너무도 중요한 현실의 요구들입니다. 그런 약속을 간절한 심정으로 사모함도 당연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속빈 강정이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말씀의 순서대로 하세요. 모든 간구와 요청에, 모든 약속의 행동들에 그 핵심이 빠져서는 안됩니다. 도대체 예수 그리스도라는 약속이 무엇인지, 그 약속이 내 모든 약속의 간구들에 무슨 상관이 있는지 그것을 물으셔야 합니다. 그것을 먼저 물어셔야 합니다. 모든 요청들에 이 소중한 약속을 연결시킬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스도라는 약속을 중심으로 해석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인생은 해석입니다. 그 해석을 중심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므로 누가 중심을 놓치지 않는 해석을 하는가 그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을 보세요. 우리는 질그릇입니다. 그런데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 질그릇에 보배가 담겨있다고 말합니다. 베드로전서 2장을 보세요. 예수 그리스도께서 믿는 우리에게 보배가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 보배라는 말은 값으로 따질 수 없는 가치의 보물을 말합니다. 이 보물이 이미 복음의 사람인 우리에게 들어있다는 것입니다. 이 약속을 우리가 과연 믿느냐 이 말입니다. 그 약속이 우리 믿음의 중심에 있는가를 물으십니다.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만족하십니까? 그 약속만으로 너무 충분하십니까? 아브라함은 이 약속의 비밀을 알았습니다. 이 약속의 비밀을 아는 사람이 큰 믿음입니다. 이 약속만으로 만족할 때까지 하나님은 끊임없이 집요하게 끈질기게 우리를 다루시고 만지실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기대하십시오. 그 하나님과 겨루어 보십시오. 누가 더 쎄나를. 이 만족을 아는 사람이 하나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에게 약속의 말씀대로 그 모든 것을 더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원리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 다음으로 본문 17절을 보면 약속에 대한 귀한 사실을 하나 더 알려줍니다. 이 약속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합니다.약속의 주인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17절을 보겠습니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의 미리 정하신 언약을 사백 삼십년 후에 생긴 율법이 없이 하지 못하여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사도 바울은 율법을 왜곡한 율법주의의 삶의 정체를 계속 밝히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는 결국 인간의 공로, 인간이 이룬 것을 내세우는 것입니다. '나도 구원을 위해 한 게 있다.' 속내용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율법의 한 조항에 수십, 수백개의 세부조항이 붙는 것입니다. 내가 이 율법을 반드시 지켜 구원받을 만한 자격, 하나님 앞에 설 만한 자격을 반드시 얻겠다 하는 것입니다. 구원의 약속을 이루는 데 나도 참여하겠다 이 말입니다.
누가복음 18장에 나오는 바리새인의 기도를 보십시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나는 하나님 앞에 설 자격이 있다. 나도 구원의 약속에 대해 무슨 역할을 해 보겠다' 그런 말입니다. 이것은 은혜가 아닙니다. 이것은 선물로서의 구원이 아닙니다. 이것은 약속의 구원이 아닙니다.
율법이 뭡니까? 율법의 역할이 무엇입니까? 율법은 우리의 한계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연약을 보여줍니다. 우리의 죄를 보여줍니다. 우리의 적나라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발가벗깁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보게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없이는 안되겠다'로 나아가게 합니다. 하나님 약속뿐이다. 그 약속을 믿음으로 살 수밖에 없다로 나아가게 합니다. 그것이 율법의 참된 기능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율법이 있기 오래 전에 하나님의 약속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먼저 있었다는 것입니다. 율법 이전에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믿음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고 그 분 앞에 설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오직 믿음으로가 영원한 구원의 법칙이라는 말씀입니다.
누가복음 1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우십니까? 안타까움에서입니다. 약속의 본질을 놓치고 껍데기만 붙들려고 아둥바둥하는 예루살렘에 안타까움 때문입니다. 약속을 주시는 분을 놓치고 부스러기들에 광분하는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그래서 곧 무너져 버릴 그들에 대한 안타까움입니다.
혹시 예수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 울고 계시진 않습니까? 곧 무너져 버릴 여러분 때문에 주님께서 울고 계시진 않습니까? 여러분은 무엇을 붙들고 계십니까? 누구를 바라고 계십니까? 약속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소위 이 복, 저 복, 복, 복, 복 그 자체입니까?
복의 근원으로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한 분만으로 너무나 만족하는 믿음되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합니다. 이 믿음 위에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하십니다. 이 믿음 가지기까지 끈질기게 여러분을 다루실 것입니다. 순종하시되 하나님 기뻐하실 즉각적인 순종을 하시기 바랍니다. 그 믿음으로 돌아가시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Point 2: 약속의 사람
이제 누가 약속의 사람인가를 살피겠습니다. 18절을 같이 보겠습니다. '만일 그 유업이 율법에서 난 것이면 약속에서 난 것이 아니리라 그러나 하나님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에게 은혜로 주신 것이라'
이 말씀은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을 설명해 줍니다. 이 말씀을 요약하면 간단합니다. 아브라함은 은혜로 주신 약속을 가장 귀한 유업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의 은혜가 그에게 가장 큰 유산이었다는 말씀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내용이 이것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이 그에게 가장 큰 재산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모든 가치를 하나님의 약속에 두고 판단하며 살았던 인생입니다. 약속의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큰 재산입니다.
아브라함이 조카 롯과 갈등이 생깁니다. 일종의 소유권분쟁입니다. 그 때 아브라함이 롯보고 뭐라합니까?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너에게 선택권을 주겠다는 얘기입니다. 아브라함이 이럴 필요가 없습니다. 이런 손해를 굳이 안 보아도 뭐라고 할 사람 아무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가 이런 양보를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나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다. 그것만으로 나는 너무 풍성하고 너무 부유하다.' 바로 이 말입니다. 이것이 아브라함의 여유와 멋의 바탕입니다. 그는 약속의 사람입니다.
사회학적 용어로 소위 'value orientation'이란게 있습니다. 가치중심의 생각이라고 번역할 수가 있습니다. 가치를 빨리 파악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행동하는 공동체가 건강한 공동체이며 활기있는 공동체입니다.
경영학에도 비슷한 용어가 있는데 'value investment'라는 말입니다. 투자하는 사람들이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말입니다. 투자대상을 가치를 정확하게 알자는 것입니다. 그 가치를 바로 알고 투자해야 남는 투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대단히 성경적인 단어들입니다. 약속이 뭡니까? value, 가치입니다. 가장 중요한 가치를 가진 것이 성경적으로 보면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러므로 약속의 사람은 그 가치를 붙드는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 무엇이 유업입니까? 무엇이 유산이며 가장 귀중한 재산입니까?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붙드는 사람이 유업의 사람이며 믿음의 사람이라는 말씀입니다.
노아를 보세요. 그는 다른 사람들이 다 살아있을 때는 그야말로 미친 짓을 했습니다. 누가 산꼭대기에다가 엄청나게 큰 배를 짓습니다. 'You man! Crazy man!' 당시 힙합하는 사람들이 있었으면 아마 그렇게 놀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의 행동의 기준이 무엇입니까? 그가 가치를 둔 곳이 어디입니까? 그는 현실의 비난을 무릅쓰며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에 기준을 두었습니다. 거기에 가치를 두었습니다. 그곳에 인생을 걸었습니다. 그리고 그 약속이 가장 분명한 현실이었습니다. 홍수가 그것을 증명해 주고 있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의 약속에 가장 귀한 유업이 있습니다. 그것을 붙드는 사람이 복음의 사람입니다.
보세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을 위해 생명을 투자하고 또 생명이 희생되더라도 그것은 사는 길입니다. 그것이 생명길입니다. 투자를 잘 하셔야 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누가복음 17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 목숨을 보존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라.' 무엇이 문제입니까? 핵심 가치인 약속이 있느냐 없느냐입니다.
요셉의 삶을 보세요. 그는 환경중심으로 살지 않습니다. 요즘 말로 처세술에 능한 사람이 아닙니다. 책략과 술수가 뛰어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그가 처세의 절정이요 책략과 술수의 최고 자리인 애굽의 국무총리가 됩니다. 왜 입니까? 그에게는 언제나 하나님의 약속과 비전이 먼저였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은 반드시 사용하십니다.
다니엘과 그 친구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어찌 보면 미련퉁이들입니다. 살 길이 있는데 죽는 길로 나아갑니다. 조금만 타협하면 되는데 굳이 외롭고 쓸쓸한 길, 돌짝 길을 갈려고 합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그 곳에 하나님의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약속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 약속이 생명보다 귀하며 어떤 것보다 귀중한 재산입니다. 그 가치관을 따라 살아갑니다. 그리고 결국 승리했습니다. 그리하니하실지라도 약속이 먼저입니다. 그 사람이 바로 복음의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사람이 비현실적인 사람입니까? 세상이 뭔질 모르고 까부는 사람입니까? 삶이 뭔지 모르는 독불장군입니까? 저는 믿음의 사람을 대단히 현실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대단히 계산이 뛰어난 사람이라고 여깁니다.
시중에 건전지가 여러 종류 많이 나와 있습니다. 알카바, 알카라인, 로케트, 에너자이저. 우리 지체 중에도 에너자이저가 있지요. 그런데 몇 달전에 신문에서 본 데이터에 의하면 이 건전지들 중에 제일 오래가는 것이 에너자이저랍니다. 같은 가격임에도 한 배 반에서 두 배까지 긴 수명을 유지한다고 합니다.
제가 건전지 선전하는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 같으면 무엇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상식적으로 현실적으로 에너자이저를 택할 것입니다. 당연한 것 아닙니까? 그런 정보를 가진 이상 좋은 제품을 사용하는 것은 소비자의 권리입니다.
믿음의 세계도 이와 다를 바가 없습니다. 믿음의 눈으로 보세요. 어디에 가치가 있는지? 믿는다는 게 과연 무엇을 믿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는 그 믿음이 가장 귀하다는 것 아닙니까? 그 믿음, 세상 어떤 것과도 바꿀 수 없다는 것이 믿음의 전제가 아닙니까? 그 사람이 은혜의 가치를 아는 사람아닙니까? 자 보세요. 이 사람보다 현실적이고 계산이 정확한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너무도 분명하고 큰 가치에 투자를 하는 사람입니다. 믿음 생활이 바보 생활이 아니예요. 그게 어리석어 보입니까? 어리석어서 그렇게 보이는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가치를 똑바로 보시기 바랍니다. 약속 안에 있는 하나님의 유업과 유산을 분명히 보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바로 약속의 사람입니다.
헬렌 켈러라는 분을 아실 것입니다.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삼중고로 고통을 받던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귀한 성취를 이루어 낸 사람입니다. 그의 고백이 이렇습니다. '나는 눈과 귀와 혀를 빼앗겼지만 내 영혼을 잃지 않았기에 모든 것을 가진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의 자신을 향한 약속을 잃지 않았다는 얘기입니다. 그 약속이 있는 한 그는 이미 너무도 넉넉한 사람이었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초대교회의 역사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크리소스톰이란 분이 계십니다. 초대교회 사역자요 설교가였습니다. 그는 복음 때문에 아르카디우스라는 로마황제에게 많은 핍박을 받았습니다. 복음 선포를 그만두지 않으면 추방하겠다는 황제의 말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황제시여, 당신은 나를 추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내 아버지의 집이기 때문입니다.' 열난 황제가 말합니다. '그러면 널 죽이겠다!' '황제시여, 그럴 수도 없습니다. 내 생명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습니다.' 열받은 황제가 말합니다. '네 재물을 압수하겠다.' '그것도 할 수 없습니다. 저의 재물은 천국에 있으며, 거기는 그 누구도 침입하여 훔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열이 바싹 오른 황제가 말합니다. '그럼 너를 사람에게서 떼어놓겠다. 친구의 씨를 말리겠다.' '황제시여, 그것도 불가능합니다. 내게는 늘 친구가 계시며 그 분은 <나는 너를 결코 떠나지 않으며 버리지 않겠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추방지로 보내어집니다. 그곳에서 계속 서신을 통해 복음사역을 하다가 또 다른 추방지로 가던 중에 순교를 당합니다. 이 사람에게 과연 하나님의 약속은 무엇입니까? 그는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여러분, 우리 한 번 되물어 봅시다. 우리는 약속의 사람입니까? 여러분의 가치는 어디 있습니까? 여러분의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지금 여기가 전부가 아닙니다. 말씀이 가르쳐주는 가치를 붙드십시오.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소중한 것을 놓치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로 그 사람이 약속의 사람입니다.
Conclusion: 사랑하는 갈보리 청년 여러분, 저는 이 복음송을 제일 좋아합니다. '나 무엇과도 주님을 바꾸지 않으리. 다른 어떤 은혜 구하지 않으리. 오직 주님만이 내 삶의 도움이시니 주의 얼굴 보기 원합니다. 주님 사랑해요'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이 가장 귀한 유산입니다. 그것이 가장 소중한 가치입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믿는 믿음의 사람입니까? 그 약속의 사람입니까? 이 약속으로 사는 은혜의 사람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Prayer: 거룩하신 아버지여, 이 귀한 구원의 약속을 우리에게 주심을 감사를 드립니다. 무엇보다 이 약속이 우리 삶의 먼저이기를 소망합니다. 우리의 미련함을 용서하시고 이 약속을 붙드는 지혜로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