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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징 대법사와 카이핑사의 인연
웨이롱(惟榮, 중국 南平市 開平寺)
1) 관징 대법사와 총다오 노법사
카이핑사는 당오대의 후량 개평 4년(910년)에 세워진 전통사찰로 역대 고승을 많이 배출한 절이다. 청나라 강희(1662~1722) 이래 먀오롄 법사, 쉬인 선사, 롄마오 법사, 신번 법사, 푸롱 법사, 푸웬 법사 같은 큰스님들이 나왔는데, 그 가운데 카이핑사에서 소년출가한 쉬윈 법사가 가장 저명하다.
나는 1945년 생으로 39살 때인 1984년 꾸산 용촨사에서 출가하여 수행하면서 그 절 지객 업무를 맡았다. 1988년 푸졘성 불교협회의 소개로 카이핑사에 이르러 감원을 거쳐 절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는 교무를 맡았다. 그렇기 때문에 1988년 이전의 문제는 잘 모른다. 다만 1988년 처음 와서부터 1997년 입적하실 때까지 총다오 노화상을 10년간 모셨는데, 1988년 이전 이 절의 역사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하셔서 잘 알고 있다.
오늘 이야기하려는 관징 대법사의 옛날이야기는 모두 총다오 스님으로부터 들은 것이다. 총다오 스님은 관징 대법사와 가까운 사이였기 때문에 좀 자세하게 알 필요가 있다. 우리가 낸 책자에 간결하게 나와 있다.
총다오 법사
1907년: 태어남
1931년: 카이핑사에서 출가.
1955년: 베이징 불교대학 2년 수료.
1957년: 카이핑사 주지가 됨
1966~1976년: 문화대혁명 기간 뭇 대중을 이끌고 함께 일해 스스로 먹을 것을 생산하고 산문을 굳게 지켰으며 절을 적게 파괴하도록 보호하는데 힘을 쏟았다.
1980년 12월 4일: 4차 전국불교대표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와 적극적으로 카이핑사를 손질하여 고쳐 정상적인 종교생활을 할 수 있게 하였다.
1988년: 나이가 들어 주지 자리를 수좌에게 물려주었다.
1997년 8월 26: 원적.
우선 1937년 관징 대법사가 이곳에 출가하셨다는 이야기에 대해서 총다오 노화상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말씀을 들었다.
”어린 아이가 7살에 들어왔는데 아주 똑똑하고 일을 잘했다. 관징 대법사는 참 부지런했다. 지금까지 소문이 어어지고 있다. 그 뒤 10년쯤 일하다가 열 몇 살에 이 절을 떠났다.”
이 이야기는 정확하게 관징 대법사 이야기와 일치한다. 총다오 노화상의 이력을 자세히 보면 총다오 스님은 관징 대법사보다 17살이 위지만 관징 대법사가 카이핑사에서 7살에 출가한 1931년에 24살의 나이로 함께 출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관징 대법사에 대해서는 총다오 노법사가 누구보다도 더 잘 알게 되어 있다. 그 뒤로도 관징 대법사와 총다오 법사는 각별한 사이가 되어 서로 교류했다는 것은 다음과 같은 증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 1981년 관징 대법사가 미국 갈 때 푸저우 공항까지 가서 배웅했다. 관징 대법사는 푸저우에서 비행기로 상하이에 가서 배를 탔다.”
이 말씀을 들어보면 1931년부터 1981년까지 50년을 함께 교류한 각별한 사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31년 관징 대법사님이 어떻게 멀리 떨어진 푸졘성 푸저우시 용췐사에 계시는 쉬윈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할 수 있는가에 대해서 보기로 한다.
당시 7살 밖에 되지 않았던 관징 대법사가 1931년 당시 92살이시던 쉬윈 화상을 스승으로 출가한다는 것은 참으로 만나기 어려운 인연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몇 가지 사실을 살펴보면 어렵지 않게 당시 상황을 복원할 수 있다.
쉬윈 화상은 1929년 90살의 나이로 자신이 처음 출가했던 꾸산 용췐사로 돌아와서 95살인 1934년까지 5년간 주지로 계셨다. 그러니까 1931년에는 쉬윈 화상이 꾸샨에 계셨기 때문에 인연이 닿을 수 있는 조건이 된다.
용췐사에서 난핑현에 있는 카이핑사까지는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 산길을 빼놓고도 200km쯤 되면 당시로서 아주 먼 거리였다. 지금이야 고속도로가 나 있고 차가 많지만 당시에는 기차 타는 구간을 빼놓고는 모두 걸어서 가야 할 테니 하룻길이 빡빡한 거리다. 그런데다 당시 쉬인 화상은 정말 바쁘고 힘든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기차는 없었지만 두 절 사이에는 민강이라는 푸졘성에서 가장 큰 강이 있어 일찍이 배들이 다녔기 때문에 그렇게 어려운 길이 아니었다. 총다오 스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쉬윈 화상은 용췐사에서 카이핑사를 다니실 때는 늘 배를 이용하셨다.”
또 한 가지는 큰 인연으로 작용한 것은 쉬윈 화상이 바로 이곳에서 출가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에 자주 왔고, 이곳에 머물 때가 많았기 때문에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쉬인 화상은 롄마오 법사에게 삼귀의 하고 이곳에서 묘련 화상을 스승으로 구족계를 받았다. 처음 용췐사에 갔으나 머리를 깍지 않았었고, 이곳에 와서 머리를 깎았다. 이 사실은 용췐사나 난화사 스님들도 잘 알고 있으며 매년 조사 참배하러 온다. 쉬윈 화상은 기회만 있으면 카이핑사 이곳에 와서 머무는 것을 좋아했다.
만일 총다오 노법사님이 살아계셨다면 당시 상황을 아주 훤히 잘 아셨을 터인데 아쉽게도 내가 보고들은 것을 종합해 볼 때 당시 7살의 관징 대법사가 쉬윈 화상을 만나 출가한 것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2) 내가 만난 관징 대법사
1984년 관정 대법사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 절을 찾았을 때 바로 총다오 노법사가 주지였다. 나는 그해로 출가하였고 4년 뒤인 1988년 내가 부임했을 때 총다오 노법사는 79살로 퇴임하셨다. 나는 그때부터 총다오 노법사가 1997년 원적하실 때까지 10년간 스승처럼 모셨다. 혁명 이후 이 절을 지금처럼 재건한 것이 바로 총다오 법사였으며 1988년 이후는 내가 그 임무를 이어받았다.
내가 당가였을 때 관징 대법사가 2번 우리 절에 오셔서 만나보았기 때문에 나도 잘 기억하고 있다. 관징 대법사는 자신이 출가한 우리 절을 돕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주셨다. 우선 관징 대법사님과 함께 우리 절을 방문했던 미국의 와이콴 스님이 150달러를 우편으로 보내왔던 기억이 난다. 당시로서는 긴요하게 쓸 수 있는 금액이기도 하였지만 우리 절이 미국에 있는 절과 서로 왕래하고 있다는 자체가 당시로서는 큰 자부심이었다.
1990년에는 1월, 미국 북미 캘리포니아불교총회 이사장이란 직함을 가지고 관징 대법사와 한 싱가포르 거사가 수많은 경전을 가지고 와서 우리 절에 기증하였다. 이때는 내가 1988년 부임한 지 2년 뒤의 일이다. 관징 대법사는 당시 더화현 쥐셴산 링쥬사를 증축하기 위해 큰 공사를 하고 계시는 중이셨는데 특별히 우리 절을 위해 큰 법보시를 해주신 것이다.
1996년에는 우리 절이 대웅보전과 천황전 등을 재건하고 있었다. 이때도 관징 대법사님은 대만 등 다른 나라 불자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 보시금을 모아 주셨다. 당시 대만의 첸리리라는 신도가 우리 절 붇다의 개금을 위해 홍콩 달러 1만2천 달러, 그리고 인민폐 9만 위엔을 보시하였는데, 관징 대법사께서 직접 불사금을 받아다가 우리 절에 전해주시기도 했다.
1997년 8월 26일 총다오 노법사께서 원적하셨다. 두 달만 있으면 대웅보전을 비롯한 원통전 천황전 점안식이 있는데 마지막 부분을 보지 못하시고 원적하셨다. 그러나 그때는 이미 대부분 공사가 끝난 상황이기 때문에 매우 만족해 하셨다. 이 불사야말로 내가 부임하여 총다오 노법사님을 모시고 일군 일이었기 때문에 마지막 점안식까지 노법사를 모시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운 일이었다.
1997년 법당 천왕전 대웅보전 개광 법회에 관징 대법사를 초대했다. 10월 24일 열린 대웅보전 . 원통전 . 천황전 3불당 낙성식 및 점안식은 이 절에서 아주 큰 행사였다. 이 점안식에는 미국, 홍콩, 대만, 싱가포르 같은 여러 나라에서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는데, 특별히 한국 방문단 18명과 함께 참석하여 자리를 빛내주었다. 관정 대법사님은 1997년 2월 처음으로 한국에서 법을 펴시기 시작하여 8월 말에서 9월 초에 두 번째 한국을 방문하셨다고 한다. 그때 한국의 제자들과 신도들에게 카이핑사 점안식을 알리고 참석을 독려하셨던 것이다. 군위 압곡사 굉해 스님이 주선하여 여러 신도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이것이 우리 절이 한국과 교류하게 된 첫 기록이다.
이미 오래된 일이라 모든 일을 다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관징 대법사님은 크게 드러내고 하시지는 않지만 여러 방면에서 우리 절을 돕기 위해 마음을 쓰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노력은 관징 대법사님이 우리 절에서 쉬윈 화상과 인연을 가지고 출가를 하셨고, 함께 출가한 총다오 노법사님과의 인연도 계속 이어졌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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