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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성처럼 나타난 여자 선동가
증언자 : 전춘심(여)
생년월일 : 1949. 12. 10(당시 나이31세)
직 업 : 무용학원 강사(현재 행상)
조사일시 : 1989. 11
개 요
5월 19일부터 26일까지 가두방송, 시체운반, 협상대표로 활동하다가 26일 차명 숙과 함께 수사관에 의해 연행되어 상무대에서 모진 고문을 당하고 15년형을 받 은 뒤 1981년 4월 3일 석방됐다.
도망치다 벗겨진 무수한 신발들
나는 1949년 12월 보성경찰서 사택에서 태어났다. 사택은 아버님이 보성군 울 어면 지서장과 면의원을 지내면서 덕을 쌓았기 때문에 면민들이 지어준 것이었다 . 어머니가 오빠를 낳은 지 8년 뒤에 나를 낳으셨기 때문에 나는 버릇없는 귀염 둥이 외동딸로 자랐다.
예술적 재질이 뛰어난 나는 6세 때부터 무용을 시작해 국민학교 다닐 때는 창 과 웅변도 했다. 중학교를 다닐 때 `춘심'이라는 이름이 기생 이름 같다 해서 `옥주'라는 이름을 썼다. 공부는 조금 못 하는 편이라 보성 예당고등학교에 입학 했으나 남녀공학인데다 깡패들이 많아 이리에 있는 고등학교로 전학을 갔다. 꾸 준히 무용을 하여 원광대 체육학과에 진학하여 무용을 전공하였다. 그러나 4학년 때 학내문제로 데모를 하여 제적당했다.
제적 후 서울과 전주 등지에서 무용학원 강사로 지내다가 1980년에는 김제에서 자취를 하며 무용학원에 취직하려던 중이었다. 그때는 식구들이 광주로 집을 옮 겨 매주마다 광주에 내려오곤 했다.
5월 19일은 무궁화 보급 운동 관계로 서울에 있는 이모님 댁에 갔다가 밤 9시 30분경 열차를 타고 송정리역에 도착했다. 송정리에서 5천 원에 자가용 영업차를 타고 광주로 오는데 광산군 서창 검문소에서 예전에 없던 검문을 했다. 군인들이 "통행금지가 되어 광주시내로 들어가지 못한다. 여관에서 자고 내일 낮에 들어가 라" 고 했다. 나는 광주의 상황이 궁금하기도 했거니와 밤 11시에 친구를 만나기 로 되어 있으므로 "우리 집은 화정동 통합병원 옆에 있으니까 시내까지 안 들어 가도 된다"며 사정을 했다. 그 자가용은 송정리로 가고 나는 군인들이 지나가는 트럭을 잡아주어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
집에서는 `이 난리에 어떻게 왔느냐'며 깜짝 놀라면서 절대 밖으로 나가지 마 라고 했다. 하지만 나는 시내상황이 궁금해 친구도 만날 겸 11시가 거의 다 되어 몰래 집을 빠져나왔다.
금남로에 접어드니 곳곳에 완전무장한 공수들이 살벌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충장로 지하상가 앞에 이르렀을 때 깜짝 놀랐다. 도망치다 벗겨진 신발들이 무수 이 널려져 있었고 공수들은 붙잡은 학생과 시민들을 개처럼 두들겨패고 있었다.
또한 공수대에 잡힌 학생들은 공수가 지시하는 손가락 방향에 따라 엎드리고 일 어서는 기합을 받았다. 원래 성격이 활달하고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나는 곧 바로 시위에 참여했다.
관광호텔 앞에서 공수들과 대치해 있는 시위대에게 도청 뒤에 있는 집에서 물 을 떠다 날라주었다. 그때 차명숙을 만났다. 물을 떠다 나르는데 상냥한 아가씨가 있어서 물어보았더니 전남대 영문과 2학년에 재학중으로 나주 천주교에 숨어 있다가 화장을 하고 광주로 들어왔다고 했다. 뒤에 알고 보니 국민학교 2학년 중퇴라고 하는데 나는 그때 의심이라곤 전혀 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각종 중요 데모사건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부마사건까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당시 동아산업 복창근 씨 집에서 물을 떠다 날랐는데 그 집에서는 옷도 아깝지 않게 내주었다. 차명숙도 그곳에서 버린 옷을 갈아입을 정도였다.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학생들은 마이크를 준비하기 위하여 금남로에서 모금운동을 했다. 학생들이 트 럭에 실려 어디론가 가고 있는데 시민들은 그러한 상황을 모르고 있으므로 앰프 를 구하여 알리자는 것이었다. 순식간에 모아진 돈이 45만 원이나 됐다. 모금한 돈으로 학생들이 앰프를 구해 왔으나 마구잡이로 날아오는 최루탄에 맞아 금방 절단나고 말았다. 나는 학생들과 함께 또다시 앰프를 구하기 위해 금남로에서 학 운동 사무소로 갔다. 그곳에서는 앰프를 내주지 않았다. 나는 학생들에게 말했다 .
"내가 모두 책임질 테니까 앰프를 떼내라."
학생들이 달려들어 앰프를 떼내는 동안 호주머니를 터니까 7만 원 정도 되었다 . 나는 그 돈을 동사무소에 주었다. 남학생들은 스피커를 들고 명숙이는 옆에서 보조해 주고 나는 마이크를 잡고 방송을 시작했다.
공수들의 잔학상을 시민들에게 알리고 광주시민과 함께 싸워야 한다는 생각에 서였다. 우리는 도청 앞까지 걸어가면서 가두방송을 했다. 그곳에서 누군가가 `이러면 너무 힘들어서 안 된다'고 하면서 픽업차를 타고 하라고 했다. 그때부터 우리는 전시가지를 누비며 시민들을 선동하는 가두방송을 했다.
방송내용은 `계엄군 아저씨, 당신들은 피도 눈물도 없습니까?', `광주시민 여 러분, 여러분은 어떻게 편안하게 집에서 잠을 잘 수가 있습니까? 우리 동생, 형 제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라는 것이었다. 또한 아리랑 노래를 즉석에서 개사하 여 시민들에게 가르쳐주고 함께 부르기도 하였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시민 여러분
십리도 못 가서 후회하게 됩니다
꽃같이 어여쁜 우리 형제들은
무자비한 계엄군에 끌려서
죽음으로 떠나가고 있습니다
방송은 주로 내가 했으나 너무 피곤하면 차명숙과 옆에 있던 남자들이 교대로 하는 식이었다.
20일 새벽 2시 픽업차에서 버스로 옮겨탔다. 그때부터는 상황방송을 했다. 오 전에 광주일고 앞에서 가슴이 드러난 채 대검에 찔려 피투성이가 된 여학생의 시 체를 본 나는 시민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다. 계엄군이 여학생 유방을 난자질했다 는 말은 시민들 사이에 급속도로 퍼져 시민들의 분노를 사기에 충분했다. 내 차 뒤에는 항상 시위대가 따라다녔다.
계엄군의 폭력은 날로 더해 갔고 언론은 광주에서 불순분자들이 난동을 부리고 있다고 허위보도를 했다. 우리는 20일 저녁 공정보도를 요구하기 위해 MBC 방송 국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러나 건물 안에 있던 계엄군들이 즉시 셔터문을 내려 버렸다. 하는 수 없이 밖으로 나와 가두방송을 하다가 다시 MBC 방송국 쪽으로 갔는데 그때는 이미 MBC가 불에 타고 있었다. 또 MBC 방송국 옆의 금성전자제품 대리점 앞에서 뭔가를 불에 태우고 있었다.
협상대표로 활동
21일 아침 가두방송을 하고 신역 앞을 지나는데 아주머니들이 딸기를 주면서 먹으라고 했다. 그러는 사이 신역 앞에 시체가 있다는 소리가 들려 신역 앞으로 갔다. 광주역 입구에 두 명의 남자 시신이 대검에 찔려 눈알이 파헤쳐진 채 쓰러 져 있었다. 나는 리어카에 두 시신을 싣고 태극기로 덮어 도청으로 향했다. 금 남로에 모여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그 시신들을 보고 분노를 금치 못했다. 그 때 도청 앞에서는 계엄군과 시민들이 대치를 하고 있었다. 나는 계엄사 중령에게 시체를 덮은 태극기를 들어 보이면서 말했다.
"이럴 수가 있습니까?"
"어디에서 왔습니까? 우리들이 죽인 것이 아닙니다. 간첩이 나타나서 그럽니 다."
그 사람은 그러면서 굉장히 가슴 아파했다. 그래서 나는 시민들에게 말했다.
"이 시간 후부터는 돌을 던지지 맙시다."
그리고 계엄군 중령에게는 `계엄군 사령관을 만나게 해달라고 했다. 그랬더니 그 중령은 도청으로 들어가자고 했다. 나는 시민들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도청 안으로 들어가서 만나고 나와도 되겠습니까?" 시민들은 좋다고 했다. 그래서 학생 1명, 시민 등과 함께 도청으로 들어갔다 . 나는 어느새 협상대표가 된 것이다.
도청에 들어가니까 도지사는 모친상을 당해 장례식 때문에 30분 늦게 들어왔 다. 도지사는 말했다.
"나도 여러분 못지 않게 분노를 느끼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주둔하면 도지사 에게 사전보고를 하게 되어 있는데 그러지 않았습니다. 요구사항을 말씀하십시오 ."
"시민들이 불안해 하니 계엄군은 철수하도록 해주시고 연행된 학생과 시민들의 소재를 파악해 주세요. 그리고 공정한 언론보도를 하도록 해주시오. 계엄사령관 을 만나게 해주시오."
"12시까지는 책임지고 계엄사령관을 만나게 해줄 테니 전옥주 씨가 먼저 나가 서 시민들을 제지시켜 주십시오. 그러면 5분 후에 제가 나가서 시민들에게 사과 의 말씀과 인삿말을 하겠습니다. "
그래서 우리는 밖으로 나와 시민들과 묵념을 하고 `선구자', `아리랑', `늙은 병사의 노래' 등을 부르면서 도지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약속된 시간 이 지나도 도지사가 나오지 않자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구용상 시 장이 나와, "광주시민 여러분, 저는 광주시장입니다."
라고 얘기하는 찰나 시민들 쪽에서 장갑차를 밀고 왔다. 구용상 시장은 그의 비 서가 잡아당겨 관광호텔 쪽으로 가면서 옆에 서 있던 나를 계엄군 쪽으로 밀어버 렸다. 계엄군이 최루탄을 너무 심하게 쏘아대 나는 숨도 제대로 못 쉴 지경이었 다. 그때 마침 계엄군 중령이 나에게 바람부는 쪽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호흡을 크게 하라고 했다. 그리고 총을 겨누고 있는 부하들에게 총을 치우라고 하면서 나에게 마이크를 주었다. 그리고 시민들을 자제시키는 가두방송을 계속 해달라 고 사정했다.
그때 계엄군이 무차별 사격을 감행했고, 장갑차를 타고 계엄군에게 돌진한 사 람은 계엄군의 총격으로 그자리에서 고꾸라졌다. 나는 도청 앞을 빠져나와 우체 국과 충장파출소를 지나 유동으로 갔다. 그때부터 지프차를 타고 본격적으로 가 두방송을 했다. 광주일고 앞 골목에서 아주머니들이 날계란 두 개를 먹으라고 주 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목이 아플 때는 날계란을 먹으면 좋다는 것을 알았다 . 아무튼 나는 그 날계란 두 개가 나에게 있어서는 19일 이후의 최초의 식사였 고 마지막 식사였다. 나는 항쟁기간 동안에 잠은커녕 한끼의 식사도 제대로 하 지 못한 것이다. 심지어는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어서 옷에다 그대로 소변을 봐 야 했다.
또한 내가 타고 다니던 차량에는 많은 쪽지가 전달되어 왔다. 그중에는 서울의 연고대생들이 광주시민을 도와주러 왔는데 담양에서 들어오지 못하고 있다는 내 용도 있었다. 나는 시민들과 함께 그들을 마중하러 갔으나 온다던 학생은 1명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우리를 분산시키기 위한 계엄군의 작전이었다고 생각된다 .
22일은 `기물을 파괴하지 말고 질서를 지킵시다. 그리고 어린애를 보호합시다.
아무 데서나 사진을 찍는 사람은 불순분자일 수도 있으니 방송차량에 신고해 주 십시요' 라는 방송을 하면서 도청으로 돌아오는 중이었다.
시민들 중 누군가가 `저 여자는 간첩임에 틀림없다'고 했다. 나는 아니라고 부인해도 흥분한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광주시민이라고 하면 모두 내 말 한마디에 모든 것을 협조하고 따르고 했는데......
분명히 수사관들이 시민들 군데군데 끼여 유언비어를 터뜨린 것일 것이다. 나 와 차명숙은 도청으로 끌려가 꽁꽁 묶였다. 같이 활동했던 차명숙까지 나를 간 첩으로 몰아세웠다.
"생각해 보니 이 언니가 정말 수상합니다. 그래서 그렇게 말을 잘했는가 봐요 ."
나는 정말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화정동 우리 집엘 가보자고 했다.
아버지가 보성경찰서장을 지내면서 빨갱이 토벌에 얼마나 큰 공을 세웠는데 나를 빨갱이로 몰다니---
우린 꽁꽁 묶인 채 트럭에 실려 화정동으로 갔다. 철썩같이 믿었던 우리가 간 첩이라고 했으니 시민들이 얼마나 나를 호되게 다루었겠는가. 같이 간 시민들은 우리 집에 가서야 나의 신원을 확인하고 오해를 푼 다음 돌아갔다.
나와 차명숙은 우리 집에서 오랫만에 잠을 자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시내상황 이 궁금해서 다시 나왔다. 나를 알아보는 몇몇 사람들에게 붙들려 가두방송을 계속하게 되었다. 그리고 시신들을 옮기는 작업을 했다.
주로 변두리 지역이나 으슥한 골목, 건물 등에 시신이 많았다. 웬일인지 시신 들마다 눈들이 모두 파헤쳐져 있었다. 총은 총대로 쏘아 죽이면서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내가 항쟁기간 동안 옮긴 시체만 해도 30여 구 되었는데 옷차림으로 보아 양아치들이 가장 많았다. 그때 나는 광주 지리를 잘 몰라서 정확한 위치는 모르지만 학동, 화순방면으로 가는 길, 효천 등지에 시체가 많았던 것 같다.
19일쯤 죽은 사람들은 칼로 난자되어 얼굴을 알아볼 수 없었다. 그래서 나이도 알아볼 수 없었으나 옷차림으로 보아 30-40대 정도 되어 보였다. 한 사람은 티셔 츠 차림이었고, 작업복과 잠바 차림의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지금도 가장 가슴 아프고 못 잊는 시체는 일고 앞에서 본 어느 여학생의 시체였다. 엷은 옷차림의 그 여학생은 가슴이 난자되어 블라우스가 핏빛이 되어 있었다. 같이 갔던 사람이 잠바를 벗어 덮어주었다. 나는 빨리 운반하라고 했는데 어디로 갔는지 잘 모른다 . 보통 시신들은 기독병원, 적십자병원 등으로 옮겼다. 나는 그 일뿐만 아니라 시민들에게 잡혀온 군인들이나 경찰들을 보내주는 일도 했다. 양동시장, 학동 쪽 , 사직공원 파출소 앞 등지에서였다. 그들은 하나같이 새파랗게 겁에 질려 울면 서 `용서해 주십시오. 호남에 간첩이 나타났다고 해서 왔을 뿐입니다. 우리는 명령에 따랐을 뿐입니다' 라고 했다. 시민들은 그들을 죽여버릴 기세로 뺨도 때 리고 배를 차고 했으나 나는 말렸다.
"여러분 자제하십시오, 이사람도 우리와 같은 국민입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복을 구해서 옷을 갈아입혀 돌려보냈는데 내 기억에는 5- 6건 정도는 될 것 같다.
차명숙을 겁탈한 놈들
26일, 시신을 옮기고 도청 쪽으로 오는데 어떤 사람이 `저 여자는 교육을 받고 온 간첩이다. 간첩이 아니고는 저렇게 말을 잘할 수가 없다. 저 여자가 독침으 로 쑤셨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순식간에 시민들이 몰려들었다. 일부에서는 집 에 가서 확인을 했다고 했으나 스포츠머리에 곤색 잠바를 입은 30대 청년이 내가 틀림없는 간첩이라고 끝까지 우겼다. 내가 보기엔 그가 수사관임에 틀림없었다 .
그 청년과 다른 청년 한 명에 의해 앞뒤에 총을 장전한 채 보안대로 끌려갔다.
내가 보안대로 들어설 때 흰 와이셔츠를 입은 50여 명의 남자들이 간첩이 왔다며 모두 쳐다봤다. 나는 그때부터 조사를 받기 시작했다. 강수사관이라는 사람이 경봉으로 위협하고 또 2명이 총을 들이대고 자술서를 쓰라고 했다. 차명숙은 수 사관들이 따로 데리고 갔다.
그 이튿날 9시경에 차명숙을 두 손을 뒤로 묶어 다시 끌고 왔다. 명숙이에게 물어보니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말만 잘 들으면 풀어주겠다고 하고 풀어주었다 가 다른 수사관들을 시켜 다시 잡아오게 한 것이라고 했다. 정말 개같은 놈들이 었다.
그들은 총부리를 나에게 겨눈 채 간첩으로 몰기 위한 조작극을 벌였다. 다음 날 외신기자들은 내가 간첩이라며 사진을 찍었다. 나는 손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간첩이 아니다'고 했다. 그러자 형사들이 개머리판으로 뒤통수를 찍었다.
모란꽃, 전춘심
차명숙과 나는 상무대로 끌려가 10일 동안 고문을 받았다. 첫날만 짠밥을 주 고 나중에는 밥도 아예 주지 않았다. 잠은 5분 이상을 못 자게 했다. 내가 언뜻 잠을 자면 그들은 나무 자로 내 얼굴을 탁탁 때리면서 못살게 굴었다.
"너의 아버지는 이 나라 충신인데 네가 역적이 되야 쓰겄어, 전춘심." 그들은 나를 이북의 모란봉에서 2년 동안 간첩교육을 받고 넘어온 모란꽃이라 했다. 그리고 그 증거물이라며 오빠가 집을 사기 위해 둔 현금 780만 원을 가져 와 공작금이라고 했다.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때 옆방에서 고문으로 인한 신음 소리가 들렸다. 그들은 저게 너의 오빠인데 공작금 내용에 대해 모두 말했 다고 하며 돈의 출처를 밝히라고 닥달했다. 그것은 수사관들이 나를 겁주기 위한 공작이었으나 나는 정말 오빠가 고문을 당하는 줄 알고 치를 떨었다.
또 내 가방을 뒤져 권총 모양의 열쇠고리를 빼내 공갈을 쳤다.
"여기서 화약 냄새가 난다. 이걸로 사람 몇 명을 죽였냐?" "이것은 어느 백화점에나 있는 물건입니다."
그들은 계속 내 말을 믿지 않다가 이틀 후 `이것 네 열쇠고리지?'하고 던져주 었다. 정말 웃기지도 않았다. 또 한 번은 육군병원 정신병동 철근방에다 나를 넣 어놓고 올케 언니를 불렀다. 돌도 안 지난 조카를 안고 와서, "고모, 간첩들에게 포섭되었으면 자수하세요."
라고까지 했다. 얼마나 우리 집에까지 못살게 굴었으면 그랬을까? 그러나 그런 것은 약과였다. 그들은 여자로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욕지거리와 고문을 자행했다. 31년간의 성장과정을 쓴 자술서에 남자와 커피를 마셨다는 것 때문에 `이 똥갈보 같은 년아, 너는 서방이 몇 개여, 네가 처녀인지 아닌지를 봐 야겠다'면서 옷을 벗겨 알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몽둥이로 음부를 마구 쑤시 고 때리고 ......
정말 인간으로서, 한 여자로서는 당할 수 없는 비참한 고문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무릎을 아홉 군데나 송곳으로 쑤시고 내 엉덩이살이 모두 터져버렸다 .
그들은 내가 신원이 확실한 데다 끝까지 버티자 간첩으로 몰지 못하고 MBC 방 송국 방화범으로 몰았다. 그들은 `야, 이년아. 네가 MBC를 방화했지?' 하면서 야구방망이로 허리를 사정없이 내리쳤다. 허리를 내리치자 의자에서 바닥으로 쓰 러지면서 오른쪽 손목이 부러졌다. 나는 고통스러워 하면서도 하느님께 감사했 다. 손을 쓸 수 없게 되어 그 지긋지긋한 자술서를 쓰지 않아도 되었으니 말이 다.
결국 그들은 김대중 씨와 연결을 시키면서 내란음모 자금으로 얼마의 돈을 받 았냐며 닥달하기 시작했다. 나는 `평소에 김대중 씨는 존경하나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며 끝까지 버텼다.
상무대에 온 지 6일째가 됐을 때 가두방송한 날부터 계속 굶었는데도 대변이 보고 싶었다. 그들은 나를 화장실로 보내주지 않고 잔디밭으로 데리고 갔다.
하필 구슬비가 내렸는데 수사관 두 명이 배와 등에 총을 겨눈 채로 일을 보게 했 다. 총을 겨누고 두 남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엉덩이를 내놓는 수치심은 이루 말 할 수가 없었다. 겨우 염소똥 같은 것만 나왔다.
하혈은 계속되고
상무대에서 열흘 동안 입에 담지 못할 욕지거리와 고문을 당하고 공군부대로 끌려갔다. 나는 공군장교에게 제발 맞지 않게 해달라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다.
그러자 그는 수사관들에게 `죄가 있으면 법으로 다스리고 때리지는 말라'며 몇 번을 당부했다. 그가 정말 천사처럼 보였다. 공군부대에 남자들이 많아 광산경찰 서로 보내졌다.
광산경찰서 유치장으로 들어가니 옷을 모두 벗기고 군 담요만 하나 주었다.
나는 그동안 한숨도 제대로 자지 못해 피곤이 몰려와 사흘 동안 잠을 잤다. 일 어나 보니 홍금숙, 유소영이 잡혀와 있었고, 대마초를 피우다가 잡힌 술집 아가 씨, 시위대에게 음식을 주었다고 잡혀온 아주머니들도 있었다. 그리고 조아라 회장님, 이애신 총무님, 정현애 씨 등도 들어왔다.
광산서에서도 수치스러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30명의 여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항상 생리대가 필요했는데도 그들은 생리대를 한꺼번에 주지 않았다. 우리들은 화장실에 갈 때마다 `생리대 하나 주세요'라고 해야만 했다.
하루는 밤에 잠을 자고 있는데 느닷없이 오리 우는 소리가 들렸다. 어린 중학 생들이 수박을 따 먹다가 잡혀와 기합을 받는 것이었다. 앞에서 `오리'하면 뒤에 서 `꽥꽥' 하고 있었다. 그처럼 어린 학생들이나 술에 취한 사람들을 삼청교육 대로 끌고 온 것이다.
1차적으로 술집 아가씨와 아주머니들, 홍금숙이 석방되고 나, 조아라, 차명숙, 이경희, 정현애, 박영순 등만 남았다. 조아라 회장님과 이애신 총무님은 나이가 드셨는데도 자세 하나 흐트리지 않고 성경공부를 했다. 그러나 나는 상무대에서 의 고문으로 계속 하혈을 했다.
하혈을 너무 많이 하여 양동에 있는 양민의원에 15일간 통원치료를 받았다.
그래도 그치지 않아 통합병원으로 후송됐다. 통합병원에 산부인과가 없기 때문에 제대로 치료가 안 됐다. 그들은 내 병명을 기록카드에 `위염'이라고 적었다.
나는 통합병원에 있으면서 말썽을 부렸다고 재판도 하기 전에 일주일간 교도소에 있었다. 통합병원에서 교수들이 먹는 음식을 몰래 가져와 애들에게 나눠 먹게 한 것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교수들은 제과점 빵들을 들여와 먹으면서도 배고파 하는 애들에게 주지 않았다. 그리고 음식이 상하려 하면 준다든지 먹다남은 찌꺼기를 주었다. 입은 똑같은 입인데 나는 너무 한다 싶어 부상당한 애들에게 갖다가 줘버린 것이다.
여자로서는 최고형인 15년형을 받고
1980년 9월 15일 재판에서 차명숙과 나는 여자로서는 최고형인 15년을 받고 9월 19일 조비오, 이기홍, 김성용 그외 많은 교수님들과 포승줄로 묶여 교도소 운동장으로 갔다. 그곳에서 짠밥을 줬다. 땅바닥에 몇 덩이 있는 짠밥은 개밥 보다도 못한 것이었다. 그때 어르신들이 '전양, 야유회 와서 밥을 먹으니 참 맛있네. 밥 먹어'라는 얘기를 했다. 그 말을 듣고 나는 얼마나 슬펐던지 통곡을 하며 울었다.
차명숙과 나는 여사로 들어가 독방에 수감됐다. 나는 교도소에서도 계속 하혈을 했다. 너무 많은 하혈로 의식이 흐려지면 나는 고통스러운 나머지 철창에 손목을 문질러 피가 나오게 했다. 그래야만 마비가 풀리곤 했다. 몸이 아파 정신을 못 차리는데도 악질적인 여자 교도관들은 상관이 와서 나의 상태를 물어보면 '건강하게 밥도 잘 먹고 있다'고 보고를 했다.
며칠 후 조아라, 박영순, 이경희 등이 교도소로 이감되어 왔다. 차명숙은 그 때까지 의심받을 짓을 많이 하여 독방을 썼다. 수사받는 과정에서도 그녀는 진술을 달리해 수사관들을 골탕먹이기도 했다. 담양이 고향이라고 했다가 영광이 고향이라고 하고 부마항쟁을 직접 주도했기 때문에 자료가 모두 집에 있다고 하기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 어른들과 함께 방을 썼다. 조아라 회장님이 몸에 때라도 벗기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해 나는 물을 받아 몸을 씻어드렸다. 그랬더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겠다고 하셨다. 그들은 들어온 지 3일만에 바로 석방되었다.
나는 항소에서 기각되어 잡범들과 함께 있었다. 주로 사기, 유괴, 간통한 여자들이 많았는데 간통하여 들어온 여자들은 먹을 것을 교도관에게 상납하는 등 온갖 아부를 했다. 그곳에서도 돈 없으면 개 취급을 당했다. 미친 여자가 들어왔는데 사람들이 그를 노리개감으로 마구 때렸다. 나는 석방될 때까지 그 여자를 보호했다. 또 교도소내의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을 하여 한 달 동안 혁수정을 차기도 했다.
나는 1981년 4월 3일 석방됐으나 차명숙은 석방되지 않았다. 함께 고생한 동지를 두고 나올 때의 고통은 사형장에 끌려가는 것만큼이나 가슴 아팠다. 석방되어 기자회견을 했다.
안기부에서의 탄압과 회유
석방 후 오빠 집에서 몸조리를 하며 지냈는데 나이 먹어 오빠집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해 1983년 무작정 상경을 했다. 취직을 했으나 하는 곳마다 안기부에서 쫓아다니며 방해를 했다. 모처럼 종로에 있는 무용학원에 취직했는데 원장 선생님이 약간의 돈을 주면서 안기부에서 쫓아다녀서 안 되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지금의 남편 이철규씨에게 전화를 하여 한 달간만 먹고살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는 내가 전주 금파무용학원에 있을 때 그의 조카로 인해 알게 된 남자였다. 그 역시 고려대를 다니다가 강제징집을 당한 사람이었다. 그는 나의 석방 소식을 들었다며 매우 따뜻하게 대해 줬다. 그와 함께 여관에서 생활하면서 살림을 꾸렸다. 남편이 금고행상을 하여 먹고 살았다. 약간의 돈이 모아지자 보증금 30만 원에 월세 20만 원인 집으로 들어갔다.
나는 안 해본 일이 없을 정도로 이것 저것 잡일을 했다. 낮에는 술집 여자들의 옷을 빨고 밤에는 포장마차를 했다. 포장마차를 할 때 마시지 못하는 술을 가끔 씩 마시고, 남자들이 귀찮게 한 것에 충격을 받아 한 달 반 동안 실어증에 걸리기도 했다. 남편에게는 볼펜으로 써서 의사전달을 했다. 하루는 밤에 꿈을 꾸는데 아버지가 나타나 혀를 잡아당겼다. 나는 피를 토하며 악을 쓰다가 말을 하게 되었다.
언젠가 헛구역질이 나고 체중이 불어나 임신인 줄 알고 병원에 갔더니 상상임신이라고 했다. 그 사실을 알고 쥐약을 다섯 병이나 먹고 자살기도를 했다.
남편이 다니는 금고회사 사장이 150만 원을 주어 서울 성수동에 지하 전셋방을 얻었다. 오래된 지하실 방이라 습기가 매우 많아 연탄가스에 자주 중독되기도 했다.
어느 날 남편이 보이지 않아 찾아보니 안기부에서 남편을 잡아가 유도심문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내가 몇 번 연탄가스를 마셨고, 우리 집에 누가 출입하는지 모두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 나에게 회유를 했다.
"광주의 영웅이 연탄가스나 마시며 살아야겠소. 우리에게 조금만 협조하면 얼마든지 잘 살게 해주겠소."
"당신들은 동료들도 팔아먹을 사람들이오."
나는 그들과 한판 싸움을 하고 그대로 남편과 돌아왔다.
안기부에서는 우리가 하는 일마다 방해를 했다. 남편의 사장이 빌려준 돈으로 찻집을 했으나 형사들이 항상 죽치고 사는 바람에 장사가 되지 않았다. 그것도 집어치우고 튀김장사를 하다가 다시 옷장사를 했으나 아직도 월세방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내가 어용, 관제라니
그동안 먹고살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광주의 상황은 잘 몰랐다. 그런데 1988년 2월에 민화위에서 정시채와 한도희 교도소장이 5·18을 사실과 전혀 다르게 증언을 하고 있었다. 곧바로 국회로 연락해 5·18광주의거부상자회의 박옥재 회장을 만났다. 그때 처음으로 박옥재 회장을 봤는데 나와 고향이 같은 보성사람이었다.
그와 의논해 민화위에 참가하게 되었다. 민화위 증언을 끝내고 난 뒤 젊은 남자가 돈을 봉투에 담아줬다. 나는 화가 치밀어올랐다.
"노태우 돈 안 받습니다."
"이건 노태우 돈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증언한 사람은 교통비로 20만 원을 줍니다."
그역시 큰소리로 화를 냈다.
"아니 벼슬도 싫으면 안 하는 것인데 왜 그래요. 나는 싫소."
"안 받아도 괜찮습니다."
나는 그대로 나와버렸다. 그런데 항간에서는 내가 민화위에서 증언하고 '1억을 받았느니, 2억을 받았느니' 말이 많았다.
대통령선거 때는 무안·함평·보성 등지를 돌아다니며 김대중씨 선거운동을 하다가 괴한 3명에게 테러를 당하기도 했다.
1988년에 부상자 종합검진을 하면서 내가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설마 했었는데 그 마지막 기대가 무너져내렸다. 전남대부속병원에서 석 달 동안 검진을 했는데 검진결과 원래는 아이를 가질 수 있었으나 하혈을 많이 해 나팔관이 막혀버렸다는 것이다. 그 심정은 당하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9년 동안 억압된 생활을 하면서 안타까운 것이 많다. 그때 내가 그렇게 광주시민과 함께 싸운 것은 영웅심리도 아니었고, 정치를 하고자 했던 것도 아니었다. 다만 그 무참한 광경을 보고 불의를 참지 못하는 순수한 열정에서 광주시민과 함께 한 것뿐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사람들이 나게게 어용이니 관제니 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박옥재씨 부상자회에서 활동한다고 해서 그 회원이 모두 어용이고 관제인 것은 아니다. 그 회장이 잘못하고 있다면 그것은 운동권에서 그만큼 소외를 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잘못된 길을 가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배척하는 것보다 바른길로 인도해 한마음이 되도록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본다.
지금 나에게 가장 시급한 일은 차명숙을 찾는 일이다. 차명숙은 전남대 영문과 학생이 아니었다. 원래 집은 담양이었으나 가족들이 서울로 이사해, 가정부로 일하던 중 5·18에 참여하게 된 사람이었다. 비록 가정부이기는 했으나 정말 똑똑한 애였다. 명숙이가 석방된 1981년 12월에 얼굴을 보고 그 후로는 만나지 못했다.
석방된 지 한 달 후에 명숙이가 조아라 회장님을 찾아와 자기 때문에 전옥주씨가 고문을 많이 당해 미안하니 식모살이라도 하여 병치료를 하겠다는 말을 했다는 것이다. 석방된 지 며칠 후 명숙이가 검은 리본을 달았다는 이유로 안기부에 끌려간 뒤부터 행방불명되었다고 했다. 내 생각엔 틀림없이 안기부놈들이 명숙이를 죽여버렸거나 교도소에 가둬놨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빨리 명숙이를 찾아야겠다. (조사.정리 신봉화) [5.18연구소]
첫댓글 자료감사합니다.
즐겁고 행복한 휴일 보내세요.