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公有)와 사유(私有)의 조화로운 성경적인 삶을 향한 실험
강동진(성토모 자문위원,
충북 보은 예수마을 http://bonacom.or.kr/ Bonacom 농부, 목사)
주님의 평안을 전하며, 새해엔 성토모의 모든 계획들 위에 주님의 기름부으심이 함께 하사,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데 더욱 귀하게 사용되기를 기도드립니다.
지난 6년 전에 보나콤(Bonacom)이라는 이름으로 이곳 속리산 골짜기에서 공동체를 시작할 때부터 우리에겐 토지는 공유하고 땅에서 나오는 소산물은 사유하는 희년의 가르침에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사실 공동체를 시작한 많은 분들이 구약성경의 희년의 제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저희와 같은 동경을 가지고 시작한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희년의 조화로운 삶은 말처럼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제목에서 '실험'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물론 연구실에서의 실험은 무수한 실패를 전제한 것이겠지만, 우리가 하고 있는 실험은 자신의 일생과 더불어 가족을 걸고 하는 것이기에 어떻게 본다면 매우 무모한 실험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찾는 이가 적은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실험이 매우 의미 깊은 것이고 분명히 성공할 가능성이 매우 높은 실험이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공동체는 두 가지의 기둥 위에 세워지는 것 같습니다. 첫 번째 기둥은 영성이라는 기둥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와 날마다 성령님을 의탁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라 나아가는 바른 영성만이 공동체를 온전한 그리스도의 몸으로 세워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두 번째의 기둥은 경제, 혹은 물질이라는 이름의 기둥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아는 몇몇 공동체는 처음 매우 훌륭한 의도와 목적으로 공동체를 시작했지만 세월이 지나는 동안 경제적인, 너무도 현실적인 문제에 부딪혀 뿔뿔이 흩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가지고 있고, 떡이 있어야만 살아가는 존재들이기에 공동체는 경제라는 두 번째 기둥을 바로 세우지 않으면 결코 온전한 모습! 을 가질 수가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처음 저희 공동체는 한국 내륙지역에서 복음화율이 가장 낮고, 경제적으로 가장 가난한 곳 중의 한 곳인 이곳 보은으로 가라 하시는 주님의 음성을 듣고 아무런 연고도, 땅도 없이 성경의 아브라함처럼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무작정 내려왔습니다. 주위에서 도와주시겠다는 제의도 있었지만 정중하게 거절하고 말 그대로 맨 땅에 헤딩하는 그런 모습으로 말이지요. 내려와서 땅을 빌리고, 집을 구하여 농사를 짓기 시작하고, 일 년 후에는 우리 힘으로 집도 지었습니다. 모든 시도들이 저희들에게는 생소한 것들이고, 처음 하는 것들인지라 당연히 많은 긴장과 갈등이 뒤따랐습니다. 무수한 토론과 논쟁이 있었고 울부짖는 기도가 있었습니다. 이러한 공동의 과제들을 풀어 가는 과정들은 우리 식구들을 매우 밀접한 관계로 결속시키는 역할을 하였습니? ? 처음에는 각자의 전대를 차고, 식사도 하루에 한끼 정도를 공동으로 해결하였지만, 밀접한 연대감은 더 많은 것을 요구하였고, 그 결과 식사도 하루 세끼를 모두 함께 먹고, 모든 재정을 하나의 전대에 넣고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집을 짓는 과정에서는 부족한 재정을 채우기 위해 각자의 결혼 패물과 아이들 돌반지까지 다 내어놓았던 적도 있습니다.
그런데 집이 지어지고, 조금씩 안정이 주어지기 시작하면서부터 틈이 없이 가까워진 연대감은 서로를 향한 피로감과 자신의 독립적인 영역들을 확보하지 못하는 것으로 말미암은 불안감으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툭하면 감정이 상하고 토론 중에는 감정이 격해지는 일도 많아졌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삶의 방식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길을 모색하려는 사람들과 조금 어려움은 있지만 지금처럼 계속 완전 공유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두 부류의 사람으로 공동체는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갈라진 틈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깊은 골이 되어갔습니다.
결국 2년 전 두 부류의 이러한 갈등은 곪을 대로 곪은 상처가 되어 폭발하고 말았습니다. 공동체의 식구들 모두의 마음에는 차라리 이렇게 살 바에야 각자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 더 좋고, 이즈음에서 헤어지는 것이 서로를 향해 더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몇 차례의 격론이 오갔고, 마지막으로 한번 더 모임을 갖고 서로의 접점을 찾거나, 해결책을 모색해보기로 하고 그해 11월 초순에 1박 2일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첫날 새벽 두 시가 넘도록 격한 토론을 벌였지만 우리 모두는 자신의 생각을 고집하며 평행선을 달리고 있었고, 함께 살기에는 너무도 다른 사람들이라는 확인만 하는 시간이었습니다. 잠자리로 각자 찾아가는 모두의 발걸음은 마치 지옥을 향해 걸어가는 사자의 걸음처럼 무겁기만 했습니다. 이튿날 모임은 시작되! 었지만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똑 같은 토론과 말들만 난무하는 중이었는데 그날 저녁 주님의 성령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습니다. 절망과 비탄에 빠져 갈 바를 알지 못하던 우리들 가운데 성령님께서 임하시며 우리들 한사람 한사람을 만져 주셨습니다. 모두가 통곡하며 회개하였고 말씀이 대언 되어지면서 이 공동체는 예수님이 시작하신 것이며, 예수님의 보혈로 사신 것임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의 눈물과 탄식을 내가 보았다고 하셨습니다. 눈물로 얼룩진 밤이 지나고 새 날이 밝았습니다. 이 날도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완전 공유를 주장하는 사람은 여전히 공유를 주장하고, 공유와 사유의 조화를 말하던 사람도 역시 그러했습니다. 하지만 분명히 달라진 것은 '그렇지만 저 사람이 없이는 난 공동체로 살 수 없어'라는 깊은 형제애가 우리 가운데 흐르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공동체의 경제적인 형태가 토지와 가옥, 그리고 경제기반시설들은 공유(公有)하고 그곳에서 나오는 소산물은 사유(私有)하면서 그 사유 중의 일정한 부분을 다시 공유하는 변형된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물론 앞으로도 우리는 또 다른 어려움과 갈등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지만 공동체의 두 번째 기둥을 세워나가는 과정에서 겪었던 우리의 아픔과 성령님의 만지심을 통해 지금 우리는 전과는 다른 종류의 유대감과 친밀함 그리고 자유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