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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제대로된 부르조아가 없다
이게 바로 제대로 된 부르조아의 표본!
그에게 기업은 나눔의 수단이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 이야기(6)] 유일한
항일 특수공작원과 참 기업인을 넘나든 유일한
유일한 만큼 인생의 편차가 큰 인물도 없을 것이다. 한 세기 전에 불과 10세의 나이로 미국으로 건너가 고학생에서 경영자로 성장하였고, 고국에 돌아와 민족기업을 일으키고는 항일투쟁을 위한 특수요원으로 변신하였다. 그리고는 다시 기업을 키워 사회에 환원하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독립운동가로, 그리고 참된 기업가이자 기부문화의 선구자로 우리의 근대와 현대를 이은, 진정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전범이다. "이윤의 추구는 기업성장을 위한 필수 선행조건이지만 기업가 개인의 부귀영화를 위한 수단이 될 수는 없다"는 그의 말에서 남다른 기업관을 엿볼 수 있다.
유일한은 민비시해 사건이 일어난 1895년 1월 5일 평안남도 평양에서 유기연과 김기복 사이에 6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유기연은 장사에 남다른 소질이 있어 평양 시내에서 농산물 도매상과 유명한 싱거(Singer) 미싱 대리점을 경영하여 재력을 쌓은 상인이었다. 그는 일찍이 숭실학교를 설립했던 미국의 북장로회 소속 선교사 사무엘 모펫(Samuel Moffett)에게 세례를 받았고, 단발을 앞장서서 실천한 개화인사이기도 하였다.
기독교도 유기연은 선교사들과의 교류 속에서 서양문명을 접하게 되었고, 일제의 침략으로 국운이 기울고 있던 조국의 상황을 생각하면서 아들을 선진 문명대국인 미국으로 보내야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된다. 그리하여 미국에 아들을 보낼 방법을 모색하던 중 1905년 2월 외부 참서관을 지낸 박장현(朴章鉉)과 그의 조카 박용만(朴容萬)이 독립운동을 할 목적으로 미국으로 가려 하자 유일한을 그들에게 동행시킨다.
도미 후 1906년경 박장현, 정한경, 정양필 등과 함께 미주 중서부 지역인 네브라스카 주 커니 시에 이주한 유일한은 1909년 6월 박용만이 헤이스팅스에 설립한 미국 내 최초의 한국독립군 사관학교인 '한인소년병학교(韓人少年兵學校)'에 입교하여 본격적인 군사훈련을 받게 된다.
유일한의 소년병학교 생활은 이 학교가 문을 닫은 1912년까지 계속되었다. 3년여의 기간이었지만 한참 감수성이 예민하던 시기에 열렬한 무장투쟁론자인 박용만을 지도자로 모시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려고 하는 동지들과 고락을 같이하며 받았던 소년병학교에서의 민족 군사교육은 어린 유일한에게 심신의 강건함과 담대함, 투철한 민족정신을 갖게 한 소중한 단련의 시간이었다. 이 시기에 형성된 민족의식과 자주독립사상은 후일 그가 실천한 독립운동의 정신적 원천이 되고 참된 기업경영의 밑거름이 된다.
그 이후 그는 1915년 헤스팅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디트로이트 변전소에 취업하여 학비를 마련한 다음 1916년 미시간주립대학 상과에 입학하게 된다. 그가 졸업반이던 1919년 4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 중앙총회(中央總會)에서 독립운동 후원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선전을 목적으로 필라델피아에서 한인자유대회(韓人自由大會)를 개최하게 되자, 그는 서재필(徐載弼), 이승만(李承晩), 조병옥(趙炳玉), 임병직(林炳稷) 등과 함께 재미 한국인 대표로 선출되어 이 대회에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기초작성의원회(起草作成議員會) 대의원으로 선출된 그는 <한국국민의 목적과 열망을 석명(釋明)하는 결의문>을 작성, 낭독하여 한국의 독립을 세계열강에 호소하였다.
유일한은 1919년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시간 중앙철도회사와 세계적인 전기회사인 제너럴 일렉트릭(General Electric) 등에 취직하였다가, 1922년 대학 동창생인 월레스 스미스(Wallace Smith)와 동업으로 숙주나물 통조림을 생산하는 라초이 식품회사(La Choy Food Product Inc.)를 설립하였다. 1925년에는 코넬대학교 의대 출신의 중국계 소아과 의사 호미리(胡美利)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룬다. 그 후 회사를 잘 경영하여 30여만 달러 정도의 자금이 마련되자 유일한은 귀국을 서둘렀다.
유일한이 귀국한 직접적인 계기는 세브란스 의전의 학장으로 있던 올리버 R.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의 초청이었다. 에비슨은 유일한이 연희전문학교 상과에서 강의를 하고, 부인 호미리가 세브란스병원의 소아과 과장을 맡아주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미국에서 자본주의의 힘을 체험했던 유일한의 선택은 달랐다.
미국에서 설립했던 라초이 식품회사의 원재료 수입을 위해 1925년 중국을 방문했던 유일한은 그 여행길에 조선을 일시 방문한 적이 있다. 이때 그가 가졌던 인상은 한마디로 '백성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병들었다'는 것이었다. 유일한은 이 문제를 단시일 내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기업, 그 중에서도 제약회사를 키우는 일이라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유일한은 미국의 사업체와 재산을 정리하고 귀국하여 1926년 12월에 유한양행(柳韓洋行)을 설립하게 된다.
그는 사업을 다각화하여 의약품 생산과 함께 위생용품, 농기구, 염료 등을 수입하여 민중의 건강과 생활 향상에 힘쓰고, 우리나라의 특산품인 화문석, 도자기, 죽제품 등을 미국에 수출하여 민족자본 형성에도 기여하였다. 이는 당초 민족의 실력양성과 경제적 자립을 염두에 두고 자신을 미국으로 유학 보냈던 부친의 뜻을 실현하는 길이었고, 동시에 선생이 품고 있던 민족적 대업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였다.
특히 1928년에는 <동아일보> 지상에 최초의 염료 광고와 약품 광고를 게재하여 큰 수익을 올리는 사업수단을 발휘하는 한편, 보스톤에서 <한국에서의 소년 시절(When I was a boy in Korea)>이란 책자를 출간하여 외국인들에게 한국의 실상을 간접적으로 홍보하는 활동도 하였다.
그 후 세계 각국과 교역을 하며 회사를 성장시킨 그는 귀국한 지 12년 되던 해인 1938년 4월 재차 도미하여 사업 활성화에 전력을 다하였다. 한편, 1940년 9월 북미 대한인국민회는 미주와 하와이 각 단체 대표자들에게 연석회의를 개최하여 시국대책을 강구할 것을 제의하였다. 이에 따라 1941년 4월 20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미국 내 각 한인단체 대표들이 모여 개최한 해외한족대회(海外韓族大會)의 결의에 따라 같은 해 8월 미주 내 모든 단체들을 통합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在美韓族聯合委員會)가 조직됐다.
미주 로스앤젤레스에 설치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 위원으로 선임된 그는 임시정부 후원과 외교 및 독립운동자금 조성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12월에는 미국 육군사령부의 허가를 얻어 로스앤젤레스에 캘리포니아 주 민병대 소속으로 맹호군(猛虎軍)으로 알려진 한인국방경위대(韓人國防警衛隊)의 편성을 적극 후원하였다. 1941년에는 남가주대학(USC) 대학원에서 경영학석사 학위를 취득하기도 하였다.
1942년에는 당시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의 한국담당 고문으로 활약하며 소설 <대지>의 작가 펄 벅(Pearl Buck)과 교유하기도 하였다. 유일한은 그해 8월 로스앤젤레스 시청에서 맹호군 창설과 함께 진행된 태극기 현기식(懸旗式)에 참여하여 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부장 조소앙(趙素昻) 등의 축사를 낭독하였다. 이는 비록 미국에서나마 한인 동포들이 일본 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국민임을 공식적으로 인정받는 감격의 순간이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결실이 있기까지는 유일한의 보이지 않는 활동이 밑받침이 되었음은 물론이다.
조국 광복에 대한 그의 투철한 의지는 1945년 미군의 한국 침투작전인 냅코 작전계획(Napko Project) 참여에서 보다 명확하게 드러난다. 미육군 전략정보처(OSS)에 의해 수립된 이 계획은 반일 민족의식이 투철한 재미 한인들을 선발하여 특수공작 훈련을 시킨 다음 한국과 일본에 침투시켜 적 후방을 교란하는 작전이었다. 이같은 작전계획은 미주에서뿐만 아니라 중국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산하 광복군이 참여한 독수리 작전과 동시에 진행되고 있었다.
1945년 1월 유일한은 이 작전계획의 핵심요원으로 선발되어 침투, 폭파, 통신, 낙하산 등 특수공작 교육을 받고, 제1조 조장으로 임명되어 '코드명 A'라는 암호명을 부여받기까지 한다. 그러나 이 작전은 일제의 항복으로 말미암아 안타깝게도 실행되지 못하였다. 그가 이미 지천명의 나이라는 50세에 접어들었을 때의 일이다.
유일한은 후에 미 국무성의 비밀문서 등을 통해 그 실체가 밝혀지기까지 평생 동안 한마디도 이 작전에 대해서 언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그가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를 엿보게 하는 대목이다.
광복 후 미국에서 귀국한 유일한은 유한양행을 재정비하여 사장과 회장, 그리고 대한상공회의소 초대 회장으로 활동하며 국가경제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인간 존중을 사업의 기본철학으로 가지고 있던 그는 육영사업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일제시대부터 종업원들의 소양 교육을 위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던 그는 1952년 전란 중에도 고려공과기술학교를 설립하여 교육비뿐만 아니라 숙식까지 무상으로 제공하며 숙련된 지식 노동자의 양성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다. 1965년에는 오늘날의 유한공업고등학교를 설립하였고 개인 소유주식을 각종 장학기금으로 출연하여 학교를 계속 지원하였다.
유일한은 기업경영에 있어서도 선구자적인 업적을 많이 남겼다. 그는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종업원지주제를 실현한 경영자다. 그는 유한양행을 주식회사 체제로 전환하면서 자신이 100% 소유하고 있던 주식의 52%를 액면가액 50원의 10%에 사원들에게 양도하는 파격적인 조건으로 종업원지주제를 도입한 것이다. 1962년에는 민간 기업으로서는 경성방직에 이어 두 번째로 유한양행을 상장시켰다. 액면가 100원으로 상장했는데 주가는 상장하자마자 6배로 뛰었다고 한다.
유일한은 나눔의 경영을 누구보다도 일찍이 실천한 인물이었다. 그는 1971년 세상을 떠나면서 유한양행 주식 14만941주를 기부하는 등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재산을 남김없이 사회사업과 교육사업에 기부했다. 이를 종자돈으로 해서 설립된 유한재단과 유한학원은 2005년 말 현재 유한양행의 1대주주와 3대주주로 200만 주에 가까운 주식을 보유하고 있으며 그 가치는 3000억 원에 육박하고 있다. 유한재단은 이 자금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사업을 펼치고 있다.
1969년 유일한은 기업경영의 일선에서 은퇴하게 된다. 그는 이때 자신과 아무런 혈연관계가 없는 조권순(趙權順) 전무에게 사장직을 승계하여 전문경영인 체제를 도입한다. 그에게 미국 변호사로 활동하던 유능한 아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가족에게 경영권을 세습하지 않고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것이다. 물론 소유도 자신이나 가족의 이름으로 한 것이 아니라 자선재단과 종업원, 그리고 국민의 이름으로 한 것이다. 이러한 행동은 "기업의 소유주는 사회다. 단지 그 관리를 개인이 할 뿐이다"라는 그의 기업관을 스스로 실천한 것이다.
유일한은 정경유착을 하지 않았고 납세의 의무를 철저히 지킨 경영자였다. 너무나도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이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1950년대와 1960년대의 기업풍토에서 그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시절의 많은 사업가들이 권력에 밀착해 이권을 따내고 부를 축적했지만 그는 역대 정권의 탄압과 유혹 속에서도 일절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
그는 세금에 대해서도 철저했다. 세금을 탈루하는 것이 상식으로 통할 때에도 유일한은 그러지 않았다. '기업이 세금을 많이 납부해야 정부가 국민을 위해 예산을 사용할 수 있다'는 상식을 가진 그는 조금의 누락도 없이 세금을 납부했다. 정치자금을 내지 않았다는 것이 빌미가 되어 혹독한 세무조사를 수없이 받아야 했지만 한치의 어김도 없이 납세의 의무를 지켰기 때문에 견딜 수 있었다. 1968년에는 3개월에 걸친 세무조사 끝에 어떤 혐의도 발견되지 않자, 오히려 모범 납세자로 선정되어 정부로부터 국내 최초로 동탑산업훈장을 수상하기도 했다.
유일한은 기업인으로서만이 아닌 한 인간으로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인물이다. 그는 그 어려운 시절 미국으로 건너가서 각고의 노력 끝에 기업가로서 몸을 일으켰으며, 사업가로서는 꿈도 꾸기 힘든 항일투쟁의 선봉에 섰고, 나아가 나눔을 몸소 실천한 인물이다. 그에게 기업은 목적이 아니라 나눔을 위한 수단이었다. 그는 평생에 걸쳐 자신의 가치판단 기준은 국가, 교육, 기업, 가정의 순서라고 강조했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모범적 실천이 아닐 수 없다.
유일한은 1971년 3월 11일 76세로 운명하였다. 정부는 1971년 국민훈장 무궁화장을 추서하였고 1995년에는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