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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없던 《사기》 〈표〉와 〈서〉 출간
*《사기》 〈본기(전9권)〉에 이어 〈표〉와 〈서〉 출간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소장 이덕일) 사기연구실에서 번역과 〈신주〉를 단 《사기》 〈표(表)〉와 〈서(書)〉가 출간되었다. 작년에 〈본기(전9권)〉를 출간한데 이어 역시 롯데장학재단(이사장 허성관)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고 출간했는데, 연구자들은 지금까지 세상에 없던 〈표〉와 〈서〉라고 자부하고 있다. 〈표 4권〉, 〈서 3권〉으로 모두 7권으로 현재까지 출간된 〈표·서〉 중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이다.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많은 고심을 했음은 쉽게 알 수 있다. 먼저 동이족의 역사를 한족(漢族)의 역사로 바꾸기 위해 삼황(三皇)을 지우고, 오제(五帝)부터 시작했다. 삼황의 시작인 태호(太昊)씨는 물론 신농 복희(伏羲)씨도 동이족임이 명백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또 오제의 시작을 황제(黃帝)로 설정했지만 그보다 이른 《상서(尙書)》 등은 소호(少昊)를 오제의 첫 임금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소호 역시 동이족임이 너무 명백했기에 사마천은 소호를 지우고 황제를 중국인들의 첫 조상인 것처럼 내세웠다. 이런 과정을 통해 사마천은 동이족의 역사를 지우고 한족(漢族)의 역사인 《사기》를 만들어냈다. 반고의 《한서(漢書)》가 한(漢)의 역사만을 기술했는데, 사마천이 중국사의 시작부터 서술한 것은 중국인의 역사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다.
사마천은 황제부터 한(漢)에 이르는 이 방대한 시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역사서술 체계를 세우기 위해 고심한 결과 기전체(紀傳體)를 만들었다. 황제(皇帝)의 사적인 본기(本紀)를 중심으로 제후들의 사적인 세가(世家)와 신하들의 사적인 열전(列傳)이 펼쳐지는 형식이다. 이를 통해 사마천은 역사의 정통성과 체계적인 계통을 수립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기전체의 한계도 명백했다. 기전체 사서에서는 제외되는 사건과 인물들이 너무 많다는 점이다. 황제들과 제후들은 각각 〈본기〉와 〈세가〉에 수록했고, 신하들의 사적인 〈열전〉을 만들었지만 실린 인물보다 실리지 않은 인물이 훨씬 더 많은 것은 자명한 이치였다. 나라의 운명을 바꿀 정도는 아니지만 지워져서는 안 되는 역사도 너무 많았다. 또한 앞의 기록과 뒤의 기록이 서로 다른 것도 너무 많았다. 그래서 사마천은 〈표〉를 만들어 이런 문제들을 해결했다. 중요한 인물과 사건들은 물론 〈본기〉와 〈세가〉·〈열전〉에서 지워진 인물들과 사건들까지 모두 수록했고, 앞뒤 기록이 다른 것도 하나로 통일하려고 노력했다. 또한 〈서(書)〉를 서술해 〈본기〉나 〈세가〉·〈열전〉 속에 충분히 수록할 수 없는 전분분야를 서술했다.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사기》 〈표〉
〈표〉는 모두 10개이다. 오제 및 하은주(夏殷周)에 관해 기술한 〈삼대세표(三代世表)〉부터 한(漢)나라가 일어선 이후의 장수, 재상들에 대해 기술한 〈한흥이래장상명신연표(漢興以來將相名臣年表)〉까지 10개여서 〈10표〉라고도 부른다. 〈10표〉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사건을 위주로 분류한 사건연표이고, 다른 하나는 인물을 위주로 분류한 인물연표이다. 사마천이 중국사의 시조라고 설정한 황제부터 하·은·주 삼대를 거쳐 춘추, 전국시대 및 진(秦)과 한(漢)나라에서 있었던 중요 사건과 인물들을 수록했다. 사마천은 “시대를 함께해도 세대가 다르므로 연차(年差)가 분명하지 않아서 〈십표(十表)〉를 지었다.”라고 설명하고 있다. 오제부터 한 무제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나라들에서 있었던 수많은 사건들과 인물들의 즉위, 폐위, 전쟁, 사망들에 관한 연대를 표로 작성했다. 이런 표가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사마천이 가장 고심했던 것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느냐 하는 것이었을 것이다. 사마천은 주(周)나라 연호와 노(魯)나라 연대기를 기준으로 이 방대한 〈표〉를 작성했다. 진(秦)나라가 중원을 장악한 이후 주(周)나라 왕실에 보존되어 있던 많은 역사자료를 훼손했다. 그래서 공자가 편찬한 《춘추》와 그 주석서들이 중요했는데 공자는 노(魯)나라 연대를 기준으로 작성했다.
〈10표〉 중에는 〈진초지제월표(秦楚之際月表)〉같은 월표(月表)도 있다. 중원을 통일한 진나라가 서기전 209년 초나라의 진섭(陳涉)의 봉기에 의해서 무너지기 시작해서 초나라 항우가 일어섰다가 서기전 202년 한나라 유방의 승리로 끝나는 7년간의 짧은 기간에 대해서는 연표가 아닌 월표로 정리한 것이다.
이 〈표〉를 번역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예를 들면 〈육국연표(六國年表)〉는 전국시대 연표인데, 주(周)와 진(秦)을 제외한 위(魏)·한(韓)·조(趙)·초(楚)·연(燕)·제(齊)에 관한 연표이다. 서기전 469년의 경우 사마천은 ‘주(周) 八, 진(秦) 八, 조(趙) 四十九, 초(楚) 二十, 연(燕) 二十四, 제(齊) 十二’라고만 적었다. 이 숫자들에 대해서 아무런 부가 설명이 없다. 이 〈육국연표〉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연표가 마찬가지다. 이 숫자들은 ‘주 원왕 8년, 진 여공공 8년, 조 간자 49년, 초 혜왕 20년, 연 헌공 24년, 제 평공 12년’이라는 뜻이다. 〈10표〉에는 이런 셀 수 없는 수많은 숫자들이 등장한다. 그래서 그간 출간된 대부분의 연표들은 사마천이 쓴 숫자를 그대로 옮겨놓는 경우가 많았다. 이를 보는 독자들은 이 숫자들이 무슨 뜻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이 〈표〉는 역사상 최초로 이런 모든 숫자의 의미를 모두 풀어 서술했다. 뿐만 아니다. 위의 469년의 경우 사마천은 위(魏)나라는 숫자를 써놓지 않았다. 그러나 이 〈표〉는 “위 출공은 이해 복귀를 시도하다 실패하고 월나라로 달아나서 4년 뒤에 죽는다. 이해가 출공 원년이다”라는 《신주》까지 달았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중국과 대만·일본을 포함해서 전 세계에서 간행된 《표》 중에서 가장 자세하고 방대하다고 할 수 있다.
작년에 출간한 〈본기(전 9권)〉는 우리 관점의 〈신주〉를 달아서 사마천이 감춘 역사의 비밀을 밝혀놓았는데, 〈표〉도 마찬가지로 우리 역사의 수수께끼를 다수 풀어놓았다. 〈삼대세표〉에서는 중국 고대 대부분의 군주들이 동이족임을 밝혔다. 또한 〈진초지제월표〉에서는 고대 요동은 현재의 요녕성 요동을 기준으로 그 동쪽을 지칭하는 지금의 요동과 다르다는 사실을 밝혔다. 연왕으로 있던 한광이 서초패왕 항우에 의해 요동왕이 되는데, 그가 봉해진 요동국은 지금의 요녕성 요하 동쪽의 요동이 아니라 현재의 천진시와 당산시 인근으로 난하 유역의 갈석산 부근에 있었다. 요동국의 수도 무종(無終)이 현재의 당산시 옥전(玉田)이라는 사실을 밝힘으로써 고대 요동은 현재의 요동과 다르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드러났다. 특히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의 사기연구실이 함께 아홉 장의 지도를 그려 이런 내용을 시각적으로 드러냈다. 이 지도들은 당시 연·진·한의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지금의 하북성 창려(昌黎) 북쪽의 갈석산 부근이라는 사실을 명확하게 말해준다. 중국에서 만리장성의 동쪽 끝을 지금의 평양까지 그려놓고 이를 전 세계에서 퍼뜨리고 있는 현실에서 이 〈표〉는 중국의 역사왜곡을 바로잡는 나침반 역할까지 할 수 있다.
*여덟 개 전문분야에 대해 서술한 〈서(書)〉
사마천이 《사기》를 편찬하면서 나라를 움직이는데 꼭 필요한 전문분야를 어떻게 서술한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그래서 〈서(書)〉를 편찬했다. 〈예서(禮書)〉부터 〈평준서(平準書)〉까지 여덟 편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에 〈팔서(八書)〉라고도 한다.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예(禮)와 악(樂)을 덜어 내고 보태었으며 율력(律曆)을 바꾸고 병권(兵權), 산천(山川), 귀신(鬼神), 천인(天人)의 관계에서 피폐한 국가를 떠맡고 변화를 통하게 해서 〈팔서(八書)〉를 지었다.”라고 말하고 있다. 각 편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서〉는 문화, 천문, 역법, 수리, 경제 등 각 방면의 전문서들로서 역사와 사회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전문적 시각과 경륜이 담겨있다.
그런데 〈표〉는 사마천의 독창적 서술이라는데 이론의 여지가 없었지만 〈서〉는 사마천이 저본(底本)으로 삼은 책들이 있었다는 논의가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후대인들이 가필했다는 설도 제기되었다. 청(淸)나라 학자 방포(方苞:1668~1749)가 《독사기팔서(讀史記八書)》에서 “이 〈서〉의 대부분은 사마천이 지은 것이고, 소부분은 저소손(褚少孫)이 보속(補續)한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이를 말해준다. 한나라 중후기 학자인 저소손이 가필했다는 주장이다. 심지어 청나라의 왕원계(王元啟:1714~1786)는 《사기삼서정위(史記三書正譌)》에서 “이 〈서(書)〉의 소부분은 사마천이 지은 것이고, 대부분은 후인들이 망령되이 가필한 것이다”라고까지 말했다.
물론 이런 견해에 대한 반대 견해도 존재하는데, 〈서〉에 대한 평가가 이처럼 갈리는 것은 전한(前漢) 후기에 가면 어느 것이 정본인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여러 필사본이 유통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경제기〉, 〈예서〉, 〈악서〉, 〈율서〉, 〈일자열전(日者列傳)〉 등 10여 편은 이미 잃어버린 상태였는데 저소손이 다른 자료들을 참조해 보충한 것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이 다른 저본을 기준으로 작성했다고 해도 사마천의 독창적 시각이 담긴 것은 부인할 수 없다. 특히 〈팔서〉 중의 마지막 세 편인 〈봉선서〉, 〈하거서〉, 〈평준서〉는 사마천의 시각이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이다. 〈봉선서〉는 무제가 하늘과 땅에 행했던 제사 등을 주로 수록했는데 사마천의 부친 사마담이 무제의 태산 봉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을 천추의 한으로 삼았기 때문에 사마천은 봉선서에 대해서 크게 신경을 썼다. 또한 〈봉선서〉의 주석에는 중원을 통일한 진(秦) 왕실이 동이족임을 말해주는 주석도 있다. 사마정은 〈봉선서〉에 대한 《색은》 주석에서 “진나라 임금은 서쪽에서 소호(少昊)에게 제사지내는데 희생은 흰색을 숭상한다”라고 써서 동이족 소호를 제사지내면서 흰색을 숭상하는 진 왕실이 동이족이라는 사실도 시사하고 있다.
주로 황하를 다스린 기록인 〈하거서〉에서 사마천은 자신을 궁형에 처했던 무제에 대해 황하를 다스리기 위해 애쓰는 군주로 비로소 긍정하기도 한다. 무제 때 황하의 호자(瓠子)가 터지면서 큰 홍수가 일자 사마천은 무제와 함께 호자에 가서 치수사업에 동참했다. 사마천은 “나는 천자를 따라 나무 섶을 지고 막았는데, 천자께서 호자에서 지은 시가 비통해서 이에 〈하거서〉를 지었다.”고 말하고 있다. 사마천은 경제정책에 관한 보고서라고 할 수 있는 〈평준서〉를 지어 국부(國富)와 백성들의 경제생활에 대한 견해를 서술했다. 〈평준서〉에는 한 무제 때 시행했던 평준균수(平准均輸) 정책과 억상책인 고민령(告緡令) 등에 대해서 설명하는데, 사마천은 태사공 자서에서 “강성한 국가는 작은 여러 나라를 겸병해 제후를 신하로 삼고 허약한 국가는 조상의 제사가 끊기거나 세상에서 없어졌다.”라고 말했다. 경제가 국가와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이다. 사마천은 현재의 재벌열전이라고 할 수 있는 〈화식(貨殖)열전〉을 써서 훗날 유학자들로부터 큰 비판을 받기도 했지만 물질의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이 사회의 비난을 받아서는 안 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사기》가 명분으로 가득 찬 죽은 역사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읽히는 산 역사서가 된 것이다.
《한서(漢書)》를 편찬한 후한(後漢)의 반고(班固)는 〈서〉 대신에 〈지(志)〉를 편찬하면서 《사기》 〈평준서〉 대신 《한서》 〈식화지(食貨志)〉를 편찬했고, 이후 여러 정사들이 대부분 《한서》의 체제를 따랐다. 《한서》의 〈지〉가 《사기》 〈표〉보다 더 정교한 부분도 있지만 역사서에 전문분야를 서술한 것은 사마천이 시초이다. 후한 때에 이르러 유학이 지배적 사상이 되면서 역사서 서술이 유가 전통의 틀에 갇히면서 형식에 치우치는 흐름이 나타난다는 점에서도 〈서〉의 가치는 격하될 수 없을 것이다.
*전문적이지만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게 구성
〈표〉 〈서〉의 번역은 〈본기〉처럼 직역을 원칙으로 삼았다. 워낙 방대한 내용이다 보니 앞뒤가 서로 다르거나 소략한 부분도 적지 않았는데, 이 경우 《사기집해》, 《사기색은》, 《사기정의》의 3가주를 참고해서 번역했고, 청나라 고증학자 양옥승(梁玉繩)의 《사기지의》도 참고했다. 《사기지의》, 《고본죽서기년》, 《춘추좌전》, 《한서》 등을 폭넓게 인용하면서 〈표〉 〈서〉의 내용과 비교했다. 각 편마다 해제를 달아 독자들의 이해를 도왔으며, 《신주》를 통해 우리 관점의 해석을 제시했다. 아홉 장의 지도를 삽입해서 시각적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특히 고대 요동에 있었던 연국과 요동국에 대한 지도를 《사기》의 실제 기술에 따라 작성해 한사군과 낙랑군에 대한 오랜 논쟁에 종지부 찍을 수 있는 판단 근거를 제시했다.
역사학자와 한문학자 등이 서로 초역(初譯)→중역(重役)을 통해 〈초본〉을 마련한 후 여러 차례의 검수와 교정을 거쳐서 확정했다. 특히 〈역서(曆書)〉, 〈천관서(天官書)〉, 〈평준서(平準書)〉는 이 분야 전문가들의 감수를 받아 완성도를 높였다. 지금까지 국내는 물론 일본과 대만 및 중국에서 간행한 어떤 《사기》보다 방대하고도 치밀한 내용으로서 전 세계 《사기》 연구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할 수 있다.
구매 정보 :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204737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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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서점 가니 아직 없더라고요.
인터넷으로 주문하시면~
저자(이소장님)에게 더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양도 많고 전문 분야 서적이라, 일반, 직장인들이 사서 읽기는 부담스러운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코로나 상황이 안정되면,
소장님 모시고 출판기념회나 설명회를 통해서 내용을 들어보면
좀 더 도움이 될텐데 ,,,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