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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솜다리문학 원문보기 글쓴이: 시냇물
[2025 신춘문예 조선일보]
아름다운 눈사람 / 이수빈
선생님이 급하게 교무실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다 나는 두 손을 내민다 선생님이 장갑을 끼워주신다 목장갑 위에 비닐장갑을 끼우고 실핀으로 단단히 고정해주신다 나는 손을 쥐었다 편다 부스럭 소리가 난다 마음 편히 놀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운동장 위로 얕게 쌓인 눈 새하얗고 둥글어야 해 아이들이 말한다 눈을 아무리 세게 쥐어도 뭉쳐지지 않고 흩어진다 작은 바람에 쉽게 날아간다 흙덩이 같은 눈덩이를 안고 있는 아이들 드러누워 눈을 감고 입을 벌리는 아이들 나는 조심스럽게 눈을 다룬다 개를 쓰다듬듯 품에 안은 채 몇 번이고 어루만진다 눈덩이가 매끈하고 단단해진다 아주 새하얗고 둥근 모양의 완벽한 눈덩이를 갖는다
눈덩이가 내 품속에 있어서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것 같고 그 세상이 아름다운 것도 같고 서툴지 않은 피아노 연주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한데
하고 있던 목도리를 푼다 모자를 벗는다 장갑은 잘 벗겨지지 않는다 내 눈사람은 너무 잘 챙겨입어서 더 이상 눈사람 같지 않다 주위를 둘러보니 아이들은 교실로 돌아가고 없다 밟히고 파헤쳐져 더 이상 하얗지 않은 운동장을 본다
선생님 제 눈사람이 가장 새하얗고 둥글어요 그리고 또 커요 나는 말하고 선생님은 오랫동안 내 눈사람을 바라보신다 어찌할 수 없어서 울고 싶은 듯한 표정으로 선생님이 서 계신다 나는 선생님을 이해할 수 없지만 같이 울상이 된다 이 순간을 지워버리려는 듯이 하늘에서 눈이 펑펑 내린다
[심사평]
시단에 신선한 바람 불어넣을 ‘감각의 사용’ 갖춰
시는 구르고, 잠시 멈추고, 다시 움직인다. 시장과 광장, 평원과 대양(大洋)과 우주로 나아간다. 사람들의 말 속에 들어 있고, 뿌리와 내일의 새잎, 발톱과 단단한 근육에 깃들어 있다가 시의 바퀴는 구동한다. 시는 모든 곳에 있고, 도달하지 못할 곳 또한 없다. 시인은 이 시적 에너지를 자유롭게 풀어놓고, 때로는 붙들어 앉히느라 매 순간 아픈 사투를 벌인다. 우리가 시를 읽으며 기대하는 것은 솟구치는 힘과 고요한 정려(精慮)가 교차하는 특별한 경험이다. 그러나 시는 헤쳐가며 구르는 것이어서 기저가 없어서는 안 될 일이다. 그 기저는 관계의 접면(接面)이라고 할 수 있고, 기저로 인해 시적 비전이 제시될 수 있다.
본심에 올라온 열한 분의 작품을 세심하게 읽었고, 최종적으로 숙의한 작품은 「주머니 자라기」, 「중력」, 「아름다운 눈사람」이었다. 「주머니 자라기」는 ‘나’를 구성하는 것의 내용을 감각적인 표현을 통해 상술했다. 시적 화자가 키우고, 모으는 것의 목록을 제시했다. 그것들은 대체로 불완전한, 멀쩡하지 않은 것이었는데, 이 구성물들이 내포하거나 환기하는 것이 다소 모호했다. 「중력」은 소리에 예민하게 반응한 시였다. 시행 곳곳에 묻어둔, 곧 터질 굉음은 마치 묵시록적 느낌을 무겁게 줬고, 현실에서 끄집어낸 시의 언어는 매우 힘이 있었다. 아쉬운 점은 공간의 이동이 눈에 띄게 계획되고 짜여 있다는 것이었다.
「아름다운 눈사람」을 당선작으로 결정하는 데에 의견을 모았다. 이 시는 풍요로운 서정이 돋보였다. 시의 보행(步行)이 차분하면서도 감각의 사용이 단순하지 않았다. 하얀 눈과 둥글고 큰 눈사람이 상징하는 것은 순백과 순수의 세계임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었다. 이 시의 매력은 운동장에, 즉 교실 바깥에 펼쳐져 있거나 세워져 있는 그 세계가 다가올 미래의 시간에 곧 짓밟히고, 녹아내려 울상을 보이며 사라지게 될 것이라는 암담한 예감에 있었다. 어떤 막막함과 뭉클한 슬픔이 길게 여운으로 남는 시였다. 미성(美聲)을 잃지 않고, 시심을 잘 지니고 키워서 우리 시단에 신선한 바람을 계속 불어넣어 주길 고대한다. 당선을 축하한다.
[2025 매일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폭설 밴드/ 노은
팝콘은 함성이라서 우리는 스네어 드럼을 밟는다
산과 하늘의 경계가 흐려지는 시간이 오면
저 멀리서 늑대의 우두머리가 하울링하는 소리가 들렸다
교실 안 아이들의 핸드폰에 폭설 경보음이 울리고
뒤적거리다 발견한 서랍 속에서 눅눅해진 팝콘
밴드 합주실은 꼭대기 층에 있어서
아이들은 지붕 없는 교실에서 자습을 했다
쿵, 쿵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옥상에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
내가 말했다
셀 때마다 달라지는 계단의 수
잡히는 대로 꽉 쥘 수밖에 없어서
손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하얗게 질린 손에 온기가 돌아오길 바라며
우린 완전히 고립된 거야
둘 중 누군가 그렇게 말하기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열차가 운행하지 않고 교문이 눈에 묻혀도
이곳은 폭설 밴드
너와 나는 깨진 전구와 베이스 기타 줄을 들고
학교를 한 바퀴 돌았다
신발장을 지날 때마다 교실에서 이탈한 아이들은 배로 늘어나서
일렬로 늘어선 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오지 않는 담임 선생님께,
추워서 옷을 벗었어요 우린 아직 힘이 넘치고 유순하답니다 서로의 입에 팝콘을 넣어주곤 겨드랑이에도 손을 넣어요,
구두 소리가 마룻바닥을 두드리면 학교는 움직입니다 교시음은 필요 없어요 베이스도요
너는 머리말을 이렇게 장식하기로 마음먹었고
늑대들이 산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아이들이 울기 시작했다
[2025 매일신춘문예] 시 부문 심사평
심사위원 : 송재학 이병률 김기연
예심과 본심이 동시에 진행된 이후, 최종심에서 거론된 작품은 노은 씨의 '폭설밴드'와 방성원 씨의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 두 편이다. '폭설밴드'에서 폭설이라는 고립 공간에서 음악성에 기대어 현실과 환상이 조립되었다면,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의 생활은 일상어의 발화이다. 전자가 시적 장치로 다채로운 발상을 사용한다면 후자는 관찰의 시선이 돋보인다. 당연히 전자는 활발하고 후자는 페이소스에 근접한다. 한 발짝 더 들어가 보면 서로 다른 이 두 작품이 얼마나 좋은지 알게 된다.
'폭설밴드'에서 "쿵, 쿵 / 우리는 무언가를 떨어뜨리기도 하였는데 / 무언가와 바닥이 부딪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커서 // 옥상에
서 어떤 아이가 얻어터진다는 소문이 학교에 돌았다 / 누군가 죽은 게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 너는 그렇게 말할 것 같았다"라는 부분은 거대 폭설 군락이라는 상징이 에워싼 교실의 분위기와 감정에 대한 빛나는 묘사이다. 그런 시간 그런 장소에서 시가 왜 필요한가를 충분히 증명하고 있다. 폭설이라는 썸네일을 가진 기묘하고 역동적인 한 편의 영상이 아닌가. "퓨즈가 나가고 모두 조용해지는 한 순간 / 기억 속의 학교는 영원히 어두울 것만 같아"라는 어두운 반전 또한 이 시의 매혹이다. 폭설 속의 다채로운 수다는 어떤 감정으로도 번안 가능한 노은 씨의 고유한 영역이다.
이사할 때는 누구나 호구가 된다'의 정경은 누구나 겪음직한 삶의 귀퉁이라는 일상이다. 이 소소한 이야기의 마지막은 "문은 닫히니까 괜찮죠? // 문을 닫았다가 열었다가 다시 / 닫다가 자꾸 내가 걸리는 것 같아 // 그냥 열어놓고 지내야죠"라는 구절이다. 이 결말은 느리지만 진솔하고 단순하면서 비범하다. 또한
이 진술에는 신산한 보통 사람의 하루가 고스란히 맺혀 있다. 사실이 아니라 공감을 추구하는 시적 언술이 몸에 베인 창작 습관을 가졌다고 짐작한다.
단점보다 장점이 많은 두 작품 사이에서 주저하면서 어떤 선택도 괜찮다는 논의가 오갈 때쯤, 결론을 위해 우리는 다시 숙고했다. 전자와 후자는 좋거나 더 좋음이 아닌,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 현대시의 섬세하고 다양한 포즈이기 때문이다.
폭발하는 시적 감수성의 넓이와 깊이야말로 심사위원들이 '폭설밴드'의 손을 들어준 타당한 이유이겠다. 언어와 음악이 에워싼 폭설이라는 늑대의 울음은 이 시가 당선작으로 선정되는데 결정적이었다. 당선된 노은씨는 20대 초반, 우리 문학의 전면에 낯선 확장성을 가져주리라 예감한다. 축하를 드린다.
사족이지만 일정한 수준을 보여준 십 대 청소년의 투고작도 잠깐 화제였다.
[2025 동아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사력 / 장희수
할머니가 없는
할머니 집에선
손에서 놓친 휴지가 바닥을 돌돌 굴렀다
무언가 멀어져가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소금밭처럼 하얗게 펼쳐지고
어떤 마음은 짠맛을 욱여가며 삼키는 일 같았다 그중 가장 영양가 없는 것은
포기하고 싶은 마음일 것이라 생각해본 적 있다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포기할 수 있었다면
또다시 포기하고 싶은 마음 같은 건, 생길 리 없을 테니까
할머니도 이제야 뭔들
관두는 법을 배운 거겠지
다 풀린 휴지를 주섬주섬 되감아보면 휴지 한 칸도 아껴 쓰라던 목소리가,
귓등에서 자꾸만 쏟아지는 것 같았는데
쏟아지면 쏟아지는 것들을 줍느라
자주 허리가 굽던 사람의 말은
더 돌아오지 않는 거지
죽을힘을 다해본다 해도
사람들은
영정 앞으로 다가와
국화꽃을 떨어트리고 멀어져 간다
정갈하고 하얗게 펼쳐지는
꽃밭처럼,
무언가 떠나는 모습은 이렇게 생겼다는 듯
할머니가 있었던
할머니의 집에서는
<심사평>
소소한 이미지로 삶-죽음에 대한 사유 성공적 이끌어내
시에 더욱 많은 것을 요청할수록 오히려 무게를 덜어내야 한다는 역설을 생각해 보게 하는 심사 과정이었다. 현대시가 그 어떤 때보다 ‘실재(혹은 실제)에 대한 열정’을 감당해 내야 하는 무게와 싸우고 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상당한 질량을 보유했으리라는 기대를 담은 관념어의 나열로도, 언어 경제를 잃은 장황함으로도 해결될 수 없다. 이번 본심 대상작을 중심으로 단적으로 말하자면 늘이고 포개는 것보다 오히려 줄이고 깎는 일이 더욱 관건이라는 사실이 확연히 눈에 띈다.
‘귓속’은 단정한 진술과 매끄러운 비유로 우선 관심을 끌었다. 경청의 무게와 깊이가 절실한 이즈음의 사정과도 잘 부합하는 주제다. 그러나 ‘이 대목이 반드시 필요한가?’ 하는 의문을 감당하기 어려워 보이는 대목들이 특히 시의 후반부에 여럿 눈에 띄었다. 시는 일자천금의 세계이기도 하거니와 절제를 화두로 언어와 씨름하는 장르이다. ‘결심과 결실’의 경우도 사정은 비슷했다. 시의 내적 논리가 무리 없이 전개되며 종반부의 전언을 독자가 수긍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그러나 종반부로 치닫기 직전에 제시된 부분의 느슨함과 평이함 그리고 장황함이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법하다.
‘사력’은 그런 점에서 최종적으로 검토의 대상이 될 만했다. 할머니의 죽음을 중심 소재로 하되 사건을 세세히 묘사하는 대신 소소한 이미지들을 그러모아 사건에 육박하게 하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였다. 이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독자의 사유를 이끌어내는 것에도 성공하고 있다. 군더더기 없이 능숙하게 쓰인 작품이다. 그 숙련에 더 많은 모험이 함께하기를 기대하며 축하의 악수를 건넨다.
정호승 시인·조강석 문학평론가(연세대 국어국문학과 교수)
[2025 한국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가담 / 박연
우, 너는 언젠가 영가들은 창문으로 다닌다는 말을 했지. 그 뒤로 밤이 되면 커튼을 쳐두었다. 낯선 영가가 갑자기 어깨를 두드릴까 봐.
두려운 일은 왜 매일 새롭게 생겨날까. 가자지구에서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소년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쏘았겠지. 총알이 통과한 어린 이마와 심장. 고구마 줄기 무침 먹으면서 봤다. 전쟁을 멈추지 않는 나이 든 얼굴들.
산 사람이 죽은 사람을 빌미로 이익을 얻으려 한다는 말을 들었어. 맨발로 거리를 걷고 싶다. 너는 내가 추워할 때 입김을 불어줄 테지. 거리에서
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입혀 둔 스웨터를 보자. 보라색 바탕에 웃는 얼굴이 수놓아져 있던 스웨터를 기억해? 표정이 어딘지 모르게 음흉해서, 음흉이라는 이름을 붙였잖아.
세상에 그런 음흉만 있다면 어떨까. 나무를 따뜻하게 해 줄 거라는 속셈이 이 세계에 숨겨진 비밀의 전부라면. 나는 여전히 좁은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빛을 본다. 그리고 그런 것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스스로를 오래 미워하고 있어.
어디로 걸어야 할까. 방향이란 게 있을까.
어디든 사람을 살리는 쪽으로. 더 많은 숨을 살릴 수 있는 쪽으로. 와중에 스스로를 사라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너는 뭐가 아름다운 장면이라고 생각해? 흩날리는 게 눈송이인 줄 알았는데 실은 이웃의 뼈를 태우고 남은 재였던 날?
갚을 것이 없는데도 자꾸만 갚으러 오는 아이들이 즐비했던 문구점
그곳에서 우리는 소란스러운 귀를 훔치는 아이들이었지. 더 이상 훔칠 귀가 없는데도 서성이기를 멈출 수 없는
어째서 세계의 비밀을 듣는 놀이를 즐겼을까
옆 나라의 수장이 계속해서 무기를 사다가 결국 소년들을 팔아버렸다는 거
어떤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힌다는 것
말을 아끼는 동안
너는 산뜻한 손짓으로 엉덩이에 묻은 흙을 털었다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결심한 얼굴이었다
자꾸 밭은 숨을 쉬게 돼
우리 심장은 우리의 가슴이 아니라 죽어가는 이들에게 있으니까
*
우리의 얼굴을 한 영가가 창문을 두드린다
[시 심사평]
"언어와 사유, 두 축이 팽팽한 뛰어난 기량을 갖춘 시 많았다"
예년보다 응모 편수가 늘었다는 이야기와 함께 건네받은 작품들의 수준이 전반적으로 매우 높았다. 언어와 사유, 두 축이 팽팽한, 그만큼 뛰어난 기량을 갖춘 시들이 많았다. 이 시들이 어디를 어떻게 지시하고 있는지 주의 깊게 살펴야 했다. 아닌 게 아니라 이즈음 세상은 너무도 소요하고 도처에서 참혹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으므로. 시를 쓰는 이라면 누구보다 예민하게 지금-여기를 감지하리라 믿기 때문에.
투고작들에서 발견한 대략의 경향이라면 이런 것이다. 먼저, 시가 점점 더 길어지고 있는 것. 기성의 추세를 수용한 결과인지는 모르겠으나 시적 밀도를 높이고 개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이 꼭 길게 쓰는 것만은 아닐 텐데 하는 아쉬운 생각이 들었다. 내용 면에서는 식물과 동물(주로는 반려동물)을 주요 소재로, 시 쓰기의 행위 자체를 하나의 장치로 채용한 경우가 다수 눈에 띄었다. 스스로를 잉여적 존재로 규정하는 화자, 더불어 자살 혹은 죽음의 징후를 내세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기후, 생태, 노동, 그리고 현 정세에 대한 우려 등을 기반으로 공공적 상상력을 펼쳐내는 경우도 있었는데, 유의미한 주제들이 표층적 차원에 그치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게도 되었다.
이런 가운데 ‘가담’ 외 4편은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세계와 사람에 대한 관심을 아주 섬세하게, 진정(眞情) 어린 어조로 그려냄으로써 마음을 끌었다. ‘가담’은 “두려운 일이 매일 새롭게 일어나는” 속에서도 “계속해서 넘어지기”를 택할지언정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이 조용히” 잊히도록 내버려두지 않겠다는 선한 의지가 돋보였다. 선량함 자체가 아니라 그 같은 성질을 담담하게 추동해내는 감각이 귀하게 여겨졌다. 자신을 넘어 타자를 향해, 가까운 곳에서 멀리까지 관계의 가능성을 확장해가는 태도와 그것을 지지하는 조밀한 언어에는 특별한 울림이 있었다. 응모한 작품 모두 일정한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 점 역시 미더웠다.
마지막까지 함께 논한 작품은 ‘매미 없이 여름 나기’ 외 4편, ‘생활의 트라이앵글’ 외 4편, ‘혹한기’ 외 4편 등이다. ‘매미 없이 여름 나기’ 외 4편은 쓸쓸함의 정서를 그리는 데 있어 각양의 이미지를 능란하게 잇대어 전개한 점이 좋았고, ‘생활의 트라이앵글’ 외 4편은 일상의 사소한 면면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심장한 사유를 길어낸 점이 인상적이었다. ‘혹한기’ 외 4편은 지금 우리 앞에 놓인 여러 거대한 문제를 생활 안으로 들여와 생생하게 풀어낸 점이 탁월했다. 이들 작품을 최종으로 선택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무언가 부족해서라기보다 우선적으로 고려한 가치가 있었다 정도로 말해 두고 싶다. 어느 정도 심사자들의 취향이 작용한 결과일 수도 있겠다. 곧 다른 지면을 통해 기꺼이 만나게 되리라 예상한다.
정성스러운 작품을 보내준 모든 응모자들께 감사를 전하며, 자신만의 보법으로 계속 정진해 가시기를 응원한다.
[2025 세계일보 신춘문예]
예의 / 최경민
옆자리가 그랬다
살아있으면 유기동물 구조협회구요
죽어있으면 청소업체예요
나도 알고 있다
지금 나가면
누울 자리를 뺏긴다는 걸
그래도 가야 한다
새벽에 하는 연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
반대편은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쌍했다고 말했다
불행히도 고양이는
새벽에 일어난 우리들보다
조금 더 불쌍하다
그래도
다 보고 올까요
죽어있는 것도
살아있는 것도
우리는 그러기로 했다
관할구역 끝까지 갔다
사실은 좋아하지 않는 걸 하는 게
기본 예의가 아닐까
생각하면서
<심사평> - 안도현·유성호 “삶의 양면성 모두 품으려는 의지 담은 명편”
2025년 세계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작품이 투고되었다. 예심을 거쳐 올라온 작품들은 저마다 구체적 경험과 언어를 특권으로 삼고 있었다. 참신한 발상과 언어에 정성을 기울인 시편들이 다가왔고, 그 가운데 시상의 완결성과 시인으로서의 삶을 이끌어갈 가능성을 갖춘 최경민씨의 ‘예의’가 당선작으로 선정되었다.
‘예의’는 짧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삶의 양면성 가운데 어느 것도 소홀치 않게 대하려는 의지를 보여준 명편이다. 삶과 죽음의 현상 모두를 껴안고, 그 경계를 넘어, 모두 다 품고 넘어서는 것이 삶에 대한 예의임을 시인은 말한다. 이해하지 못하는 연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나아가고, 좋아하지 않는 것을 하면서도 끝까지 가보는 것은, 스스로와 타인을 동시에 향하는 예의일 것이다. 행간마다 큰 공간을 유지하면서 그 안으로 삶을 향한 특유의 연민과 의지, 인내와 애호를 놓지 않으려는 마음을 단단하게 들려준 시편이다. 앞으로 훨씬 더 좋은 작품을 써갈 잠재적 역량을 구비하고 있는 시인이라고 판단해 본다.더불어 ‘상어에게 지느러미 달기’와 ‘유리 식탁’이 최종적으로 거론되었는데, 비교적 익숙한 어법과 소재로 인한 참신성 부족이 크나큰 아쉬움을 주었다.이 밖에도 자신만의 사유와 감각을 개성적으로 구축한 시편들이 많았음을 부기하고자 한다. 당선자에게 커다란 축하의 말씀을 드리고, 응모자 여러분께는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2025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안수현
윗집은 오늘도 많이 더운가 보다
아무렇게나 잘라두어 우리 집 창문에 아른거리는
에어컨 실외기 호스에서
물이 뚝뚝 떨어진다 엄마는 시끄럽다면서도
마른 토마토 화분을 물자리에 밀어둔다
새순 발끝을 받치고 있는 큰 줄기
손끝이 새파랗다
너를 이렇게밖에 밀어올리지 못해 미안하다고 하는
누군가와 닮았다
왜 자꾸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걸까,
그냥 그렇게 된 건데 우린
순진한 토마토일 뿐인데
어차피 충분히 어른이 되면
고개를 깊이 숙이고
자신을 떨어뜨려야 할 텐데
땅에서 났으면서도
먼 하늘만 보고 자라
땅에 묻히기를 두려워하는
엄마 없는 엄마와 엄마밖에 없는 딸
토마토는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린다
홀로 오래 있었던 토마토 과육에선
제 심장을 디디고 선 싹이 자라곤 한다
해묵은 양수를 받아마시며,
그것은 꽤나 외로운 일이다
그래도 토마토는 그렇게 한다
<심사평>
심사위원| 김선오∙이경수.이제니∙황인숙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고 질긴 생명의 온기
난데없는 비상계엄령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탄핵소추안 가결을 하루 앞둔 날, 네 명의 심사위원이 한자리에 모여 앉아 온종일 신춘문예 시 응모작을 읽고 있
던 풍경이 문득 현실감 없이 느껴졌다. 저물어가던 2024년이 전혀 다른 성격으로 다가왔기 때문일까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덮을 만한 사건이 한 달이 채 남지 않은 2024년 이 땅에서 일어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현실이 문학을 압도해 버린 낯선 분위기 속에서 시 응모작들을 읽었다. 기후 위기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강세였고, 슬픔과 우울의 감정을 자기 고백적으로 드러낸 시가 자주 눈에 띄었다. 고단한 현실의 무게에 짓눌린 외롭고 무기력한 주체들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듯했다.
응모작들 중 네 명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심사위원들의 눈길을 붙들었다. '개의 춤'외 4편, 테라스'외 4편, '테레민'외 4편,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을 두고 숙의의 시간을 가졌다. '개의 춤외 4편은 공간을 구축하는 방식이 매력적이었다. 특히 자유자재로 공간을 구축하는 '방'의 상상력이 흥미로웠는데 예측 가능한 마무리가 다소 아쉬웠다. '테라스' 외 4편은 오래 시를 써 온 공력이 느껴졌다. "수없이 늘어선 토르소가 울타리로 일어나고 있었다."처럼 시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문장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대상을 호명하거나 인칭을 사용하는 방식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점은 아쉬웠다. '테레민' 외 4편 중에서는
'백자 앞에서'가 눈에 띄었는데 기시감을 완전히 지우지는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를 망설이게 했다. '토마토가 보이는 것보다 가까이 있음' 외 4편은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소한 일상에서 빛어지는 생활의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이었다. 어머니로부터 유전되는 돌봄과 성장의 문제를 식물의 상상력을 통해 그려내는 시선이 믿음직스러웠다. 미안하다고 말하는 마음과 외롭지만 끝끝내 살아내는 질긴 생명의 온기가 심사위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
단 하나의 작품을 고르는 심사의 과정은 늘 어렵다. 의심이 확신으로 바뀌는 과정이지만 사실상 마지막 몫은 당선자에게 달렸다. 호명되지 못한 응모자들의 새해도 너무 춥지 않기를 바란다. 시를 쓰며 지금 여기를 견디고 어디 먼 곳에 가닿고자 하는 당신들은 이미 시인이다. 머잖아 지면에서 꼭 만나기를 바란다. 그어느 때보다도 따뜻한 온기가 그리운 시절이다. 시를 읽는 시간 동안 잠시나마 느꼈던 온기를 새해에는 더 많은 이들과 나누고 싶다.
[2025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책가도 / 이수국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오크 향 원목 책장을 창문 앞에 세웠다
책을 좋아한 왕이 책가도(冊架圖)를 세워 일월오봉도를 가렸듯
햇살과 달이 가려진 방
창틈으로 들어온 빛이 어둠을 가른다
박물관 유리문 너머 책가도
가로와 세로의 배열 속, 그림 위에 꽂힌 천년의 페이지들
그림 속 책을 보던 왕과
유리문 안을 보는 내 눈이 책가도 위에서 만났다
그림 한구석 은밀히 쓴 화공의 이름이 흔들렸다
책장 바닥에 그늘 한 권을 괴자 몸이 중심을 잡는다
무너지던 중력을 다시 세운 건 한 권의 책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꺼내면
그들의 체온이 손끝을 타고 가슴으로 전해오고
작가를 지우며 작가를 꽂는다
이럴 때 사전을 거역하는 것은 유쾌한 일
문장이 자라는 시간
스위치를 켜면 책과 나는 조도가 같아져
수백 년 전 죽은 우린 서로 이마를 맞대며 이야기한다
눈감은 순간에도 새로운 이름이 눈을 뜨고
서로 다른 시계들이 태엽을 돌리면 한 곳에서 만나는 페이지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
바람과 함께 써가는 연대기
이곳에도 낱장 사이 기압골이 있어 새로운 바람이 분다
내 안의 책장을 만지면 나는 가끔 살아 있는 것 같다
[신춘문예 당선작 시 심사평]
“정조가 좋아한 물건 중심 상상 펼쳐 ... 완성도도 높아”
올해는 역대 최대 규모의 응모작이 몰려 강원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 박승균의 시 ‘묵호 4’, 이수국의 시 ‘책가도’ 등이다. 김영희의 시조 ‘함박눈’은 시조의 멋과 매력이 잘 스며있어 거듭 읽게 됐다. 시조 특유의 정제된 표현과 호흡, 그리고 현대적 감각 등이 잘 어우러진 작품이었다.
박승균의 시 ‘묵호 4’는 묵호를 제목으로 삼은 연작시 일곱 편 중 하나로, 시를 풍요롭게 만드는 낭만적 서정성이 두드러졌다.
당선작으로 선정한 이수국의 시 ‘책가도’는 정조가 좋아한 책가도를 중심으로 상상을 펼쳐나간 작품으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이 기대고 있는 책”을 통해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 “나는 죽었지만 살아있는 사람”이라는 표현을 얻어가는 과정에서 응모자의 내공을 느낄 수 있었다. 당선자에게 축하를 보낸다.
이영춘·이홍섭 시인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시]
디스토피아/백아온
플라스틱 인간을 사랑했다. 손등을 두드리면 가벼운 소리가 나는. 그는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았고 말할 수 없었다. 그 대신 자기가 피우는 카멜 담배의 낙타가 원래는 이런 모양이 아니었다거나 레몬청을 시지 않게 만드는 법 같은 것들을 말해줬다. 나는 그의 말들을 호리병에 넣어두었다. 언젠가 그것들로 유리 공예를 하고 싶었다.
매일매일 그를 만나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는 말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에는 항상 쇼윈도 불이 꺼지고, 조명 상가들도 문을 닫았다. 집에 돌아가면 투명한 호리병을 한참 바라보다 잠이 들곤 했다. 그의 작은 이야기들을 모아둔 호리병을.
그와 있다 보면, 아주 잠깐이지만, 세상이 진짜라고 믿어졌다. 그도 마찬가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망가진 두 사람이 서로에 의해 회복되는 우울한 로맨스 영화처럼.
우리 사이에 아이가 태어난다면요, 내가 엄마를 찾아볼게요.
어느 날은 그늘에 있기엔 너무 추웠다. 날씨는 좋았지만 바람이 찼다. 당신도 춥지 않아요? 물어보려던 것을 꾹 삼키고 말았다. 나는 그 공원에서 덜덜 떨며 그가 얘기하는 것을 들었다. 오랜만에 행운목에 물을 주고 왔어요. 행운목은 물을 자주 주지 않아도 잘 살지요. 나는 가만 듣다가
당신은 왜 이렇게 나에게 관심이 없어요? 나라고 아무런 사연도 없는 줄 알아요? 화가 치밀었다. 그동안 그가 자신에 대한 이야기를 한 건 아니었다. 나는 그의 사연이 알고 싶었고, 그 역시 나의 사연에 대해서도 궁금해하길 바랐다. 그늘에서 바깥으로 걸어 나갔고 그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서 텅 빈 손을 흔들었다.
그를 정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그의 플라스틱 피부에 덧칠된 이목구비와 단 하나의 표정을 보았다.
가까운 미래에 사랑이 있을 거라고 줄곧 생각해 왔는데. 지금껏 그와 나 둘 중 누구도, 서로에게 안기지 못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제조 일자가 쓰인 전구처럼 동시에 빛나고 동시에 꺼지길 바랐다.
저수지에 가서 호리병을 거꾸로 들고 바닥을 두드렸지만,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깨뜨려보려고 주먹을 쥐었을 때, 어디선가 엄마를 찾는 아이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호리병을 그대로 버려둔 채 바깥으로 달려갔다.
도망친 곳에는 메시지가 있었다. 그가 폐기되면서 마지막으로 남긴 것이었다. 내가 가짜였더라도 당신은 적당히 건강하게 지내요. 이따금 사람들과 핑퐁을 치기도 하고. 오래된 불안과 결핍은 나를 더 아쉽게 할 테니까요. 당신의 이마는 부드러웠어요.
나는 그가 닫아준 몇 줄의 감상과 조용한 꿈들을 기억하려고 했다.
[서울신문 2025 신춘문예 - 시 심사평]
안정적 전개·시의성 있는 소재 빛나
나희덕·이병률·황인찬
이번 신춘문예에는 예년보다 많은 작품이 투고된 만큼 눈여겨볼 좋은 작품이 많았다. 다만 예년과 달리 기후 위기나 전쟁 등 기존 투고작들에서 자주 보이던 시의성 있는 주제를 다루는 작품이 줄어들었으며 일상적이고 사소한 것을 다루는 내면의 이야기가 주조를 이루고 있었기에 오늘날 우리가 실감하는 세계가 그만큼 줄어든 것은 아닌지 우려되기도 했다. 그러한 가운데 영상이나 텍스트를 경유하는 간접적 체험을 다루거나 인공지능(AI)이나 게임적 상상력을 소재로 하는 작품이 늘어났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오늘날 문학이 다뤄야 할 이야기는 무엇인지, 그리고 우리는 문학을 통해 어떤 질문을 던져야만 하는지 이런 고민을 안은 채 심사를 진행했다.
본심에 올라온 작품들 가운데 네 명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살펴봤다. ‘운동 상태 유지’ 외 2편은 표제작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버려진 피아노를 소재 삼아 사물을 다양한 방식으로 살피고 접촉하며 어긋난 운동을 유지하는 과정이 흥미로웠으나 결국 이 이야기가 설명으로 그쳐 버린다는 점이 지적됐다. ‘디오라마’ 외 4편은 사물과 시적 주체를 끊임없이 이동시키며 의미를 지연하려는 듯한 말하기 방식이 개성적으로 여겨졌다. 다만 투고작 중 일부가 지나치게 늘어져 긴장감이 떨어지는 점이 아쉬웠다. ‘마주 보는 구조의 전시장’ 외 2편은 매력적인 상상력 덕에 읽는 즐거움이 있었다. 다만 작품의 씨앗이 된 상상력이 확장되거나 전개되는 대신 멀지 않은 자리에 주저앉은 채로 있어 모처럼의 좋은 소재가 충분히 가능성을 펼치지 못했다는 인상을 줬다.
당선작으로는 백아온씨의 ‘디스토피아’를 선정했다. 안정감 있는 전개와 시의성 있는 소재 선정 등 실력이 가장 돋보였기에 당선작을 합의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플라스틱 인간’과의 사랑이란 사랑이 불가능한 이 시대의 은유이자 사랑을 꿈꾸는 결연한 다짐이기도 할 터이다. 이 시가 그리는 ‘디스토피아’야말로 지금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사랑의 모습이리라. 절망하는 대신 조용히 이 세계를 기억하고 재현하려는 시적 주체의 태도에 믿음이 갔다. 앞으로도 그 결연함으로 시와 더불어 나아가시길 바란다.
전에 없는 하 수상한 시절을 보내는 지금이야말로 더 나은 세계를 꿈꾸는 장치인 문학이 그 역할을 다해야 할 것이라 믿는다. 이번 심사를 진행하며 그러한 믿음을 가진 이가 나뿐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어 기뻤다. 문학은 나의 꿈을 당신에게 맡기는 일이자 당신의 꿈을 이어받는 일이기도 할 터이다. 귀한 작품을 투고한 모든 분께 깊은 감사와 응원의 마음을 전한다.
[2025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 / 임수율
라디오를 켜놓고 소머리를 감긴다
단단한 이빨 속에 곱씹은 풀들이
이끼가 되었다
부릅뜬 눈으로 저녁 너머를 되새김하는,
머리만 남은 소가 싱크대에 식은 울음을 쏟고,
두꺼운 혀와 솟아오른 귀를 씻기다가 나는,
한 줄기 바람이 되기도 하고
익을수록 쫑긋해지는 귀에서 흘러나오는
천둥소리, 풀벌레 소리,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
우우 끓는 한낮
뽀얗게 우러난 사태를 국자로 휘휘 젓는다
씹을 때마다 혓바닥이 입천장에 붙어 쩝쩝거리는
국밥 속에서 흰 눈 밟는 소리도 들은 것 같아,
발 담근 소의 냇물과 옥수수, 질경이, 개망초와
억새를 꾸역꾸역 건져 먹는다
소 울음소리에 주파수 맞추면,
라디오는 소와 놀던 풀밭의 새들과
꽃잎 열리는 소리를 쏟아놓고
[심사평]
2025 전북도민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이질적인 소재를 서두르지 않고 안내하는 내공”
전북도민일보의 신춘문예는 작년보다 응모 편수가 상당히 많았다. 심사를 하는 일이 한국 시단의 가능성 내지는 응모자 개개인의 잠재태를 확인하는 일이기도 해서 기쁜 과정이었다.
수백 편의 심사 대상 작품에는 시적 구성과 긴밀도 문장을 다루는 솜씨가 좋은 작품들이 많았다. 반면에 작품의 흐름에 상관없이 어려운 문장이나 어울리지 않는 수사를 끼워놓은 듯한 응모작도 좀 있었다.
이번 심사의 요목은 응모한 편수가 모두 고른 수준을 유지하고 있는지가 첫 번째였다. 이는 응모자가 앞으로 이룰 시적 성취를 가늠해보는 일이기도 했다. 다음으로는 신춘문예 응모작다운 패기나 당돌한 상상력 등을 우선순위에 두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이인희의 ‘우산, 날개를 펴고’와 신양옥의 ‘망설이는 동안’, 임수율의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와 신동신의 ‘벽의 문진’ 그리고 이영화의 ‘소금이 오다’였다.
다섯 분의 작품을 반복해서 읽었다. 최종까지 남은 작품은 임수율의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였다. 같이 보내온 ‘그릇을 읽는다’도 수작이었다. 둘 중 한 작품을 고르는 일은 어려웠다. 쉽게 읽히지만은 않겠다는 불통과 술술 읽히는 소통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신춘문예라는 특성을 참작하여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를 당선작으로 정했다.
‘소가 라디오를 먹는다’는 우리가 흔히 먹는 소머리 국밥 한 그릇이 얼마나 많은 과정으로 완성되는가와 소머리 국밥 한 그릇 속에는 얼마나 많은 과거가 들어있는지 차근차근 짚어보게 한다. 과정과 과거를 다 겪어내고 내게로 온 소머리 국밥 한 숟가락이 신앙처럼 경건해지기까지 한다.
‘소’와 ‘라디오’라는 이질적인 소재 둘을 연결하는 과정을 작가는 서두르지 않고 소처럼 느릿느릿 안내하는 내공도 지녔다. 또한, 소의 상징이 얼마든지 확장될 여지를 남겨둔 채로 이 작품을 마무리했다. 심지어 작품 안에서 약간 터덕거리는 수사나 연결조차 작가가 의도했다는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오래 정진하시기를 바란다.
심사위원 = 김영(시인, 석정문학회 회장)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카카리키 앵무 / 이주경
조용히 우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주전자 물 끓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미풍에 머리카락 날리는 소리보다 작게 울어도 가둔다 창문보다 낮게 목소리를 죽이는 아이, 이웃집엔 중문도 방음벽도 없단다 얌전히 울면 해바라기 씨를 가득 줄 테야
호기심 많은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탁자 위에 놓인 꽃병을 쪼아대도 가둔다 짧고 단단한 부리로 백합 꽃잎을 쪼아대도 가둔다 동글동글한 눈빛으로 수도꼭지를 툭툭 건드려도 가둔다 집안에서 제일 예민한 각도로 웅크리는 아이, 이웃집엔 꽃병도 수도꼭지도 없단다 너의 호기심을 잠그면 해바라기 밭을 줄 테야
혼자 놀기 좋아하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오후 햇살이 올리브색 깃털 위로 미끄러져도 가둔다 건반 위를 콩콩 뛰어다니기만 해도 가둔다 깨지지 않는 거울을 보고 혼잣말을 해도 가둔다 방안에서 깃털을 고르는 아이, 이웃집엔 햇살도 거울도 없단다 방안 가득 네 꿈을 펼친다면 새장을 통째로 줄 테야
아파트 밖을 나서는 아이를 창살에 가둔다 창문 여는 소리만 들려도 가둔다 놀이터에서 들리는 웃음소리가 높아져도 가둔다 마오리족의 깃털처럼 가벼워지려는 아이를 가둔다 창살 안에서 노란 깃털을 뽐내는 아이, 이웃집엔 너 같은 아이도 악보도 없단다 내 앞에서만 노래하면 새장을 요람처럼 흔들어 줄 테야
[2025 전북일보 신춘문예 심사평 : 시]
고요한 영혼의 시위를 당겨라
박남준 시인.
‘신춘 병’이라는 오직 문청이라 분류 지칭되는 종족에게만 대책 없이 전염되고 일사불란하게 치유를 거부하는 지독한 병이 세대를 초월해서 아직도 유효한가 보다.
일천여 편이 넘는 투고 시가 예심을 거쳐 본심에 올라왔다. 모두 열두 분의 44편이었다.
“필락경풍우 시성읍귀신(筆落驚風雨 詩成泣鬼神), 붓을 들어 떨치면 비바람이 놀라고 시를 지어 이루면 귀신도 울고 가는 이라며 두보가 이백을 일러 존경을 표한 헌사가 있다.
모름지기 시를 짓는다면 적어도 이 정도의 문장을 꿈꾸어야 하지 않는가. 마땅히 그래야 할 것이라고 젊은 날 시마에 빠져 시의 날을 벼리기도, 그렇지 못한 남루한 시적 재능을 자학하던 시절이 있었다.
발칙 풍부하고 패기 넘치는 상상력, 갓 건져 올린 물고기의 비늘에 파닥거리는 윤슬, 우주를 들이마신 숨을 멈추며 이윽고 고요한 내면의 시위를 당긴 숨 가쁘도록 팽팽한 긴장, 수면을 차고 튀어 오른 물방울에 비친 영혼의 무게.
신춘문예 심사를 하다가 위와 같은 문장을 만날 때가 있다. 가슴이 두근거리는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다. 잊고 있었던 호승심이 일기도 부러움에 눈꺼풀이 가만히 내리 감기기도 한다.
「카카리키 앵무」외 2편과 「컨베이어 벨트」외 3편, 두사람의 작품을 두고 아주 잠시 머리를 맞댔다.
기성의 시문법, 감각을 안정적으로 운용하는 훈련도 쉽지는 않지만, 그보다는 심사위원으로 대표되는 기성의 미적 감각과 안목을 돌파 해주는 그러한 신선함 속에 시적 설득력을 발휘하는 새 목소리, 새 힘을 우리는 기다리는 것이다. 적어도 그런 의욕과 모험의 열정을 기대하는 것.
기준이 그러했다. 「자석 수평계」, 「새점」, 비록 완성도가 높은 수준작이기는 하지만 기성세대와 크게 다를바없는 작품은 적어도 신춘에서는 보류하기로 했다.
당선작은 왜 꼭 한사람이어야 할까. 「들깨꽃 부각」은 시대상황과 맞물려 무릎을 치게 만들었다. 시란, 시인이란 내일을 향한 날카로운 예각의 안테나를 갈고 닦고 기다려야 한다. 뮤즈의 샘물이 가득 차오르기 까지.
「카카리키 앵무」는 사회문제로 떠오른 층간소음문제, 육아, 가족, 교육문제등을 반려동물을 통해 바라본 작품이다. 당선작을 받쳐주는 다른 작품의 수준이 조금은 고른 이에게 마음이 더 기울였다. 또한 시를 끌고 나가는 뒷힘과 함께 당선자 쪽의 발랄과 생기가 우리의 의도에 더 맞는 것으로 여겼다. 부디 당선작이 대표작이 된 시인으로 머물지 않기를 바라며 당선을 축하한다. /심사위원 박남준·김사인 시인
2025 경상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백야 / 원수현
창을 하나 갖고 싶다고 말했다
아주 작아서 내 눈에만 보이는 창을
사람들은 으레 그랬듯 그저 스쳐 지나갈 것이고
나는 그 작은 곳에 눈을 대고 밖을 보기로 했어
틈 사이로
가진 것들이 보였다 너무도 많고 때로는 아무것도 없고
많아서 우는 사람들
없어서 우는 사람들
우리 모두는 이렇게 불행함을 하나씩 눈에 넣었지
이곳을 떠나면 행복해질 거라는 사람들
그들은 지금 어디에?
빙하를 뚫고 도달한 곳이 빙하라니요!
그곳도 돌았다 빙글빙글 꼭짓점도 결국에는
그대는 미치어 있는가
그대는 미쳐 있던가
아 다르고 어 달라서 우리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아프리카의 한 부족은 뱀을 피해 장대에 올라간다고 했다
점점 더 길어지는 그림자들
우리의 그림자가 세상을 덮을 때
내가 사랑하는 것들을 놓치고 싶지 않아,
깨진 창문을 다시 기우는 사람이 있었다
[심사평/김성춘]
주제 향해 언어를 끌고가는 솜씨 뛰어나
심사를 하며 혹시 놓친 시가 없는가 몇 번을 반복하면서 응모작을 읽었다.
최종까지 선자에게 남은 작품은 4편으로 압축되었다. 최종까지 남은 네 분의 작품들은, 저마다의 색깔이 분명하면서도 소소한 일상을 아름다운 서정의 언어로 건져 올리거나, 은유에 의한 부드러운 이미지의 시편들로, 자신의 내면을 시로 잘 형상화하는 테크닉이 돋보이는 작품들이었다.
고심 끝에 선자는, 198번의 ‘백야(白夜)’를 당선작으로 낙점했다.
당선작 ‘백야’는 우선, 언어의 소통이 잘 되고, 메시지가 분명해 설득력과 안정감을 주었다 그리고 주제를 향해 언어를 끌고 가는 솜씨가 뛰어났다. 백야는 우리 시대 삶의 은유다. 불확실한 현실에 대한 우리의 막막한 삶을, ‘백야’라는 감각적 현상을 통해 우리 삶에 비유하면서 잔잔한 이미지로 형상화시키는 능력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다른 응모작들 보다 수사적 화려함은 덜하지만 삶에 대한 깊은 성찰과 부드러운 이미지가 돋보였다. 그리고 당선자의 작품들 모두가 시적 완성도 면에서 다른 응보자들보다 월등하게 높아서 오랜 창작의 내공을 느끼게 했다는 점, 이 점 또한 선자에게 깊은 신뢰감을 주었음을 밝힌다
[2025 신춘문예 ‘시’ 당선작]
날개 / 박봉철
날개에 바닥이 있다. 어둠을 안고 일어선 곳에 깃털 냄새가 났다
어깨 둘둘 말며 방향을 잡아간다
바람은 심장을 꿰뚫듯 그림자를 비켜선다
새를 연상하며 새의 가벼운 뼈들을 통과한다
무게를 줄이는 새에게 구멍이 뚫려있다는
고고학적인 소견이 귓등을 강타한다
생각을 횃대 삼아 이렇게 가벼운 분위기는 처음이야,
상황만 점점 무거워지는 거지
무게를 덜기 위해
기낭이 풍선처럼 부푸는 듯 위를 갈아먹었던 게지
거품처럼 붉은 강물들이 몸속 번갈아 우거진 체액을 삼켰던 게지
가쁜 숨이 펼쳐진 입김들이 타원형처럼 포개졌고
빛의 멱살을 찾아 길을 낼 수 있을까
방향을 재면서 동시에 꼬리가 돋아났다
그때 주저앉는 평형의 몫은 없을 것이다
꼬리를 빙빙 돌려보내는 하마, 위험할 때 철썩, 철썩 보내는 비버, 방향을 틀 때
긴꼬리로 균형을 잡는 치타,
꼬리가 날개로 들.어.간.다. 거꾸로 들.어.간.다.
꼬리의 배후는 날개였을까
분주하게 묻어온, 허공을 짚어낸다
날개를 치켜들며 여긴 바닥이므로, 일어섰을 즈음
날것의 대의를 위하여
출렁이는 지평선 너머
반쯤 넘어진 표면으로 뿔뿔이 내미는 깃털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
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
[2025 신춘문예 ‘시’ 심사평]
‘날개는 바닥이다’… 시인만의 은유로 빛나
김언희, 성윤석 시인
무엇이 시인가? 라는 질문에 앞서 시를 쓰는 사람은 자기의 시에 시적 언술이 있는가부터 먼저 살펴야 한다. 시적 언술이란, 사물과 인간의 삶을 다르게 표현할 줄 아는 능력이다. 이 능력은 오랜 습작과 읽기, 그리고 사유에서 나온다.
수많은 투고작 앞에서 단 한 사람의 시인을 선하는 일은 언제나 곤혹스럽다. 그럼에도 선자들은 투고작들을 열심히 읽고 설레는 마음으로 시다운 시를 찾는 데 집중했다.
올해는 지난해보다 많은 1329편의 시가 투고되었다. 최근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국민들이 한국문학에 많은 괸심을 가지게 된 계기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투고작들의 전체적인 성향은 가족을 다룬 시편이 대폭 증가했다는 사실이다. 취업, 전쟁, 실업, 가난의 풍경들을 살핀 시들도 없지 않았으나, 예년에 비해 줄어들었고, 가족 간의 이별, 병마, 가족 해체에 대한 시들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전체적으로 투고작들의 수준이 고르게 높아진 것은 매우 고무적인 사실이나, 특별한 한 편이 없었다는 것은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투고작 중에서 선자들에게 끝까지 남은 작품은 총 4편. 이 네 분의 작품 4편 중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내세워도 무방할 정도로 수준이 비슷했다. 마지막까지 선자들에게 고민을 안겨준 작품은 박봉철의 〈날개〉와 박설하의 〈무를 주세요〉 2편. 선자들은 박봉철의 〈날개〉를 당선작으로 선정했다. 축하드린다. 시 〈날개〉는 ‘날개는 바닥이다’라는 시인만의 은유와 함께 ‘겨드랑이에 혁명을 물고 허공을 헹구던 어깻짓/기슭을 앓아, 바깥의 몸살이다’처럼 날개, 라는 대상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여기서 뜻밖의 발견을 끌어낸 수작이다. 동봉한 다른 시편에서 언뜻 보이는 상투적인 표현만 지워나간다면 무겁고도 진중한 시인으로 거듭날 것으로 보인다.
투고작 중에서 가장 신선하고 발랄한 작품은 박설하의 〈무를 주세요〉 등 3편이다. 선자들이 오래 망설였던 작품이다. 다만 같이 투고한 작품 〈끈끈한 가족〉에서 자연스럽지 못한 언술이 걸려 아깝게 탈락했다. 이미 기성 시인 못지않은 세련된 시적 어휘와 신선한 눈을 가진 분으로 얼마 안 가 다른 지면에서 만나게 될 것임을 믿는다. 이 외에도 서미경의 〈브루클린의 날씨는 좋다고 전해주세요〉는 발상과 시적 전개가 활달하고 좋았으나 ‘할렐루야’라는 찬양어가 조화롭게 들어가지 못해 아쉬웠고, 강은미의 〈탐조〉는 담백한 시상 전개가 인상적이었으나, 특별한 시적 발견이 눈에 띄지 않았다. 당선자를 비롯해 투고하신 분들의 문운을 빈다.
[2025 농민신문 신춘문예-시 당선작]
모란 경전 / 양점순
나비는 비문을 새기듯 천천히 자수 병풍에 든다
아주 먼 길이었다고 물그릇 물처럼 잔잔하다
햇빛 아지랑이 속에서 처음처럼 날아오른 나비 한 마리
침착하고 조용하게 모란꽃 속으로
모란꽃 따라 자라던 세상
사랑채 여인 도화의 웃음소리
대청마루에 할머니 무릎을 베고 누운 아이
모란 그늘 흩어지는 뒤뜰
흐드러지게 피는 웃음소리
그녀가 갈아놓은 먹물과 웃음을 찍어 난을 치고
나비를 그려 넣는 할아버지
상처를 감춘 꽃들이
할머니 손끝에서 톡톡 핏빛으로 핀다
어떤 날은 긴 꼬리 장끼와 까투리가 태어난다
어디서나 새는 태어나고 어디서나 날아가 버리곤 한다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붉은 꽃잎을 따서 후하고 불어 보는 아이
꽃잎은 빙빙 돌며
아랫집 지붕 위로 날아간다
그 집 할아버지가 죽었다고 한다
모란 꽃잎 불어 날리는 날이면
어디선가는 사람이 죽고 부음이 날아든다
도화도 죽었으면 좋겠어 좋겠어
차마 꽃잎을 뜯지 못한 어린 손가락이 붉다
한밤중 아무도 모르게 사라진 도화
가지런히 벗어놓은 신발 속에는 붉은 말들이 무성했다
제 신발 속에 가시를 잔뜩 집어넣었을 때도
아이의 두 손을 따뜻하게 쥐고 웃었다
죽음을 이해하는 일
떨어진 꽃잎 한 장이
바람도 없이 날아간다는 것
모란이 핀다, 모란이 핀다
병풍 속 나비는 물처럼 고요하다
[심사평] 말·생각 버무리는 솜씨 안정적…전통적 서정성 돋보여
농경 문화적인 소재와 가족 서사를 기반으로 한 시들이 꽤 많았다. 이러한 시들은 시의 새로운 영역을 개척하고 이전과 다른 지평을 열어 보이는 일에 대체로 소극적이다.
현명한 독자는 익숙한 것들의 다정한 목소리가 반복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단 한 편만을 선택해야 하는 독자의 마음으로 심사위원들은 꽤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었다. 당선작으로 고른 ‘모란 경전’은 첫 행부터 독자를 끌어당기면서 한 폭의 따스한 풍속화를 그리는 데 성공하고 있다.
말과 생각을 버무리는 솜씨는 안정돼 있고 과하게 감정을 노출하지도 않는다. 최대한 전통적인 서정에 가까워지려는 이러한 노력이 요즘 시단에서 보기 드문 것이어서 귀하게 여겨지기도 한다.
하지만 함께 응모한 작품 대부분이 과거에 기반을 둔 서정이라는 점은 조금 우려스럽다. 능숙한 문장이 능사는 아니라는 점을 알고 좋은 시인으로 나아가기를 바란다.
‘주머니에 해바라기 씨앗이나 넣어둬요 당신이 이 땅에서 쓰러지면 해바라기가 자랄 테니’라는 긴 제목의 시는 현실 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지구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의 폭력 속에 ‘아이들’로 상징되는 연약한 생명의 자리를 만들어 사유하는 점이 눈에 띄었다.
다만 거친 비유와 잡다한 인용은 한시바삐 걷어내야 할 것이다.
‘죽음을 다 쓰면 삶을 써도 될까요’는 죽음에 대한 묵직한 탐구가 믿음직스러웠고, ‘요요’는 상승과 하강의 이미지를 교차하면서 주객전도의 세계를 상상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나 다음 기회를 보기로 했다.
2025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작
적당한 힘 /김정미(필명 김도은)
새를 쥐어 보았습니까?
새를 쥐고 있으면
이 적당한 힘을 배우려 학교엘 다녔고 친구와 다퉜고
매일 아침 창문을 열고 온갖 소리를 가늠하려 했었던 일을 이해하게 된다
온기는 왜 부서지지 않을까.
여러 개의 복숭아가 요일마다 떨어지고
떨어진 것들은 정성을 다해 멍이 들고 꼼지락거리는
애벌레를 키운다
서로 다른 힘을 배치하는 짓무른 것들의 자세
새로운 패를 끼워 넣고 익숙한 것을 바꿔 넣으면
손을 빠져나간 접시가 깨졌고
칠월이 손에서 으깨어졌고
몇몇 악수(握手)가 불화를 겪었다
세상의 손잡이들과 불화하든
친교를 하든
모두 적당한 힘의 영역이었을 뿐
몰래 쥐여준 의심과 아무렇게나 손에 쥐고 있던 새의 기록에서
별똥별을 본다
적절한 힘을 파는 상점들이 있었으면 해
포장도 예쁘게 해서
심지어 택배로 보낼 수 있었으면 해
평평하고 고요한 힘
고요해서 막다른 골목만큼 지루하고 착한 힘
모자라거나 딱 맞는 힘이 아니라
오르막을 오를 때 내리막 힘을 딛고 올라가려 하는,
내가 알지 못하는 모든 일들을 데려오거나
데려간 그 힘.
손닿는 곳마다 손잡이가 있는 건 아니니까
하루를 조금 더 올라가 보려는 거겠지
한 발 한 발 올라간다고 해서 다 볼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삐딱하게 어둠이 잡음으로 끼어들어도
멈추지 않으려는 거겠지
불편한 새를 손에 쥐어 보기 전에
적당한 힘 하나 손금으로 열어두어도 괜찮은
2025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 심사평 -
오랜시간 시의 언어 단련한 흔적 역력
정익진 김언 이제니 시인
당연한 말이지만, 좋은 시는 자기만의 언어를 동반하면서 나온다. 자기만의 고유한 언어를 발굴하는 사람이 곧 시인이라는 말도 가능하겠다. 자기만의 언어는 시적인 언어만 단련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삶을 관통하는 언어일 때 비로소 자기만의 언어가 되고 시가 된다. 저마다 달라야 하는 시의 언어는 저마다 다를 수밖에 없는 개개인의 삶을 터전으로 하기 때문이다.
예년보다 부쩍 늘어난 응모작을 읽어나가며 유심히 챙겨 본 것도 자기만의 언어였다. 자신의 삶을 관통한 자기만의 언어. 다수 응모작이 익히 알고 있는 엇비슷한 시적 언어를 못 벗어나고 있는 가운데, 자기만의 언어를 발견하기 위해 분투하는 작품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띄었다.
심사 막바지까지 남아서 거론된 작품은 ‘큐브의 방향’, ‘야간 산행’, ‘적당한 힘’이었다. 우선 ‘큐브의 방향’은 발상이 상당히 좋은 작품이었으나, 충분히 숙성하지 못한 채 발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남겼다. ‘야간 산행’은 질문 하나로 시작해 그 질문을 끈기 있게 끌고 가는 솜씨가 좋았으나, 중간중간 시상을 산만하게 하는 장면이 꼭 필요했을까 하는 의문을 남겼다.
‘적당한 힘’ 역시 질문 하나로 시작해 그 질문을 끝까지 끌고 가는 방식으로 시상이 전개된다. 뒤로 갈수록 질문에 응답하는 문장들이 조금 더 폭발하듯이 쏟아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적절히 시상을 확장하면서 한 편의 시를 완성도 있게 제어하는 솜씨가 마지막에 신뢰를 주었다. 오랜 시간 시의 언어를 단련한 흔적이 역력한 ‘적당한 힘’을 논의 끝에 당선작으로 뽑았다. 축하드리며 오래 정진하시기를 빈다.
심사위원=정익진 김언 이제니 시인
[2025 신춘문예-시 부산일보]
애도 / 이희수
거대한 알이 깨지고 흰자처럼
달이 흘러나왔다 어둠이 왔다
여자는 폐건전지를 투명하고 긴 통에 모은다 위험한 유리 기둥이 나타난다 고요로 쌓은 돌무덤과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구석이 생겨난다 주석이 본문보다 더 긴 하루이다 분리 수거를 마친
여자는 댓글을 읽는다 잘근잘근 씹으며 누군가를 죽이는 잔뜩 벌린 입이 있다 냉장고 문 손잡이를 잡고 여자는 가만히 얼어붙는다 쥐도 새도 모르게 누군가 죽어가는 꾸욱 다문 입이 있다 거대한 얼음이 냉장고에서 걸어나와 빙수 기계에 올라앉는다 뼛가루가 수북해질 때까지 돌리고 돌려도 끝끝내 보이지 않는다 어디로 갔을까
여자는 새발뜨기를 한다 새는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발자국을 찍고 시접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닫힌다 옷감은 희고 발자국은 푸르다 끝단이 닫히고 쌀무더기에 새발자국이 찍힌다 바느질을 끝낸
여자는 부러진 손톱을 금 간 식탁 유리에 올려놓는다 추억을 새기듯 꽃물을 들여도 길어난 시간은 잘려 나간다 손톱을 깎는 동안 곰팡이가 빵을 먹어버린다 좋은 빵인 줄 알게 된 순간 버려야 할 빵이 된다 좋은 사람일지 모른다는 예감은 둘 사이에 균열이 생기고 난 뒤에야 찾아온다 여자는 식탁 유리를 갈기로 한다 차가운
유리 기둥 안에 장기를 기증한 시신이
들어 있다 제대로 버리는 일이 남았다
[시 심사평] 사랑을 폐기할 때는 애도가 필요한 세상
잘 쓴 시들이 참 많다는 생각으로 원고를 넘기는 동안 마음이 점점 가벼워졌다. 따로 챙기는 원고가 수북했다. 그중에서도 뚜렷하게 변별이 생기고 있었는데 이미 소비된 소재인가, 새로운 소재인가, 하는 지점이었다. 좋은 시를 고르는 기준이 소재의 문제는 절대 아니지만 신춘이라는 무대는 모든 진부함을 벗고 새로움의 얼굴을 드러내는 장이 아닌가. 어쩌면 새로움이라는 말이야말로 진부하지 않은가, 라고 반문할 정도로 우리는 새로움의 정체를 벗기고 싶을 때가 있다. 아무려나 시를 쓰는 사람이 늘어갈수록 시적 언어의 바깥은 지평선처럼 물러서며 또 다른 언어를 채집할 방랑자를 기다리는 것이다.
가장의 퇴직, 청년실업은 특히 요 몇 년 새에 많이 소비된 소재였다는 점이 새로운 표현들에도 불구하고 어떤 클리셰에 묶여버리는 것이 아쉬웠다. 선자들은 그 점이 가혹하다고 읊조리며 ‘저 별들은 내가 닦기로 되어 있다’는 가슴 아픈 문장과 이별해야 했다. 우리의 삶이 커다란 ‘대삼각형’을 그리며 사는 구조라면 더 큰 범위로 확대할 수 있으리라, 믿기로 했다. 실험적이고 모던한 시들도 몇 편 눈에 띄었지만 그 시들이 발표될 지면도 곧 있을 것 같았다.
‘애도’ 외 7편의 시를 읽는 시간은 즐겁고도 흥분되었다. ‘따로 함께였다가 함께 혼자인’ 시들을 동봉해 버린 시인의 심정이 흥미로웠고 각 시편들은 혼자서도 좋은 시였다. 존재하는 모든 사람과 사물들에게는 살아 있을 때의 존중과 존엄도 중요하지만 죽음 이후의 애도란 삶과 죽음, 산 자와 죽은 자에 대한 존엄 그 이상이다. 거기서부터 산 자의 삶이 다시 시작되기도 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을 폐기할 때는 애도가 필요한 세상이기에 그 시의성을 은근히 드러낼 줄 아는 시인의 애둘러가는 마음도 읽혔다. 그렇게 애도할 준비가 안 된 사람들의 구업에 대해서도 멈춰 생각해 볼 수 있는 시였으므로 우리는 당선자에게 진심 어린 축하를 보내기로 한다.
심사위원 조말선, 신정민 시인
[2025 광주일보 신춘문예 당선작]
생각하는 나무
이 문 희
나는 몽상가답게 낙천적이죠
구름모자를 즐겨 써요
서서 먹고 서서 자는 동안에도 반짝반짝 사색을 즐기죠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그래서 외롭지도 외로운 줄도 모르죠
빽빽한 생각에 몰두하다 보면 궁금한 게 참 많아요
덩굴장미는 용암의 뿌리에서 분출한 식물성 화산일까
바다가 파도 창고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
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매미에게는 몇 마력 울음의 엔진이 장착된 걸까
또 이런 생각도 해요
하늘에 갇힌 별들은 자유로울까
물고기는 어디를 날아가려 지느러미를 가진 걸까
무지개는 하늘 놀이터의 미끄럼틀일까 아니면 하늘 바깥으로 나가는 통로일까
나는 새들에게 의자를 내어주는 게 취미라면 취미
노래를 하고 싶거나
한바탕 춤을 추고 싶을 땐 바람 몰이꾼이 되어요
매일매일 석양을 바라보며
서쪽이라는 당신에게 시를 지어 주죠
누구나 나의 친구가 될 수 있지만
길거리에서 배낭 메고 여행 중인 달팽이를 만났다고 해서
버스정류장에 데려다주겠다는 생각은 꺼주세요
오늘도 생각의 평수를 넓혀가는 나는 자유인이니까요
낮달에게 안개에게 늘 새로운 말을 걸어요
걷느라 생각에 물든 당신이라면
그늘에 잠깐 쉬어 가셔도 됩니다
나는 생각의 씨앗을 다 모아 땅에 뿌리려고 해요
파랗게 돋아나는 생각들을 환호하며 매만지게 될 거예요
나는 파란 마을 파란 집에 살아요
[2025 광주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장석주 시인
“시행을 끌고가는 능란함에서 내공 느껴졌다”
요즘 삶의 빡빡함을 반영한 탓일까. 삶의 곤핍과 우울한 정조를 에두르지 않고 보여주는 시들이 주를 이루었다. 응모작을 읽는 내내 가슴이 답답했는데, 그것은 시에 현실의 중압감이 고스란히 삼투된 까닭에서일 테다. 막장 현실에서 떨어져 나온 사유의 파편들, 소상공인들이 현실과 맞서 고투하는 모습들, 일그러진 현실이 불가피하게 불러온 꿈의 좌초를 다룬 시들이 눈에 자주 띄었다. 응모자들이 다 진지했지만, 개성이 돋보이는 자기의 목소리, 산술적 평균을 깨고 솟구치는 이미지의 돌발성, 사유의 도약으로 독자의 의식을 내리치는 죽비 같은 시를 찾기는 쉽지 않았다는 점이 못내 아쉬웠다.
열 네 분의 작품들이 본심에 올랐는데, 최종심에서 검토한 것은 조지은 씨의 ‘이상한’ 외 2편, 이진희 씨의 ‘생각하는 나무’ 외 2편, 박시유 씨의 ‘엉겅퀴’ 외 2편, 김탄희 씨의 ‘쌍둥이자리’ 외 2편 등이다. 조지은 씨는 상투성을 깨는 이미지와 감각의 돌올함에서 단연 돋보이고, 박시유 씨는 핍진한 체험에서 길어낸 시적 진정성이 예사롭지 않으며, 김탄희 씨는 투고작 ‘921’을 읽을 때 눈이 번쩍 뜨였는데, 모호함을 뚫고 나오는 목소리에 묘한 매혹이 있었다. 헌데 ‘921’이 소품이고, 다른 응모작들이 이 시를 받쳐주지 못했다는 점이 안타까웠다.
다들 개성과 시적 수일함이 또렷했지만 심사자가 당선작으로 고른 시는 이진희 씨의 ‘생각하는 나무’다. 시행을 끌고나가는 능란함에서 만만치 않을 내공을 엿볼 수 있었다. 시편의 수준이 들쭉날쭉하지 않고 두루 고른 점, 다른 응모자들과 견줘 시의 완성도에서 앞선 게 좋은 평가를 받았다. “이파리가 많다는 건 생각이 많다는 증거랍니다”, “바다가 파도 공장이라면 하늘은 구름 공장일까/누가 저 많은 구름들을 져 날랐을까” 같은 싯구들은 알아듣기 쉬우면서도 천진한 동화적 발상을 드러낸다. 각각의 시행들이 품은 사유의 조각이 시의 전체와 유기적으로 맞물린 데서 더욱 돋보였다는 걸 밝힌다.
당선자에게 축하의 박수를, 아깝게 떨어진 낙선자에게는 위로를 전한다.
2025 전라매일 신춘문예 당선작 시 <흙의 상소문>
흙의 상소문 / 배은율
말 할 수 없는 것들을 말하고 싶을 때 흙은 붓을 들어 상소문을 올린다
얼마 전 흙속에 이름 모를 시체가 암매장 당한 적이 있다
이럴 때 흙은 운다, 울음이 붓을 키운다
흙이 밀어올린 나무나 풀들은 보이는 붓이지만 아지랑이처럼 보일 듯 보이지 않는 붓도 있다 그러나 보이는 붓보다 보이지 않는 붓의 힘이 더 세다
오래 전에 흙은 붓을 들어 낯빛이 다른 계절들이 서로의 낯빛을 훔쳐 달아난다고 쓴 적이 있다 이런 글은 기상이변이나 전쟁이 났을 때 쓰는 글이다 이럴 때 붓은 투박한 땅의 문체로 겁 없이 흙의 상소문을 쓴다
이따금 꽃가지들마다 이슬이 옮겨 앉는 일, 톡톡 터지는 이슬방울에 볼과 볼을 서로 맞대느라 바람이 물빛 아침을 잊곤 하던 일을 기억하기 위해 땅은 붓을 들기도 한다 이럴 때 붓은 새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 바위 틈 살꽃들의 신음소리처럼 섬세하게 글을 쓴다 하루를 건너온 빛바랜 기억들이 제 생각의 부피를 키우는 동안, 땅은 붓을 들어 날마다 흙의 상소문을 올린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곳은 바람이 오가는 허공이다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
그래서 붓은 늘 분주하다
<창조적 사유의 세계와 아름다운 율조 > 2025 전라매일 신춘문예 시 심사평 /김동수 시인
신춘문예 시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안목의 깊이와 독창적인 문체 그리고 역경 속에서도 그것을 창조적 사유의 세계로 견인해 가려는 치열성이 아름답게엮어져 있어야 된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에서 네 분의 시를 최종심에 올렸다.
문현순의 「이생규장전」은 죽음을 초월한 남녀 간의 애절한 사랑을 다룬 김시습의 한문소설을 소재로 ‘잡힐 듯 잡히지 않고 모래알처럼 빠져 나가는’ 환상의 경계에서 ‘너를 기다리는’는 화자의 절절한 심정에 공감된 바 있으나 전반적으로 평이한 점이 아쉬웠다.
우병기는 「조약돌3」에서 ‘너를 ~ 이렇게 가꾸어 준 것은/ 햇빛과 달빛, 비바람과 물결’이라며 존재의 본질을 향한 인식의 깊이가 남달랐으나 새로운 세계에 대한 도전의식이 좀더 요구되었다.
끝까지 조온현과 배은율의 시를 놓고 고민하였다. 조온현의 「신계(神界)로 가는 길」은 죽음에 대한 새로운 사유, 곧 ‘신계로 가는 길은 걸어 갈 수 없어 육신을 태워 하늘로 보낸다’는 아포리즘과 화장(火葬)을 또 다른 윤회의 성소로 표현한 대목이 인상적이었으나 몇 군데 산문적 서술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이에 비해 배은율의 「흙의 상소문」은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미시의 세계, 이는 불교의 공즉색의 세계와 양자역학의 입자와 파동 그리고 질량·에네지 등가법칙과도 동맥을 이루면서 우주적 비의를 새롭게 읽어내고 있었다. ‘흙이 상소문을 올리는 ~허공에는 수많은 소문이 살고 있다’는 경이로운 표현이 그것으로 우리들의 정신세계를 한층 드높여 주고 있어 당선작으로 뽑았다. (이언 김동수)
[제37회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화산리 보물선 / 이수하
그가 어떤 파랑도 타고 넘는 보물선을 만든다
담벼락 밖으로 삐져나온 보일러 연통은 좌표
개나리 꽃가지는 방위를 살피는 나침반이다
턱선의 땀방울을 향해 양어깨가 번갈아 오가며
오후를 스패너로 조인다
기름통을 싣고 와 기계실에 연결했으니
골목에서 얻은 메트리스를 선실 바닥으로 삼고
커튼은 돛으로 쓴다
눈썹에 와닿는 입김
문턱에 가는 실금 따라 살얼음이 생긴다
아귀가 맞지 않는 곳에서 갈매기 울음이 새어 나온다
유모차는 뭐 하려고?
엄마를 밀고 가려고
부러진 선풍기는 내놓아야지
거기 푸드덕 새가 살아
의자는 도로 갖다 놔 애들도 올 텐데
발 뻗을 곳이 없잖아
그는 제 식구 찾아가겠다고
삐걱대는 의자를 타고 헌 옷가지들 챙긴다
의자 다리가 구부러진 못을 물고 기우뚱거린다
잠가도 들리는 물 흐르는 소리
쇠 파이프의 긴 그림자가 기울어지는 들보를 받쳐 든다
나무 벌레 구멍 속에서 금가루 같은 햇볕 쏟아내면
갯벼룩이 기어 나온다
벼락바람이 불고
얼룩무늬 골목이 스멀스멀 방문을 밀쳐둔다
[제37회 무등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감춰진 현상 연관 따스한 시선···자연과 사물 신진대사 돋보여
시는 어디까지나 고착화되고 부절절한 이미지와의 싸움이다. 특히 그런 까닭에 깊이도, 유연성도 없는 동어 반복적이고 고정화된 이미지들의 반복과 재현은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해야할 시적 상상력을 질식시키는 조종(弔鐘)에 불과하다. 단적으로 상투적 세계인식은 우리에게 생각의 자유와 사유의 지평을 제한하는 악마적인 속삭임인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새로운 의미와 가치를 구현해나가기에도 바쁜 우리의 존재를 다시금 순응과 훈육의 대상으로 길들여 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어디까지나 시는 그동안 우리가 믿거나 당연시해온 것들을 한정 짓거나 상대화하기보다 근본적으로 다른 방식의 관계 맺기다. 특히 기존의 그 어떠한 담론이나 이념의 틀로 가둘 수 없는, 매우 다양하고 자유로운 언어적 유기체가 다름 아닌 시의 세계이다. 필시 과 에 대한 반복적인 질문과 회의, 의심과 반격이 시의 교두보이자 우리 모두가 기대하는 새로운 시인들의 출발점인 셈이다.
경향각지의 총 220여명의 951편의 응모작들 가운데 최종심에 오른 「럭키」외 2편과 「화산리 보물선」외 2편의 응모작들은 이러한 기준과 원칙에 부합되었다고나 할까. 먼저 「럭키」의 이른바 '세월호 대참사'를 배경으로 한 자유롭고 활달한 재난적 상상력이 눈길을 끌었다. 특히 기존의 주제의식이나 고루한 기법에 얽매이지 않는 점들이 눈에 띄었다, 다만 시적 집중도와 완성도에 아쉬움이 남아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솔직히 과연 새로운 세계를 열어가는 시인될 수 있을까, 일말의 우려와 고심 끝에 당선작으로 결정한 「화산리 보물선」의 경우 응모작들 가운데 가장 안정되고 차분한 시적 전개가 인상적이었다. 그러면서 가상의 '보물선'을 완성해가는 작업의 과정에서 드러나거나 감추어진 일체의 현상을 이리저리 연관시켜 가는 따스한 시선 아래, 각기의 자연과 사물들이 단지 시적 부품이 아니라 엄연한 활물(活物)로 활발하게 신진대사하는 모습이 돋보여 당선작으로 결정했음을 여기 밝혀둔다.
응모자들 모든 분들께 큰 위로와 격려의 말씀을 전한다. 아울러 오래 절차탁마의 시간을 보냈을 당선자에게도 큰 축하와 문운의 인사를 전한다.임동확 시인
[2025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 침목
침목/김미정
스위스 빙하 열차의 기울어진 유리잔을 생각했다
버틸 수 있는 각도, 그런 거 있잖아
결빙 구간이 자주 반복되었다
나는 선로를 따라 쩍쩍 갈라지고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 물이 되어 몸이 몸으로 늘어지고
완전히 누우면 각진 하늘이, 조금 측면으로 기울이면 삐죽이
솟아있는 아파트 옥상과 낙상주의가 적힌 사물함이 보였다
신은 나를 물속에 둔 채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그럴 때마다
몸을 최대한 동그랗게 말고 그 속에 얼굴을 파묻었는데
나랑 같이 있자
사이프러스 큰 나무들은 비켜서 있다
철 지난 비둘기를 부르고 솟대를 걸고 손톱을 물어뜯고,
보고 싶다 보고 싶다 열두 번 모으면 사랑해 한번
커튼이 열리면 각자의 성호를 긋고 밥상을 마주하는 사람들
비릿한 철 냄새와 밥 냄새가 섞이고
열차는 제시간에 들어오거나 연착되었다
내 자리는 콘크리트가 대신하고, 폐목이 되어 공원으로
옮겨질 거라는데
부유하는 법을 배운 건 그때부터
신은 나를 통과하게 될 것이다
기다림은 다시 기다림으로 연결된다
누구든 꾹꾹 밟고 지나가길
그렇게 홀가분해지도록 나를 분리하기 시작한다
[심사평]
"유니크한 발상·언어 구성력 뛰어나…삶 원리를 침목 속성에 은유한 가편"
2025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예년에 비해 많은 투고작들이 들어왔다. 한강의 노벨문학상의 긍정적 여파가 예비 문인들의 활황으로 이어졌다고 생각된다. 예심을 통과한 작품들의 내실도 더욱 탄탄해졌는데, 역량 있는 신인들이 이렇게 많은 작품을 응모해준 사실이 매우 기쁘게 다가왔다. 심사위원들은 꽤 많은 작품들이 빼어난 시선과 언어를 보여주었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다. 이들이 개진한 언어는 시단의 관습이나 주류를 따르지 않고 경험적 구체성을 가지고 있어 이 분들의 정성에 의해 한국 시의 미래가 밝으리라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오랜 숙의 끝에 상대적으로 유니크한 발상과 언어적 구성력을 가진 김미정씨의 시편들에 주목하였고, 그의 '침목'을 당선작으로 선정하였다. 이 시편은 철로에 놓인 침목의 외관과 생태와 속성을 삶의 깊은 원리로 은유한 가편이다. 그 안에는 기억의 구체성과 함께 오래도록 버티고 갈라지고 기울어지고 낡아온 시간이 담겨 있고, 나아가 타자를 품은 채 내면으로 신성을 안아들이는 과정이 아름답게 펼쳐져 있다. 나머지 시편들도 균질성을 거느리고 있어서 더욱 성숙한 시편으로 영남일보 신춘문예의 위상을 높여주기를 기대하게끔 해주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당선되지는 못했지만 예술성과 구체성을 견지한 사례들이 많았다는 점을 기록하고자 한다. 우리 주위에서 살아가는 타자들을 큰 애정으로 응시한 작품들도 많았는데 다음 기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더 빛나는 성과를 기대하면서 투고자 여러분의 힘찬 정진을 당부 드린다.
본심 심사위원 장옥관(시인·계명대 명예교수), 유성호(문학평론가·한양대 교수)
[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아오키가하라* / 이지우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나는 지금부터 나를 고백하는 것으로
숲에 도달할 수 있다
여름이 덜컹거리며 지나가는 어떤 날, 나는 스스로를 바꿔 보기로 했다 노력과 사랑을 뒤섞어서
밥과 함께 삼켜 보기로 했다 문장 속으로 회피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새벽을 참 좋아하고
이것은 글로 포기할 마음을 먹는다는 것
창 너머로는 고장난 실외기가 소음 없이 돌아간다
다리 사이로 차오르는 땀과 찝찝함이 아름다워지는 순간이
내게는 있다
사람이 너무 좋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미안한 마음이 지속되면 어떻게 해야 할까
녹아버린 빙하처럼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중요해지는 것이다
나는 선풍기로 외로운, 혼자인, 함께는 불가능한 스스로를 견뎌낸다 곧이어 풀과 꽃을 기록했다
푸르다, 푸른 것이다 나무는 나무라는 이름으로 죽어간다
아직 나 살아있어요, 하고서
[2025 광남일보 신춘문예] 시 심사평
언어·감정·의미 잘 다스려…시적 짜임새 좋다
정끝별(시인·이화여대 국문과 교수)
한 편의 시는 어떻게 탄생하는가. 언어와 감각과 사유와 통찰을 풀고 맺고 잇대느라 얼마나 많은 시간과 자기와의 싸움을 견뎌내야 하는 걸까? 응모된 1200편이 넘는 공들여 쓴 시들을 읽으며 드는 생각이었다. 다양한 세대의 ‘일상과 시화’라 할 만한, 우리 삶 속에 시가 있다는 서정시의 뿌리를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그 경향은 크게 고금리와 고물가로 인한 생활고, 늙음과 질병으로 인한 돌봄과 죽음, 현실 정치에 대한 비판과 풍자, 그리고 구어나 방언에 담긴 모어의 시적 실현으로 나뉘었다.
특히 한강의 노벨상 수상식이나 비상계엄령 선포 등을 시제로 다룬 시들도 간간이 있었는데, 시대의 첨예한 첨병으로서의 시의 역할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예비 시인들의 시를 읽는다는 건 늘 기껍고 설레는 일이다. 거기에는 우리 시의 과거와 미래, 그러니까 정전화된 시적인 것과 가능태로서의 시적인 것이 충돌하면서 내뿜는 에너지가 꿈틀거리며 뭉쳐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과거와 현재의 시가 무엇이었고, 미래의 시가 무엇이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을 담보하는 시들이 눈길을 끌었다.
또한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적 에너지로서의 열도(熱度), 시적 도전으로서의 신선도(新鮮度), 그리고 시적 훈련으로서의 완성도(完成度) 또한 심사의 기준이었다. 자신의 체험이나 현실적 서사에 함몰되어 시적 긴장과 응집력을 놓치는 작품들을 먼저 놓았다.
최종적으로 시적 개성이 뚜렷한 네 분의 작품이 남았다. ‘순환도로’ 외 4편은 순환도로, 회전교차로, 콘크리트, 주차선, 바퀴와 같은 도시 문명의 상징적 오브제들을 통해 도시인의 삶을 통찰한다. 굵고 간결한 직진의 시적 사유와 그 전개에 호감이 갔다. ‘나무 안에 소리가 산다’ 외 4편은 서정적 통찰을 발견의 묘사에 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시 쓰기의 연륜이 읽혔다. 잘 조율되고 다듬어진 고백의 숨결이 자연스럽게 독자를 끌어당기곤 했다. 그러나 이 두 분의 시편들에서 아쉬웠던 것은 신인에게 기대하는 시적 도전으로서의 새로움이었다.
‘테트라포드’ 외 4편은 마지막까지 손에서 놓지 못했던 작품이다. 사물의 물질성과 구도를 투시하는 감각과 사유를 현실과 잇대 놓는 튼실한 연결고리가 미덕이었다. 그러나 다소 설명적이었던 다른 작품들과의 편차가 아쉬웠다.
최종적으로 ‘아오키가하라’ 외 4편을 당선작으로 내놓는다. 언어와 감정과 의미를 다루고 다스릴 줄 안다는 믿음이 갔다. 그것들을 엮는 시적 짜임새에 군더더기가 없고, 감각과 상상력은 물론 시적 시선이 새로웠다. “외로움이란 자꾸 발견되는 이상기후”, “외로움은 누군가가 주목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처럼, 감정과 의미와 묘사와 통찰이 어우러진 밑줄을 긋고 싶은 발견의 문장들 또한 매혹적이었다. 다른 작품들에서 보여주는 균질하면서 안정된 시적 열도와 완성도가 결정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당선자에게는 축하를, 비록 당선권에는 들지 못했지만 최종 심사 대상자를 비롯해 응모자 모두에게 힘찬 정진을 당부한다.
영주신문 2025년 을사년(乙巳年) 역동적인 제2회 신춘문예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밀랍으로 기록한 연대기 / 장 진(본명: 장진길)
서울 한복판 교회 종탑 아래 자리를 잡았어요
산과 들에 살던 동료들 공중에서 살포하는 제초제에 몸살 당해
벌벌 떨며 가을물처럼 야위어갈 때
한 번도 자신의 무덤을 가져보지 못한 비눗방울 같은 희망 하나 발견했어요
살충제가 묻지 않은 산과 밭 경계 가장 밀도 높은 그늘 한 뙈기 일궈
바람그늘에 집을 지은 이웃
농부의 분꽃씨 같은 까만 맹독성 약에 몰살당했어요
나이테를 저승으로 옮기던 나무가 손가락질을 했어요
저기, 저 교회 가장 높은 첨탑 밑
마지막 유언의 손가락 끝을 따라 골목으로 갔어요
십자가 첨탑 밑에 밀랍으로 집을 짓고 밤이면 붉은 십자가 불을 보며
화장품·초·전기절연물·광택제(光澤劑)를 위해 사람 손에 끌려가지 않게 해 달라고
붉은눈물 흘리며 기도했어요
저 붉은 십자가는 얼마나 많은 지옥을 천당으로 안내했는지
하늘에 닿은 기도는 얼마나 많은 어둠을 밝음으로 환승했는지
이쪽도 저쪽도 아닌 어정쩡한 세월
조금만 쓰면 뱉어버리고
실바람만 불어도 부러지고 말 것 같은 낡아빠진 혁명
한때 인간들의 목숨줄이었던 꿀처럼 단맛들은
절신한 암담함 날갯짓하며 날아다니고
노란줄무늬 휘감은 불안은
물 마른 논바닥 올챙이처럼 극한을 오글거렸어요
벌의 목숨도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라는 소문이 따금거리며
혁명가 같은 불안함을 쏘아댔지요
십자가에 기도를 걸어놓으면
바람이 기도를 하느님에게 날라줄까요?
아련한 미궁에 또 다른 살충제가 고여 있다는 말보다
문틈으로 들어오는 희망 한 줄기 절실해
앵앵앵앵 불도 나지 않은 집에 구급차를 불러봅니다
2025년도 을사년(乙巳年) 영주신문 제2회 전국 신춘문예 심사평을 듣다
2025년도 영주신문 제2회 신춘문예 응모한 작품은 각 지방별로 보면 작년 제1회 때보다 많은 문인들이 응모했다. 지역별 응모 편 수를 보면 서울 270편, 경기도 337편, 전남 301편, 전북 198편, 충남 144편, 충북 117편, 경남 138편, 경북 161편, 부산 67편, 제주도 61편, 강원도 78편, 대구 151편 등 응모해 왔다. 총 편수는 2023편이었다.
심사위원들 4명이 작품 전편을 엄정하고 꼼꼼하게 심사했다. 작품을 나누어서 1차 심사한 후 좋은 작품을 선정하여 다시 윤독하면서 가장 훌륭한 작품을 찾아내려고 더욱 고심하였다.
따라서 네 사람의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좋다고 하는 작품은 장 진(본명, 장진길)의 작품 「밀랍으로 기록한 연대기」 외 4편이었다.
당선작품 첫머리에 ‘서울 한복판 교회 종탑 아래 잡았어요’ 이렇게 시작한 작품은 벌들이 생존을 위해 산과 들에 살포되는 제초제와 살충제를 피해 몰살당하지 않기 위해서 서울 한복판에 있는 교회의 가장 높은 첨탑 밑에 마지막 유언의 손가락 끝을 따라 자리를 잡고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독일 태생의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의 예언에 의하면 ‘꿀벌이 사라지면 인류도 4년 안에 멸종될 것이다.’라는 말이 있다. 시인은 이 벌들이 십자가 첨탑 밑에 밀랍으로 집을 짓고 밤이면 붉은 십자가 밑에서 사람들 손에 끌려가지 않도록 붉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한다고 했다. 이 시인의 상상력이 어디까지에 도달할 것인가를 생각해 보았다.
저 붉은 십자가는 지옥으로 갈 많은 사람들을 천국으로 안내하고 또 하늘에 닿을 기도를 통해 많은 어둠을 밝음으로 인도하고 있는지를 상상하고 있다.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은 지식보다 중요한 것은 상상력(Imagination is more important than knowledge)이라고 하였다. 상상력은 인간사人間事 발전에 기초다. 시인에게 있어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풍부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훌륭한 작품을 쓰는 것이다.
시의 마지막 부분에는 ‘십자가에 기도를 걸어놓으면/ 바람이 기도를 하느님에게 날라줄까요?’ 기도의 힘으로 하느님께 의지하고 싶은 마음을 피력하고 있다.
작품 「선인장」은 춘하추동 주인을 기다리며 살아가는 선인장의 삶, 선인장의 울음마저 말라버린 마음 아프게 기다리는 삶을 그려놓았다. 기다린다는 것은 그리움이고 그리움에는 마음을 도려내는 아픔이 따르는 것이다.
작품 「명문대」는 시인의 기발한 상상력을 발휘하여 쓴 작품이다. 바다에 살고 있는 어족들의 첫머리 글자를 따서 시 제목을 ‘명문대’라고 하고 그 동문회에서 명태의 인사말, 문어교수의 축사, 대하 고문의 격려사를 통해 오늘의 삶을 명문대 학생들의 유언으로 표출하고 있다.
작품 「동굴 속 독화살」은 무서운 상상력의 시이다. 요즘 정치인들의 막말을 들으며 이 작품이 얼마나 무섭고 아름다운 시인가를 느끼게 한다. 사람의 말은 동굴 속의 독화살도 되고 또 남에게 듣기 좋은 말로도 표현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입속을 하나의 동굴이라고 하면 입속의 말은 그 말을 뱉어내기 전에는 독이 들었는지 꿀이 들었는지 아무도 모른다. 시인은 마지막 한 행에 ‘말은 최초에 뱉은 시간만 기억하다 사라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마지막 작품 「주목」도 좀 기발한 작품인 동시에 아이러니한 작품이다. 작품의 첫 연에서부터 셋째 연까지의 주목은 ‘주목하세요’의 주목이다. 마지막 연에서는 생쥐가 주목을 타고 오르는 것으로 이미지(image)를 달리하고 있는 작품이다.
‘어제를 통해 배우고, 오늘을 통해 살아가고, 내일을 통해 희망을 품습니다. 중요한 것은 끊임없이 의문을 멈추지 않는 것입니다.’라는 아인슈타인의 말을 우리 모두 기억하기 바란다.
심사위원 : 이서빈 시인 · 이 옥 시인 · 정구민 시인 · 박영교 시인 · 글빛나 시인(평)
[2025 한라일보 신춘문예 당선-시(가작)]
고등어 가족 / 장주호
이전의 삶이라면
분명 기요틴이 되었을
치밀하고도 잘 짜인 나무
그 반질반질한 제단 위에 올라선
모임에 어울리지 않는 입김의 뜨거움
오로지 죽어서 죽을 수 없는 존재만이
허공의 달과 눈을 맞출 수 있다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
가죽 채찍처럼 후려치던 짜디짠 마름쇠
이윽고 죽 찢어진다
구석구석 발려진다
각자의 영역을 나온 순간부터 비극
농축된 작은 금속들은 온몸의 살을 후벼 파는데
걸쭉한 피 한 줄기가 느껴지는 듯하여
구긴 초대장을 얼른 이마 위로 가져간다
요리를 기다리는 콩과 콩각지의 사이
아픈 멍을 스스로 눌러보는 것은 즐거운 일일까?
분쇄기들엔 의도가 있다는 것이 앵무새와는 다른 점
들어가는 입과 나가는 입을 구분할 수 없고
고등어의 가시는 꼭꼭 씹을 수 있다
그 자잘함에 표본이 되지는 못한다
얼굴 그림자 위로 젓가락이 곡예비행을 한다
그 짭짤함에 도무지 끊지를 못한다
[2025 한라일보 신춘문예/시-심사평] 무난한 전개… 작품성의 균형도 중요
양영길(평론가), 윤봉택(시인), 김지연(시인)
[한라일보] 시부문에는 115명의 작품이 응모되었다. 우선 '주제와 소재의 신선함', '시적 상상력과 독창성', '새로운 비유와 상징', '시적 언어의 운용', '시적 구성의 이해' 등 5가지 기준을 토대로 심사했다.
이를 바탕으로 26편을 우선 선정하고 논의를 거듭한 결과 최종 4편으로 압축됐다. '소금이 오다', '광합성의 시간', '구름의 패턴', '고등어 가족' 등이었다.
'소금이 오다'는 서사적 내레이션이 매력적인 작품이지만 자칫 수다에 그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있었다.
'구름의 패턴'은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읽히지만, 가벼움을 풀어내기 위해서는 가벼움을 털어내야 한다는 지적이 있었다.
'광합성의 시간'은 시적 체화의 측면에서 현실을 질박하게 잘 풀어내고 있었다. 그러나 시적 군더더기들이 약점으로 지적되었다.
'고등어 가족' 외 4편은 무난한 전개가 장점이지만, 투고된 작품들의 제목이 단조로우며 작품성이 균일하지 않은 점 등이 지적되었다.
최종 숙의 끝에 심사위원들은 '고등어 가족'을 가작으로 선정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당선작이 나오지 않아 아쉬웠다.
시적 구성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작품들이 더러 있어 안타까웠다. 신선하게 주제와 소재를 다루는 시적 상상력과 독창성은 모든 창작의 생명력이라 할 수 있다.
[2025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 당선작]
〈구인〉 광명기업
김용희
외국인 친구를 사귀려면 여기로 와요 압둘, 쿤, 표씨투 친해지면 각자의 신에게 기도해줄 거예요 한국인보다 외국인이 더 많은 글로벌 회사랍니다 요즘은 각자도생이라지만 도는 멀고 생은 가까운 이곳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해요 매운맛 짠맛 단맛 모두 준비되어 있어요 성실한 태양 아래 정직한 땀을 흘려봐요 투자에 실패해 실성한 사람 하나쯤 알고 있지 않나요? 압둘, 땀 흘리고 먹는 점심은 맛있지? 압둘이 얘기합니다 땀을 많이 흘리면 입맛이 없어요 농담도 잘하는 외국인 친구를 사귀어봐요 쿤과 표씨투가 싱긋 웃습니다
서서히
표정을 잃게 되어도 주머니가
빵 빵 해질 거예요 배부를 거예요
소속이란 등껍질을 가져봐요 노동자란 명찰을 달아주고 하루의 휴일을 선물해 드릴게요 혼자 쌓고 혼자 무너뜨리는 계획에 지쳤나요 자꾸 삐걱대는 녹슨 곳이 발견되나요 이곳에서 기름칠을 하고 헐거운 곳을 조여보아요 감출 수 없는 등의 표정을 작업복으로 덮어 봐요 작업복을 입으면 얼룩이 대수롭지 않고 털썩 주저앉아도 괜찮다는 생각이 들 거예요 툭툭 털고 일어나는 털털함을 배워보세요 먼지 풀 풀 날리는 공장이지만 한 뼘씩 자라는 미래를 그려봅시다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자꾸 가게 될 겁니다 긍정 쪽으로
밝은 빛이 이곳에 있습니다 일종의 상징이지요 바람이지요 떠오르는 해를 보며 출근길에 몸을 실어보세요 터널을 좋아하나요 터널이 좋아지게 될 거예요 끝엔 항상 빛이 있다는 사실로
어둠에 갇혔나요
이곳의 문은 활짝 열려 있습니다
분류 : (중소기업) 제조업 - 선박 부품 제작
임금 : 최저시급, 일 8시간(잔업 1시간), 격주 토요일 근무
깔 깔 깔
쿤이 땀 흘리며
너트를 조이는 래칫 렌치를
이곳 사람들은 깔깔이라 부릅니다
웃음 많은
이곳으로 와요
[심사평]
노동문제 발랄한 문장으로 녹여내…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詩
암울한 코로나19 시기를 지나 자신과 세계의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는 탄력적인 상상력과 경쾌하고 발랄한 목소리를 우리 시의 뜨거운 현장에서 만나는 즐거움이 컸다. 심사 내내 젊은 층의 투고가 두드러진다는 인상을 받았다. 삶 속에서 얻어지는 문장들과 상상화된 것을 통해 역으로 깊이 있게 현실을 성찰하는 시편들에서 ‘나’를 관찰하고 ‘나’를 정립하고자 하는 활달한 시적 의지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응모작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겠다. 첫 번째로 생활시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 여기에서 눈에 띄는 것은 일상의 감정이나 사건을 나열하는 방식에서 탈피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가족에 대한 시편들도 어머니나 아버지뿐만이 아니라 고모, 이모 등 폭넓게 소재를 확장하여 가족 관계를 성찰한다. 또한 인간 아닌 유령 같은 비인간적인 존재들, SF나 우주를 끌어들인 묵시록적인 분위기, 반려동물과 반려식물들을 활용하는 등 일상 속에 중간중간 끼어들어 오는 타자에 대한 관심을 증폭해낸다. 두 번째로 이상기후나 지구 환경에 대한 관심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다른 존재와 맺는 생명 관계를 설정하려는 시도이다. 세 번째로 현실을 내면화하여 드러낸다는 점이다. 즉, 사회적인 문제를 내면화하여 바라보려는 시적 통찰을 밑바탕에 둔다. 몇 차례의 토론과 고심의 시간을 거쳐 당선작과 경합을 다툰 작품은 아래와 같다.
‘랜드’는 문명 세계가 가지고 있는 그림자나 위험성을 반어적으로 경쾌하게 제시한다. 자본이 자리를 잡기 전 세워지다 만 놀이공원을 통해 묵시록적으로 반문명적 상상력을 전개한다. 주제가 클 수도 있는데 그것을 담담한 이미지로 전달하고 있기에 다정한 듯하면서 쓸쓸하게 다가온다. ‘완벽한 인사’는 잘 짜인 작품이라는 평을 받았다. 가족에게 남자 친구를 소개시켜 주는 서사적인 상황을 시적인 것을 놓치지 않으면서 전개한다. 서로 소통하는 듯하지만 단절되고 마는 관계를 어긋나는 대화를 이어나가는 방식으로 맛깔나게 표현한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말과 침묵의 관계를 리드미컬하고 절제 있게 전개할 뿐만 아니라 시적 여백을 최대로 효과 있게 사용하는 시적 전개가 인상적인 작품이다. 말의 운용과 함께 빚어내는 상상력이 산뜻하고 새로우며 안정감과 숙련된 느낌을 준다. 하지만 ‘랜드’는 몇몇 시행이 다소 평이하고 긴장감이 떨어진다는 점이, ‘완벽한 인사’는 세밀하게 전개되는 리얼리티가 장점이나 시적 구성이 다소 단조롭다는 점이 지적되어 제외되었다. ‘집이 납작해질 때마다’는 당선작과 끝까지 경합을 벌였다. 다만, 일상의 공간이 상상 공간으로 넘어가는 데 있어 세련된 품격을 보여주지만 그 시적인 이미지들이 모여서 의미의 구심점을 만드는 데까지로는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시를 쓰는 솜씨가 돋보여 앞으로의 미래가 기대된다는 점을 부기한다.
당선작으로 선정된 ‘<구인> 광명기업’은 오늘날의 현실에서 직면한 노동의 문제를 밀도 높은 리얼리티의 사회적 지형도로 구현한 작품이다. 자신이 매일매일 현장에서 피부로 경험하는 노동의 현장을 무겁게 문제화하지 않고 가볍게 경량화해서 다룬다. 구인 공고 형식을 활용하여 현장 노동자의 입을 통해 한국인을 포함, 외국인이 함께 일하는 ‘광명’기업이 얼마나 좋은 곳인지, 이곳이 얼마나 유토피아 같은 곳인지 소개하고 있지만 그게 얼마나 반어적인지를 발랄한 문장 속에 녹여낸다. “소속이란 등껍질” “동그란 베어링을 만들다 보면” ‘땀’과 ‘웃음’의 병치 등의 위트 있는 겉이야기를 통해 그 이면의 노동자가 현장에서 직면한 고통과 사회적 문제를 씁쓸하면서도 수가 높은 아이러니로 드러내고 있다. 무거운 것을 가볍게 하여 어떻게 현장감과 공감력을 획득할 수 있는지 우리 시대의 진화된 노동시의 한 모습을 여실히 제시한 작품이다. 당선작에서 보여준 현장감과 기량이 앞으로 써 나갈 작품에서 어떻게 더 뻗어 나갈지 새로운 노동시의 면모가 기대되며, 당선을 거듭 축하드린다.
[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 / 김지민
꿈이 쳐들어와 며칠째 끌고 가요
뿌리가 박혀 있는 재건축지구로
굴러다니는 벽시계 옆 이불과 옷가지 사이 사하라 장미는 피어 태엽을 작동하고 고양이가 고양이 꼬리를 잡고 무너진 담장을 친친 감아요 마침표를 찍었어도 빈집과 빈집 사이로 길이 지나가요
세발자전거와 두발자전거 사이에 있던 들뜬 목소리
그 소리가 어디로 갔을지 궁금하지만
살아있는 것들은 살고
넝쿨은 집으로 집으로 또 집으로 가요
갈라진 벽으로 들어온 찢어진 햇빛
빛과 함께 살아나는 먼지
벽지에서 헤매다 색을 잃어가는 색연필
메뉴판에서 썩어가는 토마토를 불러와 요리해요
어제와 다름없는 지붕을 만들어요
오르톨랑이 차려진 식탁
먹어본 적 없는 맛이 불러온 우리 집
이곳의 하늘이 가라앉을 동안
그늘이 그늘을 부풀려 발이 그늘 속으로 사라지고
우리의 과거는 해체되고 있어요
우리만 떠나고
여기엔
아침이 오고 쓰레기도 생기고 꽃이 피고 길이 지나가
고양이는 거실에서 짝짓기를 하고
살아 본 적 없는 세상에서
살아 본 적 없이 사는 것들이
이끼가 나무 의자를 점령한 시간의 길이를 재면서
있어요
우리는 아직도 집으로 집으로
[2025 경인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평] 김명인 시인·김윤배 시인
“무너진 옛집서 찾은 삶의 흔적… 마지막까지 울림 지속”
정치적 격랑을 거치면서, 계속 되는 불황을 견디면서, 우리들의 시심은 더 높아지고 더 깊어졌음을 응모작품을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하면 누구나 시인입니다.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가슴 속 깊이 숨어 있는 서정을 사물에 투사하여 사물의 본질을 드러낼 수 있다면 훌륭한 시인입니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될 수 있다면 아름답고 기쁘고 담대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시심은 연민입니다. 이 사회가 연민으로 가득 찬다면 시편들은 사회 병리를 치유하는 치료제가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기쁜 일은 응모작품의 수가 늘어났으며 작품의 수준이 높아졌다는 사실입니다.
작품의 경향은 대체로 일상생활에서 느꼈던 감정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또한 철학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고 있는 작품들이 많이 눈에 띄었습니다. 두 심사위원은 오랜 토론 끝에 김지민을 당선자로 밀었습니다.
김지민의 당선작 ‘넝쿨은 집으로 가요’는 재건축지구의 폐기물들에서 찾아볼 수 있는 삶의 흔적들에 깊은 시선을 보내는 시입니다.
굴러다니는 벽시계는 사하라 장미가 그려져 있고, 빈집과 빈집 사이에는 길이 지나가고 있습니다. 사라진 아낙의 목소리가 어디에 있는지 궁금하고, 오르톨랑, 즉 멧새 요리가 차려진 식탁이 있기는 하지만 먹어본 적이 없으니 상상속의 음식일 뿐입니다.
온갖 폐기물들 사이에 자라나는 넝쿨은 끈질긴 생명력의 상징입니다. 이미 무너져버린 옛집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는 넝쿨은 재건축지구에 살던 주민들의 마음일 것입니다.
버려진 메뉴판은 재건축되기 전, 그곳에서 음식점 영업으로 생계를 이어가던, 그리하여 주민들과 정담을 나누던 업주의 마음일 것입니다. 재건축지구의 하늘이 가라앉고 그늘이 커지면 그늘 속으로 발을 옮기던 사람들이 떠나고 주민들의 과거가 해체되는 것입니다. 결국 주민들은 재건축지구를 떠납니다. 서럽고도 슬픈 일입니다.
‘우리들만 떠나고’라는 마지막 행의 울림이 오래 계속됩니다. 부디 한국 시단의 미래를 예인하는 능력 있는 시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025 중부광역신문 신춘문예]
이끼의 날들
이승애
흩어진 뼈를 일으키는 건 습기입니다 수억 년 전 물에서 태어나
기댈 곳 찾아 뭍으로 온 우리는 태초의 냄새를 기억합니다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
음습한 골목길, 물에 젖은 하루가 절뚝이며 지나갑니다
언젠가 불렀던 곡조는 밟히고 또 밟혀도 살아납니다 노래가 아닌
그 한 소절을 흘리며 골목 끄트머리로 사라질 때 멀리서 바라본 혼
자만의 은밀한 기억을 녹이면 어둡고 축축한 그늘 맛이 납니다
막막함에도 내성이 생기는 걸까요
빛은 어차피 우리의 핏줄이 아니기에
더는 숨길 수 없는 조짐이 파랗게 피어오르면 하나가 됩니다
눅눅하고 미끄러운 예감으로 같은 종족을 알아봅니다
세상에서 소외된 분노는, 짓밟는 발목을 뿌리치거나 썩은 나무나
그늘진 바위를 덮기도 하지요 이때 우리의 피는 온통 뜨거운 녹색입니다
한 사내가 끊어진 노래를 기타 하나에 담아두고 뒷것이 되었지요
잎과 줄기 구분 없이 바닥이나 틈을 붙잡고 납작한 숨을 쉽니다 피가
마르면, 끝내 사라질지라도
<심사평>
시는 고백에서 시작한다'는 말이 있듯이, 시를 쓰는 것은
개인적인 체험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신변잡기적 고백에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주변의 사물과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사회적인 현상을 주시하며 확장해야 한다. 따라서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찾아 나서는 소외된 사람들에게 탈
출구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 시인이다. 시인은 시
를 통해 독자들을 위로하며 삶의 빛을 줄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시인으로서의 사명과 책무 중 하나다.
원고 뭉치를 받으면서 올해는 어느 해 보다 예사롭지 않
을 것 같다는 감이 들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작품 수에
주눅이 들기도 했지만 한 편 기대감과 반가움이 수반되었
다. 역시 첫 대면한 응모작부터 침을 몇 번인가 삼켜야 했
다. 그만큼 수작도 많았다. 대체적으로 선이 굵은 형상화
와 이미지가 날카롭게 살아있는 시들이 많았다. 반면 압
축의 미가 사라진, 마치 집을 나간 시가 숲을 헤매는 듯한
시들도 상당수 보여 이것이 요즈음의 트렌드인가 싶은 정
도로 의구심을 품게 했다. 그러나 아직은 이러한 시적 형
식은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마음으로 심사에 임했다.
삼고초려를 하듯 되 읽고 반복된 심사를 하며 고민 끝에
권서연의 '지브라 크로싱', 이희경의 '해바라기', 이승애의
'이끼의 날들'이 최종심에 올랐다.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
로 내도 흡이 없을 수작들이나 '지브라 크로싱'은 높은 문
장력에도 너무 강한 디테일이 오히려 본연의 맛을 반감시
키고 말았다. 또한 출품한 그 외의 작품들과의 큰 편차를
보여 아쉬움이 남았다. '해바라기'란 시 역시 이미지 디테
일은 좋았으나 아직은 물이 끓기 전의 온도 같은 맛을 보여주었다. 다만 일정 수준에 오른 시적 표현은 추후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했다
반면 '이끼의 날들'은 시의 주제를 향해가는 언어적 의지
의 구사는 결코 단순하지 않았다. 현실에 반향하는 내면
의 울림과 어찌 보면 세상이 무심히 흘려버릴 사소한 기
미조차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그러쥐고 나온 자연스러
운 언어 감각과 섬세한 묘사는 시의 완성도를 이루는데
성공하였다. '이끼'라는 작은 소재에서 세상의 음지에 머
무르는 사람들의 아픔을 읽어내는 예리한 통찰력이 돋보
였다. '태초의 냄새' '축축한 그늘 맛' '미끄러운 예감' '뜨
거운 녹색' '납작한 숨'으로 이어지는 감각적인 표현도 오
랜 숙련 기간을 방증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시간에
띄지 않는 세계에 살고 있을지라도, 본성의 힘은 약한 것
이 오히려 강한 것이 아닐까 하는 역설의 세상도 그려낸
마치 푹 고아 낸 사골 맛을 느낄 수 있었다
'이끼의 날들', '해바라기' 두 작품은 뛰어난 형상화로 현대
시의 든든한 시의 기틀을 이룬 어느 것을 당선작으로 해
도 무방하다고 생각되지만 깊이 들어가 시의 내면을 보면
비중의 차이를 바로 느낄 수 있었다. 당선 시 이승애 시인
의 '이끼의 날들'은 몸성으로 이룬 형상화로 생생한 시의
맛을 느낄 수 있어 시선을 끌었다. 이끼라는 평범한 소재
로 자신의 특별한 감정을 놓치지 않아 글을 끌고 나기는
힘이 있는 시다. 소외되고 짓밟히기 쉬운 서민의 애환의
삶이 잘 반영된 면도 눈에 띄었다. 당선시 '이끼의 날들'에
서 2연 한 연을 다 차지한 '음지는 우리의 몫이지요'란 간
결한 시구가 압권이었다. 심사위원 만장일치로 당선작으
로 올렸다. 당선자에게 건필을 기대하며 진심으로 축하의
말을 전한다.
결선에서 눈에 들어 오는 시가 몇 편 더 있다. 이미경의
벚나무가 보이는 중환자실', 최걸의 '그날 밤', 민은숙의
성인여드름', 서상규의 '감자에게, 감사로', 김창식의 '가
을을 깁는다'가 여운을 남기는 시였다. 당선된 이승애 시
인과 우수상 수상자인 이희경시인 등외로 밀린 모든 분들
의 강건과 문운을 기대한다.
[2025 불교신문 신춘문예 당선작]
산사 / 최원준
범종 소리에
겨울 은사시나무가 흔들리고
송백에 남아 있던 가느다란 푸른 선이 흔들리고
뒤로멈춤앞으로
밤을 지켜보던 소쩍새 눈동자 흔들리고
범종 소리는
옹송그리며 가지에 점으로 앉은
꽃봉오리를 툭 하고 건드리고
툭 하고 밀치다가 서로 얼싸안기도 하고
그리하여
범종 소리에
소스라치게 놀란 매화나무는 가지에
꽃을 점점이 피워낸다.
고요가 있고, 적막이 있고
그 속에 소란이 있고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
범종 소리에
계곡은 파문을 일으키고,
바람 따라 그 소리 배회하다가
뒤로멈춤앞으로
팔상도 쓰다듬으며
부처님 안전에 매화향 전해주면
범종 소리에
밤은 끝을 비추고
동쪽 산은 붉은 점안식 준비를 재촉하였다.
<심사평 / 문태준 시인>
구도심으로 바라본 세계
올해 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에는 많은 분들의 응모가 있었다. 구도(求道)의 시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불교시의 특징을 뚜렷하게 보여주는 시편들이 주를 이뤘다. 욕망의 제어, 내면의 평정(平靜)과 빛, 사찰 풍경 등을 다루었고, 특히 열암곡 마애부처님을 소재로 한 작품들도 눈에 띄었다. ‘숨은꽃’, ‘만휘 진리’,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만화경’, ‘산사’, ‘윤필암에서’, ‘신륵사’ 등의 작품에 주목했고, 당선작 선정을 두고 마지막까지 남은 작품은 ‘바람의 여정’, ‘반가사유상’, ‘산사’였다.
‘바람의 여정’은 숙련된 시조 창작의 솜씨를 보여주었다. 이 작품은 벌판에서 산기슭, 봉우리와 능선을 지나 다시 하강해 강물에 스며드는 바람의 행로를 시종 따라가면서 결박됨이 없는 바람의 자유자재함을 표현했다. 그러나 “허허로운”, “요란하게”, “헉헉거리며” 등의 시어 선택에서 보여주듯이 공간과 주체를 수식하는 시어를 조금만 더 정교하게 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반가사유상’은 견고한 고요와 고고함을 읽어내는 시안(詩眼)이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절대적 지복의 얼굴”이라고 쓴 시구나 “모든 경계를 허무는 순간/ 주고받는 것이 유리처럼 맑다”와 같은 시행은 독창적이었다. 언어를 절제하고, 언어를 거듭하여 덜어내는 퇴고 과정이 오래 있었더라면 보다 완성도를 높일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은 ‘산사’로 결정했다. 이 시는 산중 사찰 공간에서의 범종 소리의 울려 퍼짐과 부처님을 향한 예경을 노래했는데, 무엇보다 대상과 대상 사이에 이루어지는 상호 작용을 간파하는 시적 인식이 빼어났다. 하나의 움직임 속에 있는 밀침과 끌어안음, 적요와 어수선함을 동시에 읽어내는 안목도 높았다. 특히 “달빛이 돌그림자를 움직이는 동안”이라고 쓴 대목은 수일(秀逸)했다. 여기에는 일순과 시간의 경과, 평면적인 것과 입체적인 것, 정적인 것과 역동적인 것이 미려하게 뒤섞여 있었다. 이러한 능력이라면 앞으로 마음밭을 일궈 불교시, 그리고 한국시의 일신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했다. 당선을 축하드린다.
[2025 한국불교신문 신춘문예 시 당선가작]
정중동(靜中動) / 대활스님
고개 걸린 흰구름
걷힐 생각 없고
솔향 실바람
열린문 닫는다
깊게 타든 촛불
꼬리를 흔들고
게으른 山僧(산승)
긴하품 몰아 쉰다
다리다 만 녹차향
골방을 맴돈다
【심사평】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 높이 사
예심을 거쳐 올라온 본심 작품들은 예년과 수준이 비슷했다. 주변의 사물과 풍경묘사를 통한 생의 성찰과, 그 고통의 각인이 예사롭지 않은 질문처럼 느껴졌다. 우리 삶의 소외된 상태를 떠올리면서도 이를 어루만지는 연민의 시선이 가슴을 치기도 했다. 삶과 시간의 인식이 갖는 누추를 광휘의 꿈빛으로 떠올리는 시선도 눈길을 끌었다. 때로는 현실과 꿈의 간격이 커서 비유가 헐거운 경우도 있고, 처음의 촘촘한 언어 밀도가 뒤에 가서 풀어지는 단점이 발견되는 경우가 있지만 현실 인식과 이를 떠받치는 연민의 기둥이 단단하여 우리 시의 고통스러우면서도 숭엄한 현재성을 보여주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문제는 다른 데서 불거졌다. 신춘문예는 신인 등용문으로서의 위상을 가지는 만큼 이미 문단 활동(공모전 수상, 시집 발간 등)을 하고 있는 이들은 제외한다는 원칙이 있다. 이번 수상 대상 시인들이 그 점에서 결격 사유가 있는 것이 확인됨으로써 수상에서 제외된 것은 안타깝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수상 대상을 좁히는 과정에서 이 문제가 계속 불거져 부득이 당선작을 내지 않기로 했다.
다만 본심 작품 가운데 스님의 작품 한 편을 가작으로 선정한다. 시 ‘정중동’은 선시 특유의 분위기로 소리와 정적, 움직임과 멈춤, 그리고 시각과 후각의 미묘한 파동이 어우러지는 깔끔한 세계를 드러낸다. 핏기 없는 맑은 세계만을 다소 고답적으로 떠올리는 미흡감을 느끼면서도 지금 우리 시들에서 보기 힘들어진 간결하고 단아한 모습을 산 것이다.
[2025 현대경제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
대상
파밭 / 염경순
하얀 다리를 걷어 올린 푸른 대궁
채마밭 굵은 파들이 쑥쑥 자란다
대궁 안은 한 숨 두 숨 잔뜩 부풀었는데
속내를 알 수 없는 통통한 옆구리를
청개구리 한 마리가 발가락으로 간질인다
세상을 머금은 듯 단단히 여민 대궁
아무리 흔들어도 속을 보여주지 않는다
꺾지 않으면 속을 들여다볼 수가 없다
속을 보려고 대궁을 꺾을 수도 없다
대궁 안에 들어 있는 작은 세상
가만히 숨죽여 귀 기울이면
아무리 생각해도 도통 답을 찾을 수 없는 일들이
끙끙 속을 태우며 들어앉았다가
말문이 터지듯 어느새 쑤욱 답을 밀고 올라와
파바밭! 꽃대 위에서 하얀 꿏망울로 터진다
파밭에서는 꽃이 필 때마다
나비랑 벌 무리 좋아라 야단법석이다
대궁은 여전히 무슨 궁리 그리 깊은지
하얀 꽃 속 까만 씨알이 응어리처럼 영근다
세상에는 얼마나 많은 비밀이 있던가
작은 세상이 일일이 영그는 이치를 다 알 수는 없지만
백제의 향로 같은 깊은 침묵이 피워 올린 꽃대는
푸른 속내흘 감추며 더욱 단단해져가고
꽃씨는 벌써부터 파 밭 파 밭 아우성인데
나는 생각이 여무는 그 침묵이 좋아라
발뒤꿈치 들고 조용조용 서 있는 파뿌리들
우수상
새벽배송 공작소 / 김선욱
잠든 사람이 더 많을 열두 시 반
작고 노란 봉고차에 이형화물처럼 올라타서
접이식 의자를 펼치고 졸음과 함께 앉아서
로켓도 쏘아 올릴듯한 기지에 도착해서
거대한 명령과 굉음에 쪼그라들어서
너도 나도 그냥 입고 온 대로 입고서
무심한 컨테이너벨트 앞에 서서
잘못 거드린 도미노처럼
쏟아지는 토트박스 토트박스
왼손은 청기 오른손은 백기
청기 백기 함께 올려
청기 백기 함께 내려
반복하다가 가끔
청기가 어딘가에 끼어서
박스와 박스사이라거나 선반의 틈,
깜빡하고 가져와버린 마음에도 끼어서
십오 분의 쉬는 시간에
끼었던 손을 빤히 바라보는 것
내가 나한테 이래도 될까
하고 물어보는 것, 그때
여러분은 이곳에 돈 벌러 온 것 이라며
줄줄 새는 욕으로 우리를 부리는 사람이 있다
모두가 토를 달지 않고 묵묵하게
청기백기 청기백기를 반복하는 것으로
능숙한 백기를 든다
집에 있거나 있었던 사람들을 생각하며
너무 큰 옷을 입은 물품들이
롤테이너에 실려 도크 밖으로 빠져나갈 때마다
새벽이 닳아간다
병렬로 놓인 무수한 트럭 틈 사이로 햇빛이 스며든다
혹지 꼭 안가셔도 되는 분 있습니까
조금 더 일하실 수 있는 분 있습니까
힘 빠진 청백기 대여섯 개가 죄처럼 들려지고
나는 옆 사람 얼굴을 쳐다보고
그 사람도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본다
우리가 우리한테 이래도 될까
<심사평>
함축된 언어와 유려한 문장 탁월
정화되고 함축된 언어와 시심을 엿볼 수 있는 엄경순 작가의 「파밭」과 삶의 현장을 떠돌며 삶의 살아 있는 소리에 귀를 기울인 김선욱 작가의 「새벽배송 공작소」.
시 부문을 심사한 방민호 문학 평론가는 대상 수상작인 「파밭」에 대해 “파밭은 시인의 시의 언어에 함축된 정화된 시심, 탈속한 심성을 한껏 맛볼 수 있게 한다”며 “요즘과 같은 혼탁한 시대를 맑게 씻어낼 수 있는 감성의 시로 대상 수상작으로 선정한다”고 강조했다.
우수상 수상작인 「새벽배송 공작소」에 대해서는 “시가 현실에 보다 밀착돼야 한다는 의식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며 “새벽 배송 작업 현장이나, 문래동, 공덕역 같은 삶의 현장을 ‘떠돌며’ 오늘의 삶의 살아 있는 소리에 귀 기울이고자 한다”고 소개했다.
[2025 오륙도신문 신춘문예 시 부문 당선작]
허수아비
박상철
눈물이 없다고 가슴까지 메마른 건 아니다
바람에 흔들리지만 마음은 굳건하다
때때로 혼자 뭉게구름을 타고 올라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는다
바람에 찢긴 누더기
외로움에 부러진 가지를 놓지 못하고
너덜너덜해진 팔
새들은 제 세상인 양 집을 짓는다
우거진 수풀 사이
내 겨드랑이는 종달새 집
바람에 기울어진 몸이
몇 몇 새를 쫓지 못하고 동거를 허락한다
오래된 들녘에 덩그러니 나는 버려져 있어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린다
커튼을 올려도 소식 없는 아이들처럼
나는 독거노인이 되어 저물녘 소멸을 노래한다
<심사평>
새롭게 읽히고 공감 가는 수작
#시 부문= 신춘문예가 주는 가장 큰 의미는 새롭다는 것이다. 새로운 것은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이고 그것으로 인해 무엇인가를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것이 아주 낯설거나 무의미한 것이어서는 안 된다. 생경함은 주변과는 어울리지 못하고 독자들은 쉽게 공감하지 못하게 된다. 심사위원은 이점에 중점을 두었다.
새롭게 읽히되 무의미하지 않고 공감을 주는 데 성공한 작품. 이런 조건으로 보자면 「허수아비」는 여기에 충일한 작품이다. 우리가 그냥 생각하는 허수아비가 아니다.
“온 들녘을 다녀도 발자국을 남기지 않”으며 “빈 방을 안고 몰래 나간 새들을 기다”리는 허수아비는 허수아비로만 읽히지 않는다. 좋은 시가 그렇듯 「허수아비」는 상징으로도 읽히기 때문이다.
독거노인이 되어 소멸을 노래하며 빈들을 일으키는 온정과 진리를 동시에 지닌 존재로 읽힌다.
심사위원은 시대가 어렵고 힘든 때 일수록 이런 해자 (垓字)를 지닌 초인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 「허수아비」를 당선작으로 힘차게 밀어 올린다.
「그 겨울을 건너는 법」 「샷 추가」 「신발」 「언어를 가두다」 등의 작품이 마지막까지 겨룬 작품이었지만 아쉽게 다음 기회를 보기로 하였다.
시적 대상을 안일하게 바라보거나 상상이 비약되는 것은 양극단에 속하는데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행간의 전이(轉移)를 평이하게만 밀고 나가는 것은 신인이 취할 바람직한 자세가 아니다.(심사위원 : 이지엽)
첫댓글 잘 정리해두신 걸 감사하는 마음으로 퍼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