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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경관은 중국 광서성 계림을 닮았고 밤 풍경은 태국 파타야를 연상케한다. 전통과 역사의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고색창연한 유적지도 없고 자연이 아름답긴 하지만 매혹적인 풍광으로 감탄사를 자아내는 곳도 아니다. 무엇보다 구불구불한 산길의 도로상태가 엉망이라 이 곳까지 차타고 가는 것도 쉽지않다.
그런데도 이곳은 유럽 배낭여행자들의 로망이다. 어둠이 깔리면 밤거리는 아연 활기를 띤다. 이국적인 정취에 이끌려 길을 걷다보면 영어, 불어, 독일어가 시끌벅적하게 섞인다. 물론 한국어도 간간히 들린다. 이방인이 마을의 주인행세를 하는 곳, 라오스 남쏭강변 방비엥이다.
방비엥 인구는 3만명이다. 도시라고 하기엔 작고 마을치고는 크다. 마을을 관통하는 남쏭강 주변은 카르스트 지형이 만들어낸 수려한 경관이 돋보인다. 수도인 비엔티안에서 방비엥 까지 거리는 160km. 우리나라 기준으로 멀다고 볼 수 없다. 도로만 잘 닦였다면 1시간40분이면 갈수 있지만 이 나라는 고속도로도, 철도도 없다.
1953년 독립할때까지 62년간 프랑스 지배를 받았지만 수탈해갈만한 천연자원이 없어 그 흔한 철도도 건설하지 않았다. 그래서 방비엥까지 4시간이상 걸린다. 도로는 2차선으로 거의 포장됐지만 구간 절반은 산악지대를 통과해야 한다. 중국 자본으로 철도공사가 시작됐지만 준공되려면 오랜 기간이 걸릴듯 하다.
방비엥에서 자주 만나는 사람들은 원주민이 아니다. 등에 커다란 배낭을 짊어진 외국인들이다. 한국인도 많지만 특히 유럽 젊은이들이 방비엥을 거의 점령하다 시피 했다.
이국적인 풍광과 저렴한 물가 그리고 자유롭고 히피스러운 분위기가 더해져 배낭여행자들의 천국처럼 변모했다. 한국, 홍콩, 대만인들은 단기관광에 치중하지만 유럽인들은 이 곳에서 장기간 머물면서 낮엔 튜빙(튜브타기), 자전거, 오토바이, 트레킹등을 즐기고 밤엔 카페와 펍에서 술을 마시고 대화하며 자유와 여유를 만끽한다.
방비엥에 도착했을때 해는 아직 기울지 않았다. 몸은 피곤했지만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기엔 시간이 아까웠다. 무엇보다 중국 계림처럼 남쏭강 주변을 둘러싼 둥글고 나지막한 카르스트형 산세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호텔에 여장을 풀자마자 마을에서 가까운 탐짱(짱 동굴)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1km 떨어져 있다. 전쟁이 일어나면 주민들의 피난처로 사용된 동굴이다. 동굴 주변엔 라오스 고유의 건축양식으로 지은 수십채의 방갈로가 줄지어 서있었다.
짱 동굴로 가는 길목엔 예전 우리나라에서도 흔히 볼 수 있었던 리어카 노점상들이 관광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역시 눈길이 가는것은 열대과일이다. 우리나라에선 보기드믄 과일들을 먹기쉽게 랩에 싸서 가판대에 늘어놓았다. 망고 한팩을 사서 먹어보았다. 새콤하고 달았다.
매표소에서 한명당 15.000K(1.300원)내고 티켓을 끊어 가파른 계단을 올라갔다. 동굴입구는 산중턱에 위치해 있었다. 동굴 진입로에 창문처럼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다. 밖을 보니 남쏭강과 어우러진 방비엥 주변 풍경이 시원스럽게 펼쳐졌다.
입구는 좁았지만 안으로 들어서니 강원도 영월 고씨동굴처럼 의외로 넓었다. 전쟁때 피난 온 마을주민들이 한동안 거주하는데는 큰 불편이 없었을 것이다. 동굴 가운데에 관람객들이 걸을 수 있도록 탐방로도 냈다.
더운 외부 날씨와 달리 서늘하고 쾌적한 기분이 드는 동굴안으로 조금 더 들어가면 계단을 놓을 만큼 넓직한 공간이 나온다. 종유석과 석순이 드믄드믄 보였고 계단밑에는 물이 흘렀다. 동굴은 그리 길지 않았다. 형형색색의 조명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는 계림 은자암동굴에 비해 무척 소박해 보였다.
동굴탐방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니 동굴아래에서 물이 힘차게 흘렀나왔다.
물은 푸른빛을 띠는데 바위에 들러쌓인 물웅덩이는 마을 아이들의 야외수영장이 되기도 한다.
짱 동굴밖 잔디밭에는 라오스 승려들도 보이고 교복을 입은 여고생들도 소풍을 나왔다. 방비엥에 산다는 학생들에게 사진을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더니 소박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짱 동굴을 벗어나 남쏭강변을 걸었다. 양손에 짐을 든 할머니가 산속으로 이어진 길로 접어들고 있었다. 지금은 관광지로 변해 외국인들을 실은 자동차가 끊임없이 왕래하고 있지만 수십년전 할머니가 새댁이었을때는 마을에서 십리를 걸어들어가야 하는 산간 오지였을 터였다.
계림에 리강이 있다면 방비엥엔 남쏭강이 있다. 호수처럼 강폭이 넓은 리강에 비해 아기자기하다. 중국화에 등장하는 풍경처럼 카르스트 지형의 기암봉우리가 병풍처럼 이어져있고 강위에는 물이 불으면 넘어질 것 같은 폭 좁이 나무다리가 산수화속 그림처럼 서있다.
강가에 늘어선 초록색 보트는 마을주민들이 자가용으로 쓰기도 하지만 관광객들을 태우고 남쏭강 주변 경관을 보여주기도 한다. 손자를 품에 안은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어디론가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강은 이들에게 소중한 생활터전이다.
방비엥 마을로 돌아오니 해가 어둑해졌다. 한적했던 낮과 달리 저녁이 되면서 거리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열대 우림에서 자연을 즐기고 짚라인과 튜빙등 레저체험에 푹 빠졌던 이방인들이 중심가로 돌아오는 시간이다.
레스토랑 '루앙프라방'에는 유럽의 청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저녁식사를 마치면 밤의 열기속으로 빠져들 것이다.
남쏭강은 저녁에 빛이 난다. 유럽인들이 왜 이 마을을 사랑하는지 확인할 수 있는 시간이다. 기온은 춥지도, 덥지도 않다. 거울처럼 잔잔한 강물은 기암봉우리를 반영하고 있다. 고즈넉하고 아름답다. 그래서 해가지면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한다.
강변엔 야외식당이 넒은 나무데크위에 길게 이어져 있다. 강에 비친 일몰을 감상하면서 저녁식사를 하는 사람들은 거의 동양인이다. 간간히 서양인들도 보이지만 그들이 식사하고 노는곳은 따로 있다.
강을 잇는 나무다리가 정겹다. 다리위는 관광객들의 포토존이기도 하다. 강변에서 식사를 하려면 이 다리를 건너야 한다. 밤이 이슥할때 강변은 노천식당에서 내뿜는 불빛으로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유럽인들이 주로 찾는 레스토랑이다. 방비엥은 유럽 배낭여행자들이 선호하는 곳과 동양인들이 가는 곳이 구분돼 있다. 서로 섞이지 않도록 인위적으로 출입을 막는 것이 아니라 취향이 다르다보니 자연스럽게 서로 찾는곳도 다르다. 다만 이 곳의 핫플레이스인 펍(PUB)스타일의 작은 나이트클럽인 '사쿠라'에선 모든 인종이 섞여서 이국의 밤을 즐긴다.
네온이 켜진 방비엥 중심가는 라오스의 오지라는 이미지를 탈피해 글로벌관광지로 손색이 없다. 특색있는 인테리어로 장식한 카페엔 배낭여행객들로 가득하고 파리^ 홍콩^도쿄의 도심에서 볼 수 있는 '부티크호텔'들이 눈부시게 불을 밝히고 있다.
늦은밤까지 거리를 배회한뒤 들뜬 마음으로 잠을 청했다. 침대에서 눈을 감았으나 굳게 잠긴 창문을 통해 끊임없이 음악이 흘러들었다. 새벽 2시에 간신히 꿈속에 빠져든뒤 아침에 기상을 하고 창문밖을 보니 거리는 정결하고 차분했다. 방비엥의 낮과 밤만큼 전혀 다른 얼굴을 가진 곳이 있을까 싶다.
아침을 먹고 찾은 곳이 방비엥 서쪽에 있는 '블루라군'이다. 독일인 가족이 블루라군을 향해 걷고 있었다. 나도 트레킹을 삼아 편도 7km의 황톳길을 걸어갔다. 방비엥에서 차로는 30분 거리였다.
블루라군은 푸캄 동굴 앞을 흐르는 강물에 형성된 작은 석호(라군)다. 에메랄드빛으로 반짝이기 때문이 블루라군이라고 불린다. 수영을 하거나 나무에 매단 그네에 앉아 물놀이를 하면서 더위를 식히는 여행자들로 늘 붐빈다. 인근 숲속에서 용소를 가르지르는 짚라인도 탈 수 있다.
하지만 이 곳에 가려면 큰 기대를 하지 말아야 한다. 블루라군 가는길은 카르스트 지형을 지나기 때문에 주변풍경이 매우 아름답지만 막상 가보면 석호 규모가 너무 작다. 기왕 갈거면 수영복으로 갈아 입고 블루라군 낮은 나뭇가지에서 다이빙한 뒤 수영하는것도 괜찮다. 다만 수심이 깊은편이기 때문에 수영에 자신이 있어야 한다.
외국 배낭족들은 왜 이곳을 찾을까. 멀고 먼 인도차이나반도의 내륙 오지까지 찾아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단지 관광을 위한 목적이라면 굳이 이곳까지 올 필요가 없다. 이웃 태국이나 베트남에 가면 훨씬 더 멋진 풍광과 편리한 관광인프라를 갖추고 있다. 그래서 동양인들에게 라오스는 스쳐지나가는 관광지다.
하지만 유럽 배낭족들은 다르다. 장기체류자가 많다. 물가가 싸기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대체로 심성이 착하다. 세속의 때가 덜묻었다. '싸바이디(당신은 편안한가요)'라는 인사말도, 눈빛도 정겹다.
무엇보다 라오스는 '느림의 미학'을 추구할 수 있는 땅이다. 라오스 인민민주주의 공화국을 뜻하는 Lao PDR(People's Deomocratic Repubic)를 라오스 사람들은 '라오스에서는 서두르지 마세요' Lao PDR(Please Don;t Rush)라고 쓴다. 도시생활에 지쳐 한두달이라도 정해진 패턴과 빡빡한 일상에서 탈출해 '슬로라이프'로 '삶의 쉼표'를 찾고 싶은 배낭족들에겐 매력적인 곳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반바지에 헐렁한 티셔츠를 걸치고 운동화나 슬리퍼를 신고 마음껏 돌아다니거나 어둠이 깔리면 '파티 타운'에서 여유를 만끽하고 사랑하는 이들과 행복한 추억을 쌓는다. 열악한 환경탓에 도시인들에겐 불편하지만 마음이 편하고 느긋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방비엥은 그런 곳이다.
출처/네이버블로그<박상준 인사이트>여행리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